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망한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황제인 숭정제가 도망치지 못하고 목매달아 뒈졌다. 자기가 못가면 태자라도 먼저 피신시켜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지만 그마저 의심병때문에 늦어서 태자가 반란군에 잡혀 죽고 말았다. 청군이라고 해봐야 중국 인구에 비하면 한 줌 밖에 안되는 소수인데다 당시 명의 경제력은 대부분 강남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제대로 정통성있는 조정이 단합해서 맞섰다면 최소 몇 대는 버티다가 잘하면 고토수복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도 태자도 없이 정통성없는 방계황족들이 저마다 황제를 칭하며 자기들끼리 싸우니 버티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단종이 왕위를 잃자 단종에 충성을 바치던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과 성삼문, 박팽년 같은 학자들이 대거 쓸려나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 종친들마저 줄줄이 죽어나갔고, 변방에서는 김종서의 뒤를 이어 여진족을 통솔하던 이징옥이 죽었으며, 심지어 일반 백성들까지 단종 복위에 휘말려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단종의 처가며 누이의 일족이 죽임을 당하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했을 것이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내쫓겼을 때도 그를 보위하던 이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갔었다. 그 가운데는 칠순의 정인홍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을 나랏님이라 부르는 이유다. 왕은 개인이지만 개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왕이 건강을 잃으면 나라가 흔들리고, 왕이 자손을 보지 못하면 정통성을 위협받으며 혼란의 원인이 되기 쉽다. 왕이 누구를 인척으로 맞아들이느냐에 따라 국사가 바뀌고 수많은 이들의 운명까지 결정된다. 그래서 공인인 것이다. 개인이지만 그 모든 것이 온전히 개인의 것일 수 없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조선만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왕조에서는 왕과 관련해서 사소한 사생활 하나까지 중요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절대왕정 시대에는 고위귀족이 왕의 배변을 검사하는 역할을 영광으로 여기고 맡은 일까지 있었다. 왕의 똥도 국가의 중대사이기에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에게 맡겨져야 하는 것이다.

 

민주화된 지금이라도 - 아니 오히려 민주화된 지금이기에 더욱 그같은 공적인 존재로써의 공인이란 본질은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국가마저, 국가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 모든 공적인 영역들에 대해서마저 군주로써의 권위와 권력으로 사유화할 수 있었던 당시와 달리 이제는 대부분 공적인 영역들은 공적인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국회의원이란 핏줄에 의해 세습되는 사유물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에게, 혹은 지자체장에게 주어지는 모든 공적인 책임과 권한들이 국회의원 개인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유물이 아닌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다수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그러한 지위와 신분과 권한이 주어지는 대상 또한 다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지금 국회의원이고 경기도지사고 대통령인 것은 그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 내가 임의로 쟁취하거나 거래하여 소유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당연히 모든 소유와 포기란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당장 조선의 고종이 일본놈들 꼴보기 싫다고 아무 대책없이 왕위를 내던진다 생각해 보라. 아니 아무리 태평성대라고 성종이 내가 책임지겠다 말하고 후계도 없이 왕위에서 내려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욕심없이 권좌를 내던질 수 있는 건 분명 미덕이지만 이후 왕위가 공백이 되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 할 수 있다. 그래도 당시 왕위란 왕 개인의 소유였으니 그럴 수 있다 치자. 약속했다. 내가 지금 여기 지역구민을 위해서, 여기 경기도민들을 위해서, 나아가 국민을 위해서 책임지고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약속하고서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 말했을 때 왜 비난들이 쏟아졌는가. 노무현 전대통령을 국회에서 무고하게 탄핵했을 때 어째서 국민들은 들고 일어났던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약속하고 지역구민들의 지지를 받아 국회의원이 된 이가 1년 조금 지나고 대통령이 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지역구민들과의 약속은 단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그토록 안철수측에서 비난을 퍼부었음에도 2012년 대선이 끝날 때까지 국회의원 자리를 지켰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민들과의 더 큰 약속이 있다면 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국회의원자리도 포기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역구민들과의 약속도 우선해서 지켜야만 한다. 그것은 당을 지지해서 선택했던 지지자들을 위해서도, 그런 지지자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당을 위해서도 중요한 약속인 것이다. 내가 당장 지지율에서 밀리니 일신하기 위해서 국회의원 자리를 내던지겠다. 그것을 단호하고 과감한 희생으로 여긴다는 것은 그로 인해 다시 재보궐선거를 치러야 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대표자를 갖지 못하게 되는 지역구민의 입장을 생각지 않는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국회의원 자리를 지역구민들과의 공적인 약속이 아닌, 그를 위한 공적인 책임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사유물이자 권리로만 여기는 것이다. 이런 놈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통령 자리를 무엇이라 여기게 될까?

 

태도의 보수란 말을 더욱 납득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며칠 전 썼다.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기준과 구분에 대해서. 국회의원을 사유화한다. 당대표를 사유화한다. 그리고 나아가 대통령까지 사유화하려 한다. 그래서 태도의 보수란 것이었을까? 국회의원은 내 것이다. 국회의원 배지란 온전히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나만의 소유인 것이다. 당대표이던 시절 당원도 지지자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 결정에 지역구민들은 배제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국민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국민을 가리키는 것인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는 게 아니라 바닥이 없는 모양이다. 그 무저갱에 전율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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