경제활동의 원동력은 생산일까? 소비일까? 사실 이것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사람이 농사짓고 사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연히 농사짓고 재미로 사냥하다가 남는 쌀과 고기를 버릴 수 없어 먹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거라도 먹기 위해 농사도 짓게 되고 사냥도 하게 되었던 것일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직 이런 물음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인류가 세상에 나오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생산이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량도 옷도 가구도 없어서 너무 비싸니 문제지 양과 가격만 충분하면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항상 넘쳐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대부분은 부족한 생산을 어떻게든 늘리기 위한 시도와 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생산이야 말로 경제다. 보다 효율적으로 더 많은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야 말로 경제의 근본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산을 위한 노동력 투입 대비 생산물의 양과 질이란 인간사회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었다. 실업이란 것에 대한 이해 역시 그래서 지금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일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의 문제일 뿐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생산효율이 높아지며 생산에 풀요한 노동력의 수요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그 결과 한 사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때부터 실업과 함께 재고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게 되었다. 더이상 필요가 없어 버려지는 상품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재고란 단어야 말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이 더 중요하다면 재고라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재고라는 것이 있어도 생산자에게 전혀 아무 문제도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껏 생산해 놓고도 팔리지 않거나 아예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상황에 생산자는 휘청이게 된다. 어찌되었든 생산한 상품이 팔려야지만 생산자도 이익을 얻고 더욱 생산도 늘릴 수 있다. 소비가 없는데 생산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지금 - 아니 그동안 계속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었던 이유였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생산이 부족해서 위기를 겪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 위기는 생산이 넘쳐나서였었다. 생산은 넘쳐나는데 정작 소비는 정체되어 팔리지 않은 상품이 재고로 쌓이게 된다. 생산을 줄이거나 중단해도 결국 그 모든 것은 생산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런 현상이 구조적으로 산업 전반으로 번졌을 때 그것을 불황, 혹은 공황이라 부르게 된다.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공산주의 진영의 보스였던 소련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현물을 제공했지만 자본주의 진영의 보스였던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제공했었다. 그것도 기축통화인 달러를 이용해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시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거의 공짜에 가깝게 제공하던 자원과 상품보다 시장이 더욱 체제경쟁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문제는 어쩔 수 없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생산효율도 늘고 따라서 생산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 대부분 선진국 기업들이 너도나도 중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0억이 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중국으로 중국으로 앞다투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어느새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10억이 넘는 중국 시장에서도 다 소비하지 못하고 세계로 쏟아져 나온 상품들은 다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인건비도 싼데다 정부의 보조로 손해를 보면서 팔 수 있는 중국의 값싼 제품들이 쏟아지게 되면 세계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당장 우리도 그 영향 아래 있다. 중국의 저가제품들로 인해 많은 국내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위축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다른 나라 산업이 붕괴되면 그 제품들은 또 누가 사주게 될까?

 

그나마 다른 나라들로부터 사들이든 중간재까지 중국은 자기들이 모두 생산하려 한다. 자기들이 모두 생산해서 독점한 뒤 그저 완성된 제품들을 팔려고만 한다. 그동안 다른 나라 기업들이 자국에서 생산해 판매하던 제품들 역시 모두 자기들이 생산해서 판매하려 한다. 국제무역의 성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이유인 것이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시장인 중국이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하려 하며 다른 나라의 제품을 사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억지로 가격을 낮춘 제품만을 세계시장에 계속 팔려 하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나라들이 새삼 보호무역주의에 이끌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존재가 세계의 경제를 망가뜨릴 지 모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바라보고 늘린 설비가 오히려 압력이 되어 세계의 경제를 옭죄기 시작한다. 그래서 중국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 보지만 과연 중국까지 가세한 세계의 생산자들이 경쟁할만한 충분한 새로운 시장이 남아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인도를 찾고, 동남아시아를 개발하고,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헤집고 난 다음에는 무엇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성장을 이끌어갈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빠졌다. 그러면 어째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기업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째서 기존의 시장만으로는 충분히 성장은 커녕 유지조차 할 수 없는 것인가? 결국 산업화 이후 생산의 증가를 소비의 성장이 따라오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늘어난 생산만큼 시장은 소비할 여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생산의 증가로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했는데 정작 시장은 생산이 늘어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을 늘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이익이 성장하는 만큼 대부분 소비를 담당하는 대중의 노동소득이 충분히 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면 이와 같은 소득의 불평등으로 인한 양극화가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산은 끊임없이 늘어만 가는데 소비시장은 한정되어 있고 그만큼 경쟁이 심해지며 도태되는 기업들도 늘어난다. 그런 와중에 노동소득을 올릴 노동자마저 기술의 발전으로 줄어들어간다.

 

그러니까 묻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제조업 위기가 생산기술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생산효율이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도 아니면 생산량의 문제인 것인가? 기껏 상품을 생산해도 더이상 어디에도 팔리지 않고 있다. 아직 기술적으로 우위인 경우에도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며 갈수록 시장을 잃어가고 있다. 국내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단 돈 몇 백 원에도 부담을 느껴 더 값싼 제품을 찾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소비자들을 돌려세울 것인가? 어떻게 소비자들을 돌아오게 만들 것인가? 생산을 더 효율적으로 늘리는 것이 문제인가? 소비자들로 하여금 국산제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 더 문제일 것인가?

 

언론에서 떠드는 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인가? 그래서 규제 풀어서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으면 그 상품들이 모두 팔릴 수 있을 것인가? 모두 팔려서 기업에 이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당장 미중무역전쟁 이전에 국제무역의 쇠퇴로 수출이 감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예 몰랐다면 바보 인증이고, 다만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거나 아니면 알았지만 잊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국제무역 자체가 약화되고 국내에서도 소비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 기업에 힘을 실어주어 생산만 늘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경제를 다시 살리려면 과거처럼 생산을 늘려야 하는 것일까? 소비를 늘려야 하는 것일까?

 

기업이 배후에 있다는 의심에 대해 오히려 회의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배후에 있다는 기업들에 생각이 있다면 그따위로 떠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규제를 풀고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생산이 늘어도 당장은 팔 수 있는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비용으로 재고로 남게 될 뿐이다. 하긴 그래서 한 편으로 그리 떠들기도 한다. 나만 빼고. 그러니까 노동자의 소득은 올려주되 나만 제외하고. 대기업이 그러다 보니 결국 모두의 소득을 올리는 것을 반대하게 된다. 모르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동안 해 오던 것이고 당장 보게 될 손해가 아쉬울 뿐이다.

 

우리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아베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 기업들을 압박한 적이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인 국민들의 소득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을 시도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그런 정책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문재인 케어나 가계를 위한 다양한 재정지원 역시 그런 정책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굳이 세금을 들여 노인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통해 국민들에게 직접 소득을 지원한다. 소비에 대해 현금을 지원하는 것도 그런 한 예일 것이다. 일본도 그렇게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 에코포인트라는 소비보조 정책으로 단기간 국내경기를 부양하는데 성공한 바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에코포인트 하겠다면 기업들은 과연 세금 들어가니 안된다 반대할 것인가. 그로 인해 일본의 전자기업들은 상당한 호황을 누리며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업이 살아야 나라 경제가 산다. 기업들의 생산성이 높아져야 나라 경제도 좋아진다. 그래서 생산성 높아지면 그 상품들이 모두 팔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 줄 소비자는 여전히 소비할 여력이 부족한데 생산자만 좋아서 경제는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답답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경제전문가라 경제전문지라 떠들고 있다. 한국의 현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