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국사로서 예후했으니 국사로서 갚으려는 것 뿐입니다(國士遇之國士報之)"


지금도 회자되는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가꾸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고사의 주인공인 전국시대 사람 예양이 자신이 굳이 목숨을 바쳐가며 죽은 이를 위해 복수하려는 이유에 대해 원수라 할 수 있는 조양자에게 했던 말이다. 여기에서 국사란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비, 즉 인재라는 뜻이다. 그만큼 극진히 예우하고 중요한 일을 맡겼다는 뜻이다.


초한쟁패 당시 한의 중신 가운데 한신과 진평은 원래 항우의 휘하였었다. 원래 항우의 신하였는데 그를 떠나 유방의 휘하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배신자라 부르지 않는다. 삼국지에서도 원소의 휘하였다가 조조에게로 귀순한 장합이나 유요의 장수였다가 손책과 의기투합한 태사자를 두고 배신자라 말하는 사람 역시 없다. 강유와 왕평 또한 원래는 조위의 휘하였지만 죽는 순간까지 촉의 충신으로 살았었다.


대우가 달랐던 때문이었다. 원래 항우의 총신이었거나 원소의 고관이었다면 평가는 달랐을 것이다. 장량의 친구였지만 일족인 항우를 배신하고 정보를 빼돌렸던 항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가 불리한 것을 알고 미리 도망쳤던 종리매와 계포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만큼 항우의 신임을 받았고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았었다. 그러나 한신과 진평은 항우의 진영에 있을 당시 여러 무장과 문사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고, 장합 또한 원래 한복의 신하로서 항장이라 하여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태사자는 끝까지 유요에 충성하려 했지만 오히려 유요가 그의 충성을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찾아가 새롭게 둥지를 트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쩌면 충의를 원리적으로 강조하던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서도 이 정도 합리성을 지켜져 왔었다. 자신을 대우한 만큼 보답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 마찬가지로 충분히 대우하지 않았고 알아주지 않았다면 그에 대해 보답할 의무 또한 사라진다. 똑같이 세조의 찬탈에 앞장섰음에도 신숙주는 변절자라 부르고 한명회는 경세가라 일컫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숙주의 경우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으며 심지어 단종에 대한 고명까지 받았었다. 그런데도 선왕의 고명을 어기고 찬탈에 동조하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집권하기까지 이렇다 할 벼슬도 없이 한미한 처지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의 신하가 아니었다. 단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수양대군의 신하였다. 집권 이후 권신으로서 저지른 부정과 전횡이 문제될 뿐 ㅌ찬탈을 도운 행위 자체는 거의 비난을 듣지 않는다. 사육신은 충신이지만 그렇다고 한명회와 권람이 역적이 되지는 않는다.


조선업계의 구조조정 문제로 세상이 한창 시끄럽다. 조선업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필 그 대상이 노동자들이다.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회사를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잘려져 나간다. 그래서 과연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할 만큼 - 당장 생계마저 위협받아야 할 만큼 큰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던가. 책임에 걸맞는 예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근거로 그들은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받아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받는 임금이 곧 자신의 책임이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권한과 예우가 자신이 져야 할 의무여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많은 것들을 누리는가. 그렇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의무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정작 많은 것들을 받고 누렸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그래서 밀본의 본원 정기준은 세종에게 백성이 똑똑할수록 오히려 속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라도 국민도 민족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백성에게는 당장 자기 입에 들어오는 밥이 곧 하늘이고 나랏님이고 정의였다. 하지만 어느새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늘어나면서 굳이 자기와도 상관 없는 나라와 국민과 민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혼돈에 눈코입이 생기니 피를 토하며 죽더라는 말 그대로다.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책임까지 짊어진다. 어설프게 하는 탓에 쉽게 속고 만다. 실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어설픈 지식이 자신을 착각하게 만든다.


나라를 위해 국민으로서. 회사를 위해 직원으로서. 하지만 자신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려왔던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라를, 회사를 살려야 하기에 그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신만 죽는다. 숭고한 의미가 붙는다.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희생이다.


알아주지도 않는데 한직만 전전하면서도 항우에게 충성을 바친다. 충성을 바친 끝에 항우와 함께 목숨을 잃는다. 그것을 숭고하에 여기는 자체가 어설픈 지식의 결과인 것이다. 허구헌말 매맞아가면서도 내 두목이니까. 형님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니까. 남편이라고 매일같이 술먹고 폭력만 휘두르는데 그래도 남편이니까.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이고 헌신인가. 그마저도 자기만족으로 대신해 버린다. 희생한 만큼 - 즉 고통받은 만큼 자신의 가치는 높아진다. 그렇게 희생과 인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정작 더 책임지고 대가를 치러야 할 누군가는 가만히 있는 채.


당연한 산수를 해보려 한다. 그래서 왜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누구에게 더 얼마나 많은 책임이 지워져야 하는가. 정부가 있다. 경영진이 있다. 회사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몇 분의 1도 대부분의 노동자는 가져가지 못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지워야 하는가.


당연한 산수조차 불경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때로 절망하기도 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다수에 때로 자신이 틀린 것은 아닌가 반문도 해본다. 하지만 받은 것도 없는데 책임까지 지는 것은 부당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분노케 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가. 현실이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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