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전까지 나라라는 것은 곧 왕조였다. 굳이 루이14세의 말을 빌지 않아도 왕이 곧 나라였고 나라란 왕의 사유물에 불과했다. 세금도 전쟁도 단지 왕 개인의 변덕에 의해 결정되었다. 심지어 왕비에게 생일선물을 하겠다고 세금을 따로 거두는 것도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그같은 왕의 전횡과 수탈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은 왕을 내쫓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고대로마나 중국과 같은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국가 자체를 구성원 모두를 위한 공공의 구조로서 이해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미 고대그리스에서는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있었고, 고대로마에서는 공화라는 개념이, 고대중국에서는 공자에 의해 주창된 '대동'의 사상이 각각 발달하고 있었다. 국가는, 사회는, 천하는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모두의 소유다. 모두의 소유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천하가 모두를 위해 그에게 왕이라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왕의 통치는 따라서 모두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추구했던 법가조차 왕 개인이 아닌 단지 공공의 규범인 법을 주재하는 주체로서의 왕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치적인 행위는 오로지 공공의 규범인 법을 근거로 법이 정한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모든 정치적인 판단 역시 다수의 구성원들로부터 의견을 모아 공론의 이름으로 내려져야만 했었다. 딱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래서 고대로마에서는 법이 발달했고, 원로원이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회정치가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시민 모두의 소유다. 원로원 의원이 되고 집정관이 되고, 심지어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스스로를 '제 1시민'이라 일컫고 있었다. 단순히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명예와 권력이 아닌, 개인의 영달이나 욕망만이 아닌 공공을 위한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들조차 그것을 로마의 다수 시민들에게 과시하고 확인받아야 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대에 권력은 단지 권력자 개인의 사유물이었다. 고대로마조차 결국은 그렇게 흘러가고 말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사유화하려 하고, 그같은 시도를 적절하게 막아내지 못한다면 더이상 그를 견제할 모든 수단을 잃고 만다. 처음에는 단지 왕의 소유인 토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준 것에 불과했지만 정작 가신들이 그 토지를 기반으로 힘을 키워 왕과 겨룰 수 있을 정도까지 되자 왕이 그 토지들에 대한 권리를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봉건제다. 권력의 분화와 이동은 대략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누군가 권력을 나누거나 양도하면 그 권력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다시 기존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나 혹은 도전을 선택하게 된다. 다수의 주체가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아 나누게 되면 그것이 영국민주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대헌장'이 된다. 사실은 대귀족과 대상공인들을 위해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으려는 것이었지만 귀족과 대상공인을 그저 도시의 시민으로 바꾸면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어쨌거나 현대의 많은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이념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 할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의 나라의 주인이 되어 서로의 합의에 의해 공공의 목적을 위해 나라를 이끌어간다. 원래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에게 오로지 주권이 있고, 따라서 국가에 대한 책임 역시 오로지 국민들에게 있다. 그리고 국가와 권력이라는 개념 역시 이를 전제로 성립하게 된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은 단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임된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힘에 불과하다. 당연히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공공의 이익과 목적이라는 목표를 공유해야만 한다. 이 또한 결국 법과 제도라는 형태로 정의된다. 이념과 상식이라는 무형의 가치로도 정의된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이란 무엇하나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자의 비서관이 사적으로 전화를 걸어 언론관계자를 협박한다. 진실을 전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과 책임에 권력이 관여하려 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보도가 나오도록 협박까지 일삼는다. 그런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전전정부에서 많은 국민들이 국가와 권력이 하는 일에 시원하지 않다며 불만을 드러낸 것과도 아주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은 개인의 것이다. 개인의 소유이므로 마음껏 자기 쓰고 싶은대로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며 권장한다. 불의한 권력은 자기와 다른 편에 서 있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만 자기와 같은 편에 있으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어차피 누가 권력을 잡았더라도 반드시 했어야 할 일이기에 차라리 어설프게 들킨 것이 더 큰 문제다.
하기는 조선후기 조선은 왕 개인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사대부마저 더이상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단지 왕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인척관계등을 통해 나누어받는 위치에 있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던 식민지 시대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국민의 동의 없이 총칼로 나라의 권력을 탈취하여 독점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시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력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감히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시키는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원래 자기의 것인 권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가 문제다.
전혀 이슈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만이 시끄럽게 떠들 뿐 정작 일반국민들의 지지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했다. 오히려 잘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전전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중들로부터 비토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권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어 시원하게 일처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하고 있다. 권력을 잘 사용해서 조용하게 잘 만들고 있다.
알량한 국회의원 보좌관조차 특권으로 여긴다. 감히 친인척을 앉히려 해서는 안되는 대단한 자리로 여긴다. 당대표가 책임을 지기보다 그저 물러나며 면피하기에 바쁘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다. 공공의 책임보다 자신의 권리를 우선한다. 결국 그렇게 수렴되는 것일까. 아무런 위기의식 없이 이슈조차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주어진 권력이라면 자기를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 논란이야 있지만 그 정도 위치에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쓰는 것도 옳다. 일단 조용하다. 시끄럽지 않다. 과연 그 수단이 정당했으며 그 목적이 적합했는가는 굳이 따지지 않는다. 권력은 자신의 것이다. 자기가 쓰는 것이다. 항상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