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무언가? 민주정부에서 검찰총장이면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다. 대통령도 검찰총장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물며 장관이야. 한낱 검사장 나부랭이가 법무부장관에게 들이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검찰이란 조직이다.

 

윤석열의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0%에 언론이 광분하는 이유다. 경향일보는 신이 났는지 코로나로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인해 시급하게 처리한 추경안에 대해 시비걸고 나섰다. 미래통합당이 아예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아서 민주당 단독으로 처리한 것인데 정의당까지 미래통합당 편에서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저들이 누구의 편에 섰는가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참고로 내가 아는 자칭 진보놈들은 그리 서울대 좋아하더라.

 

검찰은 사법부가 아니다. 당연히 행정부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수사기관으로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외청으로 분리되어 있고, 청장이 아닌 총장이라 불리며 장관급 예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법부무산하의 외청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의 인사를 받아야 하고,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그러고보니 법무부장관이 검찰인사를 했다고 언론들이 검찰과 함께 지랄지랄 했었지.

 

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에 들이받는 건 항명인데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을 생까는 건 충돌이란다. 검사장 나부랭이가 법무부장관에게 덤비는 것도 '화살'이 된다. 피의자로서 수사받으면서도 당당히 소환을 거부하고, 포렌식도 거부하고, 오히려 상관인 법무부장관을 공격한다. 그런데 비판하는 언론 하나 없다. 오히려 잘한다 치켜주는 언론들 뿐이다. 어느 언론이라고 특정할 것 없이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간덩이가 커진다. 이런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사실 이미 지난 1월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황교안을 넘어섰을 때 윤석열의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즉 지금 윤석열의 차기 대선 지지율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란 것이다. 현재에 대한 확인이다. 윤석열은 옳다. 윤석열은 강하다. 청와대와 맞서기 위해서. 청와대와 민주당을 까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윤석열은 옳아야 하고 강해야 한다.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윤석열이 대통령만 되면 너희들 다 죽었다. 아마 경향과 한겨레 기자놈들은 윤석열이 삼청교육대라로 만들어서 문빠들 조질 꿈에 들떠 있을 것이다. 진중권이 바라는 것도 그런 것 아니던가. 윤석열은 그런 존재여야 하고 그런 사실을 지지율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미친 것이다. 그보다 무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고용형태란 직고용이고 정규직이어야 한다는 전제조차 이해 못하는 놈들이 기자란 것들이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고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받는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아예 무시한다. 검찰은 청와대를 공격하는 첨병이어야 한다. 언론이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망나니가 되어야 하듯. 물론 검찰과 언론에 철퇴를 내릴 수 있는 보수정부에서는 예외여야 한다. 그러다 다치거나 진짜 죽을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윤석열이 야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다고 대선에 나오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유시민은 어째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까? 칼잡이들의 한계다. 유능하면 몸에 피를 묻혀야 하고, 무능하면 무시당하고 만다. 당장 이재용만 해도 잡아넣으면 삼성과 보수진영과 척지게 될 테고, 잡아넣지 못하면 중도 이하 유권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만다. 박근혜와 이명박을 잡아 쳐넣은 윤석열이 얼마나 보수진영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보수진영의 지지를 받을 정도면 중도층은 얼마나 그의 무능을 비웃을 것인가. 물론 모를 것이다. 그게 기자란 것들이니까.

 

아무튼 한겨레 경향 정의당 이렇게 신난 것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박원석은 아예 유튜브 나와서 검찰 편을 들더만. 명백하게 나온 판결을 가지고서도 검찰을 옹호하면서.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윤석열 대선후보 나오면 보수와 진보가 하나가 되는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대신 같이 망하고 말 테지만. 윤석열이 대통령? 바퀴벌레가 웃는다.

 

딱 그 정도다. 윤석열을 대선후보로 띄워주는 언론이나, 그것도 좋다고 날뛰는 윤석열 검찰이나. 그런데 지금 상대하는 건 180석 여당과 청와대거는. 추경까지 혼자서 처리할 정도다. 재미있을 것이다. 지켜보는 보람은 있겠다.

원래 노동력이 필요해서 사람을 고용할 때는 직고용이 원칙인 것이다. 그리고 장기간 정기적으로 노동력을 사용할 것이라면 그에 걸맞는 조건과 예우를 갖추는 것이 옳다. 그것이 정규직이다. 잠시 쓰고 버리는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함께 일해나갈 동료로써 그 신분과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실 정규직이란 개념도 노동권이 크게 높아진 뒤에나 나타난 개념이고 그 전까지는 필요하면 고용해 쓰다가 필요없어지면 바로 해고해 버리는 임시직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오랜동안 함께 일해 온 직원이라면 그 기여와 신뢰 만큼이나 예우와 보상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정규직이란 자체가 노동자의 신분과 지위,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여 노동자의 동의 없이 임의로 해고할 수 없으며 법이 정한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하도록 정의된 현대의 고용형태란 것이다.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정규직이 오히려 당연한 상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 1990년대까지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해서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경비업체를 통해서 고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비원들조차 사용자가 직고용해서 각종 복지까지 제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그래서 처음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노동계가 반발했고, 그러니까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잠시 비정규직을 공요해 쓰더라도 장기간 정기적으로 같은 업무를 맡길 것이면 정규직으로 고용해 쓰라며 의무화하는 법까지 제정했던 것이었다. 노동자에게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상식이며 비정규직이란 단지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임시적으로 고용해 쓰는 특수한 고용형태인 것이다.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실제 필요로 해서 고용해 쓰고 있는 이들이다. 일시적으로 필요가 생겨서 잠시 고용해 쓰는 것도 아니고 인천국제공항이 존재하는 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력들이란 것이다. 그런데 정규직은 부당하다 주장한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실제 고정적으로 필요한 인력이고 실제 투입되어 장기간 동일업무를 수행하고 있건만 여전히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옳다고 주장한다. 누가? 언론이. 지식인들이. 정치인이. 무엇보다 국민 자신이. 좋은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내세울만한 번듯한 스펙도 없는 사람들을 직고용해서 정규직의 신분까지 주는 것은 불공정하다. 좋은 대학 나오고 내세울만한 번듯한 스펙이 있는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것이다. 순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워낙 비정규직이 보편화되다 보니 비정규직이 정상이고 정규직이 특혜가 되어 버렸다.

 

아무나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정규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자격을 갖춘 아주 특별한 소수만이 정규직이라는 신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정규직으로서 누리는 권리들을 허락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긴 지금 20대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의해 직접 고용되는 정규직이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비정규직은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고, 오히려 성장할수록 계약직만 더 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정규직이 되어 보란 듯이 살기 위해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해 온 것일 터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무나 누구에게나 정규직이란 기회를 열어주려 하다니. 비정규직이 정상이고, 외주계약직이 일반적이고, 직고용하는 정규직은 비정상이며 특혜다.

 

인천국제공항 논란이 정말 개같다는 이유인 것이다. 공정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용자가 필요해서 고용하면서 노동자의 신분과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계약직이란 형태를 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오히려 비용도 더 들어간다. 급여와 복지에 더해 용역업체의 운영비용까지 사용자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태인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계약직으로 직원들을 채우려는 이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 논란에서도 나온 논리였었다. 직고용해서 정규직으로 만들면 파업부터 할 것이다. 파업해서 자신들의 급여와 복지를 더 높여달라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안되는 것인가? 노동자인게? 하지만 자기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생각하니까. 화이트칼라가 되고, 공무원이 되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게 된다.

 

그런 논리구조인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 직고용을 반대하는 대중의 논리란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당연하다. 학교 다닐 때 좋은 대학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징벌로써 신분도 불안정하고 처우도 열악한, 더구나 사회적으로 차별까지 받는 계약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규직은 자신들처럼 노력까지 한 선택받는 소수만이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기사를 쓰는 것들이 나름대로 정규직이랍시고 노조에까지 가입한 언론사 기자란 것들이란 것이다. 거기 부화뇌동하는 이들 역시 저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은 이른바 취업준비생들이란 것이고.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든다. 과연 저들은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들을, 아니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계약직들을 과연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기는 한 것인가. 하필 어제 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인식의 범위와 한계를. 노동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규직으로 직고용하면 없는 TO도 생기고, 인건비 지출도 늘어난다. TO에도 없고, 인건비 지출도 없었다. 그런 게 언론이란 것들이고, 정치인이란 것들이고, 지식인이란 것들이고, 심지어 인간이란 것들이다.

 

기본적인 권리인 것이다. 누구나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란 것이다. 상식이어야 한다. 필요해서 고용하면 직고용이어야 한다. 장기간 정기적으로 일정한 업무를 맡기려 한다면 그 형태 또한 정규직이어야 한다. 이미 오래전에 그것은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본이 기본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린다. 구분과 차별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지금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은 특혜를 누리는 것인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있는 것인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본다. 정말 언론같다.

뭣도 모르던 시절에는 진짜 심각하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 민족에게는 창세신화가 없는 것일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한민족만의 서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한때 환단고기에 이끌리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원래 우리 민족에게도 창세신화가 있었는데 유교화의 과정에서 망실되었고 일부 지역의 무가에 그 흔적이 남아 전해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은 신화든 역사는 인류적인 관점에서 넓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논쟁이 이루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물성동이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성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과 대비되는 물物이라는 것이 사람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사물 정도가 아닌 문명화된 중화 이외의 다른 이민족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중화를 이루었다면 사람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족인 만주족 역시 사람이 아니기에 과연 그들에게도 사람과 같은 성이 있는가를 진짜 쓸데없이 심각하게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는 중국도 중화로 여겨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므로 중화는 이제부터 조선만 남게 된 것인가? 

 

그러면 과연 조선만 그랬을까? 19세기 교황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바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당시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은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들의 학살과 약탈과 강간은 범죄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것들로부터 신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중한 권리를 되찾는 숭고한 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는 벌써 오래전에 개종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집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학살인데 집시는 학살조차 아니다. 오만가지로 욕을 들어먹는 히틀러와 나치지만 그러나 집시학살을 가지고 욕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 정도다.

 

아무튼 그런 맥락인 것이다. 유대인의 유일신인 야훼는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창조주인 것인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북유럽 등 세계의 수많은 창세신화에서 창조주들은 이 세계와 함께 모든 인간들을 함께 창조했던 것인가? 유대인들이 여리고성을 함각할 당시 대항하던 성민들에 대해 했던 행동들을 보면 최소한 유일신 야훼에게 있어 여리고의 성민들은 최소한의 연민이나 동정조차 가질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인류를 자신이 창조했다면 여리고의 성민들도 자신의 창조물일 텐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창조물일 블레셋 등 다른 이민족에 대해서는 그토록 적대적이고 잔혹하기만 했던 것일까?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하느님이라고.

 

그러니까 모세와 약속하며 전한 십계명에서도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짜 신이 아니다. 신을 참칭한 존재가 아니다. 분명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아들들밖에 없었을 텐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났을 때 야훼는 그런 카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고자 했었다. 야훼는 단지 유대인만의 신이었고, 더구나 유대인이 섬기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었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한 방에 해결이 된다. 즉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러 민족들과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러야 했던 유대인들이 필요에 의해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하여 유일신으로 받들기 시작했다면 이 모든 모순들이 설명되는 것이다.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가 필요했기에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했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몰아주었으며, 그러므로 야훼는 단지 유대인의 신이었다. 야훼에게도 유대인만이 자신의 창조물이며 자신의 백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민족들에 대해 그리 잔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야훼의 백성도 창조물도 아닌 그냥 이물이었으니까.

 

세계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렇다. 아니 신화 이전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이란 자체가 그랬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모두 시골이라는 서울촌놈들처럼 자기들 이외에는 사람도 아니었고 문명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사람이었고 자신들이 이룬 것만이 문명이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의 창조주가 예정한 것이고 허락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학살하고 약탈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주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유럽의 백인들처럼.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도 없이 학살과 약탈과 방화와 강간이 저질러졌지만 유럽의 백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 여기지 않았었다. 오히려 원래 자신들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었다. 과연 고대라고 달랐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그 세계가 좁고 세계에 대한 인식도 얕았던 당시라면 더 나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이다. 설사 자신들보다 앞선 문명을 이루고 있어도 자신들의 신이 예정한 바에 따라 곧 자신들의 지배 아래 들어올 하찮은 존재들이란 것이다. 그런 존재들까지 신이 자신들처럼 공을 들여 창조했을까? 저들의 신이 창조했을 것이고, 설사 신이 창조했어도 들판의 사슴이나 말처럼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유대인의 신은 사람을 창조한 것이었다. 유대인에게 유일한 사람일 유대인을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창조했던 것이었다. 구약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다.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유대인을 창조하고 유대인에게 시련과 영광을 준 뒤 영원을 약속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래서 유대인의 율법이고, 구약의 약속 또한 유대인을 위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등장한 것이었다. 야훼가 아닌 데우스라는 이름으로, 유대인만의 신이 아닌 모든 인류의 신으로써. 

 

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귀절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이미 당시 예수의 세계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넘어서 로마가 정복한 모든 세계와 심지어 그와 맞서는 파르티아에까지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차별받던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예루살렘과 대성전마저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단지 작은 주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영광스러워하는 솔로몬의 제국보다도 더 거대한 세계가 아시아였고, 그 아시아마저 정복한 로마는 그보다 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파르티아와 그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신 역시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자신들의 신이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창조했다면 신이 예정한대로 이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신을 배반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즉 예수의 신약이란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과 약속한 구약을 벗어난 세계의 신이 세계의 인류와 맺은 새로운 약속이란 의미인 것이다. 비로소 유대인의 신은 유대인을 벗어나 세계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신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했었다.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의 왕과 유대인의 제사장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과 달리 유대인을 벗어난 세계의 모든 인류, 대중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었다. 초기 교회가 다시 구약을 불러들인 이유였었다. 새로운 종교지도자들인 주교들을 위해서도 필요했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될 황제를 위해서도 필요했었다. 사실 그래서 영지주의도 기독교를 전혀 엉뚱하게 이해한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소수에게 독점되는 비밀스런 것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것이었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말 한 마디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성직자에게 복종하라거나 교회에 충성하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수의 하느님은 세계의 하느님이고 전인류의 하느님인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예수 스스로 그렇게 실천하고자 했으니까. 이슬람의 하느님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신은 세계로 나와 세계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오히려 여전히 유대인의 구약시대에 갇혀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뭐하는 존재들인 것인가. 유대인의 율법을 강조하며, 유대의 역사를 자기 역사처럼 배운다. 배척과 증오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과연 지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유대의 율법인가, 아니면 신약의 가르침인가. 예수의 것인가, 유대인의 것인가? 아이러니한 것이다.

 

결론은 단군신화에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한 가지란 것이다. 이미 단군신화가 만들어질 무렵 조선인들은 국경 너머의 중국문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다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문명과 그 문명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이웃해 있었다. 그렇기에 하늘의 선택을 받은 존재로써 자신들을 그들과 구분지으려 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신들의 군주는 자신들만을 위한 존재였다. 홍익인간도 결국은 세계 보편의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인지가 미치는 영역 내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다. 인류를 이해하기란 아직 인간의 인식이 미천했다.

내가 유튜브 같은 건 못하겠다 여기는 이유다. 실시간 토론도 그래서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다. 내가 떠들면서 나 자신이 그에 대한 반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다. 가끔 그렇게 자연스럽게 떠올린 반론들이 원래의 의도를 잡아먹을 정도가 되었을 때 중간에 쓰던 것을 접거나 다 쓴 글을 바로 지우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냥 보기에는 국회의장 박병석이 미래통합당과의 합의 아래 본회의를 열어보겠다고 몇 번이나 꼬장을 부리며 개회를 미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보이는 것만이 전부였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어제 본회의 마지막 시한을 앞두고 한 번 풀어 놨었는데 덕분에 오늘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다. 일단 결정하고 나니 일사천리다. 미래통합당과의 합의에만 집착하는 듯 보일 때는 그리 답답하고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만 일단 결정되고 나니까 모든 것이 신속하다. 야당출신 부의장의 동의 없이는 선출할 수 없는 정보위원회를 제외한 17개 상임위의 위원장이 그렇게 29일 미래통합당에 대한 마지막 통보 이후 바로 본회의가 열리고 통과되고 말았다. 마치 원래 그러기로 예정되었던 것처럼.

 

물론 모른다. 보이는 그대로 박병석이 미래통합당과의 합의를 고집하며 꼬장을 부리다가 여론과 청와대, 무엇보다 원소속정당인 민주당의 압박을 못견뎌 고집을 접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통합당이 하다하다 너무 심하게 나오니 자기도 모르게 빈정이 상해서 민주당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 것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어제 쓴 글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자칫 너무 빨리 너무 성급하게 18개 상임위를 모두 받았다가는 오만하게 비칠 수 있으니 최대한 미래통합당에 양보하며 협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미래통합당이 그래도 버티면 그때 상임위 선출까지 밀어붙이자. 결과적으로 20대 국회 당시 미래통합당이 법사위를 틀어쥐고 법안도 통과시키지 않으면서 원외투쟁으로 국회를 마비시키던 상황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끔 만들었다. 이 놈들은 원래 이런 놈들이로구나. 어떻게든 국회를 열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민주당에 비해 국회를 여는 것조차 조건을 달며 미래통합당은 한가롭고 여유롭기만 하다.

 

미래통합당이 의도한대로는 안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민주당 180석과 그들의 오만함을 강조하며 이후 국회에 대한 무한책임을 강요하려 했었는데 시간을 너무 끌고 말았다. 일단 민주당이 먼저 많은 양보를 했었고, 이후 협상과정에서도 많은 양보를 제안했음에도 대부분 국민들에게 전혀 크게 와닿지 않을 법사위만 고집하느라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오만한 모습만 오히려 보이고 말았었다. 국회를 여는 것은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그 조건이란 것이 대통령에 대한 국정조사까지 포함된 지극히 당리당략을 우선하는 것들이었다. 민주당은 최선을 다했고 미래통합당은 그런 여당으로서의 민주당의 책임감마저 이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아무튼 어쩌면 지금 열어서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몇 주 전 너무 일찍 단독으로 본회의를 열고 상임위원장까지 선출했다면 언론과 야합한 미래통합당의 수에 넘어갔을 수 있다. 그조차도 누를 힘이 지금 민주당에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라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책임지는 모습은 보이되 오만하게 비쳐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박병석 국회의장이 영 못한 것은 아닌 듯한데. 그럼에도 그동안 열불터지게 한 것 생각하면 그런 정도 여론의 압력은 있어야 했다 스스로 납득시키고 만다.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는가. 욕한 것 사과한다. 일단은 잘했다. 칭찬한다.

생각해보면 180석 가졌으니 상임위 18개도 민주당이 다 가져가라는 것은 미래통합당이 파놓은 함정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건건마다 180석을 이야기하며 민주당이 오만하다는 인상을 퍼뜨리려 언론들부터 필사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임위도 의석수에 비례해서 나누기보다 민주당이 다 가져가며 독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의회독재라는 언론이 만든 프레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기껏 180석 몰아줬더니 의석수를 앞세워 야당을 배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민주당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과연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국민의 여론은 어떻게 움직이게 될 것인가.

 

그동안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민주당은 당장 시급한 현안들을 앞세워 당장 단독으로라도 본회의를 열고자 했다가 국회의장에게 막혀서 매번 미래통합당에 원구성과 본회의 개회를 사정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국민이 준 압도적인 수의 의석이 있으니 책임지고 주도하여 모든 현안들을 처리하되 그러나 미래통합당과의 협상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래통합당은 매번 같은 말의 반복에 더구나 승기를 잡았다는 양 새로운 조건까지 추가해서 내걸고 있다. 윤미향 의원의 국정조사며 대통령의 대북외교에 대한 국정도사가 도대체 지금 상황에 왜 튀어나오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한 달 가까이 민주당은 인내하며 미래통합당에 계속해서 대화의 손을 내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생각한 것처럼 박병석이 원래 미친 놈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내일 큰 반전이 일어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국회의장은 충분히 미래통합당의 입장을 배려하고 있었다. 자기당 지지자와 국회의원들에게까지 온갖 비난과 욕을 들어가며 국회를 멈추고 미래통합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법사위는 민주당이 가져간 상태다. 이미 결정된 상임위장을 이제와서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아무리 미래통합당이 요구한다고 민주당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노선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절대 민주당으로서도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다. 그러면 그 법사위원장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어디의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법사위원장을 민주당이 가져간 순간 지금 상황을 아주 예상 못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당시는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벌써 한 달이다. 한 달 째 본회의도 열지 못하고,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며, 그냥 시간만 보내고 세비만 받아 챙기고 있는 중이다. 국민 여론이 또 그런 건 보아 넘기지 못한다. 국회를 열라. 국회를 열고 일부터 시작하라.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본회의를 열고자 했던 것은 민주당이었고 거부한 것은 미래통합당이었다. 미래통합당이 주장하는 요구조건이라는 것은 본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들이었다. 대통령에 경제부총리까지 나서서 추경을 재촉하는 상황은 국회의장에게도 명분이 되어준다. 달말이 되었으니 더이상은 늦출 수 없다.

 

물론 그냥 망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병석이 그냥 국회의원 배지만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앉을 것이 아니면 자신의 원소속당인 민주당과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현명치 못한 행동인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도왔던 지역구의 조직들이 있지 않은가. 시의원, 도의원 등등 자신들을 따르던 사람들이 아직도 지역구에 적지 않다. 그래도 다음 지역구 후보의 선출에도 영향력을 미쳐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인의 은퇴가 그냥 물러나기만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구나 6선이라면. 권력이란 그렇게 지독한 중독이기도 한 것이다.

 

반전을 기대해 본다. 참을 만큼 참았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주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양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은 안된다. 추경이 시급하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당장 추경이 필요한 국민들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일하는 국회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날 만큼은 본회의를 열고 무언가 결과를 국민들에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그럼에도 과연 박병석이 그만한 그릇이 되는가의 의문이 남는다. 그냥 병신이라면? 그냥 멍청한 또라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루를 기다리기가 참 지치는 이유다. 어느 쪽일까? 기대를 아주 접지는 못하겠다. 희망이 고문이다.

그러고보니 경비니 보안원이니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예 없는 존재인 양 여기는 사람들을 현실에서 제법 보게 된다. 원래 전근대사회에서도 사람이 아닌 여성, 아이, 천민, 이민족 등은 아예 인구통계에서도 빠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고, 병역도 지지 않았으며, 대신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았었다. 그런 의미일까?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면 인천국제공항 신규채용TO가 줄어들 것이다. 보안요원들로 인해 인건비가 상승해서 기존의 정규직들에 불이익이 가게 될 것이다. 또 뭐가 있더라? 하도 뭣같은 소리라 눈여겨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아, 정규직으로 채용되면 바로 노조 만들어서 직렬도 옮기고 급여도 더 올리려 할 거라고? 직장생활 한 번도 안 해 본 티가 바로 팍 난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보안요원을 정규직으로 만든다고 없는 TO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냥 기존에 외주로 주던 인력 가운데 다수를 자회사에서 직고용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직고용한다. 원래 잡혀 있던 TO이고 멀쩡히 인건비도 지불되던 인력인데 단지 그 고용형태만 바꾸는 것 뿐이다. 외주용역이라고 아예 TO도 없이 돈도 안 주고 부려먹는 게 아니라 몇 명의 인력을 얼마의 돈에 쓸 것이란 내용의 계약까지 다 맺고 돈도 지불한 뒤 외주용역업체의 책임 아래 인력들을 관리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때 원청에서 용역업체에 지불하는 인건비에는 용역업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비용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건물의 출입통제를 엄격하게 하려면 보안요원이 30명 정도 필요하다. 그러면 보안요원 개인당 연간 3000만원으로 계약하면 용역업체는 그 가운데 자기들 쓸 몫을 제하고 실제 보안요원들의 임금을 책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30명에게 3000만 원 씩 지급하는 총액 9억이 한 해 원청이 지불하는 인건비인 셈이다. 그리고 용역업체는 이 3000만 원 가운데 자기들이 쓸 얼마간을 제하고 실제 보안요원들의 급여로 책정하게 된다. 이 가운데는 보안요원들이 쓰게 될 복장이며 여러 집기들에 대한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중간에 용역업체 빼고 원청이 보안요원을 직접 고용하게 되면 인건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용역업체가 가져가는 몫 가운데 절반을 급여로 더해주고 절반은 원청의 몫으로 가져간다. 괜히 노동자를 위해서도 직접고용의 형태가 더 낫다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용역업체 몫까지 책정된 전체 인건비 가운데서 실제 보안요원들에게 지급되는 급여를 올려주며 복리후생까지 포함해서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소리다. 즉 용역업체의 몫으로 빠져 있던 TO와 인건비가 인천공항공사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일 뿐 새로운 TO와 인건비 지출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원래 없던 인력도 아니고, 오히려 그동안 계속해서 근무하던 인력들일 텐데 단지 고용형태가 바뀐다는 이유로 TO가 줄고 인건비가 는다는 건 도대체 무슨 논리인가. 노동자의 파업권을 보장한다고 생산직으로 사무직으로 바꾸고, 기술직을 전문직으로 바꾸는 식의 직종전환까지 요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안요원 10년 하다가 사무직 하면 참 잘 하겠다. 이 역시 패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란 거지?

 

그냥 정규직 시켜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전체 보안요원 가운데 전문성과 숙련도가 요구되는 실제 검색을 담당하는 보안검색요원들만을 정규직으로 직고용함으로써 신분과 대우를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바로 공항에서 X레이와 검색기로 금지물품의 반입을 찾아내고 혹시 모를 불온한 침입의도를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정규직 전환을 천명한 2017년 이후 입사자들은 시험까지 치러야겠다. 이전부터 정규직 전환여부도 모른 채 열심히 묵묵히 일해 왔던 이들은 면접과 인성검사만으로 합격시켜주고, 그 이후 입사자들은 이미 공지가 되었으므로 시험까지 치러서 합격자만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겠다. 불합격자들도 구제할 방법을 마련하겠다. 역시 아무 문제가 없다.

 

연봉 5천만 원은 일단 개구라인 게 밝혀졌다. 아무도 사실확인같은 건 않고 기사부터 배설하고 있었다. 사실 연봉 5천 쯤 받아도 별 문제가 안되는 일이기는 하다. 매일같이 인천국제공항까지 멀리 출퇴근하면서,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긴장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가운데 밀수나 혹은 테러와 관련되었을지 모르는 승객의 소지품을 찾아내는 중요한 임무까지 수해야 한다. 그동안 별 일 없었으니 문제지 미국도 9.11이후 아예 관련관청에서 공항 보안요원들을 직고용하는 형태로 바꾸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인천국제공항 등에 주로 지원하는 경비학과 가운데는 사격훈련까지 하는 곳도 있는 뭐가 그리 잘나서 마음대로 무시하고 그러는가.

 

역시 세상물정 모르는 것들이란 것이다. 지금 대부분 기업들에도 직렬이 다른 무기계약직이 적잖이 있을 텐데 과연 그들이 직렬을 바꿔달라고 요구하거나 하는 경우가 실제 있기는 하던가. 다만 복리후생 면에서 정규직을 기준으로 조금만 더 챙겨주었으면 하는 바람 정도는 있을 것이다. 원래 기분 문제인 것이다. 노가다 뛸 때도 새참 안 나오면 참 기분 거지같았었다.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자신들이 문제라 여기는 부분이 도대체 어디의 무엇인가?

 

그냥 신분제인 것이다. 정규직이란 신분이다. 비정규직 역시 신분이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마땅히 해결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는 노력과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응징은 필요하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은 자격이 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아니라 생각하는가. 역겹기만 한 것이다.

내가 아직도 노동가치설을 믿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직장에서 얼마나 하는 일에 걸맞게 급여와 대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실 하나다. 얼마나 이직률이 높은가. 그러니까 도저히 이 돈에 이 대우 받고 이런 일은 못하겠다고 박차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을 얼마나 좋은 일자리인가?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 급여 높다는 사실이야 전부터 들어 알고 있기는 했었다. 사실 김두관 의원의 말과 달리 1년 연봉이 3천만 넘어도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꽤 할 만한 일자리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거의 3백 가까운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의 급여는 얼마나 높은 것인가. 그런데 이직률이 높다. 그만두고 나온 사람들이 하는 말도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까지 출퇴근하는 것도 일이고, 교대로 낮밤 바꿔가며 일하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몸이라도 편한가? 마음은 또 편한가? 그러고 그만두고 연봉만 천만 원 이상 적은 일을 하면서 차라리 병원비 아꼈다고 말한다. 도저히 다시 그 일은 못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인천국제공항이란 나라의 첫째 관문으로 특히 보안요원들의 전문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장소라는 것이다. X레이 검색대를 통과하는 수하물 속에서 금지물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승객들에 대한 검색을 통해서도 혹시 모를 금지물품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니 더 오래 일하고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잘하게 될 수밖에 없는 나름대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보안요원들이 급여와 근무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때되면 나가 버리니 항상 인력난에 허덕여야 한다. 비숙련 보안요원들로 인해 사건사고도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런 보안요원들 오래 붙잡아 놓으려고 급여와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과연 낭비일 것인가.

 

그냥 3500만 원짜리라서 별 것 아니라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도 과연 3500만 원 받고 그 일을 할 것인가. 얼마나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얼마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구인광고 볼 때 얼마나 자주 올라오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자주 올라오는 곳은 뭐라도 좆같은 게 있다. 특히 급여가 높은데 너무 자주 구한다면 절대 피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건 상당히 아주 심각하게 좆같은 일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열심히 10년 넘게 그 일을 해 왔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써 정규직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벌을 주어야 한다 생각한다. 열심히 살지 않은 벌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그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 사무직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징벌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연봉 3500만 원 이상 받는 일을 하는 건 너무 과분하다. 감히 정규직이 되는 것도 너무 과분하다.

 

장담한다. 그 돈 받고 정규직 되면 나라도 그 일 하겠다. 못한다. 특히 사무직 공무원 지원하던 사람들이라면 설사 시작해도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생산직 가운데서도 인천공항공사 보안요원들보다 더 많이 받는 일자리고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안한다. 왜?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세상물정을 모르던가, 아니면 뼛속까지 사악하던가. 볼수록 같잖기만 하다.

아주 오래전 - 사실 그렇게 오랜 건 아닌데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드는 예전 어느 때 - 안철수가 '극중주의'라는 것을 들고 나온 것을 보고 한 마디 한 적이 있었다. 극중주의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극단이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치우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양쪽의 한 가운데 위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넘치고 모자르고 치우치는 그 사이의 수많은 공간 가운데 어느 한 곳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넘치고 모자르고 치우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냄비에 라면을 끓이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너무 작은 냄비라서 라면 봉지에 적힌 대로 550ml의 물을 넣었더니 넘치려고 한다. 혹은 너무 큰 냄비라서 550ml를 넣었더니 겨우 바닥에 찰랑거리는 정도다. 혹은 혼자 먹을 때는 물을 절반만 부어 끓이면 되었는데 친구가 놀러와서 두 사람 몫을 끓이려니 아슬아슬하게 겨우 들어간다. 그런데도 중용을 지켜야 하기에 물을 절반만 부어야 한다. 당장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냄비가 작은 것 같으면 물도 줄이고 스프도 줄이고, 냄비가 너무 크고 넓어서 면이 완전히 잠기지 않는 것 같으면 끓이는 도중 한 번 뒤집어주고 풀어주는 요령도 필요하다. 한 마디로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물이라 다행이지 넣는 것이 얼린 고깃덩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공자도 예를 강조하면서도 오히려 예를 너무 엄격하게 고집해서는 안된다 말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옳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두 사람 모두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중간지점이면 되는 것인가. 지식 없는 지혜란 없다. 인지없는 의식도, 의식없는 사고도 존재할 수 없다. 알아야 한다. 지금 두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이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더 구체적으로 더 상세하게 더 명징한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통해서 엄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 중용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고 나의 판단도 틀릴 수 있다.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피해서는 안된다. 둘 다 모두 옳고 모두 틀릴 수 있기에 말하지 못하겠다. 지금 당장은 말하지 않겠다. 나중에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당장 두 사람은 나의 판단을 구하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가장 비겁한 순간인 것이다.

 

아주 오래전 타진요라고 하는 미친 놈들이 에픽하이의 타블로를 상대로 진실을 밝히겠다며 인터넷에서 온통 난장을 쳤던 적이 있었다. 아마 인터넷에서 목소리 좀 내던 인간들은 거의 거기 휩쓸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평소 정의로운 척 제법 하던 인간들 대부분이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타블로는 물론 그 가족과 주변인들까지 온통 헤집으며 상처입히고 있었으니. 그런데 그때 역시나 중립적인 척 객관적인 척 꽤나 하던 인간들 가운데 양자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던 놈들이 몇 있었다. 공중파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타진요는 타블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타블로도 타진요가 요구하는 사실들을 나서서 밝히라. 무슨 의미인가. 명백히 타진요가 일부 사실들을 트집잡아 부풀리고 왜곡해서 타블로와 그 주변을 무리하게 공격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양자의 입장을 모두 긍정하자. 근거도 희박한 타진요의 주장은 일부가 긍정되고, 명백한 사실인 타블로가 입은 일방적인 피해도 일부만 인정된다. 이 뭔 개똥같은 짓거리인가.

 

강간범과 강간피해자 사이를 진정으로 중재하려 한다면 강간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입장부터 정해야 하는 것이다. 강간인가? 아닌가? 강간이라는 행위가 실제 있었는가? 없었는가? 강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일단 강간인가 아닌가 다음에 서로에 대한 책임 여부를 따져 볼 수 있는 것이다. 강간인데 사실은 강간이 아니다. 강간은 아닌데 사실은 강간이었다. 사실은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모든 성행위는 강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관계를 갖기 전에 상대의 동의를 구했는가? 아닌가? 상대가 동의했다면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동의의사를 전달했었는가? 구체적인 동의가 있었다면 강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고, 동의없이 성관계를 했다면 다만 전후맥락에 따른 처벌수위만 달라지는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강간인가? 아닌가? 그러면 그를 전제로 어떻게 해야 두 사람 사이에 서로에게 이익이 될만한 원만한 해결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중립이어야 하니까.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되니까 끝까지 강간이라고 주장하는 피해자를 윽박지르게도 되는 것이다. 강간이라고만 계속 주장하며 고집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인 것이다. 네가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사회적으로 목소리 좀 낸다는 사람 가운데 그런 경우가 제법 많다는 것이다. 타진요사태의 경우에도 평소 호감으로 보던 자칭 평론가 가운데 그런 입장을 내보이는 경우가 몇 명 보였었다. 내가 진중권을 욕하면서도 그래도 한 편으로는 인정하게 되는 것이 이런 경우 항상 명확한 자기 입장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자칭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남 듣기 좋으라고 입바른 소리나 내뱉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래서 요즘 진중권의 모습에 어떤 연민같은 감정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남 들으라고 떠들고 있다. 자기 목소리를 열심히 받아 적어주는 언론들을 위해 듣기 좋은 말들만 영혼없이 꾸며서 배설하듯 내뱉고 있는 중이다. 언론은 열심히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충 써놓은 글들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자신의 지식인으로서의 유일한 존재가치마저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다.

 

국회의장 박병석에 대해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며 내리게 된 결론이다. 국회란 대화와 합의와 공존의 공간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독주해서도 안되고, 당연히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독점하려 해서도 안된다. 서로 다른 이념과 견해와 주장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더라도 서로 최대한 양보하고 타협하고 합의해서 함께 의회라는 공간에서 공존하는 가운데 국가와 국민을 위한 최선을 다투며 고민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옳다. 그래서 민주당도 처음에는 국회의장과 입장을 같이하며 미래통합당과의 국회개원을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상임위에서도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미래통합당의 요구 가운데도 들어줄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들어주면서, 최대한 낮은 자세로 협상을 타결지으려 그동안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미래통합당이 아예 협상 자체를 거부하면서 미래통합당과의 합의를 통한 국회개원이라는 대의는 미래통합당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돌변해 버렸다.

 

지금 국회의장이 하는 일이란 미래통합당의 의견을 들어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전달하는 것 뿐이다. 어떻게든 양당의 합의 아래 본회의를 열어야 하게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미래통합당을 달래고자 오로지 미래통합당의 편에서 민주당을 압박하며 설득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편부당이 편파가 되어 버리는 순간이다. 자기 중심 없이, 자기 기준과 판단 없이 그저 양자의 중간에만 서고자 했던 고집이 결국 그를 부정하는 어느 한 쪽의 편에 서는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 그런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박병석은 지금 자신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꽤나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민주당 출신으로 민주당의 편을 들지 않고, 대화와 합의와 공존의 국회를 위해서 국회의장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지지자들조차 그런 선의를 몰라주는 무도한 무리 쯤으로 여기고 있을 지 모른다. 결국에는 모두가 자신의 의도와 역할을 알아주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위에도 썼듯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형이다. 차라리 최악의 판단은 그보다 나은 판단을 위한 반면교사가 되어 줄 수 있다. 이명박이 어설프게 나빴기에 박근혜라는 최악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박근혜라는 최악이 있음으로 해서 문재인이라는 그보다 훨씬 나은 대안도 나올 수 있었다. 개새끼 씹새끼 욕하며 서로 싸우는 가운데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찾은 근거들과 개발한 논리들이 자신의 사유와 주장들을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주기도 한다. 내가 옳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인데 주장하기 때문에 나쁘다. 내가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인데 양보하고 철회하지 않았으니 나쁘다. 그래서 옳지 못하고 틀린 주장이 훨씬 온건하기에 옳은 것이 되어 버린다. 생각하니 또 열받네.

 

한 마디로 그냥 자아도취라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국회의장이라는 역할극에 스스로 취해 버린 것이다. 양자를 합의케 해야 한다. 양자가 서로 합의하고 사이좋게 국회문을 열 수 있도록 자신이 중재하며 이끌지 않으면 안된다. 국회의장이 된 이상 자신은 어느 정당의 소속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편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지금 미래통합당의 편에서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있는 사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흔히 미쳤다고들 말한다. 민주당을 욕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고보니 계급투쟁론 같은 건 애저녁에 내다버린 모양이다. 무산자들이 연대하여 유산자들과의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원리를 아예 부정하고 있는 중이다. 북유럽의 사민주의라는 것이 과연 그냥 얻어진 것이었는가. 투쟁 없이 그저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만으로 사민주의의 합의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인가.

 

민주주의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이해와 신념, 주장을 가지는 주체들끼리 갈등하며 충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자고 민주주의를 하려는 것이다. 단지 신분이 낮고 힘이 없고 소수라고 아예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 토론과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한 번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보자. 진중권 자신도 그러는 것처럼 토론이란 것이 항상 정중하게 논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 감정이 섞이고 때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극렬하게 충돌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마저 아우르자는 것이다. 피만 흐르지 않는다면. 아예 대화 자체를 막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타인의 주장 자체를 부정하고 차단하려는 시도들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토론의 당사자인 민주주의 시민 개인이 아닌 외적인 힘으로 그 자체를 억압하고 강제하려는 시도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사용되는 수단이 바로 권력인 것이고, 그런 권력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적인 권위주의이고 전체주의가 되는 것이다. 진중권 이 새끼는 확실히 누군가 말처럼 무식하거나 사악하다. 전체주의라는 말을 교묘하게 돌려 이용한다. 전체주의라는 것이 반드시 대중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대중을 등에 업은 권위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라 보는 것이 더 옳다. 그러면 어째서 일본의 군국주의마저 전체주의라 불리는 것인가. 스페인의 전체주의는 소수의 군인과 기득권들이 스페인 인민을 탄압하고 세워진 것이었다. 히틀러가 과연 국민친화적인 독재자였는가.

 

이명박근혜와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차이를 무엇이라 보는 것인가. 전두환과 김영삼의 차이는 또한 무엇이었을까? 아마 진중권은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진중권 자신의 입장에서 대중이 자신을 공격하는 자체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일 테니까. 감히 자신을 공격하던 무지렁이 대중들이 진보언론들까지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진중권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실체인 셈이다. 물론 자칭 진보들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며 인용하는 민주주의의 정체이기도 하다. 적당히 자신들과 같은 엘리트들이 대화하고 타협하고 합의해서 평화롭게 온건하게 이끌어가는 민주주의다. 대중은 단지 그런 자신들의 판단과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을 진짜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과두정치인 것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어지는 정치다. 지금 박병석이 하고 있는 그것이다. 안보는 보수가 맡고, 복지는 진보가 맡고, 경제는 보수가 맡고, 교육은 진보가 맡고, 서로 싸우지 말고, 최대한 양보하고 합의해서, 대통령이고 국민이고 다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잘 해 보자. 그런데 어디 감히 국민 나부랭이들이. 그러니까 한겨레 기자도 말하는 것 아닌가. 이명박근혜가 더 나았다고. 이명박근혜 시절이 더 편했다고.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그래도 언론을 언론대접 해주었고, 그래도 기득권 엘리트의 하나로 인정해 주었었다. 진중권도 지금처럼 개무시당하지는 않았었다. 마치 민주주의 초기 천박하고 비천한 자들에 의해 오염된 정치를 한탄하는 엘리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실 이렇게 진지하게 대꾸할 건 아니기는 하다. 진중권 그 새끼가 뭐라고. 사실 진중권이나 나나 글을 쓰는 동기나 스타일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경우 그냥 배설이다. 처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내 만족을 위해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라고.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보는 사람도 더 많은 유튜브 등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그리고 조금 더 정제된 글을 쓰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런데 언론이 인용해 주니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언론들이 추켜주니 자기가 진짜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진중권이 지금 편들고 옹호하는 집단은 어떤 무리들인가.

 

언론의 정체도 드러나는 것이다. 진중권을 인용하는 언론의 실체이기도 하다. 언론만 진중권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확실히 보수와 진보가 하나라는 이유도 여기서 드러난다. 진중권을 중심으로 보수와 자칭 진보언론이 하나가 되어 떠들어댄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주장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해는 하고 있는 것인가.

 

원래 투표란 전쟁의 대신이었다. 정치란 자체가 투쟁이다. 투쟁을 부정할 때 남는 것은 야합 뿐이다. 야합은 기득권의 몫이지 대중의 몫이 아니다. 대중은 야합이 아닌 투쟁만을 할 수 있다. 그러고도 진보를 자처하는 것인지. 기득권과의 야합만을 바라는 진보를 진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자칭 진보인 이유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겨울 뿐이다.

'인물은 보수정당'이란 말이 왜 나왔느냐면, 2016년 민주당이 바뀌기 전까지 정치를 하려면 아무래도 보수정당에서 시작하는 쪽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당이 크고, 돈도 많았고, 무엇보다 조직이 튼튼했다. 호남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 확실한 자기 조직과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권에서 민주정당의 지지세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크게 차이도 나지 않는데다 보수정당의 간판만으로도 당선이 확실한 지역구 또한 적지 않았을 터였다. 이슈에 따라, 혹은 민주진보진영 내부의 분열 여하에 의해 얼마든지 수도권에서의 석권도 기대해 볼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을 비롯한 대부분 언론들이 대놓고 지지하고, 검찰과 법원과 여러 행정부처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보수정권을 위해 노골적으로 선거를 돕기까지 한다. 여기에 지역유지들로 이루어진 조직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그냥 땅짚고 헤엄치며 선거를 치르는 꼴인 것이다. 지역구가 영남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강원도나 충청권, 혹은 인천과 경기 일대에서도 우세를 장담할 수 있다. 서울에서도 어디가 지역구냐에 따라 당선은 그야말로 따놓은 당상일 텐데 과연 돈도 많고 세력도 탄탄한 보수정당과 민주정당 가운데 정치에 뜻이 있다면 어느 쪽 정당을 선택하겠는가? 그러니까 도저히 군사독재의 후예들과는 손잡지 못하겠다며 사명감을 가지고 민주정당으로 향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인재가 모일 리 없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군사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마저 정작 정치를 할 때는 보수정당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러면 그런 시절 운동권도 아니면서 신념이나 사명감도 없이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야 했던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겠는가?

 

구직을 위해 열심히 발로 뛰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단 처음 직장을 구할 때면 자신의 스펙이 허락하는 한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곳부터 이력서를 넣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일단 가장 조건이 좋은 곳부터 이력서를 넣어보고 안되면 조금씩 조건을 낮춰서 다른 곳에도 이력서를 넣어 본다. 아니면 아예 가장 좋은 한 곳만 바라보고 몇 년이나 재수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그렇다면 만일 누군가 기자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고자 마음먹었을 때 어떤 곳에 가장 먼저 이력서를 넣겠는가 하는 것이다. 듣자니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이력서를 넣다 보니 어쩌다 언론사에도 이력서를 넣었고 때마친 조건이 맞아서 채용된 경우도 어디선가 우연히 듣게 되기도 한다. 돈도 없고 처우도 열악하고 영향력도 바닥인 한겨레이겠는가? 아니면 돈도 많고 회사도 크고 영향력도 막강한 조선일보이겠는가?

 

조선일보 기자 가운데는 한겨레에서 기자질 하다가 경력직으로 채용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아무리 말도 안되는 오보를 내도 감히 한겨레가 그를 비판하지 못하는 또 하나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선배들이다. 그리고 장차 자신의 직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원래 조선일보 기자가 되려다 실력이 안되어 한겨레 기자나 하고 있을 테니 자기보다 스펙도 실력도 훨씬 뛰어난 이들이 모여 있는 조선일보에 대한 인상도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밖에서야 조선일보는 그냥 좆선일보일 뿐이지만 자신들이 보기에 조선일보야 말로 최고의 기자지망생들이나 가는 최고의 직장이자 최고의 언론인 것이다. 괜히 자칭 진보언론 기자들까지 조선일보를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으로 꼽았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먼저 치고 나가며 이슈를 선점한다면 과연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겠는가.

 

박병석 하는 짓거리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자칭 진보언론의 현주소가 바로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설사 대통령이라도 미래통합당의 허락 없이는 절대 국회를 열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속했던 정당이지만 민주당이 무언가를 하려 해도 미래통합당의 허락을 받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중심은 미래통합당이며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모든 것은 이루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언론의 주류는 보수언론이며 마땅히 모든 여론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허락을 받았을 때 진보적인 이슈도 가능하다. 과연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 보도 당시 조선일보의 허락이 없었다면 한겨레가 그런 보도들을 계속해서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 위안부운동도 조선일보 허락을 받고서 하라. 진보적인 정책들도 조선일보 허락을 받고서 하라. 조선일보의 존엄이 한겨레의 존엄이며, 조선일보의 명성과 영향력이 한겨레의 명성과 영향력이다.

 

비유하자면 신라면이 많이 팔려야 다른 라면도 많이 팔리던 십 수 년 전까지 라면시장과도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카스가 많이 팔려야 드링크제 전체 시장도 커지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경쟁관계에 있는 자신들의 드링크제도 더 많이 팔릴 수 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만 년 이등을 하더라도 1등 상품이 더 많이 팔리기를 응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프로야구 구단주인데 구단주 자신이 요미우리의 팬이라 요미우리가 1등하고 자기 팀은 2등만 하면 된다던 이야기와도 닮아 있다. 그러니까 어찌되었거나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감히 누구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은 감히 더욱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민주당 안에 그런 놈들이 너무나 많다. 자칭 진보진영에서도 넘치도록 많다. 원래는 보수정당에서 공천을 받고 싶었는데 아무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민주정당으로, 민주정당에서도 아무도 공천을 안해주니 진보정당으로 흘러간 떨거지들이다.

 

맞다. 떨거지들이다. 다른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스스로를 떨거지라 여긴다. 감히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며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주도하려 했던 문재인 대통령을 국정조사해야 한다는 그 심리처럼. 그러고보니 박병석 개새끼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정조사를 받으라는 씹소리를 지껄여댄 바 있었다.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이번에 미래통합당을 열심히 도운 공로로 원래 자기 자리였을 미래통합당에 한 자리 얻게 되기를 오매불망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측이라고? 하는 짓거리를 보라. 다른 생각이 드는가. 쓰레기는 쓰레기다. 진리는 진리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