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런 게 공감능력이란 것이다. 군대 갔다왔고, 따라서 군대가 어떤 곳인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억지로 끌려간 군대에서 아무일 없이 복무를 마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지상정이다. 입대 전에 이미 무릎수술을 받았다. 군생활하면서 다른 쪽 무릎도 안 좋아져서 복무 도중 병가를 받아 수술받고, 회복상태가 좋지 않아 병가를 연장한 상태에서 또다시 연가를 써서 휴가를 연장했다. 그러니까 무릎 수술 받고 회복도 안 된 상태에서 휴가를 연장하기 위해 복귀부터 했어야 했다는 것인가.

 

가만 보면 가장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그런 사병 보기를 뭣같이 여긴 듯한 장성 출신과 군대라고는 가 본 적 없는 종북 전과자에, 대부분 여성들이다. 자식 군대 보낼 리 없는 진중권과 캐나다 국적이라 군대 갈 일 없었을 JK김동욱까지 포함된다. 웃기지 않는가. 해외국적을 가지고 평생을 민간인으로 살았을 교포가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입대한 병사의 휴가에 대해 왈가왈부한다. 자식 외국 국적 취득해서 역시 군대 갈 일 없는 진중권이 이미 군대에 갔다 온 정치인 아들의 휴가를 가지고 비아냥거린다. 북한을 찬양하던 종북빨갱이 출신으로 전과자라 군대도 가지 않았던 하태경이 뭘 안다고 감히 국방부장관을 조롱하고 비아냥대는가. 정의당의 버러지같은 여성주의자들은 또 군대를 얼마나 안다고 지랄들인가.

 

당연하게 복귀하지 못할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면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연장을 승인받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그 개같던 90년대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당시는 지휘관의 재량이라 해주지 않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병사의 권리로서 최대한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어진 상태다. 좋아졌다고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지난 수 년 간 무려 3천 명 넘는 병사가 이 규정을 이용했고, 카투사에서도 30명 넘는 병사가 혜택을 보았다. 그런데도 자기가 생각하는 군대의 이미지만으로 어딜 감히 병사가 전화로 휴가를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기를 강요한다. 이렇게 크게 사회적 이슈로 키움으로써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전화로 휴가연장을 해 줄 수 없도록.

 

버러지 새끼들이란 것이다. 군대 갔다 왔다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병사들 복무기간 줄이겠다니 그래서 나라 지켜지겠는가. 월급 올려주겠다니 그것 올려서 되겠는가. 핸드폰 쓰게 해주겠다니 그러면 군사기밀 다 유출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아무것도 해주지 말고 그냥 굴리라. 본전생각이다. 그러니까 수술받고 회복도 안된 병사에게 업혀서라도 복귀한 뒤 휴가연장해야 했다는 개소리나 늘어놓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보수정당 지지하는 건 그래서 이해가 된다. 내가 개같았던 군대기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씨발 언제까지 군대가 그따위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무튼 JK김동욱의 이야기는 조금 전에 들어 알게 되었다. 그리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는데 다시 이 인간 노래를 찾아들을 일 따위 없을 듯하다. 박재범이나 타블로나 굳이 해외국적 가지고 있다고 검머외니 뭐니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들과 꽤 오래 드잡이질도 했었는데, 그와는 별개로 감히 군대도 가지 않는 놈이 군대 가지고 지랄한 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외국인이면 외국인답게 살면 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군대 일로 떠들지 말고. 그냥 개새끼라 여기겠다. 그리도 기자새끼들보다는 낫다. 씨발놈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란 결론이었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위안부협상을 반대하며 일본정부의 사죄만을 요구해 온 피해자들이 사실은 치매로 정상적인 판단을 잃은지 오래였다. 사실 정의연 논란 당시에도 나왔던 주장이었다. 나이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노인들을 정의연이 속여서 끌고다니며 이용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주장한 바도 그것이었다. 몸도 정신도 온전치 못한 노인들은 정의연의 목적을 위해 의도와 다르게 이용했다.

 

어째서 검찰이 하필 길원옥 할머니의 기부를 공소장에 넣고 언론을 통해 크게 퍼뜨렸는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바로 이것을 바라고 여성주의자들은 검찰에 협력했던 것이고 검찰은 그 협력에 충실히 보답하려 했다. 정의연이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해 온 위안부운동은 그 출발부터가 부정한 잘못된 것이었고, 따라서 정의연이 추구하던 것과 다른 결론을 내려 했던 자신들은 옳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가세한 것이 역시 개신교와 여성주의라는 진보 아닌 진보가 점령한 정의당과 자칭 진보들이었다.

 

끝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의도한대로, 여성주의자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란대로 역사운동으로서의 위안부운동은 이것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온전히 스스로 판단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면 기억인들 올바르겠는가. 증언이며 주장인들 정상이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정의연이 배후에서 조종한 결과였다. 정의연을 제거하면 다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 정상이란 무엇일까? 바로 여성주의자들이 지난 정부에서, 아니 그동안 위안부문제에 있어 한결같이 취해 온 태도였다는 것이다.

 

기사의 방향을 보니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되네. 피해자 할머니들은 치매였다. 치매가 아니더라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그러므로 자발적인 기부조차 사실은 사기인 것이다. 기부가 사기인데 증언이며 주장은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다. 김재련을 필두로 여성주의자들이 왜 그리 미친 듯 날뛰며 박원순 시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는가. 이제와서 도대체 왜 한겨레가 위안부협상을 반대했는가 의문이 들 정도다. 아니 반대하긴 했는가? 개같은 것이다. 버러지들이다.

이래서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국가적으로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하는 위치가 되려면 군대는 반드시 갔다 와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도 군대 가라. 국회의원 되고 기자 되고 싶으면 군대 갔다 와서 군대가 어떤 곳인가 알고 와라. 내가 어떻게 비정규직에 대해,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허드렛일들에 대해 잘난 척 떠들 수 있는 것인가. 경험해 봤으니까. 실제 몸으로 겪어 봤으니까. 그래서 어떤 그럴싸한 개소리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중대라. 내가 군대 있을 때 원래 있던 사단이 재편되면서 부대원 전체가 다른 사단으로 옮겨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군대 있는 동안 거쳐간 사단장이며 연대장 대대장들이 딱 다른 사람들 두 배가 된다. 사단장 네 명에, 연대장 네 명에, 대대장 네 명,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거의 북한 수준으로 군생활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원래 사단에서 다른 사단으로 함께 옮겨가는 동안에도 중대가 다르면 말조차 거의 섞지 않았다. 한 개 중대가 한 개 대대로 편입해 들어갔는데 각각 다른 중대에 배치되고 나니 새로운 부대의 선임들이 같은 사단 출신의 다른 중대 병사들과 어울리는 자체를 무척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네가 지금 소속된 곳은 지금 여기 이곳이다. 하물며 아예 처음부터 별다른 인연도 없던 다른 중대 병사들이야 그냥 상관없는 아저씨에 지나지 않았었다.

 

요즘 군대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원래 군에서 병영이란 중대 단위로 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동도 배치도 거의 중대단위로 이루어진다. 파견근무 역시 중대단위로 파견되어 근무하게 된다. 그래서 중대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중대를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아예 남이 되어 버린다. 같이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동기가 있거나, 혹은 나처럼 거기에 더해 전입할 때 함께 온 같은 중대 출신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오다가다 얼굴은 익혀도 이름도 몰라, 말도 섞어보지 못해, 뭔 일이 있든 그런가보다 하지 세세하게 사정까지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개인화가 이루어진 현재의 군대라면 더욱 중대를 넘어서까지 서로 관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대도 다른 당직사병이 다른 중대 병사의 휴가에 대해서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금토요일에는 점호도 않는다는 개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미군은 그럴 수 있다. 미군은 모병제이고 대부분 병사들이 정부가 약속한 급여와 혜택들을 바라고 모인 직업군인들이니까. 강제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차라리 잘리거나 받게 될 급여와 혜택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면 걱정했지 군대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직업군인으로서 필요한 업무는 수행해야 하겠기에 평일 일과시간 전에는 점호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탈영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무단결근에 업무거부인 상황이다. 그러면 한국군은 어떨까? 카투사라고 일반 한국군 병사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기왕에 끌려갈 군대라면 조금이라도 편한 곳으로 가고 싶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병영을 지키는 것조차 한국군 병사들에게는 군인으로서 주어진 업무의 일환인 것이다. 먹고 자고 싸는 모든 것이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카투사도 한국군의 규정이 적용된다며 난리친 것이 불과 며칠전이다.

 

하지만 모르니까 국민의힘이나 보수언론에서 떠들면 사실이라 여기고 그대로 쓰고, 당연히 민주당은 거짓말을 할 테니 민주당쪽 반론은 아예 쓰지도 않고, 그래서 이런 무식 똥물튀기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중대도 다른데 남의 중대 병사의 휴가에 대해 당직이라고 세세하게 알고 있다? 그렇게 돌아가는 군대가 워낙 병사수가 적어서 대대가 중대같고 소대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있는가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모르면 물어보고 기사를 쓰던가.

 

아침부터 황당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중대 출신이니 저렇게 아는 척 떠들 수 있겠거니. 그러니까 같은 중대면서 평소 안좋은 감정도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악의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르단다. 같은 중대 출신도 아니었단다. 그러면 23일 복귀였는데 25일에서야 아무것도 모른 채 미복귀를 알았다는 사실도 설명이 된다. 남의 중대에까지 휴가연장 사실을 알릴 이유가 있었겠는가. 병신들이 지랄이다. 정치인이나 기레기나. 더러운 똥물들이다.

아주 오래전 하이텔 시절 우연히 논쟁에서 같은 편이 되며 알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세상에 다시 없을 원수가 되었다. 계기는 개고기와 단군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때 처음 한국에도 식민지근대화론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주장을 그로부터 몇 년 뒤 이영훈을 계기로 자칭 진보들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며 다시 한 번 듣게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반도인에게 축복이었다.

 

당시 그 사람이 일제강점기를 긍정한 이유는 하나였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개신교를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더이상 탄압받지 않고 개신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개신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과 박애와 같은 서구의 근대이념이 한반도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나아가 하필 여성이었기에 여성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된 계기도 일제강점기 개신교가 남녀평등의 가치까지 전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하긴 김활란이나 모윤숙, 박마리아 등을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와 민주화는 개신교가 주도했다. 개신교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의 진보와 민주화는 아예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선교가 자유로워진 일제강점기야 말로 대한민국의 진보와 민주화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에 진보도 민주화도 없었을 것이다. 어째서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긍정할 수 있는가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였었다. 그리고 바로 몇 년 뒤 포스트모더니즘의 탈민족주의까지 더해서 근대 이전 민족이 없었으며 따라서 민족에 의한 민족에 대한 지배도 억압도 착취도 없었다는 새로운 논리를 접하게 된다. 굳이 일본군 위안부라 했더니 쌍욕을 쳐박으며 비난하던 입으로 일본군 성노예의 책임은 일본이 아닌 그에 부역한 한국 남성들에 더 크게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를 들으면서였다.

 

일제강점기가 계속되고 있었으면 당시 세계 2위이던 일본의 국민으로서 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가끔 이름이 들려오고는 하는 자칭 진보논객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은 실체도 없는 상해 임시정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했던 조선총독부에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 아닌가?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국되면서 강제로 주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민족의 시작조차 사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한두 사람이 아닌 자칭 진보들이 이영훈 논란을 계기로 총궐기해서 한꺼번에 떠든 말들을 정리한 것으로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박근혜 정권 당시 문창극의 발언이 논란이 되었을 때 할 말 했구나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겠는가.

 

민족은 없다. 민족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민족에 의한 민족에 대한 지배도 억압도 탄압도 착취도 없고 단지 권력과 계급과 개인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도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문제가 아닌 개인 대 개인, 혹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로 이해해야만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피지배민족의 여성들이 약탈당한 것이 아닌 단지 주류남성에 의해 주변부여성의 성이 착취당한 사건인 것이다. 즉 일본군 성노예나 영등포588이나 구조적으로 전혀 다를 것 없는 사건이란 것이다. 피해자들을 납치하고 유인하고 착취하는데 동조한 조선인 남성들이 문제이지 일본 정부나 일본 민족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자칭 진보들의 사고구조를 이해하려면 이같은 저들의 역사인식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째서 저들이 저토록 정의연에 대해 적대적으로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을 재평가하기 위해 필사적인 것인가. 진보의 주류로 자리한 여성주의자들은 어째서 박근혜를 지지하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까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편을 들고 있었는가. 첫째는 개신교고, 둘째는 역사적 배경이 다른 유럽의 탈민족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수입일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고 대한민국이란 정체성도 없다. 그런 가운데 심지어 독도문제마저 쇼비니즘의 일환으로 치부하며 일본과 공유하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폭넓은 지지를 받았었다. 영토도 의미없다. 주권은 필요할까?

 

정의당이며 한겨레며 자칭 진보들이 쉽게 자칭 보수들과 일체화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더구나 여성주의가 진보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사실상 같은 뿌리를 공유한 형제나 자매와 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여성주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라. 자칭 진보에서도 주류였던 개신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라. 지금이야 개신교라면 수구를 떠올리지만 90년대까지도 많은 진보운동을 개신교회가 주도하고 있었다. 개신교에 뿌리를 둔 진보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여성주의를 매개로 저들은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민주당내 자칭 여성주의 여성정치인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저들에게는 민족도 국가도 이념도 정당도 없다. 원래 그런 무리들인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여성주의에서 지령이 내려지면 바로 등돌려서 문재인 대통령 탄핵에 나설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 여성주의자들인 것이다. 아무리 과반을 자신한다고 어떻게 당시 미래통합당과 정의당의 심상정은 탄핵을 자신하고 있었겠는가. 총선이 끝나고 김재련을 필두로 여성주의 진영이 민주당을 상대로 총궐기한 상황을 돌이켜 보라.

 

결국 자신들의 뿌리를 찾은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어디서 나왔는가. 한국의 자칭 진보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거스르고 거스르니 결국 나오는 뿌리가 헤어진 형제까지 다시 만나게 만든다. 박원순과 윤미향을 상대로 세상에 다시 없을 연대를 보여주던 자칭 진보와 자칭 보수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여성주의이고 한국 진보의 정체란 것이다. 평소 진중권의 역사관에 비추어 그의 행보도 그래서 아주 이해가 안되지는 않는다.

 

한 번 썼던 것 같으니 결국 다시 재탕이다. 원래 한국 자칭 진보의 뿌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민족을 강조하던 백기완 같은 분들은 거의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더구나 여성주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진보는 더욱 원래의 뿌리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라는 말은 꺼려해도 보수정당 2중대라는 말에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와도 같다. 여전히 잘도 목소리도 크게 잘 내고 있는 것 같더만. 오랜 기억을 떠올린다. 역겨울 뿐이다.

핸드폰을 한 번호로 10년 넘게 써 오다 보니 고객등급이 매우 높다. 당연히 혜택도 많아서 뭐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정작 써먹는 것은 가끔 편의점에서 술안주 사면서 할인받는 정도가 고작이다. 일단 첫째 내 소비방식과 맞지 않는 것들이 많고, 둘째 일부러 찾아서 이용하기에는 메리트에 비해 번거로움이 더 크다. 심지어 혜택 좀 더 보겠다고 불필요한 소비를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알고서도 안쓰고 몰라서 못썼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통신사로부터 차별을 당했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보험약관을 꼼꼼히 읽고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있으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용하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런 부분을 그냥 지나치고는 한다. 사실 그래서 콜센터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소비자가 모든 약관을 꿰고 있을 수 없기에 혹시라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교육받은 상담원에게 질문을 하고 답도 듣는 것이다. 아마 나도 그런 부지런함이 있으면 여러가지 면에서 다양한 혜택들을 누릴 수 있었을 테지만 워낙 천성이 게을러 놔서. 그러니까 혹시라도 필요하고 그래서 궁금해지면 먼저 묻고 상담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 일단 알아보기는 해야 한다.

 

하태경이 재미있는 말 했더만. 추미애 장관 아들은 누렸던 그런 현행제도의 이점들을 다른 병사들은 누리지 못했으니 차별받은 것이다. 첫째 건강한 병사들이야 굳이 병가를 쓸 이유가 없으니 상황이 같다 할 수 없을 것이고, 아프더라도 군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한 경우라면 역시 추미애 장관의 아들 서모씨와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러면 한 해에 군대에서 민간병원에서 치료해야만 하는 병사의 수는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병가를 써서 민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도 연장까지 해야 하는 경우는 또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비슷하게 민간병원에서 치료받고도 휴가를 연장하지 못해 도중에 복귀한 경우가 있다면 과연 휴가연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보려 시도는 해 본 것인가?

 

한 때 육군 장성이었다는 현역 국회의원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일선의 장교들도 세세한 규정에 대해서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건 아니란 것이다. 그리 규정이 되어 있는데 당사자도 모르고 권한을 가진 장교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거기서 끝나버린 사람과 굳이 찾아보고 알아내어 이용한 사람 사이에 차이가 벌어졌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가. 아니 사전에 제대로 전파하고 교육하지 않은 책임이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용의 여부를 두고 차별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상을 가려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로 그리된 것이다.

 

하여튼 웃긴다. 정작 하태경의 말처럼 추장관의 아들 서모씨만 이용할 수 있었던 규정도 아니었다. 전화로 휴가연장한 사람이 한 해에만 여러 명이 된다. 그런 동료를 주변에서 봤다는 증언도 끊이지 않는다. 단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굳이 알아볼 만큼 절박하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차별이다. 직접 민원을 넣어 문의하고 답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문의하라는 것이다. 하긴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하기보다 익숙한 보좌관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일 게다. 가능한지 확신이 아직 없었다.

 

질문의 수준이 너무 저열한 것이다. 그런 것도 잘한다고 어이없어 당황한 국방부장관의 태도를 의심스럽게 제목까지 달아 보도하는 언론의 수준도 딱 그 정도인 것이다., 사람을 가려가며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병사들이 누릴 수 있지만 스스로 찾아서 누리지 않으면 강제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능동적으로 찾아와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문의하고 이용하라. 추장관 가족처럼 누구를 통해서든 먼저 문의하고서 적극적으로 찾아내서 이용하라. 저런 정치인이 한국 20대 남성의 희망이다. 내가 20대 남성을 우습게 여기는 이유다. 저따위가. 정말 병신같아. 아무렇든.

정의연 등록말소까지 나오고 있다. 바로 정의당과 한겨레 등 자칭 진보가 바라던 결과다. 정확히 박근혜를 지지했던 페미들이 원하던 결과였다. 박근혜 정권 당시 여성주의의 주류는 박근혜를 지지했고 위안부협상에서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지지했던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의 결과로 당시 정대협이 떠오르며 여성주의가 여성 전쟁피해자들을 외면한 원죄가 씌워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 박근혜가 탄핵까지 당했으니 완전히 궁지로 내몰린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끄집어낸 것이 미투였고, 어느 정도 기반이 만들어지자 정의연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파트너는 역시 현정부에 적대적이던 검찰과 언론들. 여성주의에는 보수와 진보, 여와 야가 따로 없었다.

 

사실 여성주의의 원래 취지대로라면 오히려 여성주의자들이 앞장서서 일본군 위안부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파헤쳐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피해자들을 위한 활동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했다. 당연하다. 여성주의의 대모라는 김활란이나 모윤숙부터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었다. 초기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에게 친일의 혐의가 씌워져 있었고, 따라서 전쟁 도중 여성에 대한 납치와 성착취에 대해서도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부터도 아예 없는 일인 양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고,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 이후에도 해결에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정권과 보조를 맞춰서 돈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에 동조하고 있었다. 반면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은 인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며 박근혜 정권의 위안부 협상 결과 위안부문제 해결의 중심에서 국민적 지지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보기에 달가운 것이었겠는가.

 

어차피 정의당이나 한겨레 등 자칭 진보언론 모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일본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에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 자칭 진보들이 주장하던 내용을 기억한다. 정확히 이영훈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민족이란 원래 없는 것이기에 민족에 대한 범죄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란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범죄이고 여성에 대한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책임 역시 그에 동원된 한국인 남성에 대해서도 우선해서 물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여성주의의 입장이기도 했다. 정의연과 저들의 입장이 갈리는 이유다. 한국 남성들이 먼저 반성하고 한국 남성들 스스로가 한국 여성들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더 눈엣 가시 같은지 모른다.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정의연, 당시 정대협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에 부역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도 정의연을 국민들 앞에서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더불어 그나마 겨우 좋아져서 전화로도 얼마든지 병가연장을 신청할 수 있고 요건만 갖추면 바로 승인받을 수 있는 지금의 군대를 다시 이전으로 돌리고자 한다. 휴가와 관련해서 병사에게 이익이 되도록 영향을 미치려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겠다. 휴가와 배치 등에 있어 조금이라도 유리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행위를 법으로 처벌하겠다. 민원실에 문의하는 것조차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처벌하고야 말겠다. 그래서 정의당과 한겨레와 진중권 나부랭이들이 추미애 장관을 비난하며 겨우 좋아진 군대의 규정들을 부정한 것 아니던가. 그런 원죄가 있는 한국 남성인데 고작 군대나 가면서 그런 권리를 누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추미애 장관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고작 군대나 가는 일개 사병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보답은 확실하다. 여성주의자들이 원하는대로 정의연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고 나아가 아예 등록말소조차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민주당 여성의원들의 선택을 기대해 보는 바다. 민주당인가? 아니면 여성주의인가? 정의당은 선택했다. 한겨레도 선택했다. 경향은 이미 조선일보와 같은 편에 서 있다. 저들의 뿌리깊은 남성에 대한 혐오와 위안부라고 하는 역린을 지우기 위해서 검찰과 보수진영과 손잡고 정부와 여당을 공격한다. 정확히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주도하는 정의연과 혐오의 대상인 남성을 공격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는 편에 선다. 과연 여성주의는 진보인가? 하긴 처음부터 진보따위는 없었다. 배부른 놈들의 유희만 있었을 뿐. 더러운 것이다.

나도 처음 추판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입력이 되지 않아서 추간판증후군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원래 그렇다. 자기가 익숙지 않은 단어나 개념을 들으면 그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나 개념으로 바꿔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다. 그냥 목 아프니까 목디스크고, 허리 아프니까 허리디스크다. 무릎 수술했다니 십자인대다.

 

그래서 중세에는 그리도 기적이 많이 일어났더란 것이다. 바로 최근까지도 주변에서는 귀신과 관련한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이해하려다 보니 신이 일으킨 이적이 되는 것이고, 귀신이 개입한 장난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추미애 장관 아들 휴가와 관련한 논란의 출발도 그에 대한 반론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요일 당직을 서는데 복귀자 가운데 추미애 장관 아들이 없으니 미복귀겠구나. 장관 아들이니까 휴가연장이면 빽을 쓴 것이겠구나. 마찬가지로 사회 있을 때 무릎수술을 받았다 하고 군대 있을 때도 수술을 받았으니 아마도 십자인대겠구나. 아마 무릎과 관련해서 수술받았다 하면 허리디스크 만큼이나 바로 쉽게 떠올리는 것이 십자인대일 것이다. 워낙 유명 스포츠선수들도 이것으로 인해 수술받고 부상자명단에 오르고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딱 그 정도 관계인 것이다. 전우라고 하지만 실제 군대 있으면서 부대원들과 그렇게 속깊은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남이고, 군대 나가면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인 때문이다. 오히려 그래서 군대 안에서 서로 연기하는 경우도 많다. 군대 제대하고 연락이 닿아 만났더니 그동안 하던 말이 죄다 생구라였더라. 아니 그 정도면 굉장히 친한 사이이고 제대하고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몰랐던 것이 많았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재판정에서 어느 일방에 의한 증언만을 기사로 내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가 하는 것이다. 이쪽에서 보았을 때는 이렇게 보였는데 저쪽에서 보니 또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취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재판이란 것이다. 검사가 심문하면 바로 기사로 나오고 변호사의 심문은 아예 기사로 나오지도 않고. 다만 검찰이 관여된 검언유착 재판은 변호인 주장만 기사로 나오고 있는 중이다.

 

당시 병장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당직사병이었다는 제보자에게 악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접게 되었다. 귀찮은 것이다. 아마 확인전화도 안했을 것이다. 그냥 미복귀인 것을 보고 내버려두고 있다가 담당장교가 와서 휴가연장되었다 하니 그런 것이로구나 대충 넘겨짚고 확신해 버린 건 아닐까. 군대가 뭐 좋은 곳이라고 병장씩이나 되어 일일이 확인까지 하겠는가. 앞서 당직 선 놈들 가운데 누가 알아서 잘 처리했겠거니.

 

추미애 장관 아들의 십자인대와 관련한 주장들이 의미없을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오히려 허리 아프면 디스크와 거리가 멀 수 있는데도 그냥 디스크부터 떠올린다. 목이 뻣뻣하니 목디스크다. 참고로 내 경우 목디스크보다는 그냥 승모근이 항상 과긴장해 있는 것이다. 옆에서 보기에는 그런데 목디스크처럼 보인다. 사람 일이란 대부분 그렇다. 별 것 없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 여성주의의 가장 아픈 고리라 할 수 있었다. 80년대 최초의 위안부 피해자의 고발이 나오기까지 어째서 이런 중대한 문제가 아예 있지도 않았던 일처럼 한국사회에서 철저히 묻힐 수 있었겠는가. 첫째 피해자들을 발굴하고 고발하며 보호하는데 앞장섰어야 할 여성주의자들부터가 처음부터 아예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여성의 치부로 여기며 은폐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최초 여성주의 지도자들부터가 그에 적극 가담했거나 최소 방관자들이었다. 그런데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여성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몰려가 지지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근혜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으니 여성주의자들로서는 위안부문제란 말만 나와도 불편한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김재련이 굳이 박원순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저격하며 나선 이유였을 것이다. 김재련 뿐만 아니다. 평소 여성주의를 옹호하던 자칭 진보들이 적극 나서서 정의연을 상처입히기 위해 발악같은 행동들을 보이고 있었다. 정의연이 무너져야 박근혜 시절 여성주의자들이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을 지지한 사실을 정당화할 수 있다. 실제 정의연에 대한 집중공격이 이루어지던 무렵 반대편에서는 박근혜의 위안부협상, 나아가 이전 보수정부들에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보였던 행동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래 그런 의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일찌감치 보수정권이 의도한 대로 돈만 받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을 정의연 때문에 해결도 못하고 지금까지 끌고 온 것이었다.

 

김재련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수정 교수가 미래통합당에 몸담고, 정의당이 추미애 장관을 공격하는가 하면, 한겨레가 김도읍의 입을 빌어 추미애 장관을 비난한 일련의 상황들은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라는 검찰에 대한 압박인 것이다. 자기들이 이렇게 검찰을 위해 발벗고 나섰는데 검찰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 어떻게든 정의연을 기소해서 욕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굳이 윤석열이 아니더라도 이들과 줄이 닿아 있던 검찰 내부의 필요가 그런 요구에 응하게 된 것이다. 혐의들 보라. 얼마나 잡다한가. 별 것 다 털어서 붙일 수 있는 혐의는 다 갖다 붙였다. 하다못해 안성쉼터를 민간에 대여한 것까지 모두 혐의로 걸었다. 검찰이 얼마나 다급했는가.

 

기소가 곧 유죄는 아니다. 그런데 재판부 역시 검찰과 배가 맞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니. 손혜원 전의원의 경우가 그렇다. 증여세까지 모두 내고 법적인 모든 절차를 밟았는데 차명이란다. 그러면 증여세도 증여를 위한 모든 법적 절차도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벌써부터 신이 났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협상을 옹호하던 놈들이 총궐기하며 정의연을 물어뜯고 난리다. 아예 그동안의 모든 의혹들이 기소되어 유죄판결이 난 양 정의연의 정당성 자체를 훼손하고 있는 중이다. 정의당과 한겨레가 바란 결과다. 그래야 여성주의자들이 다시 기펴고 활개치며 다닐 수 있다. 어째 추미애 장관의 일에 앞뒤 안 가리고 미친 척 뛰어들더라. 버러지는 답이 없다. 여성주의는 벌레 이하다. 역겨운 것들이다.

원래 좌파들에게 사람이란 단지 수단이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사회주의다. 한 사회를 이루는 구조, 단위, 조각들. 이른바 유물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가지지 못한 약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혁명을 일으키고 가장 먼저 한 것이 그들 약자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약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조금만 더 당신들이 참으라. 그게 볼셰비키고 중국공산당 아니었던가.

 

정의당이 추미애 장관 아들 논란에 끼어든 이유일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정의당의 주류는 더이상 무산자 남성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극렬 페미니스트 집단이란 것이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극렬 페미니스트라고 모든 남성을 적대하지는 않는다. 주류남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동경하며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남성들이야 말로 여성인 자신의 격을 높여주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흑인 남성은 멸시하고 배척하더라도 부유한 백인 남성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실제 한국의 극렬 페미니스트 가운데도 선진국의 백인 남성들에 대한 동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같은 한국 남성에 대한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부모성을 모두 써서 김신명숙이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남성들도 여성들처럼 군대 가지 않고 사회에서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공부도 하고 자기계발도 하고 싶다는 어느 젊은 남성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일축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아니 이건 그냥 조롱이었다. 그건 네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지 내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네 일기장에나 쓰라. 지금 자기는 숭고하고 엄숙하게 오로지 여성의 권익만을 위해 토론에 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시시껍절한 개인의 감상따위 갖다 치우고 엄정한 논리와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들을 만하게 주장이란 것도 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바로 진보를 자처하는 인간들 말하는 싸가지가 거의 그렇다. 오로지 자기들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이고 명징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나머지는 그냥 충동이고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친절하게 자기와 토론하려면 어떤 책을 읽고서 그 논리를 근거삼아야 하는지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어차피 자기들은 군대 갈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여성이니까. 더구나 그래도 공당에서 제법 목소리도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만 앞세우면 주류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고 해주니까. 그러니까 징병제 아래에서 강제로 끌려간 군대에서 아파서 수술까지 받고서 휴가를 연장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아파서 병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복귀한 다음에 규정에 따라 휴가를 연장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다행히 정의당은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주장하는 정당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무릎이 잘못되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면 자기들이 장애인 운동을 통해 그 권리를 지켜 줄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할까 싶지만.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전공한 입장에서 기회라 여기고 평창올림픽 통역병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식으로 민원을 넣어 물었다. 그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무릎이 아파서 병가를 내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가, 병가를 연장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병가를 더 연장하려 하는데 그러면 어떤 요건을 갖추면 되겠는가, 그조차도 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냥 나라에서 시키니까 군대에 가서 뒈지든 병신이 되든 시키는대로 구르다 만기 되면 집으로 돌아가서 한남짓이나 하라. 그러니까 진중권도 저리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아들 군대 안 가도 되거든. 자기 아들은 군대 갈 일이 없으니 마음놓고 떠들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자칭 진보들 앞에 반드시 '자칭'을 붙여 부르는 진짜 이유란 것이다. 저들의 진보에 인간은 없다. 나와 같은 평범한 서민들은 없다. 지방대 다닌다고 조롱하고, 서울대 아니라고 비웃고, 가난해서 험한 일 한다고 멸시한다. 8,90년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명문대출신으로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직접 기술까지 배워가며 그들이 있는 현장으로 들어갔던 선배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자기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에 마치 장식처럼 그와 같은 희생조차 누리려 했던 이들이 없지 않다. 변절한 놈들이 대개 그런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손에 넣었으니 어떻겠는가. 어차피 군대나 가는 변변치 못한 남자놈들 뒈지든 병신되는 자기들은 알 바 아니다. 그 오만과 무례가 실제로 드러난 것이 지금 자칭 진보의 스탠스란 것이다.

 

그동안 군대 많이 좋아졌다. 많은 부분에서 사병들의 권리가 인정되고 강화되어 왔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마저 조롱한다. 저들이 계급적으로 얼마나 나와 같은 변변치 못한 부류들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인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듣기 좋은 말들로 저 높은 곳에서 고공전은 어떻게든 하는 것 같은데 내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저들이 더 역겨워지는 이유인 것이다. 한겨레도 마찬가지. 군대 좋아졌다면 오히려 그것을 반기며 국민들에 알려야 할 언론들이 좋아진 군대를 부정하고 조롱하며 모욕한다. 설사 당장 죽을 병에 걸렸어도 전화로 휴가연장따위 해주지 마라. 죽든 병신되든 무조건 복귀시키고 절차를 밟아 휴가를 더 내주라. 미친 것들 같으니.

 

결국은 당시의 재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요? 민간병원에서 무릎을 수술하느라 병가를 내고 그러고도 회복이 되지 않아 휴가를 더 연장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예 듣지 않는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군대란 관성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하긴 정치인의 딸이라고 특별히 연대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민주당이 싫은 것이다. 나경원은 같은 여성으로서 지지하지만 조민은 여성임에도 동정조차 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 사회의 주류는 누구인가. 그러니까 주류로써 대접받기 위해서는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가.

 

페미니즘이란 어떤 점에서 계급주의 운동이라 여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신경쓰는 것은 못배우고 못가진 하류층 여성들일까? 아니면 자신들과 같은 남성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중류 이상의 여성들일까? 그래서 여성주의가 남성혐오라는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남성을 혐오하는 게 아니다. 주류가 아닌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황교안을 대하는 저들의 다른 태도가 그 증거다. 그야말로 병신같은 것이다. 쓰잘데기없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90년대 군번인 내가 알기로도 그래야만 하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면 부대장에게 복귀 전에 연락해서 휴가연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는 부대장의 재량이라서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 부대장의 재량 아래 판단해서 허락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명확한 기준 없이 해주면 좋은 것이고, 안해줘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절차 역시 그리 엄격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그냥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더라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실제 미복귀인 경우도 보호자에게 연락해서 복귀할 것을 약속받으면 휴가든 외박이든 처리해서 연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논란이 진행되며 더이상 그런 주먹구구가 아닌 명확하게 부대장의 의무에, 정확히 사병의 권리에 내용을 포함시킨 것을 알게 되었다. 사병은 필요한 경우 얼마든지 정해진 연가 안에서 휴가를 요청해서 쓸 수 있고 부대장은 단지 예외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제한할 권한만을 갖는다. 허락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경우에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해진 연가 안에서 복귀를 미루고 휴가를 연장하는 것은 부대장의 재량이 아닌 사병의 권리로서 얼마든지 승인할 수 있고, 사후에 정식 절차를 밟아 공식화하고 보고하는 것도 가능하다. 좋아진 것 아닌가. 심지어 가족행사 때문에 휴가를 미루는 것도 이제는 얼마든지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작 연가 안에서 휴가연장 한 번 했다고 이 난리가 난 이유란 것이 사실 예전 군대도 아닌 그냥 사병을 도구처럼 여기던 과거의 관성이 작용한 때문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번 논란을 주도한 장성 출신이라는 인사가 장병이 휴가연장해달라면 해 줄 것이냐 따져물은 자체가 그 본질을 보여준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실제 그런 사례를 경험했다는 주장이 나와도 아예 귀기울이려고도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건 다 거짓말이다. 다 예외적인 상황들인 것이다. 그마저도 다 예외적인 규정이탈의 사례들이다. 그런데 국방부가 밝히지 않았는가. 다 군의 규정 안에 있다고. 그냥 문제없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어떤 규정에 의해 문제가 안되는가를 밝힌 것이다.

 

실제 2017년 이후 비슷하게 전화로 휴가연장을 사용한 카투사 병사가 30명이 넘는다던가. 적은 수가 아니다. 매년 10명 넘게 비슷한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니. 그러면 어째서 모든 카투사가 이런 제도를 이용하지 않고 있는가. 선택의 문제다. 21일 있는 연가를 붙여서 한 번에 쓸 것인가, 아니면 몇 번에 걸쳐서 나눠서 쓸 것인가, 나아가 한 번 쓴 휴가를 연장해서 계속 붙여 쓸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모아뒀다 그만큼 또 쓰게 될 것인가. 연가에서 연장한다고 없는 휴가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있는 휴가를 끌어다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10일 휴가 갔다가 3일 연장하면 남은 휴가일수는 8일이 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짧지 않은 군복무기간동안 휴가를 한 번에 몰아쓰고 나면 나머지 기간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고민이다. 역시 어떤 군대라도 군대보다는 사회가 좋다. 휴가는 시시때때로 군대가 지겨워진 만큼 나가 주어야 한다.

 

휴가연장하라고 해도 내가 싫다고 안할 병사가 어쩌면 대부분일 수 있는 것이다. 내 계획대로 정량하여 필요한 만큼 쪼개서 나가겠다. 아니면 나중에 모아뒀다 한 번에 쓰겠다. 모든 병사가 휴가연장을, 그것도 전화로 요청해서 쓸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럴 수 있는 규정이 구체화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당연한 권리로써 요청할 수 있고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관련한 절차 역시 모두 명문화되었다. 복귀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는데 무리하게 복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군대 좋아졌다. 옳은 방향으로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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