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예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경우일 것이다. 기껏 비슷하다고 찾은 것이 조선시대 왕족은 고신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중세유럽에서 봉건영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왕에게 손잡고 항거한 정도였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조선시대에도 왕족 간에 견제가 있었고, 중세유럽에서도 봉건영주들끼리 그야말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아니다. 최소한 한국 언론 사이에는 어떤 견제도 경쟁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언론이 전혀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오보를 내도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언론이 언론을 비판하지 않는다. 언론이 다른 언론의 보도를 전혀 확인하거나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설서 오보가 있어도 그를 정정하는 방식은 아예 다른 이야기인 양 새로운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가 심지어 KBS 내부에서도 불편한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인 것이다. 얼마전에는 저널리즘 토크쇼J를 공격하기 위해서 KBS 내부가 조선일보와 손잡기까지 했었다. 언론이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언론의 보도를 검증하려 해서는 안된다. 언론의 사실확인과 비판은 오로지 언론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의 원칙이다.

 

그래서 유시민 이사장도 저널리즘 토크쇼J에 출연해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언론은 다른 언론과 절대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부를 향해서만 꾸짖고 가르치는 기사를 쓰려고 한다. 정작 다른 관점에서 서로 논쟁적인 내용들임에도 언론끼리 서로 마주보고 기사를 쓰기보다 나란히 서서 정부만 바라보고 기사를 쓰고 있다. 물론 여기서 정부란 민주정부다. 보수정부 아래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보았듯 정부가 시키는대로 그저 두 손 곱게 모으고 받아쓰기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었다. 대신 그래서 보수정부에서는 민주당이 정부를 향한 불만까지 대신해서 배설하는 창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정부의 실정조차 모두 야당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얼마나 서슬퍼런 비판인가. 야당이 잘했어야 정부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또 지금은 어떨까?

 

아무튼 그런 것이 언론의 본질이란 것이다. 분명 한겨레도 취재를 했었다. 안성 쉼터를 팔았던 당사자에게 실제 공사비가 얼마이고 원래 팔려 했던 가격은 9억 정도였다고, 오히려 손해까지 감수하며 좋은 일 해 보자고 싸게 팔았던 것이었다며 기사 안에 분명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의혹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에서 원가는 그보다 더 쌌을 것이라며 터무니없이 비싸게 산 것이라며 의혹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판해야 하지만 따라간다. 당사자가 그렇게 인터뷰했음에도 조선일보가 그리 주장했으니 정의연은 그에 대해 성의있게 해명해야 한다. 직접 취재까지 하고서도 다른 언론의 기사를 부정하고 비판하기보다 차라리 인터뷰내용을 부정한다.

 

코링크PE 사모펀드와 관련한 의혹에 대해서도 익성의 실소유주 가능성을 일찌감치 보도하고 있던 한겨레가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재판정에서 그와 관련한 증언들이 나왔음에도 철저히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칫 재판과 관련해서 다른 언론과 다르게 변호인측 심문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할 경우 다른 언론의 보도와 상충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아무리 다른 언론의 기사를 못믿을 거짓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익성의 실소유주 가능성을 이미 보도한 상태임에도 그래서 재판관련 기사에서는 철저히 그 사실을 숨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언론도 편향되거나 왜곡된 보도를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어째서 한겨레와 경향은 그토록 채널A의 검언유착 의혹에 대해 철저히 입다문 채 아예 없는 일인 양 보도조차 거의 않고 있는 것인가. 한명숙 수뢰사건과 관련해서도 한겨레의 입장은 철저히 검찰에 맞춰진 상태다. 검찰의 해명이 더 논리적이고 타당성있다. 한겨레 기자들이 직접 자신들 채널을 통해 했던 말이다. 언론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써 15년도 더 넘은 것 같다.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들이 보수언론들과 기사를 통해 이념적으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분명 이념도 전혀 다르고 사회정치적으로도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르니 서로 비판하며 대립하는 모습도 때로는 보여야 했을 텐데도 그런 모습 같은 건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이지 않았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보수언론과 보조를 맞췄으며 정부를 비판하는데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그들은 그냥 언론이었다는 것이다. 언론의 입장에서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싸워 그들을 굴복시키고 개조해야만 한다. 단, 만만한 권력에 대해서만. 그런 그들이기에 자칫 같은 언론에 상처입힐 수 있는 검언유착 의혹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는 것조차 꺼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검언유착을 보도한 MBC야 말로 더이상 언론조차 아닌 그냥 친정부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채널A에 대한 압수수색은 반대해도 MBC에 대한 압수수색은 부추긴다. 채널A 기자에 대한 수사에는 비판적인데 MBC에 대해서는 수사가 소극적이라며 비판한다. 심지어 채널A 기자를 위해서 무려 대검이 전문자문단을 소집한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런 비판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언론은 하나다. 모든 언론은 하나여야 한다.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카르텔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언론은 카르텔이다. 이미 언론 자체가 하나의 이익집단이다. 이념도 무엇도 없는 그냥 그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이다.

 

어제도 한국경제에서 말도 안되는 기사가 하나 튀어 나왔었다. 보는 순간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환경부에서 묶음할인을 규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비판했어야 했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마땅히 이런 기사에 대해서는 바로잡고 오보에 대한 비판이 나왔어야 했었다. 하지만 거의 없었다. 왜? 언론이니까. 그래서 차라리 그런 오보조차도 받아서 같이 오보를 내고 만다. 그렇게 모든 언론이 같이 오보를 내면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는 것을 이미 그들 스스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같은 기사를 내면 행정부에서 반응하며 기정사실로 바뀔 수 있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당히 오보를 낼 수 있고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오보를 비판한다면 그들이 더이상 언론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언론에서 최근 열심히 하고 있는 팩트체크라는 것도 그래서 대부분 다른 언론의 보도보다는 유튜브 등 자신들이 언론이라 여기지 않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언론이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언론을 공격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언론이 아닌 다른 어느 주체도 대상도 언론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김어준이야 원래 무시당할 짓을 많이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유시민이 그토록 언론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하필 유시민이 공작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검언유착에 침묵하고 있는 그 모든 언론들이 당시 협력을 약속했던 당사자들이라 보는 것이 옳다. 공범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침묵해야만 한다.

 

언론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언론 스스로는 언론의 오보를 절대 비판하지도 바로잡지도 못한다. 언론은 이미 언론의 오보에 대한 자정기는을 스스로 포기한 상태다. 오히려 오보를 기정사실로 만들려 협력하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다. 카르텔이다. 그런 언론을 대상으로 오보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을 것인가. 언론은 그냥 다 같은 언론이다. 다른 언론은 없다. 그 사실만 명심하면 된다. 언론은 언론이다.

작년 조국사태 당시 내가 조국 전장관을 지지하기로 결심하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문재인 정부를 믿고 같이 욕먹고 말겠다."

 

사실 당시까지 아직 확신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었다. 연일 언론에서 새로운 의혹들이 쏟아지고, 정작 당사자의 구체적인 해명은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진실을 보도하는 공정한 언론이라고 믿고 있던 JTBC마저 가세해서 의혹을 확신처럼 보도하는데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지지하는 문재인 정부의 선택이었기에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문재인 정부는 조기에 레임덕을 맞고 끝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검찰개혁도 물건너가고 마는 것이다. 그냥 함께 욕먹고 말자.

 

누군가를 지지하고 편들어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항상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항상 잘 될 수만도 없는 것이다. 아니 정작 잘하고 잘 나갈 때는 지지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전혀 없다시피 한데, 오히려 못하고 못나갈 때는 그마저도 자신의 책임인 양 따져묻는 경우를 현실에서는 더 많이 겪게 될 것이다. 내가 정부 당국자도 아니고 그냥 현정부를 지지하는 것일 뿐인데도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고 하니 바로 비웃음을 머금고 놀리듯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문재인 정부가 잘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정부를 지지하는 것을 칭찬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누군가를 욕하고 비웃기는 잘해도 지지한다 당당히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굳이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 성경이나 불경에서도 예수와 석가모니를 비판할 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석가모지같은 성인들조차 막상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 십 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며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어떤 점이 훌륭하고, 석가모니의 어떤 점이 위대한가. 공자는 어째서 성인으로 불리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찾아 누군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게으르고 무지하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대상을 비판하는 만큼 자신의 수준도 높아진다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나 석가모니조차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자체만으로 자신은 이미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다. 이명박근혜 시절 자칭진보들은 무척 편했었다. 그냥 진보의 입장에서 보수정부인 이명박근혜정부를 그냥 비판만 하면 되었었다. 보수정부인 이명박근혜 정부와 보수여당인 당시 새누리당이 잘못하는 부분만 찾아서 비판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적인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존재감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보수정부가 물어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니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과 비슷한 정책들이 실제로 추진되는 가운데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이해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정책들이 실제 실행되었을 경우 나타날 부작용이나 국민들의 반발들에 대한 책임까지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버렸다.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좋은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회피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진중권이 그래도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여러 방송에서 패널로 출연한 것을 보았던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진보지식인이라고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인 정책들에 대해 지지하면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반대편 패널들과 곧잘 논쟁도 벌이고 하던 시절이었었다. 문제는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그 기간이 너무 짧았고 존재감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뭔 말을 했는지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실책들을 비판할 때는 누구보다 날카로웠지만 정작 정부의 편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옹호하려 할 때는 그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비루하게만 들렸던 때문이었다. 정봉주도 지적한다. 공부를 너무 안한다. 전혀 조사도 않고 나와서 입으로만 떠들려 한다.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그래도 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통일부장관이 되기 전 그토록 신랄하게 모욕까지 섞어가며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던 김연철이 정작 통일부장관이 되고 아무것도 않다가 상황만 악화시키고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라. 자기만의 주장이 있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도 머릿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실제 현실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뒤따를 책임까지 자기가 지기는 싫었다. 혹시라도 그로 인해 보수정치권과 언론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 두렵고 꺼려졌었다. 평소 최저임금인상과 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해 왔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이나 국민의 반발까지 자신들이 감당하기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아무거라도 이유를 들어서 여전히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말 그대로다.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동안 자신들이 비판하며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실제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들의 주장은 옳았었는가. 자신들의 논리에 어떤 모순이나 허점은 없었는가? 그러나 책임을 지기는 싫다. 그로 인해 어떤 비판도 비난도 듣고 싶지 않다. 모욕이나 조롱은 더욱 사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여전히 이명박근혜 정부에서처럼 비판만 하면 되는 위치로 남았어야 하는 것이다. 굳이 책임질만한 일을 하지 말고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언론으로서 원래 하던대로 비판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보적인 정책을 실제 현실에거 구현할 책임은 오로지 정치권에만 있고 자신들은 그저 그것들을 감시하고 비판만 하면 된다. 

 

자칭 진보언론이 보수언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일 것이다. 보수언론은 이명박근혜 시절에도 설사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든 그 책임까지 기꺼이 나눠지며 그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래야지만 자신들이 바라는 보수정책이 성공적으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칫 진보정부에 의해 보수정책이 폐기되거나 수정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었다. 그래서 욕먹을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보수정부의 편을 들었고, 또 보수정당의 입장을 대변하고 욕을 들어야 한다면 기꺼이 들으며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칭 진보언론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와 이명박근혜 정부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가 더 나았다.

 

진중권이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도 결국 한 가지인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놓고 비난만 하는 지금이 정당화될 수 있다. 아무런 구체적인 대안 없이 그저 흠을 찾고 트집을 잡아 조롱과 모욕을 퍼부어대는 지금의 모습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동안 방송조차 거의 끊기고 대학에서 학생들만 가르치다 그마저도 잘리고 만 지금 그가 깨닫게 된 냉엄한 현실이다. 욕하는 것 말고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존재가치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욕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었다.

 

책임은 지기 싫고, 자기 존재감은 드러내야겠고, 그러니 남이 욕하면 더 거세게, 더구나 진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더 악랄하게 비판과 비난을 퍼부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중권이 신년토론회에서 느끼던 추위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욱 문재인 정부와 지지자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게다. 저들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이명박근혜가 정권을 잡고 있다면. 최소한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어 있었더라면. 누가 자칭 진보들을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었는가? 원래 남탓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부류들이란 것이다. 그것이 이유다. 오로지.

경향일보야 더이상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참여정부시절부터 경향일보는 반민주라는 한 가지 노선을 확정하고 일관되게 그 방향을 추구해 왔을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빼고 다른 어느 정당이라도 상관없다. 미래통합당이라도 좋다. 아니 미래통합당이라서 더 좋다. 반면 한겨레는 가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 정도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곧잘 보이고는 한다. 그래도 아직은 진보언론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은 것은 아닐까?

 

사실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면 한겨레도 제법 멀쩡하게 진보언론다운 기사도 쓰고 할 것이다. 진보언론답게 사회의 그늘진 곳을 비추며 약자를 위한 기사를 쓰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기도 하다. 다만 그 한 가지 경우가 문제라는 것인데, 바로 '언론'의 이해가 걸린 사안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시절 기자실의 폐해를 직접 확인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했을 때 한겨레가 조중동과 한 몸이 되어 반대하고 나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긴 그 전부터도 기자실에서 조선일보 기자가 야마를 정해주면 한겨레 역시 그대로 받아쓰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자실이 폐쇄되면 더이상 조선일보의 야마를 받아서 기사로 쓰지 못한다. 정부를 비판하지 못한다.

 

작년 조국사태에도 역시 한겨레 기자들은 누구보다 날선 기사로 조국 전장관과 가족을 비난하고 조롱해야 하는 이유로 다른 언론사로부터 비웃음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앞세우고 있었다. 자칫 다른 언론사들과 다른 기사를 내거나 할 경우 그들로부터 어용언론이라는 조롱과 함께 따돌림까지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보수언론이 만들어 놓은 판 위에서 그들과 함께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을 공격하는 기사를 써야만 했던 것이었다. 얼마전 정의연 논란의 경우에도 뻔히 내막을 아는 상태에서도 조선일보가 의혹을 제기했으니 정의연은 해명해야 한다며 따라가는 기사를 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었다. 자신들도 언론이기에 다른 언론사들과 보조를 맞추며 그들을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당장 그동안 다른 언론사들과 맥락이 다른 보도를 곧잘 내놓았던 MBC가 그들 언론사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본다면 바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MBC는 정부의 입장에서만 보도하는 어용언론이기에 그 보도의 신뢰성을 전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MBC가 첫보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언론도 받아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죽하면 검찰의 사주를 받고 취재를 빙자한 협박을 일삼으며 특정한 개인을 음해하려 했던 채널A 기자에 대한 수사는 반대하면서, 정작 그 사실을 보도한 MBC에 대해서는 압수수색까지 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사마저 쏟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MBC는 언론도 아니다. 그러므로 MBC에 대한 어떤 수사도 탄압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다. 그러나 채널A는 같은 편에 선 언론이므로 어떤 정당한 수사조차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성명을 낸 기자협회의 회장이 바로 한겨레 기자라는 것이다.

 

그렇게는 되기 싫다. 그러니까 언론으로서 언론의 입장에서 보도를 시작하면 한겨레는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언론들이 나서서 언론의 이해를 걸고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 어찌되었거나 무조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더라도, 중간에 다른 기사가 나가더라도, 절대 그 방향만큼은 거슬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코링크PE의 익성실소유주 가능성을 가장 먼저 보도하고서도 이후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과 관련한 기사들에서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언급한 적 없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언론이 합심해서 조국 전장관과 그 가족들을 죽이려 하고 있는데 한겨레만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언론이 윤미향과 정의연을 죽이려 한다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더라도 모른 척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대협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을 쓰게 된 이유도, 위안부운동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가지는 의미도 모두 알지만 다른 언론과 맞춰야 하기에 모르는 척 따라가야 한다.

 

문제는 그러면 과연 누가 결정하는가? 지금의 사안이 언론 전체의 문제라고 누가 판단하고 모두에게 선언하는가? 그래서 기자들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으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항상 꼽히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먼저 치고 나간다. 조선일보 기사를 아예 보지 않으니 정확히 어떤 키워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먼저 치고 나가며 이것이 언론 모두의 문제라 선언하면 그때부터 모든 언론이 달려들며 그야말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방향으로 기사들이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언론의 사명을 걸고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라며 비장하게 선언하면 성전에 임하는 기사들처럼 기자들 역시 조선일보를 쫓아서 아무거라도 기사를 쏟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라리 자신들의 신념에 의해 반문과 반민주당을 선택했던 경향일보에 비해 한겨레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종속되어 버렸다. 스스로 같은 언론으로서 다른 언론과 다투거나 혹은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결심한 순간 조선일보가 주도하는 이슈에 스스로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더 헷갈리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한겨레는 멀쩡한 진보언론인 것이다.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들의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여전히 적극적이고 열정도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조선일보가 앞서서 치고 나가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 뒤를 쫓느라 어제 자신이 했던 이야기마저 뒤집기 일쑤다. 아니 오늘은 조선일보를 쫓아 그들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기사를 쓰다가 내일은 또 엉뚱한 소리를 딱 거스르지 않을 만큼 흘리는 경우마저 있다. 하긴 그러고보면 월급도 얼마 안 되는데 더 나은 조건의 직장에 경력직으로 들어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는 할 것이다. 삼성에 가방셔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면 돈도 많은 보수언론에 경력직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하게 미래를 보장받는 길인 것이다. 그것이 지금 한겨레의 모습이다. 어떤 때는 진보적이다가 어떤 때는 조중동과 다르지 않다. 본질은 후자에 더 가깝다. 정작 중요한 순간은 바로 후자의 기사를 내보낼 때이니.

 

결국 '진보'언론이 아닌 진보'언론'이기를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경향일보가 나을지 모른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지금의 노선이 진짜 '진보'라 여기고 있는데, 한겨레는 진보보다는 언론이기만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이기에 언론으로서 감히 보수의 프레임을 거부할수도 거스를수도 없다는 것이 지금 한겨레의 모순인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는 진보언론인가? 차라리 경향일보를 진보언론이라 부르는 게 옳겠다. 자칭이기는 모두 같지만.

프로젝트가 끝나고 부서 사람들끼리 회식하라며 부장님이 법인카드를 맡겼다. 아무것이든 마음껏 먹고 즐기라.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까? 고기를 구울까? 아니면 칼로 썰까? 깔끔한 일식이나 푸짐한 중식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역시 한국인이면 한식이 최고일 것이다. 베트남요리나 태국요리는 또 어떨까?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취향을 고집하며 논쟁하다 보면 결국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다수결로 하자!"

 

당연히 다수결로 해서 소수에 속하면 다수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래서 다수결이다. 물론 서로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합의해 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식을 싫어하고, 누군가는 중식을 거북스러워하고, 누군가는 굳이 회식에서까지 한식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이유를 달아서 그런 사람들조차 동의할 수 있게끔 유도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당장 오늘 회식인데? 바로 몇 시간 뒤면 퇴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로 예약부터 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도 다수결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고대에는 만장일치를 채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어차피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도 아니고, 나름대로 자기 세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어느 한 사람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기에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되고 집단 안에서 공동체의식이 발달하며 만장일치는 이내 다수결로 바뀌고는 했었다. 당연한 것이 모두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결국 소수로써 다수의 결정을 따르더라도 그만큼 거부감도 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서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더라도 최후의 순간 더이상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을 때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다수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범위가 국가단위로 확장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쟁을 했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 그래서 서로 동의도 합의도 할 수 없으면 싸움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진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데 어차피 싸움을 하더라도 세력에서 차이가 나면 결과도 자명할 것이기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의 세력을 가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쪽이 더 많고 더 강하니 더 적은 소수이고 약자인 너희들이 이쪽의 결정에 따르라.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가 다수가 되기 위한 정치라는 것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다. 혹은 이익으로 유혹하고, 혹은 힘으로 위협하며, 혹은 논리로써 설득한다.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그나마 다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더 나은 대안을 찾아 타협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회식의 경우에도 중국요리가 죽어도 싫기에 중국요리를 먹자는 쪽이 다수가 되지 않도록 다른 선택지를 찾아서 회피하려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요리만 아니면 다른 요리는 상관없다. 아니면 베트남 요리를 먹고 싶은데 어차피 가능성이 높지 않으므로 그나마 다음 선택지로서 태국요리를 선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리고 결론은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쪽으로 모두가 함께 간다.

 

박병석 국회의장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세계경제가 모두 어려운 상태이므로 경제가 더 심각한 상황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시급하게 추경을 처리해야만 한다. 자칫 시기를 놓치면 돈만 더 쓰고 효과는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회의를 열어서 추경안을 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회의를 여는데 동의하지 않는 다른 정파가 있다면 그만큼 상황이 시급하므로 결론을 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인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그 다수가 되기 위해서 지지자들도 선거 때면 열심히 발로 뛰며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다만 한 표라도 더 얻도록 노심초사 노력하는 것이고, 정치인들도 조금이라도 유권자들이 좋아할만한 정책을 내고 공약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의 정당이 다수당이 되었는데 소수당의 동의가 없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면 굳이 그렇게 더 많은 표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다수결이야 말로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치인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유인인 것이다. 다수결로 표결에 들어갔을 경우 다수가 되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정치인 개인과 정파, 정당들은 국민의 눈치를 보며 다만 한 표라도 더 얻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선택과 상관없이 정치인들끼리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서로 나누고 합의해서 모든 결론을 내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비슷한 체제가 있다. 바로 과두체제다. 소수의 집권자들이 서로간의 합의를 전제로 공존하며 권력과 이익을 나누는 체제다. 박병석이 의회주의자라는 이유다. 전에도 말했다. 어떤 정치인들에게 국회란 자기 직장이고, 국회의원이란 직업이며, 다른 국회의원들은 정당과 정파를 떠나 동료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런 정치인들끼리 유권자들의 주장이나 요구와 상관없이 권력과 자리를 나누자는 게 바로 내각제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정치인들끼리 서로 이해나 주장이 같다. 거의 비슷한 성향에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 아주 사소한 합의만으로 모든 결론에 동의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끼리 유권자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정치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유권자가 어디의 누구를 선택하는 결국 정치인이기에 그 결론은 항상 같다. 유권자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야 말로 의회독재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국민을 대변한다.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서로 대변하며 충돌하고 갈등한다. 그 과정에서 더 첨예하게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위해 다투고 싸우며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수단이 표결이고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정치인들은 국민들에 지지를 호소하며 항상 낮은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회주의자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의회주의자라는 말에는 의회지상주의자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모두 동료다. 여와 야를 가리지 않고, 진보와 보수의 구분 없이, 국회의원이라면 모두가 같은 동료인 것이다. 국민이 무어라 요구하든, 지지자들이 어떤 명령을 내리고 무어라 비판하고 있든, 상관없이 국회의원 자신들끼리 합의를 통해 모든 것은 원만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모든 것을 거부하려 한다면 모든 것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척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어째서 그동안 민주당이 그 많은 의석을 가지고서도 보수정당을 상대로 그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는가.

 

민주당의 잘못이다. 설마 저런 인간인 것을 몰랐을까? 함께 민주당의 당적을 가지고 정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 성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근본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을 마음편히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회독재라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현치를 해야 한다고? 그냥 국회의원들끼리 나눠먹자는 소리다. 그런 헛소리를 지지하는 자칭 진보란 어느 시대에 사는 얼간이들인 것인지. 싸우지 않는 민주주의란 의미가 없다.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인간은 때로 싸움이란 것을 하게 된다. 싸우지 않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때로 싸워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전혀 엉뚱하게 쓰고 있다. 보수언론들이야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칭 진보들 역시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과거 운동권 문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뭔 말인가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세상에 가장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인간들이 바로 80년대 운동권이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사파들이었었다. 언론이 쓰레기란 것이다. 자칭 지식인이란 것들도. 더럽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역겹다.

한국 자칭 진보와 과거 민주당 당권파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역시 대한민국의 주인은 수구기득권이라 확고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도 개혁도 민주주의도 시민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도 모두 수구기득권의 허락 아래서만 가능하다.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도 아니고, 협상을 통해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감히 수구기득권과 싸우려 하는 친노친문을 눈엣 가시처럼 싫어한다. 그건 본능과도 같다. 평소 주장하던 정책이라도 친노친문이기에 반대하고, 친노친문일색인 민주당이기에 더욱 비판을 넘어 비난하고 저주한다. 민주당만 빼고란 그런 그들의 진심이기도 한 것이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의심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4% 넘게 떨어지며 55%가 되었다. 여기서 더 국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문재인 정부가 아무것도 못하게만 만든다면 그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박병석은 원래 안철수를 쫓아서 국민의당으로 갔어야 할 인간이란 것이다.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다선이기까지 해서 여야에 두루두루 인맥이 있다 보니 국회의장까지 되었기는 하지만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에 특별한 의리같은 건 없는 부류들이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망해야만 자기들에게 기회가 돌아온다 생각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망하고 구민주당이 열린우리당의 잔당들을 흡수하며 다시 일어난 것처럼 문재인 정부가 망하면 옛동료들과 다시 뭉칠 수 있지 않겠는가.

 

하필 지지율 하락 기사와 박병석 개지랄 기사를 동시에 보는 바람에. 원래 민주당 성향의 지지자들이 그동안 민주당을 지지한다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향은 민주당과 맞는데 오히려 보수정당보다 민주당을 더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다시금 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차피 미래통합당이 법사위를 요구하며 아예 국회를 거부하고 있는데 더이상 협상할 여지가 있기나 한 것인가. 법사위를 미래통합당에 넘기는 것 말고 박병석의 요구를 들어줄 방법이 없다.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안철수는 이런 놈 안 데려가고 뭘 한 건지. 빌어먹을 것이다.

민주당이 보수정당에 비해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낙인처럼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싸울 땐 싸워야 하고, 버틸 땐 버텨야 하고, 타협할 땐 타협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싸울 줄도 모르고, 버티는 것도 못하고, 더구나 타협은 양보와 동의어다. 유시민이 그랬던가? 태산만한 힘을 가지고 겨자씨처럼 굴고 있다. 딱 그대로. 민주당 자신이 가진 힘을 최대한 끌어내서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지레 약하다 겁먹고서는 싸우지도 버티지도 타협도 못하고 매번 물러서기만 한다. 그 중심에는 누가 있었다. 박병석같은 사쿠라들이다.

 

지금 명분은 민주당에 있다. 법대로 국회를 열려는데 반대하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 미래통합당인 것이다. 민주당은 법을 지키려는 것이고 미래통합당은 그 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통합당 국회에 들어오게 하겠다고 법사위를 미래통합당에 내주겠는가? 그럴 거면 그냥 당적을 미래통합당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 열린우리당 시절에도 그랬다. 대통령이 무엇을 하려 하든, 여당이 무엇을 국민들에 약속했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저 야당과 언론 보기에 좋은 정치만 하려 한다. 한나라당과 언론이 보기에 사람 좋은 정치를 하려 한다. 박병석이 저 인간도 안철수 따라 국민의당 갔어야 하는 거였는데.

 

자꾸 민주당에 있는 명분을 야금야금 빼서 미래통합당에 넘겨주고 있는 중이다. 민주당이 바로 본회의 열어서 뭐라도 성과를 내면 그것으로 민주당이 명분을 독차지하는 것인데 그것을 필사적으로 온몸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계좌추적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주변인 가운데 누군가 고소고발을 당했거나. 아니면 신념이다. 평생을 보수정당의 프락치로 살아온 자존심 같은 것일 게다. 민주당도 민주당이긴 하다. 어떻게 이런 인간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던 것인지. 열린우리당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씨발 욕나온다.

통일부는 어느 정당이 집권하는가에 따라 그 위상이 하늘과 땅 차이로 뒤바뀌는 부서일 것이다.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고자 하는 보수정부 아래에서는 당연히 통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반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싶은 민주정부 아래에서는 다른 어느 부서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그래서 인사를 할 때도 보수정부에서는 자리나 하나 챙겨주려는 수준 이상은 넘지 않는 반면, 민주정부에서는 끝발 좀 있는 인사로 장관을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통일부의 업무라는 것이 민주정부가 집권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할 경우 거의 반드시 색깔론에 휘말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민주정부가 집권하면 김대중 대통령 이래 민주당의 강령으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북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테니 통일부 장관이란 자리에 있으면 그 성과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한에 조금이라도 유화적인 행동이나 태도를 보일 경우 아직 대한민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보수진영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이미 사의를 표명한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임명되던 당시도 그랬었다. 아니 그래서 김연철 장관이 지명되었을 때 모든 언론과 정치권이 나서서 그 이념을 검증하겠다며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었다. 원래 그런 신념과 지향을 가지고 있어도 위축될 수밖에 없도록. 덕분에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마저 욕하던 그 강단과 다르게 김연철 장관이 취임하고 통일부 장관으로서 한 일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었다.

 

경고는 이미 작년부터 나오고 있었다. 통일부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통일부 장관이 총대를 매고 미국으로 날아가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하든, 아니면 북한으로 가서 북한의 관계자들의 이해를 구하든 아무거라도 행동에 나섰어야 했는데 정작 장관이 있는지도 모르게 아무것도 않고 있었다. 이번 대북전단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주무부처로써 직접 나서서 대책을 세웠어야 했는데 역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도록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당연한 것이 만에 하나 대북전단 살포를 통일부의 이름으로 저지하고 나섰을 경우 돌아올 이념공격이 아무래도 김연철 장관 개인이나 통일부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칫 이념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몸을 사리는 사이 통일부는 자기 할 일을 못하고, 정작 통일부가 손놓고 있는 사이 그동안 겨우 이루어 놓은 남북관계마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에서 윤석열과 버금갈 정도의 최악의 패착이라 할 만한 부분일 것이다. 처음부터 자격도 실력도 안되는 인물을 장관에 앉힌 탓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과연 대안은 무엇인가? 벌써부터 이인영이라는 이름이 차기 통일부장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인영도 아주 야심이 없지는 않다. 그동안에도 당대표선거에도 출마하고 원내대표도 역임하는 등 어느새 당내의 젊은 중진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원내대표로써 중요한 패스트트랙정국을 훌륭하게 마무리하고 총선에서도 큰 승리를 이끄는 등 지지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상당한 성과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이루어냈던 터였다. 그렇다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 할 때 지금 이인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차기 대권을 노려 볼 수 있는 인물은 거의 행정부의 요직을 거쳐가고 있었다. 국무총리든, 각 부처의 장관이든,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국민들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당연히 통일부 장관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인 야심이 클수록 지금 통일부장관은 참여정부에서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리다. 바로 이 통일부 장관 때문에 김근태와 노무현의 사이가 틀어졌고, 정동영이 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발판이 마련되었었다.

 

그래서인 것이다. 말했듯 통일부장관이란 그를 통해 얻게 될 성과 만큼이나 정치적인 부담도 큰 자리란 것이다. 자칫 보수진영의 공격에 휘말리거나 의식할 경우 김연철 장관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시간만 때우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공격 정도는 아랑곳않을 수 있는 강단이나 그래야 하는 동기가 필요하다. 어차피 보수진영의 공격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공격을 무릅쓰고 무어라도 성과를 내는 것이야 말로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더불어 그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바람막이가 되면서 통일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독려하고 필요할 때는 채찍질하며 등떠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야심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 야심도 크고, 신념도 강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한다. 지금 적절한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이인영의 이름이 거론되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이다. 김연철같은 나부랭이로는 안된다. 그저 입으로만 떠드는 나부랭이들로는 지금 상황을 대처할 수 없다. 보다 고도로 정치적으로도 내구성을 갖춘 인물이어야만 한다. 사실 이인영이 아니어도 상관없기는 하다. 그만한 정치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 지금 민주당에는 아예 차고 넘친다. 다만 현역 국회의원이고, 여당의 원내대표를 역임했으며, 또한 차차기를 노려 볼 만한 위치에서는 또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다. 물론 이낙연도 움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부에서 특사를 보낸다면 아마도 이낙연 의원이 아닐까. 행정부 차원에서가 아닌 여당이 청와대와 협력하며 현재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입장에서 내세울만한 자신만의 업적과 성과가 부족한 이낙연 의원의 입장에서도 매우 소중한 기회일 수 있다.

 

김연철이 병신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입으로 쉽게 떠드는 놈들일수록 정작 자리에 앉혀 놓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까 그리 입으로는 사납고 세기만 한 것이다. 현실을 모르니까. 요즘 입으로 온갖 배설을 해대는 얼간이들이 차고 넘치는 모양이다만. 아직 기회가 다 사라진 것도 아닌데 자칫 인사를 잘못했다가는 그마저 날려버릴 지 모른다. 다음 인사가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더욱 민주당 안에서 야심있는 인물을 골라야 하는 이유인 것이고. 미래통합당도, 조중동도, 한경도 무시하고 소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더욱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고 그러면서도 과감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이인영도 훌륭한 선택일 수 있다. 인물은 많다. 민주당 30년 집권은 꿈이 아니다.

그러고보면 보수정치인이나 보수지지자들이 언론에 대해 무어라 말하든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보수정치인이 특정 언론사의 취재를 막는다고 언론탄압이라며 반발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보수지지자들이 특정 언론사를 찾아가 시위하거나 비난한다고 파시즘이라 비판하는 경우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민주당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예외다. 심지어 명백한 범죄행위인 협박취재에 대해 수사하려는 것마저 언론탄압이라고 자칭 진보언론들마저 나서서 비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하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한겨레가 보인 히스테릭한 반응 역시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그동안 한겨레를 신뢰하고 구독해 온 독자들이었을 텐데도 경력도 오래된 베테랑 기자가 나서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고 있었다.

 

"덤벼라, 문빠들아!"

 

그 기자만이 아니었다. 최근 김용민tv에 출연해서 자기들은 아닌 척 입바른 소리를 떠들어대는 미디어오늘의 기자도 역시 참전했다가 도매급으로 욕먹고 있었다. 심지어 기사를 통해서 정작 욕을 들었던 지지자들의 분노와 반발을 '댓글폭탄'으로 매도하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다. 경향일보도 끼어들었는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심정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저 문빠 폭도새끼들. 저 깡패새끼들. 물론 나도 가끔 대놓고 블로그를 통해서 문빠들을 그렇게 욕하기는 한다. 다만 차이라면 나는 그냥 같은 시민의 입장이고, 저놈들은 언론인으로서 그런 생각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진중권이 왜 저리 미쳐 날뛰는 것인가. 자칭 지식인이라는 것들은 어째서 문재인 정부나 그 지지자들에 대해 저토록 적대적인 것인가.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한 것을 보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어째서 저토록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는 것인가. 마치 지식인이면 민주당의 편에서 어떤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라도 있는 듯한 모습이다. 우연히 누군가 링크를 건 한겨레의 어느 칼럼에서 진중권의 행동을 '파시즘'에 대한 경계와 견제라며 애써 선의로 포장해주는 내용을 보면서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한 번 썼던 내용이기도 하다.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저 무도한 무지렁이들이 감히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며 느낀 것 가운데 하나다. 이놈들은 진짜 자기 학벌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자기들이 얼마나 좋은 대학을 나와 얼마나 대단한 것들을 배우고 알고 있는가에 대한 자부심이 그야말로 성층권을 넘어 우주를 노닐고 있다. 자신들만이 진실을 알고 올바른 판단도 내릴 수 있다. 대중이란 그런 자신들이 이끌어야 하는 대상이지 대중이 자신들을 넘보려 해서는 안된다. 진중권이 무시당하는 이유였다. 무식하다고. 일단 서울대이기는 한데 있는지도 모르는 미학과 출신에, 사실 글빨은 화려한데 논거는 상당히 빈약한 편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지렁이 대중이라면 자신들을 우러르지는 못하더라도 두려워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가만 보니 오히려 자신들을 비웃고 무시하기 일쑤란 것이다. 과연 기분이 어떨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한겨레, 경향 기자들의 자랑은 명문대 출신이 보수언론보다 많다는 것 하나더라. 실제 명문대 출신들이 많기는 하다. 물론 그래봐야 대부분 월급도 더 많은 조중동 지원했다가 실력이 미치지 못해 떨어진 것들이기는 하다. 그래서 기자로서 경력을 쌓아서 다시 경력직으로 도전해 보려고 그나마 언론사인 자칭 진보언론에 몸담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패자에 낙오자인 자신들에 대한 보상으로써 과도하게 비대해진 자의식을 가지기 쉽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다. 상처가 많고 열등감이 깊을수록 지나치게 자신을 포장하고 과시하려는 경향을 가지기 쉽다고. 그래도 사회정의와 진보적 가치를 위해서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신들인데 어찌 저따위 무지렁이 대중따위가 자신들을 모욕하고 조롱할 수 있는 것인가.

 

한겨레와 경향이 이른바 친노에 대해 가지던 뿌리깊은 적대감의 정체이기도 했었다. 감히 노무현이 언론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었다. 언론의 말을 듣지도 않고, 오히려 언론을 개혁의 대상으로 여겼었다. 노무현과 함께 그 지지자들이 언론을 상대로 공격을 가하던 당시의 기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지식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언론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역시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이놈들을 이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노무현 자신도 민주화운동에서 철저히 비주류였거니와 이후 대통령이 되고 지지자들과 함께 보여준 행동들은 위협을 넘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언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언론은 항상 정의롭고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했었다. 그런데 노무현이나 그 지지자들은 아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는 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는 얼마나 언론을 두려워하며 예우까지 해 주었었는가.

 

진중권이 문재인 정부를 가리켜 한국사회를 퇴행시키고 있다 말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한겨레 기자가 스스로 자백한 바 있었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시절보다 지금이 자신들에게는 더 어렵다. 대중이 검증하려 한다. 대중이 언론의 보도를 믿지 않고 일일이 검증하며 언론인들에 진실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그냥 쓰기만 하면 기사가 되었는데 이제는 대중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검열까지 해야만 한다. 화가 나는 것이다. 자기가 그러려고 힘들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어려운 시험을 치러가며 언론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진중권 역시 자신 정도면 더 대중들로부터 예우받아야 하는데 고작 최성해가 만들어준 대학교수 자리가 전부였었다. 그에 비하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상대로 아무말이나 쏟아내면 진지하게 다루어주는 보수언론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한국사회가 자신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정확히 저 무도한 문빠들이 감히 자신들을 전혀 인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있다. 저놈들이 악이다. 저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유독 거의 모든 언론들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만이 아닌 그 지지자들까지 적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공중파라고 예외가 아니다.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에 대한 대우가 다르다. 민주당 진영과 미래통합당 진영에 대한 판간의 기준 역시 다르다. 복수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그 공정함과 정의로움에 한 번 당해보라. 오로지 민주당 인사들에게만 적용되는 공정함과 정의인 것이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나았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퇴행이다. 그러면 어째서 문빠들은 그들 지식인, 언론인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조롱만 퍼붓게 된 것일까? 언론 스스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보도했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정의여야 한다. 무지렁이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모욕하고 조롱할 수 있는 정의당처럼. 엘리트라는 것일까? 과거 조선의 사대부들을 떠올리면 비슷할 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념은 다르더라도 같은 엘리트인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이 더 대화가 통하겠다.

 

그래서 파시즘인 것이다. 무지한 대중이 떼로 몰려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것이니. 아마 전제왕조시절 백성들이 몰려다니며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려는 것을 보는 지배층의 태도가 저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이라 불렀다. 저들의 입장에서 지금은 '문빠들의 난'이 일어나는 와중인 것이다. 진압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뭐다? 그 수괴인 문재인의 목을 베는 것이다. 구한말 조선조정이 동학의 교주였던 최재우와 최시형을 처형했던 것처럼. 한겨레나 경향이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실패에 올인한 상황이다. 그 최선두에 진중권이 있는 것이고. 그들의 목적은 같다. 동기도 같다. 자칭 진보들의 허튼 엘리트의식이 문재인을 중심으로 모인 대중의 의식과 충돌하는 것이 이유인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한겨레나 경향, 혹은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공격은 숭고한 성전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의 과거 군사독재와 싸우던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던 당시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전은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이다. 그 과정에서의 모든 행위들은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정의롭게 된다. 다만 그렇더라도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라는 것이 소수자를 끌어들이는 진중권의 행동에 대한 사소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동기와 목적은 같다.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저들이 폭도이고 악인 것이다. 조중동과 다르지 않다. 저들의 진심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잠잠해진 정의연 논란 가운데 단 한 사람 이름이 제대로 거론되지 않은 이가 있었다. 사실은 그 사람이야 말로 지금 윤미향으로 대표되는 정의연의, 아니 정대협의 시작과 끝을 정의하고 이끌어 온 주인공일 것이다. 바로 김복동 할머니다. 윤미향은 그 김복동 할머니를 가까이서 모신 덕에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었다.

 

수요집회도, 위안부운동을 세계보편의 인권운동으로 발전시키자는 구상도, 그를 통해 일본 정부의 사실인정과 사죄, 배상을 이끌어내자는 생각도 역시 모두 김복동 할머니로부터 비롯되었었다. 그리고 정대협 활동가들은 그런 김복동 할머니의 구상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역할이나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윤미향이라는 이름을 들을 일도 거의 없이 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위안부 운동을 이끌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와서 김복동이라는 이름안 간 곳 없이 윤미향이란 이름만 남았을까?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홍성일이나 임자운 같은 가짜 지식인들의 민낯이 바로 이런 곳에서 바로 낱낱이 드러난다. 이용수 할머니가 주위의 누군가에 의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고 사실관계를 잘못 오해해서 주장을 펴고 있다는 김어준의 의혹제기에 대해 그들은 주장했었다. 만일 김어준의 주장이 사실이면 이용수 할머니의 주체성이 훼손되는 것이므로 자칫 위안부운동의 정당성마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용수 할머니의 모든 주장은 오롯이 이용수 할머니 본인의 경험과 판단에 의한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어째서 김복동 할머니의 그동안 활동에 대해 정의연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이용당한 것이라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는 한 마디도 않는 것인가.

 

그동안 정대협의 활동에 대해 모르지 않을 한겨레나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이나, 정의당 같은 자칭 진보정당, 그리고 방송에 나와 떠들어대는 자칭 지식인들이 지껄이는 소리들 보면 거의 한결같다.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김복동 할머니는 아예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대신 윤미향이 제단에 올려졌다. 그리고 이용수 할머니의 이름으로 철저히 재단되어진다. 김복동 할머니가 추구하고 이루어낸 모든 위안부 운동의 성과들이 윤미향에게 덧씌워지며 윤미향과 함께 부정되고 그 자리를 이용수라는 이름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대충 이용수 할머니가 김복동 할머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는 이를 통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동안도 이용수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다만 김복동 할머니의 존재가 너무 컸기에 감히 그 앞에 나설 수 없었을 뿐이었다. 김복동 할머니도 떠났으니 위안부운동도 새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후 위안부운동을 정의하고 주도하는 것은 누구일 것인가. 윤미향이 비례대표까지 되는 것을 보며 어느새 주위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아직 생존해 있는 이용수 할머니를 앞세워서 윤미향과 정의연을 지우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그동안 자칭 진보언론들이 굳이 조중동의 프레임을 쫓아 김복동이란 이름을 지운 채 윤미향과 정의연을 공격하는데 앞장 서 온 것이 이해가 된다. 위안부운동의 취지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면서 김복동이 아닌 윤미향을 대상으로 위안부운동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며 요구하고 있었다. 윤미향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은 한 몸이었다. 윤미향은 절대 김복동 할머니의 유지를 거스를 수 없다. 그러니까 단죄되어야 한다. 윤미향과 정대협이 부정되고 그 자리에 새롭게 시작된 위안부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자칭 진보들 자신들이 된다. 그리고 냄새를 맡은 자칭 지식인들도 거기에 합류한다.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했는데 어째서 윤미향이 감히 들으려 하지 않는가.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을 지우고 나면 윤미향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김복동 할머니가 그동안 정대협에 이용당했다고 말했을 때, 더구나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면서도 오히려 모르는 척 옮겨쓰기만 하는 언론들을 보면서, 더구나 오로지 이용수 할머니만 의심도 검증도 해서는 안된다면서 김복동 할머니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무리들의 모순적인 주장에서 무심코 느끼고 있던 위화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인터뷰를 우연히 보고 나서 한 가지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진짜 더러운 놈들이 어떤 놈들인가를. 그래서 저들은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필사적으로 가리고 감추려 들었던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정대협의 활동은 활동가들이 아닌 피해자들 자신이 시작하고 주도했던 것이었다. 그 중심에서 한결같이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김복동 할머니였고, 그 후광으로 윤미향은 오히려 정대협 대표가 되고 비례대표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지금 윤미향의 자리는 김복동 할머니의 것이어야 했었다. 그래서 이해한다. 어째서 윤미향은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김복동 할머니의 유지를 거스르란 것인가.

 

이용수 할머니는 주체적인 존재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단지 정대협에 이용당한 타율적인 존재일 뿐이다. 저들이 만든 프레임이다. 이용수 할머니 자신의 의지인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의도가 그렇게 김복동 할머니의 존재를 철저하게 지우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가 쓰레기일까? 자신들이 더 잘 알 듯. 더러운 것은 인간이란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어릴수록 행동이 일차원적이 된다. 물론 아주 나이를 먹어도 비슷하게 돌아간다. 동물과 같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마음에 안들면 화나고, 맺힌 것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복수하고, 괜히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울며 도망치고 숨는다. 북한은 그런 아이와 같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원시적이고 유아적인 체제를 가진 국가일 것이다. 아직도 최고지도자의 존엄이 그리도 국가적인 위상과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

 

작년 김정은이 그렇게 신년사를 통해서 큰소리를 쳐 놓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트럼프에 망신당하고, 정작 많은 약속을 주고받았던 남한 정부는 미국 눈치 본다고 아무것도 않고 있고, 날이 갈수록 경제는 어려워지는데 북한 주민들에게 약속했던 어느것도 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그동안은 아예 판을 깰 수 없으니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기회라고 아예 엎어버릴 놈들이 북한 내부는 물론 미국과 한국 안에 차고 넘치는 것을 안다. 여러 경로로 불만은 전달하되 그러나 최소한의 선은 넘지 않도록. 그래서 더욱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였을 것이다. 어째서 북한이 남한 정부에 이렇게 비굴하게 저자세를 보여야 하는가.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여당인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하고 문재인 정부 혼자서도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되자 본전생각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최고권력자로서 구겨진 김정은 자신의 체면을 다시 일으켜세울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에 약세를 보인 것도 아쉬운 것이 있어 움츠렀던 것도 아니다. 여전히 자신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상당히 과격한 행동도 아무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렇다고 김정은 자신이 직접 나섰다가는 돌이키지 못할 수 있으니 같은 백두혈통인 김여정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앞세운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곤란했었다. 그러니 한국 정부도 한 번 당해보라.

 

그만큼 많이 몰렸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데도 그동안 한국 정부의 입장을 생각해서 많이 참아주고 있었다. 그동안 기다린 시간들에 대한 보상으로 더 열심히 더 많은 것들을 자신들과 약속한 대로 이행해야만 한다. 그냥 건물 하나다. 북한식 사고로는 그렇다. 그깟 건물 하나 쯤이야 얼마든지 다시 지으면 되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사전에 한국 정부에도 통보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기까지만 하겠다. 자신들도 대내외적으로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으니 여기까지만 한 번 마음껏 심술을 보려 보겠다. 박지원이 타이밍 잘 잡았다. 특사는 지금 상황을 풀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 판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해 보자.

 

어쩌면 이낙연에게 보다 일찍 기회가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끝난 뒤에도 변함없이 일관되게 지금의 정책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이 필요하다. 차기 유력 대선후보다. 거의 다음 대통령을 약속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서도 정동영이 북한으로 가서 김정일과 만난 바 있었다. 특사로 간 이낙연의 손에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의 결실이 들려 돌아온다면 그냥 다음 대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 입장에서도 문재인 정부 이후 5년의 시간을 약속받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미국의 승인과 상관없이란 메시지가 그래서 중요하다. 미국의 사정과 상관없이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북한과의 약속을 이행해 나갈 것이다.

 

정상국가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역사속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던 수많은 단명왕조들을 떠올려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국가로서 시스템을 갖추기도 전인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불완전한 체제들이 북한의 그것과 많이 닮았을 것이다. 변덕스럽고 유치한데 집권자의 체면 때문에 자존심만 더럽게 강하다. 근대국가조차 못된다는 소리다. 전근대의 왕조국가만도 못한 체제인 것이다. 꼴같잖은 게 뭔가 대단한 척 허세나 부린다.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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