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어째서 진보와 보수의 자유주의가 그렇게 서로 다른가 하는 것이었다. 서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데 방향은 정반대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보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 즉 자유의 공유와 자유의 사유화란 것이었다. 그리고 사고는 확장되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진짜 기준 아니겠는가.

 

과거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보수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은 국가나 민족이란 것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사유물처럼 존재해 왔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예전 어떤 자칭진보가 민족주의란 근대 이후 시민사회란 것이 정착되면서 성립된 것이기에 전제왕조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개소리를 늘어놓은 적 있는데, 원래 최초의 민족적인 자각이란 것부터 인지할 수 있는 단일한 권위 아래 지배받으며 충성을 바치던 신민이라는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장 민족주의가 시작된 유럽만 하더라도 서로 언어도 문화도 서로 다른 이들이 프랑스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이고, 혹은 같은 프랑스어를 쓰면서도 벨기에인과 프랑스인으로 나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왕의 지배 아래 세금과 충성을 바치며 직접 함께 싸우기까지 했던 이들은 같은 프랑스인인인 것이고, 다른 군주의 지배를 받으며 경쟁하던 이들은 바로 옆마을이라도 다른 민족이어야 했던 것이다. 독일어를 쓰고 오랜동안 독일인들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해 왔던 알사스 로렌의 주민들이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난리를 치던 내용이 한때 교과서에도 나왔던 '마지막 수업'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이란 정체성으로 시작된 일본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까지 천황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은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나 혹은 독재자, 아니면 지배신분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을 위해 충실히 세금을 내고, 그래도 모자르면 기부도 하며, 당연하게 전쟁이 나면 병사가 되어 목숨걸고 싸워야만 한다. 그러라고 생겨난 것이 국가주의다. 그러라고 생겨난 것이 민족주의란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민족이 개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케네디의 '국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지보다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은 그래서 미국식 애국주의를 압축한 한 마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보라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사유화한 기득권과 맞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고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해가 되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진보를 대표하는 가치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었다. 특정한 개인이나 세력이 독점한 국가가 아닌 민족이라는 보다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을 통해 구성원인 개인들의 공동체를 가치로써 추구하려 한 것이었다. 민족이란 어느 개인이, 혹은 특정 집단이 사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따라서 개인의 이해와 욕망이 반영되고 그것이 누적되어 어떤 관념적인 실체를 만들게 되니 그것이 개인들이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다. 그렇게 과념적 실체로써 구현된 공동체가 다시 국가에 투영되는 것이 진보의 국가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라면 당연히 개인의 희생과 헌신을 바라기 전에 먼저 공동체로써 개인을 위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은 사유화인 것이다. 그리고 공유화다. 공적 영역까지도 사유화하고, 사적 영역까지도 공유화한다. 이를테면 내가 내 자식을 때려죽여도 그 또한 부모로서 내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 또한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그 권리는 공적인 것으로써 공적 영역에서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개인으로서 자식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과연 공적인 영역에서 부모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정당한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자식을 부모의 자유 아래 방치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논의와 갈등은 이를 기반한다고 보면 된다. 하긴 기득권이란 말 자체가 이미 사회의 중요한 영역을 사유화한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다. 조고가 그런 것처럼 내가 나의 권위를 앞세워 말이라 하면 말이 되는 것이고 사슴이라 하면 사슴이 되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그랫던 것처럼 나쁜 새라 하면 모두가 달려들어 따지지 말고 참새를 멸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원래 전제왕정 시대에도 왕이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연구하고 개발해서 정교하게 다음은 뒤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법이 만들어지고, 윤리와 가치가 만들어졌다. 공동체의 의무와 그를 저버린 적들이 정의되었다.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의사이니 의사로서 의료행위를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내가 자본가이니 사업도 내 능력 되는 만큼 내 멋대로 해야겠다. 내가 장사꾼인데 내 물건 가지고 뭔 짓을 저지르든 상관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여기서 모든 판단과 결정과 실행의 기준은 그를 사유한 개인의 권리란 것이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내 마음,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내 권리다. 재판을 하면서도 증거와 증언을 채택하는 것은 판사인 내 임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강제로라도 그들이 가진 능력과 권리가 공동체를 위해 고루 쓰일 수 있도록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야겠다. 그게 바로 진보의 역사였다. 그래서 권력자가 제 마음대로 기준을 정해 재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성문법도 중요한 진보적 대안으로써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유화로부터 공유화로. 개인으로부터 보편의 공동체에게로.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개인의 이익과 권리로써 그것들은 보존되어야 한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구도가 바로 이해가 된다. 같은 자유주의를 주장해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같은 자유와 인권과 보편의 권리들을 주장하는대 그 방향은 저토록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 서로 비슷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을 민주당과 정의당의 행보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인가? 무엇보다 정 반대편에서 서로를 증오하고 있어야 할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저토록 돈독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단 한 마디 비판조차 없었다. 윤희숙과 이준석의 부동산투기 의혹에도, 윤석열의 검찰권 사유화에도 단 한 마디 비판조차 없더니 송영길에 대해서는 방역법 위반으로 바로 고발한다 한다. 작년 전광훈과 태극기부대의 광화문집회를 방역독재 운운하며 지지하던 그 집단이 저지르는 짓이다.

 

검찰권은 검찰에게, 사법권은 사법부에, 언론의 권리는 언론에게, 여성주의는 여성계에, 그리고 보수는 국민의힘이, 진보는 정의당이 각각 나눠 갖는다. 그게 정의인 것이다. 자신들이 기껏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시민사회활동을 통해 명성과 영향력을 키운 이유인 것이다. 뭐와 비슷하냐면 과거 중세유럽의 도시에서 각 길드가 서로 영역을 나누어 공존하던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 정당한 권리자로서 국민의힘은 보수적인 가치를 주장하고 정의당은 진보적인 가치를 주장한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노동자에 대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무어라 주장하든 자칭 진보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국민의힘에서 불거진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무수한 발언들에 자칭 진보가 침묵한 이유였었다. 반면 민주당은 사소한 발언 하나에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원래는 분노했어야 하는 것이다. 검찰이 공적인 책무이기도 한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사유화하여 남용했다면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를 용납해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검찰이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전정권의 사찰에 면죄부를 주었을 때도 자칭 진보들은 침묵했었다. 사법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가해자들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을 때도 자칭 진보는 어떤 비판도 하지 않았었다. 마치 그것이 정당한 권리이며 검찰과 사법부가 판단하면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양 그냥 입다물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심지어 명백하게 범죄를 저지른 김학의에 대해서마저 검찰이 수사를 종결했는데 재수사를 시작했다는 이유로 그 당사자인 이성윤을 죄인으로 단정짓고 공격하고 있었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 나아가 법이란 자체가 실력으로 사법시험까지 합격한 검찰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이므로 침범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언론개혁에 대한 일관된 입장이었었다. 그리고 여러 이슈들에서 보인 태도들이기도 했다. 검찰이 뭔 짓을 했든 이 사회의 엘리트로써 노력과 실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므로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판부 역시 마찬가지고 언론 또한 다르지 않다. 보수정당으로 정당한 권리를 지닌 국민의힘이라면 어떤 혐오발언을 하더라도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의힘이 노동자나 세입자를 위해 한 마디 했으면 찬양받아야지 원래 자기 역할대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문제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민주당이란 정당을 사유화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당원과 지지자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 배제하려는 모습까지 보였었다. 내 당 내 마음대로 하는데 늬들이 뭔데 지랄인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저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런 이들을 견제하며 바르게 나아가려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이란 정치인들 몇몇의 사유물인가 보편적인 당원과 지지자들을 아우르는 공적인 대상인가. 전자로 인식하는 놈들이 한 무더기라면, 후자로 인식하고 노력하는 이들 또한 한 무더기인 셈이다.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과연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가? 과연 진보의 가치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보다 보편적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일 터다. 처음에는 피를 나눈 가족이었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이었으며, 서로 공유하는 점이 많은 또다른 누구였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장애인과 귀화인과 심지어 국적도 다른 외국인들까지. 종교도 사상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달라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데 묶일 수 있다. 더 크게 나아가면 세계시민이 된다. 세계시민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반도 시민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여성주의도 진보적 가치도 그 공동체 안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원래는 선배들이 추구하던 것이기도 하다. 민족이란 권위를 쫓는가, 아니면 민족이란 공동체를 추구하는가. 절대적인 권위로서의 민족이 아닌 함께하는 공동체로써 시민의 결사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직은 인간이란 한계가 그 너머까지 허용하지는 않기에 민족이라는 최대의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 가치가 보다 넓은 세계시민의 가치에 닿아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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