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근대 이전까지 국민이란 - 아니 국민이라는 말도 근대의 산물일 테니 백성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 백성이란 단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 나라와 지배자 자신의 운명을 믿고 맡길만한 동반자나 심지어 동지는 결코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징집이라는 자체도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라 할 수 있었다. 백성을 징집해서 군대를 꾸리기보다 자신으로부터 직접 급여를 받는 용병을 더 선호했다. 내가 급여를 지급하는 한 용병은 언제나 자신의 군대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민국가의 개념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징집된 병사들이란 더이상 믿을 수 없는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 불과한 백성이 아니었다. 국가와 공동운명체였고, 국가의 운명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 동반자였다. 더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징집된 병사들이란 국민이었으며 국가의 주권자였다. 굳이 가두고 감시하고 통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나설 것을 전제하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 국가란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지키려 애쓰는 국가다. 그렇게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설득해야만 한다.


구일본제국은 출발부터 강제와 억압을 통해 뿔뿔이 흩어진 각 번의 백성들을 통합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천황의 존재 역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상 독립국가의 연합체와 같은 상태였었다. 그것을 억지로 일본과 천황이라는 개념을 주입시켜 일본의 신민으로 만든 것이었다. 정작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이 천황의 충실한 신민인 일본인들을 믿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오로지 강제와 억압으로만, 폭력과 형벌로만 유지되는 군이란 바로 여기서 출발하고 있었다. 억지로 때려서라도 군인을 만들어야 한다. 온갖 폭행과 욕설과 모욕과 가혹행위들로 철저히 길들여 제대로 된 군인을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된 군인이란 상급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줄 아는 군인이다.


똑똑한 군인을 싫어했다. 많이 배우고, 또 보고 들은 것도 많은 도시출신들을 싫어했다. 그 전통은 한국군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불과 90년대까지도 한국군 지휘관 가운데는 대학출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똑똑해서 말만 많고 시키는대로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로지 높은 곳에 있는 정부의 고위관료와 군의 지휘관들이 도맡아 한다. 일선의 사병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2차세계대전 당시, 아니 그 전부터도 일본군 가운데 지휘체계가 와해될 경우 덩달아 군기는 물론 인성마저 와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군의 사병들에 대한 - 아니 장교들에 대해서까지 억압과 폭력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


그런 구일본제국군을 계승한 것이 바로 해방이후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부 가운데 상당수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이들이었다. 1948년 수립된 정부의 수뇌부와 그들의 손발이었던 경찰들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인민들을 배신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었던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지배층과 지휘층이 조선의 일반대중과 유리되어 있었다.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억악하고 강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살인과 방화, 학살, 약탈 역시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수단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조선놈들은 그저 패야 말을 듣는다고.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한두사람 쯤 죽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그것이 최근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였다.


군이 사병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다. 군에 있어 사병들이란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지도 용기도 없는 타자들이다. 주권자로서 나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사명감도 가지지 못하는 외인에 불과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 뿐이다. 나라를 지키려 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들 뿐이다. 자신들의 나라만이 나라다. 군사독재의 전통은 유구하도록 그렇게 군을 통해 계승되어 왔다. 사병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보다 아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충분히 고민하고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 또한 주지 않는다. 굴리고 다그친다. 때리고 윽박지른다. 그래야 군은 제대로 돌아간다.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은 단지 자신들이 결정한대로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군이라는 특성상 물론 어느 정토 억압과 통제는 필수적이다. 군의 단합을 위해서라도 일정기간 병영에 머물며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과가 끝난 뒤에도 모든 일상들마저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정해진 일과가 없는 날에조차 모든 일상의 행위들을 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결정한다. 자신의 나라다. 단지 그들의 나라일 뿐이다. 한국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애국심이라 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관념적으로는 나라를 위하는데 실제 자기가 손해보면서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려는 의식은 부족하다. 아니 국가라고 하는 인식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다. 국가와 자신과의 관계를 단지 정권과, 혹은 권력자와 자신과의 일대일 인정의 관계로 인식한다. 국가라는 보편적인 세계가 아닌, 국민이라는 보편적인 관계가 아닌, 특수한 인정의 관계로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명령에는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부당한 이익 역시 정당화한다. 나라에 해를 끼치면서도 정작 위에서 아뭇소리 없으면 그것으로도 옳다.


국가가 먼저 국민을 존중해야 한다. 군이 먼저 병사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 스스로가 나라와 군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굳이 억지로 다그치고 몰아세우지 않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나라와 군을 지키려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그다지 필요없는 비용이다.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억지로 휴일까지 병영에 잡아두고 무언가를 강요하기 위한 비용이란 오히려 낭비에 가깝다. 해소되지 않은 불만과 동요가 결국 수많은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며 군에 대한 인식은 물론 군의 사기와 전투력마저 떨어뜨리고 있다. 그것을 또 관리하겠다고 비용과 노력을 낭비한다. 


차라리 모병제가 나을 수 있다 여기는 이유다. 최소한 200만원 300만원 월급을 주며 부린다면 사람 중한 줄은 알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병이 부족해서 인력난에 허덕인다면 더이상 병사들에 지불해야 할 비용을 아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비용을 들이면서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길 것이다. 병사는 공짜가 아니다. 국민 역시 공짜가 아니다. 공짜가 아닌데 공짜로 부리려 하니 그를 위해 또 엉뚱한 비용이 소모된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병영내 징집된 병사들에 대한 인간적인 예우와 환경의 개선. 충분히 대가를 치루고 대우하면서 소중하게 그들을 대해야 한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재량을 허용하며 그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을 믿지 못하는 국가가 어찌 유지될 수 있을까? 병사들을 믿지 못하면서 어찌 군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가장 크게 낭비되는 부분이다. 국민을 믿지 못한다. 병사들을 믿지 않는다. 아예 않으려 한다. 한심하다.

사실 진심어린 조언이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저 툭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서는 것은 걱정도 충고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런 번거로운 짓들을 사람들은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거라도 실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이 대단 존재라 여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로 인해 상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어떻게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악플을 다는 심리도 그와 비슷하다. 아니 대부분 오로지 상대를 걱정하고 사회의 정의와 미래를 생각해서 굳이 그런 리플들을 달려는 것이니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상대가 반박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즐긴다. 어쩔 줄 몰라하며 위축되는 모습을 즐긴다. 우월감이다. 그만큼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곤란해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가운데 상대의 주위를 이용해서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걱정해서가 아니다. 함께 고민해주는 것도 아니다. 가학성이다.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다.


과연 명절이라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는 사람들치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던가. 다만 얼마라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던가, 아니면 취업에 도움이 되도록 자기가 먼저 발벗고 힘써주던가, 재미있는 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굳이 말로 이래라 저래라 다그치는 경우가 그리 없다는 점이다. 정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럴 능력이 된다면 나서서 도와줄 뿐 되도 않는 말로 위세를 떨려 하지 않는다. 말 많은 것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해 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리어 탓을 한다. 너 때문이다. 네가 문제다. 명분쌓기이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걱정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조언도 해주었는데. 그러므로 더이상 내가 너를 도울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어설프게 아는 친척들이 그래서 더 짜증나고 불쾌하다.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거나. 진짜 가까운 사이라면 말 한 마디도 쉽게 내뱉지 않으려 한다. 명절이라고 어중이떠중이 다 모이는 탓이다. 오지랖의 이유다.

조선의 경제가 무려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크게 발전하지 못한 첫째 이유로 나의 경우 노비를 꼽는다. 이미 같은 시대 명과 일본에는 인신이 구속된 채 공짜로 부려지는 노예와 같은 존재는 공식적으로 사라진 뒤였다. 신분적으로는 예속되었지만 기본적인 급여 정도는 지급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예속인을 부려 누리는 지배층의 사치는 곧 예속된 하층민들의 경제활동을 의미했다.


조선이 노비제를 폐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노동력이 유일한 수단이던 전근대사회에서 지배신분이 사치를 누리려 하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사실 그것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그래서 농노가 있었다. 엄격히 주거와 직업, 여행의 자유가 통제되는 영민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그를 이용해 부를 만들고 일상의 사치를 유지하는가, 그것이 바로 가진 바 권력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전근대 일본사회에서 봉건영주가 누리는 권력을 측정하는 단위인 석고(고쿠)도 그것을 뜻했다. 고쿠란 자신이 소유한 영지에서 나오는 생산량이고, 생산량은 곧 그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뜻한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만한 사람들이 복종하며 일하고 있다.


조선과 이들 나라들과의 차이는 단 하나다. 일정한 영지를 항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가, 아닌가. 중세의 유럽, 혹은 근세의 동유럽의 농노들이나 일본의 농민들은 사람이 아닌 땅에 예속되었다. 오다의 소유가 아니라 오와리 영주의 소유였다. 누군가 사이토를 몰아내고 기후성을 차지한다면 마찬가지로 미노의 농민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곧 토지에 예속된 노동력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모든 토지를 국왕의 소유로 간주했던 조선에서 지배층의 토지소유란 매우 불안정한 한시적 권리에 불과했다. 특히 조선초기 과전법은 지배층의 토지소유를 한정시키고 있었다. 더욱 노동력을 직접 자기 개인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토지의 소유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노비는 언제나 지배층 가문의 소유여야 했다.


문제는 그런 결과 생산에 종사해야 할 노동력을 따로 불러 부리는 것을 비용으로 인식했던 다른 문화권에 비해 직접적으로 예속된 노동력을 공짜로 여기는 인식이 강해졌다는 것일 게다. 노동력은 영지에 속해 있으니 따라서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그들을 불러 부리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그것부터 생산의 감소라는 비용으로 지불된다. 그에 비해 사람만을 소유한다. 사람만을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부린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신분에 따른 일방적인 권력관계와 명령 뿐이다. 더이상의 어떤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고 않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어째서 조선은 후기까지 제대로 화폐도 유통되지 않고 상공업 역시 정체되어 있었는가. 돈을 벌고 쓰는 주체들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한 조선후기만 해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유민들이 임금노동자로 편입되며 도시경제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일을 해서 임금을 받고 다시 그 임금을 생활을 위한 소비에 쓴다. 임금노동자들이 쓰는 그 돈을 바라고 새로운 노동력이 유입되며 다양한 직업이 생겨나고 물자의 유통 역시 활발해진다.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나온다. 바로 그런 변화가 이미 한참 더 전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귀족의 시중을 드는 하녀나 하인들마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자였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마저 얼마간의 대가를 받고서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번 돈은 바로 시장에서 쓰여졌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과정에 그들이 번 돈이 쓰여지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음식을 팔고, 혹은 옷을 팔고, 혹은 노동력을 제공하며 또다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노비들은 조선경제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생산에는 종사했다. 양반들의 땅을 경장하여 생산을 하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조선의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재화를 주고받을 일 자체가 드문데 화폐를 유통하려 한다고 실제 그것을 가져다 쓸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도시화란 결국 임금노동자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한 신분들이 많이 살아서 화려한 건물이 빼곡하다고 도시화가 잘되었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시화란 시장화다. 시장이란 실제 재화가 유통되는 공간이다. 자신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재화를 필요한 물품으로 바꾸어가는 공간이다. 수입이 있어야 한다. 수입이 없는데 소비란 있을 수 없다. 자급자족이란 생산을 있는 그대로 소모하는 원시경제와 같은 말이다.


아마 조선의 노비제와 경제에 대해 비판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서 노동력을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 노동력은 단지 지배층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일방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노동력이 생산으로 경제활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을까? 소득이 없이는 소비도 없다. 너무나 당연한 전제이며 결론인 것을.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어려서 들었던 속담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


그런데 감이든 배든 원래 제사상에 올라가는 것 아니었던가. 역시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홍동백서 좌포우혜 두동미서 조율시이...


그 진짜 뜻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원래 제사에는 감이든 배든 대추든 올리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인근에서 제철에 나는 것들 가운데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거나 모두가 맛있거나 혹은 귀하다 여기는 것들로 정성껏 조리해서 제사상에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마다 집안마다 제사지내는 방식도 달랐다. 올리는 제수들도 달랐다. 그래서 가가례다. 집안마다 다르다 해서 가가례인 것이다. 그런데 남의 집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감놔라 배놔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즉 지금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따지는 자체가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짓 그 자체라는 뜻이다. 피자도 안되고, 바나나도 안되고, 그런데 정작 산적에는 햄이며 맛살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가 말이다. 무슨 상관인가.


가장 바보같은 짓거리일 터다. 제사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근본이 없으니 남이 하는 것만 열심히 살펴서 따르려 한다.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니까. 예란 원래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 것은 당시에는 조상을 공경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각자의 처지나 사정에 따라 그에 맞게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래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근대가 왜곡되어 버린 탓이다. 원래는 우리 스스로 극복했어야 하는 전근대였는데 일제가 중간에 끼어들며 전근대란 민족을 뜻하게 되고 말았다. 만들어진 전통을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한다. 여전히. 아직까지도.


감이든 배든 자기들 사정에 따라 놓는 것이다. 오지랖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확실히 최근 메갈을 핑계로 여성과 관련한 어떤 주장도 의견도 실제 사례도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주장을 하려 하면 바로 메갈이라는 낙인부터 찍는다. 메갈리아와 관계있을 것이기 때문에 네 말을 듣지 않겠다. 원래 이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여성의 권리신장이란 남성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실 바로 이 지점이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강경한 여성주의자들과 남성들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양보해 줬기에 여성들의 권리와 지위가 지금처럼 높아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과연 그것이 남성들이 진정으로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동의했기에 그리했던 것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사실상 아직까지 여성의 사회적 지휘와 권리의 신장은 남성의 허락 아래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가 납득하지도 동의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래야 하니까. 그러는 것이 옳다니까. 아니면 틀리다 말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강요당하는 것이 있었다. 선진국은 그렇게 한다니까 어쩐지 그래야만 대한민국도 선진국이 되는 것 같다. 똑똑하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은 그같은 주장들에 동의하고 있다고 하니 자신도 마치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약간은 허영심이다.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는 소심함도 있다. 하지만 불만은 남는다. 어째서 자신의 권리를 나누어 여성들에게 주는 것인가.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고 현실이 그러니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한 마디 말이라도 잘못했다가는 집중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무지하고 무식한 구닥다리로 매도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해 이해하는 것처럼.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해 동의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째서 여성과 여성주의는 내가 바라는대로가 아닌 것일까. 나는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주의에 동의하는데 어째서 내가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일까. 


그리고 사단이 일어났다. 일부 과격한 여성주의자들이 메갈과 워마드 같은 극단적인 여성사이트와 결합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명분을 잃었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것은 그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틈이었다. 여성주의는 별 것 없다. 여성도 별 것 없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진다. 그동안의 불만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성들이, 여성주의자들이 잘못되었다. 진짜 여성주의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여성주의다.


여성주의에는 이런 여성주의도 저런 여성주의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공산주의라고 하나가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이론과 논리가 존재하고 항상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하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도 없던 여성주의다. 현실에 실재하는 여성주의가 아닌 관념으로 이상화한 여성주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남성이 이야기하는 남성을 위한 여성주의여야 한다. 여성주의마저 자신들이 소유하려 한다.


문제는 뭐냐면 그동안 사회적으로 남성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합의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어째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노력해야 하는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대학만 좋은 곳에 가면 된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여자친구도 마음대로 골라 사귈 수 있다. 부모들부터 문제다. 여성을 마치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처럼 이야기해 놨으니 제대로 된 여성관이 자리잡을 리 만무하다. 자신을 위한 보상이며 대상이다. 그리고 사회는 남성들과 상관없이 멋대로 여성주의를 현실로 옮겨 놓고 있었다. 남성들이 소외되고 있었다.


남성의 소외는 남녀평등과 별개의 문제다. 사회적인 평등과 별개로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들보다 높지만, 남녀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분노와 불만은 누적된다. 기회를 보아 터져나온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한 세대도 아직 다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지위는 빠르게 신장되었지만 그러나 남성의 의식까지 함께 성장하고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그 부조리가 메갈리아라는 틈을 비집고 현실로 터져 나온다. 남성에게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이면 마치 발작이라도 하듯 거부반응을 보인다. 더이상은 그대로 당하지 않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작 사회적으로 대화와 합의를 주도하고 이끌어야 할 지식인들, 정치인들, 언론인들의 무관심과 방기가 만들어낸 반동에 가까운 것이다. 여성들 자신조차 남녀평등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적도 토론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여성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것이 과연 여성주의인가 고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신의 분노부터 다스려야 한다. 분노가 지나치면 증오가 된다. 증오는 답이 없다. 증오는 오로지 증오만을 생산한다.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냉정과 이성을 찾아야 한다. 물론 개소리다.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한참 더 싸우고 알아서 시들해질 때 쯤 진지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더 싸우고 질리도록 싸우고 나서야 힘이 빠지면 차근히 현실을 돌아볼 여유도 생길 것이다. 지금은 그냥 지나간다. 바람에 거스르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가끔 내가 왜 이 짓거리 하는가 의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계단 위에서 두 사람이 다투고 있다. 한 사람은 99계단이라 말한다. 한 사람은 100계단이라 말한다. 그러자 누군가 끼어들어 그러면 정확히 그 중간인 99.5계단으로 하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한다. 그래서 과연 세번째 사람은 극단을 배제하는 중용인 것인가.


워낙 좁은 땅덩이에 갇혀 산 탓인지 모른다. 결국 집 문만 나가면 죄다 친척이고, 친구이고, 아니면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이다. 살벌하게 괜히 얼굴 붉혀가며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렵다. 내일 또 볼 사람인데 작정하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곤란하다. 그래서 적당적당히. 싸우지 말고. 더구나 절대권력 앞에서 나머지란 거기서 거기라. 자기 놔두고 싸우는 것이 전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싸우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


하지만 정치란 원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린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가를 따진다. 무엇이 적당하고 무엇이 부적당한가를 다툰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장 나은 최선을 찾아간다. 논쟁하다 갑자기 상대를 사문난적이라며 몰아 죽이려 해서 문제지 싸우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간에 계단이 몇 계단인지 알려면 먼저 자기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르 밝힐 수 있어야 다음으로 진행이 가능하다. 싸우지도 않고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건 나쁘니까. 국민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싸우는 건 무조건 나쁘다. 싸우지 않는 자신들만 옳다. 99계단도 100계단도 모두 극단이니 99.5게단이면 딱 중용이고 중립이다. 가장 합리적이다. 그래서 그 99.5계단이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명확한 대안이 없다. 지향도 노선도 없다. 그냥 구호 뿐이다. 딱 듣기 좋은 말들만 가득하다. 그러면서 양극단을 비난한다. 정치에 관심없는 국민들 듣기에는 좋다. 어차피 정치인이란 그 놈이 그 놈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만을 키운다. 어떻게 해도 안철수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다.


싸우는 건 당연하다. 내가 옳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듣는다. 상대의 의견을 듣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지적한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오게 된다. 중용은 그 과정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기계적인 한가운데가 아니라. 웃는다.

사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굴복시키고 일약 천하인으로서 관백의 자리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전국시대 일본에서 가장 최대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모리가였다. 모리가 120만석에 분가나 다름없던 고바야카와 깃카와가 도합 50만석, 여기에 모리가를 맹주로 여기고 따르던 서국의 다이묘가 무려 10국에 이르고 있었다. 벌써 오다 노부나가가 죠라쿠에 성공하기 10년도 훨씬 전부터 그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정작 모리가는 단 한 번도 죠라쿠나 쇼군과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었다. 어째서?


하긴 당시 전국의 다이묘 가운데 천하일통이니 천하인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다이묘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가장 먼저 죠락쿠를 시도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조차 자기가 천하인이 되어 혼란스러운 전국의 일본을 통일하겠다는 야심보다는 그저 겐지의 일족으로서 유명무실해진 쿄의 쇼군을 대신하겠다는 단순한 욕심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케다나 호조와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을 등뒤에 두고도 감히 쿄로 전력을 다해 진군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죠라쿠에 성공해서 쇼군을 계승했다고 이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아우를 수 있었을까? 그냥 자기가 쇼군이 되고 모두가 인정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심지어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근대에조차 일본인에게 일본이라는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원래 아이즈인이었다. 그냥 사츠마 출신이었다. 쵸슈의 경계 밖은 한슈의 허락을 받아야만 겨우 나갈 수 있는 외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우리들끼리 걱정없이 잘 살면 된다. 실제 전국시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수많은 토착다이묘들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난세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굳이 다케다여야 할 필요도 없고, 굳이 아사쿠라가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오늘 사이토가 대세라면 사이토를 따르고, 내일 오다가가 대세라면 오다의 편에 선다. 만일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식들 가운데 나누어서 양쪽 편에 모두 서도록 만든다. 세키가하라 싸움 당시에도 사나다 가문의 당주 마사유키는 차남 유키무라와 함께 서군에 속해 있으면서 장남 노부유키는 동군에 합류하도록 했던 것도 그런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의 패권을 누가 가지든 사나다라는 성과 영자를 지킨다. 대부분의 다이묘에게 그것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았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도 다른 다이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군을 상대로 발악에 가까운 기습을 감행해서 무려 다이묘를 살해하는 위업을 이루기까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에서도 흔한 여러 다이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살해하고도 사이토 요시오카를 몰아내고 기후성을 차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다 노부나가도 천하에 대한 포부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만큼 미요시가 장악하고 있던 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고, 쿄까지 지나쳐야 하는 롯가쿠와 아사쿠라의 세력 역시 고만고만한 정도였다. 정작 강적이라 할 만한 다케다와 호조는 훗날 도쿠가와가 되는 마쓰다이라의 너머에, 그리고 우에스기는 다케다의 위에 버티고 있었다. 입지까지도 운이 따라주고 있었다. 요시타쓰의 급사와 요시오카의 어리석음은 오다 노부나가라는 군소영부에게 새로운 야망을 현실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죠라쿠에 성공해서 일왕까지 알현했음에도 정작 오다 노부나가 자신은 겐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것이야 말로 같은 시대 죠라쿠를 꿈꾸던 다른 많은 다이묘들과 오다 노부나가가 결정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겐지라면 얼마든지 쇼군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 자신의 실력만 보이면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얼마든지 쇼군의 계승을 인정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가 죠라쿠로 겨우 손에 넣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위의 다른 다이묘들을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노부나가를 포위하는 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때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넘겨야 했었다. 다른 겐지의 다이묘들과 달리 필사적으로 주위의 다이묘들을 제압하고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같은 이유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충실하게 이어받는다. 만일 이 두 사람이 아닌 겐지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던 이에야스가 처음부터 천하인이 되었다면 일본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처음부터 죠라쿠를 시도하고 쇼군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겐지의 후예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 원래 쇼군-정확히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은 가와치 게인지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동국을 정벌하면서 받았던 관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전구년후삼년의 역이라 일컬어지는 동국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사들의 마음을 얻으며 충성서약같은 것을 받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미나모토의 겐지는 마치 무사들의 우두머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요시이에의 증손 요리토모가 타이라가를 무너뜨리고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세운 뒤부터는 공식적으로 쇼군이란 무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써 쓰이게 되었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 무사들이니 무사들의 왕이 곧 일본의 왕이다. 굳이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아도 무사들만 장악하고 있으면 일본은 곧 쇼군의 지배 아래 들어온다. 중세 이후 일본의 정치를 특정짓는 정의였다.


원래 겐지라는 자체가 동국에 연고를 두고 있었으므로 서국과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서국에는 다이라씨가 있었지만 미나모토씨에 의해 철저히 몰락하면서 서국을 대표할만한 이름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에도시대까지 서국은 마치 별개의 존재인 양 중앙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따로 움직여 온 경향이 강했었다. 아무래도 쇼군이라는 이름에 얽매이기 쉬운 동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성도 더 강했던 것이다. 굳이 힘을 소모해가며 죠라쿠를 할 이유도 없었고, 성공해도 돌아올 실익이 없었다. 죠라쿠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겪어야 했던 위기들을 돌아볼 때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오다 노부나가 역시 수많은 역사의 패배자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렸을 수도 있다. 당장 서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모리 모토나리가 선택한 서국 10국의 맹주라는 형식부터 천하인이라는 야심과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마저 끝내 쇼군도 되지 못하고, 쿠게마저 호소카와에 거절당한 탓에 토요토미의 성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토요토미의 가신들이 분열했던 이유 역시 토요토미가 겐지가 아닌 쿠게의 이름이었다는 이유도 적지 않았고 보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싸움만 아니었다면.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패권에는 사실 운도 상당히 따랐었다. 당장 죠라쿠를 위해 미카와를 거쳐 진격하던 다케다 신겐이 그만 급사한 것도 그 하나였다. 그 전에 이미 다케다가는 그 힘의 근원이던 금광이 고갈되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만일 다케다 신겐의 사후 후계문제로 다케다가의 내정이 혼란스럽지 않았더라면 나가시노에서 가쓰요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한참 더 훗날의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역시 쇼군의 요청에 따라 죠라쿠를 시도하던 우에스기 겐신이 진중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도 역시 오다 노구나가의 패권을 도운 행운 가운데 하나였다. 우에스기 겐신이 죽고 양아들 카게카쓰가 뒤를 잇고 나서도 여전히 우에스기는 강적으로 다키가와와 시바타 모두를 고전케 만들고 있었다. 호조와 모리마저 오다 노부나가에 적대했다면 오다가의 운명도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남은 고만고만한 적들을 상대로도 상당히 고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였다. 아네가와강의 전투에서는 미카와군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자칫 패할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테지만 말이다.


사실 세키가하라 싸움 당시도 정작 패하기는 했지만 모리가가 속해 있던 서군 쪽이 동군에 비해 그다지 열세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서군 가운데 고바야카와나 깃카와 같은 배신자들이 나타나며 지리멸렬하여 와해된 것이었지 전력으로 동군이 서군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서군에 포함된 다이묘 가운데 상당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다 상당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이들이었다. 거의 절반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고 보면 된다. 잃은 병력 만큼 막대한 물자 역시 잃고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가 세키가하라 싸움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큐슈의 패자인 시마즈도 소극적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열심인 것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오타니 정도였다. 괜히 일본에서저 이순신이 도쿠가와 바쿠후의 일등 공신이라 말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서국의 무장들이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결국 졌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신들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외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다. 모든 평가는 승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전국시대 일본 역사의 중심은 결국 승리한 동국에 있었다.


단순히 동국의 무장들이 더 강해서 동국이 전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살아있을 때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중앙정치에 소극적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특히 서국의 다이묘들에게 많은 희생과 손실을 강요했다. 무능해서 이순신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함경도에서 정문부에게 패하고 쫓겨났다. 졌기에 무능한 거지 무능해서 진 것은 아니다. 결과로 모든 것을 계량한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다이묘들은 각각 독립된 영지를 다스리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근대까지도 일본이란 원래 생소한 개념이었다. 통일이라기보다는 정복이었고 복속이었다. 오로지 겐지만이 쇼군이 될 수 있었다. 오다와 토요토미조차 겐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사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유가 달랐고 목적이 달랐다. 그리고 겪은 환경까지 달랐다. 역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임진왜란. 토요토미의 야망은 정작 자신의 편에 선 다이묘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남겼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별 것 아니다.

이를테면 자기가 남자다. 자기 앞에 여자가 있다. 무심코 여자에게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눈이 더 컸으면..."

"코가 더 오똑했으면..."

"턱이 더 갸름했으면..."

"가슴이 더 컸으면..."


그러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한 마디로 정히 그런 여자를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그런 여자를 찾아 나서라 조언해주고 싶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마음에도 없는 성형수술까지 한 사람을 위해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대부분 여기에는 단서가 하나 더 따라붙기도 한다.


"그래도 성형은 그렇고 천연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지금 여기서 죽었다가 다시 환생해 태어나기라도 하라는 것일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노무현이 당선되고 인터넷의 자칭진보 자칭개혁들이 모여서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문득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진보란, 진정한 개혁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들은 과연 진정 진보를,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장 자신부터 진보가 아니다. 그다지 개혁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세가 진보를 따르고 개혁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맞춰가는데 아무래도 영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 옷이 맞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는가. 사상도 이념도 정책도 맞지 않으면 그에 맞게 수선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수선하면 되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수선하라 요구한다.


원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추구해 오던 이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념이다. 그들의 이념이다. 그렇다면 존중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자신만의 신념과 이념을 주장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선 그곳에 너무나 탐난다. 그래서 요구한다. 너희들이 나에게 맞추라. 나도 진보고 개혁이다. 그러므로 진장한 진보이고 개혁이라면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원래 정의당은 그런 정당이었다. 시사인도 그런 언론이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타겟이 된다. 오마이뉴스는 안 보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그냥 맞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한겨레도 그다지 자신과 맞지 않으니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정의당 역시 가끔 기회가 되면 표를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원래 그런 정당이었다. 그런 언론들이었다. 그런데 새삼 그럴 줄 몰랐다며 배신감을 토로한다. 진정한 진보와 언론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들을 압박한다. 아니라면 그들에 대한 지지와 구독을 철회하겠다.


처음부터 서로 이념이 달랐던 것이었다. 추구하는 신념이나 가치관도 달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여전히 자신은 진보여야 하고 개혁이어야 하며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그래서 바꾸려 한다. 진보정당을. 진보언론을. 여전히 자신들이 진보이고 정의이고 개혁이고 진실일 수 있도록.


시사인의 지적은 상당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시사인과 정의당을 공격하는 다수도 이미 깨닫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들은 원래 진보가 아니었다. 여성주의자도 아니었다. 진보와 여성주의에 대해 대단히 진지하게 고민한 척도 추구한 적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진보여야 하고 정의여야 한다. 진보정당과 언론에 대한 부정은 그것을 정당화한다. 저들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보수라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만이 정의는 아니다. 진보 가운데서도 여러 서로 다른 지향이 있고 추구가 있다. 녹색당과 정의당은 다르다. 사회당과도 다르다. 정의당 안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굳이 진중권이 유시민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심상정이 노회찬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김종대는 그냥 김종대면 된다. 그런데도 국이 하나로 끼워맞춰야 한다. 객관식 시험의 폐해다. 세상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는 오답에 불과하다. 그냥 그대로 놔두면 된다.


자신들이 느끼는 거부감 그대로 인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평소 한겨레도 오마이도 시사인도 즐겨 읽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하게 챙겨보는 것이 경향신문이다. 나 자신이 보수주의자인 것을 안다. 그리고 여성주의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안다. 그래서 굳이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대로. 나는 나대로. 어차피 이 사회에 한 줌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 정당이고 매체들인 것이다. 새누리가 그랬다면 상당히 신경도 썼을 테지만 고작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에 내가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그마저 알량한 권력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하자는대로 된다. 내가 바라는대로 된다. 아니면 응징한다. 아니면 아예 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대단하다. 우리는 대단하다. 대중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에 대한 어떤 비판도 거부하려 하는 이유다. 어찌 감히 대중에게. 자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무오류는 권력의 속성이다. 틀린 것도 옳게 맞게 만든다. 집단의 힘이 그렇게 만든다.


그냥 상관없이 살아도 되는 것을 굳이 관여하고 간섭하고 그래서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한다. 오지랖이라는 자체가 상대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자는대로, 내가 하라는대로 모든 것을 바꾸고 바로잡는다. 하여튼 시시콜콜한 것까지 내 손이 닿아야 하고 내 요구가 미쳐야 한다. 그래서 파쇼라 하는 것이다. 대중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모든 것을 통제한다. 대중만이 남는다.


내가 인터넷에서 진보입네 개혁입네 떠드는 인사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벌써 오래전에 이미 몸으로 겪어 봤었다. 그들의 오만과 폭력성을. 내가 틀렸어도 맞아야 한다. 내가 잘못했어도 옳아야 한다. 진보가 아니어도 진보여야 하고,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페미니트스여야 한다. 네가 바꿔야 한다. 네가 틀렸으니 네가 바꿔야 내가 옳게 된다. 부끄러움조차 없다는 것이 진짜 권력을 보는 듯하다.


그냥 상관없이 사는 것이다. 정의당은 저렇겠거니. 시사인은 그렇겠거니. 한경오도 또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다 망하면 망하는 것이고, 그래서 살아남으면 살아남는 것이다. 대세가 되면 그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자신과 주위의 세계를 분리한다는 것.


예쁜 여자가 좋으면 예쁜 여자를 찾아가 사랑한다 고백한다. 눈이 큰 여자가 좋으면 그런 여자를 찾아가서 일단 작업부터 걸어본다. 반드시 눈앞의 여자여야 한다면 그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인형이 아닌 이상 내 입맛대로 상대를 바꿀 수는 없다. 당연한 사실일 텐데.


세상에는 정의당도 있고 새누리당도 있다. 시사인도 있고 조선일보도 있다.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는가는 시장이 결정한다. 개인의 선택이 결정한다. 누가 인위로 강요할 것이 아니다. 세상은 자신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웃게 되는 이유다. 자신들의 정의가 너무 유치하고 한심스럽다. 토하도록.

아예 까놓고 얘기하자면 많은 언론사에게 있어 독자란 그다지 돈이 되는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언론사의 경우는 특정 이슈로 갑자기 구독자가 늘자 난처한 반응마저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늘어난 독자들을 위해 새로 신문을 더 발행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입은 주로 광고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독자가 언론사의 수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발행부수가 곧 광고단가다. 하지만 굳이 발행부수의 증가와 광고단가의 상승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면 당연히 인풋보다 아웃풋이 좋은 광고가 아닐까. 더 비싼 광고를 많이 사줄 기업과 혹은 공공기관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입장에 맞추는 것이야 말로 현실을 생각한다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러다 자칫 언론사가 망할 위기이니 그만 독자의 눈치를 좀 보라. 독자의 미움을 사서 망하기보다 독자의 눈치를 살피고 그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라. 그럴 것이면 더 돈이 되는 대기업의 입맛에 맞추는 기사를 쓴다. 진보언론들이 한결같이 재정난을 겪는 이유다. 기업의 광고유치에 불리하니까. 그럼에도 언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굳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수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를 강요한다.


언론의 경쟁력이 떨어져서 독자가 떨어져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점유율이 줄고 방행부수도 떨어져서 결국 망하게 된다면 그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언론을 굴복시키고 길들이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독자의 눈치를 보라. 유도리를 발휘하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서?


주제를 모른다. 자기들이 그렇게 대단한 줄 안다. 그러나 100억 인구를 모아서 그림 그리게 해봐야 고호 한 명 나오기 힘들다. 현실이다.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어도 예수는 한 사람 뿐이었다. 언론을 먹여살리는 것은 이미 대기업이다. 현실을 외면한다. 웃기는 현실이다.

모든 핵무기는 전략무기가 될 수 없다. 당연히 전술무기도 될 수 없다.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한 번 쓰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핵에는 핵밖에 없다. 상대에게 핵무기가 없어도 기존의 핵보유국들이 완전한 파멸로 이를 수 있는 그같은 무모한 도박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는다. 누구라도 먼저 핵을 사용하는 순간 모든 핵보유국, 열강들의 제제를 받아야 한다. 그것도 가장 끔찍하고 완전한 형태의 제제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보다 북한이 그것을 더 잘 안다. 설사 남한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해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없다. 일본에 핵미사일을 떨어뜨려 초토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없다. 미국 본토에 대륙간탄도탄을 떨어뜨리면 뭐라도 크게 변할까? 바로 미국의 핵보복에 의해 북한체제는 물론 북한영토 전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바뀌게 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북한정권이 무력에 의해 뒤집히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그것을 실전에서 쓸 수 있겠는가?


그러면 북한은 어째서 별 쓸모도 없는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 사실 핵보유국이라는 타이틀도 현실적으로 그다지 메리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열강을 제외하고 인도와 더불어 제 3세계 국가로는 드물게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파키스탄의 경우를 보자. 그래서 뭐가 크게 달라졌는가? 그래서 뭐라도 더 나아진 것이 있는가? 말이 핵보유국이지 국제사회에서 이렇다 할 발언권 하나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냥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나마도 기존의 열강들이 인정해주어야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공인했을 때 핵무기보유라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실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당장 그것이 문제다. 미국은 전혀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미국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어차피 북한이 개발하는 핵무기라고 해봐야 실전에서 사용했다가는 아예 북한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질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을. 북한이 핵보유국을 선언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동의하지 않으면 국자사회에서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 실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일단 핵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시 첫번째 경우로 돌아가게 된다. 핵무기를 쓰면 파국이다. 그런데 핵무기를 쓰지 않으면 결국 국제사회의 공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사실을 인정하고 협상에 나오지 않는 이상 북한은 실전에서 써먹지도 못할 핵무기 개발에 모든 자원과 노력, 비용을 쏟아부어야 한다.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기약없는 인정을 위해 자기 살을 깎아 가며 버텨야 한다.


북한의 도발이 부쩍 잦아진 이유다. 인내심이 바닥난 것이다. 더이상 버틸 여력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제발 들어달라. 제발 알아달라. 중국까지 질려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마저 돌아보지 못할 만큼 북한은 막다른 상황으로 몰려 있다. 사실 그래서 더 문제다. 북한이 저리 발악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체제보장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북한이 살려면 개혁개방은 필수일 텐데, 자칫 그 과정에서 북한 체제가 붕괴된다면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북한이라는 나라와 나라의 국민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지도부란 최소한 북한 정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동안 북한주민들을 끝없이 희생시켜가며 온갖 사치와 영화를 누려온 이들이다. 기득권을 내려놓기에는 그동안 그들이 누려온 것들이 너무 크고 달콤하다. 그러니 북한이 스스로 개혁개방에 나서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은 최소한 보장해달라. 바로 미국에게서. 그런데 미국이 아에 무시해 버리니 자기 혼자 달아올라 버렸다.


부시 정부와는 다르다. 클린턴 정부와도 다르다. 두 정부 모두 대외문제에 있어 적극적인 개입을 마다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부시정부의 지리한 소모와 낭비를 부채처럼 짊어지고 출범한 정부였다. 지나치게 대외문제에 개입할 경우 당장 자신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정부였다. 한국정부의 입장도 김대중, 노무현과는 크게 다르다. 만일 체제보장을 약속받으려 했다면 노무현 때 조금 더 인내하고 굽히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한국정부가 괜찮다는데 미국정부가 괜히 나서서 수고와 비용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북한정부의 오판이다. 오히려 지금 대미관계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정부다.


스스로 만든 함정에 갇혀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정부에도 마냥 좋은 일인가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만에 하나 최악의 경우 북한정부가 막다른 지경에서 상상하기도 끔찍한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회가, 국민들이 감수해야 하는 안보환경의 비용이다. 북한이라는 변수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한국정부에 정장이라는 최악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물며 핵무기를 동반한 위협이다. 다만 정작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미국에게 그것은 단지 남의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외면하는 이상 북한의 의도와 요구는 받아들여질 리 없고, 그때까지 지금처럼 도발만 하다가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시간이 문제다. 아무것도 않고 그저 북한이 안에서부터 무너지기만 기다릴 것인가. 적절히 북한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북한의 붕괴를 통제가능한 범위 안에 가둘 것인가. 현정부가 추진하는 것이 바로 전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것이 후자다. 북한의 체제변화도 남한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조율하고 통제하여 피해를 최소화한다. 이익을 극대화한다. 무엇이 최선인가는 결국 조금더 시간이 흐르고 결정될 문제다.


답답할 것이다. 핵무기를 뜯어먹고 살 수는 없다. 원자폭판을 집삼아 침대삼아 매일매일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써먹을 곳이 없다. 정작 써먹을 수 있는 곳에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관심을 돌려야 한다. 이제는 핵실험 좀 했다고 동요하는 사람마저 그리 많지 않다. 쓸 수 있는 카드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된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스스로 걸어들어간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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