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놀랄 때가 있다. 건물도 몇 채 있다. 자식들도 하나같이 잘되어 번듯하다. 그런데 정작 부모들은 폐지를 줍고 있다. 말한다.


"그저 심심해서 소일거리로..."


하지만 그들이 소일거리로 모아 파는 폐지들은 또한 한 편으로 어떤 노인들에게는 유일한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작은 손수레에 버거운 몸을 의지해가며 먼 동네를 돌아 겨우 폐지며 폐품들을 모아 팔아서 생활비를 번다. 소일거리로 모아다 파는 그 만큼 그들은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


해외유명인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거의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사회적 의무와 책임이다. 자기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인기를 누리는 만큼 무언가 사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이다. 이미 자신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이므로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역시 특별해져야 한다. 


사실 싫었다. 그야말로 특권의식이다. 남들과 다르다. 보통의 대중과는 다르다. 자신은 그만큼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과 같은 평범한 존재로 돌아오는가. 평범한 일반과 같이 책임과 권리를 나눈다면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는가.


답은 엉뚱하게도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제법 돈도 벌었다. 자식들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과 경쟁하며 폐지를 모아 소일거리를 삼는다. 아니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들의 폐지마저 독점하여 돈을 벌려 한다. 평등하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빌딩을 몇 채나 가진 사람도 좁은 반지하방에서 볕도 못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어떤가.


워낙 가난했다. 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부자가 되어야 했었다. 부자조차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었다. 쓰레기를 주워다 팔아야 했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굶어가며 졸아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만 했었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부자가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가난하다. 여전히 같다. 어제까지 같이 가난했던 사이이고, 얼마전까지 부자였어도 자신들과 크게 차이가 없던 처지였다. 그러므로 여전히 부자가 되었어도 더 악착같이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쓰레기를 모아서 팔아 돈을 벌어야만 한다.


아마 우리사회가 가진 모든 모순과 병폐의 근원에 이것이 있지 않을까. 빌딩을 가졌으면 그에 어울리는 삶이 있다. 자식이 모두 장성하여 성공했다면 자식이 없는 외로운 처지의 노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배려다. 그럼으로써 아직 가진 것 없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만 한 사람이라도 경쟁자를 줄여준다. 그만큼 알량한 것들이나마 기회를 양보한다. 폐지 그거 가져다 팔아봐야 얼마 받지도 못한다.


대기업이 피자나 치킨을 만들어 팔면야 더 싸게 팔 수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인프라가 다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수단들만 동원해도 더 쉽게 더 많이 더 싸게 대중에 피자와 치킨을 공급할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했었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러면 고작 가게 하나 가지고 가족들을 모두 동원해서 겨우 마진이나 남겨먹는 동네 피자집이나 치킨집은 어쩌라는 것일까.


대기업은 자신의 브랜드가치에 맞는 더 비싸고 더 고급스러운 더 첨단의 제품들을 만들어 판다. 비슷한 성능과 디자인이라도 중소기업은 브랜드 가치 만큼 더 싼 값에 물건들을 만들어 판다. 나아가 대기업의 이름에 어울리는 분야들에 진출한다. 중소기업이 그나마 알량한 시장을 나눠먹고 있는데 끼어드는 것은 반칙이다. 중소기업에 어울리는 업종이 있고, 개인사업자에게 어울리는 업종이 있다. 아예 가리지 않는다. 대중들은 오히려 싸졌다 편해졌다 좋아한다. 중소기업과 중소자영업자들은 죽어나간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판사나 검사 쯤 되면 남다른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가 되었으면 사회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만큼 특권을 누린다.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다. 실제 특별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아무나 판사가 되는가. 누구나 검사가 되는가. 국회의원이 되려 하면 얼마나 고단한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가. 수 십 년을 한결같이 도전하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는 이들은 또 얼마이던가. 하지만 오히려 평범한 대중처럼 그들과 어울려 눈앞의 이익을 얻기에만 더 급급하다. 하기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그런 평범한 대중들인 가족이고 친구이고 이웃들일 것이다. 한 사회를 책임져야 할 엘리트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고, 아들이고, 누이이며, 누군가의 가까운 친인이다. 모두는 그렇게 저렴해진다.


너와 내가 같다. 모두가 평등하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경쟁이라는 현실과 만나면 결코 좋은 말일 수만은 없다. 현실이 다르다. 조건이 다르다. 그렇다면 체급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비슷한 조건끼리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무한경쟁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모두가 함께 경쟁한다. 심지어 대기업이 나서서 순대며 떡볶이며 길거리 간식까지 손대려 한다. 동네 구멍가게까지 손아귀에 쥐려 한다.


계급이 필요하다. 너와 내가 다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서로가 누리는 사회적 권리도,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 역시 모두가 다르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기에게 걸맞는 세계가 있다. 책임을 지운다. 한계를 지운다. 그래도 그만큼 살면서 폐지까지 줍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고작 소일거리를 위해 얼마 안되는 돈마저 빼앗는 것은 너무 심하다. 자신의 수준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경쟁을 해도 거기서 해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사회적 책임을 진다. 그런 것이 당연해진다. 어차피 모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특별한 신분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책임을 독점하는 특권적인 신분과 계층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누리는 권리 만큼 더 많은 더 중요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서로가 짊어진 것들이 다르다. 서로가 누리는 것들이 다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다. 말 그대로 사회의 주류다. 사회를 주도하여 이끌며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그렇게 사회는 나뉘고 있다. 현실은 존재하는데 인식이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아직 모두가 가난하다. 아직 모두가 비천하다. 버르적거리며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기어올라가려 애쓰고 있다. 저 한참 위에서도 더 위로 올라가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흙탕을 뒹군다. 누군가는 줄을 드리워 주어야 한다. 줄을 고정시키고 힘껏 지탱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자기 올라가는 것만 급급하다면 결국 뒤쳐진 이들만 버려질 뿐이다. 그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사회의 자원만을 낭비한다.


트럭까지 동원한다. 개인의 차량까지 동원해 싹쓸이한다. 전혀 죄의식조차 없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만큼 돈을 벌고도 아직 가난하다. 때로 섬뜩해지는 이유다. 바로 우리 사회와 닮았다.




더 정리해 쓰고 싶지만 인터넷에 쓰는 글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는 것도 비례에 맞지 않다. 떠오르는 이야기면 족하다. 틀리면 틀린대로 모순되면 모순된대로. 생각은 이어진다. 글이 끝은 아니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과 같은 것이다. 사고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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