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여성을 존중하는 기사도와 신사도가 남아 있던 영국에서는 그러나 많은 남성들이 자기 아내의 목을 새끼줄로 묶어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여성은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지만 아내란 돈받고 팔 수 있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기사도가 존재하던 중세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면서 자신이 섬기는 귀부인에게 명예를 마치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폭력을 휘둘러 다스릴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성들에게는 모든 경의와 존중을 바치고 있었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고 다 같은 존재는 아닌 것이다. 아마 이번 정부 들어 거둔 또 하나 성과일 것이다. 지방지 기자들이 당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름없는 평범한 여성들이 당한 성폭력 또한 전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익숙하다. 1980년대까지 여성주의란 배운 것 많고 가진 것 많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여성들은 항상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어렸을 적 항상 주위에 가득하던 공순이라 불리던 공장노동자들일 것이다. 혹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아가씨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여성주의자들도 여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들까지 함께 말하는 적이 없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서비스업은 서비스업이다. 그와는 구분되는 학력있고 학벌있는 그럴 가치가 없는 여성들을 위한 여성주의는 따로 존재한다.

 

문재인 정부의 성과다. 문재인 자신의 역량이라기보다 문재인 정부의 존재로 인해 여성주의자들 스스로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결과인 것이다. 여성노동자가 주 52시간 이상 노동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 어머니로써 자식들에 대해 모성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관심이 엇다. 비정규직 아나운서야 관심의 대상 밖이다. 주류에서 밀려난 여성검사는 오히려 비난과 조롱의 대상일 수 있다. 미투의 포문을 연 서지현 검사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조롱과 비난을 기억한다. 반면 김건희에 대해서는 김지은을 모욕하고 조롱하는데도 철저히 침묵한다. 어째서이겠는가?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여성이란 여성노동자가 아니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장에서 미싱을 돌려야 했던 이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권인숙도 당시 여성주의자들에게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권인숙이 씨발쌍년이라는 이유다. 그 잘난 여성주의자들이 경찰의 편에서 외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편들어주었던 것이 당시 박원순 변호사였었다. 그런데 배신했다. 자신을 외면했던 여성주의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 박원순을 저버렸다. 전두환이 뒈지지 않았다면 그 앞에서 무릎꿇고 용서를 빌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다. 그 개씨발잡쌍년은 인간으로서 여성이 아니다. 그저 기득권에 편입하고 싶은 버러지쌍년에 지나지 않는다. 권인숙 공천 잘했다며 좋아한 내가 얼마나 병신인지.

 

여성이라고 다 같지 않다. 전근대라고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종친에 대해서는 고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같은 여성이라도 사대부 여성과 백정의 여성은 그 대우가 다르다.

 

여성에 대한 묘사가 오히려 신선할 정도로 남다른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며 떠올리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나의 아저씨'에 대해서는 그리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사실 내가 '나의 아저씨'에 대해 처음 안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씨발버러지쌍년들이 하는 똥파먹는 소리는 들을 가치가 없다.

 

여성주의는 가짜다. 거짓말이다. 내가 '페미니즘'을 굳이 여성주의로만 한정지어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도 사실상 없다. 개잡호로쌍년들에게 정의란 존재치 않는다. 욕도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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