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야당에서 차기를 노릴만한 거물이 등장하는 것은 정부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그것을 차기를 위한 새로운 아젠다로 이어갈 때인 것이다. 즉 자기 논리와 주장으로 정부를 비판하면서 한 편으로 그 비판을 새로운 정책에 대한 대안으로 이어갈 수 있을 때 그는 차기를 노릴만한 인물로 대중들에 각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어떤가.

 

윤석열이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지지까지 다 빨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그동안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가장 악랄하게 치명적이고 효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를 공격해 온 것은 다름아닌 윤석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그저 편하게 그런 윤석열의 난동에 편승했을 뿐이었다. 윤석열이 검찰과 언론을 이용해서 한바탕 정부와 여당을 휘저어주면 그보다 한 발 늦게 국회에서 국민의힘이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을 내놓는다. 그래서 어떤가. 지금 야권 대선후보 가운데 윤석열을 제외하고 주목받는 사람이 비슷하게라도 보이기는 하는가.

 

그래서 곤란한 것이다. 일단 윤석열은 국민의힘 소속이 아니다. 국민의힘의 이념이나 강령에 동의하는 존재가 아니란 뜻이다. 지금은 반문재인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손잡고 있지만 윤석열은 국민의힘이 아닌 오로지 검찰이라는 조직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검찰주의자다. 자칫 윤석열이 대선후보가 되거나 하면 국민의힘은 검찰에 완전히 먹혀 버릴 수 있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검찰을 어르고 달래느라 얼마나 힘을 쏟았었는데. 그렇다고 윤석열 빼고 국민의힘에서 대선후보를 찾으려니 사람이 없다. 사람이 있어도 대중이 알지 못한다. 심지어 국민의힘에 힘을 실어주어야 할 보수언론마저 반문재인을 위해 윤석열에 올인하는 상황이니 어떻게 해도 답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국민의힘의 딜레마일 것이다. 최선은 대선정국이 시작될 때 쯤 윤석열이 자연스럽게 빠져주는 것일 터다. 그런데 그 전에도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대한 강고한 40%대의 지지율을 더 흔들기 위해서는 윤석열이 더 설쳐주어야 한다. 추미애 장관의 직무정지 처분에 국민의힘의 반응이 상당히 뜨뜻미지근한 이유인 것이다.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썩 윤석열을 싸고 도는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필사적이라면 정의당일 것이다. 정의당은 윤석열 하나 바라보고 반문재인 코인을 탔다고 봐야 할 텐데 윤석열 나가리 되면 류호정을 대선후보로 내보내야 할 상황이다.

 

아무튼 당의 역량이 아닌 외부의 인사에 기댄 반정부활동의 결과인 것이다. 당의 역량을 강화해서 실력으로 정부와 겨루려 하기보다 정부에 반대하는 외부의 역량에 너무 기대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차라리 국민의힘이 윤석열을 영입하는 것이 아닌 윤석열이 국민의힘을 흡수하는 그림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황교안이 장외투쟁에 맛들려 자유한국당의 재정을 고갈시킨 덕분이란 것이다. 돈이 없으니 사람이 없고 사람이 없으니 실력도 안되고 그런데 윤석열이 나서주니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게 결국 자기들에게 독이 될 줄도 모르고.

 

더구나 어찌되었거나 윤석열이 국민의힘을 흡수하든 어찌됐든 대선후보로 나온다면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가. 안철수가 가지고 있던 딜레마 가운데 하나다. 중도층 중에는 민주당도 싫지만 보수당은 더 싫은 사람들이 적잖이 존재한다. 민주당 하는 꼴 보기는 싫은데 보수당은 더 싫은 사람들이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이들을 습관적으로 지지해 온 것이다. 과연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윤석열을 지지하면서 국민의힘 소속 후보로 나오는 것도 용인할 것인가.

 

그나마 지금 국민의힘에서 머리 좀 쓴다는 사람은 김종인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지금 국민의힘 안에서도 윤석열 편에서 발언하는 놈들은 원래 친검인사들이었고. 그래도 보수당이면 엘리트집단이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것도 이제 옛말이 된 것 같다. 능력도 없고, 비전도 없고, 자존심도, 당에 대한 자부심도 찾아볼 수 없다. 애잔하기조차 하다.

사찰이 사찰인 이유는 위력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대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부당하게 인신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을 사찰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은 반드시 권력을 동반한다. 권력 없이 아무리 다른 사람의 정보를 모아봐야 사찰도 뭣도 아니다. 

 

더구나 사찰이라고 반드시 남들이 모르는 사생활의 비밀스런 부분들을 헤집고 다니는 게 아니다. 사찰이라면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질텐데 그 정도 정보를 알아내려면 결국 그 동안 어디선가 사실이 새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의 통제와 지배 아래 있는 범위에서 공개되었지만 유용하다 생각되는 정보를 걸러내는 방식으로 대부분 사찰은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그런 정도 정보로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것이 권력이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찰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찰을 하는 것은 그것을 이용할 의도와 그럴 수 있는 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다. 없는 죄도 만들어 재판에 넘길 수 있고 있는 죄도 아예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더구나 양승태 사법농단 수사를 통해 다수 판사들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있던 검찰이었기에 그들이 판사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판사들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냥 간단히 보면 된다. 언론들이 지금 검찰을 무서워하는가? 대통령을 무서워하는가? 윤석열을 더 어렵게 여기는가? 민주당을 더 어렵게 여기는가? 그 자존심만 있던 한겨레조차 검찰총장의 위세 앞에 아예 오체투지하며 살려달라 애걸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검찰이 판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논란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변호사가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판사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다. 검사 개인이 그러는 것도 역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검찰총장의 지시 아래 검찰조직이 나서서 판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심지어 반부패수사부에 넘기기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차직하면 바로 수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액션이 아니겠는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변호사가 판사를 찾아가 개인적으로 협박을 하겠는가. 검사 개인이 판사를 찾아가 위협을 하겠는가. 다만 배후에 살아있는 권력 검찰총장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를 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변수는 있다. 판사가 스스로 자기들은 버러지고 검찰의 하수인이라 여기고 있을 경우 이번의 판사 사찰건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기게 될 수 있다. 아니 검찰이 하는 일이면 모두 옳다고 검찰의 다른 이들의 사생활에 대한 사찰을 정당하다고 면죄부를 줄 가능성도 있다. 양승태나 김명수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판사들이라고 제정신 박힌 경우가 매우 드무니까. 과연 판사들은 이번 일을 검찰과의 관계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자신들의 상활을 역전시킬 계기로 생각할 것인지. 판사들 자신이 괜찮다고 하면 그처럼 골때려지는 상황도 없을 테니까.

 

하다하다 변호사 로펌에서 판사들 세평 수집하는 것까지 갖다대며 윤석열의 판사사찰을 옹호하는 논리로 쓰고 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검찰인사를 위해서 경찰에서 인사대상자의 세평을 수집한 것을 두고 위법한 사찰이라며 기소까지 한 상태다. 하여튼 웃기는 짜장들이다. 며칠째 설사로 힘도 없는데 웃기도 힘들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윤석열은 때려죽여도 추미애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더구나 정치에 발을 딛는 순간 지역구만 5선의 정치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제대로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 윤석열이 정치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유력 대선주자로서 대중의 앞에 서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바로 그동안 정권타도를 위해 공동전선을 펼쳐 왔던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연대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다.

 

추미애가 그동안 계속해서 윤석열을 자극해 온 이유였다. 윤석열을 정권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줄 생각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검찰총장 자리에 앉아 있도록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기회를 본 것이다. 윤석열이 자기 입으로 직접 정치를 하겠다 선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이 선언만 하면 언론들은 하나가 되어 윤석열을 띄울 것이고 유력한 대선주자가 없는 야권의 지지는 윤석열에게로 쏠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차기 대선을 노리는 국민의힘 내부의 인사들이 동요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차기 대권에 아주 욕심이 많은 인물이 지금 국민의힘의 얼굴이 되어 활약하고 있는 중이다. 국민의힘과의 고리만 약해지면 윤석열을 쳐내더라도 반발 역시 최소화할 수 있다.

 

더불어 그동안 윤석열이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다며 언론과 하나가 되어 밀고 왔던 조국 전장관 가족 재판이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조국이든 정경심이든 아무거로라도 형량이야 어떻든 유죄판결만 받으면 그래도 윤석열로서도 할 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들이 잘못 수사한 것이 아니다. 무리한 수사를 했던 것이 아니다. 손혜원 재판에서도 보았듯 1심 판결이 수사든 보도든 그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추미애 장관은 바로 그 시점에 윤석열이 사법부를 사찰한 사실을 공개하며 윤석열과의 고리를 끊는 한편 경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은 끝났다. 윤석열의 협박을 받았거나, 혹은 처음부터 손잡고 있었거나 어찌되었든 지금부터 생각을 잘 해야만 한다. 재판의 결과가 윤석열의 기대와 다르면 그 순간 윤석열은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의 징계사유로 제기한 6가지 가운데 이 두 가지가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윤석열이 검찰을 이용해 사법부를 사찰했다. 그리고 윤석열이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중립의 의무를 저버리고 정치선언을 했다. 그러면서 묻는 것이다. 하나는 사법부에, 하나는 국민의힘에. 그래도 윤석열을 믿고 윤석열의 편에 설 것인가. 그냥 윤석열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대통령이 못되더라도 당내경선을 통해 차기 대선후보로 선출된다는 것은 홍준표가 그랬던 것처럼 대선 이후 상당기간 당의 주도권을 틀어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심이 없을까? 그리고 그 머리좋다는 판사들이 윤석열 끈떨어진 연 신세 된 것을 눈치채지 못할까?

 

처음부터 계획에 있었는지 모른다. 윤석열을 때리면 때릴수록 궁지에 몰리는 만큼 야권의 지지율이 윤석열에게로 모이게 될 것이다. 윤석열을 조금씩 함정에 빠뜨레 궁지로 내몰면 살기 위해서라도 무모하게 정치선언을 하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이 윤석열의 마지막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그런 윤석열을 부추겨서 지금 상황까지 몰고 왔으니. 과연 지금 궁지에 몰린 윤석열을 누가 목숨바쳐 구해줄 것인가. 한동훈이 아쉬울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윤석열 대망론의 실체는 한 마디로 야당실망론이다. 야당에 희망이 없다. 야당에 대안이 없다. 참여정부시절처럼 야당인 국민의힘이 정부와 여당을 거세게 몰아치고 그래서 때때로 승리도 거두고 궁지에도 몰고 했다면 윤석열 대망론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검찰이 대놓고 정치질하는 것을 두고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소재로 삼았어야 했다. 오죽하면 법무부 외청인 검찰의 수장따위에 정권 전체가 휘둘리고 있는 것인가. 정권만 휘둘리는 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혼란과 반목이 심해지고 있다. 보수정부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진짜? 

 

문제는 야당이 제대로 정부와 여당을 공략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에 전혀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검찰이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수사를 하면 거기에 기대서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하는 소재로 삼고 있을 정도다. 당장 눈에 띄는 쓸만한 정치인도 없고, 야당으로서 정국을 주도할만한 새로운 아젠다도 내놓지 못하고, 그렇다고 정부와 여당의 실정을 아프게 지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윤석열은 검찰총장으로서 정부와 여당이 곤란해 할 만한 수사를 실제 진행 중에 있다. 차라리 윤석열에게 기대를 걸어볼까?

 

언론이 윤석열 대망론을 적극 퍼뜨리고 있는 실제 이유인 것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다. 야권에서 윤석열을 차기 대선후보로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서. 작년 조국사태에서도 드러났었을 것이다. 실제 당시 자신들이 어떤 의도로 기사를 쓰고 있었는가를 후회와 함께 토로하듯 기자의 이름으로 SNS에 얼마전 올라온 바도 있었다. 조국을 죽였어야 했다. 조국이 죽었어야 했다. 조국을 노무현처럼 만들겠다. 그러면 조국 뿐이겠는가? 저들이 진정 죽이고 싶어한 것이 조국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당시 한겨레 기자 하나가 그렇게 울분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덤벼라 문빠들아! 진짜 한겨레와 경향이 죽이고 싶었던 것은 누구였을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은 이명박 정부의 탈원전과 같다. 실제 한겨레 기자가 올린 워딩 그대로다. 조국은 우병우고, 정경심은 최순실이고, 울산시장선거는 박근혜의 선거개입이었고, 또 뭐가 있더라? 그래서 국민의힘이 노동존중의 정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여성존중의 언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의당이며 자칭 진보언론들이 그냥 아무일없이 보수정권을 지지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그들은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하려 할까? 조중동이야 당연하고 자칭 진보들이 저토록 필사적으로 보수의 정권탈환을 위해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저들의 진짜 목적이다. 이번에야 말로 문재인을 죽여서 친노친문의 지긋지긋한 싹을 뿌리까지 뽑아버리겠다. 아마 문재인 이후로 예상되는 사람들까지 이번에는 진짜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그래서 윤석열인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도 그런 언론의 기대에 부응하려 열심히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을 향한 자신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한 언론은 오로지 자신의 편에 서 줄 것이다. 자신의 편에서 모든 사실과 진실을 감추고 왜곡해서 오로지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보도해 줄 것이다. 자기가 문재인을 죽이려 하고 죽일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언론은 언제나 자신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그를 위한 합작품이다. 윤석열은 문재인을 공격하고, 언론은 윤석열을 차기 대선후보로 띄워준다.

 

말하자면 윤석열 대망론이란 문재인 대통령과 친노친문의 뿌리까지 뽑아 버리고 싶은 언론의 열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윤석열이 대통령만 될 수 있으면. 윤석열이 검찰을 장악한 채 차기 대권까지 가져갈 수 있다면. 한 번 피맛을 본 놈들이란 것이다. 작년 조국 사태 당시도 그 피맛을 못잊어 날뛰던 놈들이란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놈들이 정신차려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문재인을 죽이고 민주당에서 친노친문의 흔적조차 모두 지워 버리고 말겠다. 저들의 목표다. 조중동, 국문세, 매경한경, 한경오, 프레시안 등등등등등... 얼마나 기쁜가. 그런 윤석열이 양자대결에서 이낙연을 이기는 여론조사결과까지 나왔으니.

 

정신들 좀 차리란 것이다. 이낙연이네 이재명이네 싸우는 건 좋은데 민주당 자체를 공격하여 상처입히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주당을 갈라치기해서 네 편 내 편 나누며 증오를 내보이는 것이 과연 진짜 누구를 위한 일일 것인가. 저들은 이쪽을 죄다 죽일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는데 자기들끼리 싸우기만 바쁘다. 자칭진보가 탈원전과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다. 다시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이다. 적은 안에 있지 않고 오로지 밖에 있다. 한심한 것이다. 저들의 살기는 진짜다. 실제인 것이다.

현재 자칭 진보들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방송인 박지희씨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단지 방송에서 자신들과 다른 자기 생각을 - 그것도 법을 어기지도 일반의 상식과 통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닌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같은 여성인 계약직 방송인이 실직하도록 사실상 압력을 행사했다. 여성이 노동자보다 우위에 있다.

 

박지희씨 뿐만 아니다. 진혜원 검사에 대해서도 검찰 상층부를 움직여 징계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서지현 검사에 대해서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강요하며 그녀가 겪은 성범죄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 했었다. 유시민 이사장이 하필 알릴레오 시즌3의 첫주제로 '자유론'을 들고 나온 이유인지 모르겠다. 그냥 생각은 생각 그 자체로 자유롭게 내버려두라. 강제하고 강요하고 그를 검증한 뒤 심판하려 한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정의당이 굳이 국민의힘에 노동존중이란 찬사를 바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찬사를 바치기 위해 류호정은 굳이 대통령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예상했었다. 국민의힘과 이미 사전교감을 가지고 저딴 짓을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류호정은 조선일보 행사에 쪼르르 달려가 자신의 충성심을 인증해 보이고 있었다. 저들에게 노동이란 어떤 가치인가. 과연 노동이 무언지 알기는 하는 것인가.

 

내가 자칭 진보의 노동관에 대해 비웃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노동자다. 그것도 육체노동자다. 그런데 그런 나를 가르치려 한다. 노동이 뭐고, 노동의 현실은 어떻고, 씨발 내가 늬들보다 더 잘 안다. 임대인의 삶 또한 내가 너희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 편으로 이해한다.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개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잔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배신감을 느껴 개미를 증오하게 된 인물이 나온다. 노동은 망상이다. 노동자란 이상의 존재다. 그래서 현실의 노동자를 견뎌하지 못한다. 너희가 어딜 감히. 민주당도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이해와 상관없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너희들이 진정으로 위해야 하는 국민이란 것이다.

 

같은 노동자라도 여성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여성이라도 자신들의 여성주의에 동의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고, 그래서 그 여성주의를 위해서 여성존중과 노동존중의 보수와도 기꺼이 손잡을 수 있다. 역시 말했잖은가. 미투란 박근혜 탄핵으로 체면을 구긴 여성주의자들의 반격의 수단이었다고. 여성주의란 다시금 자칭 진보와 자칭 보수가 연대하기 위한 고리였다. 여성이라는 명분이 있기에 자칭 진보는 기꺼이 반여성의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에 노동존중이란 헌사를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자칭진보다. 노동이란 단지 여성을 위한 수단이다.

 

노동존중의 국민의힘과 여성존중의 조선일보,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 2중대는 치욕스러워도 국민의힘 2분대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공공임대주택도, 탈원전도 자신들이 주장해 온 많은 것들을 그를 위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박근혜의 유산인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될 줄 알았다면 탄핵도 시도하지 않았다. 후회가 읽힌다. 피가 흐르는 듯하다.

원래 진보진영의 주택정책은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이 핵심이었었다. 집은 사는(buy) 곳이 아니라 사는(living) 곳이다. 국가에서 책임지고 저렴하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대량으로 지어 공급함으로써 서민들의 주거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장기적으로 부동산가격도 안정시켜야 한다. 주거 또한 복지며 인간의 기본권에 속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과연 공공임대주택이라는 것이 반드시 아파트여야만 하는가. 아니 주택이라는 것이 내가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이 아닌 이상 반드시 내 조건에 내 마음에 딱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혼자 사는 청년들이나, 혹은 그리 넓은 평수가 필요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가능한 조건 안에서 최대한 임대주택을 확보해서 공급한다. 만족할 만큼 넓고 좋지는 못해도 그만큼 저렴한 가격에 용이하게 출퇴근도 할 수 있는 도심 가까운 곳에 전세물량으로 공급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그 정도 조건에도 만족할 수 있는 수요가 빠져나가면 그 이상 조건의 주택들에 대한 경쟁도 용이해지게 된다. 그래서 도저히 하지 못할 정책이란 것인가.

 

자칭 진보언론과 정당과 지식인들의 이번 국토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하긴 요즘 돈 없으면 진보도 하지 못한다. 돈 많아도 알아서 기술까지 배워가며 가난한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그냥 냉난방 잘 되는 사무실에서 서류나 뒤적거리며 때되면 피켓 들고 거리에서 소리나 지르는 정도다. 아파트가 아니라고? 넓지 않아고? 조건이 열악하다고?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서민들이 지금 어떤 환경에서 어떤 조건에 집을 구해 살고 있는지 알고나 떠들고 있는 것인가. 지금부터 아파트를 지으려 해도 몇 년은 족히 걸릴 텐데 당장 정부가 재정과 행정력으로 내놓을 정책이 따로 무엇이 있을 것인가.

 

항상 비판은 쉽다. 그래서 인터넷을 보더라도 대부분 비판하는 글들이다. 인터넷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것도 누군가를 비판하는 이슈인 것이다. 옹호는 힘들다. 그만큼 구체적으로 사실을 알고 이해해야 그를 옹호하는 말도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안 좋고, 저래서 안 좋고, 그런데 원래 이사가 그렇다. 이 집을 가 봤더니 이런 점이 안 좋고, 저 집을 가 봤더니 이런 점이 아쉽고, 그래서 이것저것 현실을 고려하여 타협한 뒤 그 안에서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강제로 의무적으로 들어가 살라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조건에도 만족할 수 있으면 일단 정부가 보증할 테니 살아보라. 아파트가 좋은 점이 무언가. 공동관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LH가 공급하는 공공임대주택이면 확실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나도 내가 사는 집 소유주가 LH면 10년은 더 살아도 마음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뉴스를 보니 나름대로 고민해서 내놓은 합리적인 정책이더만 도대체 얼마나 좋은 집들에서 살고 있기에. 반지하월세방에서 살았다는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보기에도 그 집들이 그리 못 살 만큼 형편없는 집들이었는가. 확실히 저놈들과 나는 섞일 수 없는 관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돼지새끼들이다. 누구 말마따나. 그래서 늬들이 안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사만 9번은 넘게 했었던 것 같다. 가장 오랜 기억은 2살 적 구로동 철로변이었는데, 이후로 도림동에서 대림동으로, 대림동 안에서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국민학교 입할 할 때까지만 6번의 이사를 해야 했었다. 거의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한 것이다. 그나마 국민학교 입학하고 나서는 전학 문제 때문에 이사 회수가 줄기는 했는데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4번은 집을 옮겨야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진짜 이사 많이 다녔다.

 

그래도 나의 경우는 운이 좋았었다는 게 전학까지 가야 할 정도로 멀리 이사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우리집처럼 가진 것 없이 겨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에서 사는 환경이 바뀐다는 건 그만큼 일을 구하는 것부터 많이 어려워지는 너무 큰 일인 것이다. 어차피 일이라는 게 주위와의 인적 네트워트를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서 이사를 가고 나서도 일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멀리 떨어져 사는 옛이웃과 연락하며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래서 더 멀리 이사가지 못하고 늘 그 주변만 맴돌았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월세나 혹은 전세 때문에 주기적으로 한 번 씩 이사를 다녀야 했던 것이 당시 집없는 대부분 사람들의 애닲은 처지이기는 했었다.

 

그래도 일단 임대계약을 맺으면 2년 동안은 계약이 유지되어야 한다. 임대계약과 관련한 별다른 의사표명이 없으면 암묵적인 갱신으로 간주하여 동일한 조건에서 계속 임대계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제 임대계약을 4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보호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는 전세나 월세를 일정 이상 올릴 수 없고 임차인이 직접 들어와 거주하는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임대인의 주거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어차피 원래 2년 계약이 지나면 얼마든지 전세든 월세든 자기 원하는대로 올려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계약종료를 이유로 내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으로 인해 임대인이 더 곤란해졌다? 예전에는 굳이 집주인이 들어와 살겠다는 핑계조차 필요없이 바로 내보낼 수 있었고, 전세도 마음대로 올려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이전에는 계약기간이 끝나고도 집주인과 합의 아래 굳이 이사가지 않고도 계속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들 있다. 임대차보호법의 보호기간이 4년으로 연장되기 전에는 임대료만 더 원하는대로 올려주면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계속 살던 곳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임차인이 올려달란다고 전세며 월세며 다 맞춰주며 계속 살 수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된다는 것인가. 대개 이사가는 이유가 주변 집값 올랐다고 임차인이 전세며 월세며 임대료 올려달라 하면 그 돈 맞춰 줄 돈이 없어서 이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 4년은 임대료 인상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 그랬더니 임차인의 요구로 이사가야 하는 특수한 사례를 들어 부작용이라며 떠들어댄다. 이전까지는 그런 핑계도 소용 없었다니까. 2008년이었던가? 내가 굳이 이사를 해야 했던 이유 역시 집주인이 그냥 나가달라 하기에 2년 살고 나가야 했던 경우였었다. 그냥 집에 고양이 기르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나가라 하는데 뭐 어쩌는가. 덕분에 출퇴근에 10분이나 더 걸리는 곳으로 옮겨가야 했었다.

 

원래 전세라는 제도가 상당히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제도란 것이다. 금리라도 높으면 전세금 받아 이자라도 받아먹는데, 제로금리의 시대에 전세금 2년 굴려서 얼마나 더 돈을 불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2년 계약기간 지나면 그 돈 그대로 임대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오히려 물가인상까지 고려하면 손해나는 장사이기에 전세임차인의 입장에서 전세금을 계속 올려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집값도 따라서 오르니까.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전세금이 집값을 넘어서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다. 아니면 20년 치 월세를 전세로 한꺼번에 받아서 20년 동안 조금씩 까먹으며 살거나. 그 역시 물가인상을 고려하면 영 손해다. 그러니까 원래 전세 오르지 않고 몇 년을 계속해서 살아도 되는 경우란 그냥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전세는 올려받아야 하고, 전세 오른 만큼 맞춰 주지 못하면 이사해야 한다. 그래도 2년 동안 보장해 주었는데 이제는 4년 동안 전세를 따로 올리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있다. 지금 임대차보호법의 부작용이라는 내용들은 원래 임대인들이 겪어 오던 현실들이었단 것이다. 언제는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가격에 내가 원하는 조건의 전세나 월세가 넘쳐났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한 번 이사를 하려 하면 며칠을 발품을 팔아가며 집을 보고 다녀야 했었다. 이 동네가 싸다 해서 그리도 다녀보고, 저 동네면 출퇴근에 조금 더 유리할 것 같아서 그리로 훑으며 다녀보고, 부동산 몇 곳을 돌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더 싸고 더 조건 좋은 집이 없나 일일이 찾아보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집이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때에 바로바로 나와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부분 임대인들이란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지 못한 조건일 텐데 자기 형편에 맞는 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와 주겠는가. 그래서 차라리 출퇴근 때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내 형편에 맞게 내 집을 가져보겠다고 외곽에 집을 사기도 하는 것이고, 그래도 서울 중심부에서 살아야 자식 교육에도 유리하다고 충분히 집을 살 수 있는 여건임에도 굳이 전세를 살기도 하는 것이다. 전세 구하기 힘들다. 언제는 아니었을까?

 

확실히 요즘은 돈 많아야 기자도 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아니 기자를 노려도 될 만큼 학벌이 좋으려면 당연히 집안에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세라는 게 그냥 구하려면 구해지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가 원하는 조건의 전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는 것이다. 전세기간이 끝나더라도 인심좋은 집주인이 전세금도 올리지 않고 그냥 전세를 연장해준다. 이야 이런 지상낙원이. 그러나 내가 아는 전세란 당연히 전세기간이 끝나면 전세 올려줘야 하고, 전세 올려줄 돈이 없으면 며칠이고 발품을 팔며 주변의 집들을 돌아보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조건에 맞는 집을 찾지 못하면 타협하고 들어가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현실은 그런데 언론이나 혹은 네티즌들이 말하는 현실은 어떠한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집이라는 게 그리 쉽게 나와주는 게 아니다. 아주 운좋게 있더라도 발품을 팔지 않으면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지금 사는 집도 집주인의 사정에 의해 내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임대차보호법인 것이다. 원래 어렵고 힘든 것이 이사이고 그래서 자기집을 그리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과연 살아온 환경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른 것인가. 보는 현실도 다르다.

참여정부 시절 나는 한겨레를 진보언론이라 믿었었다. 경향은 그보다 더 중도적인 합리적인 언론이라 여겼었다.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다른 어떤 언론보다 무미건조하게 오로지 사실만 전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들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나서면 나 역시 따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아무리 이 정도 언론들이 나서서 비판하면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지금은? 한겨레 경향이 언론이면 조선일보가 정론이다.

 

지금 한겨레나 경향이 무어라 정부를 비판해봐야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나 댓글읽어주는 기자 등에서 언론비판도 하고 4차언론혁명 어쩌고 떠들어봐야 오히려 혐오감만 더 깊어질 뿐이란 것이다. 그래서 과거 한겨레와 경향을 신뢰했으니 지금도 한겨레와 경향을 내가 신뢰해야 하는가? KBS를 신용하고 있었으니 지금도 KBS를 신용해야 하는가? 언론의 자유란 무엇보다 소중하다 여겼던 과거의 나 자신에 대해 오늘 싸지른 설사를 집어던지는 중이란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와 다르다. 그래서 뭐? 사람이 한 입으로 두 마디 세 마디 하는 게 당연한 거지 어떻게 평생 한 가지 주장만 하는가?

 

유명 화가가 그린 미공개 작품이 발견되면 그림의 구도나 구성, 붓의 터치 등을 종합해서 그려진 시기를 유추하기도 한다. 같은 작가가 쓴 시와 소설도 시기마다 각각 개성이 다 다르다. 그래서 사람인 것이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바뀌게 된다. 나이를 먹으며 키도 자라고, 눈도 나빠지고, 혹은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승진도 하고, 실직도 하고, 누군가를 잃은 상실감에 울기도 한다. 그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항상 같을 것인가. 가장 강경하게 노동운동을 하던 활동가라고 정작 정부부처에서 장관이 되면 그때 주장하던 정책들을 온전히 행동에 옮길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저 원균조차도 이순신 장군이 파직당할 당시까지 자기라면 부산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겠다 큰소리치다가 정작 대신해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고 나니 권율에게 곤장을 맞기까지 못하겠다며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자일 때 다르고, 시민운동가일 때가 다르며, 청와대 참모인 때와 장관일 때가 다르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정부 정책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도 잘 모르던 학자시절에 모르고 떠든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래서 너무 하찮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물류일을 해보기 전과 해보고 난 뒤에 물류에 대한 내 인식부터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 말이다. 노가다를 직접 뛰어보기 전과 뒤의 노가다에 대한 내 생각도 그만큼 많이 달라져 있다. 공직을 맡지 않았어도 과거 자기가 알던 사실이나 혹은 자기가 추구하던 논리나 지향과 많이 달라져서 주장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과거 말을 이유로 그를 폄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지금 위치 쯤 되니 달리 보이고 그래서 다른 결론도 내리게 된다. 그런데 다른 분야는 다 그게 허용되는데 어째서 민주당에는 용인되지 않는 것일까.

 

조로남불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언행일치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추구한 가치이면서 정작 대부분 사람들은 지키지 못한 원칙이었단 것이다. 말 그대로다. 선 위치가 다르고, 사람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도 모두가 달라지는 법이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행동이 다르다는 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결혼하기 전, 자식을 낳기 전, 자식이 자라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하던 생각은 이후의 생각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대 시절 내가 믿건 가치대로라면 나는 벌써 죽어 시체가 되었어야 옳다. 40세 이후의 나 자신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으니.

 

중요한 것은 인과관계다. 그리고 당위다. 과연 정의의 관점에서 그 주장이 타당하고 옳은가. 그러한 주장의 변화 과정에서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제시되었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과거와 다른 주장을 해도 납득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일관적인 주장을 펴는데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예전 이런 주장을 했었는데 지금은 어째서 달라진 것인가 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인간의 지성이란 본능이 아니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청나라 도광제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서도 청렴하기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황제임에도 낡은 옷을 수선해서 입으며 황궁의 예산까지 20만냥을 넘지 않도록 했으니 여러모로 조선의 영조와도 비견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신들조차 채소장수와 흥정을 한다는 조진용이나 청렴으로 이름높은 고기야 무장가 같은 이들이 총애받았다는데, 과연 그렇게 청렴한 이들로 채워진 조정이란 얼마나 나라를 바르게 부강하게 이끌었을 것인가. 참고로 건륭제 재위말부터 쇠락하기 시작한 청은 도광제 재위기에도 오히려 몰락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청렴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 배나 되는 비싼 돈을 주고 낡은 옷을 사서 입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라의 대신이란 내 주머니를 위해 채소장수와 흥정하는 자리가 아닌 채소장수의 주머니도 채워줄 정책을 고민하는 자리여야 하는 것이다. 나라의 대신이란 이가 돈 얼마 아끼겠다고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순간 백성은 더이상 목적이 아닌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도 오히려 채소장수와 흥정을 해서 돈 얼마 아낀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과연 제대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만한 위인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가진 재산이 있고 누리는 것들이 있는데 일부러 안 가진 척, 누리지 않는 척 남들 앞에서만 아닌 척 살아간다는 자체가 이미 위선인 것이다. 그 수고와 그 노력과 그 비용과 그 시간을 차라리 진짜 백성들을 위하는 일에 쓴다면 더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히 더 비싼 옷이 좋은 것이다. 더 비싼 스마트폰이 기능도 많고, 더 비싼 태블릿이 쓰기에도 더 좋고, 더 비싼 노트북이 보안이나 성능에서 여러모로 유리하다. 이코노미석을 이용하며 얼마간 비행기값을 아끼는 것보다 퍼스트클래스에서 보다 편안하게 이동중에도 업무를 보는 쪽이 더 이익일 수 있다. 더 크고 좋은 집에서, 더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더 영양많고 맛도 좋은 음식을 맛보면서, 필요하다면 운전기사를 따로 두고 이동간에 차안에서 업무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래서 뭐가 문제란 것인가. 좋은 가방을 샀으니 기분도 좋고, 혹은 쉬는 날 요트를 타고 바다를 누비니까 한 주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이름난 디자이너의 멋진 옷을 샀더니 왠지 어깨가 으쓱거린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법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좋은 과외교사도 붙여주고, 좋은 학원도 알아봐 주고, 보다 진학에 유리한 학교에도 보내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공인으로서 얼마나 공적인 일들에 충실했는가.

 

원래 가진 것이 많아서 그만큼 누리고 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직분과 권한을 이용해서 따로 사익을 편취하지 않았다면 원래 가진 것으로 얼마나 사치스런 삶을 살든 전혀 문제될 것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형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나름대로 자기만의 사치를 누리며 살아간다. 어제보다 오늘 수입이 더 좋으니 기왕에 먹는 술 더 좋은 것으로 먹어 보겠다. 안주도 조금 더 비싼 맛난 것으로 먹어 보겠다. 그러니까 내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을, 내 가족을 위해 이것저것 다양하게 많은 것을 해보고 누려도 보겠다. 뭐가 문제인가. 다만 그를 위해서 자신의 공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집안에 돈이 수 십억 있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벌어들인 재산이면 전혀 문제될 것 없는 것이다. 그 돈을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증여의 형태로 물려주고 싶다. 세금만 제대로 냈으면 역시 문제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증여는 하고 싶은데 세금은 내고 싶지 않다. 5천만원까지는 원래 세금 없이 증여가 가능하다. 그래서 뭐? 공인이니 돈 수 십억 있어도 죄다 기부해야 하고, 대학교수인데 옷도 기워서 입어야 하며,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데 자식들을 능력이 안되는 이들처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과연 돈이 있어 그 돈을 충분히 쓰면서 사는 삶이란 것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인맥이 있어 그 인맥을 자식을 위해 쓰는 것이 또한 도덕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도덕적인 문제이기는 한 것인가.

 

역시나 왜곡된 유교문화의 유산일 것이다. 전에도 말했던 대동사상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공사의 구분이 없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이고,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다. 개인이 번 재산을 개인이 쓰는 것마저 공적인 것이 되고, 공인으로서 공무를 보는 것마저 사적인 논리로 이해하게 된다. 조국 전장관에게 씌워진 위선이라는 낙인의 정체인 것이다. 대학교수라니까. 20대 때부터 이미 대학교수였었다. 부인은 친정에 재산이 적지 않아 유산도 상당히 받았었다. 대학교수로서의 인맥과, 자신들이 가진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환경들로 인해 가능해진 많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비로소 위선적이지 않은 삶인가. 청렴하고 올바른 삶인 것인가. 백사 이항복이 청백리로 이름높은 인물이었지만 집안의 재산까지 다 내놓고 빈곤한 삶을 살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가난해서 청백리가 아니라 부정한 재물을 탐하지 않아서 청백리인 것이다.

 

도덕이라기보다는 그냥 편견이고 이기인 것이다. 내가 못하니까. 내가 할 수 없으니까. 평범한 서민이 조국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조국 전장관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자식들처럼 기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자본주의니까. 자본주의 이전에 인간의 삶이었다. 막걸리도 심지어 한 병에 만 원이 넘어가는 것이 있더라. 증류식 소주는 한 병에 몇 만 원이 기본이다. 야, 저런 건 어떤 돈많은 놈들이 사먹는 것일까? 그래서 자기 돈 많아서, 혹은 좋아해서 그런 걸 사먹는다고 도덕적으로 뭐라도 대단한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자기 돈 많아서 수 천만 원짜리 가방을 사고, 수 억짜리 장신구를 하고, 수 백억을 호가하는 대저택에 산다면 그래서 공적으로 무슨 해악이 있다는 것인가. 돈이 있어서 법이 허용한다니 펀드에 가입하고, 인맥이 있어서 입시에 도움이 된다니 인턴도 하고, 남이 하지 못하니 부도덕하다? 도대체 학교 다닐 때 도덕에 대해 뭘 배운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수능에 요즘 도덕이 포함이 안되는 것일까?

 

금태섭의 증여든, 손혜원의 증여든, 조국의 증여든, 결국 세금만 제대로 냈으면 전혀 아무 문제도 없는 일상적 행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 많은 것이 죄가 아니다. 돈 많은데 없는 것처럼 속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위선이지 내가 가진 만큼 누리고 쓰고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공인으로서 얼마나 자신의 공적인 역할을 책임을 가지고, 오로지 사심없이 수행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인으로서의 책임이고 도덕성이다. 위선을 말하려면 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돈 많고, 인맥 많고, 그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다. 배아픈 걸 도덕이라 말하는 것은 오히려 파렴치한 것이다. 

 

유시민의 평가가 적절하다. 조국은 성인이 아니었다. 오로지 무소유의 청렴한 삶을 살았던 역사적인 위인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금태섭 논란을 보며 새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다 쓸데없다. 쓸데없는 시간낭비 노력낭비 비용낭비란 것이다. 조국에 대해 들이댄 도덕적 잣대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면 도대체 개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인가. 32인치 4K모니터 쓰는 나는 24인치 HD 모니터 쓰는 사람을 위해 항상 고개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도덕의 기준부터 다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어느 시대든 공직을 맡을 정도면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려져 있고 그만큼 명성과 재산을 모두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더이상의 재물을 부정하게 모으지 않아 가난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원래 가진 재산이 많은데 그 재산마저 다 처분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가. 그래야 공직자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기준부터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광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였는가. 그 기준마저도 일관되지 않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조국사태에 대한 소회다. 전에 한 번 썼었던가. 한심하다.

어째 이상하기는 했다. 하긴 한겨레가 정신줄 놓은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닐 것이다. 어제 한 말 씹고, 오늘 한 말 뒤집고, 탈원전 주장하다가 현정부의 탈원전은 범죄라며 검찰수사를 옹호하는 것들이 바로 한겨레란 것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수처반대의 입장을 드러낸다는 건 조금 부자연스럽다. 뭔가 이유가 있다. 뭐지?

 

아침부터 성한용 개소리 들을 뻔하고 나서 김용민 방송을 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박시영이 하겠다던 그 여론조사를 해봤구나. 그랬더니 윤석열에게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가 나왔다. 잘만 하면 윤석열이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째야겠는가. 차기권력인데 줄서야지. 원래 똥이나 핥아먹던 똥걸레였지만 더 충성심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아, 그래서 류호정도 박용진도 조선일보가 부른다고 좋아라 찾아간 것일까?

 

국민의힘이 지금 대선정국까지 시간을 끌어 민주당이 더이상 공수처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려는 의도라는 것은 정치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지금 공수처를 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하고 있다. 어떻게든 좌절시키고 무산시키려 하는 중이다. 그런 국민의힘에 맞추라. 국민의힘을 기다리라. 국민의힘의 동의를 구하라. 즉, 공수처같은 건 하지 마라. 누구를 위해서? 바로 윤석열 차기 대통령님을 위해서.

 

한겨레가 저리 목숨걸고 나서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겨레가 이명박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다. 개인의 비위만 있을 뿐 대통령으로서 국가는 매우 훌륭히 운영했었다. 아, 이 기사 쓴 놈도 성한용이었던가? 뭐가 그리 좋아서 저리 찬가를 불러댄 것일까? 덤벼라 문빠들아. 한겨레가 문빠들에게 한 방 먹이려면 무엇이 가장 효과적일까? 말한 바 있었다. 윤석열을 지지하는 놈들 가운데는 이명박근혜의 복수를 하려는 놈들이 상당수 포함된다. 

 

그래서 탈원전을 4대강과 빗대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탈원전을 털어서 이명박의 4대강처럼 만든 뒤 그리고 다음은... 아마 모두가 예상하는 그것이 아닐까. 정의당이 국민의힘을 위해 입안의 혀처럼 차마 부담스러워 하지 못할 말을 대신해주고 있는 이유와 같다. 그때만 오면. 그날이 오면. 민중가요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작년부터 저쪽 인간들의 노선은 일관되었었다. 문재인 대통령 탄핵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 그리고 그 다음... 대놓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저쪽 놈들이나 그놈들을 지켜보는 이쪽 지지자들이나. 박시영 덕분에 한겨레가 더 솔직해지게 된 것 같아 한 편으로 대견키도 하다. 너무 솔직해서 헛웃음만 나온다. 똥걸레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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