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무협을 좋아하고 역사를 좋아하는 탓이다. 기왕에 충성을 바치려면 자기 목숨 뿐만 아니라 가문의 재산과 영광과 명예까지 모두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모욕도 참아낼 수 있어야 진짜 충신인 것이다. 아니 그를 넘어서 스스로 그 모든 것을 내던져 바칠 수 있어야 그 충성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한겨레와 경향이 그동안 얼마나 윤석열의 똥꼬를 빨아왔는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윤석열의 똥꼬를 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오보를 내고, 심지어 내부쿠데타까지 기획해서 연기해 보이고 있었다. 젊은 기자들이 반발하기 전부터도 한겨레는 윤석열의 똥이나 빠는 똥걸레로써 철저히 윤석열 검찰을 위해서 받아쓴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조국사태에서도 그랬었고, 추미애 장관에 대한 윤석열 항명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윤석열이 항명하던 당시 한겨레 기자들이 성명을 낸 것 보고 뜨악했던 사람들이 제법 될 것이다. 그 전부터도 윤석열 검찰의 주장만 철저히 받아쓰던 한겨레에서 뭔 젊은 기자들의 성명이란 말인가. 그 전부터도 한겨레의 논조는 조선일보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었다.

 

KBS의 검언유착 의혹이 불거지자 하어영이 앞장서서 오보를 내서 청와대가 윤석열을 저격한다는 오해를 만들었고, 다시 추미애 장관으로 인해 윤석열 검찰이 권위를 잃어가자 자기 몸을 내던진 오체투지의 사과로써 그 권위를 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오세훈을 위한 의도된 오보는 역시 보수야권의 후보로 두각을 드러내던 윤석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었다. 윤석열 검찰이 그렇다면 김학의에 대한 재수사도 출국금지도 모두 범죄인 것이다. 한 면에서는 탈원전을 주장하면서 한 면에서는 월성원전을 조기폐쇄했다고 정권차원의 비리라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사찰 역시 검찰이 그렇다고 하므로 더이상 전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보라. 윤석열이 말하기를 조중동이 아니면 언론조차 아니다. 조중동이 아니면 고발도 폭로도 해서는 안된다.

 

하긴 한겨레의 원래 태도도 그러했었다. 정의연논란 당시 한겨레는 자체적인 취재원과 취재내용을 가지고도 철저히 조선일보의 논조에 맞춰 기사를 내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그렇다면 일단 그것을 사실로 전제하고 그 다음에 자기들이 취재한 내용을 부연하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라면 사실이 이러할 테지만 취재해 보니 이런 말도 있더라. 마치 요미우리가 1위하고 자기의 팀은 2위만 하면 된다던 예전 일본 프로야구 구단주들을 보는 듯한 태도였었다. 언론에는 조선일보가 있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가 있으며, 바로 그 다음에 한겨레와 경향이 있다. 그래도 조중동 뒤를 따라가는 언론으로서 조중동이 언론의 필두가 되고 그 다음에 한겨레가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경쟁자는 많다. 일단 조선일보가 언론의 필두임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KBS를 놓느냐 연합뉴스를 놓느냐 SBS를 놓느냐로 서로 경쟁이 치열하다. 아무튼 조선일보야 말로 언론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저 따라갈 뿐이다. 한겨레가 그동안 조선일보의 오보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정면에서 비판하는 모습을 과연 보인 적이 있기는 했는가. 당연하다. 차라리 조선일보가 오보를 내면 그를 근거로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비판해도 조선일보를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당시도 조선일보가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한겨레는 자신들이 취재한 내용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중동만 언론이라는 윤석열의 태도는 지극히 옳다.

 

그러고보면 조중동 같은 메이저 언론이 아니라면 다른 언론들에 대한 고소고발은 언론에 대한 탄압으로도 여기지 않던 것이 바로 이들 언론들이었을 것이다. 지방언론이나, 인터넷언론들이나, 혹은 군소언론들에 대한 심지어 성폭력조차 기자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주의자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KBS 정도는 되어야 언론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충성심이라고나 할까. 다만 윤석열에게 더이상 대권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니 때로 홍준표나 다른 국민의힘 후보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진짜 충성의 대상이 윤석열은 아니었다는 증거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윤석열이 아니다. 윤석열로 대표되는 검찰이다. 검찰이라고 하는 시험을 통해 정당하게 획득한 권력일 것이다. 다른 말로 기득권이라 부른다. 자신들 역시 진보에서 기득권이 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오랜동안 한겨레를 구독해 온 독자들조차 자격이 없으므로 독자로서 존중할 필요조차 없다. 어느 언론이 자기 독자를 정면으로 모욕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것은 한겨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윤석열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홍준표라도 좋고 원희룡이라도 상관없고 윤희숙이나 이준석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세훈을 위해서도 기꺼이 오보라는 오명까지 감수할 수 있다. 언론이 아니라도 좋다. 조중동이 인정받으면 한겨레 역시 따라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이 언론의 가치고 존엄이다. 너무 솔직해서 감탄이 나올 정도다. 벌레는 벌레다워야 한다.

명나라가 망한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황제인 숭정제가 도망치지 못하고 목매달아 뒈졌다. 자기가 못가면 태자라도 먼저 피신시켜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지만 그마저 의심병때문에 늦어서 태자가 반란군에 잡혀 죽고 말았다. 청군이라고 해봐야 중국 인구에 비하면 한 줌 밖에 안되는 소수인데다 당시 명의 경제력은 대부분 강남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제대로 정통성있는 조정이 단합해서 맞섰다면 최소 몇 대는 버티다가 잘하면 고토수복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도 태자도 없이 정통성없는 방계황족들이 저마다 황제를 칭하며 자기들끼리 싸우니 버티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단종이 왕위를 잃자 단종에 충성을 바치던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과 성삼문, 박팽년 같은 학자들이 대거 쓸려나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 종친들마저 줄줄이 죽어나갔고, 변방에서는 김종서의 뒤를 이어 여진족을 통솔하던 이징옥이 죽었으며, 심지어 일반 백성들까지 단종 복위에 휘말려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단종의 처가며 누이의 일족이 죽임을 당하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했을 것이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내쫓겼을 때도 그를 보위하던 이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갔었다. 그 가운데는 칠순의 정인홍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을 나랏님이라 부르는 이유다. 왕은 개인이지만 개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왕이 건강을 잃으면 나라가 흔들리고, 왕이 자손을 보지 못하면 정통성을 위협받으며 혼란의 원인이 되기 쉽다. 왕이 누구를 인척으로 맞아들이느냐에 따라 국사가 바뀌고 수많은 이들의 운명까지 결정된다. 그래서 공인인 것이다. 개인이지만 그 모든 것이 온전히 개인의 것일 수 없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조선만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왕조에서는 왕과 관련해서 사소한 사생활 하나까지 중요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절대왕정 시대에는 고위귀족이 왕의 배변을 검사하는 역할을 영광으로 여기고 맡은 일까지 있었다. 왕의 똥도 국가의 중대사이기에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에게 맡겨져야 하는 것이다.

 

민주화된 지금이라도 - 아니 오히려 민주화된 지금이기에 더욱 그같은 공적인 존재로써의 공인이란 본질은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국가마저, 국가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 모든 공적인 영역들에 대해서마저 군주로써의 권위와 권력으로 사유화할 수 있었던 당시와 달리 이제는 대부분 공적인 영역들은 공적인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국회의원이란 핏줄에 의해 세습되는 사유물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에게, 혹은 지자체장에게 주어지는 모든 공적인 책임과 권한들이 국회의원 개인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유물이 아닌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다수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그러한 지위와 신분과 권한이 주어지는 대상 또한 다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지금 국회의원이고 경기도지사고 대통령인 것은 그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 내가 임의로 쟁취하거나 거래하여 소유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당연히 모든 소유와 포기란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당장 조선의 고종이 일본놈들 꼴보기 싫다고 아무 대책없이 왕위를 내던진다 생각해 보라. 아니 아무리 태평성대라고 성종이 내가 책임지겠다 말하고 후계도 없이 왕위에서 내려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욕심없이 권좌를 내던질 수 있는 건 분명 미덕이지만 이후 왕위가 공백이 되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 할 수 있다. 그래도 당시 왕위란 왕 개인의 소유였으니 그럴 수 있다 치자. 약속했다. 내가 지금 여기 지역구민을 위해서, 여기 경기도민들을 위해서, 나아가 국민을 위해서 책임지고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약속하고서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 말했을 때 왜 비난들이 쏟아졌는가. 노무현 전대통령을 국회에서 무고하게 탄핵했을 때 어째서 국민들은 들고 일어났던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약속하고 지역구민들의 지지를 받아 국회의원이 된 이가 1년 조금 지나고 대통령이 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지역구민들과의 약속은 단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그토록 안철수측에서 비난을 퍼부었음에도 2012년 대선이 끝날 때까지 국회의원 자리를 지켰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민들과의 더 큰 약속이 있다면 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국회의원자리도 포기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역구민들과의 약속도 우선해서 지켜야만 한다. 그것은 당을 지지해서 선택했던 지지자들을 위해서도, 그런 지지자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당을 위해서도 중요한 약속인 것이다. 내가 당장 지지율에서 밀리니 일신하기 위해서 국회의원 자리를 내던지겠다. 그것을 단호하고 과감한 희생으로 여긴다는 것은 그로 인해 다시 재보궐선거를 치러야 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대표자를 갖지 못하게 되는 지역구민의 입장을 생각지 않는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국회의원 자리를 지역구민들과의 공적인 약속이 아닌, 그를 위한 공적인 책임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사유물이자 권리로만 여기는 것이다. 이런 놈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통령 자리를 무엇이라 여기게 될까?

 

태도의 보수란 말을 더욱 납득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며칠 전 썼다.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기준과 구분에 대해서. 국회의원을 사유화한다. 당대표를 사유화한다. 그리고 나아가 대통령까지 사유화하려 한다. 그래서 태도의 보수란 것이었을까? 국회의원은 내 것이다. 국회의원 배지란 온전히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나만의 소유인 것이다. 당대표이던 시절 당원도 지지자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 결정에 지역구민들은 배제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국민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국민을 가리키는 것인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는 게 아니라 바닥이 없는 모양이다. 그 무저갱에 전율할 지경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되었던 이른바 부림사건에서도 부산경남의 뜻있는 변호사들이 대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나선 바 있었다. 돈없고 빽없는 대학생들의 시국사건이었음에도 그래서 변호사로 이름을 올린 이들만 무려 수 십이었었다.

 

원래 한국의 수사와 재판이란 항상 법에 따라 공정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수사기관을 믿고 재판부를 믿고 변호에 나선다는 건 그냥 손놓고 저들 하는대로 지켜보자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집단으로 나서야 했었다. 그러니까 이만한 변호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수사과정과 재판결과를 지켜보고 있다는 일종의 압력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서슬퍼렇던 시절이라도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변호사라면 그 이름값이 작지는 않았기에 변호사들이 집단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수사와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래봐야 아주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이후로도 그러한 변호사들의 집단행동은 특히 민주진보개혁진영에 있어 하나의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수사권과 기소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진 권위주의 기득권들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민주진보개혁진영의 인사들은 하나로 뭉쳐서 대응해야 한다. 변호사들도 하나로 뭉쳐서 저들이 멋대로 법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며 압력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덕분에 아주 최근까지도 부당하다 여겨지는 민주진영의 사건들에는 수많은 변호사들이 직접 변론은 하지 않더라도 변호사로서 이름 하나 더 올리는 행위를 통해 기득권의 횡포와 폭거를 막는데 한 손 보태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지금 이낙연이 하는 짓거리가 얼마나 개짓거리인지?

 

황교익만 해도 이재명과의 인연을 말하기 전에 오래전부터 민주당을 지지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견해를 피력해 온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재명이 도지사로 있는 경기도의 기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파로 매도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김어준이 개새끼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낙연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동지의 언어를 쓰라 지랄하더니 정작 적의 언어로 동지를 공격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였는가? 오사카 관광공사자리나 알아보라? 

 

그리고 이제는 민주화진영의 오랜 관행과 전통마저 부정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실제 변론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진영의 동지로써 억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행위를 부정이라며 폭로하고 고발하며 문제삼는다. 그야말로 그동안 돈도 안되는 사건에 불이익까지 감수해가며 이름을 빌려주었던 변호사들에 대한 배신행위 아니인가. 그동안 오히려 더 크게 더 많은 도움을 받아 왔지만 이재명을 도왔으니 죄가 되어야 한다. 딱 검찰이 그동안 정부와 여당을 수사하고 언론을 통해 폭로한 방식 그대로였다.

 

그래도 설마 이낙연이 검찰과 손잡았겠는가? 그런데 하는 짓거리가 딱 검찰이 하던 그대로다.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추미애의 폭로가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다. 그동안 이낙연이 보인 행보가 딱 그런 것들이었다. 진정 민주화의, 진보와 개혁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요즘 이것저것 일이 많아 뉴스를 다 챙겨보기가 힘들다. 헤드라인만 대충 훑어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인 때문이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정치뉴스따위 깊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아는 건 안다. 그래서 누가 개새끼인가도 알게 된다. 정의당만이 아니었다. 민주화의 역사를 팔아넘기는 것은. 버러지 새끼들인 것이다.

자칭 보수나 자칭 진보나 자칭 민주당 적통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민주당 지지자는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초선5적의 소란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다. 자기들을 국민만 바라보고 정치하려 한다. 극렬 지지자들이 하는 말은 듣지 않겠다. 무슨 뜻인가. 지지자는 국민이 아니다.

 

항상 민주당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민을 보고 정치하라. 국민이 바라는 정치를 하라.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라. 여기에 민주당 지지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민주당 지지자를 제외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올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른바 민주당 적통들이 주장하는 외연확장론의 실체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지 정권도 잡고 당의 입지도 확고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지지자들 하는 소리 듣지 말고 그 밖에 국민들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지지율이 30%안팎을 오가지? 한때 40% 넘는 지지를 받았는데 지지자 뺀 국민이면 누구를 말한는 것일까?

 

검찰의 무도함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민주당 인사들만 노려 표적수사하고 정치권과 손잡고 고발까지 사주했다. 총선에 직접 개입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과연 자칭 진보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런 검찰이라도 검찰이 사유화한 검찰권력을 온전히 보전시켜야 한다며 개혁을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중이다. 그래봐야 고작 조국 당했고 김경수 당했고 이재명이 당할 뻔했다. 고작해야 노무현 죽고 한명숙 감옥살이했을 뿐이다. 홍준표나 심상정이 당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권성동이나 이정미 같은 진짜 국민이 당한 것이 아니다. 비국민이 당한 것은 월권도 전횡도 당연히 범죄도 아니다.

 

조국 일가족에게는 시민의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론해서도 안되고 반박해서도 안되고 무죄를 주장해서도 안된다. 재판의 결과가 그랬고, 그 전에 언론과 정치권 지식인사회의 태도가 그러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누려야 할 시민의 권리란 민주당 관련 인사들을 배제한 나머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노동자나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조차도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하면 당연하게 외면한다. 최근 여러 이슈들에 대한 자칭 진보의 태도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민주당에 대한 것이라면 검찰이나 법원이 뭘 어떻게 하든 정당한 것이다. 민주당에 반대하는 것이 진보의 정체성이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자칭 진보들인 것이다.

 

윤석열이 자신의 의혹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언론사와 기자를 고소했는데도 그를 비판하는 언론이며 자칭진보 정치권이나 지식인의 반응을 보기 힘들다. 언론의 자유가 그리 소중하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가짜뉴스도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에 대해서는 예외다. 하긴 그동안 그토록 숱하게 보수정치인들이 기자와 언론사를 고소고발해도 언론의 자유를 떠드는 기자새끼들이나 자칭 진보는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나경원이 기사 고발했다고 정의당이 논평 낸느 것 보았는가? 

 

그냥 피해의식이고 망상이 아니라 실제 사실인 것이다. 저들이 그동안 보인 행동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검찰의 무지막지한 인권유린에도 비판은 커녕 오히려 옹호하며 지지를 보낸다. 저들의 인권이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저들의 진보란 무엇을 위한 가치인 것인가. 자칭인 이유다. 저것들이 진보면 박정희는 체게바라다. 박근혜에 미안해진다.

시작은 어째서 진보와 보수의 자유주의가 그렇게 서로 다른가 하는 것이었다. 서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데 방향은 정반대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보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 즉 자유의 공유와 자유의 사유화란 것이었다. 그리고 사고는 확장되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진짜 기준 아니겠는가.

 

과거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보수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은 국가나 민족이란 것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사유물처럼 존재해 왔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예전 어떤 자칭진보가 민족주의란 근대 이후 시민사회란 것이 정착되면서 성립된 것이기에 전제왕조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개소리를 늘어놓은 적 있는데, 원래 최초의 민족적인 자각이란 것부터 인지할 수 있는 단일한 권위 아래 지배받으며 충성을 바치던 신민이라는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장 민족주의가 시작된 유럽만 하더라도 서로 언어도 문화도 서로 다른 이들이 프랑스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이고, 혹은 같은 프랑스어를 쓰면서도 벨기에인과 프랑스인으로 나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왕의 지배 아래 세금과 충성을 바치며 직접 함께 싸우기까지 했던 이들은 같은 프랑스인인인 것이고, 다른 군주의 지배를 받으며 경쟁하던 이들은 바로 옆마을이라도 다른 민족이어야 했던 것이다. 독일어를 쓰고 오랜동안 독일인들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해 왔던 알사스 로렌의 주민들이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난리를 치던 내용이 한때 교과서에도 나왔던 '마지막 수업'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이란 정체성으로 시작된 일본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까지 천황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은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나 혹은 독재자, 아니면 지배신분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을 위해 충실히 세금을 내고, 그래도 모자르면 기부도 하며, 당연하게 전쟁이 나면 병사가 되어 목숨걸고 싸워야만 한다. 그러라고 생겨난 것이 국가주의다. 그러라고 생겨난 것이 민족주의란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민족이 개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케네디의 '국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지보다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은 그래서 미국식 애국주의를 압축한 한 마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보라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사유화한 기득권과 맞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고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해가 되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진보를 대표하는 가치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었다. 특정한 개인이나 세력이 독점한 국가가 아닌 민족이라는 보다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을 통해 구성원인 개인들의 공동체를 가치로써 추구하려 한 것이었다. 민족이란 어느 개인이, 혹은 특정 집단이 사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따라서 개인의 이해와 욕망이 반영되고 그것이 누적되어 어떤 관념적인 실체를 만들게 되니 그것이 개인들이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다. 그렇게 과념적 실체로써 구현된 공동체가 다시 국가에 투영되는 것이 진보의 국가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라면 당연히 개인의 희생과 헌신을 바라기 전에 먼저 공동체로써 개인을 위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은 사유화인 것이다. 그리고 공유화다. 공적 영역까지도 사유화하고, 사적 영역까지도 공유화한다. 이를테면 내가 내 자식을 때려죽여도 그 또한 부모로서 내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 또한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그 권리는 공적인 것으로써 공적 영역에서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개인으로서 자식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과연 공적인 영역에서 부모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정당한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자식을 부모의 자유 아래 방치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논의와 갈등은 이를 기반한다고 보면 된다. 하긴 기득권이란 말 자체가 이미 사회의 중요한 영역을 사유화한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다. 조고가 그런 것처럼 내가 나의 권위를 앞세워 말이라 하면 말이 되는 것이고 사슴이라 하면 사슴이 되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그랫던 것처럼 나쁜 새라 하면 모두가 달려들어 따지지 말고 참새를 멸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원래 전제왕정 시대에도 왕이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연구하고 개발해서 정교하게 다음은 뒤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법이 만들어지고, 윤리와 가치가 만들어졌다. 공동체의 의무와 그를 저버린 적들이 정의되었다.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의사이니 의사로서 의료행위를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내가 자본가이니 사업도 내 능력 되는 만큼 내 멋대로 해야겠다. 내가 장사꾼인데 내 물건 가지고 뭔 짓을 저지르든 상관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여기서 모든 판단과 결정과 실행의 기준은 그를 사유한 개인의 권리란 것이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내 마음,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내 권리다. 재판을 하면서도 증거와 증언을 채택하는 것은 판사인 내 임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강제로라도 그들이 가진 능력과 권리가 공동체를 위해 고루 쓰일 수 있도록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야겠다. 그게 바로 진보의 역사였다. 그래서 권력자가 제 마음대로 기준을 정해 재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성문법도 중요한 진보적 대안으로써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유화로부터 공유화로. 개인으로부터 보편의 공동체에게로.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개인의 이익과 권리로써 그것들은 보존되어야 한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구도가 바로 이해가 된다. 같은 자유주의를 주장해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같은 자유와 인권과 보편의 권리들을 주장하는대 그 방향은 저토록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 서로 비슷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을 민주당과 정의당의 행보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인가? 무엇보다 정 반대편에서 서로를 증오하고 있어야 할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저토록 돈독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단 한 마디 비판조차 없었다. 윤희숙과 이준석의 부동산투기 의혹에도, 윤석열의 검찰권 사유화에도 단 한 마디 비판조차 없더니 송영길에 대해서는 방역법 위반으로 바로 고발한다 한다. 작년 전광훈과 태극기부대의 광화문집회를 방역독재 운운하며 지지하던 그 집단이 저지르는 짓이다.

 

검찰권은 검찰에게, 사법권은 사법부에, 언론의 권리는 언론에게, 여성주의는 여성계에, 그리고 보수는 국민의힘이, 진보는 정의당이 각각 나눠 갖는다. 그게 정의인 것이다. 자신들이 기껏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시민사회활동을 통해 명성과 영향력을 키운 이유인 것이다. 뭐와 비슷하냐면 과거 중세유럽의 도시에서 각 길드가 서로 영역을 나누어 공존하던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 정당한 권리자로서 국민의힘은 보수적인 가치를 주장하고 정의당은 진보적인 가치를 주장한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노동자에 대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무어라 주장하든 자칭 진보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국민의힘에서 불거진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무수한 발언들에 자칭 진보가 침묵한 이유였었다. 반면 민주당은 사소한 발언 하나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원래는 분노했어야 하는 것이다. 검찰이 공적인 책무이기도 한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사유화하여 남용했다면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를 용납해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검찰이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전정권의 사찰에 면죄부를 주었을 때도 자칭 진보들은 침묵했었다. 사법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가해자들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을 때도 자칭 진보는 어떤 비판도 하지 않았었다. 마치 그것이 정당한 권리이며 검찰과 사법부가 판단하면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양 그냥 입다물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심지어 명백하게 범죄를 저지른 김학의에 대해서마저 검찰이 수사를 종결했는데 재수사를 시작했다는 이유로 그 당사자인 이성윤을 죄인으로 단정짓고 공격하고 있었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 나아가 법이란 자체가 실력으로 사법시험까지 합격한 검찰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이므로 침범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언론개혁에 대한 일관된 입장이었었다. 그리고 여러 이슈들에서 보인 태도들이기도 했다. 검찰이 뭔 짓을 했든 이 사회의 엘리트로써 노력과 실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므로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판부 역시 마찬가지고 언론 또한 다르지 않다. 보수정당으로 정당한 권리를 지닌 국민의힘이라면 어떤 혐오발언을 하더라도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의힘이 노동자나 세입자를 위해 한 마디 했으면 찬양받아야지 원래 자기 역할대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문제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민주당이란 정당을 사유화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당원과 지지자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 배제하려는 모습까지 보였었다. 내 당 내 마음대로 하는데 늬들이 뭔데 지랄인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저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런 이들을 견제하며 바르게 나아가려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이란 정치인들 몇몇의 사유물인가 보편적인 당원과 지지자들을 아우르는 공적인 대상인가. 전자로 인식하는 놈들이 한 무더기라면, 후자로 인식하고 노력하는 이들 또한 한 무더기인 셈이다.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과연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가? 과연 진보의 가치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보다 보편적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일 터다. 처음에는 피를 나눈 가족이었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이었으며, 서로 공유하는 점이 많은 또다른 누구였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장애인과 귀화인과 심지어 국적도 다른 외국인들까지. 종교도 사상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달라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데 묶일 수 있다. 더 크게 나아가면 세계시민이 된다. 세계시민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반도 시민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여성주의도 진보적 가치도 그 공동체 안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원래는 선배들이 추구하던 것이기도 하다. 민족이란 권위를 쫓는가, 아니면 민족이란 공동체를 추구하는가. 절대적인 권위로서의 민족이 아닌 함께하는 공동체로써 시민의 결사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직은 인간이란 한계가 그 너머까지 허용하지는 않기에 민족이라는 최대의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 가치가 보다 넓은 세계시민의 가치에 닿아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선거란 그런 것이다. 당장 이낙연이 이재명에게 지지율에서 밀리자 이것저것 가능한 모든 네거티브를 동원해서 어떻게든 지지율을 깎아보려 발버둥치는 것처럼 선거에서 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거라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으로 웃기다는 것이다. 이낙연의 네거티브는 정당한 검증이라며 지지하는 똥파리들이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이 문재인에게 했던 네거티브는 여전히 증오의 이유로 들고 있다는 것이.

 

삼국지에서 장수는 한때 조조의 큰아들인 조앙과 측근 전위를 죽이고 조조 자신마저도 죽음의 위기로 내몰았던 적이었었다. 그러나 속좁은 조비가 즉위하기까지 장수는 물론 그 모든 계획을 세운 가후 역시 조조 아래에서 큰 문제없이 관작을 받고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관중 역시 제나라 왕위를 다투던 시절 환공을 저격하여 목숨을 위협한 바 있었음에도 환공이 즉위한 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최고의 신임을 받은 바 있었다. 그것이 천하란 것이다. 천하를 이야기하는 위치에 있는 이라면 자신과 적대하여 싸운 상대라도 자신의 천하 아래 받아들이는 아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조위를 위협하던 촉의 명사들도 항복한 뒤 그대로 등용되어 오히려 더 큰 영화를 누렸었고, 심지어 사마의의 숙적이던 제갈량의 후손은 사마의의 후손이 세운 서진에서 조상의 후광으로 태수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있었다. 한때 적국이었지만 천하를 통일한 이상 그 모두는 자기 천하 아래 속하는 것이다.

 

하물며 민주주의 시대의 정당이란 것이다. 같은 정치적 이해와 목표를 공유하며 내부적으로도 끊임없이 서로 경쟁한다. 수많은 서로 다른 가지들을 경쟁하며 결국 원래의 이해와 목표 아래 단함하여 행동을 같이 한다. 경쟁하는 동안 때로 너무 거칠어질 수 있다. 때로 너무 거세고 사납고 무도한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일단 결론이 나오면 동지의 입장에서 승복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적이 아니지 않은가. 안희정이 그랬었다. 안희정 역시 경선 동안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상당한 네거티브를 했었지만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바로 차기 주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재명은 아니었던 것일까?

 

그게 문제인 것이다. 경선 도중 서로 네거티브를 했으니 저들은 적이다.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무리한 수단으로 모욕하고 음해했으니 저들은 절대 같은 편일 수 없다. 그러므로 저들을 동지로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다른 적을 선택하겠다. 김어준은 처음부터 대상을 잘못 설정했다. 적의 언어로 공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낙연의 반대편에 있는 지지자가 아닌 이재명을 지지하느니 차라리 윤석열을 지지하겠다는 자칭 문파들이었던 것이다. 같은 당의 동지를 지지할 수 없어서 명백한 적을 지지하겠다는 것이 과연 동지의 언어인가, 아니면 적의 언어인가? 아예 문재인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약속하고 대선에 나선 윤석열을 차라리 지지하겠다는 저 버러지 새끼들이 과연 진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고 민주당의 지지자일 것인가.

 

하여튼 별 이유를 들어서 민주당 정치인들의 꼬투리를 잡아 비하하고 비난하고 부정한다. 차라리 추미애보다 윤석열을 지지하고, 정세균보다 윤석열을 지지하고, 박용진보다 윤석열을 지지한다. 아무리 내가 박용진을 싫어해도 박용진이 당원들에 의해 대선후보로 선택되면 그에게 한 표 행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낙연을 제외하면 민주당 모든 정치인보다 윤석열이 낫고 오세훈이 낫고 홍준표가 낫고 이준석이 낫고 윤희숙이 낫다. 그러면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라 국민의힘 지지자가 아닌가? 조국 전장관의 억울함을 동정해서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그놈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문제는 그런 문파들을 등에 업고 그들이 좋아할만한 소리만 지껄여 온 이낙연의 정체일 것이다. 민주당 권리당원들이 바보가 아니다. 누가 동지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적의 언어로 이야기하는가는 충분히 구분한다. 문파들과 달리 지난 경선에서 있었던 네거티브는 대선과 함께 지난 과거로 잊혀진 것이다. 그동안도 이재명은 줄곧 민주당 소속의 유력정치인이었고 민주당의 가치에 충실한 언행들을 꾸준히 보여 온 동지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어떤가. 경선결과에 불복하겠다는 의지마저 내비치며, 경선에서 패배할 경우 지지자들이 상대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최소한 방관했고 부추겼다. 그리고 그런 이낙연의 행보 위에 추미애의 폭로까지 더해지며 이낙연의 뒤에 선 정치인들의 정체마저 밝혀졌다. 저들은 과연 동지인가? 같은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자인 황교익마저 네거티브의 소재로 삼으며, 어려울 때마다 민주당 정치인들을 도와 온 변호사 동지들마저 네거티브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 행동은 차라리 국민의힘의 그것에 가깝다.

 

지금까지도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재명을 마뜩지 않게 여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하필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까지 끌어들인 행위 때문이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선을 너무 넘었다. 그러나 결국 경선결과가 정해지고 이재명은 승복했으며 이후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서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크게 문제없는 행보를 보여 왔었다. 그러고서도 완전히 다 그 불만을 불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지금 나온 후보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후보이기에 지지한다. 그런데 그런 정도도 아니다. 이재명을 잡겠다고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와 지지자 전체에 피해를 주고 있는 - 심지어 그를 위해 국민의힘과 적대적인 언론마저 이용하는 행위를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그 결과인 것이다. 그냥 네거티브가 문제가 아니다. 네거티브의 질이 문제인 것이다. 김어준은 이낙연을 위해서 동지의 언어로 비판하라 했을 테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낙연의 행보가 지지자들의 선택을 결정지어 버렸다. 누가 적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동지의 언어로 이야기하는가. 그래서 이낙연은 이재명만을 이야기하고 이재명은 대한민국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재명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만을 떠드는 이낙연과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대한민국의 비전과 함께 이야기하는 이재명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원래는 짠단노선으로 보다 개혁적인 문재인 대통령 아래에서 적폐청산을 어느 정도 이루고 이낙연이 보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으로 이어나가는 구도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면 충분히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니 다음은 민주당 안에서 보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이 나오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지켜보니 문재인 대통령은 너무 온건했다. 반면 개혁대상일 적폐들은 너무 강경했다. 짠단이 아닌 단짠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이낙연에게도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윤석열 검찰과 사법부가 언론과 함께 손잡고 난장을 부리지 않았다면 문재인 대통령 다음은 보수와 안정이라는 애초의 계획대로 모든 것은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낙연이 180석 거대여당의 대표로 있는 동안 윤석열 검찰과 사법부는 더 날뛰었고 언론은 더 적대적으로 뭉치게 되었다. 이낙연의 오판이다. 하긴 이낙연에게 지지자란 그저 민주당이란 이유로 표만 주면 되는 괜히 말많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언론들이 보는 그대로 비국민들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이재명만 기회를 얻어 더 크게 되었으니 누구를 탓할까.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정동영이나 박근혜가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의 실정을 비판하며 여당 안의 야당으로써 보수층까지 아우르며 대선을 노려보겠다. 그것이 지난 1월 사면발언의 실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민심따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이낙연의 수준이다. 이번 정권에서 적폐청산을 마련하고 다음 정권에서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기대한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서 적폐청산은 커녕 적폐의 정체만 보고 말았으니 대중의 선택은 어떠할 것인가. 그런데도 손놓고 가만히 있다가 이재명만 욕한다.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 딱 똥파리들 좋아할 만한 소리다. 이낙연 자신의 판단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셈이다.

 

당원과 지지자들이 처음부터 다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보가 아니다.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무지렁이들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더 명징하게 살피고 판단하여 요구할 수 있는 실제 주체들이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 이낙연의 실책인 것이고, 모를 수밖에 없었단 것이 구세대 정치인으로서 이낙연의 한계인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는 국민이 아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민주당 정치인이 적지 않다. 참 한심한 꼬라지들이다.

오랜세월 민주당은 오로지 국민의힘의 대항마로서만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뭘 하겠다는 건지 몰랐다. 뭘 하려는지도 몰랐다. 도대체 저것들이 사람새끼이기는 한 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보수정당을 막으려면. 보수정당 하려는 것들을 어떻게든 막아내려면. 심지어 민주당이 여당이던 시절에조차 민주당은 스스로 존재하는 정당이 아니었다. 열린우리당이 뭘 하려는 정당이었고 결국 무엇을 해냈었는지 기억을 돌이켜 보라. 그보다는 지지자들도 한나라당 막으려니 열린우리당 지지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것 말고 민주당에 무슨 가치가 있었을까.

 

하여튼 이래서 정권부터 잡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개새끼 소새끼 해도 정권을 잡으니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더구나 원내다수당이다. 그래서일까? 보수정당에서 뭘 해보자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뭘 어떻게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 하려는 것을 막고 다시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게 저들이 정치하는 이유의 전부다. 윤석열이 왜 높은 지지를 받고 있겠는가. 문재인 죽이기 위해서다. 정의당이며 한겨레, 경향, 자칭 진보 지식인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것 말고는 자칭 진보 역시 다음 정권을 위해 내세울 어떤 아젠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의 민주당을 그렇게까지 싫어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이낙연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보라. 이낙연 당대표에서 물러나니 얼마나 많은 개혁법안들이 실제 상정되어 압도적으로 통과되고 있는가. 박병석이 하는 짓거리가 바로 이낙연이 당대표이던 시절 하던 짓거리였다. 책임지기 싫다. 책임질 일을 만들기 싫다. 그래서 지금껏 이낙연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책임질만한 어떤 입법행위도 이낙연의 당대표이던 시절에는 아예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이낙연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대선이 물건너간 것 같으니 이제서야 민주당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일지도.

 

어쨌거나 그래서 요즘 꽤 만족스러운 것이다. 별달리 할 말도 없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기를 포기하니 이러쿵저러쿵 떠들 이유가 사라졌다. 그렇게 한 발짝 씩, 어찌되었거나 정권 몇 번 더 잡고 원내를 계속 장악한 채 있으면 더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지 않겠는가. 지금 내 유일한 목표다. 정책 하나하나가 아닌, 법안 하나하나가 아닌, 재집권과 총선에서의 재승리다. 지금 국민의힘 하는 걸 보면 그래서 힘이 난다. 지금 국민의힘 지지율은 책임정당 민주당에 대한 반사효과다. 과거 민주당의 지지율과 성격이 비슷하다. 잘하고 있는 중이다. 이준석 화이팅이다!

정당이란 정치적 목표와 이해를 공유하는 결사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와 이해란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성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탄 승객들과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광주나 강릉으로 가고자 한다면 터미널에서 그쪽 가는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다만 부산에 도착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는 승객 개인마다 서로 다를 것이다. 더구나 승객들 스스로 결정해서 경로까지 바꿀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여러 의견들이 갈릴 수 있다. 일단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건 맞는데 정작 부산에 가까워지면 어떻게 이동하는게 자신의 목적과 이해에 부합할까.

 

물론 다당제라면 서로 다른 목적과 이해를 가지는 사람들끼리 무수히 쪼개져서 서로 정당을 만들어 공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당제 아래에서도 한 정당 안에서 세부정책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와 이해를 가지는 이들이 무수히 존재하며 그래서 정당 안에 또다른 정당인 '정파'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영국 보수당 안에서도 더 보수적인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미국 공화당 안에서도 사안에 따라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경쟁하게 된다. 누구의 주장이 더 옳고, 유권자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지는가. 그래서 어느 한 쪽이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들이 주도하여 당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정당내 정치 역시 정당간 정치만큼이나 치열해지는 이유다.

 

더구나 사실상 양당제라는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의미있는 정당이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거의 유이하다시피 하다. 정의당은 찌그래기고, 국민의당과 열린민주당은 두 거대정당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정치를 통해 실제 무언가를 이루려 한다면 두 정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정당이든 상관없다는 사람을 포함 단지 상대 정당과 맞지 않아 한쪽 정당을 선택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정치적 이해와 목표가 모두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국민의힘의 전신인 보수정당들은 내부의 다양한 주장들을 힘으로 찍어눌렀고, 민주당은 온갖 술수로 그 경쟁을 왜곡시켜 왔었다. 그게 문제였다. 정당 안에서 공정하게 경쟁이 이루어지며 국민의 이익이 충실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구조가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정치인의 이해가 국민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었다. 여기에 크게 한 몫 한 것이 또 언론이기도 했다. 제대로 사실을 보도해서 유권자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사실상 가짜뉴스에 가까운 왜곡보도로 그를 훼방놓고 있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진실을 꿰뚫은 국민의 선택이 민주당 내부의 경쟁에서 문재인 당시 당대표가 승리하여 문재인을 따르는 이들이 민주당을 장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과연 문제는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치적으로 같은 이해와 목표를 공유하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더 큰 문제는 과연 문재인은 자신의 지지자들과 모든 정치적 이해와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가. 그래서 경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문재인은 문재인의 정치를 하고, 문재인을 따르는 이들도 자기 정치를 하며, 지지자들 역시 유권자로서 자신들만의 정치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경쟁하고 타협하고 대립하고 양보하며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혼란은 필수적이다. 민주주의란 곧 혼란이다. 수많은 다양한 주장과 견해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다수에 의해 합의된 결론이 나오면 그에 승복하고 따른다. 

 

내가 이낙연을 싫어하는 이유다. 정확히 이전 김한길이나 주승용 조경태 류들을 싫어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언론의 악의를 너무나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다. 언론의 악의를 이용해서 지지자의 요구와 바람을 비틀고 당의 결정과 행동마저 왜곡해 버린다. 경쟁을 하기보다 편법으로 다른 힘을 이용해서 함정에 빠뜨리고 음해하여 저격하는 일을 일상으로 저질러 온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옳다 여기면 당당하게 밝히고 판단을 받으면 되는데 뒤에서 잡수작이나 부리며 말과 행동을 달리한다. 김어준이 개새끼인 이유다. 사정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지지자들이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왜곡된 결론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잘하고 있다. 이낙연은 잘하고 있다. 이낙연을 그렇게 공격해서는 안된다.

 

아무튼 조응천이나 유은혜나 김종민이나 박용진이나 개새끼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민주당 안에서 그만한 다른 입장과 견해가 존재하는 자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홍영표나 이낙연이나 설훈이나 노영래나 그런 놈들까지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민주당인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승리하는가? 누가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어 당에서 힘을 가지는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경선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이낙연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사법개혁을 주장해야 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끊임없이 다른 소리를 하면서도 결국 민주당은 언론중재법을 본회의에 상정하고 있었다. 정당 안에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럼에도 결국 누구의 의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 과정이 정당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당이 지지자의 눈치를 보며 지지자의 요구를 성실히 수행한다.

 

개새끼는 좋다. 씨발놈 씨발년도 좋다. 다만 그렇다고 당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개잡놈 버러지새끼들과도 경쟁하며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국 정치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과도 결국 경쟁하면서 누가 대한민국을 바르게 이끌어나갈 것인가를 경쟁해야 한다. 정의당이나 국민의당이 정당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수권정당으로서 두 정당에 지워진 책임이기도 하다. 때로 그런 호로버러지새끼들에게서도 민주당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찾을 수도 있다.

 

실망은 없다. 원래 민주당이란 그런 정당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전에 민주주의란 자체가 성인군자를 위한 정치체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갑남을녀 장삼이사 필부필부 오만 잡놈들이 모여 고만고만한 머리를 굴리며 이런저런 궁리를 해 나가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인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나아가는 방향이 옳다면 옳은 것이다. 조금 늦고 조금 헤매고 조금 비틀거려도 그래도 결국 목표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틀리지 않은 것이다. 민주주의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지금 민주당이야 딱 내가 생각한 오차범위 안에 있다. 개잡놈들임은 변하지 않지만. 하여튼.

추석이면 대목이라 대량의 추가고용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차피 최저임금에 일까지 힘든데 단기로 하려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위에서 직원들에게 호소한다.

 

"주위에 일할 만한 사람 있으면 말 좀 해 주세요."

 

바로 그동안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때마다 나왔던 지인찬스 논란의 실제 사례인 셈이다. 최저임금 얼마 올렸다고 온 나라가 들썩이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어차피 다들 최저임금이나 받는 자리들이란 것이다. 어차피 최저임금 받을 것이면 더 쉽고 더 편한 일자리가 좋다. 괜히 더 힘들고 더 수고스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런 일자리들 대부분은 뭘 해도 이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에 이직률도 높고 새로 사람을 구하려 해도 하겠다는 사람도 적다. 무엇보다 그런데도 일단 믿고 일을 시켜 볼 만한 사람을 채용해야 이후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이다. 당장 급하다고 아무나 고용했다가 뭔 사고를 칠 줄 알고.

 

구내식당 주방보조도 그런 경우다. 최소 수 십, 수 백 명 분의 식사를 때마다 준비해야 하는데 그 일이 절대 쉬울 리 없다. 무거운 식자재도 많고, 물기 가득한 공간에서 항상 손이 젖어 있어야 하며, 이것저것 번거로운 일들도 많다. 시설관리 역시 다르지 않다. 심지어 대부분 시설관리는 경비와 마찬가지로 밤낮을 바꾸는 교대근무다. 그러고서도 최저임금 겨우 받는 정도다. 그래서 항상 하는 말이 '최저임금 받으며 이런 일 하는 자체가 너무 신기한 일'이란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자주 바뀐다. 당장 작년까지 일하던 곳에서도 내가 그만두기까지 젊은 직원들 얼굴이 꽤 많이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당장 사람이 없으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급하게 사람을 구하려는 경우 공개적인 모집보다는 다른 경로를 통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전에 일하던 직장에서도 그래서 결원이 생기면 공개적으로 구인을 하면서도 기존의 직원들에게 넌즈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말하고는 했었다. 역시 같은 경우인 것이다. 공개적으로 구인광고를 통해 모집하는 것보다 알음알음으로 추천받아 채용하는 쪽이 빠르고 더구나 보증할 당사자도 있으니 믿을 수 있다. 어차피 더 긴 시간 동안 기존에 있던 직원들에 부담을 지우며 업무에 차질을 주기보다, 어차피 최저임금이나 받는 남들 하기 꺼리는 일에 믿을만한 사람을 채용하려면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니까 그래봐야 겨우 최저임금이나 받는 자리란 뜻이다.

 

어째서 정규직을 뽑는데 시험봐서 뽑지 않는가. 그러니까 주방보조나 시설관리나 경비나 뭔 시험을 어떻게 봐서 뽑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 생각으로 서울대에서 미화원을 대상으로 시험을 강요했던 것인데 결과가 어떠했는가. 그에 대해 어찌 생각들 하는가. 그렇게 추천을 받아 단기로 써보고, 그래서 쓸만하면 기간제 계약직으로 일도 시켜보고, 그래서 정말 잘한다 싶으면 무기계약 정규직으로 고용을 보장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래봐야 최저임금이다. 일한 기간에 따른 수당상승이 있을 수 있고, 정규직이 되었으니 정책에 따라 복지가 달라질 수도 있기는 하지만 어디 가서 뭘 하든 크게 다르지 않은 최저임금이나 겨우 받게 된다는 뜻이다. 법정근로시간대로 한 달 내내 일해봐야 200만원도 안되는 돈이나 겨우 받을 뿐이다. 그래서 정규직이 되어서도 그런 일들은 이직률이 매우 높다.

 

한 마디로 세상경험이 없는 것이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관련한 논란 대부분이 세상 경험이 적은 청년세대나 혹은 기자들, 아니면 계급적으로 서로 얽힐 일이 없는 정치인 사이에서나 불거지게 되는 것이다. 정규직이 된다고 급여가 더 오를 리도 없고, 같은 정규직이라고 보안원이 사무직으로 바뀔 일도 없다. 그냥 고용과 복지만 정규직에 준하게 되는 것 뿐 여전히 최저임금일 테고, 일의 고단함과 수고로움도 여전할 것이다. 그런데도 정규직이라니 대단한 신분상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정규직 시키려면 시험봐서 뽑아야 한다. 최소 몇 달을 해당 업무에 종사하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았을 텐데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일까. 현장에서의 경험보다 시험이 더 믿을만하다는 주장인가.

 

아무튼 그런 주장에 따르면 지금 직장에서도 불공정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돈도 적고 일은 힘들고 고용도 불안정해서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도, 그래서 필요한 인원에 턱없이 못미치는 사람만 고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도, 그럼에도 공정하게 시험봐서 성적순으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우리나라 실업률이 괜히 높은 것이 아니다. 특히 청년실업률이 30대 이전까지 매우 높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돈 받고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 그런 대우 받고 그런 조건에서 그런 일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들이 현실에는 너무나 널려 있다. 그런데도 급여도 너무 높다, 대우도 너무 좋다, 너무 노동자가 권리만 주장하고 있다, 마치 자기들은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이것이 현실이다. 사람을 구하려 해도 구하기 쉽지 않다. 최저임금만으로 사람을 구하려면 그만큼 애로사항이 있다. 더구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사람이 부족한 만큼 기존의 직원들은 더 크게 고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이 제대로 돌아가야 직장도 유지되는 것이다. 악은 대중의 무지를 선동한다. 맞는 말이다. 개새끼들인 것이다.

근대의 법은 사람이 아닌 행위를 처벌한다. 사람에게는 타인이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되는 고유의 존엄이란 것이 있기에 권력이 그를 침해하는 형벌을 임의로 정의하거나 집행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법이 처벌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이 아닌 그 행위여야만 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오래전부터 배우고 믿어 온 근대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행위에 있어서 반성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범죄는 행위다. 동기와 실행, 그리고 결과다. 그로 인해 누군가 피해입은 사람이 생겼고, 그로 인해 훼손된 공공의 가치와 질서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 실제하는 사실들이다. 실제 행위가 저질러졌고 그로 인한 결과가 생겨났다.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공동체는 권력의 힘을 빌어 물으려 한다. 그런데 사실 자체가 뒤바뀌지 않았는데 그저 피의자가 반성하고 사죄했다는 이유로 형량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뒤늦게라도 자기 잘못을 알고 반성도 했으니 형량을 줄여주겠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피의자의 태도가 형량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반성과 사죄가 없었다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하는 것도 피의자의 방어권을 인정하는 현대의 법체계와 심각하게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내가 무죄라 여겨서 무죄를 주장했는데 그를 이유로 형량을 올린다. 고의로 범죄를 저질렀어도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요구하는 사죄의 형식만 갖추면 형량을 낮춰 주는데 그를 거부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게 된다. 행위와 상관없이 권력기관을 대하는 피의자의 태도가 형량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과연 피의자의 범죄라는 행위에 대한 형량인가, 아니면 피의자의 태도라는 인격에 대한 형량인가. 아니 더 정확히는 피의자가 재판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재판부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예우를 갖추는가.

 

한 마디로 내가 기분 좋으니 형량을 낮춰 주고 내가 기분 나쁘니 형량을 더하겠다. 그러니 한 번 판사인 자신을 향해 자기 태도를 잘 결정해서 말과 행동을 보여 보라. 절대자다. 그리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의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 역시 피의자의 태도를 보고 자신이 결정하겠다. 그래서 실제 무죄여서 무죄를 주장한 억울한 피의자는 더 많은 실형을 살았고 오히려 진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했다는 이유로 더 적은 형량만 살게 되었다. 무죄를 주장했기에 표창장 위조는 징역 4년이란 형량이 나오고, 유죄를 인정했기에 그보다 더 끔찍한 살인과 사기, 성범죄들은 심지어 집행유예까지 나오고 있다. 과연 이런 것을 근대적 사법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전근대 조선에서 재판이 그러했었다. 법체계 자체가 매우 엉성했기에 재판관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많았었다. 그래서 재판관을 맡은 관리의 그때 충동이나 감정 여하에 따라 판결이 바뀌고 처벌도 달라지고는 했었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한다. 양승태의 사법농단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째서 현직 판사들은 그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 판결로써 그동안 밝혀진 사실들을 부정하려 들고 있다.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판사인 자신의 결정에 따라 재판정에 선 모두의 운명이 결정된다. 자기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누가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법치가 아닌 인치다. 최소한 한국 법정의 상황은 그렇다. 명징한 법률에 의해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판사 개인에 의해 피의자 개인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한국 사법체계의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이유다. 판사는 신일 수 없고 신이어서도 안된다. 판결은 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당연히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도 법에 의한 판단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 아닌 철저하고 체계적인 객관적 법체계에 의해 인간이 아닌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야말로 일제강점기의 유산이자 군사독재의 유산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재판부란 2등신민 조선인을 지배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총칼을 거머쥔 절대권력자의 하수인이었었다. 자신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니 군림해야만 한다. 그래서 멀쩡한 인간은 오히려 판사를 일찍 그만두고 이상한 놈들이 남아 대법원장까지 하는 것이다. 그게 현재의 한국 사법체계의 구조다.

 

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이상한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평소 너무 익숙하게 쓰던 말들을 귀로 흘려 들으며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더 자칭 진보들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 인문학적인 소양을 그리 강조하던 자칭 진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걸 그들이 몰랐을까? 그런데도 어째서 그들은 사법개혁에 절대 반대하는 것일까? 그들의 상식과 정의의 수준일 것이다. 우습지도 않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