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느 선비가 먼 길을 떠났다가 우연히 외지고 허름한 초가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밤늦게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보니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는데 그리 습관적으로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집주인을 위하는 마음에 선비는 그날 밤 집주인이 습관적으로 떨던 다리를 자르고 냅다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글 중간에 나오지 않았는가. 발을 떨어 복이 달아나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기에 떨던 다리를 잘라준 덕분에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더라. 당시에도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여겼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성공해야 하는 존재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하는 이유는 높은 자리에 올라 큰 권력과 명예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과 명예는 모두가 그를 위해 노력해 온 시간들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같은 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그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 더 가난하고 더 비천하고 더 비참한 삶을 살아야지만 더욱 노력해서 성공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인류사에서 거의 보편의 법칙처럼 믿어져 온 이야기일 것이다. 당장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 와중에도 혹시라도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형편이 될까 구휼을 자제한 것이 바로 19세기의 일이란 것이다. 당시의 복지란 것도 그래서 딱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보다 못한 정도로만 그쳐야만 했었다. 그래야 스스로 노력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하긴 지금 당장도 복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 하면 바로 나오는 말이 복지가 지나치면 스스로 노력해서 잘 살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가 약해질 것이란 경고일 것이다. 가난하다고 그저 나라에서 도와주려고만 하면 열심히 일하려던 사람들까지 그런 것을 보고서 더이상 일해야 할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복지만 바라고 게을러지며 가난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살도록 채찍질한다는 의미에서 가난은 더욱 고통스럽고 비참해야만 하고, 그런 모습을 열심히 노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항상 어렸을 적 자식들에게 그리 말씀하시고는 하셨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데 이른바 취업준비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며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기는 공항 보안요원들과 같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온 것이었다. 공항 보안요원들처럼 비정규직이 되어 차별받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가며 지금껏 열심히 노력해 온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구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한 탓에 고작 비정규직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벌받는 모습을 자기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껏 노력해 온 그동안의 시간들이 허무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벌을 주는 것이 정의란 것이다. 신상필벌이라 한다. 그동안 자신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양보해가며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이 있어야 하고, 저들이 그렇지 못한 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정의고 그런 것이 공정이다. 노력도 안했는데 정규직이란 보상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특혜이며 불공정이다. 그저 큰 노력 없이 계약직 보안요원에 만족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정규직이란 보상을 누리게 하는 것은 불의이고 죄악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이다. 정규직이란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보상인데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할 대상들에게 그런 특혜를 주려 한다. 그런데 묻고 싶다. 겨우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 너희는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라 말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 것인지. 상처주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란 것인지.

 

어째서 체육계에서는 체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체육계만이 아니다. 군대내 따돌림과 가혹행위로 끔찍한 총기사고가 일어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직장에서도 상사와 동료의 괴롭힘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그동안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대개 같다. 너무 못해서. 너무 정상에서 벗어나 있어서. 그래서 잘하라고.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선의에서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폭행과 가혹행위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집단의 암묵적 동의와 연대에 의해 이루어지고는 한다. 후회조차 없다.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저가 약하고 저가 무능해서 저가 남들과 달라서 그리 된 것인데 괜히 죽어서 다른 사람 곤란하게 만든다.

 

드라마 '송곳'에서 아주 명대사가 있었는데. 사람이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못사는 건 죄가 아니다. 남들만큼 노력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어느 법전에도 그런 내용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성공해야 하는 사회니까. 모두가 성공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하는 사회였으니까. 그러므로 성공은 정의다. 성공하지 못한 삶은 악이다. 성공은 그만한 보상을 누려야 하고 성공하지 못한 삶은 그에 따른 징벌을 받아야만 한다. 인천공항공사 정규직전환 논란과 최숙현 사건의 본질을 같이 보는 것이 비단 나 하나 뿐일까? 당사자가 상처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는 일을 폄하하고, 그동안의 삶을 비하하고, 인간 자신마저 서슴없이 모욕한다. 인천공항공사 보안요원들을 향한 인터넷의 정의로운 여론을 너무 적나라하게 직접적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리 다르다 여기는 것일까?

 

그저 고통받지 않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 것이다. 그저 스스로 비천하다 여기지 않고 비참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존엄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땅히 이 정도 삶은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매맞지 않고, 모욕당하지 않고, 곤궁하지 않으며, 불안해하거나 위태로워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몇 년 뒤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대단하게 많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계획을 세워 어떻게 잘만 하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정도가 생기는 것 뿐이다. 선수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면 결과로써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아니 선수를 그만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만 모든 것을 걸고서 온갖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따위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못하면 못한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목적은 인간 자신이다.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었을 텐데. 하지만 인간은 수단이다. 인간에게는 더 가치있는 원대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를 이룸으로써 인간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고작 정규직인데. 그냥 평범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운동하며 살고픈 것 분인데. 악의조차 없다는 것이 더 비참하다. 오로지 선의로 정의감에 그리한 것이란 사실이 더 참혹할 것이다. 인간을 벌주어야 한다. 내가 잘되고, 네가 잘되고, 모두가 잘되기 위해서. 그것이 정의고 공정이다.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참 없어 보이는 말이나.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라.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 그래서 네 생각은? 네 주장은? 네 근거와 네 논리는? 그냥 이름없이 말하는 필부필부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 이름 걸고 말해야 하는 지식인이라면 더 말할 것다. 오죽 못났으면 자기 주장이 아닌 남의 말을 근거로 앞세우는 것인가.

 

사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었다. 이른바 전거란 것이다. 과거의 문헌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역사의 인물 가운데 문장력이 어쩌고 하는 내용이 있으면 거의 대부분 그렇게 과거의 문헌을 인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일 터다. 실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석할 때 가장 막히는 부분이 곳곳에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 있는 의미도 알 수 없는 글자와 단어와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능력을 보자고 과거시험의 과목에 시작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냥 글만 아름답게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고전을 인용하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도와 어우러지게 하는가 실력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제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고전의 문헌을 인용하더라도 결국 주장하는 바는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어야 하고 생각이어야 한다. 그냥 인용만 잘하는 것을 오히려 당대의 지식인들은 비웃고 있었다. 그마저도 권위를 인정할만한 고전도 아닌 아는 누군가의 말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누가 그렇게 말했다더라. 어디에 그렇게 쓰여 있다더라. 그러니까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주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없이 단지 인용만 하는 것이라면 그냥 그 책을 사서 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웃기는 것이다. 기자라는 것들은 남의 말을 따옴표로 받아서 그대로 전달하기에 바쁘고, 지식인이라는 것은 기자가 쓴 기사를 받아서 있는 척 떠벌리느라 정신없다. 아니 아예 검사로부터 들은 말이면 그 자체로 이미 기정사실을 넘어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검사로부터 직접 전해들을 수 있다는 자체가 자랑이고, 그 이야기를 또 기자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것이 자랑이다. 오죽하면 토론에 나와서 내세우는 논리라는 것이 누구와 직접 만나봤느냐는 것이다. 검사가 썼다는 공소장이 근거가 되고 있다. 자기가 직접 발로 뛰어 당사자를 만나고 물어서 들은 내용들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 검사의 말이 논어고 맹자고 기자의 기사는 춘추고 사기다. 진중권이 주희고 김경록이 송자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옳다. 절대 틀릴 리 없다.

 

문제는 전근대사회에서도 저따위로 무작정 고전만 인용하여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 이들을 선비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가 말에 책임이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자신의 모든 주장의 책임을 고전의 저자들에게 떠넘긴다. 감히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면 절대 함부로 여길 수 없는 대상을 빌어 책임까지 함께 떠넘기려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그들이 잘못인 것이지 자기의 잘못은 아니다. 따옴표를 따서 보도했지만 그들이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니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거면 자기 이름까지 달고 기사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이름을 앞세워 인터뷰도 하고 기고도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것인가. 그런데도 틀렸을 경우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남의 이름을 빌어 윽박지르기만 열심이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대단하게 여기는 이들이 그리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지금은 네가 틀린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가장 최악이 바로 이런 비겁함인 것이다.

 

남의 말을 인용했어도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다. 남의 주장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폈다면 그 주장 만큼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지식인이라 여기는 이의 자세다. 과거 진중권은 그런 모습을 얼핏 보이고는 했었다. 자칭 진보라 여기는 지식인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의 많은 것들을 내걸고 자기의 책임 아래 글을 쓰고 주장을 하고는 했었다. 기자란 한 때 한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여겨지고는 했었다. 스파이더맨과 슈퍼맨이 괜히 평상시 기자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정의와 지성과 용기를 모두 가진 이들만이 진짜 기자가 될 수 있다. 물론 환상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런 환상을 믿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뭔가 주장하기 만만치 않으니 여론조사를 근거랍시고 들고 나오겠는가 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잘하냐? 추미애가 잘하냐? 윤석열과 조숙에 대한 서울대생들의 평가가 어떠한가?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기사는 자신들이 쓰고 있다. 자신들이 쓴 기사를 가지고 대중이 판단하면 그를 근거로 인용하는 대단한 순환논법이다. 그러면 항상 대중의 판단과 의사를 그렇게 존중해서 인용해가며 기사를 쓰고 있는가. 그럴 놈들이면 자신의 잘못된 기사에 분노하고 항의하는 대중들에 미안한 감정이라도 가져야 한다. 대중이란 단지 자신의 기사에 선동당하고 이용당해야 할 대상일 뿐 존중되어야 할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만한 당당함이라도 보이던가.

 

사실 나 역시 오래전 한참 비루하던 시절에 뭣만 하면 누가 뭐라 주장했다더라며 앞세우기를 즐겨하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않는다. 일단 귀찮다. 누가 뭐라 떠들었든 상관없이 나는 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인용한다면 내 주장을 위해 필요해서다.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다. 주장에는 기자로서의 자신도, 지식인으로서의 자신도 없고, 그냥 논리없는 인용만이 가득하다. 책임을 돌리면서, 그러나 권위를 빌리면서, 그 권위마저 순환에 의핸 자가생산이다. 그것이 자칭 지식인들과 기자것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하며 권위까지 싣는 방식인 것이다.

 

이제는 차라리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논객이라면 미움은 받더라도 비웃음을 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도 지식인이라면 차라리 모두와 원수가 될 지언정 무시당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레기라고 욕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가는 느낌이다. 자칭 지식인이라는 것들의 헛소리에 귀기울이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정도다. 내가 왜 그딴 놈들의 허튼 소리를 내 시간 낭비해가며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언론에 대한 관심조차 이제는 아예 시들하다.

 

차라리 자기 이름을 앞세운 만큼 되도 않는 논리라 할지라도 자기 주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이들이 더 괜찮은 기자고 지식인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최소한 그만큼 자기의 주장에 대한 책임 역시 온전히 자신이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마저 감수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차라리 낫다고 여기는 이유다. 그나마 나은 똥이다.

그러고보면 기자것들이 인천국제공항 전규직전환을 일부러 논란으로 키웠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 좋은 대학 나왔고 어려운 언론고시 합격해서 기자까지 되었다. 기자가 되니 만나는 대상이 정치인, 기업임원, 검사, 판사, 경찰간부들이다. 경찰도 일선에 있는 이들은 취급도 안해준다. 그런데 고작 명문대도 나오지 못한 무지렁이들이 정규직이 되겠다 하니 고깝게 보일 밖에.

 

검사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우습게 봤던 이유였다. 강금실 이후 조국 전장관과 지금의 추미애 장관까지 멸시에 가깝게 하극상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사법고시에는 합격했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조국 전장관은 서울대 교수출신이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으며, 강금실과 추미애 장관은 검사출신이 아니다. 검사 출신만 인정한다. 판사조차 검사 아래에 있다. 그런데 어딜 감히. 그리고 그런 검사들과 어울리는 기자것들이나 진중권, 김경률 등 자칭 지식인들에게도 그런 사고는 전염된다. 어디 검사도 못 된 것들이.

 

그만큼 자기들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확신이 강한 것이다. 남들 놀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도 갔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좋은 직업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기자씩이나 되었으니 검사님들과 어울릴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울리는 그 검사님들은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판사고 다 우습게 여기는 대단하신 분들이다. 실제 검사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기도 하다. 자기들처럼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하고, 어려운 사법시험도 합격하지 못한, 검사가 되어 보지도 못한 놈들은 자신들을 상대할 자격조차 없다. 어째서 검사들이 이명박을 그토록 좋아하는가. 박근혜는 그런 검사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지만 이명박은 철저히 대우하며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검사는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란 것이다.

 

그런 맥락인 것이다. 기자것들이 감히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들이 정규직이 되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검사들과 더불어 감히 검사도 아닌 법무부장관 나부랭이들이 검사들을 지휘하고 개혁까지 하려 한다는 사실에 증오의 감정마저 품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검사들을 유희곤은 만나봤고, 유희곤을 진중권은 만나봤다. 김경률 역시 나름대로 어려운 회계사 시험 합격해서 자부심이 남달랐을 테니 검사들과 어울리기 좋았을 것이다. 검사는 법무부로부터도, 심지어 행정부로부터도 독립되어 존재해야 하는 조직이다. 대통령의 인사와 지휘조차 받지 않고 예산도 따로 쓰며 대통령 머리 위에서 그를 감시하고 심판해야 하는 대단한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기자것들에게 윤석열은 대통령과 동격인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감히 대통령이 윤석열에게 지시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추미애 장관이 지휘하려 한다는 사실에 비난을 쏟아낸다.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검사들이 모욕당하는 그 이상으로 검사들과 일체화된 기자것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낸다. 카르텔이다. 명문대 나와서 그래도 남들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업까지 가지게 된 출세의 카르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잘 것 없는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이라는 자신들의 영역을 넘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사회의 공정이며 정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좋은 대학 나와 어려운 시험 합격해서 검사까지 되었으니 고작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을 뿐인 정치권력이 그를 어찌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대중의 욕망이란 그를 지탱하는 이 사회의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어째서 국회는 합의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것인가. 단 한 사람의 반대나 이탈도 없이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하나의 방향을 향해서 주장하고 결정도 해야 한다 주장한다. 같은 이유인 것이다. 엘리트라면. 대중의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민주당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인지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적의와 멸시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같은 편이었어야 하는데 감히 자신들의 카르텔을 흔들고 부수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그러니까 왜 기자것들 나부랭이가 공수처에 저리 적대적인가 하는 것이다. 무슨 이해가 얽혀 있어서.

 

명문대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이 신분이 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겨레와 경향을 포함한, 공중파를 아우르는 자칭 언론고시를 통과한 기자것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검사와 하나가 된다. 검사 역시 그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는 특별하고, 심지어 국민이 선출한 권력보다도 우월하다. 대통령조차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우습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냥 행정부 외청이다. 법무부에 의해 인사와 예산이 집행되는 외청이되 산하기관이다. 독립적으로 수사하지만 대신 상관으로서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에 지휘권을 행사할 권한까지 갖는다. 그마저 부정한다. 법무부장관이 검찰에 인사권과 지휘권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예산까지 독립된 조직이어야 한다. 입법, 행정, 사법부 이외에 검찰부를 새로 만들려 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짓거리인가. 고작해야 검사장들 따위가 모여서 회의를 하고 법제상 상사인 법무부장관의 지휘권을 무력화하려 시도한다. 그런 것을 언론이 긍정적으로 받아써주고 있다.

 

그냥 부모들이 교육을 잘못 시킨 것이다. 학교에서 잘못 가르친 탓이다. 엘리트란 그런 것이 아니다.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지는 것이 그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부모와 선생들은 그러라고 공부하기 싫은 그들을 억지로 등떠밀고 있었을 것이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가지면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실제 그러고 있다. 광고주만 믿고 오히려 독자를 우습게 보는 기자것들의 그 오만한 자부심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진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유독 잔혹하고 냉소적인 언론의 태도와 국민이 위임한 선출된 권력 앞에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검찰의 모습이란 것이. 검찰을 포함한 관료사회의 모습이란 것들이. 그 가장 앞에서 그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란 것이다. 힘있는 자와 가진 자들을 위해서. 언론의 현주소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 사회의 본질이다. 안타깝게도.

김대중 이후 민주정부 대통령들의 공통점이라면 취임하는 순간 이미 차기 대권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대통령도 맨손 500만 표를 외치던 이인제를 영입하고, 노무현 전대통령을 해수부장관에 임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노무현 전대통령 역시 당내 유력 대선주자였던 정동영과 김근태를 각각 통일부와 복지부의 장관으로 임명함으써 국정에 대한 경험을 쌓고 자신의 실력을 국민들에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도 이낙연과 김부겸, 김영춘 등 당내의 유력인사들을 행정부로 불러들여 기회를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통령의 이름으로 대놓고 한 사람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도 대권에 대한 욕심만 컸던 정동영이나 김근태로부터 많은 원망을 들어야 했었다. 조금만 더 자기에게 기회를 몰아줘도 괜찮을 텐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실망으로 배신감으로 이어진 탓이었다. 그러나 이후 치러진 선거들에서 드러났듯 결국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실력이며 인망이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느라 너도나도 현직대통령과 거리두기를 하는 상황에 노무현 전대통령이 기회를 더 몰아주었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기회는 내가 줄테니 그 기회를 살려서 대통령까지 되는 것은 알아서 하라. 안타깝게도 당시 노무현 전대통령이 기회를 주었던 인간들 가운데 제대로 그 목적을 이룬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되었거나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박원순이나 이재명 등은 이미 지자체장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만한 무대를 스스로 쟁취하여 가지고 있었다. 굳이 대통령의 도움까지 필요치 않았다. 아니 지난 2월 신천지발 코로나19의 확산상황에서는 이재명의 한 발 앞서가는 과감한 행동들이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까지 견인한 바 있었을 정도였었다. 결국은 국회의원 배지 하나 밖에 없는 김부겸이나 김영춘 같은 민주당의 험지에 도전하던 원내 인사들일 것이다. 인품이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지만 중앙정치에서 소외된 전남의 도지사로 있다는 이유로 어느새 잊혀진 이름이 되었던 이낙연도 마찬가지였다. 대선후보감이 많아야 만일의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다. 이후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개혁정책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정권재창출을 위한 준비는 필수적이다.

 

대통령이란 그냥 국가원수에 행정부의 수반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미 정치인이다. 최고의 위치에서 최고의 힘을 가진 대한민국 제 1의 정치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이 정치적이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소속 정당의 지지율을 움직이고 의회에서의 의석수를 바꾸며 차기 정권에 대한 기대에마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소속 정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의회에서의 의석이 줄고 차기정권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면 그만큼 대통령의 정책에도 영향이 돌아오게 된다.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서라도 소속정당인 여당과의 협력은 필수적이고 여당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정치적인 고려 또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정부가 여당에 힘이 되어 주고, 여당이 정부에 힘이 되어주는 선순환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러라고 정당의 이름으로 대선후보도 내고 하는 것이다. 문재인 개인의 이름만이 아닌 당의 이름까지 더해서 차기 대통령감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면 지금의 남북경색국면에서 청와대가 당에게 도움을 구할 것은 무엇이고, 또한 당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인영을 통일부장관으로 끌어 온 것이다. 이미 그동안 원내대표로써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며 당내에서 또 한 사람 유력한 리더로써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었다. 민주당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운동권 가운데서도 성골이라 할 수 있는 전대협 의장 출신이고, 정치인으로서도 다선의원이며, 원내대표로써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바 있으니 다음 단계를 준비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당대표며 원내대표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야심을 가감없이 드러낸 바 있었기에 그러니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야심과 실력을 십분 발휘해서 통일부를 이끌고 남북경색국면을 타개하는데 기여해 보라. 어제도 말했듯 그것은 이인영에게 또 한 번 더 큰 기회가 되어 줄 것이다. 당장의 경색국면이 풀리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그 공은 고스란히 이인영에게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인영 만일까?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대한민국이 북한도 아닌대 대북전문가라 할 만한 사람이 박지원 하나 밖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파격이라 여겨질 정도로 국정원과 그렇게 어울려 보이는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왜 박지원인가? 그러니까 지금의 남북경색국면이 긍정적으로 해결되었을 때 그 공을 통일부장관인 이인영 혼자서 모두 독점하게 두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대표 선거에도 출마해야 하는 이낙연을 다시 행정부로 불러들일 수 없다. 이낙연의 옆에 붙여 줄 수 있는 인물에게 그 역할을 나누는 것이 적절하다. 이낙연은 열린우리당 분당 당시 노무현 전대통령과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남았을 정도로 구 민주계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그리고 박지원은 그 구 민주계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다. 말이 구 민주계지 김대중 직계다. 아직 원내에 확실하게 자기 사람이랄 만한 사람이 없는 이낙연에게 있어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는 박지원이 국정원장이 되어 대북문제에서 크게 활약하는 것은 상당히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남북관계의 경색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다. 타개할 수 있다.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대로 그 모든 공을 청와대 혼자서 독점해야 하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과 그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자리에 차기와 차차기를 위한 안배를 마련해 둔다. 즉 박지원을 굳이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국정원장이란 자리에 앉힌 것은 차기 대권주자로서 아직은 불안한 이낙연에 대한 배려 차원인 것이다. 당장 이재명만 해도 대북전단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낙연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래서야 자칫 당대표가 되고 난 뒤에도 존재감없이 묻힐 수 있다. 더구나 박지원이 돌아오면 운동권의 이인영에 더해 민주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구민주계도 다시 흡수할 가능성이 생긴다.

 

아무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면 그런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위기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회로 삼는다. 차기와 차차기를 위한 기회로써 당과 함께 나눈다. 뼈에 깊이 새겨야 한다. 이낙연이든 이인영이든. 김부겸이나 김영춘도 대통령을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김현미에게도 기회는 충분히 주었었다. 김대중부터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까지 민주정부의 대통령들처럼 당을 위해 노심초사 노력하는 대통령은 보수정당에 없었다. 공작 같은 것 말고 정당한 정치적 행위로써.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

이인영을 통일부장관에 임명한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너, 한 번 차차기 대선에 도전해 봐라."

 

물론 공짜는 아니다. 지난 20대에서도 정권이 교체되고 김부겸과 김영춘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졌었다. 김부겸은 민주당 입장에서 사지라 할 수 있는 대구에 계속해서 출마하며 마침내 당선된 점을 인정해서, 김영춘의 경우도 민주당에게 있어 숙원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사실상 정치적 리더로써 성과를 이루어낸 점을 높이 사서, 그리고 실제 김부겸의 경우 장관 취임 초기 여러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고 있었다. 그래도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장관도 해보고, 공직사회도 경험해 보면서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지 정도는 직접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노무현 이래의 전통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차기 대선주자로서 김근태와 정동영을 낙점하고 각각 복지부장관과 통일부장관에 임명해 경험을 쌓고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주었던 바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될 정도로 남북관계가 크게 경색된 상황이란 것이다. 남북관계개선에 소극적인 한미워킹그룹의 반대와 방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더구나 공무원사회의 복지부동을 깨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몰아세우기 위해서도 정치적으로 야심이 있는 장관의 책임있는 과감한 행동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지금의 경색상황을 풀고 남북관계에 있어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낸다면 그 공은 모조리 현직 통일부장관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설사 대통령이 주도하고 국정원장과 청와대 참모들이 앞장서서 해결했다 하더라도 통일부장관으로서 현안에 대한 공적을 또한 챙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럴 실력이 되는가. 그만한 정치적 야심이 있는가. 시험대다. 원내대표로서 일정한 성과를 보였는데 과연 다음 대선까지 노려 볼 만한가.

 

한 편으로 여전히 민주당에서 다수를 이루고 있는 과거 운동권 출신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과거의 전력도 화려하고, 당장 중진으로서 입지도 단단한데, 더구나 세력까지 상당함에도 정작 민주당 안에서 과거 운동권들의 입지는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어지간하면 이제 그만 물러나라며 떠드는 놈들이 바글거리는 상황이다. 그래도 그동안 민주당을 위해 헌신해 온 세월이 있는데 운동권 출신 가운데 대선후보 하나 쯤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김경수는 너무 친노친문의 이미지가 강하다. 너무 노무현과 문재인 라인만 다 해 먹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호남 구민주당계의 이낙연에, 그리고 과거 김근태계였던 전대협 출신들에, 대선후보군의 면면도 다양해 질 필요가 있다. 그만큼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이인영이 일을 잘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처음 통일부장관 후보로 이인영의 이름이 언론을 통해 거론되었을 적부터 눈여겨 지켜봐 온 이유였었다. 과연 이인영이 차기는 몰라도 차차기에는 도전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를 통해 민주당 내부에 여러 세력들이 한 번 더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보면 노무현과 김근태의 사이가 틀어진 것도 김근태가 원했던 통일부장관 자리를 정동영에게 주었던 것이 원인이었으니. 그를 기반으로 정동영은 2007년 대선후보까지 되었고 김근태는 18대 총선에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은 바 있었다. 여러 세력에서 유력한 대선후보가 나와서 서로 경쟁하며 화합한다면 민주당도 결국 서로 결이 다른 세력들끼리 화학적 결합을 강화할 동기가 되지 않겠는가.

 

어찌될지는 모르겠다. 결국 통일부장관으로서 이인영의 정치적 야심과 능력에 달려 있다 봐야 할 것이다. 박지원까지 더해졌다. 임종석이 청와대로 돌아갔다. 지금으로서는 이낙연 다음으로 민주당에서 차차기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을 것이다.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만한 실력과 자격이 되는가. 이인영의 운명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취업준비생이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세상경험이 없다. 직장생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없다. 정의연의 안성 쉼터 관리를 월급 120만원 받고도 못해서 안달인 사람이 그리 많다. 2015년 최저임금이 115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아예 컨테이너에 숙소까지 두고 건물에 상주하며 관리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115만원도 많다고?

 

하긴 그러니까 정의연 사업에 업체들이 통상적인 비용을 받고서 기부하는 방식으로 할인해주는 경우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이해 없이 마치 대단한 불법이고 비리인 것처럼 떠드는 것이기도 할 게다. 그러고보면 조선일보도 딱 자기들 수준에 맞는 독자를 잘도 찾아서 그들을 낚을 만한 기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정의연이라고 아예 비용 자체를 깎아주고 나면 다른 계약자들도 비슷한 정도의 할인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안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손흥민이 국내로 복귀하며 고졸 신인 수준의 연봉만 받겠다고 통크게 선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손흥민이 그 정도 받는데 다른 선수들은? 손흥민보다 실력도 인기도 명성도 모두 못미치는 선수들이 그보다 더 받겠다 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그래서 실력이 있으면 실력만큼 받아야 그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한 번 가치를 낮추고 나면 다시 되돌리기도 어렵고 그만큼 다른 동종업계에도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받는 돈은 정확하게, 다만 선의로 무언가 배려해주고 싶다면 일단 돈부터 받고 난 다음에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

 

내가 120만원 받고 그 일을 하고 싶다고 내가 일단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것이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될 수 있는 것이다. 편의점 가운데 직원들에게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몇 년이나 경영할 수 있는 경우란 그래도 된다고 채용에 응하고, 나중에 그만두고도 문제삼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나는 절대 못한다. 그 일 시키려면 2020년 기준으로 300만 원 이상은 주어야 한다. 그런데 자격도 되지 않는다.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정도는 스스로 점검도 하고 수리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무리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는 120만원도 많다고 말한다. 50만원도 차고 넘친다 떠들어댄다. 우리나라 노동현실이 왜 이 따위인 것인가.

 

어제 기사를 보니 인천국제공항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 했음에도 무려 10%나 되는 직원이 지난 3월에 퇴사했다고 한다. 심지어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그만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내 기준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인 것이다. 인천국제공항까지 매일 출퇴근하는 것도 일인데, 더구나 교대제라 낮밤을 계속해서 바꾸며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고로 야간업무를 포함한 교대제 근무는 wto에 의해 1급 발암물질로 정의된 바 있었다. 어제 자던 시간에 오늘 일해야 하고, 오늘 일하는 시간에 내일은 자야 한다. 잠이 제대로 올 리도 없고, 깨어있다고 정신이 멀쩡하기도 힘들다. 숙면을 취해야 자고 일어나서도 정신이 맑을 텐데 수면패턴이 계속 바뀌니 그조차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보는 눈도 많은데 다른 보안경비업무에서처럼 일하는 시간 말고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받는 급여가 얼마인가?

 

물론 급여에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내가 일해보고 도저히 이 돈 받고 이 일은 못하겠다 싶으면 턱없이 적은 것이고, 돈은 쥐꼬리만큼인데 그래도 이 정도 일이면 이 돈 받고도 계속 일할 수 있겠다 싶으면 만족스런 액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일이 힘들고 뭣같아도 대우만 괜찮으면 어떻게든 남으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심리다. 그런데 직원 가운데 10%가 정규직 전환이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달 전에 집단으로 퇴사했다.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런데도 직고용도 안된다, 정규직은 더 안된다, 급여를 올려주고 복리후생을 높여주는 것도 절대 안된다. 그러니까 그 정도 받고 일할 사람만 찾아서 계속 바꿔가며 일을 시키란 의미 아닌가. 왜? 공항 보안요원따위 하찮으니까. 자기들이 보기에 그리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따위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 대우를 해주는 것은 부당하다. 불공정하다. 그러면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더 웃기는 것이다. 직장들을 평가한다. 직업들을 비평한다. 어디는 어떻고, 어디는 저떻고, 그래서 어디는 일할 만하고, 어디는 아니고. 자기 일일 때는 다르다. 남의 일이니까.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희는 그 정도만 받고 그 정도 대우 아래 일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직장인이란 것들이 미래통합당의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열광적으로 지지를 드러내는 이유인 것이다. 자기는 비정규직이 될 일이 없으니까. 취업준비생들도 자기는 비정규직을 목표로 구직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은 죽을 때까지 비정규직으로 있으며 고용이 불안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들이 정규직으로 일하고, 정규직으로 일하려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들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을까?

 

월 120짜리 건물관리인이 오히려 돈도 너무 많이 받는 일이 되는 순간 그를 기준으로 다른 직업들도 급여수준이 재편되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아무리 오래 쓰더라도 정규직으로 바꿀 이유가 없어지면 더욱 정규직을 고용해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해고가 쉽지 않아서 기업이 어렵다면 해고가 쉬워졌을 때 가장 먼저 해고되는 것은 연차가 쌓여 연봉도 높아진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급여를 높게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동일 업무일 경우다. 이를테면 자회사를 통해 간접고용하는데 동일 업무에 비정규직만 있고, 정규직이 있어도 직급까지 다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과장 이하 모두 계약직이고 과장 이상만 정규직이면 직급에 대한 차이로써 비정규직과의 차이를 두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기는 절대 잘릴 일도 없고, 비정규직이 될 일도 없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의 비정규직은 더 열악한 조건에서 더 힘들게 고생하며 일할 수 있도록 하자.

 

아마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은 그것을 정의라 여기고 있을 테니까. 실력대로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노력한 만큼 누리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누가 판단하는데? 누가 평가하는가? 결국에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사용자라는 것이다. 더욱 그렇게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주장하는 바고 그에 동의하는 자칭 청년세대 직장인, 취준생들이 주장하는 바다. 노동의 가치를, 노동자인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 시궁창에 쳐박는다. 당연히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므로 상관없다.

 

최근 노동관련 이슈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이래서 계급이구나. 이래서 연대구나. 하지만 신분이 되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넘볼 수 없고, 파견직은 직고용을 넘봐서는 안된다. 생산직이 사무직과 동등해지려 해서도 안된다.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직이 사무직처럼 되고, 파견직이 직고용과 같아지고,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다르지 않으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노력해 온 것은 무엇이 되는가. 그러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다른 존재인가. 전혀 상관없이 파견직만 차별하면 직고용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는 것인가. 생산직의 처지가 열악해지면 사무직은 더 좋아지기만 하는가.

 

그러니까 미래통합당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할 게다. 새삼 느꼈다.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계급을 신분처럼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도 신분과 같은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도 신분처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연대의 대상이 아니다. 동질성을 느낄 대상은 더욱 아니다.

 

설명하려면 너무 길고 어려워 나 자신도 자꾸 피하게 된다. 이런 때 정면에 나서야 하는 것이 자칭 진보들일 텐데도 그러나 혹시라도 정부 편든다는 소리 들을까봐 비정규직을 위해서 단 한 마디도 보태지 못한다. 한국 자칭 진보들의 비루함일 것이다. 오히려 정부 지지율 떨어지는 것만 기뻐하고 있는 중이다. 한심한 꼬라지들이다.

대통령이 무언가? 민주정부에서 검찰총장이면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다. 대통령도 검찰총장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물며 장관이야. 한낱 검사장 나부랭이가 법무부장관에게 들이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검찰이란 조직이다.

 

윤석열의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0%에 언론이 광분하는 이유다. 경향일보는 신이 났는지 코로나로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인해 시급하게 처리한 추경안에 대해 시비걸고 나섰다. 미래통합당이 아예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아서 민주당 단독으로 처리한 것인데 정의당까지 미래통합당 편에서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저들이 누구의 편에 섰는가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참고로 내가 아는 자칭 진보놈들은 그리 서울대 좋아하더라.

 

검찰은 사법부가 아니다. 당연히 행정부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수사기관으로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외청으로 분리되어 있고, 청장이 아닌 총장이라 불리며 장관급 예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법부무산하의 외청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의 인사를 받아야 하고,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그러고보니 법무부장관이 검찰인사를 했다고 언론들이 검찰과 함께 지랄지랄 했었지.

 

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에 들이받는 건 항명인데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을 생까는 건 충돌이란다. 검사장 나부랭이가 법무부장관에게 덤비는 것도 '화살'이 된다. 피의자로서 수사받으면서도 당당히 소환을 거부하고, 포렌식도 거부하고, 오히려 상관인 법무부장관을 공격한다. 그런데 비판하는 언론 하나 없다. 오히려 잘한다 치켜주는 언론들 뿐이다. 어느 언론이라고 특정할 것 없이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간덩이가 커진다. 이런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사실 이미 지난 1월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황교안을 넘어섰을 때 윤석열의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즉 지금 윤석열의 차기 대선 지지율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란 것이다. 현재에 대한 확인이다. 윤석열은 옳다. 윤석열은 강하다. 청와대와 맞서기 위해서. 청와대와 민주당을 까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윤석열은 옳아야 하고 강해야 한다.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윤석열이 대통령만 되면 너희들 다 죽었다. 아마 경향과 한겨레 기자놈들은 윤석열이 삼청교육대라로 만들어서 문빠들 조질 꿈에 들떠 있을 것이다. 진중권이 바라는 것도 그런 것 아니던가. 윤석열은 그런 존재여야 하고 그런 사실을 지지율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미친 것이다. 그보다 무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고용형태란 직고용이고 정규직이어야 한다는 전제조차 이해 못하는 놈들이 기자란 것들이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고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받는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아예 무시한다. 검찰은 청와대를 공격하는 첨병이어야 한다. 언론이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망나니가 되어야 하듯. 물론 검찰과 언론에 철퇴를 내릴 수 있는 보수정부에서는 예외여야 한다. 그러다 다치거나 진짜 죽을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윤석열이 야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다고 대선에 나오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유시민은 어째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까? 칼잡이들의 한계다. 유능하면 몸에 피를 묻혀야 하고, 무능하면 무시당하고 만다. 당장 이재용만 해도 잡아넣으면 삼성과 보수진영과 척지게 될 테고, 잡아넣지 못하면 중도 이하 유권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만다. 박근혜와 이명박을 잡아 쳐넣은 윤석열이 얼마나 보수진영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보수진영의 지지를 받을 정도면 중도층은 얼마나 그의 무능을 비웃을 것인가. 물론 모를 것이다. 그게 기자란 것들이니까.

 

아무튼 한겨레 경향 정의당 이렇게 신난 것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박원석은 아예 유튜브 나와서 검찰 편을 들더만. 명백하게 나온 판결을 가지고서도 검찰을 옹호하면서.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윤석열 대선후보 나오면 보수와 진보가 하나가 되는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대신 같이 망하고 말 테지만. 윤석열이 대통령? 바퀴벌레가 웃는다.

 

딱 그 정도다. 윤석열을 대선후보로 띄워주는 언론이나, 그것도 좋다고 날뛰는 윤석열 검찰이나. 그런데 지금 상대하는 건 180석 여당과 청와대거는. 추경까지 혼자서 처리할 정도다. 재미있을 것이다. 지켜보는 보람은 있겠다.

원래 노동력이 필요해서 사람을 고용할 때는 직고용이 원칙인 것이다. 그리고 장기간 정기적으로 노동력을 사용할 것이라면 그에 걸맞는 조건과 예우를 갖추는 것이 옳다. 그것이 정규직이다. 잠시 쓰고 버리는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함께 일해나갈 동료로써 그 신분과 지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실 정규직이란 개념도 노동권이 크게 높아진 뒤에나 나타난 개념이고 그 전까지는 필요하면 고용해 쓰다가 필요없어지면 바로 해고해 버리는 임시직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오랜동안 함께 일해 온 직원이라면 그 기여와 신뢰 만큼이나 예우와 보상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정규직이란 자체가 노동자의 신분과 지위,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여 노동자의 동의 없이 임의로 해고할 수 없으며 법이 정한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하도록 정의된 현대의 고용형태란 것이다.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정규직이 오히려 당연한 상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 1990년대까지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해서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경비업체를 통해서 고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비원들조차 사용자가 직고용해서 각종 복지까지 제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그래서 처음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노동계가 반발했고, 그러니까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잠시 비정규직을 공요해 쓰더라도 장기간 정기적으로 같은 업무를 맡길 것이면 정규직으로 고용해 쓰라며 의무화하는 법까지 제정했던 것이었다. 노동자에게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상식이며 비정규직이란 단지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임시적으로 고용해 쓰는 특수한 고용형태인 것이다.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실제 필요로 해서 고용해 쓰고 있는 이들이다. 일시적으로 필요가 생겨서 잠시 고용해 쓰는 것도 아니고 인천국제공항이 존재하는 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력들이란 것이다. 그런데 정규직은 부당하다 주장한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실제 고정적으로 필요한 인력이고 실제 투입되어 장기간 동일업무를 수행하고 있건만 여전히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옳다고 주장한다. 누가? 언론이. 지식인들이. 정치인이. 무엇보다 국민 자신이. 좋은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내세울만한 번듯한 스펙도 없는 사람들을 직고용해서 정규직의 신분까지 주는 것은 불공정하다. 좋은 대학 나오고 내세울만한 번듯한 스펙이 있는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것이다. 순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워낙 비정규직이 보편화되다 보니 비정규직이 정상이고 정규직이 특혜가 되어 버렸다.

 

아무나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정규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자격을 갖춘 아주 특별한 소수만이 정규직이라는 신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정규직으로서 누리는 권리들을 허락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긴 지금 20대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의해 직접 고용되는 정규직이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비정규직은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고, 오히려 성장할수록 계약직만 더 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정규직이 되어 보란 듯이 살기 위해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해 온 것일 터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무나 누구에게나 정규직이란 기회를 열어주려 하다니. 비정규직이 정상이고, 외주계약직이 일반적이고, 직고용하는 정규직은 비정상이며 특혜다.

 

인천국제공항 논란이 정말 개같다는 이유인 것이다. 공정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용자가 필요해서 고용하면서 노동자의 신분과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계약직이란 형태를 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오히려 비용도 더 들어간다. 급여와 복지에 더해 용역업체의 운영비용까지 사용자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태인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계약직으로 직원들을 채우려는 이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 논란에서도 나온 논리였었다. 직고용해서 정규직으로 만들면 파업부터 할 것이다. 파업해서 자신들의 급여와 복지를 더 높여달라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안되는 것인가? 노동자인게? 하지만 자기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생각하니까. 화이트칼라가 되고, 공무원이 되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게 된다.

 

그런 논리구조인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 직고용을 반대하는 대중의 논리란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당연하다. 학교 다닐 때 좋은 대학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징벌로써 신분도 불안정하고 처우도 열악한, 더구나 사회적으로 차별까지 받는 계약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규직은 자신들처럼 노력까지 한 선택받는 소수만이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기사를 쓰는 것들이 나름대로 정규직이랍시고 노조에까지 가입한 언론사 기자란 것들이란 것이다. 거기 부화뇌동하는 이들 역시 저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은 이른바 취업준비생들이란 것이고.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든다. 과연 저들은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들을, 아니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계약직들을 과연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기는 한 것인가. 하필 어제 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인식의 범위와 한계를. 노동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규직으로 직고용하면 없는 TO도 생기고, 인건비 지출도 늘어난다. TO에도 없고, 인건비 지출도 없었다. 그런 게 언론이란 것들이고, 정치인이란 것들이고, 지식인이란 것들이고, 심지어 인간이란 것들이다.

 

기본적인 권리인 것이다. 누구나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란 것이다. 상식이어야 한다. 필요해서 고용하면 직고용이어야 한다. 장기간 정기적으로 일정한 업무를 맡기려 한다면 그 형태 또한 정규직이어야 한다. 이미 오래전에 그것은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본이 기본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린다. 구분과 차별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지금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은 특혜를 누리는 것인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있는 것인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본다. 정말 언론같다.

뭣도 모르던 시절에는 진짜 심각하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 민족에게는 창세신화가 없는 것일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한민족만의 서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한때 환단고기에 이끌리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원래 우리 민족에게도 창세신화가 있었는데 유교화의 과정에서 망실되었고 일부 지역의 무가에 그 흔적이 남아 전해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은 신화든 역사는 인류적인 관점에서 넓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논쟁이 이루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물성동이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성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과 대비되는 물物이라는 것이 사람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사물 정도가 아닌 문명화된 중화 이외의 다른 이민족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중화를 이루었다면 사람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족인 만주족 역시 사람이 아니기에 과연 그들에게도 사람과 같은 성이 있는가를 진짜 쓸데없이 심각하게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는 중국도 중화로 여겨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므로 중화는 이제부터 조선만 남게 된 것인가? 

 

그러면 과연 조선만 그랬을까? 19세기 교황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바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당시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은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들의 학살과 약탈과 강간은 범죄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것들로부터 신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중한 권리를 되찾는 숭고한 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는 벌써 오래전에 개종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집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학살인데 집시는 학살조차 아니다. 오만가지로 욕을 들어먹는 히틀러와 나치지만 그러나 집시학살을 가지고 욕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 정도다.

 

아무튼 그런 맥락인 것이다. 유대인의 유일신인 야훼는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창조주인 것인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북유럽 등 세계의 수많은 창세신화에서 창조주들은 이 세계와 함께 모든 인간들을 함께 창조했던 것인가? 유대인들이 여리고성을 함각할 당시 대항하던 성민들에 대해 했던 행동들을 보면 최소한 유일신 야훼에게 있어 여리고의 성민들은 최소한의 연민이나 동정조차 가질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인류를 자신이 창조했다면 여리고의 성민들도 자신의 창조물일 텐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창조물일 블레셋 등 다른 이민족에 대해서는 그토록 적대적이고 잔혹하기만 했던 것일까?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하느님이라고.

 

그러니까 모세와 약속하며 전한 십계명에서도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짜 신이 아니다. 신을 참칭한 존재가 아니다. 분명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아들들밖에 없었을 텐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났을 때 야훼는 그런 카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고자 했었다. 야훼는 단지 유대인만의 신이었고, 더구나 유대인이 섬기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었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한 방에 해결이 된다. 즉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러 민족들과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러야 했던 유대인들이 필요에 의해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하여 유일신으로 받들기 시작했다면 이 모든 모순들이 설명되는 것이다.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가 필요했기에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했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몰아주었으며, 그러므로 야훼는 단지 유대인의 신이었다. 야훼에게도 유대인만이 자신의 창조물이며 자신의 백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민족들에 대해 그리 잔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야훼의 백성도 창조물도 아닌 그냥 이물이었으니까.

 

세계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렇다. 아니 신화 이전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이란 자체가 그랬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모두 시골이라는 서울촌놈들처럼 자기들 이외에는 사람도 아니었고 문명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사람이었고 자신들이 이룬 것만이 문명이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의 창조주가 예정한 것이고 허락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학살하고 약탈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주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유럽의 백인들처럼.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도 없이 학살과 약탈과 방화와 강간이 저질러졌지만 유럽의 백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 여기지 않았었다. 오히려 원래 자신들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었다. 과연 고대라고 달랐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그 세계가 좁고 세계에 대한 인식도 얕았던 당시라면 더 나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이다. 설사 자신들보다 앞선 문명을 이루고 있어도 자신들의 신이 예정한 바에 따라 곧 자신들의 지배 아래 들어올 하찮은 존재들이란 것이다. 그런 존재들까지 신이 자신들처럼 공을 들여 창조했을까? 저들의 신이 창조했을 것이고, 설사 신이 창조했어도 들판의 사슴이나 말처럼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유대인의 신은 사람을 창조한 것이었다. 유대인에게 유일한 사람일 유대인을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창조했던 것이었다. 구약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다.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유대인을 창조하고 유대인에게 시련과 영광을 준 뒤 영원을 약속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래서 유대인의 율법이고, 구약의 약속 또한 유대인을 위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등장한 것이었다. 야훼가 아닌 데우스라는 이름으로, 유대인만의 신이 아닌 모든 인류의 신으로써. 

 

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귀절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이미 당시 예수의 세계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넘어서 로마가 정복한 모든 세계와 심지어 그와 맞서는 파르티아에까지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차별받던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예루살렘과 대성전마저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단지 작은 주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영광스러워하는 솔로몬의 제국보다도 더 거대한 세계가 아시아였고, 그 아시아마저 정복한 로마는 그보다 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파르티아와 그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신 역시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자신들의 신이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창조했다면 신이 예정한대로 이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신을 배반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즉 예수의 신약이란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과 약속한 구약을 벗어난 세계의 신이 세계의 인류와 맺은 새로운 약속이란 의미인 것이다. 비로소 유대인의 신은 유대인을 벗어나 세계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신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했었다.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의 왕과 유대인의 제사장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과 달리 유대인을 벗어난 세계의 모든 인류, 대중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었다. 초기 교회가 다시 구약을 불러들인 이유였었다. 새로운 종교지도자들인 주교들을 위해서도 필요했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될 황제를 위해서도 필요했었다. 사실 그래서 영지주의도 기독교를 전혀 엉뚱하게 이해한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소수에게 독점되는 비밀스런 것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것이었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말 한 마디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성직자에게 복종하라거나 교회에 충성하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수의 하느님은 세계의 하느님이고 전인류의 하느님인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예수 스스로 그렇게 실천하고자 했으니까. 이슬람의 하느님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신은 세계로 나와 세계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오히려 여전히 유대인의 구약시대에 갇혀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뭐하는 존재들인 것인가. 유대인의 율법을 강조하며, 유대의 역사를 자기 역사처럼 배운다. 배척과 증오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과연 지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유대의 율법인가, 아니면 신약의 가르침인가. 예수의 것인가, 유대인의 것인가? 아이러니한 것이다.

 

결론은 단군신화에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한 가지란 것이다. 이미 단군신화가 만들어질 무렵 조선인들은 국경 너머의 중국문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다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문명과 그 문명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이웃해 있었다. 그렇기에 하늘의 선택을 받은 존재로써 자신들을 그들과 구분지으려 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신들의 군주는 자신들만을 위한 존재였다. 홍익인간도 결국은 세계 보편의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인지가 미치는 영역 내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다. 인류를 이해하기란 아직 인간의 인식이 미천했다.

내가 유튜브 같은 건 못하겠다 여기는 이유다. 실시간 토론도 그래서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다. 내가 떠들면서 나 자신이 그에 대한 반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다. 가끔 그렇게 자연스럽게 떠올린 반론들이 원래의 의도를 잡아먹을 정도가 되었을 때 중간에 쓰던 것을 접거나 다 쓴 글을 바로 지우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냥 보기에는 국회의장 박병석이 미래통합당과의 합의 아래 본회의를 열어보겠다고 몇 번이나 꼬장을 부리며 개회를 미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보이는 것만이 전부였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어제 본회의 마지막 시한을 앞두고 한 번 풀어 놨었는데 덕분에 오늘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다. 일단 결정하고 나니 일사천리다. 미래통합당과의 합의에만 집착하는 듯 보일 때는 그리 답답하고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만 일단 결정되고 나니까 모든 것이 신속하다. 야당출신 부의장의 동의 없이는 선출할 수 없는 정보위원회를 제외한 17개 상임위의 위원장이 그렇게 29일 미래통합당에 대한 마지막 통보 이후 바로 본회의가 열리고 통과되고 말았다. 마치 원래 그러기로 예정되었던 것처럼.

 

물론 모른다. 보이는 그대로 박병석이 미래통합당과의 합의를 고집하며 꼬장을 부리다가 여론과 청와대, 무엇보다 원소속정당인 민주당의 압박을 못견뎌 고집을 접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통합당이 하다하다 너무 심하게 나오니 자기도 모르게 빈정이 상해서 민주당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 것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어제 쓴 글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자칫 너무 빨리 너무 성급하게 18개 상임위를 모두 받았다가는 오만하게 비칠 수 있으니 최대한 미래통합당에 양보하며 협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미래통합당이 그래도 버티면 그때 상임위 선출까지 밀어붙이자. 결과적으로 20대 국회 당시 미래통합당이 법사위를 틀어쥐고 법안도 통과시키지 않으면서 원외투쟁으로 국회를 마비시키던 상황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끔 만들었다. 이 놈들은 원래 이런 놈들이로구나. 어떻게든 국회를 열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민주당에 비해 국회를 여는 것조차 조건을 달며 미래통합당은 한가롭고 여유롭기만 하다.

 

미래통합당이 의도한대로는 안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민주당 180석과 그들의 오만함을 강조하며 이후 국회에 대한 무한책임을 강요하려 했었는데 시간을 너무 끌고 말았다. 일단 민주당이 먼저 많은 양보를 했었고, 이후 협상과정에서도 많은 양보를 제안했음에도 대부분 국민들에게 전혀 크게 와닿지 않을 법사위만 고집하느라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오만한 모습만 오히려 보이고 말았었다. 국회를 여는 것은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그 조건이란 것이 대통령에 대한 국정조사까지 포함된 지극히 당리당략을 우선하는 것들이었다. 민주당은 최선을 다했고 미래통합당은 그런 여당으로서의 민주당의 책임감마저 이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아무튼 어쩌면 지금 열어서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몇 주 전 너무 일찍 단독으로 본회의를 열고 상임위원장까지 선출했다면 언론과 야합한 미래통합당의 수에 넘어갔을 수 있다. 그조차도 누를 힘이 지금 민주당에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라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책임지는 모습은 보이되 오만하게 비쳐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박병석 국회의장이 영 못한 것은 아닌 듯한데. 그럼에도 그동안 열불터지게 한 것 생각하면 그런 정도 여론의 압력은 있어야 했다 스스로 납득시키고 만다.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는가. 욕한 것 사과한다. 일단은 잘했다.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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