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체로 아재 인증일 것이다. 아니 할재인증일까?

 

"우리는 민족중흥의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국민교육헌장이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유교의 왕도정치에서 영향을 받아 나타난 사상이었다. 소수의 권력자, 지식인들이 다수의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올바로 이끌며 그들이 겪는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성과 합리에 근거헤 국민을 위한다던 계몽주의 아래에서 계몽군주들은 절대왕정 때보다 더 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절대왕정의 군주란 궁정의 군주였지만 계몽군주는 국민의 군주였기 때문이었다.

 

근대적인 국민교육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때 계몽군주와 소수의 지배계급에 의해 시작된 국민교육은 그야말로 국민을 만드는 교육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촌락단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을 주입시키고, 그 국가의 상징으로써 군주를 충성의 대상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더 효율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식들까지 가르쳤다.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무산계급의 해방을 외치던 사회주의자들마저 자기 조국과 군주를 위해 기꺼이 자원해서 전장에 나가고 수도 없이 죽어나간 이유였었다.

 

바로 그런 근대의 기반 위에서 전체주의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은 국민이었다. 하나의 정체성과 하나의 목표와 지향을 가지고 하나로 단결해야 하는 객체들이었다. 그렇게 이념화했고 교육했고 선동했으며 마침내는 그를 동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 독재자는 이전 어느 군주도 누리지 못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과연 이전 어느 군주가 히틀러처럼 효율적으로 학살을 주도하고, 스탈린처럼 전국민을 조직화하여 수 천 만에 이르는 이들을 숙청할 수 있었겠는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 역시 거의 중국 전토에서 준동한 사건이었었다. 내가 곧 국가이고 내가 곧 정의이며 그러므로 내가 가리키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가 처음에는 일제와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와 유착했던 이유인 것이다. 그들 역시 기득권이었다. 많이 배운 지식인이었고, 그 전에 무산자들을 착취하던 지주 자본가의 일원이었었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여성주의란 계몽의 주제였었다. 국민이란 그를 계몽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강제로라도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여성주의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여성주의만이 선이며 그런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자신들이 정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며 지도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

 

이수정이 참 솔직하다. 아니 전부터도 신지예니 장혜정이니 열심히 솔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라서가 아니다. 이수정의 아들은 특별하다. 당연하다. 있는 집에서 제대로 된 고차원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엘리트인 때문이다. 너희는 그렇지 못하다. 하다못해 이준석조차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가르치겠다. 바꾸겠다. 자신의 논리와 주장 아래 가두겠다. 주체로서 이해하려 하기보다 객체로써 강제하려고만 한다. 누구의 방식과 닮았을까?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이 민주진영을 싫어하는 것이다. 자칭 진보가 여성주의와 손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자칭 진보에 남은 것이라곤 여성주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에 대해 자칭 진보가 뭘 하고 있었을까? 노동자들의 권익을 개선하기 위핸 최저임금인상이나 근로시간단축, 최근의 대체휴일에 대해서 자칭 진보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오히려 중대재해법에 반대하는 국민의힘을 두고 노동존중의 정당이라고 찬양하던 놈들이다.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예 법안 자체를 반대하는 국민의힘과 손잡은 놈들이었다. 

 

국민은 주체가 아니다. 개인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들이야 말로 계몽의 대상이다. 그런데 계몽의 대상이어야 할 국민들이 마치 주인처럼 설치고 다니고 있다. 한겨레가 괜히 민주당 싫어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괜히 자기들 기사 트집잡는 지지자들 싫다고 덤벼라 문빠들을 시전한 것이 바로 한겨레였다. 너희 주제들이. 너희 따위들이. 그래서 저들은 정서적으로 국민의힘에 더 가까운 것이다. 성희롱이라면 성희롱이다. 성추행이라면 성추행이다. 근거를 요구하는 자체가 2차 가해다. 증거를 요구하는 자체가 2차가해다. 논리를 요구하는 자체가 2차가해다. 자살도 2차가해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리고 KBS는 본격적으로 그 본색을 드러냈었다.

 

사실 지난 촛불정국부터 시작된 갈등이기도 하다. 같은 여성이다. 최순실마저 같은 여성이었다. 김건희도 여성이기에 감히 비판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히려 김건희가 영부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승리일 수 있다. 윤석열을 비판하는 민주당 진영의 말꼬리를 핀셋으로 잡아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근혜가 물러난 순간 여성주의와 민주진영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것이 지금 여성주의가 적이 된 이유다.

 

아무튼 이수정 덕분에 더 확실해졌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구나. 하긴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이 비슷할 것이다. 여성주의라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대부분 면면들이 거의 이런 부류들일 테니까. 무산자 남성 뿐만 아니라 무산자 여성까지도 저들에게는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 겪고 주장하는 모든 현실들도 단지 계몽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주의에는 여성조차 없다. 혐오하는 이유다. 혐오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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