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봉건제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봉건제는 그 성격이 달랐다. 물론 프랑스도 처음에는 정복자로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수백년 넘게 대를 이어가며 한 지역에서 영주와 영민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살다 보니 어떤 유대같은 것이 생겨났다. 영주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영민들은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지에서 영주들 역시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영민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의 가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오히려 자신의 영주를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맞섰던 농민들이 단지 어리석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영국의 봉건제는 노르망디의 대공이던 윌리엄의 정복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토착귀족들에 의한 나름의 봉건제가 정착되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정복으로 인해 기존의 봉건귀족들은 모두 몰락하고 윌리엄이 이끌고 온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귀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당연히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기존의 영민들에 대한 어떤 유대나 책임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영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고 나서도 상당기간 그들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지배집단과 피지배민과의 사이의 괴리가 젠트리라는 중간계급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더 많은 수입을 얻고자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추방하고 농지를 목초지로 바꾸었던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도 대한제국까지 한반도의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에는 도덕적 지배를 전제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삶을 살피고 소작인들은 지주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한다. 나아가 조선 전체에서도 양반들은 도덕적 모범을 보이며 백성들의 삶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그런 양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약속저럼 지켜지고 있었다. 조선말 탐관오리의 학정에 백성들이 떨치고 일어났을 때도 그들의 중심에는 해당지역의 양반들이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에도 다수의 양반들이 백성들과 함께 나라와 임금과 백성을 위해 무기를 들고 있었다. 나라와 임금을 지키겠노라고 양반들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다수의 농민들이 그에 호응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었다. 양반은 백성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성은 양반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사정은 바뀌었다. 일본인들은 이방인이었다. 일본제국은 단지 정복자였다. 조선에 대한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가지지 않는 일방적인 약탈자이며 통치자였다. 이전의 지배자들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배려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제국에 협력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조선의 기층과 유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과 손잡고 일본에 협력한다는 것은 일본에 더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일본인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실제 이 당시 많은 이들이 일본제국에 대한 협력의 대가로 막대한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약속받고 있었다. 지배세력과 피지배집단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들의 후예들이었다. 조선을 경멸하고, 조선인을 혐오하며, 조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려 했던 이들이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무참하게 같은 동포를 학살할 수 있었는가. 같은 동포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조선말을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사고를 가진 이들마저 적지 않았었다. 그런 이들이 과연 조선의 백성들에 대해,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민들에 대해 어떤 동질감이나 연민의 감정 같은 것을 느꼈을 리 없는 것이다. 타인이었다. 자신보다 열등한 단지 상관없는 타인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죽이고 빼앗아도 전혀 죄책감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어진 군사독재 역시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적 동의 아래 세워진 권력이 아니었었다. 굳이 국민 다수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요구를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국민의 여론을 짓밟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그래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 더 큰 힘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의 눈밖에만 나지 않으면 한반도라는 좁은 땅덩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민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기득권 역시 따라서 단지 권력의 눈치만 잘 살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권력이 일방적으로 권리를 쥐어주고 그 권리를 지켜준다. 국민이야 죽든 말든. 국민들이야 아무리 불만을 가지든. 


계급의식이란 그나마 층위는 같지만 결국 같은 경계 안에 공존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나는 저들과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만큼 저들과 다른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다. 상대에 대한 우월감은 더 큰 책임과 의무로 돌아간다. 결국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공존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복자는 다르다. 이방인인 새로운 지배자들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굳이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인 그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진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위한 기여이고 배려다. 


엘리트는 없지만 정복자는 있다. 어째서 그토록 염치도 체념도 없이 악착같이 하나라도 이익을 더 챙기려 발버둥인가.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일반의 역량이 쇠퇴하면 사회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구멍가게까지 털어간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허름한 손수레까지 빼앗아간다. 그들이 돌아갈 곳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이 속한 집단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다.


굳이 특정기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만이 아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고위공직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동안 궁금했었다. 어째서 한 사회의 엘리트로서 법조인이라는 인간들이 저토록 천박하고 명예라는 것을 모르는가. 명예는 동질집단 안에서나 신경쓰는 것이다. 아무리 명예로운 신사도 일개 야만인들 사이에서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일부러 불편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과연 그들은 한국인인가. 국적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분명 한국인이다. 그러나 정서만을 놓고 본다면 최소한 그들은 나와 같은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 수직의 층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평의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서의 공간이다. 이해의 공간이다. 단지 타인일 뿐이다. 단지 이익만을 얻고 떠나려는 이방인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사회에 정착하려 애쓰는 다른 피부 다른 생김새의 외국인보다 더 먼 타인이 아닐까.


이어진다. 엘리트란 한 사회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지는 이들이다. 더 많은 권리와 권한이 주어지되 그것을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할 책임 역시 지워진다. 엘리트가 없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저 위로 올라간다. 아래는 보지 않고 위로만 올라간다.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조선인들처럼. 저들처럼 되지 않고자. 하기는 그래서 부모들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던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들처럼 된다. 저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21세기의 새로운 식민지다. 같은 국민, 같은 구성원에 의해 지배되는 약탈되는 식민지다. 현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