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진보 기준에서 광주에서 북한 공작원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악의적 가짜뉴스가 아니다. 단지 잘못된 근거에 의한 사실관계가 틀린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조봉암의 죽음도 그랬고, 인혁당 재판도 마찬가지였다. 악의를 가지고 가짜 뉴스를 만들어 다른 이를 고통받게 하더라도 그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써 주장할 정당한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언론중재법에서 정작 제제하고자 하는 대상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악의를 가지고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릴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뉴스는 물론 악의를 가지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려는 누군가의 의도에 편승한 경우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당연하다. 취재란 복수의 취재원을 통해 입체적인 사실을 구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일 단일한, 혹은 편향된 취재원의 증언만을 가지고 보도했을 경우 내용의 오류에 대한 책임에서 언론이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그동안 노조며 수많은 시민사회의 개인이나 단체들이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보도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주장일 것이다. 세월호만 하더라도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유가족들이 큰 고통을 느껴야 했던가. 하긴 세월호 오보에 자칭 진보언론들도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더이상 관심이 없다. 세월호를 가지고 정부와 여당을 공격할 수 없기에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노조 역시 마찬가지다. 노조에 대한 언론의 왜곡보도가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는데 유리하기에 오히려 더 반가울 수 있다. 그러므로 가짜뉴스는 정의다.

 

언론중재법으로 불이익을 당할 언론인만 볼 것이 아니라 언론의 가짜뉴스로 피해입고 고통받아왔던 수많은 이 사회의 개인들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사회적 약자도 있고 소외된 소수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자칭 진보의 여성주의는 지킬 가치가 있는 여성의 존엄만을 지킨다. 버러지들인 것이다. 역겨운 것들이다.

민주당과 관련한 사안은 별 사소한 것까지 꼬투리를 잡아 논평을 하던 정의당이 정작 윤희숙을 포함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부동산투기 의혹에 대해서는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진중권이나 경향일보 같은 부류들은 윤희숙이 면피하려 국회의원 사퇴라는 꼼수를 부리자 훌륭하다며 칭찬마저 아끼지 않는 중이다. 그동안 대선후보가 되겠다고 공약이랍시고 떠든 노동자에 대한 저급한 인식들에도 전혀 아랑곳않는 모습이다. 도대체 왜?

 

벌써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자칭 진보에게 진보란 정당한 집권자인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상태에서 자신들이 그들과 동류로써 발언하는 진보를 뜻한다. 원래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고 자신들이 속해야 하는 집단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사회적 약자에 있지 않다. 사회적 약자를 위할 줄 아는 기득권에 있다. 빈민들을 위한 자선사업 좀 한다고 빈민들을 업수이여기는 다른 귀족들과 굳이 적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이해와 정체를 공유하는 동류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찬탈자인 민주당과 국민의힘에 대한 판단 역시 저들에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되는 이들과 그래서는 안되는 이들, 바로 신분이고 계급이며 벽이다.

 

국민의힘은 그래도 된다. 민주당은 그래서는 안된다. 주호영이 23% 전세를 올려받은 것은 오히려 옹호해줘도 박주민이 새로 세입자를 받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월세를 올려받는 것은 용서 못할 죄악인 것이다. 나경원의 입시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조국만 문제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손혜원의 목포 부동산 구입은 범죄지만 윤희숙은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윤희숙이 실제 투기를 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윤희숙이 당면한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는가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칭진보는 철저하게 수구와 보조를 맞춘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달리 더 한정된 범위만을 조사했음에도 더 많은 사람이 투기의혹으로 걸려든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언론과 더불어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LH의 부동산투기를 가지고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던 이들이 KDI소속으로 세종시에서 투기를 한 의혹이 있는 윤희숙을 찬양하기 바쁘다.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신분사회란 것이다. 정체성이란 것이다. 그래서 정통성이다. 자신들이 진보를 주장해도 그것은 정당한 지배자 아래에서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정책을 현실에 펼치려 해도 정당한 지배자의 인정을 받아 그리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의힘에서 중대재해법을 돕겠다니 벌써 오래전부터 추진해 온 민주당은 무시한 채 국민의힘을 '노동존중의 정당'이라 찬양하던 것을 보라. 민주당의 중대재해법은 소용없다. 심지어 국민의힘이 중대재해법을 아예 반대해도 비판조차 없다. 국민의힘의 정체성이 그러하니 노동문제나 사회문제 사회적 약자의 문제 등에 대해 발언하는 것도 그대로 인정한다. 자칭 진보가 비판하는 것은 오로지 불의하게 정권을 잡은 민주당 뿐이다.

 

윤희숙의 투기의혹으로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윤희숙은 자신의 투기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는 와중에도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는 민주당에 분노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비판하는 자칭 진보 역시 언론과 더불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문재인 대통령 비판에는 더없이 용감하던 자칭 진보가 이번에는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조국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과연 저들은 진보인가?

 

진중권을 변절자라 정의당과 별개로 봐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동안 진중권과 정의당의 행보에 얼마나 차이가 있었던가. 진중권과 정의당과 한겨레와 경향일보 등, 그리고 혹은 홍세화니 김규항이니 하는 지식인 나부랭이들의 언행에 얼마나 차이란 것이 보이던가. 원래 그런 놈들이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인영이 제대로 말해주었다. 저놈들과 어울리는 건 똥통을 뒹구는 것이다. 버러지새끼들이다.

근대 이전의 귀족이나 지주, 자본가들 역시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작지 않았었다. 때때로 식량과 돈을 나눠주기도 하고, 자선병원을 지어 병을 치료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곤궁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기울이고 있었다. 단, 한계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힘없는 이들이 국가나 사회에 대해, 혹은 정의나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했었다. 그건 그들의 역할이 아니다. 자신들의 역할이다. 자신들의 책임이고 권리다.

 

그러고보니 공수처법 통과될 때 정의당에서 그랬을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공수처따위 필요없다. 노동자에게는 검찰개혁따위 아무 의미가 없다. 무슨 말인가? 노동자는 국가와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전혀 관심도 없고 가질 필요도 없다. 그저 당장 자기 입에 들어오는 것, 손에 쥐어주는 것, 피부에 와닿는 일상의 문제들만이 노동자들에게는 전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검찰이 뭔 짓을 하고 언론이 뭔 지랄을 하고 법원이 어떤 개수작을 하든 그것과 노동자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이미 관성화되어 있는 그같은 현실의 일들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것이야 말로 노동자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다. 차라리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환경을 개선하는 법안에 힘을 보태라.

 

그러면 과연 정의당이 그동안 노동자들을 위한 입법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왔었는가. 그래서 어이없는 것이다. 다 반대했었다. 최저임금이며 근로시간이며 대체공휴일이며 중대재해법이며 자신들이 주장한 원안과 조금만 차이가 있어도 그를 트집잡아 반대만 했을 뿐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 아닌가. 여러 개혁입법들에 대해 국민의힘과 협상할 때 국민의힘도 자기들 나름의 원안을 만들고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고 버티는 것으로 입법을 저지시키는 시도를 해왔을 것이다. 과연 자신들이 제시한 원안과 다르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양보도 타협도 거부한 채 반대만 일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그래서 그나마 정의당이 기득권에 대한 개혁으로 요구하는 재벌개혁의 선의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마저 완전하지 못하니 반대하겠다. 

 

그동안 내가 자칭진보에 대해 비판해온 연장선상인 것이다. 바로 그들이 속한 집단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언론의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단지 취재과정에서의 실수나 오류로 인한 틀린 뉴스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 이를테면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폭동을 주도했다는 주장이나 보도 역시 악의적으로 광주를 폄훼하려 하는 가짜뉴스가 아닌 단지 취재원이 그래서 나온 틀린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의 책임은 없다. 문제는 과연 그런 가짜뉴스를 누가 어떤 의도로 흘리겠는가 하는 것이다. 정의당이 진정 지키고자 하는 대상은 어디의 누구인가. 검찰개혁도 언론개혁도 사법개혁도 하여튼 기득권에 대한 개혁이란 개혁은 모두 반대하며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만을 앞세우는 그들에게 진정 위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일 것인가.

 

하긴 예정된 결과일 것이다. 그나마 자칭 진보 가운데서도 가장 기득권에 가까웠던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었었다. 페미니즘의 온상이 바로 이화여대다. 이화여대란 대학의 성격을 이해하면 자칭 진보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어째서 자칭 진보의 페미니즘은 진정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여성은 외면하는가. 노동자는 여성이 아니다. 비정규직 계약직은 여성이 아니다. 차라리 여성인 추미애보다 윤석열 오세훈이 여성주의의 정체성에 맞는다. 재미있지 않은가.

 

참 비열한 것들이다. 조국을 세상에 다시 없을 쓰레기로 매도할 때는 언제고 언론개혁 반대할 때는 조국의 말을 인용한다. 그것도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인용한다. 사람은 못돼더라도 괴물은  되지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괴물이라는 자각조차 없다. 그들이 누구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 보는게 드러나는 부분일 것이다. 그게 정의당이  정의당인 이유다. 자칭 진보가 자칭 진보인 이유다.

무기의 발달은 무기의 역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병사 개인을 무장하던 수준에서 국지적인 전술에 영향을 미칠 정도를 넘어 전쟁 전반을 지배할 수 있는 무기가 나왔고, 마침내는 무기의 존재 그 자체로 정치외교적인 역학이 움직이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핵무기일 것이다. 실제 사용할 일은 거의 없지만 보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달라지고,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보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가운데 보유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비슷한 무기로 전함과 폭격기, 핵잠수함, 항공모함등이 포함된다.

 

2차세계대전 이전 전함은 오로지 전함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거의 무적의 병기였었다. 그만큼 전함이 보유한 막강한 화력과 방어력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 어느 나라의 전함이 나타났다 하면 그 사실만으로도 주변국이 긴장하며 경계에 들어갔다. 항구에 틀어박혀 꼼짝도 못하는 소련의 마라나 독일의 티르피츠를 경계해서 어떻게든 격침시키려 독일과 영국의 공군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격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었다. 전함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니 그 존재만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이른바 현존함대전략이란 것으로, 덕분에 영국과 독일의 해군이 서로를 경계하느라 이렇다 할 큰 해전 없이 1차세계대전은 끝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의 등장과 항공투사무기의 발달로 인해 전함은 더이상 이전과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지만.

 

당장 중국이 서해에 구축함 수 십 척을 파견하는 것과 항공모함 한 척을 항해시키는 상황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우리 입장에서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이라는 주요한 전력을 우리의 영해 가까지 투사하는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공모함을 운용하는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그 피해와 손실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까지 감수해가며 항공모함을 우리 해역 가까이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상대의 항공모함을 격침하더라도 그 이후의 상황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우리의 경우 한미연합이란 고리로 인해 한국의 항공모함이 격침되면 바로 미국의 개입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냥 항공모함 한 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만한 각오와 의지와 역량이다.

 

그래서 항공모함은 정치무기인 것이다. 이만한 비싼 무기체계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가며 해당 지역에 파견한다. 보유한 공격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만한 나라를 상대로 그 이상의 상황까지 고려해가며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과연 그런 여러 요소까지 감수해가며 한국의 항공모함 전력을 상대할만한 상황인가. 더구나 항공모함 전력조차 감당하기 힘든 제 3세계의 나라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경향모라 하지만 한국 해군이 계획하고 있는 수준의 항공모함 전력조차 위협으로 여겨야 하는 나라들이 세계에는 오히려 더 많다.

 

더구나 문제가 그런 중요한 무기체계인 만큼 한미동맹이 있는데 우리가 마음대로 하기에는 정치외교적인 문제들이 적지 않다. 항공모함이 가지는 위력만큼이나 그로인한 영향이 자칫 미국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경우 미국은 그를 적절히 통제하려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만큼 미국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직접 움직일 필요까지 없는 저강도 상황에서는 한국의 해군을 적극 활용하려 할 것이다. 우리의 무기체계지만 동맹의 무기체계이기도 하다. 사실 그래서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 여기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허락 없이 과연 우리가 항공모함을 꿈꾸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항공모함보다 핵잠수함이 더 유용할 것이란 주장에 대한 반론인 것이다. 핵잠수함의 가치는 그 은밀성에 있다.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된다. 핵잠수함의 존재를 인지하고 경계하더라도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구체적인 사실까지 파악해서 대처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활용하기도 상대적으로 제약이 크다. 러시아가 일본을 압박할 때 핵잠수함이 아닌 폭격기를 활용하는 이유인 것이다. 오히려 눈에 보이고 실제 확인이 가능하기에 그 자체를 정치외교의 기호로써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항공모함의 이유다. 내가 지지하는 이유인 것이고. 항공모함은 정치무기다.

사람들이 정치가에게, 특히 리더의 위치에 있는 이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다. 실력. 자신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역량이다. 도덕성은 그 다음이다. 정확히 정치가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 역시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가 대중을 위해 온전히 그 역량을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마저 중간에 가로채려 할 수 있다. 그를 위한 역량도 실력이다. 그래서 도덕성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가에게 있어 최대 덕목은 무엇보다 대중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실력이어야 한다.

 

이낙연이 아무리 리더로써 자신의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들을 떠들어도 대부분 대중들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무려 180석 거대여당의 당대표까지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입법부인 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쩌면 대통령보다 더 큰 권한이 무려 1년 가까이 이낙연 자신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땠는가? 지난 1년 동안 이낙연은 그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검찰개혁을 제대로 해 노았는가? 언론개혁을 제대로 이루어 놓았는가? 부동산과 관련한 입법들은 어떤가? 정부에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바로잡을 책임이 입법부에는 있었을 것인데 그동안 이낙연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 보궐선거의 참패는 지난 1년 동안의 민주당의 행보에 대한 평가 성격도 있는 것이다. 민주당이 못해도 너무 못했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안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는 책임이 없다며 빠져나가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후 대선후보 경선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 또한 어디에도 없다. 나와 상관없고 다 주변이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일 뿐이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잘못만 들추려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겠는가. 이놈은 어떻게 해도 책임있는 자리에 앉을 인간이 아니다. 그럴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인간이다. 그래서 비교되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문제로 공격을 받더라도 그동안 결과로써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비전을 밝혀 온 이재명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재명이 이낙연보다는 낫다.

 

즉 이재명에 대한 네거티브를 하더라도 어째서 자기가 이재명보다 나은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져 있는 것이었다. 어필하려 해도 그동안 해 놓은 것들이 이재명이 보여준 것들과 비교되며 무색하게 만들고 만다. 윤석열 역시 마찬가지다. 정확히 지금 이재명의 차기 대통령후보로서의 높은 지지율은 다른 후보들과의 비교에 의한 반사효과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낙연보다는 낫다. 윤석열보다는 낫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영향을 준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놈들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이 더 나아 보인다.

 

하여튼 웃기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간이 거대여당의 대표가 되어서 아무것도 않고 있었다.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시도조차 않았었다. 거대여당의 대표로써 당이 이루어낸 성과들을 자신의 실력으로 삼아 앞세워서 경선이든 대선이든 임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이 이제와서 해내겠다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을 호구로 본 것일까? 거대여당의  대표일 때는 아무것도 않던 인간이 대통령이 된다고 뭔가를 해 낼 것이라 믿어 줄 것이라고? 경선이라도 깨끗하게 치렀으면 또 모른다. 도덕적인 문제라면 이 또한 작지 않다. 비호감도의 이유다. 한심한 주제란 것이다.

그러니까 딱 그런 놈들하고만 어울린 결과란 것이다. 2007년 대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당시 정동영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는 노무현만 줄창 씹었고,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나서는 BBK만 줄곧 떠들었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명확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저 보기 좋으라고 늘어놓은 공약이라는 이름들의 개별정책들만 있었을 뿐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국정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래서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정동영이 대통령이 되면 뭐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희망도 없는데 그나마 경제라도 앞세운 이명박을 제치고 투표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지금 이낙연에 대한 국민의 비호감도가 민주당 지지층에서까지 과반을 넘어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이낙연이 차기 대선후보로써 과반에 육박하는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이유 가운데 가장 컸던 것이 문재인 정부의 초대총리이면서 품위있고 안정적이면서도 친화력있는 특유의 언행 때문이었다. 얼핏 핵심을 꿰뚫는 신랄함과 함께 연륜을 드러내는 점잖음까지 느끼게 한다.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된 '엄중'도 당시까지는 그래서 호감의 이유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고 이낙연이 그동안 해 온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재명에 대한 네거티브 뿐이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오로지 이재명 깎아내리기에만 혈안이 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단지 대중적으로 유명할 뿐인 황교익을 제물로 삼으려는 무도한 모습까지 보여주었었다. 이 새끼 진짜 뭐하는 새끼인가?

 

심지어 경선이 한창인 와중에 경선의 결과에 대해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색마저 넌즈시 여러 경로를 통해 내비치는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사냥을 공공연히 공약으로 내걸다시피 한 윤석열을 차라리 지지하겠다는 자기 지지층에 대해서마저 경선의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다른 후보 흠집내기에, 그 과정에서 민주당 친화 유튜버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과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 지지자에 대한 린치, 그리고 경선불복에 대한 의심까지, 그런데도 과연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런 이낙연을 민주당의 대선후보로서 지지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국민의힘 지지층에서야 더욱 민주당 대선후보가 마음에 내킬 이유가 없을 테니 그 결과가 바로 전국민 62%라는 압도적인 비호감도인 것이다. 누구때문인가? 이낙연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이낙연의 주위에 어떤 놈들이 포진해 있을지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당시 정동영 주위에는 누가 있었을까? 물론 정청래도 있었다. 이재명도 있었다. 아마 이재명도 그래서 상당히 기시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정청래가 발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다. 아무튼 그 주류는 역시 당시 민주당의 구당권파들이었다. 바로 안철수 따라서 국민의힘 갔다가 지금 어디서 뭘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찌그러기들이다. 작년 이낙연이 복당을 추진하다 뒷구멍 수작질이나 부리던 그놈들이다. 당원과 지지자만 아니면 자기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믿던 놈들과 놈의 합작품인 것이다. 버러지새끼. 하여튼 꼬시다. 니 똥이다.

그러고보면 국민의힘은 항상 자기성향 스피커들을 너무 맹신해서 문제였었고 민주당은 너무 불신해서 문제였었다. 차라리 자기들에 편향된 언론보다도 더 극단적인 스피커들만 믿는 국민의힘에 비해 민주당은 그래도 자기들에 우호적인 스피커들보다 일방적인 언론에 더 신뢰를 보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자기들에 불리한 주장을 한다고 자기들에 우호적인 스피커들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크를 만드는 것은.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다.

 

황교익은 어찌되었거나 정치인이 아니고 당연히 이재명 캠프에 속한 이재명의 사람도 아니다. 그냥 개인이고 그나마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나름 유명인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임명의 절차나 자질에 있어 문제는 없었는가 따져 물을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개인의 성향이나 양심에 대해서까지 캐물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긴 이 또한 국민의힘이 잘하는 짓거리 가운데 하나다.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여 개인의 성향을 문제삼는다. 김정은 개새끼 해보라. 김정은이 개새끼든 뭐든 개인이 그런 것까지 검증받아야 할 이유따위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아무리 민주화된 사회라도 개인이 공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인과 대등하게 대결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은 개인이다. 그것도 정치인 개인도 아닌 집단을 이룬 캠프에서 한 개인을 상대로 온갖 막말을 늘어놓는다? 시민의 공복이라는 정치인의 자세로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단지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격에 대한 모독까지 서슴지 않으며 저지른다. 그런 놈들이 더 큰 권력을 잡는다 생각해 보라.

 

김어준 이 씨발놈이 경선이 시작되고 이낙연에 대한 비판여론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커지자 동지의 언어로써 비판하라 지랄한 바 있었다. 그런데 정작 동지의 언어가 아닌 적의 언어로 지지자들까지 싸잡아 공격하는 놈들은 어디의 누구인가. 하는 짓거리부터가 가장 민주당이 막나가던 시절에조차 차마 하지 못하던 짓거리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김한길이 저런 식으로 한 시민을 다구리놓았는가? 주승용이나 박주선이 그러고 있었는가? 손학규가 그랬을까? 하다못해 안철수도 그따위로는 놀지 않았었다. 이명박근혜나 당당히 그러고 있었다.

 

정도를 넘어섰다. 민주당에 대해 친화적인 스피커들부터 성향을 나누어 블랙리스크로 만들고,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의 지지자를 경쟁후보가 한 인사라는 이유로 언론을 이용해 린치하려 한다. 이낙연이 개새끼인 건 알았지만 이건 진짜 버러지새끼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그늘이 사라지니 이렇게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가. 캠프 관련자 하나? 자원봉사자 하나? 그런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리더란 자리다. 그런데 대통령? 똥이 웃는다.

당연한 것이다. 정통성 확실하고 대중적 지지가 높다면 굳이 미국이라는 외세에 기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기 힘만으로는 권력을 가질수도 지킬수도 없으니 미국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만이 아니다. 영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고, 프랑스도 그랬고, 중국도 그랬다. 자기들이 아예 다 뒤엎고 직접 지배할 것이 아니라면, 아니 직접 지배하는 경우에도 협력자는 필요했고 따라서 그 대상은 항상 자기들에 기대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분쟁 가운데 상당수가 그렇게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이 뿌려 놓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된 것들이었다.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미국이 괜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만 귀국할 수 있도록 강제했던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남아 있던 조선인들이 스스로 자기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한 자생적 기구인 건준조차 인정하지 않았었다. 한반도인들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과 지지가 아닌 친일파와 그들의 옹위를 받는 이승만을 앞세우려 했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지배에 협력했던 친일파들의 전문성보다는 역시나 한반도인들로부터 크게 반감을 사고 있었기에 미군의 지지 없이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그 취약성을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5.16 당시에도 장면이 아닌 박정희를 선택했던 것이었고, 12.12 이후에도 민주화진영이 아닌 전두환을 후원했던 것이었다. 명분도 정통성도 취약하다면 더욱 이용하기가 수월하다.

 

실제 독립운동가로서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이승만이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성과로 대중적 지지가 높았던 박정희의 경우 미국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의 의지대로만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장면 이후 5.16쿠데타를 지지했던 것이었고, 박정희 이후 민주화진영이 아닌 12.12 쿠데타를 지원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명분과 정통성에서 취약했던 박정희와 전두환은 미국 정부에 많은 것을 양보하며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손아귀 아래서 일본에 더욱 종속되어 가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현지인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더라도 역시 명분도 정통성도 지지기반도 취약한 정권일수록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다.

 

베트남도 그래서 망했던 것이었다. 베트남의 우파 인사 가운데도 호치민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대중적인 인망과 지지가 높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청렴하고 능력있고 무엇보다 베트남이란 나라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하던 인물이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아니 1공화국의 응오딘지엠부터가 상대적으로 덜 부패하고 능력도 확실한 인물이었으며 새로운 베트남을 그럭저럭 잘 이끌어나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응오딘지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지나친 압력과 간섭으로 인해 방어적인 독재로 나아가도록 떠미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을 몰아내기 위해 군부의 쿠데타를 사주한 결과 그나마 유지되던 남베트남의 체계와 질서는 사실상 붕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베트남을 마음대로 하겠다고 응오딘지엠을 몰아세울 게 아니라 적당히 협력하려 했다면 과연 베트남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응오딘지엠까지 경제력이나 행정력, 군사력에 있어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앞서는 상태였었다.

 

그나마 한반도의 사정이 나았던 것은 첫째 그래도 미국이 선택한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이 김일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무엇보다 조봉암의 제안으로 시작된 토지개혁의 결과 국민적인 지지역시 매우 높았다는 점일 것이다. 김일성의 명성이 이승만과 비교할 정도가 되었었고 조봉암이 없어서 여전히 지주가 농민을 수탈하는 구조였다면 한반도도 예외없이 베트남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패한 독재자로 전락했을 때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졌던 것이었고, 박정희도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는 가운데 측근들에 암살당했던 것이었다. 전두환의 군사정권역시 그 결말은 같았다. 명분도 정통성도 없는 부패한 권력은 반드시 국민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다만 차이라면 한국전쟁과 이후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미국의 많은 지원을 받으며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자발적 친미국가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미국이 그토록 다루기 불편해했던 이승만과 박정희가 결국 한국을 자발적 협력자로 남겨둔 공로자들이란 점에서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원한 반대편에서 미국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다.

 

자발적 협력과 지배와 통제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전자는 대한민국이 사실상 유일하다시피 하다. 그리고 후자는 거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었다. 남미에서도 미국이 앞세운 수많은 독재권력이 무너지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반미정권들이 들어서며 미국을 크게 곤란케 만들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다시 친미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그 정권의 수반이란 놈들이 거의 비슷한 놈들이라 여전히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한 나라의 사회의 악과 미국의 영향력이 등치된다. 그래서 그 악을 거부하고 배제하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반미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미국은 악이다. 사회의 악이란 곧 미국의 존재다. 그러면 미국 정부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가? 모른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미국에 북한 전문가는 없다고. 아시아 전문가도 없다. 미국에는 미국 전문가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을 제외한 각 사회의 저변민중의 의지와 힘에 대해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국제관계를 단순한 힘과 이해의 구조로 이해하고 그를 전제로 모든 계획과 전략을 수립한다. 민주주의란 미국의 가치이지 인류의 가치가 아니다. 국민이 스스로 존엄하며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미개한 야만인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가치가 아니다. 한국의 모델을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적용하기에는 그 주체인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를 신뢰할 수 없다. 무시한다. 배제한다. 그래서 항상 어딜 가나 뻔한 놈들을 앞세우고 그 대가를 치르고 만다. 배우지 못한다. 베트남에서도, 남미에서도, 불과 몇 년 전 베네수엘라에서 실패를 겪었음에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최대한 존중하고 고려해서 새로운 리더와 질서를 세우려 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 모른다. 실제 힘과 명분을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의 대중들을 이끌 인물을 선택해서 힘을 실어주었다면 이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능한 것을 넘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희미했다. 당장 탈레반이 수도를 공격해 오는데 필사적으로 맞서고자 하는 의지마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놈들만 선택한다. 탈레반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다. 대중적 지지가 높은 상식적인 인물이 상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데 심지어 미국은 탈레반과 맞설 유력인사들마저 무력화시키는 것에 앞장서고 있었다.

 

제국으로서 미국의 무능이다. 미국의 무능이기 이전에 이전과 다른 제국의 통치방식에 대한 숙제인 것이다. 문명의 차이가 이전처럼 확연하지 않다. 문명의 차이로 억누르기에 민족이라는 존재가 더없이 강고해졌다. 종교와 역사와 전통과 인식과 관념이 하나의 힘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 세계화란 그런 수많은 약소민족들에게도 통용되는 논리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긴 한국마저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리려 애쓰는 점이 미국이란 제국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할 것이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다. 어떻게 한국은 미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공산화가 되지 않고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모두 이루고서도 친미국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인가.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은 이후로도 계속 친미의 전도사들이었다. 미국이야 말로 자유고 평등이고 인권이고 민주주의 그 자체다. 반면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 대한민국은 가장 반미정서가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보호하고 후원한 결과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미래 또한 없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인정 없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전히 미국은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다.

그러고보면 내가 자칭 진보들과 논쟁하기를 싫어하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권위있는 누군가가 그리 주장한 적 있다더라!"

 

저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내가 뭐하고 있나 싶어진다. 서로 자신의 논거와 논리를 가지고 서로의 주장을 첨예하게 벼려나가는 과정이어야 할 텐데 느닷없이 외부의 힘과 권위를 빌려 나를 찍어누르려고만 한다. 네가 저기 모두보다 뛰어난가? 네 주제가 저토록 저명한 인사보다 더 대단한가? 논쟁이 아니다. 힐난이고 조롱이고 강요지.

 

지식인이라면 다른 사람의 주장과 논리를 가져다 쓰더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그대로 인용해 쓰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까지 자기가 온전히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있는 누군가의 주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옳다 여기기에 주장하는 것이다. 하물며 해당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검사의 수사나 판사의 판결을 절대적인 근거인 양 앞세우는 것이 과연 지식인이 할 일인 것인가.

 

진중권이 입시전문가들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논쟁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조롱이고 비아냥이었다. 판사가 그리 판결했으니 전문가들의 의견은 소용없다. 하긴 그래서 자칭진보가 더이상 검찰개혁이니 사법개혁이니 언론개혁이니 하는 개혁과제들에 최소한 침묵하거나 오히려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동안 정치권력에 의한 검찰의 수사나 사법부의 판단은 모두 옳았었다. 진보인사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서 어떤 잘못도 문제도 없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지만 검찰과 사법부를 등에 업고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과 법원이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론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하고 있었다. 진보적 가치가 우선인가?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하는 것이 우선인가? 진보의 정체성은 반민주당에 있다. 정의당이 선언했고 자칭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이 긍정했다. 그러므로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하는 한 검찰과 법원과 언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다하다 법원이 판단했다고 사실여부에 대한 논쟁조차 부정하는 지식인이란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기들이 떠받드는 텍스트를 읽어 본 적 없다고 아예 논쟁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놈들이 태반이던 것이 바로 자칭 진보였었다. 누가 그런 주장을 했으므로 그를 읽어 본 적 없으면 말할 가치도 없다. 그게 바로 엘리트라는 것들이다. 대개는 서울대거나 그 아랫줄의 명문대 출신들이 많다. 법원이라면 역시 서울대가 주류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감히 말조차 꺼내서는 안된다. 되도 않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에도 여전히 윤석열과 최재형에 대한 기대를 자칭 진보가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대 출신이고 사법고시까지 합격했다면 뭘 해도 잘할 사람들이다. 뭘 해도 전문가 이상이 될 것이다. 이미 말한 바 있다.

 

진중권이 원래 저런 수준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자칭 진보 가운데 나름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인물이라 여기고 있었다. 스스로 지식인이기를 부정한다. 그냥 엘리트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정의당의 정의란 그 정의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자기들은 대중을 이끄는 존재이지 대중과 하나가 아니다.

 

그러고보니 기억난다. 역시 좋은 대학 다니던 자칭 진보였었다.

 

"스스로 대중의 하나로 여기려 한다."

 

논쟁 도중 나를 비난하려 꺼낸 말이었다. 너는 그냥 일반 대중이다. 일반 대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 진중권만이 아니다. 저놈들을 싫어하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역겨운 것들이다.

 

1990년대 초반 여성이 어떻다 말하면 바로 욕부터 들어야 했었다. 여성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것조차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이라 여겨졌었다. 여성성이 어떻고, 여성의 우월함은 어디에 있고, 그렇게 강한 여성을 묘사하겠다고 남성화시키는 것조차 여성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써 대상화하고자 하는 시도로 여겨졌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국 같은 인간이다. 개인의 차이가 있을 뿐 성별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지금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감수성은 어떠한가.

 

여성들도 얼마든지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남성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성적인 의도 없이도 적당한 스킨십을 주고받으며 남성들과 부대낄 수 있는 것이다. 실제 90년대 당찬 여성들은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서로 가까워진 뒤이겠지만 남성과 여성을 굳이 구분하며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자체를 더 불편하게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의 기사도가 여성을 예우한 것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이 아닌 단지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있다면 여성들은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보트에 먼저 오를 것이 아니라 남성과 함께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런 여성들에게 여성은 약하고 섬세한 존재이니 말 한 마디도 조심하며 해야 한다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성과 남성을 특정하는 여성성이나 남성성 같은 개념은 성차별의 산물이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성차별 역시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성차별의 근거가 되는 성에 대한 단정과 인식이 강화된 때문이었다. 여성은 이렇다 남성은 저렇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차별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결과로 남성 역시 여성과 다른 의미로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남성은 어때야 하고 여성은 저때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벗어나면 남성도 여성도 아니게 된다. 성을 강요한다. 성을 강제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인지감수성이란 이름으로 남성들에게 여성을 특정하여 가르치는 것이 여성주의에, 정확히 성평등에 부합하는 행동일 것인가.

 

확실히 다른 점은 서유럽의 기사도나 신사도에 대한 당시 여성주의자들의 평가가 지금과 전혀 달랐다는 점일 것이다. 여성을 도대체 뭘로 보기에 그따위로 행동하는가. 차라리 조선시대의 성구분이 그나마 여성을 한 주체로 인정하려는 것일 수 있었다. 여성을 단순히 출산의 도구나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유교적 가치를 실천하는 주체로써 여기며 사회적 역할을 나누려 하고 있었다. 하긴 바로 그 기사도와 신사도의 시대에 남편의 아내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었고, 싫증난 아내를 목줄을 걸어 내다 파는 행위가 상식처럼 벌어졌었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을 보호와 배려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한 편 그 여성을 보호하고 배려할 주체로써 기득권 남성을 뒤쫓는 것은.

 

한 편에서는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남성들을 규탄하면서 한 편으로는 여성을 상대로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옹호한다. 검찰 출신이기 때문이다. 법무부 차관까지 지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의 후배들이 그를 위해 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찰로써 김학의를 수사한 행위에 대해 기소당한 이성윤은 나쁜 놈이다. 성인지감수성의 결론이다. 자격없는 이의 성추행은 죽어서도 갚지 못할 범죄지만 자격이 있다면 자격없는 여성에 대한 유린조차 범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인권만 보호한다.

 

그래서 지금의 여성주의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계약직 방송인인 여성 아나운서가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실직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남성인 검찰 지도부를 움직여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여성 검사들을 징계하려 하고, 또다른 성범죄 피해자인 여성의 피해사실을 의심한다. 당연하게 여성인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여성성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킬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약자인 여성들은 그러므로 여성을 규정한 성인지감수성의 대상에 포함될 수 없는 때문이다.

 

여성은 이렇다. 이런 존재다. 그러므로 여성은 이렇게 대해야 한다. 진짜 90년대 학교로 돌아가서 선배들에게 말했다가는 바로 매장되었을 개소리들인 것이다. 여성은 인간이나. 여성 이전에 한 개인이다. 개인의 발견이야 말로 근대화의 시작이다. 시대가 참 많이 바뀌기는 했다. 내가 여성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90년대 말부터였을 것이다. 여성이기에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여기는 쌍년들이 늘기 시작한 것은. 그런 것들이 여성주의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디 출신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일제와 군사독재에 부역하던 씨발년들의 그 학교다. 

 

성인지감수성이란 말 자체가 여성을 규정하고 정의하고 일반화하여 대상화하는 성차별의 산물인 것이다. 그 사실을 여성들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퇴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존재인가? 남성과 다르게 대우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동등한 주체로써가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서만 여겨야 할 존재인 것인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금의 여성주의인 것이다. 쌍년에 씨발년들 버러지년들이다. 욕도 쳐아깝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