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정권초부터 그리 주장했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목표는 박근혜의 복권이라고. 박근혜를 몰락시킨 문재인과 민주당에 대한 복수일 것이라고. 결국 증명되었다. 여성주의자들에게 적은 오로지 민주당 뿐이다.

 

조동연씨의 사생활을 파헤치고 심지어 그 자녀들에 대해서까지 인신공격성 주장을 펼쳤던 것은 가세연과 상당수 수구언론, 수구정치인들이었다. 결국 혼외자의 원인이 성폭력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말았다. 자발적인 미투가 아닌 성폭력 고백은 그 자체로 성폭력일 수 있다. 자신의 성폭력을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더 잔혹한 성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박원순의 경우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검증마저 2차가해라고 부정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정의당과 자칭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조동연씨와 자식들을 공격한 주체들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조동연씨를 믿으려 했고 감싸주려 했던 민주당을 공격하면서 정작 가세연과 수구언론 수구정치인들에 대한 논평은 빠져 있다. 민주당이 조동연씨를 정치판에 등장시킨 것이 잘못이다. 그러니까 성폭력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으며 그로 인해 혼외자를 가져야 했던 사람은 정치판에 나서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인신공격은 정당하다는 것인가. 신지예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조동연 같은 사람을 정치판에 등장시킨 민주당 잘못이다.

 

그나마 정의당은 나아서 다 지나가고 난 뒤에야 조동연씨가 사퇴하고 나니 민주당에 지키지 못한 책임을 씌우고 있었다. 철저하게 국민의힘이나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진영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일 것이다. 저들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진정 여성주의가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다시 말한다. 여성주의는 버러지다. 똥이다. 썩어문드러진 구더기다. 저걸 재활용이라도 할 수 있다 여기는 년놈들이 쓰레기라는 것이다. 욕도 아까울 지경이다. 그 민낯을 본다. 익히 알던 모습일 터다.

남성이 혼외자를 가질 경우 대개는 자신이 아닌 내연관계의 여성에게 보호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남성의 혼외자 문제는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분리된 상태에서 인정과정마저 복잡할 때가 많다. 진짜 혼외자인가 아닌가 따지기가 유전자검사라도 해보지 않는 이상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임을 묻기도 쉽지 않다.

 

반면 여성의 경우 거의 반드시 혼외자라도 자기가 직접 낳아 기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모계는 분명하다. 낳은 사람이 확실하기에 따라서 혼외자일 경우 책임소재도 분명해진다. 네가 누구의 아내인데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았으니 부정하고 불결하다. 아마 그래서 부계사회란 결혼이란 제도를 강제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 부당하고 불공정하며 모순적인 현실인 것이다. 여성은 직접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에 책임소재가 분명하다. 남성은 아이를 임신시키고도 분리되어 있기에 책임을 회피할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혼외자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여성에 비해 남성의 경우는 혼외자를 인정하는 자체만으로 평가가 올라가는 경우마저 생긴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자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려 한다. 정말 뭣같지 않은가. 왜 여성만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혼외자 문제는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다. 남성의 혼외자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여성의 혼외자에 대해서만 엄격한 현실이야 말로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사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가. 정의당이 조동연씨에 대한 논평을 내면서 과연 여성의 혼외자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가세연이나 언론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는가. 아니 오히려 조동연씨를 보호하려 한 민주당을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을 것이다. 절대 국민의힘이나 언론이나 가세연은 강하게 비판하지 못한다.

 

하여튼 정말 뭣같은 상황이란 것이다. 결혼생활이 불행했고 남편에게서 안정과 애정과 신뢰를 얻을 수 없었고 그래서 다른 상대를 찾았다. 결혼이란 제도에 구속되어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려 했었다. 그런 개인의 문제를 결혼이라는 법적인 관계에 귀속시킨다. 결국 이혼했고 10년이나 지난 일들을. 어쨌든 자기 아이로 지금껏 기르고 있는 아이의 신상까지 까발리면서. 하지만 여성주의자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 한 마디 비판도 못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가짜다. 현재 한국의 여성주의는 그냥 거짓말이다. 여성주의란 그저 기득권 여성을 위한 한가로운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김건희는 지켜야 하지만 조동연은 아니다. 황보승희는 지켜야 하지만 정경심은 아니다. 나경원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고민정은 아니다. 선택적이다. 너무 철저하게. 완벽하게. 쌍년들인 때문이다. 

과거 여성단체들이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며 내세운 논리가 그것이었다. 결혼이란 법적 제도와 개인의 감정은 별개다. 법이 결혼이라는 관습과 제도를 이유로 개인의 감정에까지 강제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감정은 철저히 사적인 영역에서 당사자간에 해결되어야 한다.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역시 당시 간통죄 폐지를 지지했었다. 이미 서로 부부로써 애정이나 의리가 남아있지 않은데 법이 부부로서의 의무와 책임까지 강제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몇 달 전 윤석열의 부인인 김건희씨의 과거에 대해 추미애 전대표가 한 마디 했다고 정의당이 즉각 나서서 했던 말도 있었다. 고작해야 후보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에 여성의 과거에 대해 성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너무 낡고 전형적인 정치를 저질로 만드는 행태였다던가? 그런데 이번 조동연씨 논란에 대해 정의당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을까? 야당 대선후보 부인에 대해서는 어떤 의혹도 제기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있는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조동연씨에 대한 공격에는 어떤 반응들을 내보이고 있을까?

 

심지어 자식들의 얼굴과 신상정보까지 죄다 까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인도 아닌 일반인의, 그것도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들의 개인정보를 모조리 공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남자의 아이가 아니었다. 남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어미의 죄까지 자식에게 낙인찍어야 한다. 그런데도 자칭 여성주의자들은 침묵한다. 아예 처음부터 아무말도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윤석열의 부인에 대해서는 어떤 의혹도 제기하지 말라며 단도리친 바 있기에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 여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결혼이란 단지 법적인 구속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부부가 아닌 것인가. 결혼했다고 영원히 부부여야 하는 것인가. 실제 역사를 보면 결혼과 개인의 감정을 분리하며 살아간 예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결혼은 필요에 의해 하고 사랑은 감정에 이끌려 한다. 결혼은 집안끼리의 결합이지만 사랑은 개인간의 유대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합법적인 배우자와 별개로 개인적인 연인을 따로 두고는 했었다. 어찌보면 추잡하다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집안끼리의, 혹은 개인의 필요에 의해 결혼이란 제도의 힘을 빌리면서 따로 자신만을 위한 사랑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결혼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사랑을 찾았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래서 남편의 아이가 아니란 이유로 그 아이까지 단죄되어야 하는가. 그래도 엄마의 아이인데.

 

여성주의란 거짓말이란 이유다. 최소한 지금 한국의 여성주의는 철저히 가짜들이다. 여성주의자라면 절대 지금의 이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브로치라 해도 워킹맘 망신을 다시킨다 해도 여성주의자들은 침묵한다. 지켜야 할 것은 국민의힘쪽 여성이지 민주당을 지지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칭 진보가 가짜듯 자칭 여성주의도 그래서 가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러운 버러지들이다. 박멸해야 한다. 추악하다.

거의 20년 쯤 되었을 것이다. 내가 자칭 진보를 자칭 진보라 부르며 욕하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 내 말을 믿지 않았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분노해서 원망은 가지더라도 그래도 설마 대한민국에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위한 정치집단이 하나 쯤 있어야 하지 않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충고까지 했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렇게 매도만 하지 말라. 그런데 어떤가.

 

그런 점에서 윤석열은 내게 매우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보라. 하루가 멀다고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는데도 여전히 그에 대한 지지를 멈추지 않는 자칭 진보의 모습을.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던 정의당이 윤석열 지지자들에 대한 황운하의 발언은 바로 나서서 물어뜯고 있었다. 추미애의 말 한 마디도 그저 허투루 지나가지 않고 물어뜯은 이유도 추미애와 윤석열의 관계를 비춰 보면 바로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이재명에 대해서는 연일 특검해야 한다며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던 심상정이 윤석열에 대해서는 한 마디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라. 원래 심상정이 출마한 이유였다. 진보정당의 대선후보로써 이재명 특검을 주장하는 모습을 계속 언론에 비춰 주기 위한 용도인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가 심상정을 띄우려는 것이고. 이재명을 죽여야 윤석열이 산다.

 

오히려 윤석열의 발언에 대한 보도는 자칭 진보들이 언론도 아니라며 무시하는 소수 인터넷언론이나 지방언론들을 통해 더 많이 보도되고 더 강하게 비판받고 있는 중이다. 진보도 아니고 언론도 아니라더니 정작 자칭 진보가 해야 할 일을 그들이 대신 다 하고 있다. 자칭 진보란 것들은 한 걸음 물러서서 노동자들이야 뒈지든 말든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는 태도를 일관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저 새끼들 더 싫어하는 것이다. 나야말로 노동자니까.

 

윤석열 공약대로 하면 5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루 7시간 겨우 쉬어가며 7000원도 안되는 최저임금으로 세전 월 400을 찍던 그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못하겠다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면 바로 잘리고 만다. 그런데 저 새끼들은 이수정이 있고 윤석열이 여성주의에 호의적이니 그래도 좋다고 지껄이고 있는 중이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위한 진보정당? 대안세력? 개뿔. 저놈들이 그동안 그들을 위해 한 일이 도대체 무언데? 세월호도 검찰이 유가족 사찰 없다니까 아예 입 싹 다물고 더이상 언급도 않고 있다. 이후에도 꾸준히 세월호 언급해 주는 건 민주당 뿐이다.

 

오히려 윤석열로 인해 자칭 진보의 실체가 드러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런 일이다. 저놈들은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위한 진보를 추구하는 놈들이 아니다. 보편적인 인권이나 자유, 평등 등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미 자신들이 속한 기득권집단의 권리고 자유고 평등이다. 종부세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처음 부유세를 신설하자며 공약으로 들고 나왔던 것이 바로 자칭진보였다. 좆까는 것들이다.

다들 아다시피 국민의힘은 '중대재해처벌법'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래서 아예 입법 자체를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정의당을 비롯한 자칭진보는 후퇴한 내용이나마 통과시킨 민주당만을 비판했을 뿐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정의당의 당대표가 국민의힘을 '노동존중의 정당'이라며 찬양하기까지 했었다. 물론 표결에서도 정의당은 국민의힘과 같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무엇을 말하겠는가.

 

윤석열이 '중대재해처벌법' 자체를 손보겠다는 말까지 했음에도 황운하의 사소한 말실수 하나보다도 반응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뭐든 윤석열과 관련해서는 반박성명을 알아서 내던 정의당과 반박기사를 써주던 자칭진보언론들이 이런 문제는 철저히 침묵한다. 원래 정체성이 같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가난해야 한다. 힘들어야 하고 차별받아야 한다. 죽어나가야 하고 고통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들에게도 설 자리가 있다. 그래서 이번 정부 내내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대체휴일을 비롯한 모든 노동문제에 대해 정의당은 현정부와 철저히 각을 세운 것이었다.

 

하여튼 윤석열이 여기까지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그나마 중도적인 한겨레조차 누가 되든 상관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로가 사라지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원상복귀되더라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다. 그나마 진보언론이랍시고 눈치보는 행보가 이런 정도란 것이다. 그렇자면 그 깊은 진심은 무엇일까. 민주당은 사실 아닌 것 가지고도 오만 비난을 들어야 하는데. 그게 자칭 진보란 것이다. 버러지새끼들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최저임금제와 52시간 근로제를 폐지하겠다는 윤석열의 발언에 대한 자칭 진보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최소한 적극 반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 발언 때문에라도 대통령 후보로서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반응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 황운하의 윤석열 지지자들에 대한 발언은 바로 즉각적으로 격렬하게 튀어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자칭 진보가 바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지지자들을 4050 남성 기득권으로 정의하고 배제를 주장한 당사자들이란 것이다. 상대편의 지지층을 비하하고 매도한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습다. 아니 그래서 더 의문이 든다. 이런 식의 공격에 반응하는 것은 대개 당사자들이란 것이다. 나경원이 '달창'이라 했을 때도 정작 자칭진보들은 별 말이 없었다. 오히려 공조하는 놈들이 더 많았다. 남의 일이고 상대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웅하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리 격렬히 반응했던 것일까? 황운하가 말한 대상에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전부터도 말했었다. 자칭 진보는 최저임금이니 52시간 근로니 하는 것에 그리 크게 관심이 없다고. 심지어 중대재해법 같은 경우도 아예 법안 자체를 반대하는 국민의힘을 두고 '노동존중의 정당'이라 헌사할 정도로 그 입장이 국민의힘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인 것이고. 그래서 정작 정의당 대선후보인 심상정도 윤석열은 내버려두고 이재명만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을 당선시키기 위해 진보를 분열시키고자 출마한 것이니까.

 

그래서 과연 흥미롭다는 것이다. 과연 자칭 진보가 윤석열을 비판하는 순간이 올 것인가. 최소한 이재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윤석열을 공격하는 그 때가 오기는 할 것인가. 그럴 리 있나. 벌써 여기저기서 커밍아웃하며 윤석열 지지를 선언하기 시작했을 텐데. 그게 자칭 진보의 정체성이란 것이다. 이제 정의당에 남은 정체인 것이고. 웃기지도 않는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체로 아재 인증일 것이다. 아니 할재인증일까?

 

"우리는 민족중흥의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국민교육헌장이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유교의 왕도정치에서 영향을 받아 나타난 사상이었다. 소수의 권력자, 지식인들이 다수의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올바로 이끌며 그들이 겪는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성과 합리에 근거헤 국민을 위한다던 계몽주의 아래에서 계몽군주들은 절대왕정 때보다 더 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절대왕정의 군주란 궁정의 군주였지만 계몽군주는 국민의 군주였기 때문이었다.

 

근대적인 국민교육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때 계몽군주와 소수의 지배계급에 의해 시작된 국민교육은 그야말로 국민을 만드는 교육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촌락단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을 주입시키고, 그 국가의 상징으로써 군주를 충성의 대상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더 효율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식들까지 가르쳤다.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무산계급의 해방을 외치던 사회주의자들마저 자기 조국과 군주를 위해 기꺼이 자원해서 전장에 나가고 수도 없이 죽어나간 이유였었다.

 

바로 그런 근대의 기반 위에서 전체주의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은 국민이었다. 하나의 정체성과 하나의 목표와 지향을 가지고 하나로 단결해야 하는 객체들이었다. 그렇게 이념화했고 교육했고 선동했으며 마침내는 그를 동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 독재자는 이전 어느 군주도 누리지 못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과연 이전 어느 군주가 히틀러처럼 효율적으로 학살을 주도하고, 스탈린처럼 전국민을 조직화하여 수 천 만에 이르는 이들을 숙청할 수 있었겠는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 역시 거의 중국 전토에서 준동한 사건이었었다. 내가 곧 국가이고 내가 곧 정의이며 그러므로 내가 가리키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가 처음에는 일제와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와 유착했던 이유인 것이다. 그들 역시 기득권이었다. 많이 배운 지식인이었고, 그 전에 무산자들을 착취하던 지주 자본가의 일원이었었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여성주의란 계몽의 주제였었다. 국민이란 그를 계몽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강제로라도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여성주의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여성주의만이 선이며 그런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자신들이 정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며 지도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

 

이수정이 참 솔직하다. 아니 전부터도 신지예니 장혜정이니 열심히 솔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라서가 아니다. 이수정의 아들은 특별하다. 당연하다. 있는 집에서 제대로 된 고차원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엘리트인 때문이다. 너희는 그렇지 못하다. 하다못해 이준석조차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가르치겠다. 바꾸겠다. 자신의 논리와 주장 아래 가두겠다. 주체로서 이해하려 하기보다 객체로써 강제하려고만 한다. 누구의 방식과 닮았을까?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이 민주진영을 싫어하는 것이다. 자칭 진보가 여성주의와 손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자칭 진보에 남은 것이라곤 여성주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에 대해 자칭 진보가 뭘 하고 있었을까? 노동자들의 권익을 개선하기 위핸 최저임금인상이나 근로시간단축, 최근의 대체휴일에 대해서 자칭 진보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오히려 중대재해법에 반대하는 국민의힘을 두고 노동존중의 정당이라고 찬양하던 놈들이다.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예 법안 자체를 반대하는 국민의힘과 손잡은 놈들이었다. 

 

국민은 주체가 아니다. 개인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들이야 말로 계몽의 대상이다. 그런데 계몽의 대상이어야 할 국민들이 마치 주인처럼 설치고 다니고 있다. 한겨레가 괜히 민주당 싫어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괜히 자기들 기사 트집잡는 지지자들 싫다고 덤벼라 문빠들을 시전한 것이 바로 한겨레였다. 너희 주제들이. 너희 따위들이. 그래서 저들은 정서적으로 국민의힘에 더 가까운 것이다. 성희롱이라면 성희롱이다. 성추행이라면 성추행이다. 근거를 요구하는 자체가 2차 가해다. 증거를 요구하는 자체가 2차가해다. 논리를 요구하는 자체가 2차가해다. 자살도 2차가해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리고 KBS는 본격적으로 그 본색을 드러냈었다.

 

사실 지난 촛불정국부터 시작된 갈등이기도 하다. 같은 여성이다. 최순실마저 같은 여성이었다. 김건희도 여성이기에 감히 비판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히려 김건희가 영부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승리일 수 있다. 윤석열을 비판하는 민주당 진영의 말꼬리를 핀셋으로 잡아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근혜가 물러난 순간 여성주의와 민주진영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것이 지금 여성주의가 적이 된 이유다.

 

아무튼 이수정 덕분에 더 확실해졌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구나. 하긴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이 비슷할 것이다. 여성주의라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대부분 면면들이 거의 이런 부류들일 테니까. 무산자 남성 뿐만 아니라 무산자 여성까지도 저들에게는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 겪고 주장하는 모든 현실들도 단지 계몽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주의에는 여성조차 없다. 혐오하는 이유다. 혐오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한 마디로 인권변호라는 건 돈이 안 된다. 그래서 박원순이 빚쟁이로 살았던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 자기 돈 내고 변호사 고용할 정도면 인권변호사가 나설 이유가 없다. 대부분 인권변호란 돈도 안되면서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건들에 대해 수임료와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변호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사건들 변호해 과연 최소한의 생활이라도 유지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변호사라고 해도 평소에는 다른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일반재판을 맡아 변호를 하다가 필요하다 여기는 경우에만 인권변호에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일반재판들을 맡아 수임료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생활도 하고 사무실도 유지하면서 인권변호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로서 재판에서 변호가 필요한 의뢰인이 있어서 의뢰를 받았는데 그 사건의 내용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일 것인가. 존속살인범이든 연쇄강간범이든 희대의 사이코패스든 재판에는 반드시 변호사가 동석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아예 변호사도 선임해서는 안된다고?

 

몰라서라기보다 또 지랄이란 것이다. 아주 악랄한 지랄이다. 대중의 무관심과 무지를 이용한다. 단어의 단편적인 뜻을 이용해서 의미를 극단적으로 순정화한다. 인권변호사란 이런 것이다. 인권이란 이런 것이다. 현정부에 대한 대부분 비판들이 그러했다. 코로나든 경제든 인권이든 뭐든 하여튼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하여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한다. 가장 이상적인 도덕성과 역량과 성과들을 전제한 뒤 그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인권변호사는 수임하는 사건 모두가 인권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누가 정의했을까?

 

변협이 나서는 이유인 것이다. 인권변호사란 그런 것이 아니다. 변호사란 직업이 그런 것이 아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해서 기사를 쓴다. 그 당연한 정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기레기 새끼들이 남의 직업에 대해서는 참 버러지같이 엄격하다. 자칭 진보란 버러지 새끼들도 또 여기 한 마디씩 끼는 모양이다. 똥에는 버러지가 낀다. 그런데 똥에서 기어나온 버러지가 때로 비싼 옷을 더럽히기도 한다. 진짜 역겨운 것들이다.

중국 전설상의 명검 간장과 막야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날 오나라의 명검장인 간장이 명검을 만들자 초나라 왕이 이를 빼앗기 위해 간장을 죽였다. 아내인 막야가 도망쳐서 유복자를 낳고 명검을 만드는 비법을 전하고 복수를 당부한 뒤 죽으니 아들이 역시 명검을 만들어 초나라왕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원수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수만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방법이 없어 고민하는데 길가던 협객 하나가 그를 보고는 자신이 복수를 도와주겠다며 대신 명검과 아들의 목을 달라고 했다. 아들이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명검과 자신의 목을 건네니 협객이 그 목을 가지고 초나라왕을 찾아가서 간장의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고는 기회를 봐서 자신의 목과 함께 왕의 목을 쳐서 아들의 목과 함께 끓는 솥 속에 떨구었더라. 이런 게 바로 복수란 것이다.

 

게르만족의 전설인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도 사랑하는 남자의 복수를 위해 이민족을 끌어들여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햄릿도 그렇게 자기가 원수라 여기던 삼촌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끝내는 자신마저 목숨을 잃고 말았었다. 자기가 충성을 바치기로 한 주군의 복수를 위해 얼굴과 목소리까지 망가뜨리고 선비로써 자신의 명성과 체면마저 뒤로 한 채 비참한 몰골이 되어 기회만 노렸던 예양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리고는 끝내 조양자의 옷이라도 베어야겠다며 벗어놓은 옷에 칼질을 하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었었다. 복수란 것이다. 세상에 가장 강한 감정이 하나는 공포고 하나는 증오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대가를 돌려주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희생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복수를 위해 스스로 원수에게 몸을 팔고, 가족마저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신세마저 망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윤석열이 보이는 굳건한 지지율의 원천인 것이다. 복수해야 한다. 정권을 잃은 복수를 해야 한다. 그래서 뜨뜻미지근한 홍준표로는 안되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복수를 해 줄 윤석열을 원한 것이었다. 조국을 통해 직접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조국에게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도 윤석열이라면 확실하게 죽여 줄 수 있다. 민주당도 확실하게 조져 놓을 수 있다. 그런 당위 앞에서 다소의 무능이나 부패 같은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자칭 진보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와 전혀 상반되는 윤석열의 공약을 보고서도 한 마디 비판도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차라리 군사정권으로 시대가 역행하더라도 문재인만은 죽여야 한다. 민주당만은 거꾸러뜨려야 한다. 오세훈을 위해서 용산참사 발언에 침묵했던 것처럼, 윤석열과 관련한 모든 의혹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 역시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얼마간 더 흠결이 보인다고 저들이 입장을 바꿀 이유가 없다. 나라가 망하고 자기가 죽더라도 복수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반면 이재명의 경우는 민주당 지지층에서마저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부터가 자신의 신념과 가치, 이해와 관련한 어긋남 때문이었다. 문재인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민주당을 이대로 전적으로 믿고 지지할 수 없다. 이유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유를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민주당을 지지하고 이재명에게도 표를 줄 수 있다. 윤석열의 과오만으로는 안된다. 가치와 지향이란 미래를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민주당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이 영리하다는 이유다. 이재명의 행보는 철저히 여기에 맞춰져 있다. 윤석열에 대한 비판보다 자기가 만들어갈 대한민국에 대한 약속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완된 지지층을 결집시켜 49:51의 싸움으로 되돌려놔야 한다. 아무리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하더라도 자신의 현실과 미래까지 걸고 복수에 나서려는 사람이 절대 과반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최근 이재명이 지지율에서 윤석열을 바짝 추격하고 나선 이유일 것이다. 윤석열의 지지율은 크게 변화가 없다. 대신 이재명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 결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재명이 보인 행보에 지지층들이 다시 결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자칭 보수들의 윤석열에 대한 비판에 귀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근거다. 어차피 저들은 윤석열의 인물을 보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의 능력이나 자질, 인품 등을 보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칭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저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복수 뿐이다. 문재인을 죽일 수만 있다면 윤석열이 어떤 놈이든 자신들이 다 감당할 수 있다. 평소 윤석열 욕했다고 윤석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이 노려야 할 것은 그 사이에 있는 이해에 충실한 중도층과 민주당의 정체성에 공감하는 기존의 지지층이어야 한다.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복수는 자신의 희생까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문재인을 지키겠다던 자칭 문빠들이 어느새 윤석열의 편에서 그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현실도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지난 경선에서의 사소한 불쾌감을 아직도 부여잡고 자신들이 지지한 대통령을 죽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재명을 죽이기 위해 윤석열을 지지한다. 이재명만 죽일 수 있으면 문재인이야 죽든 말든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감정은 때로 본능보다 지독하다. 이번 선거의 최대 구도일 것이다. 복수와 이해, 과거와 미래, 이재명도 알고 아마 윤석열도 알 터다. 정말 뭣같은 선거가 될 듯하다.

전쟁이란 곧 상대의 의도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른바 전장의 주도권이란 것이다. 내가 싸울 곳과 장소와 조건을 결정한다. 먼저 유리한 지점을 점령하고 내가 유리한 때에 내가 유리한 조건에서 싸우도록 상대에게 강요한다. 사실상 대부분 전략과 전술들은 그를 위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순신이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였다. 제갈량이 몇 배나 강한 위를 상대로 항상 공세를 펼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사마의가 그를 저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일본군이 이미 진을 치고 방어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부산으로 진격해봐야 이기더라도 피해만 클 뿐이었다. 위가 촉으로 넘어오지 않는 이상 전쟁을 결정할 권리는 오로지 촉군에 있었다. 하지만 촉이 기산을 넘어온 순간 주도권은 위로 넘어온다. 맞서 싸우지만 않으면 된다. 괜히 맞서 싸우다가 제갈량에 크게 혼난 것이 바로 단곡전투였다.

 

내가 유리한 전장이 있다. 기병이면 평지가 유리하고, 보병이면 산을 끼고 방어하는 것이 유리하다. 공격하는 입장이면 평지에서 회전을 펼치는 것이 유리하고, 방어하는 입장이면 성을 끼고 농성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조선군에 유리한 조건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한양만 바라고 기습공격을 펼쳤던 것이었다. 중간에 산성들은 아예 무시했다. 잡다한 병력들은 무시한 채 오로지 한양만을 바라보고 기병을 동원해 돌격했었다. 그것이 자신들에 유리한 전장일 테니까. 반면 고수전쟁에서는 요하에서 평양이라는 지리적 거리를 이용해서 적의 주력을 끌어들여 괴멸시키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었다. 누가 더 자신이 유리한 전장에서 상대의 불리를 강요하는가. 승리의 조건이다.

 

적이 뭔 생각을 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적이 그를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려 하고 그를 위해 어떤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가다. 그러므로 자신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상대를 자신의 싸움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국민의힘이 잘하고 민주당이 못하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우기더라도 국민의힘은 자기들 논리 안에서 자기들 주장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 위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반면 민주당은 협치라는 이름 아래 그런 국민의힘이 준비한 전장에서 어렵게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언론이 그리 몰아간 때문이라 하지만 의석차이가 거의 수 십 석 이상 나면 그런 변명도 의미없는 것이다.

 

해야 하면 한다. 할 수 있으며 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너무 쉽고 간단한 논리다. 그래서 반대하면 짓밟고 넘어간다. 협상을 요구한다면 민주당에서 주도해서 협상을 끌어간다. 하긴 그런 게 리더십일 것이다. 대부분 평범한 개인들은 책임지고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런 결정을 자기 이름으로 내릴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을 걸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까지 옮겼기 때문에.

 

이재명이 민주당을 데리고 보였던 퍼포먼스에 대한 뒤늦은 생각이다. 이런 게 리더십이구나. 이런 게 없어서 그동안 민주당이 지지부진했던 것이구나. 이낙연이어서는 안되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기도 했다. 너무 국민의힘의 이야기를 들었다. 국민의힘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언론에 귀를 기울이고 언론의 주장까지 내면화했다. 될 일도 안된다. 해야 할 일도 못한다. 그만한 힘을 있는데 그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된다면 그러면 된다. 너무 쉽지 않은가.

 

이재명의 민주당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이재명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인격적으로는 분명 더 훌륭하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훌륭한 것이 맞다. 하지만 정치란 인격을 도야하는 도량이 아닌 어느 한 편의 이해와 지향과 추구를 관철하는 전장인 것이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면 이기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진심만으로 통하는 전장이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왕도가 안되면 권도로, 그도 안되면 패도로, 그래도 안될 것 같으면 마도의 힘이라도 빌려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패하고 죽는 것은 아무 책임없는 필부필부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협치하고 싶으면 국민의힘이 먼저 굽히고 나서라. 얼마나 이낙연의 민주당이 국민의힘에 얕보였으면. 언론도 하찮게 보고 비웃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습게 보여서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앞장서서 내세우지도 못한다. 이재명의 가치다. 민주당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당대표가 소소한 잡놈이라 다행인 이유다. 오히려 송영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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