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학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일진이 자신보다 싸움을 못하는 문제아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당장 내일 놀러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돈이다. 그러면 돈을 뺐긴 문제아는 돈을 빼앗긴 채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그러면 자기에게 빼앗긴 돈을 채워넣고자 다른 아이로부터 돈을 빼앗는 문제아를 보면서 일진은 그것을 일부러 나서서 뜯어말릴 것인가.


어차피 거의 모든 시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약취함으로써 자신의 부와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뒤에도 그같은 구조 자체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생산이 늘었어도 거기에 더해 피지배층의 인신과 재산을 약탈하고 착취한다면 그만큼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피지배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힘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조금씩 그보다 더 좋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더 약하고 더 열등한 지위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자신들이 빼앗긴 만큼을 다시 되찾으면 된다. 지배층인 자신들만 아니면 되었다. 자신들의 것에만 손대지 않으면 되었다. 오히려 다른 대상으로부터 약탈한 것들을 다시 자신들이 약탈해 가질 수 있었다. 굳이 더 가지겠다고 일일이 구석구석을 직접 살필 필요가 없었다.


공범이 된다. 동업자가 된다. 착취와 피착취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전체 구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피착취자가 착취자를 동경한다. 엄연히 자신의 것을 빼앗아감에도 그 힘과 우월한 지위를 부러워하고 동일시하게 된다. 피착취자가 착취자를 따라간다. 그런 자신에 만족한다. 또다른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구조로써 보편의 질서와 정의로서 인식되기에 이른다.


대귀족은 소귀족을 착취하고, 대상인은 소상공인을 착취하며, 소상공인은 노동자를 착취한다. 노동자는 어쩌면 그보다 열등한 다른 누군가를 착취한다. 제국주의 시절 유럽인들의 인종주의는 현실의 불만과 분노를 대신 분출하기 위한 통로로서 이용되었다. 그래도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있었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만족과 위로는 얻을 수 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약탈한다. 사용자는 노동자를 약취한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찾취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마저 자신들이 손님이 되었을 때 편의점 알바에 손님인 자신의 지위를 앞세운다. 그러면 편의점 알바의 아래에는 누가 있을까? 사회적으로 소외된 남성이 여성, 혹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다. 그러므로써 그와 같은 사회적 구조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헬조선인 것이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빼앗고 이용하려 한다. 조금의 수단만 있으면 그를 이용해 억압하고 강제하려 한다. 그같은 사회구조의 최하부에 이제 갓 세상으로 나온 젊은이들이 있다. 아무것도 없이 세상으로 나와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 역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도 서로 전혀 다른 조건에 있음을 빗대는 것이다. 이미 사회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결정되어 있다. 똑같은 빼앗기는 입장에서 누군가는 빼앗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자신은 처음부터 빼앗기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인가. 처음 가장 먼저 최상위층으로 약탈당했던 당사자들일 것이다. 가장 먼저 저항하며 지켜야 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자기보다 못한 이들로부터 빼앗아 빼앗긴 만큼 되찾으려 했었다. 아래로 내려온다. 더 약한 사람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끝에 아무것도 기댈 곳이란 없는 이들이 남게 된다. 막막한 처지가 차라리 지옥과 같다. 더이상의 희망도 기대도 미래도 없다. 먹고 먹히는, 먹으려 달려들고 먹히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야만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성은 사라진다. 본능과 탐욕이 지배한다. 지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답은 젊은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하부에서 일방적으로 빼앗기는 위치에 있는 그들에게 해결의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에는 도대체 몇 겹인지도 모르는 강고한 사회의 구조가 켜켜이 짓누르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가장 위에서 걷어내야 한다. 가장 위와 가까운 이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기업이야 당연히 그럴 리 없을 테니 그들과 마찬가지로 상부구조를 이루는 누군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다.


가장 위부터 숨통을 틔어준다. 권력의 구조 자체를 제거한다. 당연하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설득하고 강제한다. 아래로부터 바꾸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숴야만 한다. 그러고도 여전히 억압적인 권위와 권력을 동경하여 그를 닮아가려 할 수 있다. 근본은 구조 자체의 혁신이다. 개혁이라기보다는 혁명에 더 가깝다. 합법적이고 온건한 그러나 근본의 혁명이다. 이 사회를 위한 마지막 희망이다. 이 사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이대로 이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누구도 사회의 하부구조로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약탈당하고 착취당하는 입장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식들이 그런 위치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사라져간다. 사람이 사람을 먹이로 삼는 사이 그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사라져간다. 여유롭지 않다. 한가롭지 않다. 바로 당면한 현실이다.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기득권의 잘못이다. 그를 극복하는 것마저 젊은이들의 책임으로 놓는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물으려 한다. 기성세대와 닮으라 한다. 기득권과 닮으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빼앗는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빼앗기는 위치에 있는 것이라며.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방식이다. 자신들이 정한 답을 통해 속이고 이용한다. 교활하고 비열하다. 항상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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