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에 대한 비판은 공인에 대한 관심도와 비례한다. 그리고 관심도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더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인이다.


어째서 연예인은 공인이 아닌가. 연예인의 사생활이 일반 대중들에 어떤 간접적인 영향이라도 끼치는가. 연예인의 가족이야기가 얼마나 개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가지는가. 연예인의 동생이 어디서 강도짓을 하든 어디서 사기를 치다 잡혔든 관심있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정치인은 아니다. 고위공직자 역시 아니다. 그래서 권력이다.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불특정한 다수의 개인들에게까지 크거나 작은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정치인의 말 한 마디에 정부기구가 움직인다. 고위공직자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하위공무원들은 바쁘다. 정치인과 가족이고 고위공직자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 영향 아래 있는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 엄격해져야 한다. 공인에게 사생활이란 없다.


당장 기업에서 중요한 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밥먹는다고 사장이 연락이 안된다. 중요한 바이어가 찾아왔는데 점심시간이라고 어디 가서 낮잠 자느라 핸드폰까지 꺼두고 있다. 기업 밖이라면 상관없다. 회사 하나 망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만으로도 큰 피해를 주는 것이다. 중요한 결제가 필요한데 결제를 해주어야 할 당사자가 자리를 비웠다.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상륙사실이 베를린에 전해졌을 때 히틀러 낮잠자는 시간이라고 보고를 늦췄다던가.


그러지 마라. 그래서는 안된다. 일반이라면 대개 자기에게 최소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부분들에 대해서만 일부러 지적도 하고 할 것이다. 그래야 상대도 들어먹을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인데 남이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짜증만 날 뿐이다.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 있다.


"네가 뭔 상관인데?"


그러나 정치인은 그게 안되니까. 고위공직자들은 그런 게 안되니까. 하다못해 경영자 역시 일정규모 이상이 되면 사회적인 영향력이 정치인 그 이상일 수 있다. 집안싸움으로 기업이 흔들리고 나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상관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적하고 비판한다.


도를 지나친 비판이라.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리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참 편하게 정치해 왔다. 아무도 대놓고 비판하지 않았었다. 항상 방패막이가 있었다. 문재인이라는 유용한 방패막이를 앞세워 도리어 자기들도 함께 총질을 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저들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문재인이 뒤로 물러나고 더민주가 안정되면서 명실상부 제 3당으로 입지를 굳힌 국민의당도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유력한 대선후보인 때문이다. 국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있는 제 3당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한다. 판단한다. 비판한다. 당연한 유권자의 권리다.


그동안 언론도 조용하고 인터넷에서만 떠들어대니 그것이 단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기에 비판하는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중상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국민의당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뭐 이런 것으로 그리 시끄러운가. 하지만 공당이다. 공인이다. 유력대선후보다. 바로 한국사회의 일반대중들에게 상당할 영향력을 실제 미칠 수 있는 정당이고 정치인이다. 비판이 부당한가. 그러면 공인 하지 않으면 된다.


우습다. 언제부터인가 국민의당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문제삼는 주장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민의당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자기들만 가지고 그러는가. 어떤 의도가 있어서 자기들만 타겟으로 삼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정치를 말던가. 권력은 가지고 싶고 책임은 지기 싫다. 더 높은 지지와 인기와 지위와 권력은 가지고 싶은데 그에 대한 요구와 기대들에 대해서는 무시하려 한다. 편하게 정치한다. 정치도 아니다.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몇 가지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대통령을 씹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 마음껏 국민들이 씹으라고 대통령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못한다면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비난과 조롱과 비아냥이 싫다면 대통령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까지 공인의 의무다. 한심하다.

리베이트에 대한 내부조사가 시작되었다.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한 문제들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모두가 안철수 대표만 바라보고 있다. 안철수야 말로 국민의당의 시작이며 끝이다. 안철수가 결정해야 내사든 징계든 이루어진다.


그래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박선숙이다. 안철수의 최측근이다. 바로 박선숙이 안철수를 통해 김수민을 공천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견제할 사람도 없었다. 이태규의 공천마저 당규를 고쳐가며 일어붙였다. 그런데 박선숙이 연루되었을 때 리베이트든 공천비리든 알게 되었다고 경고하거나 제지하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과거 3김 시대의 정당들이 그랬다. 한 사람의 제왕적 총재 아래 그 측근들을 중심으로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견제자들은 있었지만 무력했다. 특권에 익숙해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장서서 싸웠던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전대통령의 측근들이 급격히 변질되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간은 유혹에 약하다. 유혹을 견딜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하기는 특정인 이후 새누리당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특정 계파가 주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계파도 아주 수가 없지는 않다. 더민주 역시 친노패권이라 노래를 부르지만 그럼에도 친노와 비노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수틀리면 연판장도 돌린다. 막장이지만 그럼에도 내부에서 서로 견재하는 장치가 된다. 다만 가끔 그것이 동업자적 유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는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국민의당 내부는 오로지 안철수만 바라보고 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조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당연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안철수 자신의 체면과 관계가 있다. 자신의 대선주자로서의 입지와도 관계가 있다. 차라리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묻고 넘어가느니만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밝혀지거나 바뀌지 않는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욕망하기에 그 욕망을 제어할 수단이 필요하다. 절대권력에는 비판자도 견제자도 없다. 그나마 사실이 알려진 것도 내부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누군가가 나섰기 때문이다. 완전하지는 않다.


안철수가 새정치를 부르짖을 때부터 의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때만 되면 바람만 일으키고 사라진 신인정치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새로 국민의당을 만들면서 이건 20세기 3김정치의 재래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다만 그릇이 못미치는 것이 이리 빨리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지켜본다.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니 기대하지 않는 것을 기대한다. 어디까지 보여줄지. 말했듯 이것은 당대표인 안철수의 차기 대권과도 아주 관계가 없지 않다. 자칫 치명적일 수 있다. 개인의 입장이 걸려 있다. 흥미롭다.

흔히 생각한다. 무신이 권력을 잡으면 그만큼 군사력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다. 군인이 권력을 가지면 그만큼 국방도 더 튼튼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가.


역사가 증명한다. 고려중기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고려의 군사력은 더 강해졌는가. 강해졌다. 단, 무신들의 사병만 강해졌다.


거란이 쳐들어왔다. 몽골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무신들이 보유한 그 정예인 사병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들이 끌려가고 승려들이 끌려갔다. 전국이 초토화되는 가운데 무신들의 사병은 백성과 관리들을 억압하고 쥐어짜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였다. 최씨정권에 빌붙어 많은 원한을 만들었다. 이대로 고려조정에 남아있다가는 경대승의 도방처럼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다. 명분이야 좋았다. 몽골에 항거한다. 하지만 몽골과 싸우는 동안 삼별초가 한 일이 무엇인가.


과거 군사독재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조직을 만들었다. 군의 명령체계마저 무시한 채 개인의 사조직을 만들어 군을 사유화하려 시도했었다. 그 영향이 지금도 남아 군의 부정과 비리로 이어진다. 군이 거대한 이익집단이 되었다. 권력은 군을 사유화하기 위해 군의 비리를 눈감아주고, 그같은 비리는 구조화 고착화한다. 생계형 비리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다. 다들 하는 짓거리다.


어째서 문민통제인가. 그나마 군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적기 때문이다. 군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차라리 군이 필요없으면 군의 규모를 줄여서라도 다른 분야에 쓰려 한다. 군인은 군의 직접이해당사자다. 군과 직접 이해가 닿아 있는 군인이 군을 사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군의 효율을 높인다. 군과 민간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만들어진다.


국정원이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업무의 전문성만을 고려해야 하는데 정작 조직 내부에서 정치질을 하고 있다. 국정원을 사유화하려 하고 있다. 단지 고향을 이유로, 혹은 어느 정권에서 중용되었다는 이유로 철저히 분리하고 배제하려 한다.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일에 더 열심이다. 국정원이 원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마저 뒷전이 된다.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특히 북한과 관련한 기존의 정보라인이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한 사실이 그를 말해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권력에 아부하느라 당연해진다.


어떻게 문민통제를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민간정부가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으면 된다. 특정 권력이 아니다. 고도로 체계화된 구조가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개혁이다.


어려서 국정원에 대한 환상같은 것이 있었다. 나쁜 놈들인데 유능하다. 말종들인데 일은 잘한다. 말 그대로 환상인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그냥 개아들놈들이었다. 썩은 고기가 묻은 뼈다귀에 자기 내장까지 내어주는. 영혼이 없어서 영혼은 내주지 못한다.


국정원이 유능해지기 위해서다. 군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다. 군사법정은 비상법정으로 제한해야 한다. 민간법정이 군인도 재판해야 한다. 민간인 국방장관이 군인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20년 뒤에는 가능해질까?


답답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뒤로 한다. 한두군데가 썩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우울하다.

관행이란 한 마디로 그동안 남들이 해오던 일들을 뜻한다. 옳고 그르고 상관없이, 맞고 틀리고와 상관없이, 그냥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니 따라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그동안 국민의당이 줄곧 주장해 본 바가 무엇이었던가.


거대양당을 비판하며 그 대안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주장해 왔었다. 기존의 두 정당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 기존의 두 정당이 보여온 구태와는 다른 정치를 제도권에서 선보이겠다. 그래서 제 3당이 될 수 있었다. 정당득표는 새누리당에 이어 무려 2위다. 그런데 그런 정당이 다른 정당들도 그동안 똑같이 해왔으니 관행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하고 있다. 타당한가?


도덕성의 칼이란 더 엄격하게 자기 자신도 벨 수 있어야 한다. 안철수와 국민의당 탈당파 국회의원들이 더민주를 뛰쳐나가며 내세운 명분이 무엇이었던가. 지난 총선 내내 두 거대정당 - 특히 더민주를 비난해 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런데 정작 자기들이 문제가 되니 전혀 문제없는 관행이 되어 버린다. 문제는 지금 그 두 거대정당조차 그런 유치하고 원시적인 장난은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기는 이런 것들이야 말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 그저 남들 하는 것 안하겠다는 기생적 정치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누리당과 더민주가 하는 것은 안하겠다. 새누리당과 더민주처럼은 안하겠다. 그저 두 거대정당만 비난할 수 있으면 된다. 두 거대정당의 대안이 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누가 하는가는 결국 두 거대정당이 결정한다.


물론 국민의당을 창당하면서부터 사실상 더이상 새정치라는 말은 그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확히 새정치가 아니라 남들 안하는 정치다. 리베이트도 요즘은 너무 뻔해서 기성정당은 거의 쓰지 않는다. 남들 안하는 정치면 된다. 너무 쉽다. 어이가 없다. 우습다.

항상 나오는 말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행동한다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모습만을 보인다면. 무슨 뜻인가. 내가 납득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면 나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내 기준에 맞아야만 그들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다. 도대체 호모포비아와 차이가 무엇인가.


어째서 퀴어축제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때로 불편하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한 과장된 모습들을 보이는 것인가.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의 불쾌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그런다고 당신들이 우리를 어쩔 것인가. 당신들이 불편하게 불쾌하게 여기는 그들 역시 바로 우리들이기도 하다. 그런 불편함과 불쾌감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그토록 불편하고 불쾌해도 그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싫다. 그 불쾌함이 싫다. 그마저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 맞춰야겠다. 자신이 바라는 기준에 맞춰야만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겠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도록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인 자신들에 맞춰야 한다. 말했잖은가. 바로 그것이 포비아의 시작이라고. 항상 다수의 입맛에 맞는 모습만을 보일 것이면 무엇하러 그들은 소수자로서 우리 사회의 변방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같은 상당히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이 배려다. 상대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먼저 이해하려 노력한다. 최소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상대를 단정짓지 않는다.


모든 혐오와 차별은 원래 이상적인 대상을 전제한다. 일반의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그와는 다른 기준들마저 평가하려 한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남성이 바라는 여성이 아니기에, 다수가 바라는 소수자가 아니기에. 그러므로 그들은 잘못되었다.


여전히 반복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포비아가 아니다. 혐오도 차별도 하지 않는다. 단지 보편의 상식에서 벗어난 비일상의 모습이 불편하고 불쾌할 뿐이다. 딴 며칠 일 년 가운데 아주 짧은 동안만 허락된 복장이다. 평소 그러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현실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일진이 자신보다 싸움을 못하는 문제아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당장 내일 놀러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돈이다. 그러면 돈을 뺐긴 문제아는 돈을 빼앗긴 채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그러면 자기에게 빼앗긴 돈을 채워넣고자 다른 아이로부터 돈을 빼앗는 문제아를 보면서 일진은 그것을 일부러 나서서 뜯어말릴 것인가.


어차피 거의 모든 시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약취함으로써 자신의 부와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뒤에도 그같은 구조 자체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생산이 늘었어도 거기에 더해 피지배층의 인신과 재산을 약탈하고 착취한다면 그만큼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피지배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힘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조금씩 그보다 더 좋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더 약하고 더 열등한 지위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자신들이 빼앗긴 만큼을 다시 되찾으면 된다. 지배층인 자신들만 아니면 되었다. 자신들의 것에만 손대지 않으면 되었다. 오히려 다른 대상으로부터 약탈한 것들을 다시 자신들이 약탈해 가질 수 있었다. 굳이 더 가지겠다고 일일이 구석구석을 직접 살필 필요가 없었다.


공범이 된다. 동업자가 된다. 착취와 피착취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전체 구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피착취자가 착취자를 동경한다. 엄연히 자신의 것을 빼앗아감에도 그 힘과 우월한 지위를 부러워하고 동일시하게 된다. 피착취자가 착취자를 따라간다. 그런 자신에 만족한다. 또다른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구조로써 보편의 질서와 정의로서 인식되기에 이른다.


대귀족은 소귀족을 착취하고, 대상인은 소상공인을 착취하며, 소상공인은 노동자를 착취한다. 노동자는 어쩌면 그보다 열등한 다른 누군가를 착취한다. 제국주의 시절 유럽인들의 인종주의는 현실의 불만과 분노를 대신 분출하기 위한 통로로서 이용되었다. 그래도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있었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만족과 위로는 얻을 수 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약탈한다. 사용자는 노동자를 약취한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찾취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마저 자신들이 손님이 되었을 때 편의점 알바에 손님인 자신의 지위를 앞세운다. 그러면 편의점 알바의 아래에는 누가 있을까? 사회적으로 소외된 남성이 여성, 혹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다. 그러므로써 그와 같은 사회적 구조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헬조선인 것이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빼앗고 이용하려 한다. 조금의 수단만 있으면 그를 이용해 억압하고 강제하려 한다. 그같은 사회구조의 최하부에 이제 갓 세상으로 나온 젊은이들이 있다. 아무것도 없이 세상으로 나와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 역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도 서로 전혀 다른 조건에 있음을 빗대는 것이다. 이미 사회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결정되어 있다. 똑같은 빼앗기는 입장에서 누군가는 빼앗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자신은 처음부터 빼앗기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인가. 처음 가장 먼저 최상위층으로 약탈당했던 당사자들일 것이다. 가장 먼저 저항하며 지켜야 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자기보다 못한 이들로부터 빼앗아 빼앗긴 만큼 되찾으려 했었다. 아래로 내려온다. 더 약한 사람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끝에 아무것도 기댈 곳이란 없는 이들이 남게 된다. 막막한 처지가 차라리 지옥과 같다. 더이상의 희망도 기대도 미래도 없다. 먹고 먹히는, 먹으려 달려들고 먹히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야만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성은 사라진다. 본능과 탐욕이 지배한다. 지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답은 젊은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하부에서 일방적으로 빼앗기는 위치에 있는 그들에게 해결의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에는 도대체 몇 겹인지도 모르는 강고한 사회의 구조가 켜켜이 짓누르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가장 위에서 걷어내야 한다. 가장 위와 가까운 이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기업이야 당연히 그럴 리 없을 테니 그들과 마찬가지로 상부구조를 이루는 누군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다.


가장 위부터 숨통을 틔어준다. 권력의 구조 자체를 제거한다. 당연하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설득하고 강제한다. 아래로부터 바꾸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숴야만 한다. 그러고도 여전히 억압적인 권위와 권력을 동경하여 그를 닮아가려 할 수 있다. 근본은 구조 자체의 혁신이다. 개혁이라기보다는 혁명에 더 가깝다. 합법적이고 온건한 그러나 근본의 혁명이다. 이 사회를 위한 마지막 희망이다. 이 사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이대로 이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누구도 사회의 하부구조로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약탈당하고 착취당하는 입장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식들이 그런 위치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사라져간다. 사람이 사람을 먹이로 삼는 사이 그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사라져간다. 여유롭지 않다. 한가롭지 않다. 바로 당면한 현실이다.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기득권의 잘못이다. 그를 극복하는 것마저 젊은이들의 책임으로 놓는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물으려 한다. 기성세대와 닮으라 한다. 기득권과 닮으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빼앗는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빼앗기는 위치에 있는 것이라며.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방식이다. 자신들이 정한 답을 통해 속이고 이용한다. 교활하고 비열하다. 항상 그렇듯.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입장이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내가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어째서 그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 주의깊게 따져본다. 이해와 용서는 다른 것이다. 이해와 인정 역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서 판단한다. 평가한다. 과연 어떠한가.


물론 실제 많은 불편함들은 그같은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론들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려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또한 이해의 하나다. 다만 때로 그런 수준을 넘어선 - 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편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러는가?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들을 하는가? 저런 모습으로 있는가?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들인 경우도 많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 각자가 놓인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런 서로 다른 판단들이 서로 다른 개성을 만들어낸다. 원래 그 사람은 그런 때 그런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구나.


일상생활에서야 사실 거의 문제될 것이 없다.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딱 그 만큼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 서로의 관계를 해치지 않을 만큼. 서로의 관계를 해침으로써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래서 한 편으로 현실에서의 이해라는 것도 서로에게 가해지는 영향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권력에 비례한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해야지 부모가 자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고용인이 사용자를 이해해야자 사용자가 고용인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 안그래도 상관없으니까.


굳이 내가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오히려 자신에 맞춰서 말과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권력관계다. 부모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을 때릴 수 있다. 자식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모를 때릴 수는 없다. 사용자 역시 그냥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용인을 해고하여 내보내면 그만이다. 고용인이 사용자를 내보낼 수는 없다. 하물며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대상이란 굳이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아무릴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개 인터넷 등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란 바로 그같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대상들에 대한 것이다. 굳이 자기가 상대에게, 혹은 상대를 자기에게, 그렇게 상대를 내면화하여 이해하려는 수고 자체가 번거롭고 수고스럽다. 어차피 타인이다. 어차피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판단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보기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단정짓는다. 내가 불편하니 너는 잘못되었다.


아주 오래전일이다. 박재범이 어느 SNS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전문가들이 그 글의 내용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해석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박재범을 불편하게 여기던 네티즌 가운데는 그럼에도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아야 하는가'며 반발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타진요의 경우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단지 타블로를 위해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들은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런 행동들을 하는가. 그런 모습들을 하고 있는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니다. 타인이다. 타자다. 객체다. 대상으로서 단지 자기 안에 있는 이미지만을 투사하여 객관화한다. 보편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에 대한 자각조차 없다.


하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배운다. 보편의 인간도 아니고, 불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도 아니다. 직접적인 관계 아래 모든 것이 놓인다. 그를 통해서만 인정된다. 아직 인정이 지배하는 사회다. 인정이란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다. 주고 받는다. 받고 준다. 그런데 전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없다. 타인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다. 남에게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나에게 직접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 없기에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될 지 굳이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상대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한다.


더구나 대상이 오히려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연예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제 거리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해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에게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무례가 저질러진다.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나마 인터넷이다.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연예인은 가장 만만하고 편리한 대상이다.


아직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외의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원시사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외의 것들에 대해 상상할 능력이 결여되었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같은 인간으로서 대상을 존중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의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설사 불편한 것이 있더라도 상대를 위해 자신이 그만한 불편조차 참아내지 못한다. 그만한 배려조차 베풀 여유가 없다. 그럴 이유가 없다.


어쩌면 분노일 수 있다. 증오일 수도 있다. 애써 자신과 분리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다. 갈 곳을 잃은 자신의 감정을 굳이 거리끼지 않아도 되는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투사한다. 그만큼 불만도 많고 그 불만을 해결할 어떤 수단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상대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를 대신하여 투사하고자 한다.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를 비난함으로써 잠시의 통쾌함을 얻는다.


이미 대중은 권력이다. 인터넷은 대중을 조직화하고 대중의 의지를 구체화시켰다. 단일한 목적과 이해가 그들을 '우리'로 만든다. 대중을 거슬렀으므로 그들의 잘못이다. 대중에 밉보였으므로 그들이 잘못한 것이다. 결집한 대중의 힘이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대중이 항상 옳다. 서로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한다. 단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로 뭉친다. 자신들이 정의다.


한 걸음만 다가서면 된다. 한 걸음만 자기에게로 데려오면 된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살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다. 굳이 문제삼을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 정도 수고도 자기는 번거롭다. 그것이 더 불편하다. 오만이다. 알량한 우위에 도취된다. 저열한 것이다.


처음 평민당 프로젝트부터 에러였다. 88년 총선 당시 김대중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로써 양심적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호남이라는 지역기반에, 수도권으로 이주한 호남출신 유권자들의 결집에, 여기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민주화를 위한 강한 열망과 헌신에 공감한 시민들의 지지가 더해지며 영남을 나누어야 했던 김영삼에 승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철수는 어떤가?


김대중처럼 민주화를 상징하지도, 시대의 개혁을 의미하지도, 그렇다고 호남이라는 지역을 대표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국민의당에서 안철수와 호남출신 국회의원들과의 사이는 이해를 같이하는 동업자 관계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들 호남출신 국회의원들은 하나같이 호남을 벗어나면 인지도나 이미지가 영 미치지 못한다. 호남의 지역주의를 자극해서 호남의 의석은 석권했지만 그 결과 수도권에서 야권유권자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잃었다. 그나마 두 거대정당의 오만이 만들어낸 빈틈이 비례투표에서 선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금의 지지의 근거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저 두 정당이 싫어서 투표한 경우가 더 많았다. 안철수 개인의 대중적 인기나 카리스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김수민과 박선숙까지 연루된 리베이트 의혹도 그 연장에서 보아야 한다. 안철수라는 인물의 인품에 이끌린 것이 아니었다. 안철수라는 인물이 보여준 그동안의 역정이나 업적, 혹은 그의 신념이나 이상에 이끌려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안철수라는 바람을 보았다. 그 바람을 타고 국회의원 배지라도 하나 달 수 있을까 계산하며 모였다. 앞서 말한대로 국민의당과 안철수의 관계는 제왕적 총재에 더 가까운 당대표 안철수에 비해 오히려 계약적 동업자 관계에 더 가까웠다. 다시 말해 안철수가 추구하는 이상에 충실하기보다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었다. 안철수가 아무리 부패청산을 말해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장 자신의 이익부터 챙길 수 있다.


내부자의 고발로 이번 추문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정당이라고 하는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지 못했다. 이익으로 뭉쳤다. 이해로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당에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렇게 새정치민주연합을 박차고 국민의당으로 합류한 인사들이 다수였다. 당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었다. 당장 당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어도 바로 나에게 주어져야 할 이익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상관없다. 과거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도 룰을 무시한 채 당대표를 흔들던 인사들이 그런 식으로 더민주 내부사정을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반복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사실상 안철수에게는 없다.


지켜봐야 한다. 의외의 반전이 일어나게 될지. 안철수가 갑자기 놀라운 능력을 보이며 당내 불만세력들을 다독이고 단합시키면서 문제가 된 부분만을 도려낼 수도 있다. 그런다면 안철수는 최소한 김대중 급이라 보아도 좋다. 도저히 안되겠으면 잘라내고, 그래도 끌고 가야 한다면 다독여 품고, 문제가 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대처로 더이상의 확산을 차단한다. 하필 박선숙이나 김수민이나 안철수 라인이라는 게 문제다.


정치가 기업과 같지 않다. 기업은 사용자와 고용자라고 하는 일방적 관계에 의해 유지되지만, 정당은 구성원 다수가 주주이고 동업자다. 어떻게 그들을 다독이고 끌어안는가. 이익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번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한계가 있다. 당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게끔 동기와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과연 가능할지는. 여기서 안철수가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정권교체는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지켜보는 이유다.

칼이란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벨 수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자신을 벨 수 없다면 타인도 벨 수 없다. 특정인만을 벨 수 있는 칼은 정작 필요한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칼의 날카로움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심지어 자식마저 희생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칼을 뽑았다. 자신있게 휘둘렀다. 아니 아예 난도질을 했다. 정치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도덕성이다. 도덕성이야 말로 한국정치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한 가치이며 새로운 정치다. 그런데 정작 자기 당 자기 사람에게서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과연 그 칼은 자기 당 자기 사람 자기 자신에게까지 휘두를 수 있는 칼인가. 자신마저 벨 수 있는 그런 칼인가.


작년 안철수가 도덕성을 앞세워 문재인을 흔들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안철수를 걱정했다기보다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을 걱정했다. 그런 식으로 지나치게 도덕적인 선명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스스로 선명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도덕성을 강조한 만큼 더 엄격하게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서도 도덕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새누리당이었다면 이슈가 되지 않는다. 그러려니 심지어 지지자들도차 아무일없이 넘어간다. 더민주였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더구나 유력대선주자인 문재인이 가장 우위에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도덕성이다. 더민주의 도덕성에 흠결이 생기면 바로 대선주자인 문재인에게까지 영향이 간다. 그리고 문재인이 받는 타격은 다시 더민주에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하물며 새정치였다. 거대양당을 비판하며 대안세력으로서 지지를 호소하며 자리잡은 3당이었다. 그런 정당에서 다른 정당에서도 보기 힘든 구태의 비리가 사실이 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의 인식이 어떨까?


기소만 되어도 당원권을 박탈해야 한다. 기소된 국회의원의 지역구에는 공천도 해서는 안된다. 비례대표 역시 계승해서는 안된다. 모두 안철수 자신이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오기 전 문재인을 비판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다시 그대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모두가 지켜본다. 과연 안철수는 자신의 당 소속 국회의원의 불법과 부정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안철수 자신이 한 말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출당되어야 하고, 그들이 가진 의석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럴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차라리 비판하기보다 비웃으려 한다. 차라리 잘못이기보다 어리석음이다.


시험대에 섰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말을 번복할 것인가. 그렇다고 당대표로서 쉽게 소속정치인을, 그것도 측근을, 심지어 당의 의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다. 어쩌면 뜻밖에 안철수의 그릇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좀 어이없는 사건이다. 너무 뻔하다.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티나게 해먹지 않는다. 들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면 들켜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도 아니면 아예 몰랐다. 차라리 우습기조차 하다. 여러가지로 웃게 만드는 사건이다. 전혀 남이면 재미있다.


"여어, 일어났나?"

"어, 고든?"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사이 200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200년만에 만나는 고든의 얼굴은 15초 전에 보았던 그대로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원 잔 것 같지도 않군."

"흐흐흐... 그렇지?"


무려 1091년에 걸친 원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원정에 자원한 승무원들이 인식하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다. 200년마다 한 번씩 번갈아 깨워서 데이터로 추출한 의식의 상태를 점검하면 그때나 겨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매번 데이터형태의 의식을 완벽하게 이식하기 위해서 이전의 몸과 똑같이 완벽하게 몸을 구성해서 준비해 놓기 때문에 어색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아니 바로 의식이 추출되기 직전에서 눈만 잠시 감았다 뜬 듯한 기분이었다.


"별다른 건 없지?"

"그거야 에고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하긴..."


사실 우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최소단위가 수십년이었다. 조금만 거리가 멀어지면 수백년은 기본으로 넘어갔다. 인간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몸은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이 견지디 못했다. 


그래서 전쟁도 원래는 인간이 아닌 컴퓨터가 도맡아 했다. 인간이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원칙 때문이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원정을 위한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는 인원도 실제 전투원이라기보다는 전투가 끝난 뒤 점령하고 지배하는 행정적인 절차를 수행할 이들이었다. 기본적인 무기조차 한 번도 다루어 본 적 없는 이들이 그래서 절반을 넘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121년."

"금방이네?"

"네 번 째니까."

"아, 그렇지."

"자각이 없네."

"아아..."


주위를 둘러봐도 어차피 하얀 벽 말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흔한 창문조차 없었다. 어차피 깨어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하루 정도이니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장식 같은 것도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필요치 않았다. 바깥풍경을 보고 싶어도 수십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인 막막한 검은 공간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도 보통의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깨어나서 잠시 수다나 떨다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컴퓨터가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나면 다시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데이터로 돌아가 컴퓨터에 저장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미친 짓이야."

"당연히 미친 짓이지."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미친 짓에 자원한 거지?"

"인간이니까."

"아아..."


자원하면서도 항상 회의하고 있었다. 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무려 1091년이다. 그나마 공간도약이라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의 행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 정도 거리는 기본이었다. 고작 행성 하나에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1091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것도 벌써 여섯번째였다.


"이번에는 몇 년이나 갈까?"

"뭐 몇 년이나 가겠냐?"

"이번엔 네가 바로 하게?"

"못할 게 뭐 있어?"


고든의 말처럼 그런 게 인간이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 단지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떠나고 보는 것. 그래서 여섯번째다. 여섯번이나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는 떠났고, 그리고 그때마다 반란이 일어나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 사실이 본성에 전해지면 다시 자원자를 모아 원정군을 꾸리고 징벌을 위해 떠나보낸다.


"내가 반란을 일으켜도 그 사실이 본성으로 전해지기까지 최소 천 년 이상, 어차피 나는 죽고 없을 테고 후손이 있어도 천 년이 넘어가면 그다지 느낌이 없어. 아마 지금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최초의 반란군과 유전적으로 이어졌는가조차 확실치 않은 전혀 생소한 누군가일 걸? 어쩌면 그 사이 본성보다 기술이 더 발달해서 군사적으로 우리를 압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말야. 한 마디로 일단 진압에 성공한다면 말이겠지."

"재미있겠는데?"

"그러라고 자원한 거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우주선에 타고 있는 원정군 가운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꽤 상당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최소 3세대는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본성에서 그곳까지 사절이 도착하는데도 기본으로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이 본성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국의 존재를 3대가 지나도록 여전히 의식하며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번 반란 역시 도착하고 기존의 반란군과 손잡고 반역을 선언함으로써 고작 천 년만에 다시 원정군을 꾸리게 된 경우였다. 천 년만에 반란사실이 전해졌고 다시 천 년에 걸쳐서 진압군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여튼 부지런한 녀석들이라니까."

"그러자고 자원한 거라구."

"쯧..."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천 년이다. 왕복해서 2천년이다. 굳이 본성을 위한다고 반란진압에 목숨을 걸어봐야 오고가고 결과가 보고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기본으로 필요하다. 살아서가 중요하지 죽고 나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 과학이 발견해 낸 유일한 진실이었다. 본성에 충성하려 원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시공의 거리를 의식하는 순간 거리만큼 희석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만 문제라면 과연 오로지 전쟁만을 위해 세팅된 우주선과 컴퓨터를 어떻게 제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말했듯 전쟁은 컴퓨터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알아서 할 일이었다.


"바쁘게들 살아. 바쁘게들."

"흐흐흐흐..."


아직 한 번의 잠이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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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영역은 교통과 통신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힘을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명령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에 하나 외적이 침입하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바로 전력을 투입하여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늦지 않게 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대응을 적절한 순간에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제국의 영토가 역사의 발전과 비례하여 더욱 넓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아주 고대에는 도보로 이동했다. 전차는 이동에 제약이 있었다. 말이 등장했다. 역참이 등장했다. 배는 말보다는 느리지만 지형의 제약도 크게 받지 않으면서 한 번에 더 많은 인원과 물자를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철도가 등장했다. 전신이 등장했다. 무선이 등장했다. 비행기가 음속을 넘어 하늘을 날아다녔다. 사실상 지금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영토는 지구 전체다. 굳이 고정된 국경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하루만에도 타국을 무력화시킬 수단을 미국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수단들에 들어가는 비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상 많은 제국들이 끝내 무너지고 만 또 하나 이유였다. 제국에 한계는 존재한다. 제국이 가질 수 있는 영토의 한계는 명백히 존재한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무리해서라도 한계를 넘어서까지 영토를 넓히려 한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넓힌 영토를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현지화를 시도했었다. 당제국은 한계를 넘어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절도사를 두었었다. 하지만 조금만 틈을 보이면 한계를 넘어서 획득한 영토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는 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노리는 창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었다. 한계를 넘어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비용이 들어가는데 정작 조금만 약점을 보여도 오히려 반란을 걱정해야만 했다. 제국의 최전성기는 그래서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보아도 좋았다.


과연 우주에서도 지구에서와 같은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건담에서와 같은 태양계 내에서의 전쟁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아직까지 인간의 지식으로 가능한 한계다. 은하계의 지름만 무려 10만 광년이다. 빛의 속도로 10만년은 날아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이 넓은 우주에 인간이 자리잡고 살아갈만한 조건의 행성은 몇 개나 될까? 그런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소설에서처럼 광속을 뛰어넘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시공간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한계는 존재한다. 극단이기는 하지만 한 번 원정을 떠나는데도 수십수백년이 걸린다. 겨우 전쟁에서 승리해서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반란이 일어나면 알려지는데만 다시 수 세대가 걸린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데도 인간이 우주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가능할까?


만일 외계인이 실제 존재하더라도 많은 SF에서 묘사하는 것 같은 그런 침략은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UFO가 실제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면 압도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지구와 지구인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익이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지구를 침략해서 지구를 정복하면 무엇하는가. 그래서 무언가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니 그런 수고도 감수하는 것이다. 설사 생기는 것이 있어도 남는 것이 있어야 비용이든 시간이든 투자할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역대의 모든 제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먼 미래도 역시 멍청한 짓거리를 반복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항상 합리만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합리만을 쫓았다면 지금의 인류의 문명은 없다.


바보짓이다. 한 마디로. 우주에서의 전쟁이란. 우주를 무대로 벌이는 정복이란. 하지만 원래 인간이라고 하는 자체가 바보들이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같은 바보짓을 반복한다. 이것이거나 아니면 이것이거나. 새벽의 망상이다.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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