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법은 사람이 아닌 행위를 처벌한다. 사람에게는 타인이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되는 고유의 존엄이란 것이 있기에 권력이 그를 침해하는 형벌을 임의로 정의하거나 집행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법이 처벌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이 아닌 그 행위여야만 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오래전부터 배우고 믿어 온 근대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행위에 있어서 반성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범죄는 행위다. 동기와 실행, 그리고 결과다. 그로 인해 누군가 피해입은 사람이 생겼고, 그로 인해 훼손된 공공의 가치와 질서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 실제하는 사실들이다. 실제 행위가 저질러졌고 그로 인한 결과가 생겨났다.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공동체는 권력의 힘을 빌어 물으려 한다. 그런데 사실 자체가 뒤바뀌지 않았는데 그저 피의자가 반성하고 사죄했다는 이유로 형량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뒤늦게라도 자기 잘못을 알고 반성도 했으니 형량을 줄여주겠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피의자의 태도가 형량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반성과 사죄가 없었다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하는 것도 피의자의 방어권을 인정하는 현대의 법체계와 심각하게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내가 무죄라 여겨서 무죄를 주장했는데 그를 이유로 형량을 올린다. 고의로 범죄를 저질렀어도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요구하는 사죄의 형식만 갖추면 형량을 낮춰 주는데 그를 거부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게 된다. 행위와 상관없이 권력기관을 대하는 피의자의 태도가 형량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과연 피의자의 범죄라는 행위에 대한 형량인가, 아니면 피의자의 태도라는 인격에 대한 형량인가. 아니 더 정확히는 피의자가 재판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재판부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예우를 갖추는가.

 

한 마디로 내가 기분 좋으니 형량을 낮춰 주고 내가 기분 나쁘니 형량을 더하겠다. 그러니 한 번 판사인 자신을 향해 자기 태도를 잘 결정해서 말과 행동을 보여 보라. 절대자다. 그리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의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 역시 피의자의 태도를 보고 자신이 결정하겠다. 그래서 실제 무죄여서 무죄를 주장한 억울한 피의자는 더 많은 실형을 살았고 오히려 진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했다는 이유로 더 적은 형량만 살게 되었다. 무죄를 주장했기에 표창장 위조는 징역 4년이란 형량이 나오고, 유죄를 인정했기에 그보다 더 끔찍한 살인과 사기, 성범죄들은 심지어 집행유예까지 나오고 있다. 과연 이런 것을 근대적 사법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전근대 조선에서 재판이 그러했었다. 법체계 자체가 매우 엉성했기에 재판관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많았었다. 그래서 재판관을 맡은 관리의 그때 충동이나 감정 여하에 따라 판결이 바뀌고 처벌도 달라지고는 했었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한다. 양승태의 사법농단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째서 현직 판사들은 그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 판결로써 그동안 밝혀진 사실들을 부정하려 들고 있다.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판사인 자신의 결정에 따라 재판정에 선 모두의 운명이 결정된다. 자기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누가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법치가 아닌 인치다. 최소한 한국 법정의 상황은 그렇다. 명징한 법률에 의해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판사 개인에 의해 피의자 개인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한국 사법체계의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이유다. 판사는 신일 수 없고 신이어서도 안된다. 판결은 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당연히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도 법에 의한 판단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 아닌 철저하고 체계적인 객관적 법체계에 의해 인간이 아닌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야말로 일제강점기의 유산이자 군사독재의 유산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재판부란 2등신민 조선인을 지배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총칼을 거머쥔 절대권력자의 하수인이었었다. 자신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니 군림해야만 한다. 그래서 멀쩡한 인간은 오히려 판사를 일찍 그만두고 이상한 놈들이 남아 대법원장까지 하는 것이다. 그게 현재의 한국 사법체계의 구조다.

 

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이상한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평소 너무 익숙하게 쓰던 말들을 귀로 흘려 들으며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더 자칭 진보들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 인문학적인 소양을 그리 강조하던 자칭 진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걸 그들이 몰랐을까? 그런데도 어째서 그들은 사법개혁에 절대 반대하는 것일까? 그들의 상식과 정의의 수준일 것이다. 우습지도 않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