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둘씩 현실의 예외를 인정하다 보면 결국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된다. 여기서부터는 안된다. 사실 이번 리쌍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세입자의 경우도 그같은 건물주의 입장에 맞추느라 정작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었다.


어떻게해도 건물주는 강자다. 세입자는 약자다. 건물주가 이렇게 하라 하면 세입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를 막아주는 것이 법이다. 대중의 여론이다. 그런데 거기에마저 가이드라인이 붙는다. 여기서부터는 된다. 여기서부터는 안된다. 그러면 강자인 건물주의 입장에서는 편하다. 불법이든 편법이든 어쨌거나 그 선만 맞춰주면 더이상 골아플 일이 없다.


그래서 중요하다. 리쌍과 세입자의 관계가 어떻게 풀리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일반의 대응은 어떠한가. 그러므로 앞으로도 건물주는 여기까지만 하면 더이상 피곤할 일이 없다. 세입자는 여기까지 하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 사회적 보장도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세입자가 계약 당시 건물주와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허술함도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경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이번 사태가 대표성을 가지게 된 이유인 것이다.


어쨌거나 건물주의 일방적인 횡포는 막아야 한다.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 역시 막아야 한다. 개별사안이 아닌 전체의 그림을 그린다. 그럼에도 세입자의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 리쌍이 그동안 세입자와의 관계에서 항상 원만하지 못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더 성실하게 세입자를 설득하고 납득시킬 책임이 있다. 강자와 약자는 처음부터 사회적인 의무도 책임도 전혀 다르다.


차이는 뭐냐면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를 단지 대등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보는가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보는가 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한다. 적극 보호한다. 자본주의국가다. 건물에 대한 전적인 권리는 건물주에게 있다. 현실을 봐야 한다.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고보니 벌써 작년이다. JTBC의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이 제대로 지적한 바 있었다.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많은 사회운동가, 혹은 진보정치인들이 쉽게 빠지고 마는 함정일 것이다. 사회적인 약자일수록 선하고 순수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도 그런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리쌍의 건물 정도 되는 입지에 자기 가게를 냈을 정도면 엄밀히 사회적 약자라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권리금으로 리쌍이 챙겨준 돈만 거의 2억 가까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입지다. 어지간한 서민들은 그런 곳에 자기 가게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건물주와 세입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한다. 건물주니까 갑이고 세입자니까 을이다. 갑이니까 악하고 을이니까 선하다. 하지만 법원의 명령에도 불응하며 건물주가 인기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을 이용해서 압박하는 세입자의 모습을 본다면 이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벌써 몇 년 째다. 도대체 어떤 을이 벌써 몇 년이나 법원의 명령에까지 불응해가며 다른 사람이 소유한 건물 주차장과 지하를 이용해서 장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번 이슈에 발을 담근 사회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이유다. 선의는 인정한다. 그럴수밖에 없는 나름의 동기 역시 이해한다. 그러나 시한을 지나 버렸다. 리쌍이 지급한 권리금만으로도 그 사이 얼마든지 다른 건물을 찾아 새롭게 가게를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쌍으로서는 최선의 성의를 다 보여주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권리금까지 2억 가까이 주고, 임대료도 안 받으면서 건물주차장이며 지하를 이용해 장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그런데도 여전히 안 나가겠다. 오히려 건물주가 인기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한다.


건물주와 세입자의 사이는 분명 갑과 을이다. 그런데 연예인과 대중의 사이는 오히려 연예인이 을이고 대중이 갑이다.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에서 을의 위치라 불리해지니 언론을 통해 대중을 끌어들인다. 대중의 평판에 민감한 연예인이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 한다. 여기에 정치인까지 가세한다. 정치인들도 가만히 고민해봐야 한다. 혹시 자신의 개입이 또다른 갑을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측면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건물주와 세입자 두 가지 입장만 놓고 생각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고도화되어 있다. 당장 지금 세입자의 주장대로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만을 인정해서 건물주인 리쌍을 압박할 경우 이번에는 오히려 리쌍이 일방적인 피해자로 몰리게 된다.


몇 년 전 처음 이슈가 되었을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도저히 세입자의 편에서 생각할 수 없게 된 이유다. 아무런 합의를 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리쌍에게 양보만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리쌍이 지급한 권리금을 가지고 다른 가게를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리쌍에게 언제까지 퇴거하겠다 일단 약속하고 이전을 위한 비용 등에서 추가로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건물에 가게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부담이었다면 그 부분만 해결해달라 요구하고 원만한 합의를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는 그러니 을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리쌍의 건물에서 임대료도 내지 않은 채 장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익만을 계속해서 챙기고 있었다. 더 오래 계속해서 이익만을 챙기겠다. 리쌍이 연예인이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었겠는가. 자기는 양보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어느 일방에게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인가.


꿈에서 깰 필요가 있다. 세입자라고 모두 가난하고 힘없는 그런 소외된 이들이 아니다. 몇 억 단위가 오갈 정도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서민의 범주에 놓기도 애매하다. 그동안 리쌍의 건물을 일방적으로 점유한 채 장사하며 얻은 이익만 하더라도 을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강자와 약자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때로 강자가 약자보다 더 약자이기도 하다. 이론은 책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지간하면 이런 경우 세입자의 편에 서야겠지만 이번에는 해도해도 너무했다. 그런 일에 끼어든 사회운동가들이나 정치인 역시 그런 점에서 크게 오판했다. 오히려 비슷한 이슈가 다시 발생했을 경우 대중이 일방적인 판단으로 어느 한 쪽의 편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선입견이 생긴다. 이슈가 크게 되었기에 그래서 더 조심해야만 한다. 과연 당사자들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표성을 가지는가. 남을 위하기가 그래서 결코 쉽지 않다.

불과 얼마전까지 나라라는 것은 곧 왕조였다. 굳이 루이14세의 말을 빌지 않아도 왕이 곧 나라였고 나라란 왕의 사유물에 불과했다. 세금도 전쟁도 단지 왕 개인의 변덕에 의해 결정되었다. 심지어 왕비에게 생일선물을 하겠다고 세금을 따로 거두는 것도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그같은 왕의 전횡과 수탈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은 왕을 내쫓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고대로마나 중국과 같은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국가 자체를 구성원 모두를 위한 공공의 구조로서 이해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미 고대그리스에서는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있었고, 고대로마에서는 공화라는 개념이, 고대중국에서는 공자에 의해 주창된 '대동'의 사상이 각각 발달하고 있었다. 국가는, 사회는, 천하는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모두의 소유다. 모두의 소유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천하가 모두를 위해 그에게 왕이라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왕의 통치는 따라서 모두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추구했던 법가조차 왕 개인이 아닌 단지 공공의 규범인 법을 주재하는 주체로서의 왕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치적인 행위는 오로지 공공의 규범인 법을 근거로 법이 정한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모든 정치적인 판단 역시 다수의 구성원들로부터 의견을 모아 공론의 이름으로 내려져야만 했었다. 딱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래서 고대로마에서는 법이 발달했고, 원로원이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회정치가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시민 모두의 소유다. 원로원 의원이 되고 집정관이 되고, 심지어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스스로를 '제 1시민'이라 일컫고 있었다. 단순히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명예와 권력이 아닌, 개인의 영달이나 욕망만이 아닌 공공을 위한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들조차 그것을 로마의 다수 시민들에게 과시하고 확인받아야 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대에 권력은 단지 권력자 개인의 사유물이었다. 고대로마조차 결국은 그렇게 흘러가고 말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사유화하려 하고, 그같은 시도를 적절하게 막아내지 못한다면 더이상 그를 견제할 모든 수단을 잃고 만다. 처음에는 단지 왕의 소유인 토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준 것에 불과했지만 정작 가신들이 그 토지를 기반으로 힘을 키워 왕과 겨룰 수 있을 정도까지 되자 왕이 그 토지들에 대한 권리를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봉건제다. 권력의 분화와 이동은 대략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누군가 권력을 나누거나 양도하면 그 권력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다시 기존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나 혹은 도전을 선택하게 된다. 다수의 주체가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아 나누게 되면 그것이 영국민주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대헌장'이 된다. 사실은 대귀족과 대상공인들을 위해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으려는 것이었지만 귀족과 대상공인을 그저 도시의 시민으로 바꾸면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어쨌거나 현대의 많은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이념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 할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의 나라의 주인이 되어 서로의 합의에 의해 공공의 목적을 위해 나라를 이끌어간다. 원래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에게 오로지 주권이 있고, 따라서 국가에 대한 책임 역시 오로지 국민들에게 있다. 그리고 국가와 권력이라는 개념 역시 이를 전제로 성립하게 된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은 단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임된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힘에 불과하다. 당연히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공공의 이익과 목적이라는 목표를 공유해야만 한다. 이 또한 결국 법과 제도라는 형태로 정의된다. 이념과 상식이라는 무형의 가치로도 정의된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이란 무엇하나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자의 비서관이 사적으로 전화를 걸어 언론관계자를 협박한다. 진실을 전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과 책임에 권력이 관여하려 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보도가 나오도록 협박까지 일삼는다. 그런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전전정부에서 많은 국민들이 국가와 권력이 하는 일에 시원하지 않다며 불만을 드러낸 것과도 아주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은 개인의 것이다. 개인의 소유이므로 마음껏 자기 쓰고 싶은대로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며 권장한다. 불의한 권력은 자기와 다른 편에 서 있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만 자기와 같은 편에 있으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어차피 누가 권력을 잡았더라도 반드시 했어야 할 일이기에 차라리 어설프게 들킨 것이 더 큰 문제다.


하기는 조선후기 조선은 왕 개인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사대부마저 더이상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단지 왕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인척관계등을 통해 나누어받는 위치에 있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던 식민지 시대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국민의 동의 없이 총칼로 나라의 권력을 탈취하여 독점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시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력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감히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시키는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원래 자기의 것인 권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가 문제다.


전혀 이슈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만이 시끄럽게 떠들 뿐 정작 일반국민들의 지지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했다. 오히려 잘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전전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중들로부터 비토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권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어 시원하게 일처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하고 있다. 권력을 잘 사용해서 조용하게 잘 만들고 있다.


알량한 국회의원 보좌관조차 특권으로 여긴다. 감히 친인척을 앉히려 해서는 안되는 대단한 자리로 여긴다. 당대표가 책임을 지기보다 그저 물러나며 면피하기에 바쁘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다. 공공의 책임보다 자신의 권리를 우선한다. 결국 그렇게 수렴되는 것일까. 아무런 위기의식 없이 이슈조차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주어진 권력이라면 자기를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 논란이야 있지만 그 정도 위치에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쓰는 것도 옳다. 일단 조용하다. 시끄럽지 않다. 과연 그 수단이 정당했으며 그 목적이 적합했는가는 굳이 따지지 않는다. 권력은 자신의 것이다. 자기가 쓰는 것이다. 항상 흥미롭다.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주장만 할 것이라면 굳이 모여서 시끄럽게 구호를 외칠 필요가 없다. 직접 문서로 전달해도 되고, 보다 공개적으로 하려면 대자보라는 수단도 있다. 언론을 통해 보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모여서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시위라는 것을 하는가. 그러니까 불편하지 않으려면 자기들 주장을 들어달라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이 불편하고 불쾌한 그 자체가 시위라는 것을 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시뻘겋게 물든 생리대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불쾌하다. 그러면 어디에 그것을 하소연해야겠는가. 그래서 연대라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과 같다. 저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다. 정부에 대해서, 그리고 기업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소비자로서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저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정부와 기업에 돌아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을 끝내려면 그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워낙에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자격이나 자세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단지 자기가 불편한 것만 생각하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굳이 고려하지 않느다. 정부와 기업에 무언가를 요구할 때도 공손하게 얌전하게 질서있게. 자기가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게. 그렇다고 과연 조용히 얌전하게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시위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가.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도 뭐라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욕이라도 먹어야 한다. 그것이 시위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인을 대상화한다. 자기 아닌 타인을 객관화한다. 완전함을 요구한다. 한국사회의 이기주의는 그래서 더 고약하다. 완전무결한 시위를 위해서. 완전무결한 사회를 위해서. 우연히 생리대시위에 대한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인터넷에서만 시끄러운 이른바 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편할 때 권리고 내가 편할 때만 자유다. 나를 편하게 할 의무이고 책임이다. 대중은 권력이다. 꼭 닮았다. 

간단히 7촌이라면 부모의 사촌의 손자 쯤 된다. 부모의 사촌이 5촌당숙, 그 자식이 6촌, 그러니까 그 자식의 자식이 7촌인 셈이다.


그러면 얼마나 먼 사이인가? 일단 할아버지가 7대독자시니 친가쪽은 제외하고 외가쪽으로는 거의 5촌당숙이며 6촌형제들과 일상으로 왕래하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바로 그 6촌 형제의 자식이 내게는 7촌이 되는 셈이다. 의외로 가깝지 않은가?


요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당장 나만 해도 외가는 물론이고 어머니의 외가와도 왕래가 없지 않아서 촌수는 모르는데 그냥 형동생, 아저씨 할아버지 그렇게 어울려 지냈었다. 아예 촌수계산도 안되면 먼 친척인데 한마을에 살다 보니 그냥 친척이라며 소개하고 또 대우해주고 그런다. 외할머니 쫓아서 친척들 찾는데 도대체 아무데나 다 친척이 산다. 그런데 7촌이라면 얼마나 가까운가.


정동영의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 그 연배에서 7촌이라는 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아내의 7촌이라 해봐야 장인장모의 사촌의 손자다. 자기 7촌이면 아버지의 사촌형제의 손자다. 6촌 정도는 왕래가 있었다 봐야 한다. 그냥 생각하기에 7촌이라면 한참 머니까.


그러니까 입을 조심했어야 하는 것이다. 암말 없이 지냈으면 누가 뭐라나? 어째서 국민의당의 문제에 기존 거대정당들이 굳이 침묵하고 있는가. 긁어 부스럼이거든. 혹시 모를 빠져나올 구멍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안다.


하여튼 재미있다. 7촌은 남이라며 열심히 감싸는 중이다. 남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정동영 연배나 지방의 정서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웃긴다.

원래 자본주의는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 혹은 독립되기를 바라는 자본을 소유한 주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기는 그래서 자본주의는 봉건적 전통이 남아있는 사회에서 발달하기가 더 쉽다. 권력이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할 때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껏 이윤을 추구할 수 있고 마침내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기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권력의 위에 서게 된다.


근대유럽의 초기자본주의에서는 그래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심지어 영국의 인도침략조차 영국정부가 아닌 영국의 자본가들이 투자하여 세운 동인도회사라는 사기업이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부의 역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이란 자본가들이 이윤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행정적, 제도적, 정책적 지원과 보호만을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바로 그런 자본가들이 내는 세금에 의해 영국이라는 대제국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기에 기록된 임금따위 무슨 상관이냐는 격양가가 이때 유럽의 자본가들에 의해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초기자본주의 국가들과 달리 뒤늦게 출발해서 그들을 따라잡아야 했던 후발국가들은 유형이 약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자본가들이 육성되고 사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아직 자본적으로 취약한 이들 후발국가에 있어 정경유착은 필연적이었다. 정부가 주도하여 경제정책을 펼치면 그에 편승하여 자본가들은 돈을 벌었다. 사실상 보다 이른 시대의 중상주의의 발전형에 더 가까웠다. 정부는 자본가들로 하여금 돈을 벌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본가들은 정부의 권력을 자본으로 뒷받침한다. 그리고 정부의 주도로 경제정책이 이루어지는 만큼 경제성장의 과실 역시 정부와 자본가들이 독점한다. 다양한 시장주체들에 의해 성장하는 경제가 아닌 정책을 주도하는 소수권력과 자본에 의해 성장하는 경제다.


일본경제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정부기관의 관료주의는 바로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폐허에서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일본의 엘리트관료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본의 위에서 일본의 경제가 세계경제를 굽어볼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시기적절한 정책들을 펼쳐 지원하고 이끌었다. 바로 이들 관료들이 일본을 이끌고 일본경제를 이끈다. 바로 이들 관료들이 있기에 지금의 일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같은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는 일본의 경제위기에 있어 오히려 비효율과 비능률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만다. 여전히 자신들의 성공에 갇혀 있던 관료주의의 경직성이 오히려 일본의 경제위기 극복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한국의 자본주의도 바로 그런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부흥을 이끈 주도세력들은 만주국 모델을 만들었던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주도세력 역시 만주군에 복무하며 일본의 방식을 배운 특정세력들이었다. 아니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치독일도 그랬고 스탈린의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후발국가가 선발자본주의국가를 따라잡으려면 강력한 국가의 통제가 필수였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정책을 만들고 자본을 모으고 투자를 주도한다. 민간은 오로지 정부가 하자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경제에 대한 모든 책임도 권한도 오로지 정부가 갖는다. 경제발전의 공적 역시 오로지 정부에게 모이게 된다. 정부가 하자는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돈을 번다. 시장의 주체들의 자발적인 경제활동의 결과가 아닌 정부의 정책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한다.


시장에서 다양한 경제주체들의 기여나 행동에 대한 판단 역시 따라서 한국식 자본주의에서는 오로지 정부에 의해 독점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같은 행동들이 적절했는가. 그같은 행동들이 한국사회와 경제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가. 그러나 어차피 한국의 경제를 이끄는 것은 정부다. 정부가 판단한다. 그것이 과연 옳았는가. 적절했는가. 경제주체들 사이의 약속인 신용은 그래서 전혀 의미가 없다. 어차피 경제를 이끄는 것은 정부이기에 개인의 판단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시장주체인 기업이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경영자가 주가조작을 했어도 정부가 괜찮다 했으면 괜찮은 것이다. 그들 또한 정부와 함께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사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였다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기업이 자신들의 실적을 속인다. 투자의 자료가 되는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아예 조작한다. 투자와 관련한 자료들을 조작해서 주가를 임의로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과연 누가 기업에 투자할 수 있을까? 누가 주식을 사고 시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주식은 단지 돈놓고 돈먹는 도박에 불과하다. 타짜의 사기조차 도박판에서는 하나의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속는 놈이 바보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나라는 최소한 선진국 가운데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정치가 썩었어도 그것은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하기는 그러고 보면 아직도 선진국이라는 독일에서마저 기업의 도덕성과 관련한 이슈가 끊이지 않는다. 역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국가의 경제를 이끈다. 경제주체들이 아니다. 시민들이 아니다. 그래도 설마 이같은 신용과 관련한 문제들까지 허술하게 넘어가려 하지는 않는다. 시장을 속였다. 투자자들을 속였다. 그런데도 아무일없이 넘어간다.


그냥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기업이 하자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자신이 아니다. 주체들이 아니다. 주체는 저들이다. 그저 믿고 따르면 부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내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나를 돈벌게 하는 것이다. 정부도, 기업도, 심지어 많은 국민들 자신들마저 그렇게 여기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경제는 정부와 기업이 하기 나름이다. 그들이 하자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하여튼 재미있다. 남의 일이라 여기면.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를 미리 알았으면서도 아무 조치없이 그저 4조라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할 논의만을 하고 있었다. 분식회계는 문제가 아니다. 신용을 속이는 것은 전혀 큰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도 조용하다. 알면서도 반응이 없다. 원래 자본은 그런 것이다. 정부란 그런 것이다. 분노하는 이조차 드물다. 그래도 경제만 살아난다면. 그래서 경제가 살아날 거라는 기대 자체가 한국의 근대가 만든 신화다. 신앙이다. 수준을 확인한다. 여전하다.

유럽의 중세를 심지어 문명이 퇴보한 암흑기로 여기게 된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자신감과 그에 비례한 구시대에 대한 오만함에 가득차 있던 근대유럽의 지식인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유럽사회에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정착시키려는데 당연히 구시대의 가치와 질서는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철저히 부정한다. 철저히 극복한다. 새로운 유럽을 만든다.


르네상스 이후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중세의 유럽이 아닌 그 이전의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당장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과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보다 한참 앞서 있었던 이슬람의 부와 문명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 동경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하필 이교도였기에 동경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슬람이 아닌 이슬람문명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를 배운다. 정확히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많은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명과는 크게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대부분의 유럽인들의 직계선조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족들로 로마인들의 정복대사이 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로마를 약탈하는 입장에 있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결국 훈족에 쫓겨 장성을 넘었던 이들 게르만의 여러민족들이었고 보면 지금 유럽인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계승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마제국이 있던 이탈리아반도마저 이들 이방의 야만족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로마인 역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시 말해 유럽의 중세란 원래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상실한 채 문명적으로 퇴보해 있던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야만상태에 머물러 있던 유럽인들이 비로소 서로마제국의 유산을 통해 조금씩 문명이라는 것을 배워가던 시기라 여기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아니었던 중세의 유럽인들이 로마의 문명을 통해 어느새 그리스와 로마를 계승하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자신감이었다. 이만하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유럽의 중세가 있었기에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건만,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 비하면 너무나 한심한 수준이던 유럽의 중세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래 없던 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자신들의 직계조상들을 부정함으로써 더 멀리 있는 위대한 조상들을 가지게 된다.


즉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라는 말은 고대로마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다. 아니 그마저도 고대로마는 이미 멸망한 제국이었다. 신화로서 고정되었다. 아무런 발전 없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제국을 아직 살아있는 현실의 문명이 추월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신화란 이상화된다. 과거 감히 누구도 견줄 수 없었던 고도의 문명을 세웠던 로마제국에 대한 기억은 그들을 이상화된 신화로 고정시키고 말았다. 유럽인들이 아무리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켜도 여전히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고대로마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여전히 유럽인들의 문명은 초라하고 비루하다. 저급하고 한심하다. 그같은 이상화된 선입견이 멸망한 고대로마제국과 비교하여 현재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을 정당화하는 동기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상 이 단계부터 이미 고대로마를 벗어나 유럽인들만의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이름 아래.


바로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여야 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로마가 될 수 있었으므로. 이상적인 로마로 다가가는 동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유럽을 극복한다. 이제까지의 현실을 넘어선다. 로마가 된다. 지금까지의 현실인 유럽을 벗어나 이상적인 로마제국의 문명을 다시 되찾는다. 새로운 시대를 연다.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과거는 철저히 부정하고 잊는다. 과거의 유럽을 잊는다. 심지어 이 시기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구국의 영웅이던 잔다르크마저 비웃고 있었다. 과거의 무지와 야만이 만들어낸 허황된 신화에 불과하다.


간단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유럽인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마제국은 파괴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유럽과 동시에 존재했으며, 이후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의 유산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처음으로 문명을 배웠고 문명화를 이루게 되었다.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문명인이 아니었던 시절이 없었다. 고대로마의 문명은 곧 유럽인 자신의 것이다. 그것을 잇는 고리다. 암흑시대란. 

아주 어릴 적 일이다. 그렇다고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쫓아 시장에 갔었다.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그것도 기특하다고 시장안 허름한 식당에서 순대국이라는 것을 사주셨다. 내가 그 뒤로 상당이 오랜동안 순대국이라는 것을 먹지 않게 된 이유였다.


제대로 냄새도 제거하지 않아서 거의 악취에 가까운 노린내가 나는 내장들이 시뻘건 고추국물 안에 담겨 있었다. 순대국에 순대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 지인이 맛집이라며 끌고 들어간 순대국집에서였다. 그래도 거기 순대는 고기며 야채며 듬뿍 들어간 순대였다. 당면순대를 넣은 순대국이라니. 거의 컬처쇼크급이었다. 요즘은 아예 돼지국밥 아류로 뽀얗게 국물을 우려 내놓는다.


아마 그 비슷한 무렵 학교 다니던 길에는 이것저것 안주와 함께 소주를 팔던 식당이 하나 있었다. 항상 지나면서 보면 노란 들통이 식당 앞에서 보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그 안에 끓고 있는 돼지뼈며 감자며 손님이 주문하면 덜어서 내놓는 것이 바로 감자탕이었다. 손님더러 알아서 끓여먹으라고 - 하기는 이미 돼지뼈와 감자는 다 익어서 나온다. 국물도 거의 우려 내온다. 그냥 야채며 몇 가지만 손님 앞에서 익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때는 삼겹살은 진짜 돈 없어서 먹는 값싼 고기였다. 대학교 다닐 때도 싼값에 그것도 고기라고 푸짐하게 먹고 싶을 때 시켜먹는 것이 바로 삼겹살이었다. 돈있으면 돼지불고기, 그보다 더 돈에 여유가 있으면 돼지갈비. 요즘은 갈비보다 어째 삼겹살이 더 비싸진 것 같다. 과연 삼겹살이 그렇게 비싸게 먹을 부위인가는 지금도 그다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는 노마 하나가 자기네 이모네 식당에서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고기를 다 먹고 나면 밥 볶아준다고 자랑하던 게 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았다. 아, 그런 것도 있구나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예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의외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그다지 오래지 않은 것이 많다. 어려서 감자탕이라 하면 감자국 비슷한 것이라 여겼었는데. 들통 안에는 빨간 국물 위로 노란 감자만 동그라니 떠있는 듯 보였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기억이다. 생각났다.

안철수가 책임지겠다며 당대표자리에서 물러난 것과 결국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어째서 안철수가 여전히 유력대선후보로서 높은 지지를 받는가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자리란 책임이 아닌 권리다. 자리에 붙은 타이틀은 그만큼의 권한이고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하는 일 없이 노는 자리가 아니다. 거의 휴일도 없다. 잔업에 야근에 휴일근무도 거의 일상이다. 급여가 높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모시는 국회의원이 재선에 성공했을 때나 의미있는 것이다. 재선에 실패하면 실업자 신세다. 그때부터는 자신을 채용해 줄 다른 국회의원을 알아봐야 한다. 낙선한 국회의원들은 자기 보좌관이 다른 국회의원 밑에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주는 것이 일이다. 마냥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마저도 특권이니까. 국회의원 보좌관이 무슨 힘이 있다고.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악착같이 최저임금 올리는 건 반대다. 복지 늘리는 것도 반대다. 그러므로 아무나 보좌관이 되어서 세금으로 월급받는 것은 특혜다. 보좌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받는 급여만을 생각한다. 하기는 그러니까 친척 가운데 누가 국회의원이라도 되면 한 자리 얻으려 그리 난리치는 것이기도 할 터다.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직업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직업이란 신분이다. 사회적 지위다.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지위, 수입만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 힘든 일 친인척이든 누구든 잘 할 수 있으면 믿고 맡기면 무엇이 문제일까.


국회의원이 진짜 제대로 일하려면 보좌관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죽어라 일해야 한다. 항상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이 보좌관 좀 늘려달라는 것이다. 보좌관 부족해서 편법으로 보좌관을 늘린 뒤 다른 보좌관 임금 덜어서 늘어난 보좌관들에 준다. 생각이 있는 것인지.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역할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 그를 위해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공공에 대한 의식 자체가 희박하기도 하다. 당장의 이기적인 욕망이 공적 책임을 대신한다. 우울하다.

단, 여기서의 가족은 말 그대로 가족이 아닌 친인척에 대한 관용적인 수사로 보아야 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단지 자기 가족을 보좌관으로 채용했다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까. 동서에, 5촌에, 엄밀히 그런 관계를 일반적으로 가족이라 일컫지는 않는 것이다.


원래 친척이란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 그리고 인척은 혼일을 통해 이어진 관계를 뜻한다. 한 마디로 처가, 시가, 외가, 사가 등을 모두 통틀어 말한다. 이를테면 형의 아내쪽 가족들을 부를 때 사돈이라 호칭하는 것이 바로 사가를 뜻하는 것이다. 친척은 아니지만 인척이다.


운전사도 보좌관이다. 국회의원 운전사가 그냥 운전만 하는 사람이라 여기면 곤란하다. 운전 역시 국회의원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업무를 보조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세금으로 급여를 지급한다. 차라리 친척은 안되지만 인척은 된다고 큰소리치던가.


도대체 친인척의 개념도 모른다. 인척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국회의원 운전사가 어떤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냥 운전만 하는 것이니 아무 문제되지 않는다. 은연중 운전이라는 자체를 깔보는 것이 있다. 운전이 그렇게 문제라면 인턴은? 고작 인턴이다.


그래서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 일부러 글까지 써가며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다시피 나는 친인척채용에 대해 무척 관대한 편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긴다. 다만 그것으로 남을 공격하니까.


우리는 깨끗하다. 우리는 전혀 문제없다. 늬들이 잘못이다. 늬들이 잘못된 것이다. 태생부터 문제다. 그런데 정작 하는 짓거리 보면 다른 것이 거의 없다. 차라리 말이나 말던가. 자기들 코가 석자다. 어이가 없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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