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까지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은 차라리 전쟁을 바랐었다. 적을 죽이고 적의 물건을 빼앗을 수 있었다. 민간인 여자를 강간하고 마음껏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기회였다.

 

차라리 40대 꼰대들이 전쟁으로 죽어 나자빠졌으면. 나를 대신해 좋은 직장에 취업한 30대 선배들, 혹은 20대 동년배들이 전쟁을 통해 시체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의 열등감과 분노를 해소하고, 아쉬운 성욕은 강간으로 푼다. 그리고 약탈을 통해 부를 쌓을 수 있다면 전쟁이 끝난 다음은 자신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윤석열이 전쟁을 공약했음에도 20대, 특히 가장 먼저 전장으로 끌려갈 남성들이 지지를 멈추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도 비슷하게 사상이 의심스러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했으며 적이라 여겨지는 여성들을 강간하며 전장의 피로와 공포를 달랬었다. 노략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다. 여성을 강간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무고한 사람을 죽여 자신의 분노를 해소한다.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전쟁 이상의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죽이고 빼앗고 강간하겠다. 그를 통해 현실의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겠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건 그런 의미인 것이다. 죽어도 상관없다. 전쟁이 총알받이로 끌려가도 아랑곳않겠다. 내가 싫은 그놈들만 뒈질 수 있다면. 그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강간하며 약탈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 20대 남성들의 좌절과 절망과 공포를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일 것이다.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 내가 파괴되어도 상관없다. 그렇더라도 모두를 파괴하고 죽이겠다.

 

인간의 적나라한 본모습인 것이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역사에 이미 등장했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지하겠다. 당장 내가 죽더라도. 내가 뒈지더라도. 너만 죽일 수 있다면.

 

어째서 한국 20대 남성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 부모의 문제고 그들을 가르친 선생의 문제일 것이다. 언론과 지식인과 이 사회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나 역시 십분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20대 시절 나 역시 전쟁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파괴는 기회다. 파멸은 희망이다. 절망의 끝에서 사람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무서운 것이다. 저들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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