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이해했다. 심상정 의원의 법안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전제 하나가 빠져 있었다. 모든 경영자들이 단지 최저임금의 30배에 해당하는 임금까지만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경영자마다 기업의 임금수준이 전혀 다르다. 신입사원 최저연봉이 3천만원인 기업과 1500만원인 기업에서 경영자들이 똑같이 최저임금의 30배인 4억 5천까지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최저임금수준이 높은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에서 기업내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차이가 서로 다르다. 심지어 어떤 경우 중소기업 경영자에 비해 대기업 경영자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아마 정의당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최고임금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에서 그 전제로서 그 전에 도입되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므로 어느 사업장이든 동일한 노동을 한다면 급여조건은 같다. 일괄적으로 최고임금역시 최저임금에 맞춰 모든 사업장에서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마다 하는 일마다 고용형태마다 모두 임금이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른 기준 가운데 가장 낮은 하나에만 맞춰서 다시 모두에게 일괄적인 최대임금을 적용한다. 과연 옳은가. 과연 정당한가.


그래서 설마 같은 기업 안에서라는 단서를 스스로 만들어 붙이게 되었던 것일 게다. 그래야 겨우 타당해진다. 같은 기업 안에서 기업내 임금수준에 맞춰서 최고임금을 정한다. 최저임금이 높은 곳에서는 더 많은 임금을, 최저임금이 낮은 곳에서는 더 적은 임금을. 그럼으로써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차별을 둔다. 실적이 좋은 기업과 근근히 먹고 사는 기업 사이에도 차별을 둔다. 장기적으로 지역과 업종에 따라 최저임금에도 차등을 두어야만 한다. 모두가 같지 않을 것이면 다른 것도 하나의 원칙을 세워 달라지도록 만든다.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법을 입안해도 결국 통과될 리 없을 것이라 지레 판단한 때문인가.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정의당에서는 이런 정책들을 지향한다. 이런 법들을 만들려 한다. 국민의당의 등장으로 인해 그나마 제 3당이었던 정의당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다.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차라리 욕이라도 먹는 쪽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기억되는 방법이다. 지금대로라면 전혀 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비판과 비만들만 듣게 될 뿐이다. 절박하다. 문득 안쓰럽다. 정의당의 앞날이 불투명하다.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다. 스스로 정치인이 되었다 생각해 보자. 어쩌면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비밀스런 내용들까지 공유해야 하는 최측근으로 자신이라면 과연 어떤 사람을 임명하고 싶을 것인가. 그래도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이 아닐까.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던 사람이 적합하지 않을까. 결국은 가족이고, 친척이고, 친구이고, 동문이다. 때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파란 것은 그렇게 개인적인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문제가 된다면 과연 그같은 친인척 임명이 단지 세금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꼼수는 아닐까. 친인척을 보조관으로 임명하여 세금을 빼돌리려는 편법은 아닌가.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충분히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겨 채용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실력이나 실적이 부족해도 개인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그를 상쇄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도 단지 친인척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해서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국회의원의 친인척 보좌관 임명에 대해 문제삼으려 한다면 바로 그 점을 정확히 해야 한다. 친인척인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부적절한 친인척 임명이기에 문제인 것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과연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어 채용된 당사자가 얼마나 크게 부당한 이익을 보았는가. 업무의 전문성이나, 급여의 적절성, 무엇보다 보좌관 채용 이전의 직업이나 수입 등도 고려해야 한다. 보좌관으로서 실제 수행한 업무들에 대해서도 정량적 판단을 내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친인척이기 때문에 채용해서는 안된다. 친인척만 아니면 되는가? 만에 하나 국회의원들끼리 서로 친인척을 교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로의 친인척을 교차하여 채용한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고 잘했는가만 보면 된다. 얼마나 적합한 채용이었는가 전문성만을 따지면 된다. 하지만 귀찮다. 바로 이런 것이 포퓰리즘이다. 행정편의주의다. 그냥 귀찮으니 해경을 해체하자. 그냥 성가시니 친인척 채용하지 못하게 하자. 친인척인 것이 잘못이 아니다.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제한하는 것 역시 기본권 침해일 수 있다. 너무 나이브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뜩지 않다.

얼마전 유명연예인 모씨의 성폭행사건이 이슈가 되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신상에 대해 묻고 있었다. 직업은 무엇이고, 장소는 어디였고, 상황은 어땠었고, 심지어 평소 행실이나 성품은 어땠었는가. 그러면서 알게모르게 중립임을 앞세우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자들의 악의적 의도에 의한 주장이 아닌가 의심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거의 기정사실처럼 피해자들의 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더라.


한 편으로 또다른 어떤 성폭행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굳이 피해자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비슷한 나이의, 심지어 정신지체인 피해자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자기가 선택했다. 자기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핵심일 것이다. 압도적인 폭력에 의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려야 비로소 성폭행이 범죄로서 인정받는다.


원래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제대로 된 성이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냥 아버지의 딸이고, 남편의 아내이며,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나마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수단은 단 하나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자궁이 유일했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여성만이 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태초의 인간들은 여성이 아닌 여성의 자궁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까지 했었다.


누군가의 딸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여성에게 오로지 하나 인정되는 존엄은 바로 그 자궁에 있었다. 남성을 위해 아이를 잉태해야 한다. 남성을 위해 그 성과 신분과 재산을 물려줄 2세를 낳아야 한다. 오히려 여성 자신이 자신의 자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남성을 위한 자궁을 안전하게 깨끗하게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야 말로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다. 여성이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자궁을 지키지 못했다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존재할 가치를 잃게 된다. 단지 남성의 성폭력에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은 집단에서 배척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게 된다.


여성에게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물으려 하는 이유다. 얼마나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었는가. 만일 그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법은 지킬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불과 반 세기 전까지 이 사회가 가지는 상식의 수준이었다. 얼마나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지키고 감싸줄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필사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아예 죽으면 더 좋다.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다 죽으면 그때는 신앙이 된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존엄을, 존재를 지켰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피해자에게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인간으로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실제 어느 판사가 재판정에서 피해자에게 했던 말이라 한다. 바늘을 흔들면 바늘귀에 실이 들어가는가. 성범죄를 단지 가해자의 성적 충동으로 단순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해자의 단순한 충동에 대해 피해자는 얼마나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는가. 가해자의 어쩌면 당연한 본능에 대해 피해자는 얼마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그래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킬 수 없었던 책임을. 그와 같은 상황을 만든 책임을. 남성의 본능은 너무 당연하다. 잘못은 여성에게 있다. 지키지 못한 여성에게 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직업이 무엇인가. 과연 자신을 - 정확히 자궁을 지키기에 적합한 직업인가. 피해자의 평소 행실은 평소에도 얼마나 자신의 자궁을 지키려 노력했는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당시 장소가 어디였고, 상황은 어땠었고, 가해자와의 관계는 어떠했었고, 결국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얼마나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빌미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진짜 죽을 각오로,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몰려서야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정황은 인정된다. 그래도 그런 상황까지 만든 책임은 묻게 된다.


같은 성범죄라도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전혀 상반되는 이유인 것이다. 묻고 또 묻고 따지고 또 따져서 전혀 한 점 흠결 없이 오로지 순결했을 때만 그나마 피해자는 보호받을 수 있다.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조차 단지 자궁이 더럽혀졌다는 자체를 문제삼는 이들도 있다. 문명의 발달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단지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이 있다.


행위의 문제다. 인간의 문제다. 피해자의 인격과 존엄의 문제다.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행위를 강요했다. 누구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디냐가 문제도 아니고, 어떤 상황이었는가도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저항했는가도 문제가 아니다. 단지 분위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꼼짝못하도록 몰아세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성 이전의 인간. 존중받아야 하며 마땅히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주체이자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누군가 말했다. 한국사회의 많은 성범죄는 한국사회의 보편적 성의식을 배후에 두고 있다. 아니 그것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게 된 것이 이제 겨우 한 세기가 채 되지 않았다. 여성을 단지 도구로 본다. 대상으로 본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수단으로만 여긴다. 여성은 스스로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존엄이며 인격이다. 현실을 읽는다.

길게 쓰고 싶지는 않고,


그냥 딱 떠오르는 한 마디,


"전관예우"


변호사 좋은 사람 썼구나.


돈이 좋기는 좋다.


법보다 위에 있는 것이 돈이다.


새삼 깨닫는다.

나같은 경우 어디 가서 무슨 뒤에 '장'자 붙거나 하는 자리 맡는 거 무지 싫어하는 편이다. 귀찮다. 성가시다. 물론 아무리 하찮은 것이더라도 일단 뒤에 '장'자 붙으면 나름대로 권위가 서는 것도 있다. 어느 정도 사소한 것이라도 남들과 다른 특권 같은 것도 주어진다. 아무튼 뭐가 좋아도 좋기는 한데, 그러나 그보다 그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일들을 맡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장'자를 단지 남들보다 높은 곳에 있는 무엇으로만 생각한다. 남들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이고 고귀한 명예이고, 보다 크고 강력한 권력이고 권위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책임이다. 의무다. 자신을 얽매고 옭죄는 족쇄이고 형틀이다. 자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벗어던지니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그럼에도 끝내 자기가 먼저 자리를 내던지지 못하는 것은 그마저도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이고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 무게를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퇴가 책임이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벌이어야 한다. 피해이고 고통이어야 한다. 불이익이어야 하고 굴욕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말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스스로 책임을 졌다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그런데 단지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대신한다. 아무런 사죄도 반성도 없이, 더구나 아무런 사후처리 없이, 그저 자리에서 물러난 것만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문득 작년 고작 4석짜리 재보궐선거에서 패했다고 비주류가 모두 나서서 물러나라 압박했을 때 당의 혁신을 위해 끝까지 당대표자리를 지키던 문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당시 문재인에게 물러나는 것과 당대표 자리를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편하고 쉬운 길이었을까? 당대표자리 그냥 물러나면 된다. 실제 김종인을 영입해서 비대위원장에 앉히고 절차에 따라 당대표에서 물러났을 때 문재인은 어느때보다 홀가분한 모습이었었다. 지금도 당과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있다. 당대표일 때는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꼬리가 따라붙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거의 없다. 그래서 과연 당시 문재인에게 당대표자리를 지키는 것과 포기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고통이고 불이익이고 모욕이었을까.


그릇의 차이다. 책임질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그때문에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 지금 당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해야만 하는가. 물러나는 것은 쉽다. 오히려 남아서 리베이트추문에 대한 뒤처리를 하자면 온갖 구설에 휘말리기 쉽다. 당내 관계도 불편하게 꼬일 가능성이 높다. 리베이트에 관련되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바로잡으려는 당대표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미흡하다 여겨진다면 그에 따른 언론과 여론의 비판 역시 감수해야 할 것이다. 대선가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당대표로서 자신이 대표로 있는 당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저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수모로써 모든 것을 대신할 것인가.


안철수가 생각하는 새정치의 실체다. 그래서 작년에도 그렇게 문재인더러 당대표 물러나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일 게다. 당대표는 특권이다. 권력이고 권리다. 그러므로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진정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표의 자리에 앉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불리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안철수의 방식과도 이어진다.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기에 권력을 가지려는 것이 아닌 권력이라고 하는 결과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권력이란 자신을 위한 트로피다.


참 편하게 정치를 한다. 나같으면 진짜 편하다. 책임질 일 있을 때마다 더이상 책임질 일 만들지 않게 편하게 자리부터 내놓는다.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기부터 한다. 그 다음에는 자기와는 상관없다. 작년에도 그랬다. 정동영과 천정배 두 사람이 탈당까지 하게 된 것도 결국 이전 당대표였던 김한길과 안철수가 뿌린 씨가 그렇게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당대표에서 물러났으니 자기와는 상관없다. 전직당대표가 물러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현직당대표를 비난하며 물러나라 압박한다. 자기와는 상관없다. 이제 자기와는 전혀 아무 상관도 없다.


정당이란 사기업과 같다. 자신은 CEO다. 내 회사다. 내 소유다. 그런데 내가 그 소유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아마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까. 권력을 사유화한다. 사회적 책임과 의무마저 사유화하려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책임이다. 오히려 넘친다. 자신은 자신이 져야 하는 책임 그 이상으로 책임을 모두 졌다. 재미있는 캐릭터다. 너무 흔해서 이제는 식상하다. 새정치의 안철수다.

결국 리베이트 추문으로 인해 안철수가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천정배가 불쌍하다. 공동대표라고 도대체 뭐 한 게 있어야지. 뭘 할 수 있었지? 아무튼 참 무책임하다. 도대체 정치인 안철수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맞는가.


이제 안철수가 물러났으니 비대위든 다음 당대표든 뽑히고 나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하겠는가. 이번 리베이트와 관련해서 연루된 인사들이며 내부의 구조적 문제들을 바로잡는 숙정작업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악역이 되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 쳐내고, 자리도 잡기 전에 당규와 인적구조부터 손을 대야 한다. 그런데 그 문제들이 누가 대표일 때 일어났는데.


굳이 정치가 아니더라도 원래 있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려면 인수인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더럽고 힘들고 번거롭고 욕먹기 쉬운 일들은 전임자가 일단 자기 책임 아래 일어난 일들이면 일단 미리 정리하고서 넘겨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다. 리베이트 추문으로 인해 당이 위기에 빠졌는데 후임자에게 모두 떠넘기고 자기는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순수성도 의심된다. 여기서 더 버티고 있어봐야 추문으로 인해 유력대선주자로서 안철수 자신의 내상만 깊어진다. 어차피 전당대회가 열리면 당대표에서 물러나고 내년 대선출마를 위한 준비에만 집중할 계획이었다. 조금 더 일찍 당대표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분간 여론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몸을 피해 더이상의 이미지훼손을 막는다.


가장 쉬운 것은 죽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힘든 일들이 있을수록 더 그렇다. 어려운 과정들이 남아 있을수록 더 그렇다. 오욕을 무릅써야 한다.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만한 다짐도 없이 대통령이 되려 한다. 당대표가 되어 있다. 너무나 쉽게 당대표자리에서 물러난다. 사태를 수습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상황이 불리해지니 일단 도망치고 본다. 지난 대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고도 여전히 유력대선주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인지. 측근의 비리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최측근마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정작 당의 위기에 아무것도 않고 먼저 도망부터 치고 마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리더십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조금 더 욕먹어야 한다. 지금 국민의당에서 안철수 빼면 누가 남는가. 그나마 쓸만한 인물이라고 해봐야 안철수 혼자가 전부다. 그런 안철수마저 뒤로 물러난다. 당에 사람이 남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당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모인 당이다. 어이없다.


근대 이전 모든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해야만 했다. 아니 그마저도 어느날 갑자기 외적인 요인에 의해 어떻게 될지 몰았다. 그러다가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신용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지 증서 한 장만으로 실물과 똑같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아도 신용관계에 의해 자신이 투자한 만큼의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의 시작이다.


화폐 역시 최초의 화폐는 실물화폐였다. 1달란트의 금화는 1달란트의 무게를 가졌다. 은 1냥은 실제 은 1냥의 무게였다. 은 1냥에 해당하는 구리를 녹여 동전을 만들었다. 실제 구리의 가치가 동전의 가치였다. 화폐단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동전이 가지는 가치가 화폐의 단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고작 종이 한 장이 그 몇 배의 가치가 있는 실물가치를 대신한다. 5만원권 한 장의 실제 원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가 근대와 더불어 나타나게 된 이유였다. 고도로 정비된 사회구조와 체계가 필요했다. 엄격한 개인의 관계가 요구되었다. 약속이 약속으로서 인정된다. 단지 말 한 마디 글자 한 줄이 실제와 같이 인정되고 존중된다. 신용의 출현이다.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고도화된 구조가 비로소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그같은 신용을 흐트리려 한다면? 말과 글로서 사람들을 속이고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든다면?


당장 내가 주식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식시장을 믿지 못한다. 거래주체들을 믿지 못한다. 특히 걸핏하면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장난치는 큰손들을 믿지 못한다. 주식매매의 근거가 되어야 할 신용자료들마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거나 왜곡되기 일쑤다. 그마저 꿰뚫을 수 있는 확실한 정보력을 가지지 못하는 한 개미는 그냥 개미에 지나지 않는다. 주식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 무엇때문이겠는가?


정작 신용의 범죄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실물에 대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돈을 훔치거나 빼앗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범죄인데 전근대사회의 상식을 적용한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돈을 잃고 심지어 목숨마저 끊은 수많은 희생자들은 무엇인가. 그들로 하여금 그같은 투자를 하도록 결심하게 만든 근거들이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면 투자의 실패가 온전히 그들의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개인과 개인이 집단과 집단이 서로 믿지 못함으로써 인해 발생하는 사회비용이 또한 얼마이던가. 서로 믿지 못하고,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그래서 화합하지 못하고, 그래서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이와 같은 신용에 대한 범죄를 더 무겁게 처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근대사회에서 말하는 반역죄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질서를 해치는 범죄다.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주식거래를 해서 단기간에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불과 4억을 투자해서 몇주일만에 2억이라는 돈을 간단히 벌 수 있었다. 반대로 내부거래를 몰랐던 다른 투자자들은 그들을 위해 2억이라는 돈을 부당하게 상납하는 처지가 되었다. 비대칭적이다. 불공정한 경쟁읻. 같은 링 위에 서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용서한다. 간단한 처벌만으로 끝낸다. 유혹받지 않을 수 없다. 아예 이것이 죄라는 자각마저 없다.


어떻게 하면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이 저처럼 뻔뻔하게 허술한 방법으로 내부거래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아예 금감원이나 수사기관의 추적을 회피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잘못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돈이 될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한다. 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자화상이다. 신용도 없고 오로지 탐욕만이 있다. 서로의 탐욕이 서로를 물고뜯으며 겨우 지탱한다.


너무 허술해서 오히려 어이가 없다.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인가. 아무 죄의식도 없이 대중을 상대로 신용의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고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실제 그래왔었다. 분식회계를 하고, 허위자료를 내고, 내부거래를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그래도 용서된다. 처벌받지 않는다. 차라리 주식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심할 따름이다. 우습지도 않다.

간단히 어느 영세기업이 있다. 실적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며 노동자를 파견직으로 고용하고는 일 년에 천만 원 남짓만을 겨우 지급한다. 그런데 전무의 연봉은 5억이 넘어간다. 전무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가 5억을 넘어간다면 당연히 그에 비례하여 회사에 이익을 남겼어야 하는 것이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전무라서 당당히 그에 맞는 연봉을 지급했다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천만 원도 안되는 연봉만을 받을 리 없다.


물론 노동자의 임금이란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에 비례하여 받는 것이 아닌 노동력 그 자체에 대해 지급하는 것이다. 그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 자신이 가진 노동력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인간의 가치이기도 하다. 오히려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의 총량을 결정하는 것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노동력이 아닌 목적인 상품에 있다. 어떤 상품을 얼마에 생산해서 어떻게 팔 것인가. 경영이란 것이 존재하는 이유다. 리더다. 그런데 30배가 넘는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그들의 결정에 의해 일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그 30분의 1로밖에 인정받지 못한다. 부당하지 않은가.


연봉을 10억 이상 받고 싶은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만큼의 실적을 낸 뒤 그 실적 가운데 노동자의 연봉을 최소 3400만원 이상으로 올려주면 된다. 10억이면 그 30배에 채 미치지 못하는 연봉이다. 그러고 보니 참 느슨하다. 같은 기업 안에서 노동자의 최저연봉이 4천만원만 되도 무려 12억이다. 그런데 어째서 반대하는가면 기업내 최저임금은 천만 원 조금 안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유능한 임원은 3억도 적을 뿐이다. 3억을 받아도 적을 정도로 일을 하는데 전체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고작 연 몇 백 만원 올리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모순이다.


사실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는 법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정상적인 기업에서는 최저연봉과 최고연봉의 차이가 그렇게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는 경우른 그리 드물다. 전체 가운데 아주 일부만이 그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대우조선과 같은 경우다. 회사는 적자를 보는데, 그래서 노동자는 경영정상화를 이유로 해고까지 당하는데, 그러나 임원들은 여전히 정상임금을 받는다. 실적은 최악인데도 경영진은 책임을 지지 않고 노동자의 임금만을 깎으며 자기 급여는 이전대로 유지하려 발버둥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려면 자기 임금부터 갂아야 한다.


도대체 이 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천만원 이하라서? 그리고 임원들은 기본으로 10억 이상은 받아야 해서? 도대체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얼마를 받아야 적당하고, 능력있는 임원급은 얼마를 받아야 적절한 것인가. 이익을 내도 임원의 공인이 임원에게 대가가 돌아가고, 손해를 보면 노동자의 책임이니 노동자의 급여가 깎이고 일자리마저 위협받는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만한 일을 했으면 그만큼 노동자에게도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그만큼의 일을 하지 못했으면 임원들 역시 책임져야 한다. 당연한 상식이다. 단지 임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몇 십 배의 연봉을 받고, 단지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그 몇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연봉만을 감사하며 받아야 한다. 임원급이 받는 최고임금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 지 모르겠다. 너무 늦었다. 더 빨리 나왔어야 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대중의 편의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느라 국가적 국제적 이슈에 정교하게 판단하고 대응하기에는 여유가 너무 부족하다. 각각의 이슈들에 얽힌 복잡한 사정이나 구체적인 내용들을 일일이 살펴서 적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해서 결정한 뒤 행동에 옮기기까지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적인 지식과 그를 위한 충분한 시간적 물적 여유가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적합한 사람을 골라 필요한 자리에 앉히고 그 역할들을 대신 시킨다.


투표란 그런 의미다. 과연 저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공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인가. 굳이 내가 일일이 신경쓰지 않아도 바르게 옳게 판단해서 자신과 우리들에 피해가 오지 않도록, 아니 최대한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판단하고 결정해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인가. 그래서 일일이 별 것 아닌 일들에 대해서까지 여론에 묻고 여론을 핑계삼는 정치야 말로 가장 비겁한 것이다.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자신의 능력과 소신에 맞게 바르게 옳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라고 그 자리에 올린 것이다. 평가는 결국 다음 선거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만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을 했다면 그에 대해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할 의무가 주어진다. 국민으로부터 공적 책임을 위임받은 전문가로서 대중에게 바른 정보를 제공하여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정치인의 역할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영국국민들이 어리석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그것이 오만이라는 것이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럴만한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전제한다. 어째서 과반에 이르는 영국인들이 EU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EU탈퇴를 지지하는데 투표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럼에도 EU탈퇴가 영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면, 국가와 국민에게 손해가 된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만에 하나 설득에 실패했다면 국민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자신이 그 책임까지 대신하는 것이 공인으로서 정치인이 져야 할 책임인 것이다. 노엘 갤러거의 말이 맞다. 그러라고 결코 적지 않은 세금을 급여로 지급하고 각종 예우와 사회적 권위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회피하고 단지 국민투표에 그 책임을 돌리려 했었다.


과연 브렉시트가 옳은가. EU탈퇴가 영국과 영국민들에 이익이 되는가. 그마저도 미리 생각해두지 않은 듯 벌써부터 말이 바뀌고 있다. 하기는 그런 정치인들에 낚여 지지를 보내고 심지어 투표를 통해 당선까지 시킨 것이 바로 유권자들인 것이다. 정치인의 책임은 한 편으로 유권자의 책임이다. 보다 고도의 전문적인 판단이 필요한 영역까지 국민투표에 맡긴 무책임은 분명 정치인의 잘못이지만, 그런 정치인을 선택하여 그같은 책임있는 자리에 앉힌 것은 어디까지나 유권자의 잘못이다. 정치인들은 비겁했고 국민들은 어리석었다. 그들은 주권자로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했다.


그래서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여론을 들먹이는 정치인 역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내 책임 아래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시 국민들에 묻는다. 그를 위해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설득하며 이끈다. 그래서 리더다. 리더십이 사라졌다. 리더십이 사라진 정치는 그저 낚시에 불과하다. 정치인이 미끼를 던지면 대중이 그 미끼를 문다. 대중이 미끼를 물면 그를 기반으로 정치적인 영향력과 지위를 상승시킨다. 저질정치다. 책임이 없는 정치라는 것은.


과연 자신은 책임정치인으로서 바른 판단을 내렸는가. 국민들에게 부끄럽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옳은 결정을 내렸는가. 그래서 정치인과 대중의 소통은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발달은 미디어와 교통의 발달에 비례한다. 포퓰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다. 영국은 그것을 잊었다. 그것을 잊은 유권자와 정치인들이 정치를 왜곡시켰다. 남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의 여론과 반대로 가는 것을 정치인의 책임인 양 여기는 이들마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희생하여 국민들을 바르게 이끈다. 민주주의도 한계에 이르러 가는 것 같다. 하필 영국에서. 난해하다.

리더의 정치와 리더가 아닌 이의 정치는 다르다. 당연히 지키는 자와 도전하는 자의 정치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리더의 정치란 관리의 정치다. 통제의 정치다. 리더란 룰을 만드는 사람이다. 자기 영향력 아래 모든 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와 구조를 만든다. 자신이 내세운 이념과 신념대로 모두가 따르도록 기준을 세우고 규범을 만든다. 만에 하나 따르지 않는 이가 있다면 엄격하게 제제한다. 반면 리더가 아닌 이의 정치란 타인이 만든 룰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순종하거나, 아니면 도전하거나.


지킨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해진 룰 아래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도전한다는 것은 따라서 그 룰을 부정하고 새롭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인정하지 않겠다. 받아들이지 않겠다. 반드시 자신이 의도한 새로운 룰을 만들겠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의 수단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따른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당시는 무척이나 합리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투사였던 이들이 정치인이 되어 급격히 타락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운동하던 당시의 방식 그대로 정치를 하려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철수는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도 김한길이라는 공동대표가 있었다. 사실상 김한길이 주도하고 자신은 그를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스스로 룰을 만들어 본 적도, 그 룰을 따르도록 강제해 본 적도 없다. 기업과 다르다. 기업에서 CEO는 월급을 주는 사람이고 CEO가 주는 급여는 직원들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주체들이 존재하는 정당에서 월급으로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초선의원에 자기세력이 없는 입장에서 주위에 더 많이 의지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자신의 의지를 주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럴만한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아닌 시절에는 편했다. 아무 걱정없이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었다. 나중은 생각지 않고 아무것이든 질러댈 수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이 그에 대해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공격만 하면 되었다. 비난만 하면 되었다. 그런 때는 누구나 정의로울 수 있다. 야당시절의 한나라당을 떠올려 보면 된다. 야당이던 시절 그들은 누구보다 정의롭고 유능했다. 오히려 야당으로서는 지금 야당보다 더 뛰어났었다. 반면 여당으로서는 지금 야당보다 한참 미치지 못한다. 마침내 자기 당을 만들고 자기 측근으로 주위를 채웠을 때도 그저 초선의원시절이던 때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정의를 주위에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안철수가 가진 리더십, 정치력의 한계인 셈이다. 자신의 측근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 아니 측근들이 오히려 안철수의 머리 위에 올라 그를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철수가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는 이유다. 자기 주위에서 그런 부정이 저질러지는데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어느 분이 생각난다. 차라리 자기가 모든 것을 주도하여 저질렀다면 바보는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정치초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사실 문재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투르고 어설펐다. 그리고 무능했다. 자신의 측근들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차이라면 그럼에도 단지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좋아서 모인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능력이 없다면 인덕이라도 있던가. 직접 강제하여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사람을 심복시키는 것도 정치인의 능력이다. 그마저도 없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고 그를 유력 대선후보로 여기는 것일까.


몰랐으면 몰라서 문제고 알았어도 알았으니 문제다. 차라리 초반에 빠르게 결론짓고 확실하게 대처하느니만 못했다. 시간을 끌면서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가진 리더십의 한계만 드러내고 말았다. 정치할 깜냥이 아니다. 다양한 이해주체들을 조율할 역량도 인격도 가지지 못했다. 자신의 측근들마저 제대로 심복시키지도 통제하지 못했다. 자기 당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그릇이다. 뒤늦게서야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정치는 타이밍이다. 남 공격할 때는 좋았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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