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봉건제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봉건제는 그 성격이 달랐다. 물론 프랑스도 처음에는 정복자로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수백년 넘게 대를 이어가며 한 지역에서 영주와 영민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살다 보니 어떤 유대같은 것이 생겨났다. 영주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영민들은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지에서 영주들 역시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영민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의 가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오히려 자신의 영주를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맞섰던 농민들이 단지 어리석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영국의 봉건제는 노르망디의 대공이던 윌리엄의 정복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토착귀족들에 의한 나름의 봉건제가 정착되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정복으로 인해 기존의 봉건귀족들은 모두 몰락하고 윌리엄이 이끌고 온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귀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당연히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기존의 영민들에 대한 어떤 유대나 책임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영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고 나서도 상당기간 그들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지배집단과 피지배민과의 사이의 괴리가 젠트리라는 중간계급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더 많은 수입을 얻고자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추방하고 농지를 목초지로 바꾸었던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도 대한제국까지 한반도의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에는 도덕적 지배를 전제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삶을 살피고 소작인들은 지주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다. 나아가 조선 전체에서도 양반들은 도덕적 모범을 보이며 백성들의 삶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그런 양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약속저럼 지켜지고 있었다. 조선말 탐관오리의 학정에 백성들이 떨치고 일어났을 때도 그들의 중심에는 해당지역의 양반들이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에도 다수의 양반들이 백성들과 함께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위해 무기를 들고 있었다. 나라와 임금을 지키겠노라고 양반들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다수의 농민들이 그에 호응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었다. 양반은 백성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성은 양반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사정은 바뀌었다. 일본인들은 이방인이었다. 일본제국은 단지 정복자였다. 조선에 대한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가지지 않는 일방적인 약탈자이며 통치자였다. 이전의 지배자들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배려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제국에 협력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조선의 기층과 유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과 손잡고 일본에 협력한다는 것은 일본에 더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일본인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실제 이 당시 많은 이들이 일본제국에 대한 협력의 대가로 막대한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약속받고 있었다. 지배세력과 피지배집단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들의 후예들이었다. 조선을 경멸하고, 조선인을 혐오하며, 조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려 했던 이들이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무참하게 같은 동포를 학살할 수 있었는가. 같은 동포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조선말을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사고를 가진 이들마저 적지 않았었다. 그런 이들이 과연 조선의 백성들에 대해,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민들에 대해 어떤 동질감이나 연민의 감정 같은 것을 느꼈을 리 없는 것이다. 타인이었다. 자신보다 열등한 단지 상관없는 타인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죽이고 빼앗아도 전혀 죄책감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어진 군사독재 역시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적 동의 아래 세워진 권력이 아니었었다. 굳이 국민 다수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요구를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국민의 여론을 짓밟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그래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 더 큰 힘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의 눈밖에만 나지 않으면 한반도라는 좁은 땅덩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민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기득권 역시 따라서 단지 권력의 눈치만 잘 살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권력이 일방적으로 권리를 쥐어주고 그 권리를 지켜준다. 국민이야 죽든 말든. 국민들이야 아무리 불만을 가지든. 


계급의식이란 그나마 층위는 같지만 결국 같은 경계 안에 공존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나는 저들과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만큼 저들과 다른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다. 상대에 대한 우월감은 더 큰 책임과 의무로 돌아간다. 결국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공존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복자는 다르다. 이방인인 새로운 지배자들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굳이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인 그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진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위한 기여이고 배려다. 


엘리트는 없지만 정복자는 있다. 어째서 그토록 염치도 체념도 없이 악착같이 하나라도 이익을 더 챙기려 발버둥인가.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일반의 역량이 쇠퇴하면 사회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구멍가게까지 털어간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허름한 손수레까지 빼앗아간다. 그들이 돌아갈 곳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이 속한 집단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다.


굳이 특정기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만이 아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고위공직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동안 궁금했었다. 어째서 한 사회의 엘리트로서 법조인이라는 인간들이 저토록 천박하고 명예라는 것을 모르는가. 명예는 동질집단 안에서나 신경쓰는 것이다. 아무리 명예로운 신사도 일개 야만인들 사이에서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일부러 불편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과연 그들은 한국인인가. 국적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분명 한국인이다. 그러나 정서만을 놓고 본다면 최소한 그들은 나와 같은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 수직의 층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평의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서의 공간이다. 이해의 공간이다. 단지 타인일 뿐이다. 단지 이익만을 얻고 떠나려는 이방인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사회에 정착하려 애쓰는 다른 피부 다른 생김새의 외국인보다 더 먼 타인이 아닐까.


이어진다. 엘리트란 한 사회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지는 이들이다. 더 많은 권리와 권한이 주어지되 그것을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할 책임 역시 지워진다. 엘리트가 없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저 위로 올라간다. 아래는 보지 않고 위로만 올라간다.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조선인들처럼. 저들처럼 되지 않고자. 하기는 그래서 부모들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던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들처럼 된다. 저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21세기의 새로운 식민지다. 같은 국민, 같은 구성원에 의해 지배되는 약탈되는 식민지다. 현실이다.

가끔 놀랄 때가 있다. 건물도 몇 채 있다. 자식들도 하나같이 잘되어 번듯하다. 그런데 정작 부모들은 폐지를 줍고 있다. 말한다.


"그저 심심해서 소일거리로..."


하지만 그들이 소일거리로 모아 파는 폐지들은 또한 한 편으로 어떤 노인들에게는 유일한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작은 손수레에 버거운 몸을 의지해가며 먼 동네를 돌아 겨우 폐지며 폐품들을 모아 팔아서 생활비를 번다. 소일거리로 모아다 파는 그 만큼 그들은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


해외유명인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거의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사회적 의무와 책임이다. 자기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인기를 누리는 만큼 무언가 사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이다. 이미 자신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이므로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역시 특별해져야 한다. 


사실 싫었다. 그야말로 특권의식이다. 남들과 다르다. 보통의 대중과는 다르다. 자신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과 같은 평범한 존재로 돌아오는가. 평범한 일반과 같이 책임과 권리를 나눈다면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는가.


답은 엉뚱하게도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제법 돈도 벌었다. 자식들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과 경쟁하며 폐지를 모아 소일거리를 삼는다. 아니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들의 폐지마저 독점하여 돈을 벌려 한다. 평등하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빌딩을 몇 채나 가진 사람도 좁은 반지하방에서 볕도 못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어떤가.


워낙 가난했다. 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부자가 되어야 했었다. 부자조차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었다. 쓰레기를 주워다 팔아야 했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굶어가며 졸아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만 했었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부자가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가난하다. 여전히 같다. 어제까지 같이 가난했던 사이이고, 얼마전까지 부자였어도 자신들과 크게 차이가 없던 처지였다. 그러므로 여전히 부자가 되었어도 더 악착같이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쓰레기를 모아서 팔아 돈을 벌어야만 한다.


아마 우리사회가 가진 모든 모순과 병폐의 근원에 이것이 있지 않을까. 빌딩을 가졌으면 그에 어울리는 삶이 있다. 자식이 모두 장성하여 성공했다면 자식이 없는 외로운 처지의 노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배려다. 그럼으로써 아직 가진 것 없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만 한 사람이라도 경쟁자를 줄여준다. 그만큼 알량한 것들이나마 기회를 양보한다. 폐지 그거 가져다 팔아봐야 얼마 받지도 못한다.


대기업이 피자나 치킨을 만들어 팔면야 더 싸게 팔 수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인프라가 다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수단들만 동원해도 더 쉽게 더 많이 더 싸게 대중에 피자와 치킨을 공급할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했었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러면 고작 가게 하나 가지고 가족들을 모두 동원해서 겨우 마진이나 남겨먹는 동네 피자집이나 치킨집은 어쩌라는 것일까.


대기업은 자신의 브랜드가치에 맞는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러운 더 첨단의 제품들을 만들어 판다. 비슷한 성능과 디자인이라도 중소기업은 브랜드 가치 만큼 더 싼 값에 물건들을 만들어 판다. 나아가 대기업의 이름에 어울리는 분야들에 진출한다. 중소기업이 그나마 알량한 시장을 나눠먹고 있는데 끼어드는 것은 반칙이다. 중소기업에 어울리는 업종이 있고, 개인사업자에게 어울리는 업종이 있다. 아예 가리지 않는다. 대중들은 오히려 싸졌다 편해졌다 좋아한다. 중소기업과 중소자영업자들은 죽어나간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판사나 검사 쯤 되면 남다른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가 되었으면 사회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만큼 특권을 누린다.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다. 실제 특별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아무나 판사가 되는가. 누구나 검사가 되는가. 국회의원이 되려 하면 얼마나 고단한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가. 수 십 년을 한결같이 도전하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는 이들은 또 얼마이던가. 하지만 오히려 평범한 대중처럼 그들과 어울려 눈앞의 이익을 얻기에만 더 급급하다. 하기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그런 평범한 대중들인 가족이고 친구이고 이웃들일 것이다. 한 사회를 책임져야 할 엘리트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고, 아들이고, 누이이며, 누군가의 가까운 친인이다. 모두는 그렇게 저렴해진다.


너와 내가 같다. 모두가 평등하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경쟁이라는 현실과 만나면 결코 좋은 말일 수만은 없다. 현실이 다르다. 조건이 다르다. 그렇다면 체급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비슷한 조건끼리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무한경쟁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모두가 함께 경쟁한다. 심지어 대기업이 나서서 순대며 떡볶이며 길거리 간식까지 손대려 한다. 동네 구멍가게까지 손아귀에 쥐려 한다.


계급이 필요하다. 너와 내가 다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서로가 누리는 사회적 권리도,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 역시 모두가 다르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기에게 걸맞는 세계가 있다. 책임을 지운다. 한계를 지운다. 그래도 그만큼 살면서 폐지까지 줍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고작 소일거리를 위해 얼마 안되는 돈마저 빼앗는 것은 너무 심하다. 자신의 수준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경쟁을 해도 거기서 해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사회적 책임을 진다. 그런 것이 당연해진다. 어차피 모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특별한 신분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책임을 독점하는 특권적인 신분과 계층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누리는 권리 만큼 더 많은 더 중요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서로가 짊어진 것들이 다르다. 서로가 누리는 것들이 다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다. 말 그대로 사회의 주류다. 사회를 주도하여 이끌며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그렇게 사회는 나뉘고 있다. 현실은 존재하는데 인식이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아직 모두가 가난하다. 아직 모두가 비천하다. 버르적거리며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기어올라가려 애쓰고 있다. 저 한참 위에서도 더 위로 올라가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흙탕을 뒹군다. 누군가는 줄을 드리워 주어야 한다. 줄을 고정시키고 힘껏 지탱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자기 올라가는 것만 급급하다면 결국 뒤쳐진 이들만 버려질 뿐이다. 그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사회의 자원만을 낭비한다.


트럭까지 동원한다. 개인의 차량까지 동원해 싹쓸이한다. 전혀 죄의식조차 없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만큼 돈을 벌고도 아직 가난하다. 때로 섬뜩해지는 이유다. 바로 우리 사회와 닮았다.




더 정리해 쓰고 싶지만 인터넷에 쓰는 글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는 것도 비례에 맞지 않다. 떠오르는 이야기면 족하다. 틀리면 틀린대로 모순되면 모순된대로. 생각은 이어진다. 글이 끝은 아니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과 같은 것이다. 사고는 이어진다.

국민의당 리베이트 파문이 유력대선후보인 안철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장차 대통령이 되고자 할 때 그 자격을 묻는 시험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책임 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주어지는 자리다. 당장 행정부의 수반이자 군최고통수권자로서 아주 많은 사안들을 직접 결정할 수 있다. 단지 그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권력을 나누어 가진다. 주위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자기는 그러려 하지 않아도 어느새 가족이 주위의 측근들이 부정에 손을 대고 만다. 김영삼도 그랬고 김대중도, 노무현도 마찬가지였었다. 오랫동안 불의한 권력과 싸워왔기에 스스로 그들과 다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자신도 청렴했고 공직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남달랐다. 그러나 어찌되었는가. 다름아닌 아들이, 친형이, 그리고 측근들이 줄줄이 비리와 연루되어 처벌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처벌이라도 받았으면 다행이다. 어떤 정부에서는 아예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검찰조사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요식적인 수사만을 겉핥기로 하고 대충 마무리짓는 경우도 많았다. 나라의 부가 새어나간다. 국민의 이익이 그리로 흘러들고 만다. 국가와 국민에 크나큰 해를 끼치게 된다. 엄격하게 통제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엄정하게 책임을 묻거나.


이번 리베이트 파문은 안철수에게 최소한 자신의 주변에 대한 통제능력이나 혹은 의지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안철수가 몰랐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고, 알았는데도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의지가 없는 것이다. 사당은 상관없다. 공당이라면 문제다. 하물며 국가라면 더 큰 문제다. 국가의 요인이 그런 식으로 대통령의 묵인 아래, 혹은 대통령의 눈을 피해서 부정을 저지른다. 


아니 하다못해 그런 일들이 결국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면 엄정하게 조사해서 처벌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지지부진이다. 당사자들을 부러 제대로 조사조차 않고 있었다. 그저 계좌내역만을 가지고 아무 문제 없다며 내부고발자를 색출하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물론 안철수 자신이 직접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마저도 안철수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면 리더십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부정을 미리 막지도, 이미 저질러진 부정의 진실을 밝히지도, 엄정히 책임을 묻지도 못한다. 걸러지지 않은 말들이 아무렇게나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다. 대통령이 되었다 생각해 보라.


설사 김수민 개인의 일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두가 추측하는대로 박선숙이 배후에 있다면 그것은 더 심각하다. 안철수가 몰랐기를 바란다. 아무리 싫어도 설마 유력대선후보라는 사람이 그런 수준... 아, 반기문이 있었다. 미안하다. 한국에서 대통령후보가 되는데 특별히 자질따위 필요없는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과연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인물인가.


그래서 오래전부터 비판해 왔었다. 도대체 뭘 보고 유력한 대선후보인가. 박찬종도 그랬다. 이인제도 마찬가지였다. 문국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검증된 것이 없었다. 개인의 성취와 공인으로서의 책임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대통령은 성취하는 자리가 아닌 책임지는 자리다. 정치인이란 개인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닌 국가의 공익을 위해 책임을 가지고 봉사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개인의 성취만을 가지고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가름한다. 공적인 책임을 지우려 한다. 항상 그렇게 바람을 불어왔었다. 무책임하게. 아무것도 따지거나 묻지 않고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야 자기 기업이니까 알아서 자기식대로 하면 된다. 말아먹어도 자기 책임이다. 하지만 국가는 아니다. 국정을 책임진다는 것은 수천만 국민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원칙이 존재한다. 원리와 상식이 존재한다. 그것을 묻는다. 과연 자격이 있는가.


볼수록 확신만 커질 뿐이다. 의지도 없고 신념도 없고 능력은 더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유력대선후보다. 무엇을 기준에 둔 유력대선후보인 것인지. 나아지는 것이 없다. 밝혀지는 것도 없다. 그냥 버티고 있을 뿐이다. 안철수의 현주소다.


안타까운 것이다. 대한민국의 유력대선후보다. 유력 3당의 대표다. 두번째로 많은 비례투표 지지를 받았다. 현실은 항상 픽션보다 더 극적이다.

"그가 나를 국사로서 예후했으니 국사로서 갚으려는 것 뿐입니다(國士遇之國士報之)"


지금도 회자되는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가꾸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고사의 주인공인 전국시대 사람 예양이 자신이 굳이 목숨을 바쳐가며 죽은 이를 위해 복수하려는 이유에 대해 원수라 할 수 있는 조양자에게 했던 말이다. 여기에서 국사란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비, 즉 인재라는 뜻이다. 그만큼 극진히 예우하고 중요한 일을 맡겼다는 뜻이다.


초한쟁패 당시 한의 중신 가운데 한신과 진평은 원래 항우의 휘하였었다. 원래 항우의 신하였는데 그를 떠나 유방의 휘하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배신자라 부르지 않는다. 삼국지에서도 원소의 휘하였다가 조조에게로 귀순한 장합이나 유요의 장수였다가 손책과 의기투합한 태사자를 두고 배신자라 말하는 사람 역시 없다. 강유와 왕평 또한 원래는 조위의 휘하였지만 죽는 순간까지 촉의 충신으로 살았었다.


대우가 달랐던 때문이었다. 원래 항우의 총신이었거나 원소의 고관이었다면 평가는 달랐을 것이다. 장량의 친구였지만 일족인 항우를 배신하고 정보를 빼돌렸던 항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가 불리한 것을 알고 미리 도망쳤던 종리매와 계포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만큼 항우의 신임을 받았고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았었다. 그러나 한신과 진평은 항우의 진영에 있을 당시 여러 무장과 문사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고, 장합 또한 원래 한복의 신하로서 항장이라 하여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태사자는 끝까지 유요에 충성하려 했지만 오히려 유요가 그의 충성을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찾아가 새롭게 둥지를 트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쩌면 충의를 원리적으로 강조하던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서도 이 정도 합리성을 지켜져 왔었다. 자신을 대우한 만큼 보답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 마찬가지로 충분히 대우하지 않았고 알아주지 않았다면 그에 대해 보답할 의무 또한 사라진다. 똑같이 세조의 찬탈에 앞장섰음에도 신숙주는 변절자라 부르고 한명회는 경세가라 일컫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숙주의 경우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으며 심지어 단종에 대한 고명까지 받았었다. 그런데도 선왕의 고명을 어기고 찬탈에 동조하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집권하기까지 이렇다 할 벼슬도 없이 한미한 처지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의 신하가 아니었다. 단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수양대군의 신하였다. 집권 이후 권신으로서 저지른 부정과 전횡이 문제될 뿐 ㅌ찬탈을 도운 행위 자체는 거의 비난을 듣지 않는다. 사육신은 충신이지만 그렇다고 한명회와 권람이 역적이 되지는 않는다.


조선업계의 구조조정 문제로 세상이 한창 시끄럽다. 조선업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필 그 대상이 노동자들이다.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회사를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잘려져 나간다. 그래서 과연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할 만큼 - 당장 생계마저 위협받아야 할 만큼 큰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던가. 책임에 걸맞는 예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근거로 그들은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받아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받는 임금이 곧 자신의 책임이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권한과 예우가 자신이 져야 할 의무여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많은 것들을 누리는가. 그렇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의무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정작 많은 것들을 받고 누렸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그래서 밀본의 본원 정기준은 세종에게 백성이 똑똑할수록 오히려 속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라도 국민도 민족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백성에게는 당장 자기 입에 들어오는 밥이 곧 하늘이고 나랏님이고 정의였다. 하지만 어느새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늘어나면서 굳이 자기와도 상관 없는 나라와 국민과 민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혼돈에 눈코입이 생기니 피를 토하며 죽더라는 말 그대로다.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책임까지 짊어진다. 어설프게 하는 탓에 쉽게 속고 만다. 실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어설픈 지식이 자신을 착각하게 만든다.


나라를 위해 국민으로서. 회사를 위해 직원으로서. 하지만 자신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려왔던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라를, 회사를 살려야 하기에 그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신만 죽는다. 숭고한 의미가 붙는다.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희생이다.


알아주지도 않는데 한직만 전전하면서도 항우에게 충성을 바친다. 충성을 바친 끝에 항우와 함께 목숨을 잃는다. 그것을 숭고하에 여기는 자체가 어설픈 지식의 결과인 것이다. 허구헌말 매맞아가면서도 내 두목이니까. 형님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니까. 남편이라고 매일같이 술먹고 폭력만 휘두르는데 그래도 남편이니까.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이고 헌신인가. 그마저도 자기만족으로 대신해 버린다. 희생한 만큼 - 즉 고통받은 만큼 자신의 가치는 높아진다. 그렇게 희생과 인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정작 더 책임지고 대가를 치러야 할 누군가는 가만히 있는 채.


당연한 산수를 해보려 한다. 그래서 왜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누구에게 더 얼마나 많은 책임이 지워져야 하는가. 정부가 있다. 경영진이 있다. 회사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몇 분의 1도 대부분의 노동자는 가져가지 못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지워야 하는가.


당연한 산수조차 불경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때로 절망하기도 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다수에 때로 자신이 틀린 것은 아닌가 반문도 해본다. 하지만 받은 것도 없는데 책임까지 지는 것은 부당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분노케 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가. 현실이 부당하다.

경영자도 노동자다. 임원들 역시 노동자다. 놀고 먹는가? 아니다. 일하라는 자리다. 오히려 일반노동자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가치있는 일들을 하라고 그 많은 연봉에 예우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가 위태로워졌다. 누구의 잘못인가.


노동생산성은 노동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력과 임금은 상수다. 한 사회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당연히 노동자의 임금 역시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높아진 임금수준에서도 더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영진이 해야 할 일이다.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고서도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 그래서 경영자에게는 고위임원들에게는 막대한 급여와 각종 예우가 주어진다. 노동자를 징계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진다. 그런데 망했다.


하기는 나라가 망했는데도 조선왕실은 일본제국 황실의 일원이 되어 떵떵거리고 잘만 살았다. 여전히 일본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예우받으면서.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었든. 양반들도 그래도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대마불사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책임으로부터도 면제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마음껏 말아먹고 망쳐놓아도 정작 자신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야 시키는대로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했을 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정규직 노조야 그렇다 치더라도 파업조차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책임은 이들이 진다. 경영을 잘못해서, 분식회계로, 혹은 낙하산으로, 그렇게 부당한 이득을 챙겨왔던 이들은 여전하다. 그러고서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더러 희생하라.


국민의 잘못이다. 국민이 그렇게 길들여 왔으니까. 국민이 그렇게 가르쳐 왔으니까. 시시비비를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나라경제를 살려야. 기업을 살려야. 그러니 노동자가 죽어야.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상관없는 노동자들은 얼마든지 죽어도 된다. 여론은 항상 노동자의 반대편에 있었다. 나라경제가 어려우니 너희들이 죽으라. 시작을 누가 했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임은 국민이 진다.


어째서 나라경제가 이토록 어려운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노동자들에 책임을 떠넘기면 되니까. 경영 잘못해서 손실이 나면 경영자나 임원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지운다. 국민은 그것을 지지한다. 그렇게 하라고 실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경영을 잘해야 할 동기가 사라진다. 그냥 적당히 내 이익만 챙기다가 안되면 정부의 지원이나 받으면 된다. 노동자 해고하고 임금을 깎으면 된다.


말하기도 싫다. 여기서는 이래도 된다. 정부의 탓만이 아니다. 기업의 탓만도 아니다. 여론이 그렇다. 국민의 생각이 그렇다. 너무 오랜 싸움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지쳐갔다. 강성노조가 어디 있는가. 그래도 노동자 때문이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 피곤타. 우울하다.

원래 세금을 낼 때도 마찬가지다. 국세청에서 일괄적으로 개인과 법인의 수입과 지출내역을 파악해서 세금을 매기고 거둬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비용도 수고도 시간도 너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개인과 법인이 알아서 소득과 지출내역을 정리해서 신고하면 그를 기준으로 국세청에서 세금을 매기고 그대로 납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무사가 존재한다. 개인과 법인이 내야 할 세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전문지식을 빌려준다. 


바로 여기에서 여러해 전 탈세라며 한창 시끄러웠던 강호동의 과다계상에 의한 과소납부라는 이슈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나 법인이 자발적으로 신고하지만 항상 정직하게 사실대로 신고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일정한 샘플을 지정해서 국세청이 따로 신고내역을 정밀하게 추적해서 조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세무사가 판단한 감세 및 면세 내역에 대해 세무당국이 인정하지 않으면 세무당국의 의견에 따라 추가적인 세금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이를 기준으로 원래 내야 할 세금보다 비용을 초과계상해서 더 적게 냈다는 것이 과다계상에 의한 과소납부의 진실인 것이다. 한 마디로 불법은 아닌데 잘못된 해석으로 잘못된 내용을 신고했다. 당국이 바로잡았으니 그에 따라 세금을 더 내면 된다.


선관위의 선거비보전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세금으로 선거비용을 보전해주는 것이니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하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당선부터 되고 봐야 하니 아무래도 더 좋고 더 비싼 더 선거에 도움이 되는 수단들을 사용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런 것들까지 일일이 세금으로 보전해주다가는 낭비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준을 정한다. 여기까지는 선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비용이고, 여기서부터는 후보자 개인의 욕심이다. 여기까지는 정당한 선거비용으로서 인정할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다. 물론 정당이나 후보자 개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보전받아야 할 테니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비용을 보전받을 수 있도록 자료를 제출한다. 그리고 각 정당과 개인들이 신고한 내용 가운데 선관위는 엄격하게 심사해서 인정할 수 있는 것들만을 추려서 그에 대해서만 선거비용을 보전하게 된다. 나머지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번 국민의당과 지지자들이 리베이트에 대한 물타기로 관행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선관위의 선거공보물 비용 보전거부 및 선거비용 부풀리기의 진실인 것이다. 선관위 자신도 단지 비용을 부풀렸다 말하고 있지 그것이 불법이라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절차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당들은 최대한 비용을 보전받기 위해 가능한 모든 비용을 신고하고, 선관위는 그 가운데 인정할 수 있는 것들만을 추려서 나머지는 보전을 거부한다. 그런데도 그 부풀리기가 다른 정당에비해 너무 컸고, 그 가운데는 심지어 불법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관위가 보전거부로 끝내지 않고 자체조사를 거쳐 검찰에 고발하게 된 경위였다. 관행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부분도 아니다. 국민의당만 관행을 주장한다.


하기는 벌써 디자인협회마저 나서서 국민의당의 관행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최소한 디자인업계에 국민의당이 주장하는 관행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그같은 관행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업계에 한 발 걸치고 있었을 김수민 의원이 몰랐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김수민 개인의 일탈만은 아닐 것이라 개인적으로 추측하게 되는 이유다. 관행은 익숙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업계의 관행이 아닌 다른 관행이다. 그리고 업계의 관행이 아닌 다른 관행이라면 그같은 관행에 익숙한 누군가가 뒤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납세는 국민의 의무지만 절세는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다. 법이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하도록 정의해 놓았다면 그것을 찾아서 스스로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법을 지켜야 할 국민의 의무일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자신이 쓴 비용을 신고해야 하지만 그 정직 안에는 법이 정한 자신의 권리 또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오해하기 쉽다. 정직이 정당, 혹은 개인의 의견과 정부기구와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무튼 재미있다. 속속들이 까발려지고 있다. 안철수는 어느새 한참 뒤로 물러나 있다. 책임이 없거나, 아니면 권한이 없거나. 남의 일처럼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정면으로 국민의당을 겨냥하며 안철수의 지도력을 시험받는다. 안철수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비리들이 저질러진 과정도, 그것이 밝혀지고 이슈가 되고 수습되는 과정 역시. 남의 일일 때 모든 것은 헤프닝이 된다. 웃을 수 없는 것은 그래도 공당인 때문이다. 씁쓸하다.

하기는 이제는 지지자들도 새정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변한다. 안철수도 국민의당도 더이상 새정치라는 말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새정치라는 프레임으로 가두려 하지 말라. 정치는 현실이다.


한국사람은 정의를 믿지 않는다. 보편적인 정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합의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소리 크고 확신이 있다면 그것이 정의가 될 수 있다.


일단은 우긴다. 괴벨스도 말했다. 대중은 거짓말을 하면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믿게 된다. 승자에게 진실을 추궁하는 사람은 없다. 실제 지난 총선에서 노골적으로 지역주의를 이용했음에도 심지어 지역주의에 비판적인 야권언론들조차 국민의당의 승리만을 이야기했지 그들이 선거과정에서 했던 말이나 행동들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하지는 않았었다. 승리가 중요하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정치인들이 배운 교훈이다. 그래서 선정적인 기사거리를 찾는 기자들과 손잡고 일단 대충 던지고 본다. 아무거나 던지고 이슈로 만든다. 계속 우기다 보면 믿는 국민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진실마저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고보니 성완종사태에서도 국민들은 노무현을 끌어다 물타기하는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의도에 훌륭히 넘어가 주었다.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받은 현정부와 여당의 인사들이 아닌 노무현 정부의 사면이 더 큰 문제다. 국민의 힘으로 당시 야당은 엄중한 심판을 받았었다.


자체조사결과 리베이트는 없었다. 굳이 수사대상인 박선숙이나 김수민을 직접 조사하지 않고도 벌써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비례대표 공천과정에 대해서는 굳이 더이상 문제가 없으므로 조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을 내부의 음해나 정치적인 탄압으로 몰고간다. 다만 문제라면 더이상 언론이 국민의당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편했었다. 더민주를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새누리당의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국민의당과 안철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 필요가 사라졌을 때도 여전히 국민의당과 안철수는 언론의 방치에 가까운 보호를 받을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미 대부분의 언론이 국민의당과 안철수를 공격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몇몇 진보언론이 국민의당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고 있다.


과연 얼마나 우길 수 있을까. 과연 얼마나 반복해서 미디어를 통해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도 지지자는 결집한다. 여기에서 국민의당이 끝나서는 안된다. 안철수가 끌어내려져서는 안된다. 정치의 재미있는 점이다. 지지하는 정치인이 잘못하면 차라리 등돌리기보다 오히려 더 지지를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인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다. 정치인의 잘못이 자신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도 정치인이 잘못해서는 안된다. 잘못했더라도 잘못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믿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치를 제대로 배웠다.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도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몰아간다. 단지 저들은 이미 1당도 2당도 아니다. 여당도 제 1야당도 아니다. 아마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 1야당 시절 새정치민주연합도 언론이라는 환경 앞에 철저한 약자였다.


지지자들이야 상관없다. 어차피 믿을 것을 전제로 정치적인 지지도 보내는 것이다. 사안이 갈린다고 믿음을 거둔다면 지지자라고 하기도 어렵다.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말들만을 한다. 어차피 국민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사실에도 진실에도 관심이 없다.


새정치를 한다. 헌인물들이 새정치를 하고 있다. 낡은 인간들이 모여 낡은 관행을 새정치로 하고 있다. 그 위에 안철수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오래된 냄새가 그래도 술단지였음을 알게 한다. 재미있다.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대한민국과 국민의 현주소다.

아무래도 소비수준이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기왕에 먹는 것 맛있는 것으로 먹고 싶다. 맛도 좋고, 영양도 있고, 분위기도 있는 그런 곳에서 비싸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다. 그래서 맛집열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백종원으로 대표되는 직접 맛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맛있는 것들로 마음껏 배불리 먹으려 하다가는 살이 찌고 만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상에서 벗어난 체형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살찐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살을 빼지 않는 것은 죄악과 같다. 이율배반이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으면 살이 찌고, 그렇다고 살을 빼자니 맛있는 것들을 마음껏 먹지 못한다. 먹고는 싶고, 살은 빼야겠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먹게 하는 것이다. 내가 먹지 못하니까. 내가 먹어서는 안되니까. 남이 먹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맛을 상상하고, 그 느낌을 상상하고, 그 순간의 만족을 상상한다.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금욕은 인간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당위다. 당위는 도덕이 되고 정의가 된다. 금욕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그런데 욕망은 본능이다. 그래서 원래 역사적으로도 억압된 사회일수록 이상한 짓거리들이 발달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지 못하니 그늘에 숨어 대리만족을 발전시킨다. 얼마나 이 사회는 식욕을 부추기면서 한 편으로 식욕을 억압하고 있는가.


그러고보면 나도 역시 배불리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살찌는 것이 싫다. 배나오는 것이 싫다. 차라리 먹는 것을 줄인다. 배고픔을 참아낸다. 먹방을 보면 가끔 자신도 그런 쾌감을 느낀다. 맛있겠다. 배부르겠다. 좋겠다. 부러움을 넘어 그 느낌을 탐내고 가져오려 한다. 


식욕을 부추기는 것이나, 식욕을 억압하는 것이나, 심지어 억압된 욕망의 비틀어진 틈을 비집고 이용하는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또한 욕망이다. 욕망이 욕망을 낳고 욕망을 억압하고 억압된 욕망을 이해한다. 이 사회의 구조를 보여준다. 문득 떠올리는 재미다.


프랑스대혁명기를 살았던 작가 마르퀴 드 사드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아주 놀라운 직관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욕망을 쫓는가. 아니면 욕망을 추상하는가. 추상은 이성의 영역이다. 도덕과 양심과 정의를 판단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런데 정작 사드는 바로 그 이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추상하는 또다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성매매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절한 수단을 통해 자유롭게 해소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두어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성범죄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과연 옳은가? 그렇다면 당장의 성적 충동과 욕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더이사의 추가적인 충동이나 욕망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포르노를 보면서, 그리고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사창가 근처에서 성범죄는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포르노의 합법화와도 관계가 있다. 성매매를 합법화했더니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면서 불법적인 성매매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포르노가 유통되는 사회에서 불법적인 포르노 역시 함께 생산되며 유통되고 있었다. 인간은 욕망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재주가 있다. 욕망한 적 없는 것들마저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상상력이다. 그것이 추상이다. 그것이 이성이다. 더 큰 욕망을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그래서 항상 궁리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선다. 하나가 충족되면 새로운 하나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의 타락 역시 끝이 없다.


과연 섹스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해 본 사람, 어느 쪽이 더 성욕을 억제하기 쉬울까? 당장 오늘 성매매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해결했다. 직접적인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성적 충동을 발산했다. 그러면 한동안은 어떤 충동도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부부사이에서도 어느새 찾아온 권태기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실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디 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쌓여간다. 욕망을 가르친다. 물론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을 어디서나 쉽게 단지 돈만 있으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매매가 합법화되었을 때 성매매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성매매라고 하는 자체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이 도구가 된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어째서 성매매업소 근처에서 더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는가. 포르노를 접한 사람들 가운데 성범죄의 발생빈도가 더 높은가. 그곳에서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다. 오로지 그로써만 존재한다. 포르노에 익숙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여성관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설사 성범죄가 사라지더라도 사회에는 또다른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멸시와 혐오가 당연한 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는 나 역시 성매매합법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은 성매매여성에 대해 전혀 차별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실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다. 보다 다수의 일반의 문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 여성 또한 인간이어야 한다. 목적이며 존엄이어야 한다.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설득하여 자신의 욕망에 동의토록 할 수 있을까. 쉽다는 자체가 이미 상대를 존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을 자본의 대상으로 여긴다. 도구로서 객관화한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또한 자본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오랜 욕망의 정수다. 아무튼.

한국사람들의 심리에는 그런 것이 있다. 오랜 유교문화의 유산인지 모르겠다. 거물을 좋아한다. 아무튼 널리 이름이 알려진 대단하게 훌륭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선거때만 되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유다. 기성정치와 관계없고, 그러면서도 유명하고, 자기 분야에서도 실적을 남긴 그런 인물이라면 무조건 한 번 맡겨 볼 수 있다. 정치는 그런 거물들이 하는 것이다. 정치에 물들지 않았으니 더 잘할 것이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도 그래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서는 몇 명 씩 대통령만을 노리는 저격수가 자발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기 지역 정치인이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을 상대로 싸움도 걸고 고함도 지른다. 대통령과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거물이다. 그런 이미지를 노린다. 실제 재야와 운동권의 거물이었던 전력과는 달리 과거 한나라당에서 김문수와 손학규가 전국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김대중과 노무현을 제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할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전국에 알린다.


불과 얼마전까지 이재명이라면 그저 서울에 붙은 성남이라는 도시의 아는 사람이나 겨우 이름을 들어 아는 시장 정도에 불과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이재명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들을 일도 없고, 설사 듣더라도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성남에서나 겨우 알아줄만한 전국적으로 보면 피라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일개 지방도시의 자치시장이 대통령과 행정부를 상대로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다. 아니 이재명이 먼저 부딪히기 전에 청와대와 행정부가 먼저 나서서 이재명을 견제하고 있었다. 청와대와 행정부마저 움직이게 만드는 전국구의 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검찰이 움직인다. 행정안전부가 움직인다. 경기도가 움직인다. 마치 형주의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 위와 오가 뭉치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고작 형주에서도 강릉 하나만을 겨우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조인과 우금, 서황, 오에서는 육손에 여몽까지 움직일 정도로 관우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달리 만인적이 아니다. 그정도 동원해야 확실하게 관우를 잡을 수 있었다. 이재명을 잡기 위해서는 검찰과 행정부와 광역자치단체까지 나서서 압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만한 힘이 움직이면 언론이 침묵해도 세상에 알려질 수밖에 없다.


솔직히 정치인 개인에 대한 선호도만 놓고 본다면 문재인보다는 이재명이다. 문재인은 인간적으로 존경하지만 이재명은 정치인으로서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현실에 옮겨주는 그야말로 자신의 대리인이다. 내가 성남시민이 아닌 것을 그래서 항상 안타깝게 여긴다. 만일 이재명이 대선후보로 나와 당선을 노려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른다면 마땅히 나는 그를 위해 투표할 것이다. 굳이 이재명을 지지하더라도 야권의 승리에 전혀 지장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이재명에게 한 표를 행사한다. 그런데 그 이재명이 그를 견제하는 청와대와 행정부, 광역자치단체로 인해 거물이 되어 가고 있다.


그냥 단식이 아니다. 행정부에 맞서는 단식이다. 행정부의 뒤에 도사린 청와대에 맞서는 단식이다. 이미 이재명은 청와대라고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일개 자치시장에 불과한 이재명이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선다. 모르긴 몰라도 성남시민들은 무척이나 뿌듯해 할 것이다. 원래 자기 동네에서 거물이 나온다는 건 그런 의미일 테니까. 비로소 성남에서도 전국에 내세울 인물이 나왔다.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간다.


그야말로 이재명프로젝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무시하고 넘어갔다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의식했으며 티나게 견제했다. 표나게 압박했다. 그 결과 숨어있어야 할 이재명이 드러났다. 이재명의 이름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현정부의 반대편에 있다. 현정부의 실정의 정반대편에 그의 존재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인다. 의외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란 언제나 있어왔다.


흥미롭다.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벌써 단식 8일째다. 언론은 침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은 그의 단식에 주목하고 있다. 주목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폄하하고 누군가는 비난하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더 열성적으로 지지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는 있다. 청문회장에서 명패를 던지고, 장례식장에서 원수라 할 수 있는 이에게 허리를 숙인다. 계기는 아무때도 찾아올 수 있다. 기대가 크다. 지지하는 정치인이다. 꿈을 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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