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민당이 문재인의 독도방문을 이유로 위안부재단에 약속했던 10억엔을 주지 않겠다 말했다 한다. 모두가 바라던 것이다. 그깟 10억엔-우리돈으로 100억원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정 필요하면 5천만 국민이 200원씩만 내도 100억은 어떻게 만들 수 있다. 10억엔을 주지 않는다면 아베와 박근혜 사이에 이루어졌던 위안부협상은 무효가 된다. 이미 협의한 약속내용을 어떤 이유로든 이행하지 않았다.


아주 한국정부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도 오히려 일본정부가 나서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명백한 협의위반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래도 된다. 한국정부는 그러면 안된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그같은 명백한 위반에도 항의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 10억엔을 주지 않더라도 한국정부는 자신들과 협상한대로 해야만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 번 호구잡히면 이렇게 무섭다. 그냥 무시당한다. 철저히 부정당한다. 인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불쌍하게 보이면 밟힌다. 그런 정부더러 외교 잘한다고 지지하는 국민이 무려 40퍼센트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가히 경악이다. 문재인이 참 큰 일을 했다. 원래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을 테지만 덕분에 명분만 하나 더해졌다. 위안부협상은 무효다. 다시 확인한다. 정부만 병신이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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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호영] 2016.08.03 21:31 신고

    오히려 잘 됐네요. 뭐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넘들은 그냥 그대로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드러난 현상만 보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지금 성주를 비롯한 영남권에서 새누리당을 비토하는 것은 사드배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여전히 사드는 배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동네, 혹은 인접한 지역이어서는 안된다.


당장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네 마네 다투던 것이 조용해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과연 어느 당이 사드에 찬성했느냐 반대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드가 대한민국의 안보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기고 있을 때 사드에 대한 반대여부는 곧 안보에 대한 정당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리 멀지 않다. 바로 대선국면으로만 들어가도 성주는 뒷전으로 밀리고 사드를 앞세운 안보논란이 더 크게 불거지게 될 것이다. 최소한 침묵한다. 더민주의 전략이다.


어차피 지금 더민주가 나서봐야 성주든 사드배치는 정치문제로 비화될 뿐이다.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에 대한 시시비비와는 상관없이 새누리당이냐 더민주냐로 편갈라 싸우기 바쁠 것이다. 새누리당이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주의 사드배치에 반대하던 이들도 더민주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새누리당의 편에서 그들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세월호 당시도 당시 새정연이 나서는 순간 새누리당과 새정연, 나아가 보수유권자와 비보수유권자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진짜 대선을 먹으려 한다. 대권을 노리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손해가 될 만한 일은 나서지 않으려 한다. 당장 이익이 없어도 더 큰 손해만큼은 막으려 한다. 대선은 총선보다 비토세력의 유무도 무척 중요하다. 이긴 사람이 다 먹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 자신이 바라지 않는 후보가 이긴다면 그 손해와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다. 타겟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논란도 만들지 않는다.


당장의 지지율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지역주민이 하는 말에 쓸데없이 휘둘릴 필요 없다. 선거때가 되면 다 바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선거라는 것이다. 엄하게 힘쓰고 발목잡힐 수 있다. 잘하고 있다. 그저 국민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는 것만이 바른 정치는 아니다. 영리해져야 한다.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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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선대로부터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터임에도 많은 2세들이 단명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는가 저도 모르게 이해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의 한가운데 있었다.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권력에 둘러싸여 자라고 있었다. 권력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지는 대신 현실감이 떨어지게 된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단지 권력의 도구로,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한 마디로 선대가 남겨놓은 유산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자신이 물려받은 나라는 소수의 권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째서 수많은 정복자들이 마침내 모든 목적을 이루고 스스로 무너져내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갔는가 대통령의 이름이 등장하는 뉴스들을 통해 실제처럼 느끼게 된다. 오로지 정복이 목표였다. 권력이 목표였다.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정복을 마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감만 넘친다. 자신의 힘으로 정복을 끝냈다는 생각에 조심성이 사라진다. 그동안 자신을 옹위해 온 친위세력들도 있다. 어차피 대구경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지할 것이다. 부산경남 역시 자신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임기 3년차, 그러나 지지율은 40%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의 지지율은 전국평균보다 한참 높다. 무엇을 해도 된다.


대구경북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 부산경남 역시 오래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자만했다. 너무 자신만만했다. 대구경북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부산경남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실이 아닌 권력의 흐름만을 본다. 현실을 살아가는 다수의 국민이 아닌 특정한 이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권력의 향배만을 살핀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지지 없이 권력을 가지기도 지키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어차피 자신은 대통령을 했고, 싫은 놈이 대통령되느니 이대로 깽판놓더라도 상관없고, 어차피 이미 이룰 건 다 이뤘다.


기분나쁜 무심함을 느낀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단지 성취와 보상이라고만 생각한다. 대중에 대한 의무를 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 그래도 자신은 된다. 그동안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자신감이다. 왕조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나마 5년 남은 임기만 마치면 그의 이름 앞에 '전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현재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흥미롭다. 결국 천하를 통일하고도 어렵게 손에 넣은 권력마저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믿었던 이들의 반란에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만다. 마치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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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이릉에서 육손에게 크게 패한 것이 서기 221년,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상심하여 백제성에 머물던 유비가 병을 잃고 사망한 뒤 불과 4년 만에 제갈량은 조위를 상대로 북벌을 시작한다. 이릉에서 상당한 인적자원을 잃고 유비라는 구심점까지 사라진 상태에서 제갈량은 불과 5년도 지나기 전에 조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여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조위를 상대로 무려 7년 동안 주도권을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반전이었다.


사실 유비가 죽는 순간 촉한의 운명은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촉한은 오로지 유비가 있었기에 세워질 수 있었던 나라였다. 고작 익주 하나였다. 변방이었고 인구도 물자도 모두 터무니없이 적었다. 혼자서 세력을 이루어 살아남기란 이미 조조가 한의 천하 대부분을 발아래 두고 있던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처음 장송도 익주 혼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기보다 제발로 조조의 품으로 들어가 그 보호를 받고자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비의 존재가 그같은 장송의 결심마저 바뀌게 만들었다. 유비라면 촉이라는 변방을 기반으로 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대의명분이었다. 당장 유비 자신이 황제의 먼 친척이었고, 그동안 끊임없이 무모할 정도로 조조에 맞서버 부딪혀 오고 있었다. 원소마저 사라진 당시의 천하에서 패자가 되어 황제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와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비 한 사람 뿐이었다. 아직 한의 천하를 기억하고 조조에 반대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유비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당장은 조조의 지배 아래 있지만 아직 한의 천하를 잊지 못하고 있기에 기회만 되면 유비를 따라나설 이들이 천하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관우가 조인을 번성으로 몰아넣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을 때도 그래서 조조의 천하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바로 그 유비가 있기 때문에 촉은 반조조의 중심인 것이고, 바로 그 유비가 있었기 때문에 한이 망하고 한을 이은 또다른 한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비가 죽었는데 촉은 전처럼 하나의 나라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전례를 보더라도 유비라고 하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공백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분열이 뒤따랐다. 권력층이 분열하고, 혹은 통제를 잃은 관료층이 부정과 부패로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가만 내버려두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촉한은 망해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서촉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가 죽고 촉이 가장 큰 위기에 놓였을 때 오히려 조위가 그를 방치했던 이유였다. 굳이 자신들이 먼저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당장 말해야 할 나라에서 어느날 군대가 출병하더니 옹양주 일대를 한순간에 모두 차지하고 말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로 그것이 제갈량이 대단한 점이다. 선주 유비의 고명을 받으며 유비가 가진 명분까지 모두 계승했다. 이엄의 숙청은 자칫 분열될 수 있는 촉한의 내부를 제갈량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과정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주군 유비를 대신하는 존재가 된다. 그것을 모두에게 납득시킨다. 사실 제갈량이 촉의 승상이 되어 이룬 모든 업적보다 이것이 가장 대단했다. 오로지 유비에 의해 유비로 인해 세워진 촉이었기에 유비가 죽은 지금도 유비가 필요했다. 제갈량 자신이 유비가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다. 이후는 그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내정을 안정시키고, 그리고 군비를 키운다. 불과 4년이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벌에 나서게 된 것이. 그러고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사적으로도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내정도 전혀 피폐해지지 않았다. 과로사했다는 말이 허투루들리지 않는 이유다.


군재가 부족하다지만 그것은 재상으로서의 중국역사상 한손에 꼽히는 능력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지 당시로 한정했을 때결코 정확한 평가라 볼 수 없었다. 당장 당시 조위의 최고 명장이었던 장합이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조진을 이은 도독 사마의가 회전에서 제갈량에게 패한 뒤 다시는 모험을 않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지휘관인 한신이나 백기 같은 인물들도 그토록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에서 안정된 적을 상대로 그같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었다. 모험을 시도하기에는 촉과 위의 현실적인 차이가 너무 절대적이었다.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위를 약화시켜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나 역시 만약 유비가 살아서 제갈량 대신 북벌에 나섰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재상으로서의 역량은 과연 소하와 장량에 비견할 수 있고, 군지휘관으로서도 한신과 비교해 그의 상대는 항우가 아닌 사마의였고 조위였다. 거의 유비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이 빈손에서 시작했다. 마이너스였다. 유비에게 오로지 황실종친이라는 명분만이 있었듯이 제갈량에게도 유비의 고명대신이라는 명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초기족건을 충실히 활용하여 역사를 움직인 것은 개인의 역량이었다. 대단하다 여기는 부분이다. 어쩌면 소설보다도 실제의 제갈량은 더 대단하다. 바람을 부르지도 미래를 내다보지도 못해도 역사를 바꾼다. 심지어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장완과 비의, 그리고 강유까지 그가 남긴 인재들이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촉을 지탱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남기듯 제갈량은 그들을 남겼다. 삼국지 후반의 주인공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사를 이유로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유명한 이들은 다시 평가받고, 상대적으로 무명인 이들에 대해 다시 평가된다. 정사에 비해 연의의 제갈량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과장된 것이지 모두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삼국지연의가 있기 전에도 제갈량은 명재상의 상징이었다. 당징 손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서진에서부터 제갈량의 평가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갈량과 같은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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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부활이니까 부활의 음악을 한다.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음악이기에 그 음악을 만들고 들려준다. 다른 음악을 듣고 싶으면 다른 음악인의 음반을 들으라. 세상에 음악인은 얼마든지 많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맥락은 비슷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이 최소 복수의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각의 정당이 서로 추구하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념도, 성향도, 정책도, 노선도, 인적구성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유권자는 다수의 정당 가운데 가장 자신의 정치적 이해나 입장과 유사한 정당을 선택하여 자신을 대신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권자의 이해와 입장을 반영할 다양한 정당의 존재가 필수라 할 수 있다.


어차피 지지하는 정당도 아니다. 지지할 정당도 아니다. 전혀 상관없는, 평소 그다지 관심도 가지지 않던 정당이다. 하지만 말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바뀐다면 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정당의 모습을 갖춘다면 그때는 지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과 가장 가깝다 여겨 지지하는 정당이 따로 있지 않은가. 똑같은 정당이 둘이라면 굳이 다당제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파쇼란 정의다. 전체주의란 가장 강하고 완벽한 정의다.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그러므로 모두가 자신의 정의에 따라야 한다. 자신의 정의에 맞춰야 한다. 자신의 정의에 동의해야만 한다. 다양성도 그 안에서만 인정된다. 여성주의자들의 편에 선다. 그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이들이 그 정당을 지지하면 되는 것이다. 여성주의에 적대적인 자신들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정당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한다. 조선일보가 참언론이고, 새누리당이 그런 점에서 참정치인 참정당이다. 일베는 정의다. 그러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여기고 자신의 입장을 정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정의롭다. 그래서 항상 정의로운 인간들이 문제였다. 너무 정의로워서 다른 정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너무 정의롭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정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의란 자신과 같아지는 것이다. 자신과 같아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악이다. 더구나 자신들은 다수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억압할 수 있다. 고작 원내교섭단체도 못되는 제 4당을 두고서.


내가 네티즌들을 싫어하는 이유다. 다수가 정의라 착각한다. 다수가 동의하면 그것으로 정의는 결정되었다 여기고 만다. 정의와 반대되는 것은 악이다. 자신들이 적대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타진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그냥 자기와 맞지 않으면 지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지지하지도 않던 정당이니 앞으로도 주욱 지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지지자가 모두 떨어져 나가면 알아서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다. 억지로 자신과 같아지도록 만든다. 그렇게 압력을 가한다. 그것이 정의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다양한 입장과 이해가 존재한다. 메갈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와 주장들이 존재한다. 어느 한 쪽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부정한다. 다양성은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너무 정의롭다. 항상 한심하다. 정의가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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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아직 여성운동의 전통이 취약하다. 여성주의에 대한 지식도 없고 인식 역시 빈약하다. 심지어 여성들 자신들마저 여성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기에는 여성주의 자체가 이미 너무 낯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미 여성들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성으로서, 아니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했고, 그리고 아들을 낳기 위해 심지어 아직 핏덩이인 딸을 죽여야만 했었다. 뒤웅박팔자라는 말을 한다. 뒤웅박에 똥을 넣으면 거름통이 되고 돈을 넣으면 돈통이 되듯 여성의 삶도 다 남자 만나기에 달린 것이다. 도박에 미쳐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둘러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겠거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여성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다. 공감해줄 대상이 필요했다. 여성주의자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정작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이들 다수의 일반 여성들에게까지 절실하게 닿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들 평범한 다수의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여성주의자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 하기는 다수의 중요한 여성주의자들은 계급적으로 주류인 상류층에 속한 경우가 많았었다. 평범한 이 사회의 일반적인 여성들을 이해하기에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었다. 그들의 여성주의는 이 사회 여성의 현실이 아닌 그들이 보았던 권위있는 누군가의 저작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세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논리도 다르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오히려 다수 여성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메갈리아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주장하는 것은 매우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냥 남자들이 잘못했다. 남자들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들이 억울하다. 남자들이 한 그대로 남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여성주의에 대한 첨예하고 정교한 이론 따위 알지 못해도 자신들이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아왔는가는 경험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되갚아주면 되는 것인가. 페미니즘의 단계 가운데 극단적인 레디컴 페미니즘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페미니즘을 여성과 사회 모두에 각인시켜야 한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모두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멀리 있는 이론이나 논리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직관이 더 빠르고 쉽다. 남자들에게 그대로 돌려주자. 그리고 자연스럽게 현실에 불만을 가진 여성들은 메갈리아로 몰려들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메갈리아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워낙 여성주의의 전통이 일천하다. 여성들 사이 여성주의 자체가 그다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메갈리아를 불편하게 여기는 남성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공격하고 나섰다가는 자칫 여성주의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이 있다. 남성이 여성주의마저 정의하고 강제한다. 남성의 눈치를 보며 남성들이 지지하는 여성주의만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여성주의가 어느 정도 뿌리내리고 있다면 걱정이 덜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더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분노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절대 그 의미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화려한 수사와 논리로 여성주의를 이론적으로 공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여성이 아니거나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당장 빚때문에 먹고 죽을 농약을 사들고 돌아가는데 농업의 현실이 어떻네 떠들어봐야 농민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과 그런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편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들은 이해할 생각조차 없다.


일탈이 있다면 그것대로 비판하면 되는 일이다. 범죄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끝나는 일이다. 과연 누가 메갈인가. 누가 메갈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가. 개인의 신상을 뒤지고, 개인의 사상과 양심까지 검열하려 한다. 강제하려 한다. 메갈을 하지 마라. 메갈 근처에도 가지 마라. 설사 자신이 아무 잘못도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메갈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 너는 악이다. 죄인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되어야 한다.


가장 불쾌한 것은 사회의 일부를 다수의 힘으로 철저히 배제하려 하는 그 의도다. 폭력이다. 권력이란 폭력이 정의를 가졌을 때 나타난다. 자신들이 정의가 된다. 그 정의를 확인하려 한다. 다수의 폭력이 권력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파쇼라 부른다. 다양성은 대중의 선택에 의해 배제된다.


범죄는 범죄다. 일탈은 일탈이다. 여성들 역시 당당해져야 한다. 일탈과 범죄를 통해서라도 주장하려는 바가 있다. 회피는 비겁한 것이다. 절박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메갈리아라서가 아니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항상 상대적인 약자를 향해 기울어 있다. 유일하게 믿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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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학생운동이 결정적으로 국민들과 유리되며 동력을 상실하게 된 계기가 아마 96년 연세대사태였을 것이다. 사실 연세대사태는 한총련의 오판이라기보다는 경찰과 정부의 주도면밀한 전략에 의한 몰아가기에 가까웠다. 워낙 김영삼정부 내에도 이미 학생운동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운동권전력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바로 그들의 선배였으며 동지였던 이들이 정부를 위해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정부에 저항적인 학생운동을 무력화시켜라.


1997년 IMF로 인해 구조조정의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던 김대중 정부 역시 어떻게든 정부에 반대하는 노조를 무력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김대중 정부 내부에도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른바 재야운동권이 다시 핵심적인 위치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누구보다 노조의 생리를 잘 알고 노조가 가지는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노조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게 된 손해배상소송을 통한 경제적 압박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낸 전략이었다. 정부가 지시했고 검찰이 지휘했고 기업들이 따랐다. 이전 정부에서는 없었던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노조탄압정책이 바로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민주화정부에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군사독재정권에서도 이런 것은 없었다.


민주화정부의 가장 악랄한 점은 모든 것이 합법과 합리를 가장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민주화는 이루어졌고 국민이 선출한 법과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에 의해 합의로 만들어진 법은 공공의 규범으로서 강력한 강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법이 그렇다. 합법적인 정부가 합법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그렇다. 그러므로 그에 반대하는 것은 악이다. 죄도 아니다. 죄와 악은 전혀 별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단지 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악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법을 중요하게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그나마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민주화 정부 이후부터다. 폭력이 아닌 법과 합리에 의한 더욱 교묘해진 지배인 것이다. 그나마 역사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현행법을 어겼으니까.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고 있으니까. 시민들에 불편을 끼쳤으니까. 군사독재정권에서였다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 민주화를 주도한 민주화정부에서 그리 주장하면서 어느새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일단 법이니 따르라. 일단 정부가 시켰으니 따르라. 반대하면 형벌이 아닌 경제로써 압박한다. 아예 살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그로부터 배워 잘 써먹고 있는 것이 여당인 한나라당, 그리고 이후 새누리당이다. 그런데 단지 지금 정부가 새누리당이니 모든 것이 새누리당의 잘못인 것처럼. 과거가 아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그저 몰라서 왜곡되고 있다. 원죄는 누구에게 있을까.


'송곳'서도 구고신이 말한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멋모르고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이 새누리당 욕하는데 그 대사를 쓴다. 드라마의 배경이 바로 참여정부 시절이었다. 유시민이 노유진서 반성하더라. 다 참여정부의 잘못이었다. 합법적으로 노조 자체를 일반 시민과 분리한다. 대중의 집회와 시위마저 일반 시위와 분리한다. 전문시위꾼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도 바로 김대중 정부였다. 연대가 아닌 시위꾼이다. 역시 내부의 논리를 잘 아는 운동권출신 인사들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연대는 악이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민주화 이전의 김대중과 이후의 김대중에 대한 평가가 다른 이유다. 노무현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은 전혀 별개의 인간이다. 문재인도 그래서 사실 그렇게 크게는 기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뭐 더이상 어떻게 더 빼먹을 게 남아있는가도 모르겠고. 워낙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며 아예 뿌리부터 말려버린 탓에 노조든 시민사회단체든 더이상 무언가를 주도하여 추진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치면서 나머지 바닥까지 닥닥 긁어 아낌없이 박살낸 뒤다. 차라리 포기하면 편하다. 기대할 것도 없다.


여성운동가들이 제도권에서 여성운동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세우고, 노동운동가들이 정부의 요직에서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낸다. 학생운동에 몸담았으니 학생운동은 그들의 몫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머리도 달라졌다. 권력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원래 그런 인간들이었을까. 문득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축복이고 재앙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영웅인 이유다.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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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에 대한 상당수 남성들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째서 남성이라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져야 하는가. 나아가 어째서 밤늦게 길에서 남성인 자기를 보면 여성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하거나 가는 방향마저 바꾸는가. 하지만 여성들은 그래야 하거든. 남성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쩌면 메갈리아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음에도 다수 네티즌에 의한 신상털이까지 동반한 메갈리아와 그 우호세력에 대한 집단린치에 대해 비판적인 역시 다수의 입장이 여기서 갈릴 것이다. 메갈리아가 주장하는 미러링이라는 것을 상당부분 인정한다. 지나치다 싶은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 여성들이 실제 일상에서 겪으며 느껴온 억울함과 굴욕감의 반영인 것이다. 남성의 성기를 절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라면서부터 여성이기를 부정당해야 했었고, 남자이기에 태어나지 말라는 말 그대로 여성이기에 태어나서는 안되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었다. 그리 오래지도 않다. 지금도 나이 지긋한 세대에서는 일상으로 쓰이고 있다. 직장에서 저질러지는 성폭력과 심지어 직접적인 성범죄들도 말할 것 없다. 취업과 인사상의 불이익 또한 여성에게는 현실이다. 여성에게 가장 안전한 직장은 전업주부다. 하기는 그마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또 어떤 남성에게는 그것은 남의 이야기다. 자기가 겪기에 오히려 여성이 아닌 남성들이 차별받고 있다. 꼼꼼히 따져보자. 여성들이 취업과 인사에 있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이유들이다. 여성들이 급여 등에 있어서도 불이익을 받는데 정당하다 믿고 있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밤길도 함부로 혼자서 다니지 못한다. 어디 남자와 믿고 술자리 가지기도 불가능하다. 학교 선후배, 동기조차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여성이기에 당해야 하는 강요와 압박을 과연 남성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메갈리아의 미러링에서 남성들을 불편케 만드는 폭력성만이 보이는 것이다. 그 폭력성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미러링은 분명 반사회투쟁이다. 그리고 반사회투쟁의 목적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대상을 불편케 함으로써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도록 만든다. 최소한 일부로 하여금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인식토록 강제한다. 메갈리아 논란이 일어나자 바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여성에 대한 집단적 혐오가 그 증거다. 꼭꼭 가면 뒤에 숨겨두고 있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메갈리아를 핑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장 메갈리아에 대해 공격하면서 앞장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메갈리아를 하는 여성들의 외모나 신상에 대한 것이다. 여성들은 어떻다.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떤 존재들이다. 나아가 여성주의란 이런 것이다. 자기들이 여성주의까지 정의하려 한다. 여성주의의 운동마저 자신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강제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혐오고 차별이다. 자신들이 인정하는 여성주의만 인정하겠다. 자신들이 인정하는 여성만 인정하겠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메갈리아에 대한 공격은 곧 여성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진실한 속내다. 똑같이 메갈리아에 비판적이더라도 굳이 여성이나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면 단지 메갈리아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처럼 야만적인 인간사냥을 방불케하는 집단공격을 긍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일베를 미러링한다면 반메갈리아는 메갈리아를 미러링한다. 그나마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이해할 부분이 있지만 메갈리아에 대한 미러링에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는가. 그냥 기분나쁘다. 단지 감정이다.


메갈리아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적 행동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 역시 남성인 때문이다. 불쾌하다. 불편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심리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온건한 여성주의가 이루어낸 것이 무엇인가. 여성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여성들이 특혜를 받고 있다. 남성이 차별당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남성이 차별당하는가. 남성을 차별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한국사회 여성의 지위와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나마 나아진 것은 이제 드디어 여성들이 남성들의 경쟁자로 스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을 두려워한다. 여성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원래 개도 두려운 상대를 만나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나아졌다. 더이상 여성은 동정의 대상도 연민의 대상도 아니다. 그나마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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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여성의 경우만은 아니다. 처음 인간이 자신보다 열등한 다른 존재를 만났을 때 가지는 감정은 무시다.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일부러 차별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약자이고 열등한 존재이기에 가만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에 대한 차별을 굳이 제도화하지 않음으로써 얼핏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상대적으로 인정받은 듯 여겨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냥 무시한 것이다. 차별조차 할 필요 없이.


그러다가 조금씩 여성의 존재를 의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정의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에게도 남성들처럼 반드시 따라야 하는 사회의 규범과 기준이 있다. 남성들에게도 엄격한 사회적 규범이 관습적 제도적으로 강제되듯 여성 또한 그래야만 한다. 다만 여성과 남성이 같을 수 없으므로 여성은 여성의 규범을 따르면 된다. 다만 그 규범은 바로 얼마전까지 일방적으로 무시당해 온 사회적 관습과도 관게가 있다.


그렇데 차별받다가 조금씩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사회활동 역시 많아지만셔 어느새 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까지 이르게 되면 이번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나타나게 된다. 더이상 무시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규준을 강제할 수도 없다. 이미 여성은 남성인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저들이 자신과 다른 것은 저들이 정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저들은 틀렸다. 부정한 것에 대한 당연한 거부다.


참고로 중세유럽의 기사도나 그로부터 유래한 신사의 여성에 대한 배려는 이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무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보다 열등하다. 자신의 배려와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조금 양보하고 손해보더라도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 경쟁자가 아니다. 대등한 동반자도 아니다. 그 경계에 있다. 인간으로 여기는가 아닌가. 차라리 혐오가 나을 수 있다. 최소한 같은 인간일 수는 있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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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바생 2016.07.27 04:21 신고

    그것보다는 남성이 중세에 비해 여성화되었기 때문에 책임감은 사라지고 계산적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http://oceanrose.tistory.com/m/post/552

    이 글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메갈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뭉친 여러 커뮤니티에서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과연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인가.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자신들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인가의 여부를 자신들이 판단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평가 역시 자신들이 결정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번 메갈리아 사태에서 한결같이 메갈리아 편에 서려는 이유다.


여성들 자신을 위한 페미니즘이다. 여성들 자신에 의해 여성들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결권은자존과도 이어진다. 내가 결정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책임진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대신 정의하고 판단하고 강요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 진짜 페미니즘은 이런 것이다. 자신들은 이런 것들만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한다. 그 밖의 것들은 페미니즘으로 인정할 수 없다. 먼저 자신들을 납득시키라. 자신들의 동의를 구하라.


간단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이나 수단들을 정의한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일본제국의 법과 제도 안에서 독립운동은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인 자신들이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일본인 자신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한다면 그때는 일본인 자신들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의 편에 서 줄 것이다. 그래서 과연 독립운동가들인 조선총독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독립운동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그들의 노선이나 방법이 정당하며 효과적인가의 여부는 자신들끼리 토론하고 논쟁하며 결정할 문제다.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는 자신들이 결정한다. 그에 대한 판단이나 행동 또한 자신들이 알아서 결정한다. 너희들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괜히 남성이 여성주의자의 논쟁에 끼어들어봐야 좋은 꼴 못 보는 이유다. 타인이다. 어떻게 해도 몇 다리 건너 남이다. 얼마나 여성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가. 여성들 자신을 위한 토론에 남성들이 어째서 자신들의 시각을 강요하며 끼어들려 하는가.


메갈리아를 응징해도 여성주의자들 자신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리하면 되는 것이다. 전혀 남인, 심지어 대상이기도 한 남성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밀리게 되면 남성들이 여성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결정하게 된다. 남성들이 동의하는 범위 안에서만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이 여성운동에 비판적인 남성에 의해 종속된다. 존재의 이유 자체를 부정당할 수 있다. 전쟁이다. 죽느냐 사느냐.


어째서 뻔히 보이는 여러 문제들에도 여성주의자들과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진보정당과 정치인들이 메갈리아의 편에서 네티즌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최소한 일베에 대해서 반대편의 네티즌들이 진정한 보수는 어떤 것이라며 그들을 정의하거나 강제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단지 일베라고 하는 커뮤니티의 평소 행동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보수 자체가 타겟은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도 그래서 일베를 쉽게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메갈리아 사태에는 여성주의가 걸려 있다. 메갈리아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여성주의적 성향에 동의하는 다수 개인들이 이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 발단이 되었던 성우 역시 메갈리아의 주장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일부 주장들에 공감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타겟이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행동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았어야지 여성주의까지 전선을 넓혀서는 안되었다.


말 그대로 메갈리아사태는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여성주의와 비여성주의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메갈리아라 할지라도 여성주의자로서 여성주의를 지키고 싶은 입장과 여성주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메갈리아를 이유로 여성주의를 문제삼으려는 이들의 싸움이 된 것이다.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말한다. 그런 것은 진정한 여성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여성주의는 이런 것이다. 진정한 여성주의자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 판단도 결정도 행동도 그들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 한다.


늬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너희들이 멋대로 단정짓고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 내버려두면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 갈등과 경쟁을 통해 결론지어졌을 문제였다. 여성주의를 길들이려 한다. 나 역시 이번 사태를 보며 느끼는 것이다. 여성과 여성주의에 부정적이던 이들 상당수가 메갈리아 사태에 편승하여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고 있다. 집단이 여성주의를 강제하려 한다.


서로 보는 것이 다른 것이다. 비여성주의자들에게는 여성주의가 대상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여성주의의 주체는 바로 자신들이다. 굳이 여성주의와 여성주의자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일방적인 믿음과 결정만을 강요하려 할 뿐이다. 그에 비하면 여성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이야기다. 자신들의 몫이다. 알아서 한다. 누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끝없이 부딪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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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바생 2016.07.27 04:17 신고

    글쓴이님은 메갈리아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시나보네요. 그런데 그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자신의 공격본능을 표출하는 것 뿐이죠. 페미니즘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의태한 것 뿐입니다.
    http://oceanrose.tistory.com/m/post/574

    이곳에 보면 이 사태의 배경을 잘 아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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