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45%에 이른다. 그런데 정작 같은 민주당 소속의 대선후보 이재명의 지지율은 이에 한참 못 미친다. 정권교체에 대한 지지도 낮아진 상황에 정권연장에 대한 지지가 이토록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중립이어야 한다. 대선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중립을 지키려 국민의힘의 개소리와 민주당 사이에서 항상 가운데 서려고 하는 그나마 낫다는 언론들 상황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진실과 조선일보 사이의 중립을 추구하는 그나마 양호한 자칭진보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니까 민주당 하자는대로 해주면 안된다. 민주당에 유리한대로 행정부가 움직여서는 안된다.

 

정작 해야 할 일이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데 박범계는 윤석열의 특활비를 감추는데 앞장섰다. 유은혜는 김건희의 경력위조를 덮는데 일조하는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실제 집행하는데 매우 소극적이다. 추경도 않겠다, 소상공인지원도 않겠다, 재난지원금 전국민지원도 못하겠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지지자 사이에서 민주당과 청와대가 대립하는, 정확히 청와대가 민주당으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이 인식되어 가는 것이다. 이재명은 문재인을 적대한다. 그러니 문재인을 지키려 윤석열 찍겠다는 병신들도 나오는 것이다. 이재명이 문재인을 공격하니까.

 

자기가 민주당 소속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민주당의 정권연장이야 말로 자신이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것들을 이어갈 유일한 통로란 사실을 부정한다. 그런 필요에 대한 자각 자체가 없다.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으로서 당연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 내내 정작 윤석열을 제대로 찍어내기 위한 어떤 행동도 정부나 여당차원에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적임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다시 깨닫는다. 난세에는 그저 사람만 좋은 리더란 오히려 성가시기만 한 것이다. 불편하고 오히려 피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윤석열을 여기까지 끌어올렸는가? 지금 청와대의 행보가 그 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낙연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양정철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이낙연은 그 동안 민주당 다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일까? 똥파리는 자연발생인 것일까? 의심은 깊어만 간다. 정권연장의 의지는 있는 것일까?

 

그나마 윤석열이 인터뷰로 확인해주고 있다. 이재명은 비판하며 요구하지만 윤석열은 복수하려 하고 있다. 이래도 보고만 있을 것인가? 똥파리들은 여전히 똥이나 파먹고 있을 것인가. 김찬식 아저씨, 보여? 하여튼.

윤석열이 대놓고 공약으로 해고를 쉽게 할 수 있게 하겠다는데도 자칭진보는 여전히 윤석열이나 이재명이나라는 태도다. 아니 사실 이 정도면 극좌에 가깝고 정통 좌파는 그래도 윤석열이라는 입장이다. 왜일까?

 

한 마디로 이재명이 상스럽기 때문이다. 김혜경이 잡스럽기 때문이다. 기왕에 대통령이 되려면 억 단위는 해 쳐먹어야 한다. 노동자를 고통스럽게 해야 노동자가 자신들을 지지한다.

 

말했을 것이다. 저놈들은 단 한 번도 노동자였던 적이 없다. 같은 노동자더라도 노조 집행부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랐다. 노동자들이 어떤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든 노동자의 불이익과 분노는 곧 자신들의 힘이 된다.

 

노동자란 단지 자신들을 위한 수단이다. 심지어 이미 자칭진보는 노동자마저 버렸다. 여성이다. 그것도 노동자인 일반 여성이 아닌 상류층 여성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석열을 배후에 둔 김건희를 여성주의자들은 지켜야 한다.

 

나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데 자칭 진보는 소고기가 아닌 삼치를 구워 먹는 것을 한스러워한다. 오래전 기억이다. 내가 실직하고 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는데 자기가 무산계급이라며 삼치를 먹는 걸 과시했다. 그런 수준인 것이다. 내가 케이크를 못 먹으니 나는 무산계급이다. 어찌 사람이 밀기울을 먹고 쌀겨로 죽을 쑤어 먹는가.

 

저들이 아는 노동자와 내가 아는 노동자가 다르다. 노동자의 해고가 쉬워지면 다른 노동자가 더 취업하기 좋아진다. 불만을 가진 노동자는 자신들을 지지하게 된다. 내가 자칭 진보를 혐오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저 새끼들의 대가리속에 노동자인 나란 존재는 아예 들어있지 않다.

 

오래전 게임회사 다니던 시절을 떠올린다. 많은 게임회사들에서 경력직 한 명과 다수의 1년도 안된 신입직원들만을 고용하고 있었다. 오래 데리고 있으면 급여를 올려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업들에 필요한 것은 책임지고 업무를 주도할 경력직 몇 명과 그들의 지시에 따라 단순작업을 수행할 다수였다. 그리고 그 다수 대부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가련한 처지로 전락하고는 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여성을 위해서라면. 물론 그 여성을 위해서 자칭 여성주의는 계약직 여성의 해고를 압박할 수 있다. 지방지 기자도 여성일 수 없다. 여성은 매우 특별한 의미여야 한다.

 

윤석열이 보여준다. 내가 말하는 자칭 진보가 현실의 자칭 진보가 다르지 않음을 몸으로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자칭진보일 테지만. 진보가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니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단 하나 진리다.

지식의 반댓말은 아마 무지일 것이다. 그러면 지혜의 반댓말은 무엇일까? 맹목이다.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비가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는 과연 신의가 있는 사람인가? 강물이 불어 목까지 차오르는데도 어차피 상대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버렸다. 한 마디로 그냥 병신이다. 바보 모지리다.

 

송나라 양공이 오늘날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인의에 대해 한 가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상황에서 군주로써 지켜야 할 인의에 대해 전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인의를 위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스스로 배제해 버렸다. 그래서 병신이다. 모지리 찐따다.

 

그래서 마속 역시 가정에서 산에 오르는 어이없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이 읽은 병법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시 상황이 어떻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이든 상관않고 무작정 산부터 오르고 본 것이었다. 이런 또 다른 말로 헛똑똑이라 부른다. 머릿속에만 있는 지식인 것이다.

 

어째서 문재인 대통령은 홍남기를 저토록 중용하고 홍남기가 말하는대로만 따르는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도 경제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계입문도 등떠밀려 했던 만큼 오래도록 국가단위의 경제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관은 그저 직관적인 선량함이란 선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경험과 직관에 비추어 국가와 국민들에 무언가를 해 보고 싶은데 그 방법이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처음 장하성을 중용하고 김상조에 의지하다가 아예 홍남기에게 먹혀 버린 것이다. 더 철저한 논리와 근거들 앞에 선량함이란 그렇게 의미없어지는 것이다.

 

널리 보는 것을 한자에서 관觀이라 쓰고 그보다 좁게 보는 것을 각각 시示와 견見이라 한다. 그러면 그보다 좁은 걸 무어라 할까. 그래서 눈 목자 목目다. 닫힌 눈이다. 보지 못하는 눈이다.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보지 않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 이를 시야가 좁다고 말한다. 시야가 좁은 이유란 무엇인가. 더 넓게 더 다양하게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능력 자체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적고 경험한 것이 적을 경우 쉽게 한 가지에, 자신이 아는 단 한 가지 가능성에 집착하기 쉽다. 그게 맹목이다. 지혜의 반댓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정도는 나도 모르는데 대통령후보도 몰라도 되는 것 아닌가. 게임개발자다. DX12에 대해 아예 기본개념부터 모른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3D가 뭔지 어드밴처가 뭔지 PC와 콘솔의 차이부터 이해하지 못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정치인도 전문직이다. 보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인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내치와 외교를 더욱 잘하기 위해서라도 해당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주위의 조언도 제대로 귀에 들어올 수 있다. 무어라 조언을 하고 제안을 하면 제대로 이해해서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직업과 관련한 용어조차 모르는 관리자를 떠올려 보라. 게임개발팀 팀장인데 폴리곤이 뭔지도 모른다. 윈도우가 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과연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컴퓨터 하드웨어를 모르고서 컴퓨터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프로그램과 그래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개발과정을 프로듀싱한다는 것도 절대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에게 개발자 가운데 누군가 뭐라 하면 그게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굴레가 되고 구속이 된다. 바로 맹목이다.

 

지식이 중요한 이유다. 알지 못하고 지혜란 있을 수 없다. 먼저 알고 난 다음에 궁리도 고민도 지혜도 존재하게 된다.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도 지식은 필수다. 먼저 읽고 먼저 생각하고 먼저 경험한 뒤 비로소 말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다. 기자새끼들이야 원래 그런 새끼들이라. 우리나라에서 기자새끼들보다 무식한 새끼들도 없다. 기자새끼들도 말한다. 꼭 알아야 기자질 하는가. 그래서 기레기란 것이고. 

 

아무튼 딱 기자 수준이라 하겠다. 몰라도 된다? 몰라도 상관없다? 역사가 증명한다. 아니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그를 보여주고 있다. 어째서 철종은 그 선한 의지에도 아무것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는가?

 

참 기레기같은 대선이란 것이다. 딱 검찰 수준의 대선이다. 수준낮아서 할 말을 잃는다. 어이없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인데, 이번 대선의 구도는 무능과 유능이다. 미래와 과거다.

 

이재명 성격 개같은 것 내가 알고 있다. 인성 좆같은 것 나도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가? 유능하다.

 

그렇다고 윤석열 성격이 좋은가? 인성이 훌륭한가?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인정하 만한가?

 

참 필사적이다. KBS의 K는 분명 검사의 K다. KBS 파업을 주도했다는 피디 버러지새끼가 인정했다. KBS는 오로지 검찰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윤석열이 그만큼 유능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과 관련한 의혹은 단 한 줄도 보도하고 있지 않다.

 

이재명이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KBS는 윤석열의 민영화 공약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공영방송은 EBS 하나면 충분하다. KBS야 그냥 아무 건설사에나 팔아넘기면 그만이다. 

 

고소고발하면 언론은 입닫는다. 권력으로 찍어누르면 오히려 그것을 자유로 여긴다. 언론을 풀어주는 것이야 말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이다.

 

내가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을 비웃은 이유가 있다. 저널리즘 토크쇼J를 조롱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정연주를 과연 누가 쫓아냈을까? 바로 KBS직원들이었다. 제 발로 이명박 밑으로 기어들어가 노예를 자처한 것이 바로 KBS였다.

 

애써 윤석열의 무능을 가린다. 가족의 비위를 지운다. 그러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KBS는 대한민국에 그냥 악이다. 언론의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하는가? KBS 직원들부터 실업자로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인간 개쌍놈 된 자체는 둘 다 다르지 않다. 그래서 누가 더 유능한가? 그것만은 가리지 못한다.

 

정의당도 한겨레도 가리지 못한 진실이다. 윤석열은 대통령이 될 만 한가?

 

재택근무 동안에도 최저근로시간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에 자칭 진보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개새끼는 개새끼다. 씹새끼는 씹새끼일 뿐이다.

 

심상정은 씨발쌍년이다. 더 심한 욕도 참는다. 참 내가 많이 점잖아졌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탓이다.

생각해보니 아주 오래다. 아마 2004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친노사이트 '서프라이즈'의 커뮤니티 '서프랑'에서 논쟁이 있었다. 정중하지만 인간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지식인과 거칠고 사납지만 인정을 말하는 일반인 사이에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말은 한껏 예의를 지키고 있지만 내용은 인간에 대한 경멸과 혐오와 무시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반발하며 내뱉은 누군가의 말은 날것의 욕설과 모욕과 비난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

 

내가 글을 쓰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욕설과 비속어를 섞어 쓰게 된 계기였다.  차라리 이쪽이 나에게 맞다. 개새끼는 개새끼고 씹새끼는 씹새끼고 염명할 빌어먹을 놈은 염병할 빌어먹을 놈인 것이다.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눈을 뜨면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머리끄댕이 끌어잡고 싸우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고작 몇 천 원 때문이었다. 고작 몇 백 원에도 사람들은 쉽게 원수가 되었다. 동전 몇 개 때문에도 쌍놈이 되고 쌍년이 되고, 그렇게 얻어낸 지폐 한 장에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내 돈 몇 백 원을 가져갔어도 씨팔놈이고, 내 돈 몇 십 원을 떼어먹었어도 호로쌍놈이다. 그래야 했다. 그 논리를 도대체 얼마나 긴 문장으로 합리적으로 풀어야 한단 말인가.

 

저 새끼 찍어죽이자. 아주 자지를 뽑아죽이자. 대가리를 박살내 죽이자. 고작 얼마간의 돈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그까짓것 하는 그 알량한 돈 때문에. 부모를 욕하고, 자식을 비난하고, 인격을 짓이긴가. 너무 당연하다. 그게 내가 살아온 환경이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저씨들과 당연하게 머리끄댕이 붙잡고 싸우는 아줌마들과 얼마간 용돈을 위해 우유를 훔치고 신문을 훔치고 자전거를 훔치는 또래들이 있었다. 보지를 찢어버리겠다. 그게 뭐?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딱 옆집 살던 친구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하던 욕이었다. 그리고 죽어라 쳐맞았다. 아주머니와 그 남편과 그리고 부모에게. 친구였다니까? 언제부터인가 선을 넘어서면서 멀어진.

 

아마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지식인인 자칭 진보는 정작 사회구조의 하부에 위치한 나와 같은 가난하고 비루한 이들의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려 한다. 자신들만의 엄숙하고 고귀한 논리를 억지로 적용하려 한다. 그러므로 비천한 언어는 잘못되었다. 저열하고 지열한 어휘란 그 자체로 죄악일 수 있다. 그러니까 개새끼를 개새끼라 하는 건 잘못이다. 씹새끼를 씹새끼라 욕하는 건 죄악이다. 씨팔놈을 씨팔놈이라 했더니 네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언어들이 너무 당연한데?

 

이재명이 그런 욕설을 한 배경을 몰랐을 때도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는 것이다. 화나면 그럴 수도 있지. 열받으면 그런 정도야 당연한 것이다. 그게 나의 상식이다. 때로 화나면 그보다 더 심한 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는 한다. 그런데 어째서 자칭 진보에게는 그런 말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그래서 말했을 것이다. 자칭 진보가 주장하는 진보에는 진짜 소외된 사회적 약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장난인 것이다. 그냥 놀이인 것이다. 자기가 보는 약자다. 자기가 보는 소외된 자다. 자기가 생각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팔아햐 하는 그 절박함을 과연 저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정조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먹이고 동생을 공부시키고 싶은 그 간절함을 과연 저들은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인가. 가난해도 고귀하고, 소외되었어도 고결하다. 국민의힘 지지로 돌아섰다는 어느 사회복지사의 말이다. 가난한 이들이 이토록 치사하고 야비하고 악랄하고 교활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선량하고 순박한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로서 약자만을 떠올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이재명보다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란 경우에 속한다. 그래도 대학까지는 마칠 수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굳이 힘들게 돈을 벌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익숙하다. 이재명의 욕설과 이재명 자식의 도박과. 아니 웃긴다. 인간의 존엄과 자기결정권을 말하면서 마약의 비범죄화를 주장한 것은 자칭진보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기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인간이기에 자신의 존엄을 훼손하고 포기할 권리가 주어진다. 어째서 인간은 항상 엄숙하고 경건하며 예의와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전후 맥락과 상관없이 이재명의 욕설만을 문제삼는 자칭 진보들을 보며 떠올리는 생각이다. 정확히 당시 엄숙하고 근엄하게 그럴싸한 말들을 주워섬기던 이른바 노빠들에 대해 느끼던 반감의 정체였을 것이다. 저에도 말했지만 이재명은 나와 같다. 오히려 나보다 낫다. 그의 계급적 위치는 나보다 더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재명의 욕설을 이해하고 고귀한 저들은 이재명의 욕설을 용납하지 못한다. 심지어 전후맥락과도 상관없이.

 

다시 말하지만 내가 저들을 진보 앞에 굳이 자칭을 붙여 부르는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시드 비셔스는 개새끼였던 것인가. 어려서부터 마약에 중독되어 끝내 마약중독자로써 죽고 있었다. 알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쇠고기 대신 삼치를 먹는 것도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이다. 당시 나는 라면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다.

 

자칭 진보에게 사회적 약자란 없다. 소외된 소수자란 존재치 않는다. 추잡하고 비루하고 천박하며 사악한 그들의 언어란 그들에게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 진보일 수 없다. 저들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진보가 되느니 저들이 수구가 되는 것이 더 저들에게 정의롭다. 개새끼 씨팔놈이란 이유다. 자지를 뽑고 대가리를 쪼개버린다. 부모 보지를 찢고 나온 개자지가 구더기 호로잡새끼들인 것인가. 아직 욕은 넉넉하다. 진보란 없다는 이유다.

20세기 초까지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은 차라리 전쟁을 바랐었다. 적을 죽이고 적의 물건을 빼앗을 수 있었다. 민간인 여자를 강간하고 마음껏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기회였다.

 

차라리 40대 꼰대들이 전쟁으로 죽어 나자빠졌으면. 나를 대신해 좋은 직장에 취업한 30대 선배들, 혹은 20대 동년배들이 전쟁을 통해 시체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의 열등감과 분노를 해소하고, 아쉬운 성욕은 강간으로 푼다. 그리고 약탈을 통해 부를 쌓을 수 있다면 전쟁이 끝난 다음은 자신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윤석열이 전쟁을 공약했음에도 20대, 특히 가장 먼저 전장으로 끌려갈 남성들이 지지를 멈추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도 비슷하게 사상이 의심스러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했으며 적이라 여겨지는 여성들을 강간하며 전장의 피로와 공포를 달랬었다. 노략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다. 여성을 강간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무고한 사람을 죽여 자신의 분노를 해소한다.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전쟁 이상의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죽이고 빼앗고 강간하겠다. 그를 통해 현실의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겠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건 그런 의미인 것이다. 죽어도 상관없다. 전쟁이 총알받이로 끌려가도 아랑곳않겠다. 내가 싫은 그놈들만 뒈질 수 있다면. 그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강간하며 약탈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 20대 남성들의 좌절과 절망과 공포를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일 것이다.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 내가 파괴되어도 상관없다. 그렇더라도 모두를 파괴하고 죽이겠다.

 

인간의 적나라한 본모습인 것이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역사에 이미 등장했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지하겠다. 당장 내가 죽더라도. 내가 뒈지더라도. 너만 죽일 수 있다면.

 

어째서 한국 20대 남성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 부모의 문제고 그들을 가르친 선생의 문제일 것이다. 언론과 지식인과 이 사회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나 역시 십분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20대 시절 나 역시 전쟁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파괴는 기회다. 파멸은 희망이다. 절망의 끝에서 사람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무서운 것이다. 저들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끔찍하다.

19세기, 여성을 존중하는 기사도와 신사도가 남아 있던 영국에서는 그러나 많은 남성들이 자기 아내의 목을 새끼줄로 묶어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여성은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지만 아내란 돈받고 팔 수 있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기사도가 존재하던 중세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면서 자신이 섬기는 귀부인에게 명예를 마치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폭력을 휘둘러 다스릴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성들에게는 모든 경의와 존중을 바치고 있었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고 다 같은 존재는 아닌 것이다. 아마 이번 정부 들어 거둔 또 하나 성과일 것이다. 지방지 기자들이 당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름없는 평범한 여성들이 당한 성폭력 또한 전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익숙하다. 1980년대까지 여성주의란 배운 것 많고 가진 것 많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여성들은 항상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어렸을 적 항상 주위에 가득하던 공순이라 불리던 공장노동자들일 것이다. 혹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아가씨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여성주의자들도 여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들까지 함께 말하는 적이 없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서비스업은 서비스업이다. 그와는 구분되는 학력있고 학벌있는 그럴 가치가 없는 여성들을 위한 여성주의는 따로 존재한다.

 

문재인 정부의 성과다. 문재인 자신의 역량이라기보다 문재인 정부의 존재로 인해 여성주의자들 스스로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결과인 것이다. 여성노동자가 주 52시간 이상 노동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 어머니로써 자식들에 대해 모성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관심이 엇다. 비정규직 아나운서야 관심의 대상 밖이다. 주류에서 밀려난 여성검사는 오히려 비난과 조롱의 대상일 수 있다. 미투의 포문을 연 서지현 검사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조롱과 비난을 기억한다. 반면 김건희에 대해서는 김지은을 모욕하고 조롱하는데도 철저히 침묵한다. 어째서이겠는가?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여성이란 여성노동자가 아니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장에서 미싱을 돌려야 했던 이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권인숙도 당시 여성주의자들에게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권인숙이 씨발쌍년이라는 이유다. 그 잘난 여성주의자들이 경찰의 편에서 외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편들어주었던 것이 당시 박원순 변호사였었다. 그런데 배신했다. 자신을 외면했던 여성주의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 박원순을 저버렸다. 전두환이 뒈지지 않았다면 그 앞에서 무릎꿇고 용서를 빌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다. 그 개씨발잡쌍년은 인간으로서 여성이 아니다. 그저 기득권에 편입하고 싶은 버러지쌍년에 지나지 않는다. 권인숙 공천 잘했다며 좋아한 내가 얼마나 병신인지.

 

여성이라고 다 같지 않다. 전근대라고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종친에 대해서는 고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같은 여성이라도 사대부 여성과 백정의 여성은 그 대우가 다르다.

 

여성에 대한 묘사가 오히려 신선할 정도로 남다른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며 떠올리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나의 아저씨'에 대해서는 그리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사실 내가 '나의 아저씨'에 대해 처음 안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씨발버러지쌍년들이 하는 똥파먹는 소리는 들을 가치가 없다.

 

여성주의는 가짜다. 거짓말이다. 내가 '페미니즘'을 굳이 여성주의로만 한정지어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도 사실상 없다. 개잡호로쌍년들에게 정의란 존재치 않는다. 욕도 관대하다.

몇 년 전 방영한 드라마 '녹두꽃'에 황석주라는 이름의 향반이 등장했었다. 처음 녹두라 불리던 전봉준과도 교류하고,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에도 협력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도 제법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결국 반란의 수괴로 고문을 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동생 황명심을 신분이 낮은 백이현과 혼인시켜야 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리자 바로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수모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황석주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부분이라 해봐야 거의 또다른 주인공이던 이현과 관계된 내용들에서였다. 대부분은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고, 왕실을 생각하고, 백성도 생각할 줄 아는 보수적이지만 그래도 강직하고 개념도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드라마가 처음 시작되고, 그리고 의병이 되어 당당히 목숨을 잃는 장면만 보았다면 오히려 황석주의야 말로 당대의 양심과 기개를 대변하는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 아니 유럽 전역에서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봉건적 신분질서의 모순과 종교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배후에는 다름아닌 그 타도의 대상이었어야 할 귀족들이 있었다. 이 또한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입으로 떠들고 글로 써봐야 자신의 실제 권력에 조금의 상처도 낼 수 없는 무력한 글쟁이들을 후원함으로써 자신의 지성과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었다. 때로 그들이 쓰는 반체제적인 글들을 상대정파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도 자신의 후원을 받던 이들이 선을 넘거나 하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요즘 윤석열과 관련해서 보면 차라리 변희재나 정규재가 더 진보적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나마 변희재 정도나 윤석열이 주장하는 내용들의 모순과 김건희와 관련한 의혹들이 가지는 부당성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잘난 자칭진보는 어떨까? 김건희가 대놓고 김지은씨를 모욕했는데도 그에 대한 비판 한 마디 새어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120시간 노동이니 최저임금제 폐지니 노동자의 인권과 관련한 주장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과 탈원전백지화를 주장했을 때도 저들은 철저히 침묵할 뿐이었다. 이 모든 건 조국 때문이다. 조국을 때려잡자. 대한민국의 진보란 결국 조국 하나다.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었다. 그래서 자칭진보였다.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 행동만 놓고 보면 저들은 단 한 번도 진보인 적이 없었다. 저들이 도대체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했었는가? 최저임금 1만원 안됐다고 8000원으로 올리는 것을 반대하는 수준인 것이다. 40시간 근로와 전사업장 적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52시간 근로제도 반대했었다. 더 강화된 법안이 아니기에 그나마 중대재해법도 반대하고 있었다. 대체휴일 근로는 어떨까? 그러니 윤석열이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는, 아니 심지어 저들이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있는 여성주의에 반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음에도 비판 한 마디 못하는 것이다.

 

이준석이 그것을 아는 것이다. 자칭 진보는 아무것도 없다. 여성주의란 그냥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부 폐지한다고 해도 영향받을 것은 없다. 여성을 강제징집해서 공창을 만든다고 해도 저들은 감히 국민의힘을 비판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그런다고 정작 권력있고 돈있고 명성있는 집안의 여자들이 그 대상이 될 리는 없으니. 기자들도 분명 그 대상에서 예외가 될 것이다. 약자인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과 여자는 달라야 한다. 하물며 계집은 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전에없이 극단적인 극우적인 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윤석열을 보면서도 비판 한 마디 없이 오로지 이재명만 물어뜯으려는 자칭 진보를 보면서 과연 저들이 그동안 주장해 온 진보의 가치란 무엇이었는가.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아니 그냥 이재명만 아니면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자칭 진보의 모습이란 것이다. 아마 모두 알지 않았을까. 심상정의 지지율의 이유다. 당연한 결과다.

새삼 확인하는 사실이다. 자칭 진보는 가짜다. 자칭 여성주의는 거짓말이다.

 

김학의가 최종적으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자칭 진보나 자칭 여성주의자 가운데 이 부분을 문제삼는 놈들이 하나라도 있던가.

 

정의당은 이미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절차가 부당했다며 국정감사에서 시비건 적이 있었다. 한겨레는 역시 검찰이 무혐의 결론을 냈는데 억지로 수사하고 출국금지시켰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하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며 공개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다.

 

이성윤은 김학의를 수사했으므로 중앙고검장 자격이 없다. 정의당의 공식입장이었다. 이성윤이 김학의를 수사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는데 기소된 내용이 아닌 기소사실만 집중한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MBC  단 하나였다. 그토록 진보와 여성주의를 주장하던 지식인, 언론 어느 것 하나 김학의의 무혐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는 명확하다. 그런데 자칭 진보와 자칭 여성주의가 오히려 김학의의 편에서 수사한 검사와 지시한 정부를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여성이란 남성의 도구다. 남성의 트로피다. 그러므로 여성의 지위란 남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아버지이거나, 배우자이거나, 혹은 자식이거나.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의 사회적 지위에 맞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근대사회에서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기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귀부인의 명예였지 하층민 여성의 명예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기사도, 신사도란 귀부인을 향한 서구 상류층의 상식이었다.

 

법과 정의와 상식과 윤리는 오로지 그럴 자격을 가진 자들만을 보호한다. 오래전 여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몸을 팔기도 했었다. 자신의 정조마저 내놓은 채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혹사해야 했었다. 그러면 지금 여성주의는 누구를 위한 여성주의인가? 지금 진보가 추구하는 여성주의란 무엇을 위한 여성주의인가?

 

김학의의 피해자가 불쌍한 이유인 것이다. 하다못해 김학의가 감히 기득권을 위협하는 민주당 나부랭이였다면 이런 취급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피해자가 있는 집 자식이거나 마누라거나 어머니였다면 어땠을까?

 

검찰이 그렇다고 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법원이 판결했으니 그 자체로 사실이고 진실이 된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은 조동연씨로 하여금 성폭행 사실을 자백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한다. 여성주의는 가짜다. 자칭 진보는 거짓말이다. 윤석열이 입증해 준다. 김건희가 증명해 보여준다. 저들은 단지 유희로써 진보와 여성주의를 말할 뿐.

 

벌써 한참전에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자칭 진보가 상대의 학력을 문제삼았다. 학벌을 비웃었다. 경제상태를 조롱했다. 자기는 삼치 먹는데 그마저도 못먹는 버러지들이다. 지금도 자칭 진보 가운데 이름이 거론되는 네임드가 올린 포스트의 내용이었다.

 

오래전 진보란 지식인들의 유희였다. 지식인이란 곧 교육의 기회를 독점한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다르지 않다. 진중권과 심상정이 손잡은 이유다. 그냥 웃게 된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단 하나 진실이다.

내가 전부터 말했었다. 송영길 잘하고 있다고. 송영길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소소하다. 소소하게 속물이고 소소하게 사명감있고, 소소하게 사익을 챙기면서 소소하게 권력의지가 강하다.

 

한 마디로 상식적인 선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알면 한다.

 

중요한 한 마디였다. 자기부터 불출마하겠다. 기성 중진들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

 

물론 불출마가 정계은퇴는 아닐 것이다. 정치를 국회의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꿈을 꾸려면 국회의원도 밟고 지나갈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확실해졌다. 송영길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를 위해서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만들 필요를 느끼고 있다. 우상호야 전부터 그런 의지를 내비치고 있었을 테고.

 

국민의힘이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이건 좀 크게 먹힐 것 같다.

 

아무튼 결국 메시지는 하나다. 우리 이렇게 내려놓고 바꿀테니 지지자들은 돌아와 달라. 이재명을 중심으로 뭉쳐달라.

 

더불어 지금까지 손놓고 있던 이낙연계에 대한 압박이기도 하다. 이런데도 뒤로 빠져만 있을 것인가.

 

어째서 민주주의는 평범한 다중의 정치체제인가. 때로 송영길이 문재인보다도 더 대중에겐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낙연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더 잘하라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당연하게.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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