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방영한 드라마 '녹두꽃'에 황석주라는 이름의 향반이 등장했었다. 처음 녹두라 불리던 전봉준과도 교류하고,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에도 협력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도 제법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결국 반란의 수괴로 고문을 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동생 황명심을 신분이 낮은 백이현과 혼인시켜야 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리자 바로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수모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황석주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부분이라 해봐야 거의 또다른 주인공이던 이현과 관계된 내용들에서였다. 대부분은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고, 왕실을 생각하고, 백성도 생각할 줄 아는 보수적이지만 그래도 강직하고 개념도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드라마가 처음 시작되고, 그리고 의병이 되어 당당히 목숨을 잃는 장면만 보았다면 오히려 황석주의야 말로 당대의 양심과 기개를 대변하는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 아니 유럽 전역에서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봉건적 신분질서의 모순과 종교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배후에는 다름아닌 그 타도의 대상이었어야 할 귀족들이 있었다. 이 또한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입으로 떠들고 글로 써봐야 자신의 실제 권력에 조금의 상처도 낼 수 없는 무력한 글쟁이들을 후원함으로써 자신의 지성과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었다. 때로 그들이 쓰는 반체제적인 글들을 상대정파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도 자신의 후원을 받던 이들이 선을 넘거나 하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요즘 윤석열과 관련해서 보면 차라리 변희재나 정규재가 더 진보적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나마 변희재 정도나 윤석열이 주장하는 내용들의 모순과 김건희와 관련한 의혹들이 가지는 부당성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잘난 자칭진보는 어떨까? 김건희가 대놓고 김지은씨를 모욕했는데도 그에 대한 비판 한 마디 새어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120시간 노동이니 최저임금제 폐지니 노동자의 인권과 관련한 주장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과 탈원전백지화를 주장했을 때도 저들은 철저히 침묵할 뿐이었다. 이 모든 건 조국 때문이다. 조국을 때려잡자. 대한민국의 진보란 결국 조국 하나다.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었다. 그래서 자칭진보였다.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 행동만 놓고 보면 저들은 단 한 번도 진보인 적이 없었다. 저들이 도대체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했었는가? 최저임금 1만원 안됐다고 8000원으로 올리는 것을 반대하는 수준인 것이다. 40시간 근로와 전사업장 적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52시간 근로제도 반대했었다. 더 강화된 법안이 아니기에 그나마 중대재해법도 반대하고 있었다. 대체휴일 근로는 어떨까? 그러니 윤석열이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는, 아니 심지어 저들이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있는 여성주의에 반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음에도 비판 한 마디 못하는 것이다.

 

이준석이 그것을 아는 것이다. 자칭 진보는 아무것도 없다. 여성주의란 그냥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부 폐지한다고 해도 영향받을 것은 없다. 여성을 강제징집해서 공창을 만든다고 해도 저들은 감히 국민의힘을 비판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그런다고 정작 권력있고 돈있고 명성있는 집안의 여자들이 그 대상이 될 리는 없으니. 기자들도 분명 그 대상에서 예외가 될 것이다. 약자인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과 여자는 달라야 한다. 하물며 계집은 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전에없이 극단적인 극우적인 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윤석열을 보면서도 비판 한 마디 없이 오로지 이재명만 물어뜯으려는 자칭 진보를 보면서 과연 저들이 그동안 주장해 온 진보의 가치란 무엇이었는가.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아니 그냥 이재명만 아니면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자칭 진보의 모습이란 것이다. 아마 모두 알지 않았을까. 심상정의 지지율의 이유다.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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