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세익스피어의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비슷한 장면이 나올 것이다.

 

"이런 건 맛 없어, 먹지 마!"

"이런 형편없는 걸 먹겠다고? 안돼! 이런 건 버려야 해!"

"당신에게 이런 건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 다른 걸 먹어."

 

결론은 아무것도 먹지 말고 굶으라는 것이다.

 

받아야 할 돈이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리저리 회피하는 바람에 결국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당장 급해서 일부라도 받으려는데 누군가 끼어든다.

 

"일부만 받아서 되겠어? 다 받아. 일부면 아예 받지 마!"

 

내가 급하다고.

 

"그러면 옳지 않아. 전부 다 토해낼 때까지 버텨."

 

그렇다고 아예 신고해서 감옥에 보내느냐면,

 

"돈을 다 받아낼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마. 감옥에도 보내지 말고. 돈부터 다 받아."

 

그래서 이 놈은 내 편일까? 돈을 빌려간 그 놈 편일까? 결론은 나는 돈을 받지 못했고 그놈은 돈을 주지 않았다. 다른 어떤 책임도 지고 있지 않다.

 

이명박근혜 때도 한결같았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 타협은 악이다. 양보는 적이다. 그러므로 전부가 아니면 반대하고 기권하겠다. 한 번에 최저임금 1만원으로 오르지 않으면 최저임금인상에도 반대, 한 번에 주 40시간 되지 않으면 그것도 반대, 한 번에 모든 사업체에 대체휴일 인정되지 않으면 그 또한 반대, 타협하고 양보한 중대재해법도 전부가 아니므로 반대, 그래서 과연 누가 좋았었는가? 반대해서 노동자가 더 좋아졌을까? 기권해서 사용자가 더 좋았을까? 그러면 정의당과 자칭진보는 누구를 위해 봉사한 것인가?

 

중대재해법에 대해서도 아예 법안 자체에 반대했던 '국민의힘'은 노동존중의 정당이라며 추앙하더니 그나마 양보한 법안이라도 통과시킨 민주당에 대해서는 극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당시 국민의힘을 비판하던 자칭진보는 거의 보기가 힘들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 그러니 전부를 쟁취해낼 때까지 노동자는 억울하고 힘들고 부당해도 참으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 그냥 참고 견디라. 그게 정의당이고 한겨레였다.

 

내가 자칭 진보를 혐오하는 이유다. 나 자신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노동관련현안에서 과연 정치권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선택들을 하는가. 그래서 자칭 진보는 노동자인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실제로 해 왔는가. 2000년대 초반까지 나 역시 자칭 진보를 진심으로 믿고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옥석논쟁 당시 나는 이문옥을 지지하고 있었다. 왜 내가 입장을 바꾸었을까?

 

노동자와 약자들을 위한 진보? 그런 건 현실에 없다. 저들은 한 번도 진심으로 노동자와 약자를 위해 본 적이 없었다. 결과는 항상 기득권의 이익 유지였다. 그를 위해 그들은 봉사해 왔었다. 결과가 말해준다. 사실이 진실의 근거다.

여성주의는 메갈리아를 인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결집한 순간 그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편주의가 아니다. 인류보편의 가치로서의 여성주의가 아니었다. 오로지 여성만 특별한 여성주의였다. 그것도 모든 여성이 아닌 일부의 특별한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주의였다. 김학의 사건을 보라. 그리고 국민의힘과 관련한 수많은 성추행, 성희롱, 성폭행사건들에 대해 여성주의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가.

 

2016년 탄핵정국부터, 아니 2012년 대선부터 여성주의의 목표는 한결같았다. 박근혜를 지키자. 박근혜를 당선시키고 지키고 다시 되돌리자. 그래서 문재인 정부 출범 초부터도 여성주의는 민주당 정부에 적대적이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자칭 진보가 민주당 정부를 적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었다. 어째서 한겨레와 정의당은 국민의힘과 손잡고 민주당을 적대해야 하는가. 그를 위해서 박원순도 죽였던 것이었다. 그냥 박원순 하나 죽이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모든 언론과 정치권이 반민주당 전선으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성주의에서도 극단에 위치한 것들과 굳이 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조선일보와 인터뷰한다고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해 좋은 기사가 나갈 리 만무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좋아하는 후보는 민주당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 하긴 그런 조선일보를 가장 신뢰하고 부러워하며 닮아가고 있는 것이 한겨레였던가. 노동자를 위한다면서 거짓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기사를 냈는데 반박하는 기사 한 줄 없었다. 차라리 정부를 욕하겠다. 정부만 욕하면 참언론이다. 조국이랑 추미애 욕 더 못하게 했다고 들이받던 한겨레 기자들이 정작 윤석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이유다. 딱 닮았다. 그래서 한겨레가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민주화운동과 민주화세대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너희들따위 필요없으니 아예 구독도 하지 말아달라.

 

이재명이 현명했던 것이다. 조선일보나 한겨레 따위와 인터뷰한다고 제대로 사실을 보도할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여성주의 매체라면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과 인터뷰할 시간에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서 더 많은 대중과 직접 다가가는 것이 나을 수 있다. 한겨레가 또 한겨레 했다. 여성주의 말고 저놈들에게 과연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 남아 있긴 한가. 똥걸레는 똥걸레일 뿐. 윤석열 똥이나 닦는 신문이다. 더럽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 있을 지 모르겠다. 2017년 당시 극우보수지지자를 제외하고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던 집단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페미니스트들이었다. 박근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탄압받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여성이라서 부당하게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탄핵이 인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때 그토록 박근혜를 싸고돌던 페미니스트들이 지금은 다 어디 가 있을까?

 

문재인 정부 초기 메갈리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좋은 말 쓰다가 어느 순간 돌변했던 것도 바로 그 기억 때문이었다. 메갈리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전해듣고, 실제 거리에서 집회하며 어떤 구호를 외쳤는가도 들었었다. 아 이 씨발년들은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구나. 그런데 그래도 진보적이라 여겼던 페미니스트 다수가 그런 메갈리아를 싸고도는 것이다. 정확히 메갈리아를 중심으로 결집하려 하고 있었다. 진선미 윤인순 유은혜 년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 씨발년들이 지금 뭔가 꾸미려는 게 아닌가. 그 결과가 바로 안희정 징역과 박원순 자살이었다. 그런데 그 씨발년들이 지금 몸담은 곳이 어디인가. 바로 정의당이고 한겨레다. 

 

여기서 문제, 박근혜 싸고돌던 페미니스트를 적극 수용하여 주류로 만든 정의당이 어째서 이제와서 박근혜 사면 가지고 지랄하고 나서는 것일까? 목적이 달성되었는데 지랄한다면 다시 수단을 살필 필요가 있다. 정의당은 박근혜 복권시키자고 국민의힘과 손잡았었다. 정확히 정의당 주류인 페미니스트들이 국민의힘과 조선일보와 철저히 밀착하고 있었다. 그래서인 것이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박근혜 괜히 사면했다고 말할 수 없으니 정의당의 입을 빌린다. 그만큼 박근혜 사면이 국민의힘 입장에서 상당히 곤란한 상황을 만든 것이다. 왜 곤란한가는 다들 아는 바와 같을 테고.

 

지금껏 정의당이 논평한 것을 가만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의당이 국민의힘이나 윤석열을 대놓고 비판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진보는 커녕 인류보편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했어도 정의당은 오로지 침묵했었다. 그러면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말꼬리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연장에서 이번 비판도 되새겨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당의 의도는 무엇인가? 정확히 국민의힘의 의도는 무엇인가?

 

국민의힘 2중대 3중대도 아니고 그냥 따까리란 것이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하기 어려운 말을 대신해주고, 괜히 욕먹을 것 같은 말도 대신해주고, 국민의힘이 한 마디 하면 힘을 실어주려 또 한 마디 해 주시고, 정의당의 모든 행보는 그렇게 국민의힘의 이해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정의당과 손잡은 한겨레는 말할 것도 없다. 진중권과 신지예와 심상정의 차이를 한 번 설명해 보기 바란다. 거의 없다. 그게 진실인 것이고. 항상 진실은 단순하다.

사찰이란 절차에 의하지 않고 하는 것이다. 절차에 따라 사건을 인지하고 대상자에 대해 사전조사를 하는 것은 내사라 부른다. 사건에 관계된 사실들만 아직 혐의가 구체화되지 않았기에 비공식적으로 조사하고 혐의가 구체화될 경우 바로 수사에 들어간다. 사실이 아니고 혐의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후 폐기한다. 내사 중 사건을 인지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 바로 국정원과 검찰의 캐비닛인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사실과 혐의에 대한 인지 없이 오로지 대상만을 표적으로 법적인 근거나 절차 없이 조사를 진행하는 것을 바로 사찰이라 부르는 것이다. 당연히 대상에 대한 고지도 없고, 절차에 의한 통제나 관리도 없다. 그야말로 무제한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조국 전장관의 일가족에 대한 검찰의 사찰이 그러했었다. 남의 집 이혼부터 인턴증명서까지 별 사소한 것들을 있는대로 시시콜콜 다 캐고 다녔었다. 그런 사건에 대한 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혐의에 대한 고발이나 신고가 접수된 것도 아니었다. 조사한다는 고지도 범위나 대상에 대한 제한도 없었다. 그러면 공수처는 어떠한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고발사주와 윤석열 처가의 사건에 대한 수사는 이미 오래전 공개적으로 시작됐다.

 

수사에 필요하면 관련자들에 대한 자료를 공개적으로 요청할 수 있다. 검찰이 유시민, 아니 노무현재단의 계좌를 들여다 본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바로 그 사실을 비밀리에 감췄기 때문인 것이다. 의도가 정당했다면 차라리 수사상 필요해서 봤으며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기밀사항이므로 밝힐 수 없다고 대답했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검찰에게는 그만한 권한이 있다. 누가 누구와 언제 통화했는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내용의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았는가. 현대수사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들 아닌가. 그런데도 사찰이라...

 

하긴 수사한다는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수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검찰의 권한을 이용해서 개인정보를 탈탈 털고 그를 근거로 용의자나 혹은 관련자들을 압박해서 진술만 받아내려 했을 것이다. 증거가 아니라 진술이다. 정경심 재판도 마찬가지다. 결국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린 근거란 것도 검찰이 압박해서 받아낸 진술이었다. 법정에서 바꾼 증언들은 모두 인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검찰의 수사는 처음부터 사찰이었다. 그래서 공수처도 사찰을 하는 것이다.

 

기레기들이 난리치는 이유도 그것이다. 검찰은 원래 사찰을 한다. 그 사찰한 것을 자기들이 기사로 받아쓰고 있는 것이다. 이동재가 했던 짓거리를 KBS도 한겨레도 경향일보도 모두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들은 사찰의 예외였다. 그런데 공수처가 감히 검찰과 함께 자신들까지 사찰하려 한다. 수사가 아니다. 기자들 자신들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은 수사하는 곳이 아니다. 참 버러지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야말로 추악한 자기고백이다.

일본만화에 흔히 나오는 대사가 하나 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거면 경찰따위 필요없어!"

 

맞는 말이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날 것이면 굳이 경찰까지 동원해서 시간과 돈과 노력까지 허비해가며 수사씩이나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당사자끼리 만나서, 아니면 누군가의 중재로 대충 서로 사실을 인정한다면 사과하고 사과받고 끝내자 말하면 된다. 그러면 어째서 사과로 끝나지 않고 경찰까지 나서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다시 저 말을 뒤집어 보려 한다.

 

"경찰이 나서야 하는 일이면 사과따위 필요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돈을 도둑맞았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더니 범인이 찾아와서 고개를 숙이고는 말한다.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용서해주세요."

 

물론 그러고 용서받을 수 있는 도둑질도 현실에는 분명 존재한다. 그럴 경우 위의 대사로 대체할 수 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라면 굳이 경찰에 신고할 일도, 경찰이 나서서 수사할 일도 아닌 것이다. 경찰이 나선다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력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은 과연 어느 정도의 사안인가. 기레기들이 더 잘 알 것 아니던가. 체험학습을 인턴이라 했다고 허위사실이라고 판결한 것이 바로 정경심 교수를 재판한 재판부였다. 학생이 인턴을 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정확했고, 인턴활동 동안 얼마나 성실했는가 여부까지 낱낱이 파헤쳐서는 사소한 오류까지도 빌미삼아 기소하여 처벌하려 했었다. 합격한 지원 뿐만 아니라 불합격한 내역까지도 그래서 업무방해라며 무려 진역 4년을 선고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없는 사실을 허위로 기재해서 지원한 사안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하나는 절대 사과로 못 끝내고 그래서 공권력을 동원해서 개인을 수사하고 구금하고 재판해서 처벌까지 했는데 하나는 그냥 말 몇 마디, 그것도 잘못에 대한 인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과로 끝나고 말았다. 그걸 용인하는 중이다. 무엇이 공정이고 무엇이 정의인가? 그들의 사고와 판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기자는 버러지다. 사람새끼가 아니다. 자칭 진보 역시 똥버러지다. 자칭 진보 가운데 저 어처구니 없는 사과에 한 마디라도 하는 새끼 있는가 찾아보라. 가장 앞장서서 사과해주셨습니다 감읍하며 외친 것이 바로 똥걸레였다. 한겨레라 부르면 똥을 모욕하는 것 같아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못 부르겠다.

 

예로부터 같은 법이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는 하나였다. 신분의 구분이 있는 경우였다. 고귀한 이와 비천한 이에게 법은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정의도 진실도 가치도 도덕도 윤리도 마찬가지다. 아마 그것이 이 사회의 카르텔이란 것이겠지. 문재인 대통령이 너무 물렀다. 좋은 사람은 원래 난세에는 일찍 죽는 법이다. 한숨만 쉬게 된다. 

지식은 아는 것이고, 지혜는 판단하는 것이다. 알기만 하고 판단할 줄 모른다면 당연히 쓸데없다. 그냥 알기만 하는 것이라면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판단만 할 줄 한다면 그건 더 위험하다. 프로그램 없이 컴퓨터가 돌아가는 상황이다. 그냥 가정용 컴퓨터이면 모르겠는데 거대한 공장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데이터도 프로그램도 없이 임의로 가동하는 상황인 것이다.

 

지혜 없는 지식은 쓸데없고, 지식 없는 지혜도 따라서 위험할 뿐이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는 하나다. 지혜를 위해 지식이 있고 지식이 있고 난 다음에 지혜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말한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차라리 주위에 잘 아는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를 빌려 올바로 판단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자기 것도 아닌 다른 사람의 지식과 지혜가 옳고 적절하다는 것을 판단할 것인가. 판단이야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만한 식견과 경륜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문재인조차 그래서 경제전문가가 아니었기에 경제관료들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치열하고 투철한 삶을 그리 오래 경험하지 못했기에 때로 너무 무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장하성이 떠나고 김신조마저 남아 있지 않은 지금 누가 문재인이 처음 구상한 경제정책들을 지탱하고 있는가. 그 전에 어째서 문재인은 자신의 경제공약을 반대하는 김동연과 홍남기의 주장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반면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에서는 남다른 역량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게 지혜다. 그 지혜의 근거는 바로 지식이고 경험이고 오래고 깊은 사유다.

 

어째서 김대중 정도 되는 이들조차 관료들에 둘러싸일 수밖에 없었는가. 노무현 또한 관료들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하물며 그조차도 안 되는 인물이다. 박근혜인들 잘하고 싶지 않았을까? 문재인이 박근혜를 풀어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래도 악의는 없었다. 단지 멍청했고 무식했고 비겁했고 그럼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 최순실 같은 존재가 숨어들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무지는 거짓과 기만이 자라는 양분이다.

 

차라리 무식해서 낫다. 무지해서 괜찮다. 백지라서 기대할 수 있다. 참 비루하다. 얼마나 능력이 대단해서 어떻게 대한민국을 낫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차라리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나쁘지 않다는 게 저들이 지지하는 논리인 것이다. 이재명은 위험하다. 이재명은 사악하다. 그러나 그 어떤 악보다 위험한 것이 특히 권력자에게는 무지고 무능이다. 한심한 것이다. 하긴 정동영 출마했을 때 내 심정이 비슷했었다. 아 이 새끼는 진짜 아닌데. 아무튼.

그동안 수도 없이 밝혀 온 그대로 나는 노동자다. 그것도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일한 만큼 수당까지 더해서 월급으로 받는 이른바 하층 육체노동자다. 그런 내게 무엇보다 시급하고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이슈란 과연 어떤 것일까?

 

최저임금을 낮추거나 없애면 그나마 받는 월급마저 깎일지 모른다. 정규직 해고가 자유로워지면 지금처럼 소장의 부당한 지시에 게기지도 못한다. 근로시간이 늘어나면 지금보다 더 적은 시급으로도 지금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시절로 돌아갈지 모른다. 하루 여덟 시간 겨우 집에서 쉬고 나머지는 계속 나와서 일만 해야 한다. 더구나 국민연금까지 더 많이 내고 더 적게 받으면 나이 먹고 경비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처지가 될 가능성까지 높아진다. 어쩌면 폐지를 주워 리어카에 싣고 다니는 추레한 노인들 가운데 나이 먹은 나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가?

 

지금껏 자칭 진보가 반응을 보인 이슈란 고작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장동, 하나는 부동산 양도세였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하루 쉬면 그만큼 월급이 줄고, 그래서 몸이 아파도 하루 더 나가 일해야 하는 나와 같은 노동자에게 누가 얼마를 더 받고 세금을 얼마 덜 내고 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데? 하지만 저들에게 관심사란 그런 것들 뿐이다. 최저임금도, 근로시간도, 국민연금도, 정규직의 일자리도 전혀 관심밖의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자칭 진보와 노동자인 나 사이에 접점이란 무엇이 있을까?

 

그나마 노동자를 위하는 척하던 것도 그만둔 지가 꽤 되었다. 민주노총마저 노동자 전체의 이익이 아닌 자기들 노조의, 아니 노조집행부 자신의 이해를 위해 노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지 꽤 오래 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노골적으로 그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신지예가 고백한 것처럼, 진중권이 자백했던 것처럼, 저들은 단지 가난한 자와 약자들 위에서 그들을 연민하며 위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지적 도덕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 했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태연히 타인의 직업과 학력을 문제삼아 그를 비난하고 조롱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칭 보수들도 감히 지역문제로 특정지역을 비하하지 못할 때 자칭진보는 당당하게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노동자인 나에게, 노동자로서 나의 계급적인 가치와 이해란 자칭 진보의 그것과 어디서 얼마나 닿아 있는가. 모두 반대했었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법안이나 정책들은 거의 모두 자칭 진보가 나서서 반대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럴싸했다. 더 많은 전체의 노동자에게 더 큰 이익을 돌려주기 위해서 당장의 작은 진보를 반대하겠다. 그러면 누가 나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낫게 바꾸어 주는가. 그러면 나의 계급적 이해와 일치하는 정치집단이란 어디의 누구일까?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안타깝게 목숨을 끊었을 때 그 옆을 지켜준 것은 그 잘난 자칭 진보가 아니었다. 신지예와 진중권의 국민의힘 바라기가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국민의힘이 노동존중의 정당이다. 그게 저들이 말하는 노동의 가치다.

 

내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저들이 말하는 노동자로서 계급적 이익에 보다 투철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위한 정치를 하고 나를 위한 법안을 내는가. 나를 위한 정당인가. 답은 명확하다. 대안조차 없다. 씁쓸한 현실이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기는 했었다. 아마 홍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번 홍남기만 감싸고 돌며 임기초 했던 약속들을 나몰라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그냥 천생 보수구나.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래도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니 존중은 해주어야겠다. 그런데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일반인의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참으로 괴로운 것이다.

 

이해는 한다. 정치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도 한 부담이었을 것이고, 윤석열의 저 높은 지지율의 근원이 박근혜를 위한 복수심이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가지는 상징성 만큼 차기 이재명 정부에 그에 대한 부담을 넘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문재인 자신이 사면시키고자 했던 인사들을 위해서라도 거래의 대상으로 박근혜만큼 요긴한 카드도 없었을 것이다. 한명숙은 오래전부터 문재인이 마음의 빚으로 여기고 있던 정치인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과연 문재인 자신이 말한 '원칙'과 '공정'과 '정의'에 부합하느냐는 것이다. 그저 정치공학적인 '계산'에 의한 판단이 아닌가.

 

박근혜가 혹시라도 감옥에서 중병이 걸리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면 그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다. 더구나 윤석열을 중심으로 결집한 보수의 동력이란 결국 감옥에 갇힌 박근혜를 위한 복수심이며, 그렇게 만든 당사자라 여기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적개심인 것이다. 보수진영에서 박근혜가 가지는 상징성 만큼이나 이재명이 집권하더라도 사면에 대한 요구가 계속될 것이고 그로 인한 논란이 끊임없이 불거질 것이란 점에서 임기도 다 끝나가는 문재인 정부에서 짊어지고 가는 것이 어찌보면 맞기도 하다. 더구나 덕분에 자신이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정치인들도 다수 풀어줄 수 있지 않았는가. 다만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상식에 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판단들이 옳은가.

 

노무현과 비슷하다. 하긴 70년대 운동권과 80년대 운동권 사이에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있었다. 80년대 운동권과 90년대 학번들 사이에도 그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86이라 부르는 것이다. 75와도 97과도 다르다.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다.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보수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의는 엄격하지 않고 단호하지도 않으며 철저하지도 않다. 그리고 개인의 상식과 정의와 원칙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성립하고 작동한다. 그럴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뒤통수 맞고 나니 그냥 허탈하네. 뭐라 해야 할까. 어머니께 말씀드린대로 문재인이 감옥에 가든 어디서 죽든 이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란 생각이 더욱 확실해진다. 노무현 죽었을 때도 그래서 아무 감정이 없었다.

 

정말 괜한 것이었다. 나같은 무지렁이 노동자가 감히 정치인 걱정을 하다니. 정치인을 지켜주겠다 안달복달하고 있었다니. 나는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살아야 하는 그냥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고도의 정치적 계산따위 나의 일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 저놈들의 일이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혹시라도 사면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민주당이나 이재명 후보에게 미치지 않도록 대통령 개인의 독단에 의한 결정이라 발표한 부분은 지극히 문재인 다웠다. 정치인이란 역시 선지자이고 순교자여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제 임기가 끝나가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나의 감정도 시효를 다해간다. 진짜 잊혀지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잊을 것이다. 미련도 애정도 미움도 싹 다 잊을 것이다. 더하고 빼고 나면 그냥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다시는 문재인 대통령을 찾지 말라. 그럴 생각이고. 씨발. 문재인 정부 임기내내 홍남기보다 더 기분나쁜 하루였다. 퇴임 후 뭔 일을 당하든 나와는 상관없다. 윤석열은 절대 안된다는 전제에도.

사실 언제부터인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기는 했었다. 아마 홍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번 홍남기만 감싸고 돌며 임기초 했던 약속들을 나몰라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그냥 천생 보수구나.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래도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니 존중은 해주어야겠다. 그런데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일반인의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참으로 괴로운 것이다.

 

이해는 한다. 정치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도 한 부담이었을 것이고, 윤석열의 저 높은 지지율의 근원이 박근혜를 위한 복수심이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가지는 상징성 만큼 차기 이재명 정부에 그에 대한 부담을 넘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문재인 자신이 사면시키고자 했던 인사들을 위해서라도 거래의 대상으로 박근혜만큼 요긴한 카드도 없었을 것이다. 한명숙은 오래전부터 문재인이 마음의 빚으로 여기고 있던 정치인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과연 문재인 자신이 말한 '원칙'과 '공정'과 '정의'에 부합하느냐는 것이다. 그저 정치공학적인 '계산'에 의한 판단이 아닌가.

 

박근혜가 혹시라도 감옥에서 중병이 걸리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되면 그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다. 더구나 윤석열을 중심으로 결집한 보수의 동력이란 결국 감옥에 갇힌 박근혜를 위한 복수심이며, 그렇게 만든 당사자라 여기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적개심인 것이다. 보수진영에서 박근혜가 가지는 상징성 만큼이나 이재명이 집권하더라도 사면에 대한 요구가 계속될 것이고 그로 인한 논란이 끊임없이 불거질 것이란 점에서 임기도 다 끝나가는 문재인 정부에서 짊어지고 가는 것이 어찌보면 맞기도 하다. 더구나 덕분에 자신이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정치인들도 다수 풀어줄 수 있지 않았는가. 다만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상식에 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판단들이 옳은가.

 

노무현과 비슷하다. 하긴 70년대 운동권과 80년대 운동권 사이에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있었다. 80년대 운동권과 90년대 학번들 사이에도 그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86이라 부르는 것이다. 75와도 97과도 다르다.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다.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보수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의는 엄격하지 않고 단호하지도 않으며 철저하지도 않다. 그리고 개인의 상식과 정의와 원칙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성립하고 작동한다. 그럴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뒤통수 맞고 나니 그냥 허탈하네. 뭐라 해야 할까. 어머니께 말씀드린대로 문재인이 감옥에 가든 어디서 죽든 이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란 생각이 더욱 확실해진다. 노무현 죽었을 때도 그래서 아무 감정이 없었다.

 

정말 괜한 것이었다. 나같은 무지렁이 노동자가 감히 정치인 걱정을 하다니. 정치인을 지켜주겠다 안달복달하고 있었다니. 나는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살아야 하는 그냥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고도의 정치적 계산따위 나의 일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 저놈들의 일이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혹시라도 사면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민주당이나 이재명 후보에게 미치지 않도록 대통령 개인의 독단에 의한 결정이라 발표한 부분은 지극히 문재인 다웠다. 정치인이란 역시 선지자이고 순교자여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제 임기가 끝나가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나의 감정도 시효를 다해간다. 진짜 잊혀지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잊을 것이다. 미련도 애정도 미움도 싹 다 잊을 것이다. 더하고 빼고 나면 그냥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다시는 문재인 대통령을 찾지 말라. 그럴 생각이고. 씨발. 문재인 정부 임기내내 홍남기보다 더 기분나쁜 하루였다. 퇴임 후 뭔 일을 당하든 나와는 상관없다. 윤석열은 절대 안된다는 전제에도.

이를테면 북한에서 공작하라고 보낸 국정원 요원이 느닷없이 휴전선을 넘어 귀순하는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내부에 침투해서 선동과 여론조작을 해보라 보내놨더니만 자기는 오로지 대한민국만 사랑한다며 선언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엇보다 나머지 요원들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가.

 

간첩은 간첩인 줄 모를 때 그 존재와 위력이 극대화된다. 간첩인 줄 알고 나면 그때부터는 의미를 잃는다. 아니 오히려 해악이 되기 쉽다.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군도 그렇게 정보당국이 간파한 독일 간첩들을 이용해서 역정보를 흘림으로써 독일군의 오판을 유도하기도 했었다. 모략이 모략인 줄 알면 그건 더이상 모략이 아니게 된다. 원래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포위하고 민주당을 압박하려 한 것인데 느닷없이 진보 가운데 보수편임을 선언하는 놈들이 나온다. 아직 편먹은 대가도 받지 못했는데 그렇게 되면 나머지 심정이 어떻겠는가.

 

정의당과 녹색댕, 여성의당, 그리고 한겨레 등 자칭 진보들이 신지예를 욕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냥 진보인 척 해야 했었다. 진보로써 진보적이지 못한 민주당을 욕해야 했었다. 그래서 신지예도 이전까지 정의당도 못하는 윤석열 비판까지 해가며 자신을 위장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진보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아예 대놓고 국민의힘에 가 버렸으니 남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다. 자칫 여기서 더 국민의힘과 편먹고 민주당 욕하다가는 자신들의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실제 국민의힘으로 돌아서기 전과 이후 신지예나 진중권이 하는 주장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심지어 남아 있는 정의당이나 한겨레 역시 저들과 크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았다. 정의당은 여전히 대장동이다. 여전히 이재명만 욕하고 있다. 윤석열에게는 아예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하긴 설강화를 옹호하는 놈들 가운데도 자칭 진보가 적지 않다. 그냥 위치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신지예로 인해 더욱 선명히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고.

 

자칭 진보가 신지예를 욕하는 절박함을 이해하는 이유다. 작년부터였다. 작년 총선을 앞두고 문재인 탄핵을 이야기할 때부터였다. 한겨레는 아예 퇴임 이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말을 공공연히 입에 올렸다. 신지예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 아마 이재명과 관련해서도 박원순처럼 뭔가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자칭 진보는 그냥 국민의힘 전위부대라 여기고 판단하면 거의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신지예가 확인시켜주었다.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가난한 놈들은 자유가 뭔지도 모른다는 말에 신지예가 동의했을 것이다. 거기에도 공통된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참 대단하신 자칭진보다. 훌륭할 따름이다. 병신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