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과 김학의 모두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더구나 김학의의 경우는 증거까지 확실했고, 피해자 또한 다른 누군가를 앞세우기보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직접 증언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원순은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진 바 없음에도 범죄자로 낙인찍혔고 김학의는 검찰의 1차 수사결과를 이유로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무고한 시민이 되어 있었다. 혐의라는 것도 박원순은 성추행이었던 반면 김학의는 권력과 폭력을 사용한 다수의 피해자에 대한 집단강간이었다. 어째서 이런 논리가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나올 수 있었는가.

 

어이가 없는 것이다. 아직 혐의가 확정적이지 않다며 박원순을 위해, 아니 최소한 박원순에 대해 안좋은 소리는 않으려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마저 2차가해라며 그 시신에 침을 뱉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마저 온갖 모욕과 조롱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박원순에게는 인권이란 없다. 시민의 당연한 권리조차 인정되어서 안된다. 가족간의 천륜조차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면 김학의는 어떤가?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덮어주고, 심지어 출국금지가 된 상황에 대해 수사하려 했다는 상황조차 의인이라며 포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학의는 보호받아야 하는데 박원순은 아니다. 자칭 진보도 자칭 여성주의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결같다.

 

박원순이 잘못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계속 검사를 했어야 했다. 검사를 그만두더라도 전관을 이용해 돈을 더 벌었어야 했다. 수 천억 재산에, 대형 로펌의 임원이거나 혹은 보수정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모욕을 겪었을까? 아마 그랬다면 광화문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에 아무 여성이나 붙잡고 강간해도 진정한 여성주의자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데 앞장섰어도 참된 노동존중의 진보인사라며 찬사를 들었을 것이다. 하필 민주당 당적을 가진 것이 김학의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김학의에 온정적인 기사를 쓰게 해주지 않는다고 젊은 기자들이 편집국을 들이받고 모든 언론이 그런 한겨레를 지지해주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선배기자들도 그런 젊은 기자들을 꾸짖기보다 승복하며 타협하고 있었다.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인정받아야 한다. 용인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자신들의 주인에게? 이 나라의 정당한 주인들에게. 길들여진 개인 것이다. 목줄 묶인 개처럼 항상 누군가를 바라보고 허락부터 구해야 한다. 그래서 박원순이 더욱 잘못 살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단지 수사만 받았어도 세상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되었는데 유죄판결까지 받은 이명박은 그 공과를 평가하려 하고 있다. 그것을 한겨레는 객관이고 공정이라고 당당히 주장한다. 자칭 진보 모두가 그런 논리에 동의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김학의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박원순은 비난과 조롱과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동안의 행적들에도 불구하고.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진보이고 정의이고 여성주의인가.

 

심지어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것이 청와대까지 위험하게 만들 중대한 범죄라 이야기한다. 박원순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중대한 2차가해인 것처럼 김학의라는 범죄자를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이 정권차원에서 책임져야 할 심각한 죄악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의 정의란 어디에 있는가. 저들의 진보와 여성주의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김학의보다 박원순이 악한 정도가 아니다. 김학의를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은 청와대가 무협의 결론을 냈던 검찰보다 더 악하다. 똥버러지들이란 이유다.

사회주의가 지나치면 전체주의가 된다. 자유주의를 넘어서면 자유의지주의가 된다. 법치주의의 끝에 사법권력이 있다. 그래서 진보는 오히려 더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세상을 옳게 바꾸고 싶다. 세상을 고루 보편적으로 정의롭게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강제력이 필요하다. 그 강제력을 긍정할 때 스탈린이 된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에 부정적이고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하고 학살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것은 정의인가?

 

자유를 위해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자유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 언론이 오보를 내는 것도 자유에 해당하는가? 언론이 자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하는 것도 언론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인가?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일상을 억압당하는 상황에서 자기들만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누리겠다면 역시 그 또한 자유라 할 수 있는가? 범죄혐의가 있는 사람의 출국금지조차 권한을 가진 기관에서 시행하면 안되었던 것이다.

 

법치주의를 이유로 수사하고 기소하는 검사와 재판하는 법원을 절대시한다. 감히 감시조차 하지 못한다. 비판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저 받아 옮기기만 할 뿐이다.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죄를 지어도 감히 판사를 탄핵해서는 안된다. 검찰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상관인 장관이 징계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 검사와 판사는 제대로 법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무식한 때문이다. 딱 시험 볼 만큼만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보고 나면 다 잊어 버린다. 진보는 그저 자신의 지적 허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와 비슷하니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쫓고, 자유주의와 비슷하니 자유의지주의를 추종하고, 법치주의와 얼추 같아 보이니 사법권력의 전횡과 농단을 용인한다. 그것이 진보다.

 

원래 수구는 그런 놈들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거의 상식처럼 그런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러면 진보는 무엇인가. 진보라고 하는 지적 도덕적 우월감이 더이상의 노력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 홍세화 아닐까.

 

 내가 최근 더욱 자칭 진보를 공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저들은 수구와 같다. 한겨레는 조선과 같고, 정의당은 국민의힘과 같고, 진중권은 신혜식과 같다. 아니 더 못하다. 저놈들과 같이 취급되는 것을 참아야만 하는 것인가.

 

진보가 진보가 아닌 이유다. 진보에는 진보가 없다. 정의당에 정의가 없는 것과 같다. 진보를 진보라 정의한 순간 진보는 정체하고 퇴보한다. 도는 실천이고 과정이고 진화다. 진보 역시 같다. 그 사실을 모른다. 웃기는 것이다.

성리학의 나라라는 조선이었지만 그러나 중기를 넘어가면 사대부 가운데 사서삼경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굳이 몰라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3대에 한 번은 과거급제자가 나와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바로 그 과거만 노리고 준비하는 기술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과거에 출제될만한 문제들만 모은 족보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그것만 공부하느라 정작 유가의 경전은 돌아보지도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시험을 통한 능력지상주의에 회의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 나부터 학력고사 시절 모의고사보다 무려 40점이나 오른 점수를 받은 경험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모의고사와 학력고사 사이에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점수만 무려 40점이 오르고 있었다. 시험은 능력인가? 운인가? 한 문제 맞고 틀리고에 등급이 갈리고 당락이 갈린다면 그 한 문제의 차이를 온전히 실력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칭기즈칸 시대 몽골에서는 말 잘 타는 것이 능력이었다. 말 잘 타고 활 잘 쏘면 그것으로 알아주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 중국 송나라에서는 사서삼경 잘 외고 시문 잘 짓는 것이 능력이 되고 있었다. 과학자 가운데도 날카로운 직관과 탁월한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최근의 추세는 반복된 실험에 질려하지 않고 데이터를 꼼꼼하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맥아더와 같이 자신의 직관을 믿고 과감한 도전을 하는 지휘관이 더 필요했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아이젠하워와 같은 관리형 지휘관이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있다. 그래서 진정 모두가 인정할만한 능력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기타를 잘 친다고 반드시 기타리스트로서 더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잘한다고 더 높은 인기와 많은 수입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는 중견배우보다 아직 연기도 어설픈 젊고 매력적인 신인배우가 더 높은 개런티를 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필 그 시점에 가장 평가받을 수 있는 재능을, 더구나 그것을 발현하기 좋은 조건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시험문제의 제출방식과 평가방식에 따라서도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시험 하나 잘 봤다고 과연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문제란 것이다. 시험이 능력이다. 결과가 능력이다. 그래서 결과를 얻었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덕분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더 노력을 않는다. 자칭 진보들이 진보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무지한 이유인 것이다. 자칭 보수들이 보수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무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는 능력이라면 보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제 보수는 그저 막말의 아이콘처럼 되어 버렸다. 국민의힘에 진짜 실력있다 여길만한 인물이 누가 남아 있는가. 자칭 진보 가운데 귀기울일만한 가치있는 주장을 내놓는 이가 누가 있는가. 그런데도 학벌과 학위과 전력이 방패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잘났다.

 

오세훈의 'v' 발언을 보면서 더욱 느끼는 것이다. 언론은 차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제 얼굴에 침뱉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기자놈들도 무식하기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시험이란 단지 과정이며 결과는 이후로 증명되는 것이다. 학벌이 아니라, 전력이 아니라, 시험의 결과가 아닌 실제 누적된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진보가 진보인 이유는 진보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류호정이나 장혜영 같은 얼치기들이 오히려 진보를 상징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래도 된다. 그만한 자격이 된다. 그러므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격이 안되는 너희들이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칭 사법부인 검찰과 법원이 아닐까. 엄밀히 사법부는 법원만을 가리킨다. 검찰은 행정부다. 그러나 법원 스스로가 검찰을 같은 사법부로 여긴다. 김명수가 필사적으로 검찰을 지키려 애쓴 이유였다. 같이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연수원생활도 함께 했었다. 동료 아닌가. 고작 시류를 잘 타서 선거로 당선되었을 뿐인 정치인들에 비해 자신들이야 말로 타고난 실력과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이른 이들이다. 감히 국회의원 따위가. 감히 대통령따위가. 감히 국민들 따위가. 그 오만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그리고 그런 오만조차 옳다는 언론의 태도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민주당의 중진 가운데 오히려 그런 이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이들은 또 무엇 때문인가.

 

능력지상주의라기보다 시험지상주의다. 시험을 잘봤으면 능력 있는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자격이 있다. 자격이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기자들이 조국 전장관의 일가족을 집요하게 들이파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험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시험이 정의고 시험이 진리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도 참 고생 많이 했었다. 대학에 가지 못했었다. 지금 대통령도 고작 경희대 출신이다. 노회찬도 고려대 출신이었었다. 웃기는 현실이다.

물론 이전에도 여성주의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적인 페미니즘의 시작은 역시 이화학당 학장이던 김활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활란이 어떤 인물인가? 김활란과 함께 활동하던 모윤숙, 박마리아 등은 어떤 성향의 인물들이었었는가? 특히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YWCA라는 여성단체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이 단체에서 어떤 식으로 대중문화를 억압하고 탄압해 왔는지 나이 좀 되면 거의 기억할 것이다. 성매매특별법 논란 당시 여성주의자들과 논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었다. 씨발 이년들 그쪽 종자들 아녀? 맞았다. 개신교와 여성주의의 콜라보는 진짜 지옥이다.

 

이른바 레디컬 페미니시트들이 주장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여러 여성주의적 정책이란 그래서 전혀 낯설지 않다. 원래 그런 종자들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만화책을 불태우고, 게임들을 불태우고, 오만 꼬투리를 잡아서 유해물로 낙인찍는다. 오죽하면 이진주가 좋은 만화상인가를 받게 되었는데 차마 못받겠다고 수상을 망설이고 있었겠는가. 그러면 그런 저들의 성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일제강점기부터 저들은 항상 친일 친독재 친권력 친기득권으로 거의 기생하듯 빌붙어 지내왔던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기생페미니즘 바로 자체였었다. 권력에 빌붙어 권력의 은혜로 여성의 지위향상을 이끌어낸다. 그를 위해 여성단체를 이끌고 여성을 동원해서 권력의 친위대 역할을 해 왔었다. 그 정신적 지주가 역시 반공을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개신교였었다. 당시의 여성주의란 여성 스스로가 실력을 키워 여성의 해방과 자존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닌 권력자와의 유착을 통해 법과 제도로써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독재권력이 물러나자 여성주의는 새로운 숙주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기생충은 숙주 없이는 절대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때마침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향상에 매우 우호적이던 운동권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향상은 진보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결탁했다. 마침 개신교에서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에 그 결합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보는 여성주의고 여성주의는 곧 진보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편한 동거였었다.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은 진보 가운데서도 상당히 극단적인 혁명주의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논리인 것이다. 그나마 여성을 사회적 약자라 여기는 이들의 경우 강제적으로 그들을 평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그런 전제가 사라질 경우 그들의 방식은 진보 내부에서도 논란이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그동안 진보진영 내부에서 여성주의자들과의 갈등 과정에서 여러 혐의를 뒤집어쓰고 축출된 이들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진보일 수는 없다. 그런데 여성주의는 진보다. 여성주의야말로 진보의 상징인 것이다. 진보는 곧 여성주의여야만 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진보진영에서 여러 성추문에 휩쓸려 사라진 이들 가운데 그런 논쟁에 휘말린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샌가 여성주의가 진보 전체를 대표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면 진보는 더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되었는가? 자칭 진보정당과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의 급격한 수구화와 여성주의의 진보독점과 과연 무관할 것인가?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메갈리아와 워마드일 것이다. 여성주의에서 그나마 이름뿐인 진보란 가치를 배제한 집단이었으니. 그들이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칭 진보들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인 것이다. 2012년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군새독재의 정통후계자인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2017년 탄핵 당시에도 마지막까지 박근혜를 지지하며 탄핵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메갈리아와 워마드였다. 문재인 재기해라. 문재인 대통령더러 성재기처럼 자살하라 외친 것이다. 왜? 박근혜를 내쫓고 당선된 남성 대통령이었으므로. 그러면 그런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한 자칭 진보들의 태도는 어떠했었는가? 오히려 그들을 제도권으로 받아들였다. 얼굴로 앞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이제부터 진보의 주류다.

 

원래 자칭 진보들이 가지고 있던 지적 허영과 개신교의 종교적인 엄숙함이 친권력 친기득권적인 한국의 기생페미니즘과 결합하며 지금의 노골적인 자칭 진보의 성향들을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류호정의 부당해고를 오히려 옹호하는 자칭 진보언론들을 보라. 저들은 원래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던 자칭 진보들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류호정에 이어 장혜영이 대표적 수구언론인 조선일보의 1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조선일보 1면이란 조선일보의 정치적 의도의 반영인 것이다. 왜 하필 조선일보는 반대편에 있을 정의당의 국회의원을 1면에 실어주고 있겠는가? 

 

양승태의 사법농단조차도 아무 잘못도 아니라는 한겨레라는 것이다. 아예 박근혜 당시의 국정농단마저 문재인 정부를 끌어들여 부정하려는 것이 지금 자칭 진보들인 것이다. 진보는 포섭되었다. 자칭 진보는 조선일보의 영향력 아래 있다. 자신감의 발현이다. 자칭 진보와 보수가 모두 조선일보의 의도대로 놀아난다. 실제 그러고 있기도 하다. 여성주의가 진보를 집어삼키고 마침내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여성주의에게 원래의 자리란 친일, 친독재, 친기득권의 기생페미니즘인 것이다. 조선일보가 봐주면. 국민의힘이 도와주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이 자신들을 알아봐 준다면.

 

지금에 와서도 정의당의 진보를 믿는 놈들이 있다면 뇌가 구더기거나 아니면 양심이 구더기인 것이다. 정의당 기준으로도 국민의힘은 노동존중이 맞는 것이다. 항상 말한다. 진중권은 변절한 적이 없다. 서민도 변절따위 하지 않았다. 원래 자칭 진보란 그런 놈들이었다. 한참 위에서 민주당과 민주정부는 굽어보며 조롱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그러면서 국민의힘과 조선일보에는 항상 약한 모습만을 보이고. 심지어 국민의힘은 성폭행과 성추행의 추문에 휘말려도 한 마디 비판조차 듣지 않는다. 어느 여성언론인도 그를 문제삼으려 않는다. 왜? 그것이 진실이니까. 정의인 것이다. 우습게도.

주류의 특권은 주어진 권한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전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찰이 수사권을 남용하고, 감사원이 감사권을 남용하고, 정치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고, 그래서 나경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자격을 가진 자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한 것인데 무슨 문제인 것인가. 그래서 최순실이 문제인 것이다. 최순실은 주류가 인정하기에는 너무 자격이 미달한 존재였었다.

 

류호정을 보면 윤석열 검찰이 떠오른다. 류호정이 보좌관에게 저지른 갑질들을 보면 검찰이 그동안 시민을 상대로 저질러 온 죄악들이 보이게 된다. 그만한 지위에 있으니까. 그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자칭 진보들은 검찰의 그같은 반인륜적, 반헌법적, 반가치적 수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것이었다. 심지어 윤석열을 차기대통령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었다. 한겨레가 류호정의 반노동적인 갑질행위를 옹호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정의당도 이제는 주류정당이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정의당이 법과 정의, 가치, 윤리, 도덕에 구애받으며 정치해야 하는가.

 

그래서 한 편으로 민주당을 더욱 얕잡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작년 경향이 대놓고 민주당 빼고 찍자는 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이 어디 감히 어쩔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보다는 조롱이었고 무시였었다. 늬들은 못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그 부족함을 비난하고 싶어 한다. 국민의힘의 몸에 묻은 똥은 권리니 무시하고, 민주당을 스쳐지나는 바람은 권리를 벗어났으니 비난하고, 

 

그러면 자칭 진보만인가? 물론 자칭 진보만은 아니다. 다만 진보가 누구와 닮으려 하는가. 누구를 쫓고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있는가? 자칭 진보언론들이 수구언론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자로서 마음대로 기사를 조작해서 현실에 개입하려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인다. 기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기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보인가? 그래서 진보란 게 당장의 현실인 것이다.

 

박범계 신임 법무부장관이 자기들 말 안 들어줬다고 바로 수사권으로 보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모습까지 잘한다고 지지하며 추종하는 자칭 진보들을 보면서 더욱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주호영의 성추행은 철저히 침묵하면서 죽은 박원순의 시신만 줄기차게 부관참시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진보인 것이다. 진중권과 서민이 아직 진보논객인 이유이기도 하다. 홍세화는 절대 보수정권에는 덤비지 못한다. 항상 그랬었다. 자칭 진보의 현실이다. 정체인 것이다.

원래 민주당의 뿌리는 김대중이란 거물의 명망에 기댄 지역정당에 지나지 않았었다. 김대중이 있으니 민주당이 있고, 김대중이 없으면 민주당도 없다. 그리고 그 민주당의 표란 거의 호남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당시 민주당 정치인들이 자기 정당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반면 지금 민주당 초선들이 사회인으로서 자리잡을 무렵 민주당은 대한민국 정치의 두 거대한 기둥 가운데 하나였었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까지 정권도 두 번이나 잡았고, 열린우리당은 처음으로 의회에서 과반의석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시작이야 어찌되었든 이만하면 보수정당과 견줄만한 대한민국의 주류정당이 아니겠는가.

 

그런 차이다. 감히 한겨레 사회부장이 국민의힘 원내대표에게 전화로 압박하거나 협박하는 따위의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고소고발하겠다 협박하면 똥닦은 휴지처럼 쓰레기통에 쳐박혀 꼼짝도 못하는 게 바로 한겨레 기자란 것이다. 그런데 감히 한겨레 기자 나부랭이가 민주당 원내대표에게는 초단위로 전화를 걸어가며 압력을 행사하려 한다.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당시에는 그래야 했었다. 보수정당은 언론사 사주들 불러서 어르고 달래고 자기 마음대로 기사쓰게 만들 수 있었지만 민주당 정치인들은 언론에 사정사정해야 겨우 악의를 뺀 기사 한 줄 나가고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런 시절을 겪어 왔던 자칭 중진과 초선의 언론이나 다른 정파, 지식인사회등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길들여진 것이다. 지금 정의당이 국민의힘의 눈치를 보면서 보수언론의 눈에 들려 필사적인 이유와 같다. 그래야 진정 인정받았다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정의당이 구태란 것이다. 민주당에는 민주개혁이 대한민국의 주류임을 확신하는 새로운 세력들이 들어섰지만 정의당에는 여전히 보수가 대한민국의 주인인 상태다. 정의당이 필사적으로 국민의힘에 '노동존중의 정당'이라는 찬사까지 바쳐가며 보수의 눈에 들려 발악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다. 이낙연을 비롯한 민주당 중진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초재선 젊은 정치인들의 행보란 것은. 자신감이다. 언젠가 유시민이 말한 태산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겨자씨만하게 쓴다는 민주당의 현실을 뒤집을 최초의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180석의 의석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래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언론이어야 하는데 민주당이 더 겁먹고 움츠러들고 있다. 바로 중진이란 놈들이다. 구시대의 타성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는 병신들이다. 어째서 나이먹으면 은퇴하고 뒷방으로 물러나는가. 너무 오래 정치를 하는 건 아닐까.

 

어째서 언론은 민주당에 대해서만 엄격한가. 아니 한겨레tv만 보더라도 자칭 진보들은 여전히 민주정부와 민주당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려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아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내가 김대중을 절반만 인정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민주개혁세력을 하찮게 만들고 말았다. 물론 주범은 김영삼일 것이다. 그래도 언론을 그렇게 길들인 책임에서 김대중이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찮게 보인다. 여전히 민주당이라면 하찮게만 여겨진다. 그래서 나경원에 대한 보도와 조국에 대한 보도가 다르다. 주호영에 대한 보도가 박원순에 대한 그것과 다르다. 그래도 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민주당 지도부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결과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뒤집으려는 이들이 있다.

 

젊은 피들에 당을 맡겨야 할 때가 되었다. 차기 대권도 50대 이하에서 나올 수 있었으면. 저들의 카르텔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세력 가운데 차기 대통령도 나올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늙으면 물러나야 한다. 더욱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게 되는 한 가지다. 늙으면 연금 받으며 노후를 보내는 것이다. 욕심들이 많다. 퇴물들이. 썩은 내가 난다.

자고 일어났더니 좋은 뉴스가 있었네.

 

삼권분립이란 상호견제와 공존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서로 남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때로 협력하고 때로 감시하고 때로 견제하면서 삼발이의 세 다리처럼 든든하게 국가를 떠받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정부와 입법부는 항상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고 책임을 물을 다양한 장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법부는?

 

그동안 사법부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었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판단에 대해 너무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행정부 내부의 징계에 대해서까지 사법부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었으니. 이래서야 무소불위의 옥상옥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사법부에 대해서도 행정부와 입법부 차원의 견제와 감시, 징벌이 필요하다. 바로 탄핵이다.

 

사법부가 사법부를 징벌할 수는 없다. 사법농단 재판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사법부가 검찰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입법부가 나선다. 국회의원들이 주어진 권한 아래서 현행법을 어긴 법관을 탄핵하여 징벌한다. 그것은 국민이 위임한 헌법기관으로서의 권한이기도 하다.

 

새로운 역사가 쓰여진다. 사법부는 무소불위의 언터처블의 존재가 아니다. 사법부도 얼마든지 다른 헌법기관들의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도 불온하고 불손한 수단이 아닌 정당한 권한의 집행을 통해서. 사법부에게만 사법부에 대한 징벌을 맡길 필요가 없다.

 

판사도 사람이다. 그런 만큼 오류도 많고 유혹에도 취약하다. 그런 판사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한다.

 

민주당을 지지하길 잘했다. 이러라고 표를 몰아주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바로잡혀간다. 최고다.

선거를 치르면 차라리 정의당과 민주당이 표를 나눴지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표를 나눌 일은 없을 것이라 그래도 믿었던 적이 있었다. 세상이 진보와 보수로만 이루어져 있다 여기던 시절이었다. 정확히 수구와 반수구의 구도만이 존재한다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면서 그보다는 상하의 수직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칭 진보는 수구와 더불어 저 높은 곳에서 무지한 대중을 계도하고 계몽하는 숭고한 존재들이다.

 

정의당 지지자들이 여기저기 출몰하며 개소리를 늘어놓는다. 그 가운데 압권은 역시 정의당 망하면 국민의힘이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것. 아는 것이다. 정의당 사라지면 자칭 진보들은 차라리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에 투표하려 할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정의당이 민주당과 표를 나누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작 정의당 지지자들은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표를 나누고 있다 여기고 있었다. 정의당 아니면 국민의힘 말고 투표할 정당이 있기나 한 것이다. 내가 그동안 이야기해 온 자칭 진보의 정체성과 너무 딱 맞아떨어져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진중권은 변절한 것이 아니다. 한겨레는 여전히 자칭 진보언론인 것이다. 그것이 자칭 진보의 정체고 실체다. 차라리 진보를 포기해야지 어찌 민주당과 민주정부에 유리할 수 있는 기사를 내보낼 수 있는가. 차라리 진보이기를 거부해야지 어떻게 민주당과 민주정부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언론으로서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인가. 말 그대로. 아직 저들에게 민주당은 불가촉천민 그대로인 것이다.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정의당에게 진정 지금 대한민국의 주류가 누구인지. 그를 위해서는 정의당에 해산 수준의 타격을 입혀야 한다. 정의당이 폭망하고 한겨레와 경향이 폐간되면, 아니 정의당이 수구메갈로 정체성을 바꾸고, 한겨레와 경향이 조중동의 따까리 역할을 - 그런데 이미 그러고 있잖아? - 하면서 연명하는 처지가 되면 알겠지. 자기들 주제를. 아니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악을 쓰고만 있을 뿐. 웃기는 짜가리들이다. 버러지들.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어째서 김종철이 국민의힘을 노동존중의 정당이라 불렀는지. 지금 돌아가는 정의당 꼬라지 보아하니 국민의힘이 노동존중 정당이 맞는 것 같다. 즉 정의당도 노동존중을 위해서는 국민의힘처럼 해야 한다는 것.

 

2중대 따위가 아니다. 그냥 전위대다. 국민의힘의 홍위병이다. 주호영 살리려고 당대표까지 쳐날린다. 김종철이 성추행을 인정하고 물러난 진짜 이유다. 그래서 수사도 필요치 않다. 진실이 드러난다. 진실이 무엇이든.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서 나온 한 마디가 또 논란이 되었다. 입양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숙려기간을 두고 서로 맞지 않으면 취소하거나 아이를 바꿔주는 등의 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 번 입양했으면 끝까지 책임지도록 해야지 입양을 취소하고 심지어 아이를 바꿔준다는게 말이 되는가. 아이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서라도 입양자격을 더 엄격하게 심사하고 한 번 입양했으면 처벌을 강화해서라도 끝까지 책임지게 해야 한다. 그래서 특히 양부모가 입양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데 법으로 책임지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입양아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보살피게 될 것인가.

 

현실은 현실이다. 이상이 이상인 이유는 현실이 사람들이 당연히 믿고 바라는 기대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도 아이를 입양하려는 양부모에 대해 엄격한 자격심사가 이루어진다. 벌써부터 입양 전에 잠시 함께 살아보며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숙려기간도 두고 있다. 그래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다. 자기 배아파 낳은 친자식도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내다 버리고 방치하는 것이 현실인데 하물며 전혀 상관없는 아이를 입양해서 함께 사는 것이다. 처음 아이를 입양할 때는 진심이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바뀔 수 있고, 아이를 기른다는 자체가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던 환상과 너무 거리가 멀어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억지로 함께 살게 한다고 그런 마음이 다시 바로 잡히겠는가. 이혼할 부부를 억지로 같이 살게 한다고 그들의 사이가 더 좋아지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듣기에 옳으니까. 아이를 한 번 입양했으면 끝까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듣기에도 참으로 옳은 말이니까. 

 

바로 그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파헤치고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고 지식인의 책무인 것이다. 이상은 어떤데 현실은 어떤가. 그렇다면 그 사이를 최소한으로 좁히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을 또 실제 실천으로 옮기는 이들이 바로 정치인들이다.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언론이든 지식인이든 보수정권 아래서는 현실만 찾고, 진보정권 아래서는 이상만 말한다. 그래서 진보정치인들은 항상 문제가 많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보수정치인들의 행동은 현실이 그러하고, 진보정치인들의 행동은 이상과 이만큼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보수정치인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고, 진보정치인들은 이상론적으로 사악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민주정부를 공격하는 이들이 앞세우는 주된 논리다. 같은 입시비리라도 - 심지어 입시비리인가도 분명하지 않음에도 연세대 교수들과 정경심 교수에 대한 판결을 비교해 보라. 정의를 주장해 왔으니까. 도덕을 말해 왔으니까. 진보와 이상을 외쳐 왔을 테니까. 괘씸죄가 더해진다. 반면 어차피 보수정치인들은 그런 주장따위 안 하고 있었으니까. 욕망대로 살자고 말하고 행동도 그리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모순은 정의와 도덕을 기준으로 민주당 인사들을 공격하는 것 역시 보수정치인들이란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진보정치인은 이상에 충실해야 하고 보수정치인은 현실에만 충실하면 된다.

 

자칭 진보들이 쉽게 보수에 포섭되는 이유인 것이다. 듣기에 옳거든. 당장 듣고 있기에는 정말 옳게 여겨지거든. 그래서 조국 전장관 일가족을 지금도 하나가 되어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인턴증명서의 내용이 완전무결하게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최강욱 의원이 유죄판결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인턴증명서에 한 점 오류도 거짓도 없이 정확하지 못했으므로 위조다. 그럴 거면 지금 기자새끼들은 죄다 감방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지성이다. 인간의 이성인 것이다. 이성 없이 본능만으로 쓸 경우 그런 당위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어째서 사문서위조라는 범죄는 형법에 없는 것인가. 이해할 머리도 능력도 의지도 안된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도덕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못하기에 그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완전하지 못한가? 어째서 그런 모순들이 발생하는가? 그러므로 그런 모순들을 바로잡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그것이 비판이다. 그것이 진실이며 대안제시다. 하지만 상관없다. 조국은 그 상징과 같다. 자신들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이다. 그러면 국민의힘은? 국민의힘은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정당이니까. 그러니 비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걸 논리적이라 생각하는 대가리가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만을 공격하며 국민의힘을 편드는 자신들은 옳다. 웃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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