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정경심 교수가 부동산투기에 손을 대서 아파트도 몇 채 가지고 있었으면 인권위가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인권이란 그같은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만을 위한 인권일 테니.

 

인권의 정의가 바뀌었다. 그동안 검찰수사에 대해 인권이란 측면에서 비판해 온 부분들이 있었다. 지나치게 불필요한 주변인들까지 소환해서 상관없는 별건들까지 헤집으며 사실상 협박에 가깝게 권위를 앞세운 강압수사를 하고 있다. 심지어 구속에 대해서도 피의자의 방어권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최소한으로 제약할 것을 많은 인권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인권위는 주장한다. 검찰은 그래도 된다.

 

인권에 대한 아주 오랜 논리 가운데 하나다. 사람의 인권은 모두 같지 않다. 사람마다 인권은 차등을 두어야 한다. 인권을최대한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과 최소한으로만 보호되어야 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 그리고 더욱 여성주의자들은 같은 인간 안에서 여성이라는 차별을 두고, 여성 안에서도 노동자와 자산가, 전문직의 차별을 둔다. 물론 남성 안에서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끈떨어진 연 신세인 정경심 교수의 인권이야 돌아볼 필요가 있는가. 무엇보다 그렇게 몰아간 주체가 자신들이 그토록 추종하는 주류기득권 남성인 것이다.

 

국민의힘의 성추행, 성희롱, 성폭행은 범죄조차 아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위조차 아니다.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이 일관되게 보여 온 행보였다. 지금 인권위의 판단은 다른가.

 

뒤늦게서야 동의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는 참사를 넘어섰다. 특히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인사는... 아니 좋은 점도 있다. 기자들과 같다. 좋은 여성주의자는 죽은 여성주의자 뿐이다. 인권의 개념마저 이렇게 오염시킨다.

 

원래 여성주의 자체가 인권과는 상관없는 친일, 친독재, 친기득권의, 기득권 남성에 빌붙는 기득권 유한부인들의 취미생활에서 출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달라진 것이 없다. 새삼 확인한다. 인권이 죽었다. 빌어먹을 것들이다.

결국 유시민이 주장한 검찰이 노무현재단 계좌를 들여다 봤다는 의혹 역시 사실로 드러났다. 윤석열의 징계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온지도 꽤 되었다. 그래서? 검찰과 손잡고 난리치던 언론 가운데 제대로 반성하거나 최소한 사실보도라도 제대로 하는 놈들이 있나?

 

윤석열이 고발했을 때는 아주 엎드려 죽는 시늉까지 했었다. 결론은 하나다. 무서운 사람과 무섭지 않은 사람, 그래도 되는 사람과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비열하고 비루한 짓거리가 사람 가리는 것이다. 그러고도 언론의 사명이니 자유니 지껄이겠지.

 

기자놈들이 말하는 언론의 자유란 별 것 아니다. 가짜뉴스 낼 자유, 거짓말할 자유, 기사인 척 광고질할 자유다. 언론의 존재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이유인 것이다. 도대체 지금 언론이 이 사회의 공익과 정의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새삼 확인케 되는 것이다. 좋은 기자는 뒈진 기자 뿐이다. 좋은 기자들 되었으면 좋겠다.

어째서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종전은 커녕 휴전조차 반대하고 있었는가. 이미 국토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국민들이 죽거나 다치고 생사를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전쟁을 이어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북한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루자는 '멸공통일'은 군사독재가 끝날 때까지 대한민국의 국시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오히려 더 호전적으로 전쟁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결국은 아주 최근까지,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도 북한을 일컫는 '괴뢰'라는 단어에 그 답이 있는 것이다. 괴뢰란 한 마디로 꼭두각시 인형이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엄하고 대등한 존재가 아닌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혹은 조종에 의해 영혼없이 행동하는 존재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다못해 한 사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주체들에 의한 병립정부가 아닌 불순하고 불온한 존재에 의해 이용당한 끝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끝내 전쟁의 참화까지 겪게 만든 하수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전쟁도 아닌 '6.25동란'이었던 것이다. 전쟁조차 아니었다. 대등한 정치적 주체에 의한 무력충돌이 아닌 그저 반란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 간단한 비유인 것이다. 당장 조선시대 홍경래가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선조정에서 반란군과 휴전도 아닌 종전을 맺는다 가정해 보라. 더이상 조선조정은 홍경래군과 싸우지 않겠다. 그 말인 즉 홍경래군을 병립 가능한 독립적인 주체로써 인정하고 예우하겠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없었던 대등한 정치주체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니 역사는 이를 '독립'이라 말하고, 그때까지의 무력충돌을 '독립전쟁'이라 다시 정의하게 된다. 물론 북한의 경우는 분열되던 당시 하나의 주권을 가진 정부가 없었으므로 사정이 약간 다르다. 명이 멸망할 당시 숭정제의 자살 이후 정통성있는 황제가 사라지자 너도나도 황제를 자처하던 병립정부의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언젠가 명이든 청이든 하나의 나라로 흡수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종전선언은 그동안 사실상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로 존재해 오던 북한을 완전히 인정해주는 요식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종전선언에 반대한다는 것은 독립된 주권국가로써 병존하는 자체를 반대한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차라리 통일을 주장하는 이들이 종전선언으로 통일의 가능성이 영영 사라졌다 말한다면 이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에 반대한다는 놈들이 종전선언에 무작정 반대부터 하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더구나 종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북한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끌려가야 할 20대 남성들이 그러고 있다.

 

통일이 싫으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종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여전히 북한은 대한민국에게 있어 통일의 대상으로 남고, 따라서 그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시도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명목상이더라도 그로 인한 낭비가 결코 작지 않다. 통일을 비용 때문에 반대한다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종전선언에 찬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언론이 병신인지, 그런 언론만 믿고 떠드는 어린 놈들이 더 병신들인 것인지.

 

하긴 더 어이없는 것은 그래서 스스로 보수의 입장에서 종전선언에 반대한다는 놈들 가운데 이같은 맥락을 들먹이는 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드는 이유가 일본과 미국이다. 일본과 미국 때문에 종전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게 한국 보수의 수준이다. 그런 놈들에게 휘둘리는 자칭 20대 공정남들의 수준인 것이고. 이준석이 딱 그 놈들 수준이기는 하다. 우습지도 않다.

이낙연계가 자신들의 태업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경험이 있다.

 

2012년 당시 김한길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당권파는 문재인 당시 후보의 낙선을 위해 아예 대놓고 태업한 바 있었다. 하다못해 지역조직조차 가동하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선거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훼방만 놓지 않았을 뿐 사실상 낙선운동을 했던 것이었다. 더구나 안철수의 갑작스런 사퇴로 단일화효과도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문재인 당시 후보는 간발의 차이로 박근혜에 패배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낙연이 안철수가 되고, 이낙연계가 김한길의 역할을 대신 한다. 오히려 선대위를 장악하고 선거운동을 훼방놓고 태업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이재명을 지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다음 수순은 무언가?

 

탄핵은 거짓말이다. 아무리 민주당이 180석 의석을, 우호의석까지 190석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탄핵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을 테고, 무엇보다 헌재까지 가서 어떻게 결론이 내려질지 모른다. 거기에 아예 대놓고 검찰이 나서서 훼방놓기 시작하면 탄핵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은 거의 감옥에서 회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뭘 바라고 아예 대놓고 지자 말하고는 자신들만의 시간을 주장하는 것인가.

 

조경태를 기억할 것이다. 한희갑이나 김경재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김한길의 이름까지 거론되는 중이다. 공통점은 무언가 철새다. 그것도 중요한 시점에 민주당의 명분을 가지고 날아갔던 아주 요긴한 철새들이었다. 물론 한두명이면 대선도 끝났는데 데려갈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낙연계 수 십 명이면 과연 어떨까? 민주당의 개혁정책을 앞장서서 저지하고 이재명의 낙선도 도왔다. 여기에 내각제 개헌이라는 미끼까지 던진다. 이보다 더 나은 그들의 시간이 있을까?

 

도깨비라 부르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다면서 윤석열도 지지할 수 있는 놈들이다. 홍준표와 윤석열이 공약한 정책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이전으로 회귀시키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이재명만 막을 수 있다면 자신들은 그마저도 감수할 수 있다. 윤석열과 관련한 의혹에도 침묵할 수 있다. 이재명만 아니라면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도 물고빨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바로 철새들의 시간인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태업했다가는 예전과 달리 자신들의 행위가 바로 지지자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러면 재선도 장담하지 못한다. 금태섭을 기억하고 있다.

 

그냥 적이라 보면 된다. 장차 적이 될 놈들이다. 동교동계가 지금 죄다 어디 가 있는가. 어디에 있었는가.

 

일단 버리고 시작해야 한다. 원팀이라기에 참고 보고 있었더니 또 저 지랄들이다. 민주당은 저 병 못 고치나 보다. 씨발.

과거 선거들을 돌이켜보면 아무리 보수적인 인물이라도 중도층을 공략하기 위해 진보적인 정책 몇 개는 기본으로 공약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처럼 아예 보수조차 바라지 않을 수구로의 회귀를 전면에 내세운 경우란 오히려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흥미롭다. 그런데 어째서 자칭 진보들은 남의 일 구경하듯 하는 것일까.

 

경향이야 이미 수구로 돌아섰고, 그나마 진보를 자처하던 한겨레조차 윤석열의 공약을 보고서도 중계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비판한다면 이재명이다. 정의당은 아예 윤석열은 제치고 이재명의 도덕성만 공격하는 중이다. 윤석열이 당선돼서 실제 공약한 그대로 모든 것이 과거로 회귀해도 상관없다. 그동안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주장하던 진보적 가치란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였던 것인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어째서 정의당이 돈도 없다면서 매번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었는가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빚이 많다는데 빚독촉에 시달린다는 말도 들어 본 적 없었다. 빚이 너무 많아서 정당하게 지불해야 할 임금이나 각종 비용을 체납한 경우가 있다는 말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돈이 들어오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 동은 도대체 어디서 들어오는 것일까?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중도층이란 함정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일 것이다. 민주당의 왼쪽에는 정의당이 있다. 더 진보적인 정의당이 있으므로 민주당이 진보적이지 못해 실망하는 유권자가 있으면 정의당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당에게 등돌린 중도층이 있다면 그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기 쉽다. 그래서 조중동이 정의당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파면 나올 게 많다. 과거 보수정권 아래에서도 토론에서 자기를 모욕한 상대에게 보복하려 한 박근혜를 제외하고 진보정당에 대해 그리 적대적이거나 하지 않았다. 훌륭한 도구였다. 정의당을 통해 민주당이 진보적이지 못함을 비판하고 민주당 내부의 보수화를 이끌어낸다.

 

선거에서 이길 때는 가만 있다가 선거에서 지기만 하면 진보적이어서 졌다. 보수적인 중도층의 마음을 잡지 못해서 졌다. 그러니 진보도 개혁도 다 때려치자. 그런데 진짜 진보적이면 민주당에 실망했을 때 진보정당인 정의당으로 돌아서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정의당이 과연 진보이기는 한 것인가. 진중권 나부랭이가 진보를 자처하던 것이 바로 자칭 진보고, 그런 놈들이 모인 정당이 바로 정의당이었던 것이다. 김학의를 수사한 것도 정권차원의 범죄다. 그로 인해 문재인 대통령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한겨레의 공식 논평이었다. 

 

진보적이라고 그런 자칭 진보의 정체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민주당에 실망했어도 정의당에 표를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포기하지. 진보적이어서 포기하기 쉬운 이유는 어차피 자신들의 요구와 반대로 가는 거라면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보궐선거에서도 다수 진보적 지지자들이 투표를 포기했던 것 아니던가. 지금도 비슷하다. 도저히 민주당 후보인 이재명을 지지할 이유를 찾지 못해 선택을 유보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진보적인, 혹은 우호적인 중도층 유권자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들을 먼저 결집시켜야 진짜 중도층을 끌어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미 정의당으로 갔을 것이므로 보수적인 중도층만 의식하자. 그동안 민주당의 방식이었다.

 

고민해야 한다. 진짜 민주당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민주당을 지지해서 얻을 수 있는 효능감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들을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그를 통해 지지층의 결집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 중도층만 잡으면 끝인 것일까? 대통령의 지지율과 민주당의 지지율을 보라. 민주당은 과연 더 진보적이어서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낮게 나오는가.

 

아무튼 분명해진 것이다. 이번 선거는 진정 진보와 보수의 진검승부가 될 것이다. 보수가 저토록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한 것이다. 저 새끼들은 그냥 자칭이라고. 그래서 유권자들은 진정 진보에 회의하거나 반감을 가지는가. 지켜 볼 일이다. 뭐라도 해야 하는 시점이다.

어째서 경선 전보다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윤석열에게 밀리는 결과만 나오는가. 간단하다. 보궐선거 당시와 비슷한 이유라 보면 된다. 정확히 이재명 리스크가 아니라 민주당 리스크다. 저 새끼들 믿어도 좋은가.

 

정치적 지지란 결과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지지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지자를 정치적 동지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향하는 바와 그 과정에 대한 이해와 추구가 같다. 이른바 말하는 효능감이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치적인 지지를 함으로써 얼마나 내게 맞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윤석열을 지지하는 보수가 목표하는 결과는 하나다. 정권을 교체해서 복수하겠다. 그런데 민주당은?

 

그동안 민주당이 해 온 꼬라지를 보라. 문재인 대통령도 잘 한 것 없다. 지지자를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다. 너무 국민만을 바라봤다. 국민을 이유로 지지자를 외면해 왔다. 그 결과 지지자가 원하는 정치 가운데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런데도 정작 지지자들이 결집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지지자는 무시한 채 중도층만 바라보며 중도층만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 하고 있다. 그런 정당을 지지할 이유가 있을까?

 

이재명을 중심으로 민주당이 더욱 선명하게 정부와 날을 세우려는 선택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여기는 이유다. 지지자들이 돌아볼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지지자를 중심으로 그래도 국민의힘은 아니라는 중도층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차별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대선후보 이재명이 있어야 한다. 이재명이라면 다를 것이다. 이재명이라면 지금까지의 민주당과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다.

 

먼저 지지층이 결집해야 중도층도 움직이는 것이다. 중도층이 움직인다고 지지층까지 결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중도층만 보고 우왕좌왕하는 지금 꼬라지는 무엇인가. 중도층은 결과를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이지 과정까지 살피는 사람들이 아니다. 결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무능한 것이다. 지금 민주당이 빠진 함정이다.

 

이재명이 무엇을 바꿔 줄 수 있는가. 이재명이라면 어떤 것들을 지금보다 낫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아는 새끼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민주당은 무능하다. 지금까지만 보면 그렇다. 답답하다.

역사상 봉건사회에서는 군주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의 크기에 비례해서 지분과 권력이 주어졌다. 그게 바로 천승제후니 백승제후니 하는 말의 유래인 것이다. 천자가 만 대의 수레를 동원해서 전쟁에 나설 때 어떤 제후는 그 가운데 천 대의 수레를 이끌고 있고, 어떤 제후는 고작 백 대도 못되는 수레를 모아서 가지고 왔다. 누구의 발언력이 더 세겠는가. 누가 더 큰 관심을 받고 논공행상에서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겠는가.

 

일본 전국시대에 10만석이니 100만석이니 하는 영지의 규모가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그에 비례해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 차이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더 크고 더 비옥한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지의 크기에 비해 더 적은 병력만을 동원하거나, 아니면 적은 병력을 동원해도 더 정예인 병력을 동원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영지를 보유한 영주의 실력과 영향력으로도 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싸움에 실제 도움이 되는 놈이 최고인 것이다.

 

어째서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은 항상 일본보다 후순위에 있었는가? 당연하다. 인구만도 거의 세 배 가까이 차이났다. 경제력은 아예 말할 것도 없었다. 군사적으로도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호위함대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도 남을 만큼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다 일본 본토에서도 발진할 수 있고 혹은 다른 지역으로도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는 첨단 항공전력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불과 십 수 년 전까지 한국의 군사력이란 육군을 제외하면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프리깃함인 광개토대왕이 한국해군의 최대대양전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체할 전폭기가 없어서 F-4팬텀을 한계까지 굴려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경제력은 사실 한국도 이만하면 아직 아쉽기는 해도 크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1인당 GDP도 일본 턱밑까지 따라왔고 재정건전성만 보면 일본보다 더 큰 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미국의 국제전략에 있어 한국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아직 의문점이 있다. 그래서 미국이 굳이 사드배치를 강요했던 것이었다. 사드라도 한국에 배치해 놔야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미국을 위해 역할을 할 수 있겠다. 그것 말고 지금 한국의 군사력으로 얼마나 미국의 대중국전략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추진하려는 것이다. 전략자산이랄 수 있는 항공모함과 핵잠수함과 대륙간탄도탄의 도입을. 유사시 한국은 미국을 위해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이제 미국은 절대 한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지금처럼 북한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군의 대부분 전략과 전술, 그리고 군사정책들이 북한이라는 특정한 상대에 구속되어 있기 쉽다는 것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오로지 북한을 이기기 위해서만 전략전술을 구상하고 장비를 도입하고 무기를 개량한다. 그것이 과거 한국이 육군만 비대한 불균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첫째 이유였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더 유연하고 더 자유로운 그래서 미국이 원하는대로 바로 반응할 수 있는 군대가 미국 입장에서도 필요하다. 그래서 종전선언인 것이다. 더이상 북한만 의식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로 그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도록 한다.

 

이해했을 것이다. 어째서 일본은 한국과 북한의 종전선언에 반대하고 있는가. 같은 이유로 오히려 한국 보수들이 항공모함과 핵잠수함과 대륙간탄도탄의 도입에 회의적인 것이다. 어딜 감히 일본의 자리를 넘보는가. 어딜 감히 미일관계에 한국이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가. 지금 민주당 일부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냥 일본이 미국 아래 첫째로 있고 한국은 그 아래에서 떨어지는 국물이나 핥으면 된다. 종전선언에 대한 반대와 전략자산 도입의 반대는 그래서 함께가는 것이다. 그들은 또 전시작전권의 환수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미국이 원해서 하는 것이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실제 자신들을 위해 도움이 될 동력이지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중국은 그런 종전선언에 찬성의 입장을 보이는가. 완충지대란 무엇인가? 평소의 긴장과 만에 하나의 경우에 충격을 중간에서 흡수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오히려 그 만에 하나의 상황을 일으킬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중국이 북한에 무작정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해 줄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인 것이다. 그랬다가 진짜 만에 하나 북한이 오판해서 한국과 무력충돌이라도 일으킨다면 그 여파는 바로 가까이 있는 중국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북한과 한국 사이의 긴장이, 아니 더 나아가 미국과의 긴장관계로 인한 불똥도 지금까지 계속 중국에게까지 튀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중간지대에 존재하는 국가나 세력들은 어느 한 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드는 경우가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어느 한 쪽 편에 서더라도 한 편에서 다른 진영과도 여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서로 적대하는 진영들끼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더라도 그를 통해서 중재와 타협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일본과 조선 양쪽에 한 발 씩 걸치고 있던 에도시대 이전의 대마도가 그런 경우였었다. 명백히 일본의 영토였지만 임진왜란 직전까지 전쟁의 가능성을 먼저 경고하는 등 조선과의 관계에서도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과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야 중국도 마음놓고 북한을 한국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간지대로서 마음놓고 키워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가장 종전선언을 바라는 것은 중국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훨씬 유용한 전력이 된 동맹을 북한이라는 족쇄로부터 풀어주어 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고, 중국은 북한이라는 진짜 완충지대를 가질 수 있으며, 당연히 한국 입장에서는 북한과의 적대관계로 인한 막대한 비용과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반면 북한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 완충지대로 자리하고, 미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비중이 높아지면 안좋은 나라가 하나 있다. 그래서 일본이 반대하는 것이다. 종전선언이야 말로 미국에게 있어 일본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종전선언을 반대한다는 건 어떤 의미이겠는가.

 

흥미로웠다. 보수라면 오히려 항모도입에 찬성할 줄 알았다. 핵잠도입에도 호의적일 줄 알았다. 그런데 대륙간탄도탄에마저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어째서? 그래서 전시작전권 환수에 반대해 온 것이었다. 종전선언에도 반대해 온 것이었다. 북한은 주적이어야 한다. 한국의 모든 국방과 군사정책은 북한을 대상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그게 바로 한국 보수의 정체란 것이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글 썼더니 손가락이 꼬이려 한다.

 

더이상 미국이 단일패자로서 자신의 힘만으로 세계질서를 좌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파트너가 필요하다. 유사시 함께할 동맹으로써 믿을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대상이 반드시 필요해졌다. 유럽의 영국과 남태평양의 호주와 과거에는 동아시아에 일본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이란 존재가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돌려주겠다 나서기 시작한 무렵과 일치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근이라는 사람이 얼마전 국군포로를 이유로 진보정권을 비판하고 나선 듯하다. 국군포로를 방치했기에 진보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진보정권이라는 게 언재부터 존재했었더라? 한국전쟁은 언제 일어났고 국군포로는 언제 발생했지? 

 

조창호 대위가 탈북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북한에 국군포로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아니 이승만 정권 당시 포로교환을 통해 돌려받은 국군포로들에 대해서조차 사상검증을 실시하고 그 가운데 상당수를 공식비공식적으로 제거한 바 있었다. 국군포로가 아니라 간첩이다. 애국심이 부족해서 항복했고, 북한에서 빨간 물이 들어서 돌아온 배신자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전직 군인이 그런 부분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진보정권의 책임만 묻는다. 왜?

 

바로 저것이 수구의 국가관인 것이다. 윤석열이 120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해도 그들은 감수할 수 있다. 불량식품을 먹으라 해도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급여를 깎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직제나 직렬에 따른 차별을 강화해도 마찬가지다.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죽어도 너무나 당연하고 보상 한 푼 못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 당장 나를 때려죽이고 내 가족을 강간해 죽여도 그럴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윤석열을 비롯 수구정당이 아예 대놓고 언론을 탄압해도 오히려 잘한다고 칭찬하는 언론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한겨레 보라. 자기들 광고 끊겼어도 오세훈이 TBS 대놓고 탄압하니 만세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국가란 내가 목숨바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있기에 내가 있고, 따라서 나의 이익이나 안위는 크게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수구의 국가관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게 같은 수구의 권력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를 가정한다. 정당한 지배자가 지배하는 국가란 내가 헌신할 대상이지 내가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반면 진보정권은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는, 내가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 이중적인 사고가 수구와 진보정권에 대한 모순된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구정권부터 시작된 모든 잘못들에 대해서는 아예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를 해결하지 못한 진보정권에 대해서는 극도의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맹목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보수적인 수구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수구 역시 그 맥락은 유사하다. 수구정권은 당연히 그래도 된다. 그래서 김학의의 범죄는 범죄가 아닌 것이다. 김학의의 범죄를 묻은 검찰의 행위는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검찰이 범죄를 묻음으로써 일반인이 된 김학의를 수사하는 것은 더 큰 범죄일 수 있다. 그래서 진보적 수구다.

 

그러니까 수구정권에서 국군포로들을 아예 외면하고, 심지어 돌려받은 포로들까지 살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한 채 진보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했다 탓하는 것이다. 수구정권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아예 무시했던 사실은 외면한 채 진보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했다며 욕하는 것과 같다. 국민의힘의 강간이나 성추행, 성희롱은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민주당의 사소한 말실수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군인들이 많다. 그것이 이른바 수구들이 말하는 복수심인 것이다. 자칭진보들까지 무의식 가운데 가지고 있는 정권찬탈에 대한 복수심이다. 어디 한 번 잘하는가 보자. 그렇게 문재인 정부는 시작되었고 그들의 잣대에 의해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그냥 너무 당연하다.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그래서 우습다.

아마 지금은 반페미니즘 정서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더 강할 것이다. 오히려 수구정당 진영에서는 전보다 반페미니즘 정서가 많이 약해진 편이다. 오죽하면 착한 페미니즘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겠는가. 정권을 잡으려면 페미니즘도 필요하다. 왜? 아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자기들 편이라는 걸.

 

바로 작년 박원순 사망을 전후한 정국이 계기였을 것이다. 당시 모든 여성주의자들은 - 심지어 박원순 시장과 깊은 교분과 인연을 쌓아 온 이들마저 그를 위한 한 마디 애도조차 없이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기 바빴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정도가 부족하면 린치가 가해졌다. 그 결과 어느 계약직 여성 방송인은 직장을 잃어야 했다. 현직 검사들은 검찰 수뇌부들을 통해 징계까지 하려 했었다. 미투의 시발점이었던 서지현 검사를 의심하는 부류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에 대한 확인과 검증마저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라며 진실이 아닌 오로지 주장만으로 한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끝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과연 당시 여성주의자들이 피해자라 주장한 그 여성 때문에만 그리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었는가? 하지만 국민의힘 관련 성추문이 이후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심지어 여성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정의당과 한겨레에서마저 김학의에 대한 재수사가 정권차원의 불법이고 부정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가지고 청와대를 겨냥하고 있었다. 김학의가 어떤 범죄를 저지른 인간은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김학의 수사와 관련해서 기소되었다는 이유로 이성윤의 고검장승진을 반대한 것이 바로 정의당이었다. 그들의 여성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째서 안희정은 모친의 죽음조차 부정되어야 하고, 김학의는 그 재수사를 범죄시해야 하는 것인가.

 

아마 기억할 것이다. 올초였던가. 한겨레에서 선언한 바 있었다. 4050남성은 민주화기득권세력이다. 그놈들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자기들 독자 대부분이 그런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랑 절대 상관할 필요 없다. 오히려 적대하며 배제하고 타도해야 한다. 그게 바로 여성주의자들의 속내인 셈이다. 사실상 일베와 같다. 워마드 메갈리아가 원래 일베의 미러링으로 시작된 것이다. 원래 비슷한 것들이 반대편에서 똑같이 놀려 만든 것이 바로 워마드 메갈리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년놈들이 지금 여성주의자의 주류다. 그리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친독재친기득권의 과거 여성주의 선배들이 나올 것이다. 과연 그런 버러지들을 위해 굳이 민주당이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남성들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민주당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기레기것들이 페미니즘을 앞세워 이재명을 공격하는 것부터가 증거인 것이다. 이준석은 2030의 남심을 잡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이해한 것들이 이재명에게 대해서만 적대적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준석의 여가부 해체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던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이 이재명에 대해서만은 공격적이다. 그냥 여성주의가 수단인 것이다. 여성주의가 명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자칭 반페미전사들이 페미니스트들과 손잡고 민주당을 공격하는 양상인 것이다. 윤석열의 페미니즘은 착한 페미니즘, 이재명의 페미니즘에 대한 회의는 나쁜 반페미. 아주 신났지? 그래서 지지자들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안되겠다.

 

그러면 페미니즘 버린다고 여성표 다 날리는 것인가?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비단 민주당 남성지지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여성지지자 가운데서도 페미니즘에 최소한 회의적인 이들이 늘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당 인사들 사이에서 페미니즘 회의론이 조금씩 불거지는 이유인 것이다. 페미니즘이 민주당을 적대하는 이상 굳이 페미니스트들과 함께할 필요가 없다. 자칭진보가 아예 국민의힘과 손잡은 이상 자칭진보와 같이 갈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누가 뿌린 씨앗인가? 오히려 내부의 독일 수 있는 것이다. 자칭 진보와 손잡는 것이 함께 똥통을 구르는 것과 같다면 여성주의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등에 칼을 대고 걷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회의론은 시기적절하다. 반페미가 아니다. 그냥 회의론이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민주당이 함께 나서야 하는데.

 

이제 여성주의자들은 진짜 국민의힘만 바라봐야 하게 될 지 모르겠다. 어차피 상관없을 것이다. 여성주의가 바라는 여성상이란 철저히 기득권에 기생하는 여성의 모습일 것이니. 자기가 노력해서 성공하기보다 남성의 배려로 더 나은 남성을 배경삼아 다른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다. 정의당이 김건희라면 발벗고 나서는 이유도 그것이다. 

광주는 시혜가 아니라 의무다. 권리나 권한 같은 것이 아닌 당위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기에 그리하는 것이다.

 

진중권부터 자칭진보들 지금 하는 꼬라지 보면 윤석열이 광주가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광주 가서 광주민주환운동을 인정해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양 그를 떠받들기 바쁘다. 그 정도 사과 했으면 되지 않았는가. 그런 정도 방명록씩이나 써주었는데 진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긴 민주당 인사들에 대해서는 역시 평가가 다르다. 저들이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가 드러나는 부분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정의당이 국민의힘이나 윤석열의 말꼬리 잡고 비판하는 꼬라지를 못봤었다. 왜이겠는가.

 

저놈들은 이제 광주까지 팔아버렸다. 하긴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놈들이니 당연할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저놈들과는 뿌리도 가는 길도 다르다. 광주가 그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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