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봉건사회에서는 군주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의 크기에 비례해서 지분과 권력이 주어졌다. 그게 바로 천승제후니 백승제후니 하는 말의 유래인 것이다. 천자가 만 대의 수레를 동원해서 전쟁에 나설 때 어떤 제후는 그 가운데 천 대의 수레를 이끌고 있고, 어떤 제후는 고작 백 대도 못되는 수레를 모아서 가지고 왔다. 누구의 발언력이 더 세겠는가. 누가 더 큰 관심을 받고 논공행상에서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겠는가.

 

일본 전국시대에 10만석이니 100만석이니 하는 영지의 규모가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그에 비례해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 차이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더 크고 더 비옥한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지의 크기에 비해 더 적은 병력만을 동원하거나, 아니면 적은 병력을 동원해도 더 정예인 병력을 동원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영지를 보유한 영주의 실력과 영향력으로도 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싸움에 실제 도움이 되는 놈이 최고인 것이다.

 

어째서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은 항상 일본보다 후순위에 있었는가? 당연하다. 인구만도 거의 세 배 가까이 차이났다. 경제력은 아예 말할 것도 없었다. 군사적으로도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호위함대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도 남을 만큼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다 일본 본토에서도 발진할 수 있고 혹은 다른 지역으로도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는 첨단 항공전력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불과 십 수 년 전까지 한국의 군사력이란 육군을 제외하면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프리깃함인 광개토대왕이 한국해군의 최대대양전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체할 전폭기가 없어서 F-4팬텀을 한계까지 굴려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경제력은 사실 한국도 이만하면 아직 아쉽기는 해도 크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1인당 GDP도 일본 턱밑까지 따라왔고 재정건전성만 보면 일본보다 더 큰 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미국의 국제전략에 있어 한국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아직 의문점이 있다. 그래서 미국이 굳이 사드배치를 강요했던 것이었다. 사드라도 한국에 배치해 놔야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미국을 위해 역할을 할 수 있겠다. 그것 말고 지금 한국의 군사력으로 얼마나 미국의 대중국전략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추진하려는 것이다. 전략자산이랄 수 있는 항공모함과 핵잠수함과 대륙간탄도탄의 도입을. 유사시 한국은 미국을 위해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이제 미국은 절대 한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지금처럼 북한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군의 대부분 전략과 전술, 그리고 군사정책들이 북한이라는 특정한 상대에 구속되어 있기 쉽다는 것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오로지 북한을 이기기 위해서만 전략전술을 구상하고 장비를 도입하고 무기를 개량한다. 그것이 과거 한국이 육군만 비대한 불균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첫째 이유였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더 유연하고 더 자유로운 그래서 미국이 원하는대로 바로 반응할 수 있는 군대가 미국 입장에서도 필요하다. 그래서 종전선언인 것이다. 더이상 북한만 의식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로 그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도록 한다.

 

이해했을 것이다. 어째서 일본은 한국과 북한의 종전선언에 반대하고 있는가. 같은 이유로 오히려 한국 보수들이 항공모함과 핵잠수함과 대륙간탄도탄의 도입에 회의적인 것이다. 어딜 감히 일본의 자리를 넘보는가. 어딜 감히 미일관계에 한국이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가. 지금 민주당 일부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냥 일본이 미국 아래 첫째로 있고 한국은 그 아래에서 떨어지는 국물이나 핥으면 된다. 종전선언에 대한 반대와 전략자산 도입의 반대는 그래서 함께가는 것이다. 그들은 또 전시작전권의 환수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미국이 원해서 하는 것이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실제 자신들을 위해 도움이 될 동력이지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중국은 그런 종전선언에 찬성의 입장을 보이는가. 완충지대란 무엇인가? 평소의 긴장과 만에 하나의 경우에 충격을 중간에서 흡수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오히려 그 만에 하나의 상황을 일으킬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중국이 북한에 무작정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해 줄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인 것이다. 그랬다가 진짜 만에 하나 북한이 오판해서 한국과 무력충돌이라도 일으킨다면 그 여파는 바로 가까이 있는 중국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북한과 한국 사이의 긴장이, 아니 더 나아가 미국과의 긴장관계로 인한 불똥도 지금까지 계속 중국에게까지 튀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중간지대에 존재하는 국가나 세력들은 어느 한 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드는 경우가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어느 한 쪽 편에 서더라도 한 편에서 다른 진영과도 여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서로 적대하는 진영들끼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더라도 그를 통해서 중재와 타협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일본과 조선 양쪽에 한 발 씩 걸치고 있던 에도시대 이전의 대마도가 그런 경우였었다. 명백히 일본의 영토였지만 임진왜란 직전까지 전쟁의 가능성을 먼저 경고하는 등 조선과의 관계에서도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과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야 중국도 마음놓고 북한을 한국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간지대로서 마음놓고 키워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가장 종전선언을 바라는 것은 중국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훨씬 유용한 전력이 된 동맹을 북한이라는 족쇄로부터 풀어주어 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고, 중국은 북한이라는 진짜 완충지대를 가질 수 있으며, 당연히 한국 입장에서는 북한과의 적대관계로 인한 막대한 비용과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반면 북한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 완충지대로 자리하고, 미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비중이 높아지면 안좋은 나라가 하나 있다. 그래서 일본이 반대하는 것이다. 종전선언이야 말로 미국에게 있어 일본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종전선언을 반대한다는 건 어떤 의미이겠는가.

 

흥미로웠다. 보수라면 오히려 항모도입에 찬성할 줄 알았다. 핵잠도입에도 호의적일 줄 알았다. 그런데 대륙간탄도탄에마저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어째서? 그래서 전시작전권 환수에 반대해 온 것이었다. 종전선언에도 반대해 온 것이었다. 북한은 주적이어야 한다. 한국의 모든 국방과 군사정책은 북한을 대상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그게 바로 한국 보수의 정체란 것이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글 썼더니 손가락이 꼬이려 한다.

 

더이상 미국이 단일패자로서 자신의 힘만으로 세계질서를 좌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파트너가 필요하다. 유사시 함께할 동맹으로써 믿을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대상이 반드시 필요해졌다. 유럽의 영국과 남태평양의 호주와 과거에는 동아시아에 일본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이란 존재가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돌려주겠다 나서기 시작한 무렵과 일치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근이라는 사람이 얼마전 국군포로를 이유로 진보정권을 비판하고 나선 듯하다. 국군포로를 방치했기에 진보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진보정권이라는 게 언재부터 존재했었더라? 한국전쟁은 언제 일어났고 국군포로는 언제 발생했지? 

 

조창호 대위가 탈북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북한에 국군포로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아니 이승만 정권 당시 포로교환을 통해 돌려받은 국군포로들에 대해서조차 사상검증을 실시하고 그 가운데 상당수를 공식비공식적으로 제거한 바 있었다. 국군포로가 아니라 간첩이다. 애국심이 부족해서 항복했고, 북한에서 빨간 물이 들어서 돌아온 배신자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전직 군인이 그런 부분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진보정권의 책임만 묻는다. 왜?

 

바로 저것이 수구의 국가관인 것이다. 윤석열이 120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해도 그들은 감수할 수 있다. 불량식품을 먹으라 해도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급여를 깎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직제나 직렬에 따른 차별을 강화해도 마찬가지다.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죽어도 너무나 당연하고 보상 한 푼 못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 당장 나를 때려죽이고 내 가족을 강간해 죽여도 그럴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윤석열을 비롯 수구정당이 아예 대놓고 언론을 탄압해도 오히려 잘한다고 칭찬하는 언론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한겨레 보라. 자기들 광고 끊겼어도 오세훈이 TBS 대놓고 탄압하니 만세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국가란 내가 목숨바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있기에 내가 있고, 따라서 나의 이익이나 안위는 크게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수구의 국가관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게 같은 수구의 권력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를 가정한다. 정당한 지배자가 지배하는 국가란 내가 헌신할 대상이지 내가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반면 진보정권은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는, 내가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 이중적인 사고가 수구와 진보정권에 대한 모순된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구정권부터 시작된 모든 잘못들에 대해서는 아예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를 해결하지 못한 진보정권에 대해서는 극도의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맹목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보수적인 수구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수구 역시 그 맥락은 유사하다. 수구정권은 당연히 그래도 된다. 그래서 김학의의 범죄는 범죄가 아닌 것이다. 김학의의 범죄를 묻은 검찰의 행위는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검찰이 범죄를 묻음으로써 일반인이 된 김학의를 수사하는 것은 더 큰 범죄일 수 있다. 그래서 진보적 수구다.

 

그러니까 수구정권에서 국군포로들을 아예 외면하고, 심지어 돌려받은 포로들까지 살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한 채 진보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했다 탓하는 것이다. 수구정권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아예 무시했던 사실은 외면한 채 진보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했다며 욕하는 것과 같다. 국민의힘의 강간이나 성추행, 성희롱은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민주당의 사소한 말실수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군인들이 많다. 그것이 이른바 수구들이 말하는 복수심인 것이다. 자칭진보들까지 무의식 가운데 가지고 있는 정권찬탈에 대한 복수심이다. 어디 한 번 잘하는가 보자. 그렇게 문재인 정부는 시작되었고 그들의 잣대에 의해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그냥 너무 당연하다.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그래서 우습다.

아마 지금은 반페미니즘 정서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더 강할 것이다. 오히려 수구정당 진영에서는 전보다 반페미니즘 정서가 많이 약해진 편이다. 오죽하면 착한 페미니즘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겠는가. 정권을 잡으려면 페미니즘도 필요하다. 왜? 아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자기들 편이라는 걸.

 

바로 작년 박원순 사망을 전후한 정국이 계기였을 것이다. 당시 모든 여성주의자들은 - 심지어 박원순 시장과 깊은 교분과 인연을 쌓아 온 이들마저 그를 위한 한 마디 애도조차 없이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기 바빴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정도가 부족하면 린치가 가해졌다. 그 결과 어느 계약직 여성 방송인은 직장을 잃어야 했다. 현직 검사들은 검찰 수뇌부들을 통해 징계까지 하려 했었다. 미투의 시발점이었던 서지현 검사를 의심하는 부류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에 대한 확인과 검증마저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라며 진실이 아닌 오로지 주장만으로 한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끝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과연 당시 여성주의자들이 피해자라 주장한 그 여성 때문에만 그리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었는가? 하지만 국민의힘 관련 성추문이 이후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심지어 여성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정의당과 한겨레에서마저 김학의에 대한 재수사가 정권차원의 불법이고 부정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가지고 청와대를 겨냥하고 있었다. 김학의가 어떤 범죄를 저지른 인간은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김학의 수사와 관련해서 기소되었다는 이유로 이성윤의 고검장승진을 반대한 것이 바로 정의당이었다. 그들의 여성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째서 안희정은 모친의 죽음조차 부정되어야 하고, 김학의는 그 재수사를 범죄시해야 하는 것인가.

 

아마 기억할 것이다. 올초였던가. 한겨레에서 선언한 바 있었다. 4050남성은 민주화기득권세력이다. 그놈들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자기들 독자 대부분이 그런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랑 절대 상관할 필요 없다. 오히려 적대하며 배제하고 타도해야 한다. 그게 바로 여성주의자들의 속내인 셈이다. 사실상 일베와 같다. 워마드 메갈리아가 원래 일베의 미러링으로 시작된 것이다. 원래 비슷한 것들이 반대편에서 똑같이 놀려 만든 것이 바로 워마드 메갈리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년놈들이 지금 여성주의자의 주류다. 그리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친독재친기득권의 과거 여성주의 선배들이 나올 것이다. 과연 그런 버러지들을 위해 굳이 민주당이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남성들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민주당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기레기것들이 페미니즘을 앞세워 이재명을 공격하는 것부터가 증거인 것이다. 이준석은 2030의 남심을 잡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이해한 것들이 이재명에게 대해서만 적대적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준석의 여가부 해체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던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이 이재명에 대해서만은 공격적이다. 그냥 여성주의가 수단인 것이다. 여성주의가 명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자칭 반페미전사들이 페미니스트들과 손잡고 민주당을 공격하는 양상인 것이다. 윤석열의 페미니즘은 착한 페미니즘, 이재명의 페미니즘에 대한 회의는 나쁜 반페미. 아주 신났지? 그래서 지지자들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안되겠다.

 

그러면 페미니즘 버린다고 여성표 다 날리는 것인가?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비단 민주당 남성지지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여성지지자 가운데서도 페미니즘에 최소한 회의적인 이들이 늘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당 인사들 사이에서 페미니즘 회의론이 조금씩 불거지는 이유인 것이다. 페미니즘이 민주당을 적대하는 이상 굳이 페미니스트들과 함께할 필요가 없다. 자칭진보가 아예 국민의힘과 손잡은 이상 자칭진보와 같이 갈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누가 뿌린 씨앗인가? 오히려 내부의 독일 수 있는 것이다. 자칭 진보와 손잡는 것이 함께 똥통을 구르는 것과 같다면 여성주의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등에 칼을 대고 걷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회의론은 시기적절하다. 반페미가 아니다. 그냥 회의론이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민주당이 함께 나서야 하는데.

 

이제 여성주의자들은 진짜 국민의힘만 바라봐야 하게 될 지 모르겠다. 어차피 상관없을 것이다. 여성주의가 바라는 여성상이란 철저히 기득권에 기생하는 여성의 모습일 것이니. 자기가 노력해서 성공하기보다 남성의 배려로 더 나은 남성을 배경삼아 다른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다. 정의당이 김건희라면 발벗고 나서는 이유도 그것이다. 

광주는 시혜가 아니라 의무다. 권리나 권한 같은 것이 아닌 당위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기에 그리하는 것이다.

 

진중권부터 자칭진보들 지금 하는 꼬라지 보면 윤석열이 광주가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광주 가서 광주민주환운동을 인정해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양 그를 떠받들기 바쁘다. 그 정도 사과 했으면 되지 않았는가. 그런 정도 방명록씩이나 써주었는데 진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긴 민주당 인사들에 대해서는 역시 평가가 다르다. 저들이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가 드러나는 부분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정의당이 국민의힘이나 윤석열의 말꼬리 잡고 비판하는 꼬라지를 못봤었다. 왜이겠는가.

 

저놈들은 이제 광주까지 팔아버렸다. 하긴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놈들이니 당연할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저놈들과는 뿌리도 가는 길도 다르다. 광주가 그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관훈토론에서 기레기들 질문하는 수준 보아하니 저 대가리로 이해 가능한 건 딱 윤석열까지다.

 

홍준표도 아니다. 그래서 홍준표도 일부러 말도 거칠게 세게 하고 했던 것이다. 제대로 말해선 알아먹지 못한다.

 

인간은 딱 자기 수준에 맞는 권력만을 요구한다. 기레기가 요구하는 권력의 수준이다.

 

어째서 그렇게 박근혜를 향수하는지 알 것 같다. 한겨레도 그리 박근혜 그리워하더만.

 

저놈들 대가리 수준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재명의 말을 도무지 못알아먹는다. 인간이 한심해진다.

이게 바로 언론이 말하는 언론의 자유란 것이다. 기득권과 붙어먹을 자유, 범죄를 저지를 자유, 언론이 검언유착과 유시민음해미수에 대해 소극적으로 - 나아가 물타기보도로 일관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언론에게 검찰이란 김오수가 아닌 이미 퇴임한 윤석열인 것이고.

 

이번 선거는 언론과의 승부다라는 말을 하기 무섭게 언론이 스스로 보여주고 말았다. 윤석열에게 불리한 증거물압수나 그와 관련한 보도자료는 받지 않겠다. 그를 위해서 심지어 현직 검찰총장과도 맞다이뜨는 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서? 한겨레, 경향이 포함된 법조팀 출입기자들이. 명분도 그럴싸하다. 언론인들과 통화한 핸드폰을 압수하는 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킨다. 그러고보니 요즘 언론의 자유 잘 떠들던 언론이 있었던 듯하다.

 

아주 노골적이다.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 언론이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러니 검찰도 따르라. 검찰총장도 따르라. 다시 말하지만 어디 가서 한겨레 진보라 하면 쳐맞는다니까. 저따위 짓거리에 최소 부화뇌동, 그러나 아마도 앞장섰을 한겨레가 과연 진보일까? 그러면 윤석열이 진보겠네?

 

이렇게 국민도 독자도 안중에 없는 것들이 바로 언론이란 것들이다. 그렇게 돈이며 향응이며 받아쳐먹고 그에 맞게 기사써주는 게 기레기 일이란 것이고. 그런 언론 믿고 이재명 물어뜯던 것이 바로 똥파리들. 똥파리의 뿌리가 어디인가 알겠지. 언론은 해체가 답이다.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기자가 인간인가? 해부학적으로는 인간일지 모르겠다.

 

하다하다 검찰과 붙어먹는 법조팀 기자들이 현직 검찰총장에게 들이받는 현실마저 보게 된다. 법과 정의를 위해서? 가치와 윤리와 진실을 위해서? 좆까고. 그냥 우리 좆꼴리는대로 내버려두라는 게 이유다. 그를 위해서 윤석열을 대통령 만들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인 것이고. 아우 냄새 진동한다. 써글 것들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동안 자칭 진보들이 사회의 감시자 역할을 해 온 것도 사실이긴 했다. 사회 곳곳의 부조리와 모순을 파헤치고 그를 고발하고 비판해 왔었다. 그래서 과거 대선들 때는 어느 정도 자칭진보의 지원을 등에 업기도 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그런 전제가 많이 바뀌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서 검찰이 노골적으로 정치화하며 그 본색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득권은 아니지만 엘리트다.

 

자칭 진보가 같은 엘리트로서의 동류의식으로 검찰에 붙어 버렸다. 검찰의 말이야 말로 법이고 진리이고 정의라고 아예 자기 뇌를 파다가 쓰레기장에 불법투기해 버렸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고 말았다. 아마 검찰에 해묵은 원한이 있는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검찰 출신의 대통령후보가 나타났다. 하긴 경선부터 아주 물고빨고 하느라 이 인간이 도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검찰이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수 십억의 부당이익이 관여된 사건을 불기소종결하는데도 입다물고 있다. 하긴 자칭 페미들마저 김학의 사건을 검찰이 덮었는데 왜 재수사하냐고 퇴임후 대통령이 책임지라는 세상인 것이다. 윤석열은 입다물고 이재명만 떠든다. 이재명은 눈감고 윤석열에 대해서만 써댄다. 알려야 할 건 윤석열만 알리고 없는 사실까지 파헤치는 건 이재명만 한다. 공영방송인 KBS마저 이 지경이니 과연 어떻게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일까.

 

그야말로 검언의 총력에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맞대응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언론도 알았다. 검찰과 함께면 민주시민도 얼마든지 노예로 만들 수 있다. 버러지로 만들 수 있다.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검찰 역시 언론이 함께면 똥을 싸든 설사를 뿌리든 모두 정의롭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 판사까지 가세한다. 그런 선거다. 이 사회 부조리의 끝판왕격이다. 이 새끼들만 때려잡으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정의롭게 돌아갈지 모른다.

 

긴장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민주당. 신문기사 보고 벌벌 떠는 짓거리 좀 이제 그만했으면 바랄 뿐이다. 언론은 좆밥 이전에 적이다. 적이 떠드는 소리 듣고 겁먹는 것은 똥파리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이번 선거의 의미가 그렇다. 그래서 오세훈이 TBS를 조지고 언론이 침묵하는 것이다. 심지어 오세훈에게 광고로 쳐맞은 한겨레마저 무릎꿇고 반성하는 중인 것이다. 언론을 조져라. 이재명에게 바라는 하나다. 언론을 조지고 검찰을 조져라. 민주주의란 정의 위에 기능하는 것이다.

 

아무튼 윤석열 대선후보 되고 언론 기사가 더 가관이 되어 가는 것 같다. 하긴 딱 기자들 지적수준에 맞기는 하다. 명문대 출신에 출세만 하느라 머리에 든 건 아무것도 없다. 무운을 운이 없는 것으로 알아들은 그 수준과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지는가. 심상정이야 문재인이랑 이재명 욕하려고 출마한 년이고. 윤석열 도우면서 그렇지 않아도 인기 떨어진 고양에서 거물로 자기 이미지를 다시 끌어올린다. 병신들이 참 많다. 씨바랄 겨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좀 배웠다는 인간들의 서울대에 대한 컴플렉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서울대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서울대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의식과 사고가 왜곡된다. 서울대는 특별하다. 그 가운데서도 법대, 그 가운데서도 사법고시 합격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수많은 경쟁자들을 이기고 오로지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최고의 자격을 손에 넣었다. 그것만으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끝난 것이다.

 

언론이 한때 조국 전장관을 물고 빨았던 이유였다. 그리고 한순간에 등을 돌린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봐야 사법고시도 합격하지 못한 교수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고작 경희대 대통령 주위에서 그를 보좌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진짜는 사법고시에도 합격하고 대통령과도 맞짱뜰 수 있는 검찰총장이 아니겠는가. 정의당이 그나마 민주당과 우호적이던 입장을 뒤집고 본격적으로 국민의힘과 같은 배를 타기 시작한 기점이었다. 그래도 이 참에 진짜 서울대 대통령 한 번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공범이라는 것도 있다. 지금껏 대통령후보로서 윤석열이 내세울 수 있는 이미지나 역량, 성과 들은 거의 언론이 합작해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 윤석열이 현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는 동안 언론은 그와 협력하여 대선후보로서 그의 모든 것을 만들어 주었었다. 이제와서 그런 윤석열의 치부를 까발린다? 실체를 드러낸다? 그동안 해 온 일들이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이루어낸 결과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을 부정하게 되면 그 모든 것들도 다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건 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말이 안되는 일이다. 현직 검찰총장이 사퇴하자마자 바로 특정정당의 대선후보로 나서다니. 그야말로 현직에 있을 때부터 이미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 명분으로 앞세웠던 자신에 대한 정치적 탄압 또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오히려 약소한 수준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언론들은 어떠했는가. 특히 진보라 자처하던 언론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민주당에 대해서는 그리 추상같던 언론들이 그런 부정한 행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었는가. 그를 위해서 자기 독자들을 기득권집단이라며 매도하던 게 바로 한겨레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후보인 것이다. 철저하게 치부를 감추고, 무능을 왜곡하고, 악행을 지우며. 그런데도 고작 언론에 휘둘리기 좋은 6070 중심의 당원투표에서 몰표를 받아 국민여론조사에서의 압도적 열세를 뒤집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21만의 표가 움직여서 바뀐 결과였다. 그동안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데 공동전선을 이루고 있던 보수지지층에서조차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제 6070마저 물러나고 언론에 대한 불신이 더 큰 이후 세대들이 주류가 된다면 과연 언론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튼 재미있는 것이다. 심상정이 윤석열을 위해 고발사주에 물을 타려 벌써부터 아주 필사적이다. 지금 공수처에서 수사 열심히 잘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특검이란다. 그것도 이재명까지 묶어서 같이 특검하잔다. 무슨 의미겠는가. 특검이란 사법이 아닌 정치의 영역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제도다. 정치적으로 해결하자. 이재명과 함께. 그러면 어떤 정치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조국을 추방한 서울대의 연대는 어느때보다 굳다. 참 잘나셨다.

2012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후보였던 문재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권력의지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권력을 가져야겠다는 필연적 동기가 부족하다. 내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 권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목적 모두가 권력자로서 많이 부족하다. 워낙 보통 사람이 가지는 욕망이나 감정과 거리가 먼 도덕적으로 초탈한 삶이 역설적이게도 권력자로서 약점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런 약점을 많이 보완했다는 2015년 이후로도 그 근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권력이란 여전히 두렵고 더러운 것이다.

 

아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지지자들조차 느끼는 어떤 답답함의 이유일 것이다. 오세훈이나 박형준이 보이는 행보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권력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 권력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한다. 그런 결단과 행동에 주저나 망설임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자리에 앉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실현한다. 누군가 그것을 비판하고 방해한다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억압하고 응징한다. 그에 비해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권한 안에서의 결정조차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다. 자를 수 있으면 자르고, 윽박지를 수 있으면 윽박지르고, 거래할 수 있으면 거래한다. 어쩌면 권력자에게 너무나 당연한 그런 행위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권력이란 두렵고 더러운 폭력이란 것이고, 또 하나는 권력이란 유용한 수단이며 도구란 것이다. 전자는 대개 도덕적으로 고결한 은자의 삶과 어울린다. 권력을 쥐어주겠다는 말에 오히려 귀를 씻고 더 깊은 곳으로 숨는 이들에게 오히려 권력이란 거추장스러운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 자칫 그로 인해 자신이 지켜온 것들이 크게 변질되고 타락할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지는 것은 전자가 아닌 후자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가문이나 당여를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나라와 백성과 천하의 안위를 논하기 위해서. 그를 위해서 그들은 권력을 가져야 하고 그 권력을 유용하게 쓸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권력자로서 자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권력자가 권력을 두려워하고 제대로 쓸 줄 모르면 권력은 의미없어지는 것이다.

 

최근 송영길의 행보를 통해서도 더욱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해야 할 때는 한다. 해야만 한다면 한다. 정도를 걸으며 명분 앞에서 망설이거나 하는 경우란 오히려 드물다. 하지만 때로 권도로 돌아가고 패도를 밟아야 할 때는 망설임이 느껴진다. 여전히 권력이란 문재인 대통령에게 두렵기만 한 것일까. 꺼려지기만 하는 것일까. 그에 비해 소소한 속물 송영길은 거대여당의 대표란 자리를 얼마나 얄밉도록 자신을 위해 잘 활용하고 있는가. 차라리 정치인으로서는 송영길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낫지 않은가. 그 도덕적인 고결함이나 목적과 동기의 숭고함을 배제했을 때 권력 그 자체를 대하는 자세만큼은 정치인으로서 송영길이 훨씬 윗줄에 있는 듯 보인다.

 

아마 송영길이었다면 윤석열이 저렇게 미쳐 날뛰도록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천시장 시절 보여주었었다. 철저하게 자기 사람들만 챙기느라 시정을 망치고 시민들로부터 원망과 비난을 듣던 모습에서. 그러나 그런 행보조차 당시 송영길은 너무나 당연했고 당당했었다. 마치 지금 오세훈이나 박형준을 보는 것처럼. 그래서 정치인이란 것일까. 그래서 이재명에게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송영길보다도 더 권력이란 수단을 재량껏 사용하면서도 그 동기와 목적까지 분명하다. 이기에 소아와 대아가 있다면 이재명은 대아적 이기주의자일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 오로지 자신의 목적이며 자신의 이유다. 그를 위해 얼마든지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

 

수구보수와 수구진보 모두가 이재명의 대통령당선을 저지하고 나서는 이유일 것이다. 노무현과는 다르다. 문재인과도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이재명은 그동안 보수진영에서 집권해 왔던 권력자들과 닮아 있다. 충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과 역량을 활용해서 오로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집요함과 악랄함이 있다. 그런 이재명에게 180석 여당까지 배후에 주어진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검찰마저 지금 시점에서는 이재명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재명에게 밉보이면 자칫 검찰이란 조직 자체가 날아가 버릴 수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문재인은 아니었다. 문재인에게 권력이 주어진다고 나에게 위해가 가해질 것이란 두려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재명이면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두려워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이재명으로의 권력교체란 이유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연장이지만 문재인 정부와 전혀 다른 정체성의 정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기대가 크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음을 지지자들 스스로 깨닫고 있었으니.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괴물의 방식이 필요하다. 기대하는 이유다. 부디.

벌써 10년도 더 지난 모양이다. 당시 내가 어느 글에서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기자가 지성을 가리키던 시대는 끝났다.

 

말 그대로였다. 배워야 기자를 했고, 공부해야 기자를 했다. 대학 졸업장 한 장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치열하게 궁리하고 학습하고 스스로 고민한 끝에 자신과 세상에 대한 답을 찾아냈어야 했다. 어제의 답이 오늘의 답이 아니고, 오늘의 답이 내일의 답이 아니다. 그런 기자들이 쓴 기사는 한 시대를 바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공공부보다 토익이며 취업시험공부가 더 중요한 시대에 그런 지성 같은 건 더이상 의미가 사라진지 오래다. 기자란 것도 그저 취업시험 잘 치러서 점수만 높게 받으면 될 수 있는 흔한 직업이 되고 말았다. 더욱 기자라는 사명감도 기자로서 살기 위한 노력도 기자가 된 이후에는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무운을 빈다가 운이 없기를 빈다로 들렸다라... 차라리 몰라서 그리 썼다 했으면 좋을 것을 구구하게 늘어놓는 변명이 더 구차하다. 그런 주제에 남들 깔 때는 그리 독하고 악하기만 했을 테지.

 

기자가 왜 버러지인가. 기자를 존중할 이유가 없는 이유란 무엇인가. 기자는 과연 인간이긴 한가. 고민의 답도 필요없다.

 

아무나 기자가 되는 시대다. 새삼 확인한다. 저런 새끼들이 무식을 자랑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라니.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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