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일정한 외부의 자극에 대해 일정한 조건이 충적되면 일정한 패턴의 사고와 행동으로 결과가 도출되게 된다. 그래서 거꾸로 현재의 행동에 대해서 그 동기와 원인이 되는 과거의 사건들을 거꾸로 유추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심리상담 받으러 가면 정신과의사들이 현재의 상태와 함께 과거의 경험을 자꾸 캐물으려는 이유다.

 

성범죄란 실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피해자의 자존과 존엄에 심각한 상처를 남기는 중대한 범죄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피해자들의 평소 표현이나 행동에 그 영향이 강하게 남게 된다. 심지어 아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사고와 행동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경우마저 있다. 그렇게까지 중대한, 피해자가 그토록 큰 고통을 호소할 정도의 범죄라면 그렇다면 평소 드러난 표현이나 행동에 있어 그 영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피해자다움이 아니다. 과연 피해자로서 어떤 고통을 겪었고 그로 인해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는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성추행 피해자가 가해자라고 지목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신체적인 접촉을 시도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상대와의 접촉이 끔찍하도록 싫었던 피해자였다면.

 

물론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안희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위계에 의한 성폭행을 당해 왔다 주장한 김지은씨의 경우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차라리 사랑이었다 믿어 버리게 된다. 서로 좋아해서 성관계를 갖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게 된다. 아니라면 상대를 부정해야 하고, 그런 상대를 끝까지 거부하지 못한 자신마저 부정해야만 한다. 의외로 성폭행을 당하고서 끝까지 저항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는 경우도 피해자들에게서 매우 흔하기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재련 변호사가 처음부터 피해자가 성추행 사실을 인지하고, 그를 거부하며 회피하기 위해 부서이동을 요청했다고 주장한 사실이 부조리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성추행에 대해 일찌감치 인지하고 거부감도 강했다면 어떻게 자기가 먼저 가해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인가. 신체접촉까지 먼저 시도할 수 있는 것인가.

 

그냥 주장만 하면 성추행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도 그저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가해자를 지목하면 성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 걸 두고 전문용어로 떼쓴다고 말한다. 그동안은 여성이 상대적으로 약자니까 떼를 쓰더라도 대부분 잘 들어주었었다. 여성들이 그런다고 뭐 남성들 자신에게 크게 해가 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여성이 권력이 되었다. 언론과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한 인간을 철저히 매장할 수 있는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자기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계약직 여성 방송인을 해고시키고, 심지어 현직 검사마저 검찰 지휘부를 움직여서 징계하려 시도했었다. 그렇다면 이미 가지게 된 권력 만큼 엄정한 심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과연 저들이 주장하는 성추행 주장에 얼마나 타당성이 있고, 그로 인한 피해까지 감수할만한 개연성이 있는 것인가. 그마저 거부한다면 동등한 인격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으로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써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를 여성들은 거부한다.

 

그러니까 근거를 제시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과문해서 성폭력에 대해 이미 인지하고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회피를 시도하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먼저 접근해서 신체접촉을 시도하는 경우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피해자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보이는 과학적인 원리나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라 그토록 싫고 미운데 신체접촉은 먼저 할 수 있다? 김지은씨와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란 것이다.

 

어린애들이라서 그렇다. 한 사람의 성인이 되지 못한 반편이들인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있어도 남성들의 절반 만큼만 이름이 허락되었다. 2차가해라 말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양 여긴다. 피해자가 주장했으니 가해자고, 피해자가 호소하고 있으니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검증하는 것조차 2차가해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너무 봐주었다. 사람으로 보지 않았었다. 어린아이가 너무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위험하다.

지금도 여전히 어제일처럼 떠오르는 장면이다. 재개발한다고 다 허문 폐허 위에서 동생에게 소리쳤다.

 

"나 초코파이 먹었다!"

 

친구들이 비웃더라. 초코파이 먹은 게 뭐 그리 자랑이냐고. 어릴 적 그리 간절했던 소원 가운데 브라보콘과 가나초콜릿을 사먹는 것이 있었다. 마음껏도 아니다. 그저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있던 구멍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과자와 아이스크림 가운데 그 두 개가 그리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덕분에 시장바닥에서 초콜릿 사달라고 떼쓰며 울다가 엄마에게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모른다. 외갓집 간다고 이모네랑 같이 기차 타고 갈 때 이모부가 사줘서 처음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초콜릿이라면 환장을 한다. 

 

워낙 고기 먹을 일도 없어서 고기만 먹었다 하면 그리 설사를 해댔었다. 그 질긴 고기힘줄도 아깝다고 계속 씹다가 하마트면 기도가 막혀서 어린 나이에 요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당시의 내 눈에 매일 고기 먹고, 아이스크림 콘에, 초콜릿에, 심지어 장난감과 만화책까지 자기 방 가득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어떻게 비쳤겠는가. 그런데 별 상관 없었다. 그나마 나보다도 더 가난하고 집안환경이 좋지 않던 녀석이 또 주위에 있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돈벌이란 것을 한 것이 당시 그 노마랑 리어카 빌려서 끌고 다니며 폐지며 고철 모아서 고물상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나중에 자전거와 신문, 우유까지 훔쳐서 돈버는 법을 가르쳐 줬는데 예나 지금이나 내가 그런 일까지 할 주제는 못되어 그만두었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사는 곳까지 갈리며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되었지만 알아서 어디선가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것이다. 고3 시절에도 과외니 학원이니 하는 건 언감생심이고 그 흔한 참고서마저 과목마다 한 권 이상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세계사 참고서는 학년 초에 샀다가 잃어버려서 졸업할 때까지 참고서 없이 교과서만으로 공부해서 1년 내내 만점은 도맡았던 기억이 있다. 참고서 하나도 새로 사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보충수업을 받으려면 학교에서 지정한 참고서를 사야만 했었는데 나를 좋게 본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나만 면제가 되어 참고서 없이 필기만 열심히 하기도 했었다. 과연 그런 나의 눈에 수업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과외 받고 학원 다닌다며 학교 허락까지 받고 교실을 나서던 녀석들이 어떻게 비쳤겠는가? 그런데 역시나 예나 지금이나 어차피 있는 집 놈들이 있는 만큼 누리는 것이아 원래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게 빈부격차란 것이다. 그런 게 자본주의란 것이다. 아니 자본주의 이전에 인간의 사회란 그렇게 굴러왔던 것이다. 더 많이 가진 만큼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더 높은 곳에 있는 만큼 더 많은 것들을 허락받으며, 더 다양한 사람을 아는 만큼 그 관계에서 이익을 얻는다. 그렇게 나도 이리저리 알게 된 사람을 통해 일자리를 새로 얻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보다가 단골이라 친해진 주인의 소개로 백수시절 잠시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시장에서 사과장사를 하게 된 것도 그렇게 우연히 오다가다 만나 친해진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것을 두고 불공정하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공장일이나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이나 남들 부러워 할 만한 대단한 것이 아닐 테니까. 특히 공장의 경우는 사람을 못 구해서 내 차례까지 돌아온 경우라 그리 추천할 만한 일은 되지 못했다.

 

조국 전장관이며 추미애 장관과 관련해서 공정 어쩌고 떠드는 소리들을 들으며 느끼는 감상이다. 그 주장대로라면 한 달에 한 번 고기 먹는 것도 어려운 나는 매일같이 고기를 먹고 그나마도 물려서 버리는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사들고 흘려가며 먹을 수 있는 녀석들에게 분노마저 느꼈어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저들은 나처럼 참고서 하나로 공부하지 않는 것일까? 나처럼 보충수업받고 자율학습받으며 교과서 하나만으로 공부하지 않는 것일까? 나도 저들처럼 참고서도 몇 개 씩이나 사서는 과외받고 학원도 다녔다면 더 좋은 대학을 나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어쩌겠는가? 그마저도 부모님들이 열심히 고단한 현실을 헤치며 살아온 결과였던 것을.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고단한 몸을 누이던 부모님을 기억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동생 먹이겠다고 어설프게 라면을 끓여야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래도 정부에서 생활보호대상자라고 때되면 주던 쌀과 밀가루가 있었기에 아주 배곯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지금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부모가 조국이다. 부모가 추미애다. 부모가 대학교수고 억대의 상속자인데 과연 일용직이나 전전하는 부모를 둔 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가. 부모가 판사출신에 국회의원도 몇 선이나 했는데 알량한 자기집 하나가 평생 모은 재산의 전부인 부모를 둔 나같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인가 하는 것이다. 부모가 무역회사를 하기에 외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장난감들이 집에 가득하고, 삼촌이 일본을 자주 오가기에 일본에서 바로 신작 애니메이션을 구해와 학교에서 신나게 자랑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결론은 무언가. 밤늦게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면서도 안전하게 다칠 걱정 없게 돌아가서 다시 가족과 함께 할 시간만 행복하게 기대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른바 가붕게론이다. 워낙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더욱 지지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애매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들도 먹고 살 만한 위치에 있기에 저런 모습들이 괜히 배아프고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대생이란 놈들이 조국 전장관 딸을 가지고 그 지랄들을 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보안검색요원들 정규직 시켜준다니 불공정하다고 발광하던 놈들이 추미애 장관 아들에 대해서도 불공정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 게다. 그런데 내 기준에서 보면 그런 놈들도 불공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따위 소리 지껄이는 놈들 가운데 추천 없이 수시 거치지 않고 대학 들어간 놈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스펙 만들겠다고 이런저런 인맥이며 연줄을 이용하지 않은 놈들은 또 몇이나 되겠는가. 없는 사람은 못 받는 과외며 학원이며 마음껏 누렸던 놈들이 대부분이란 것이다. 그래서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보고 있으면 나 자신도 위화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내가 과연 인터넷에서 이러고 놀아도 괜찮은 것인가. 저들이 보기에 나는 그냥 불가촉천민인 것을.

 

내가 누렸어야 했는데. 조국 전장관도 추미애 장관도 아닌, 그들의 자식도 아닌 자신만 누렸어야 했을 텐데. 진짜 솔직한 속내였을 것이다. 가난한 놈들은 정규직도 안되고, 월급을 더 받는 것도 자기 일자리나 위협하는 것이고, 임대료를 적게 내도 임대인에게 불이익을 되면 피해를 보게 될 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이란 가난한 놈들은 더 가난하게, 자기들처럼 누리는 놈들은 더 동등하게. 그런 미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감히 저런 비천한 놈들과 자기들이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놈들이다. 아니라 생각하는가? 대충 하는 소리 보면 그들의 경제수준이 보인다. 진짜 아무것도 없이 악밖에 남지 않은 경우와 함께 그런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고 싶은 욕망들을 보게 된다.

 

바로 조국 전장관이나 추미애 장관을 둘러싼 공정논란의 실체인 것이다. 아마 진짜 현실의 불공정을 몸으로 느끼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저 남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불공정을 말하는 놈들이 누리는 현실은 또 나와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 웃긴다는 이유다. 그래서 더욱 정의당이며 한겨레 같은 자칭 진보들에 대한 혐오도 깊어지는 것이다. 진정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정과 정의란 무엇인가. 진보는 없다. 자칭만 있을 뿐. 논란의 정의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함께 군생활을 한 사람들을 전우라 부르며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침에 눈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소대원 얼굴이고, 밤이 되어 잠들기 직접에도 바로 옆자리에 누운 같은 소대원의 얼굴을 눈에 담게 되는 것이다. 자다 말고 일어나 불침번을 설 때도 계속해서 소대원의 얼굴을 헤아리게 된다. 훈련이나 근무는 말할 것도 없다. 과연 살면서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애인이든 부부든 직장동료든 이렇게까지 긴 시간을 사생활조차 없이 함께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전우인 것이다. 벌거벗은 채 서로의 알몸을 보면서 함께 목욕도 하고, 온갖 힘들고 궂은 일들도 함께하며 봐서는 안되는 모습까지 항상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그래서 한 번 군대에서 사이 틀어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가족끼리 의가 상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이유와 같다. 유예가 없다. 미운 채로 계속 서로 보면서 미워해야 하고, 싫은 채로 계속 함께하면서 싫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만큼 한 번 각별한 마음이 들면 전역하고 나서도 때로 생각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막사도 다르고, 훈련도 근무도 따로 돌아가는 다른 중대라면 어떨까?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중대가 다르면 중대장들조차 다른 중대의 병사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할 수 없다. 다른 중대의 병사에게 무언가를 시키려 한다면 반드시 해당 중대의 중대장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휘계통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지휘관도 아닌 소대장이나 부사관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옆에 지나가도 경례조차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확실히 내가 있던 부대에서도 다른 중대 소대장이나 부사관들에게까지 경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대장은 그래도 지휘관이니 보이면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 말인 거의 항상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한 존재이기에 서로를 전우라 부른다면, 서로 얽힐 일도 거의 없는 사이이기에 그냥 아저씨란 것이다. 여러 중대가 하나의 건물을 쓰고, 그래서 근무도 함께 서는 경우라도 그 기본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한 개 대대가 중대규모도 안되는 동원사단에서조차 중대가 다르면 그냥 남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어찌 함께 군생활을 한 전우인데 아저씨라 부를 수 있느냐고? 장교니까 그럴 수 있을 지 모른다. 다만 장교지만 지휘관은 경험하지 못한 듯하다. 실제 영 아니다 싶은 경우 아예 지휘관을 거치지 않고 여기저기 잡일만 시키다 적당히 진급시킨 뒤 예편케 하는 경우가 군대에서는 제법 있는 편이다. 중대가 달라도 대대가 같으니 전우다. 비슷한 시기 함께 군생활을 했으니 아저씨라 불러서는 안된다. 징병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미필자가 많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미필이 많은 건 그렇다 치고 오히려 미필이 더 목소리도 크게 더 당당히 떠들고 있다. 듣도보도 못한 병장회의의 결정을 근거로 탈영을 확정짓고, 중대가 달라서 아저씨라 부르기도 한다니 그것을 트집잡는다. 하필 이번 이슈를 크게 키운 대부분이 현역 사병과는 거리가 먼 미필이거나 다른 군생활을 한 경우들이라.

 

아저씨는 아저씨다. 단 한 번도 중대 막사 바깥의 다른 군인들을 같은 주둔지에 있다고 전우라 여긴 적이 없다. 혹시라도 예비군훈련을 받으며 같은 사단, 같은 연대 출신을 만나더라도 그냥 아저씨지 전우같은 것이 아니다. 그만큼 전우란 군대 갔다온 이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담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십 년 넘게 지나 우연히 길에서 만나도 자연스럽게 군에서 쓰던 호칭이 튀어나오는 그런 관계다. 당연하게 그 시절로 돌아가서 사회에서의 시간을 잊은 채 떠들 수 있는 그런 사이인 것이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들까지 전우로 여겨야 한다니. 개소리도 이정도면 수준급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년 조국사태 터지고 얼마 안 있어 내가 썼던 글이 있다. 저 새끼들 지금 조국을 죽이려는 것이다. 조국과 조국 가족을 죽이고 나아가 문재인까지 죽이려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 죽었을 때 저 새끼들 반성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피맛을 보고 좋아하고 있었다. 또 다시 누구라도 그렇게 죽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기 SNS에 작년 조국사태 당시 주위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올린 모양이다. 사돈의 팔촌 주차딱지까지 다 털 건데 과연 제가 버티겠느냐고. 그러니까 그게 과연 보수언론만 그리 생각하고 그 지랄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 가운데 정신나간 인간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조국 전장관이나 가족이 죽을 것까지 생각하고 스탠스를 잡고 있었을 텐데 멀쩡히 살아 있으니 꼬이고 말았다. 그 원망이 누구에게 향할까?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한명숙 전총리를 검찰과 손잡고 감옥으로 보낸 것이 그로부터 채 1년이 되기 전이었단 것이다. 저 놈들의 속성이다. 어째서 살아 있는가? 어째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가? 지금도 떠드는 소리 들어보면 그런 원망이 들리는 듯하다. 윤미향 의원도 박원순처럼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벌레새끼들이란 이유다. 그래서 더욱 자칭 진보를 믿어서 안된다는 것이고. 김완 기레기놈 라디오 나와서 자기들은 정의연 논란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헛소리 지껄여대더만. 아닌 척 헛소리 지껄여댄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쁘다. 새삼 확인한다. 저 새끼들은 적이다. 내가 죽던가 아니면 싸그리 죽여 없애던가. 잘 버텨주어 다행이다. 조국 전장관도.

사실 군필들도 자주 헷갈리는 부분인데, 소대장은 지휘관이 아니다. 단지 병사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지휘자들일 뿐이다. 지휘관은 중대장부터다. 지휘권이란 작전과 인사, 보급 등 군정과 군령을 통괄하는 개념인데, 그래서 행정반도 참모역할을 맡는 행정보급관도 중대부터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군대에서의 명령과 행정은 중대를 최소단위로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군필들도 가만 자기 군생활 떠올려 보면 알 것이다. 이것저것 귀찮게 시키고 또 병사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들어주지만 정작 소대장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대 안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기보다 대부분 중대 행정반에 가서 특히 중대장의 결제를 받고서야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는 했었다. 대대단위에서는 중대장만 여럿이고, 소대장은 아예 지휘관인 중대장이 없다. 그래서인 것이다. 주둔지는 대대단위로 편성해도 병사들의 생활은 중대단위로 이루어진다. 훈련과 작업과 대부분 군생활들이 중대단위로 중대장의 책임과 지휘 아래 이루어지게 된다.

 

카투사라고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대 단위로 각각의 업무와 스케줄이 모두 다른 것이다. 같은 전투병과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훈련을 받고 업무를 수행할 것인가는 중대단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군대에서 서로 지내는 막사도 다른 옆중대의 병사나 간부라는 건 어떤 의미이겠는가. 한 개 대대에 고작 몇 십 명 정도 규모라 당직근무를 같이 서게 된다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남의 중대면 어지간히 중대한 일이 아닌 이상 알 필요도 알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소속 병사의 휴가야 말할 것도 없다.

 

간단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군생활을 기억하는 군필자들이 오히려 증언자로 나선 당직사병의 말을 듣고 고개부터 갸웃거리고 마는 것이다. 처음 휴가복귀일이던 6월 23일 해당 사병이 당직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이미 대부분 군필자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군기따위 국에 말아 쳐먹은 당나라 군대라고 휴가복귀일이 이틀이나 지났는데 그제서야 당직사병이 미복귀사실을 알게 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직을 서기 전에 같은 막사를 쓰는 이상 누군가는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고, 더구나 휴가복귀일에 복귀하지 않은 병사가 있으면 그 순간 난리가 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대도 다르다네?

 

상식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중대에서 병가를 내 민간병원에서 치료받던 병사가 회복이 더뎌서 추가로 더 연가를 붙여서 쓰기로 했다. 그 사실을 굳이 상관도 없는 옆중대에까지 상세하게 전파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기는 할 것인가. 대개는 같은 막사를 쓰는 부대원들에게만 사실을 전파하여 오해나 혼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직사병이 휴가연장 사실을 몰랐다는 점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서로 중대도 다른데 남의 중대 병사가 병가를 연장했든 아니든 자기가 알 게 무언가 말이다. 중대간에 서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른 중대의 선임에게 일일이 그 사실을 보고할 이유도 없다. 뭔 말인가면, 일단 중대 넘어가면 그때부터 대부분 증언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병장회의에서 상사가 휴가반려를 결정했다는 말에 역시 대부분 군필자들이 비웃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행보관들조차 정작 병사들을 징계하려면 지휘관인 중대장을 통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정확히 중대장에게 사유를 설명하고 징계를 건의하면 중대장이 받아들여 징계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지휘관이 아닌 부사관들은 단지 건의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훈련소에서 훈련병 중대장 역할을 맡은 부사관들 역시 훈련병들을 징계하려면 장교인 이웃부대 중대장이나 혹은 그 위에 건의해서 명령을 받아내야 한다. 휴가의 연장 역시 인사이며, 인사 또한 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상사가 뭐라 결정했든 지휘관 역할을 맡은 장교가 결정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검찰은 미필자가 얼마나 되는 것이며, 기자놈들 가운데 군대 갔다 온 놈들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다.

 

아니 좋아라 저 말을 받아서 탈영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에서 포맷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의도가 기억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당직근무를 대대단위로 함께 서더라도 중대가 다르면 남의 휴가따위 알 턱이 없다는 군필자들의 당연한 말조차 저들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왜 중대이고, 어째서 남의 중대 아저씨인가 그 이유마저 일부러 잊고 있다. 미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인사권을 가진 장교가 적법하게 규정과 절차에 따라 연장을 허가했다 말한 순간 이 모든 소란은 끝나야 옳은 것이다. 권한을 가진 당사자가 아무 문제없이 자기 권한 아래에서 모든 것을 처리했다는데 거기다 대고 누가 뭐라 말할 수 있단 것인가. 국방부도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지 못한다. 법이 그렇고, 규정이 그렇고, 지침이 그렇다. 도대체 이 나라에 병신들이 얼마나 많다는 것인가. 너무 상식적인 일이라 글도 잘 쓰여지지 않는다. 진짜 민폐들이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타난다. 부정하거나, 혹은 수용하거나. 내가 안희정에게 성폭행당했다며 고발한 김지은씨의 주장을 신뢰하며 지지했던 이유였다. 의외로 많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성폭행당했을 때 그것을 성폭행이 아닌 사랑이라 여기며 가해자에게 집착하는 경향이란 생각보다 성폭행 피해자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불륜으로 여길만한 상황들 역시 자신의 상사로서 적극적으로 거부의사를 밝히기 어려웠던 당시 김지은씨의 상황과도 상당히 부합하는 것이다.

 

그래서다. 몇 년에 걸친 반복된 성추행으로 심지어 부서를 옮기고 싶다 요청하기까지 했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오랜기간 고통받아왔고 그럼에도 주위의 외면으로 인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당사자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자신의 본능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끌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거부하던가, 아니면 능동적으로 수용하던가. 그 사이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신체접촉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던가, 아니면 그것을 사랑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수용하던가. 문제는 후자의 경우라면 성추행을 이유로 부서를 옮겨달라는 요청같은 건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김지은씨도 그래서 미투를 폭로하기까지 적극적으로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수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박원순 시장의 몸에 손을 대는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 것인가.

 

피해자다움이 아니다. 피해자로서 보일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모습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몇 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는데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하고, 한 편으로 부서이동을 요청하면서 한 편으로는 자기가 먼저 적극적으로 가해자일 박원순 시장의 몸에 손을 대고 있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직접 손을 겹쳐잡고, 몸까지 밀착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그동안의 성추행이 박원순 시장의 신뢰와 애정의 표현으로 여겨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장했다면 이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괜히 사실을 확정하겠다고 말을 덧붙인 덕분에 모순이 드러나고 말았다. 오히려 박원순 지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성추행인 것을 알았다고 주장했으면 더 설득력있게 설명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쓸데없이 오래전부터 이리저리 주워들은 일들이 적지 않은 탓에 나름대로 이쪽 분야에도 어느 정도 이해가 있다. 그래서 안희정이 1심에서 무죄가 되었을 때도 눈쌀을 찌푸리며 판사를 욕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박원순 시장의 경우에는 자신이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에 대한 의심부터 가지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다움이 아닌 논리적 일관성이다. 합리성이고 개연성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더욱 한겨레와 정의당이 김재련과 유착하는 정황을 의심하는 것이고.

 

당장 추미애 장관 논란을 통해서도 김재련의 성향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대리하는 의뢰인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성폭행 사실까지 언론을 통해 온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김재련의 주장만을 금과옥조처럼 받아 주장하고 있었다. 과연 한겨레와 정의당에 다른 목적과 의도가 없었다는 것인가. 아무튼 동영상을 통해 더욱 확실해지고 있다. 더 확실한 증거와 증언들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성추행을 당한 피해사실과 저같은 행동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페미는 병신이다. 차라리 병장회의를 믿겠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모든 언론이 반민주당인데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도 친민주당 성향의 언론이 하나쯤 나와주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어차피 반민주당 언론은 차고 넘치니까 민주당 지지자들을 노린 친민주당 언론이 하나쯤 있어주면 제법 장사가 되지 않을까.

 

결국 나왔구나. 굿모닝충청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기사를 검색하면 항상 첫머리에 보이곤 했었다. 요즘 아주경제에서 장용진이 그리 잘 나가고 있다지? 원래는 한겨레, 경향으로 갔어야 할 독자고 후원이다. 어쩌면 오마이뉴스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한겨레, 경향의 기자들은 조중동 입사지원서를 주머니에 넣고 경력직 구인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한겨레와 경향을 이해하려면 조중동을 보면 된다. 아무리 그럴싸한 소리를 지껄여대도 결국 조중동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 굿모닝충청이나 아주경제나 포털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언론들이 대안언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동형TV에 굿모닝충청 기자 나와서 하는 것 보니 진짜 어수룩하다. 과거 진짜 취재하고 기사쓰는 것만 알던 기자들이 저렇지 않았었을까. 제발 저 초심을 마지막까지 잃지 않기를. 장사속이라도 좋다. 반대편에서 균형을 잡아 줄 언론이 한둘 쯤은 있어야 시민들도 다양한 시각에서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꽤 전부터 제법 괜찮은 기사를 많이 내던 언론이라 이제라도 주목받는 것이 신기하면서 뿌듯하기도 하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등 진보를 위장한 언론들이 차지하던 몫까지 다 가져갈 수 있기를. 그러고도 초심을 지킬 수 있으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 그래도 위안을 얻는다.

그러니까 카투사는 중대가 달라도 당직은 통합으로 선다. 그래서 뭐? 그래봐야 남의 중대다. 매일 얼굴 마주하며 훈련도 근무도 함께 하는 같은 중대가 아니라 다른 일정으로 돌아가는 옆 중대 이야기란 것이다. 그러니까 23일 복귀라는데 25일까지 미복귀인 사실이 정작 당직사병인 자신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은 것일 테지.

 

23일이 복귀일인데 25일까지 복귀하지 않았음에도 당직사병인 자신이 몰랐단 사실부터가 그만큼 중대가 다르면 서로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23일 복귀일에 복귀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난리게 났을 텐데 정작 당직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실을 전혀 듣지 못한 채 뒤늦게 미복귀 사실을 알고 전화까지 걸었다. 같은 중대였다면 설사 인원점검을 하지 않았어도 자기 중대원이 복귀하지 않았는데 바로 연락부터 넣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군대 안 갔다와서 모르는 놈들이나 저런 헛소리에 낚인다는 것이다. 굳이 인원점검 안해도 자기 분대 자기 소대에 인원이 비는데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아무리 외출외박이 자유롭다고 누가 외출나가고 외박나갔는지 같은 부대에 속해 있으니 모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휴가에서 복귀했어야 할 인원이 보이지 않는데 아무도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그런 일들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 자체가 어이가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일들이 진짜 카투사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미복귀도 문제가 되어서 안되는 것이다. 주말에는 그냥 마음대로 병영을 비워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카투사도 군대인데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25일까지 미복귀인 사실을 뒤늦게서야 다른 중대인 자신이 당직을 서면서 발견했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모든 주장의 근거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중대가 다르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긴 중대가 같았다면 굳이 당직이 아니더라도 23일 당일 같은 중대 소속 다른 병사들과 대화에서 미복귀 사실을 들어 알았을 것이다. 모를 수가 없다. 군대가 그런 조직이 아니다. 그런데 전혀 아무것도 모른 채 25일에야 미복귀를 발견했다는 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병장회의나 통합당직이나 진짜 한 사람 말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가져다 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가 없다. 차라리 의미가 있으려면 다른 중대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23일 복귀 당일 당직을 섰는데 미복귀를 알았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은 당직사병 자신도 부정한 상태지.

 

직장생활만 해봐도 안다. 다른 부서라도 같은 층에 있으면 사람 한둘 비는 게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왜 보이지 않는지 이유는 모르더라도 오늘 자리에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게 된다. 군대에서 병영이란 그런 곳이다. 하물며 징병제 국가에서 사병에 대한 통제가 그리 허술하지 않다. 모르면 입이라도 닥치고 있던가. 진짜 우동 먹고 싶어진다. 사와야겠다.

말하자면 부사관은 실무자 장교는 관리자라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기업에서 현장반장이 아무리 경력이 오래되고 호봉이 높아도 결국 모든 업무는 그보다 어리고 경력도 일천한 관리자의 결재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현장반장의 경력과 경험을 충분히 반영해서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최대한 의견을 반영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더라도 결재권을 가진 관리자가 안된다 그러면 현장반장은 그냥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장교라고 다 같은 장교가 아니라서 일정 단위에 대한 지휘권한을 가지는 지휘관만이 그같은 결제권을 가지게 된다. 군에서는 명령권이라 한다. 인사도 모두 명령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휴가가고 복귀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은 지휘관을 찾아가 자기가 휴가가고 복귀하는 내용을 보고해야 하는 것이다. 부사관도 간부로서 병사들을 휴가보내고 외출외박보내는데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지만 결국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지휘관인 장교란 것이다. 부사관이 보기에 휴가연장을 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기더라도 지휘권한을 가진 장교가 그래야겠다 결심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 규정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언론의 보도내용을 사실로 인정해서 병장회의에서 상사가 병가연장은 불가하다고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지휘관에게 보고되었을 때 지휘관이 연장해주어야겠다 결정했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실제 당시 휴가를 연장해 준 인사권자 역시 적법한 절차 아래에서 문제없이 휴가연장이 이루어졌다 증언한 바 있었다. 무엇보다 추미애 장관 아들이 연장해서 쓴 휴가는 상사가 불가하다 말했던 병가가 아닌 개인의 연가였었다. 자기 휴가를 청원휴가로 당겨서 쓴 것인데 그건 부사관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로지 지휘관만이 부대사정에 따라 반려할 권한을 가질 뿐이다. 부대에 따라 부대에 오래 근무하며 여러 사정들에 해박한 부사관이 그런 결정을 주도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결정권한은 지휘관인 장교가 갖는다.

 

군대 안 갔다 온 놈들만 이런 헛소리에 넘어간다는 것이다. 아니면 군대 갔다 왔는데 뇌가 우동사리라 벌써 포맷되어 버렸거나. 아무리 지원반장이라도 부사관인 상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란 것이다. 병가연장이든, 연가를 당겨서 청원휴가로 붙여서 쓰든. 더구나 21세기 들어 병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지휘관도 함부로 제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병사에게 그만한 사정이 있다면 지휘관은 휴가에 대한 청원을 들어주어야 한다. 쌍팔년도 군대도 아니고. 오죽하면 카투사는 주말에 인원점검도 안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한 사람의 증언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카투사는 인원점검도 안하는 당나라 군대로 만든다. 

 

누가 반려를 결정하고 지시했느냐가 핵심이 아니란 것이다. 병장회의에 출석한 누구도 사병의 휴가에 대해 관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직사병이 주장했다는 휴가를 미복귀했는데 야식으로 처리해 줄테니 얼른 들어오라 말했다는 내용조차 그래서 엄밀히 징계사유에 속하는 것이다. 당직사병은 단지 미복귀에 대해 보고할 의무만 가지고 있다. 미복귀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지는 오로지 지휘관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투사 근무 개판 섰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금요일부터 이틀 동안 인원도 확인하지 않았고, 미복귀를 확인하고서도 보고부터 하지 않았다. 널럴하다는 미군도 이렇게는 근무하지 않을 것이다.

 

살다살다 부사관이 휴가를 내주고 반려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건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은 지휘관인 장교의 몫이다. 인사권자가 문제없다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서류조차 필요없이 구두로 연장을 허가했으면 바로 연장되는 것이 군에서 지휘관의 명령이 가지는 힘인 것이다. 나중에 문제되면 지휘관을 찾아가 물으라. 그래도 된다. 그런데 부사관이 구두로 병가연장 반려를 결정했다? 세상에 병신이 얼마나 많다는 것인가. 우동 먹고 싶다.

 

 

그러니까 상사가 주재한 병장회의에서 병가연장은 불가하다란 결론을 내린 것이 사실이라 치고, 그런데 추미애 장관 아들은 병가를 연장한 게 아니라 연가를 붙여서 청원휴가로 연장해서 휴가를 쓴 것이다. 뭔 말이냐? 병가는 더이상 안된다니 군의 규정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진 연가에서 청원휴가를 써서 이후 휴가를 연장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그냥 의미없는 헛소리. 쟤들 잘하는 짓거리다. 이것저것 뒤섞어서 사람들 헷갈리게 만들기. 마치 야바위하듯 이리저리 말 돌려서 헷갈리게 만들고서는 엉뚱한 헛소리로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만드는 것. 즉 추미애 장관 아들이 19일 병가 이후 4일 붙여 쓴 휴가는 병가가 아닌 연가였는데 병가와 연가를 대충 섞어 씀으로써 오해를 유도하는 것이다. 다만 그 방식이 너무 치졸해서 오히려 역풍만 불게 되었을 뿐.

 

아무리 군대 안 갔다온 사람도 병장들이 회의로 휴가 보내고 말고를 결정하지는 못한다는 정도는 안다는 것이다. 더구나 병가의 경우 병사 개인의 신상과 관련한 것이기에 자칫 그로 인한 책임소재까지 고려했을 때 병에게 결정을 맡긴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냥 그런 의견도 있다더라 하는 정도지 결론은 인사권을 가진 장교가 어떻게 판단했느냐 하는 것이다.

 

진짜 하다하다 별 거지같은 헛소리까지 다 듣는다. 길막고 아무나 붙잡아서 물어보라. 군필이든 미필이든 병장이 회의를 통해 휴가연장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고. 그런 걸 뉴스로 내보내는 방송사도 방송사고 좋아라 낚이는 병신들도 병신들이다. 그냥 답이 없다. 저런 새끼들과 내가 같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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