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지난 정의연 논란 당시 자칭 진보는 선택했을 것이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에는 원래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과 외교적으로 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역사문제로써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이었고 후자가 정의연이었다. 그리고 자칭 진보는 당시 정의연의 내부사정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수구언론의 보도를 뒤쫓으며 선택을 했었다. 정의연은 버린다.

 

원래는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에 부정적이던 여론이 언론의 정의연에 대한 집중공격 결과 정의연을 부정하고 위안부협상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 십 년 간 이어져 온 수요집회며 소녀상까지 철저히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며 부정당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는가? 시작은 조중동이었지만 사정을 알면서도 철저히 그들의 논리를 쫓았던 자칭 진보에 있는 것이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게 더 괘씸한 이유다. 그 결과 위안부문제는 불쾌한 기억과 더불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하긴 그래서일 것이다. 최근 위안부 이슈에 대해 자칭 진보가 전처럼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오히려 한겨레는 일본의 입장을 고려해서 과거사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기사를 노골적으로 내보내고 있을 정도다. 무슨 의미인가? 반정부를 위해서라면 친일도 상관없다. 반정부를 위해서라면 위안부문제도 얼마든지 일본의 입장에 맞출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이며 언론의 공정성이고 객관성이다. 대단한 자칭 진보이지 않은가?

 

원래 자칭 진보의 입장이기도 했었다. 정확히 자칭 진보를 장악한 여성주의의 입장이다. 남성이 잘못이지 무슨 일본의 잘못인가? 조선의 남성들이 조선의 여성들을 팔아치운 것이지 위안부 문제에 무슨 민족까지 개입될 여지가 있는 것인가? 아주 오래전 자칭 진보들과 논쟁하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나쁜 것은 조선의 남자들이지 일본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정의연 공격에 앞장섰던 것일 수 있겠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옳았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더 나았다. 실제 성한용은 이명박이 유죄판결을 받는 날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장문의 글을 통해 드러낸 바 있었다. 노무현이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온정 가득한 단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솔직하게 이명박근혜시절이 더 나았다며 고백하는 기자도 있었다. 과연 한겨레 만이겠는가. 정의당도 이명박근혜 시절이 더 나았다. 저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다. 진심일 것이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려면 최대한의 사실에 최소한의 거짓만을 섞어야 한다. 확인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사실을 최대한 섞어야 사람들은 진실로 믿을 것이고 그때서야 최소한의 거짓말이 사실마저 거짓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더 많은 사실과 더 적은 거짓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이라 믿도록 만든다.

 

한 사람이 하면 거짓말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면 어느새 사실로 뒤바뀌게 된다. 문 밖에 호랑이가 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부정하고, 두 사람이 말하면 의심하고, 세 사람이 말하면 믿어 버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삼인성호다. 언론 하나가 독감 백신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고 하면 황색언론이라며 모두가 비웃을 테지만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독감 백신을 맞은 뒤 사람이 죽었다 하니 십 수 년 간 검증되어 온 독감백신이 한순간에 사람을 죽이는 위험한 약물이 된다. 그나마 한국 언론의 신뢰성이 바닥이라 별 일 없이 지나간 것이지 아니었으면 코로나19의 재확산 와중에 독감의 감염까지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KBS의 박대기 기레기가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로 혹시 모를 하나의 진실이 가려질지 모른다며 우려하는 트윗을 올린 것을 보았다. KBS의 뉴스가 어째서 그따위인가 한 마디로 설명해주는 트윗이었을 것이다. 99개의 거짓을 보도해도 하나만 사실이면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가짜뉴스를 사실처럼 보도하고 모든 언론이 따라가며 사실로 만들어 놓으면 99개의 거짓은 그야말로 99개의 사실이 되어 버리는 것 아니던가. 99개의 사실 가운데 하나의 거짓이 사실을 오염시켜도 심각한 상황인데 99개의 거짓을 언론의 담합으로 사실로 만들고는 그것을 하나의 사실과 섞는다. 그 해악은 어찌할 것인가.

 

KBS의 수신료를 절대 올려서는 안되는 이유일 것이다. 아니 아예 이 참에 수신료를 폐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따위 놈들이 공영방송에서 기자질을 하고 있다. 99개의 거짓에 하나의 사실만 보도해도 가치있다는 쓰레기들이 기자랍시고 취재도 하고 보도도 내보내고 있다. 그런데 수신료를 올리라고? 거짓을 사실처럼 보려면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가 그나마 해악이 적을 것이다. 과연 KBS의 뉴스에 그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그나마 자기 주장이 상당히 객관적이고 진실을 담은 옳은 주장이라 여겼으니 당당히 모두가 보는 공간에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박대기라면 대중 사이에 인지도도 낮지 않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긴 KBS만일까. 가짜뉴스를 내보내도 정부만 비판할 수 있으면 된다.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가짜뉴스라도 서슴없이 내보내야 한다. 그게 참된 기자정신이다. 자칭 진보 기자들이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인 것이다.

 

어째서 언론이 저토록 가짜뉴스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 민감한가. 당장 KBS부터 한동훈 구하겠다고 검언유착 보도에 가짜뉴스를 섞어 빌미를 주었던 전력이 있었다. 가짜뉴스에 대한 사과라고는 없던 KBS가 그때만은 유독 빠르게 사실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언론이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언론의 보도를 검증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저널리즘 토크쇼j도 알아서 폐지했었을 것이다. 그것이 KBS고 박대기라면 그 가운데서도 꽤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KBS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쓰레기에 미안할 정도다. 더러운 버러지새끼들일 것이다.

나는 정치인의 선의따위 믿지 않는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이나 양심이 아닌 오로지 욕망이라 믿는 편이다. 이른바 권력의지란 것이다. 내가 권력을 가지려는 이유, 내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그를 위해 내가 치를 수 있는 대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정치인 문재인에 대해 어떤 신뢰도 기대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사람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욕망을 전혀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 경쟁상대들이 박근혜와 안철수였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재인이 저딴 인간들만 못하겠는가. 딱 2012년까지 내가 문재인이란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지금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예 알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문재인이란 정치인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유시민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더 적극 동의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문재인에게는 흔히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어둠이란 게 없다. 사실 사람에게 어둠이 없으면 평면이 되어 버리기 쉬운데 오히려 어둠이 아닌 밝음으로 입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문재인 만은 욕망이 아닌 선의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앞서 '편'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노무현은 오히려 정치인으로서 보다 격렬하게 욕망을 드러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바들, 그를 위해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대가들에 대해 너무나 선명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빛이 너무 강해서 어둠이 아닌 것들마저 어둠으로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문재인은 담담히 자신의 목적보다 주어진 역사적 사명과 책무에만 충실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는 어쩌면 이 시대란 요구를 비추는 거울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담담하게 크게 요동치는 법 없이 그냥 일상처럼 지지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대한민국 정치사에 문재인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명한 권력의지 없이 권력의 정점에 선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경우일 테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대의 요구로 거대한 사명과 책무를 짊어진다는 것은 신화나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이고, 그런 바람을 거부하지 못한 선의가 자기 안에 그런 시대를 담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지지자들조차도. 똥파리들이 설치는 진짜 이유일 터다. 딱 자기들 수준에서 정치인을 이해한다. 문재인을 위해서 남경필을 지지한다? 잘하면 민주당을 지지해서 정의당에 표를 주겠다는 말까지 나오겠다.

 

이낙연에 대한 불만들을 곱씹다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리고 만다. 항상 민주당을 불편하게 욕하며 지켜보기만 하던 내가 당적은 버렸어도 민주당의 행보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민주당에 대한 신뢰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주당의 정치인으로서의 욕망이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에 닿아 있는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없이는 민주당도 민주당 정치인들도 없는 것이다. 과연 그 절망과도 같은 벽을 이낙연이든 이재명이든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의 조급함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란 이유다. 새삼 확인한다.

조국 전장관이 구상한 검찰개혁은 상당히 온건한 것이었다. 어차피 아직 경찰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검찰이 독점한 수사권 가운데 일부만 경찰에게 넘기고, 검찰도 실제 일선에서 일하는 평검사들의 지위와 권리 등 조직의 민주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정도만 되어도 검찰 내부에서 충분히 자체적인 개혁이 가능하다. 문무일이 참 개자식이기는 했는데 그런 점에서 교활하게 능수능란하게 청와대와 법무부와의 관계를 잘 조율하고 있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검찰은 알아서 열심히 잘 할 것입니다. 지지자들도 그런 검찰의 모습에 의심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적폐수사를 앞장서서 지휘했던 윤석열이 후임이지 않은가.

 

문제는 정치검찰로써 정치력을 십분 발휘하여 저 조국마저 농락했던 문무일과 달리 윤석열은 정치력따위 찾아볼 수 없는 그냥 일선의 수사검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워낙 한직만 떠돌았던 탓에 검찰총장으로서 정치검찰이 드글한 중앙에서 살아남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정치력을 학습하고 단련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었다. 칼은 뽑아서 휘두를 때보다 아직 칼집에 있을 때 더 위협적이다. 아무리 검찰의 권력이 막강해도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정권을 가진 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검찰도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살아있는 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해서 굳이 검찰조직이 피해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적당한 수준의 개혁이라면 오히려 검찰 스스로가 주도하여 명분도 얻을 수 있고, 얼마든지 정권이 바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탈을 쓴 멧돼지는 그동안 자기가 해 온 대로만 하면 대통령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이란 확신마저 가지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인 박근혜와 이명박을 기소해 감옥에 보내고, 대법원장마저 재판에 넘긴 자신들인데 두려울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 꼬라지가 난 것이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다. 적당히 이 정도 선에서 검찰과 타협을 봐도 좋겠다. 시작이 중요하지 처음부터 다 이룬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검찰 체면도 적당히 봐주고 현실적인 여러 사항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정도로는 지금 검찰이 하는 꼬라지로 봐서 너무 부족하다. 이런 정도 개혁으로는 검찰이 가진 무소불위의 힘을, 더구나 그를 이용한 온갖 부정과 비위와 범죄들을 예방하는데 턱도 없이 부족하다. 어찌해야겠는가? 그냥 검찰로부터 아예 수사권을 빼앗고 수사청과 기소청을 분리하자. 말하자면 덕분에 윤석열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검찰의 마지막 총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의 공일까? 바로 윤석열의 공이다.

 

한겨레가 발악하는 이유다. 한겨레 젊은 기자들이 대놓고 다른 보수언론까지 동원해가며 자기들 선배를 공격한 이유인 것이다. 윤석열을 지켜야 한다. 윤석열 검찰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해졌다. 공수처가 윤석열 검찰과 협력하겠다 하는데 윤석열 임기는 올 7월이면 끝이다. 그때부터는 다른 검찰총장이 윤석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과연 그때도 새로운 검찰총장은 윤석열처럼 그저 무식하게 들이받기만 하는 인물일 것인가. 차기 대권도 민주당에서 가져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금 윤석열처럼 정권교체만 믿고 마냥 정부와 여당과 적대할 수만 있을 것인가. 검찰 없이 언론따위가 무슨 수로 정부를 취재하고 감히 비판씩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제 검찰은 수사와 기소를 모두 마음대로 하는 조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정의당이 미쳐 날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석열 검찰이 그대로 있어야 자신들이 진보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보란 민주당을 공격하기에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어설프게 타협하며 끝날 뻔한 검찰개혁을 수사권의 분리라는 정도를 추구하도록 만든 최고의 공로자일 것이다. 아마 그것을 검찰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검찰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다. 윤석열이 자기 사람만 챙기며 검찰을 수단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면 검찰이 이런 상황에까지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원도 불만이다. 윤석열에 보조를 맞추다가 초유로 판사가 탄핵되었고 대법원장까지 탄핵 대상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애써 감춰 온 법원의 속내가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 법원이 정부와 여당에 정면으로 적대한다? 이재명이 대통령 된 이후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이재명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보다 과두정체제에서의 독재자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런 때는 또 유용해 보인다. 얼마나 피바람이 불까? 이재명의 높은 지지율에는 윤석열과 김명수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으로서도 상당히 큰 희생을 치른 결과였을 것이다. 하마트면 파로스의 승리로 끝날 뻔했는데 마지막에 검찰개혁법안으로 거의 완전에 가까운 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위험하고 부담스런 대상을 개혁하는데 조국과 추미애를 희생양으로 넘겼으면 상당히 남는 장사인 것이다. 전투에서는 윤석열이 이겼어도 전쟁에서는 검찰이 패했다. 그런 사실조차 아직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윤석열이고 한동훈인 것이다. 어쩌다 검찰에서 저런 정치력 고자들이 실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유형의 검찰총장과 그 측근들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검찰개혁을 완결시킨다. 최고의 인선이었던 것이다. 윤석열의 검찰총장 임명은. 그 끝이 보인다.

2012년 문재인은 그야말로 등떠밀리다시피 출마한 아직 야인에 지나지 않았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그저 민주진영에서 나오던 이야기들을 종합한 이상의 전혀 어떤 새로운 주장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진영에 마땅한 대선후보가 없으니 노무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이전의 수많은 대선후보들처럼 바람을 타고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인으로서 아무리 훌륭해도 과연 정치인으로서도 그만한 역량과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처음 문재인이란 인물은 내게 안철수와 동급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 문재인에 대한 내 평가가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된 것은 다름아닌 민주당 당대표 선거에 문재인이 출마하며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를 들고 나오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그동안 김대중 이후 민주당이 추구해 온 정책적 지향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동안 아직 누구도 구체화하여 말한 적 없는 문재인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민주당의 당대표로서 민주당을 개혁하기 위해 내가 그토록 꼴보기 싫어하던 민주당의 구태들의 공격에도 흔들림없이 밀고 나가는 모습에서 그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되어서도 무언가 남들이 못하는 것들을 이루어 줄 수 있겠다. 어쩌면 노무현보다도 더 능숙하게 굳건하게 내가 바라는 개혁을 보여줄 수 있겠다. 아마 당시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지지하게 된 유권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 기대해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구마처럼 느리고 답답하다고 비전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의 뒤만 따라갔던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멈춰서서 지지자들과 눈을 마주하며 머뭇거리는 모습도 거의 보여 준 적 없었다. 그냥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는 이미 정했고 그 과정에서 사소한 장애들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때로 그로 인해 걸음이 늦춰지기도 하고 때로 조금 멀리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방향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에까지도 40%를 넘나드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문재인이란 인물을 신뢰할 수 있다. 믿고 기대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교감에서 나오는 인정이 아닌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크고 단단한 그의 뒷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이었다. 동정을 구하지도 연민에 기대지도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대통령으로서 그 자리를 당연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낙연이 문재인과 같다고? 그래서 이낙연이 차기 대선후보로서 국민들에게 어떤 새로운 아젠다를, 자기만의 목적과 지향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는가? 그를 위한 자신만의 신념과 의지를 제대로 보여 준 적이 있었는가? 하다못해 문재인 대통령의 후광으로 유력 대선주자로 꼽하고 초거대여당의 대표가 된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조금 느려도 이낙연만 믿고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이낙연만 믿고 지지하며 뒤따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나 기대가 없다. 그래서 이낙연더러 그저 문재인 대통령의 뒤라도 열심히 잘 따라가라 주문하는 것이다. 자기 것이 없으면 남의 것이라도 잘 따라가는 것도 기술이다.

 

이낙연에게는 미래가 없다. 내가 믿고 기대할만한 어떤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믿었다. 그래도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따라서 가장 잘 이어받아 완성할 최적의 인물은 이낙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동안 별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이낙연에게는 없어도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있다. 이낙연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문재인 대통령만 잘 따라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재명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 막연한 믿음을 산산이 부숴 버린 것이 바로 '사면론'이었다. 하필 문재인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고작 전직대통령에 대한 사면이라는 시대를 거스르는 구태의 반복이었는가. 자칭 문빠라는 놈들이 그런 사면론조차도 대통령과 상의한 결과일 것이라 떠들어댔을 때는 어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대통령이 그따위 정치적 유불리를 위해 명백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그놈들을 사면할 인물로 보였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이낙연은 문재인과 같다. 문재인도 이낙연과 같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느리다고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신중하다고 과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성급한 임기응변에 기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옳다면 언젠가 당연하게 목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가 오해하든, 누가 자신에 적의를 가지든, 그래서 방해하며 막아서든 진실은 반드시 정의에 이르고 만다. 이낙연과 비교가 되는가? 아직 이낙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입장에서 가장 어이없는 주장인 것이다. 그것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라는 놈들 입에서. 이낙연따위가 문재인 대통령과 같다.

 

아직 내가 보기에 민주당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비견할만한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실력이 뛰어난 인간도 있고, 남달리 정의감과 행동력이 돋보이는 인물도 있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물도 있는데 그 모두를 아우르며 한 나라를 이끌 리더로써 모든 것을 맡겨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은 조금 더 자기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불안하고 두려우니 자꾸 다른 수단에 기대려는 모습을 보인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재명과 이낙연을 딱 반씩만 섞어서 두 배로 튀겨 놓으면 괜찮겠다 여겼었는데.

 

자칭 문빠, 흔히 문파리라 불리는 놈들의 한계인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이재명에 대한 증오심만 키우다 보니 정작 문재인 대통령마저 이낙연과 비슷한 급으로 낮추고 만다.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다고 남경필을 지지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다고 사면론을 지지하고, 심지어 그 사면론이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라는 국민의힘의 주장마저 답습한다. 대통령은 열외다. 이낙연과도 이재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유독 홀로 튀는 인물이란 것이다. 애써 비교하려니 그 격을 떨어뜨린다. 문빠가 맞기는 한 것인지. 웃다 죽을 지경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소련 영토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들과 독일 영토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평가가 다른 이유는 하나다. 소련군은 단지 독일군 영토에서 자신들을 침략하여 학살과 강간, 약탈, 파괴를 저질렀던 독일인들에 복수를 했던 것이었다. 반면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에 대한 자신들의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여지없이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오래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후손이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미치후사의 머리를 잘라 뱃머리에 걸었던 행동을 두고 너무하다며 비판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오다 노부나가가 자기 처남이기도 했던 아자이 나가마사의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어 연회에서 사용한 사실이 있었다. 그만큼 급박했으니까. 아자이 나가마사가 돌아서며 퇴로까지 끊기고 하마트면 오다 노부나가 자신의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복수다. 그만큼 나를 위험하게 만든 적이었기에 철저한 보복을 통해 그를 되갚아주려 한다.

 

적을 살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더욱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강력한 적을 철저하게 말살하여 미연에 예방하는 행위는 오히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세 척의 일본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키고 수 천에 이르는 일본군을 몰살시켰어도 누구도 그것을 전쟁범죄라 부르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의 민간인들이 일본군을 도와 미군을 살해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 민간인들 역시 적으로 간주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 수단 가운데 필요하다면 생명을 빼앗고 생활시설을 파괴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드레스덴 폭격은 끔찍한 비극이지만 당연히 전쟁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인 것이다. 도쿄대공습이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군인만이 아닌 민간인을 포함한 일본이란 국가 자체가 적이었고 따라서 그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민간일을 대상으로 한 공격 역시 정당화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질렀더는 민간인 학살이 나치 독일이나 구 일본제국군의 학살과 다른 성격을 가지는 이유다. 남경에서 일본군은 전혀 자신들에 위협이 되지 않는 중국인 민간을 상대로 그야말로 자신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한 학살과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다. 남경의 중국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그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살과 강간, 약탈, 파괴라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었다. 소련에서 나치 독일이 보인 행동 역시 유사했었다. 차라리 소련군이 자신들과 맞서 인정할만한 성과를 보였다면 그렇게까지 무심한 잔혹함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슬라브인은 열등하다. 러시아인은 자신들 게르만인에 비해 열등한 존재들이다. 차라리 분노다. 혐오고 증오다. 저런 열등한 존재들을 가만 내버려두고 있는 자체가 자신들에게 죄책감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베트남에서 한국군은 베트콩인지 무고한 일반인진지 구분조차 모호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직전까지 무고한 베트남의 일반인이었다가 한 순간에 베트콩의 일원이 되어 한국군을 위협으로 내몬다. 어찌해야 하는가.

 

만에 하나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인들이 더 두려워하고 긴장해야 한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열등한 대상들에 대해 학살을 저질러 왔지만, 한국인들은 적을 말살하기 위해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제거해 왔었다. 적이라 여기면 잔인해진다. 한 번 적이라 여기고 나면 무감각해진다.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인종적인 학살에는 죄책감이 있을 수 있어도 적에 대한 말살은 죄책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에 대한 양심선언이 그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이유였다. 적을 향한 모든 행위는 가혹할수록 정당하다.

 

적은 죽인다. 적은 말살한다. 적은 파괴하고 배제한다. 대신 적이 아니라 여기면 그때부터는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그랬었다. 아군이라 여기면 누구보다 친절하다가 적이라 여기면 누구보다 악독하고 가혹해진다. 인종적인 우월감에 기대 약자에게 더 가혹했던 나치 독일이나 구일본제국군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공산당은 적이다. 공산당에 부역하는 것도 적이다. 적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적은 적이고 오로지 아군만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베트남에서의 학살이나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을 이전의 다른 학살과 구분할 수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나치독일과 구일본제국군이 특별한 이유인 것이다. 아니 제국주의 이후 열강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저지른 범죄들이 이전과 다른 이유들인 것이다. 적을 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 적은 철저히 파괴하여 무력화시켜야 내가 안전할 수 있다. 그들은 적인가? 아니면 단지 무력한 약한 존재일 뿐인가. 항상 생각이 깊어지는 이유다.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 자칭 진보란 것들은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면서 정작 검찰과 법원, 언론, 그리고 보수야당은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일까. 오로지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이 권력비판이다. 심지어 이명박근혜 당시에도 이렇게 집요하게 지독하게 권력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정부에 대해 자칭 진보들이 비판이랍시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사람 몇이나 될까? 강준만이니 홍세화니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번 정부 들어서야 알았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사고와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뇌를 저놈들 수준으로 퇴화시켜보자. 스스로 자신의 뇌가 구더기라 최면을 걸어보자. 그리고 답을 얻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쉽게 혼동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절대 그럴 리 없음에도 그 절대란 단어마저 무색케 만든다. 권력과 권리를 혼동한다. 비슷하게 저울 권자 들어가고 ㄹ로 다음 음절 시작하니까 비슷하지 않겠는가. 다만 권력이라면 어쩐지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권리라면 마땅히 보호해 주어야 할 무엇으로 느껴진다.

 

사법시험 존치론을 주장하던 놈들의 논리를 돌이켜 본다. 시험 잘 쳐서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과 지위와 권력과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는 건 능력에 따른 권리에 해당한다. 그에 반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국민들을 속여서 표 많이 받아 얻는 선출직 따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검찰은 시험 잘 봐서 자기 능력으로 얻은 자리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국민들 잘 속여넘긴 대가로 얻은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비판해야 하고 권리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답이 나오는가? 보수정당은 원래 학벌과 스펙 좋기로 유명하지 않았는가. 그에 비하면 경희대 나온 대통령따위. 대형 로펌 출신도 아닌 인권변호사따위. 그것도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활동했다.

 

즉 자칭 진보들이 보기에 윤석열 검찰이 누리는 특권은 권리인 것이다. 라임 관계자에게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해도 그조차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보수정당 정치인들이 성폭행을 하든 성추행을 하든 노력 않고 시민단체나 만들며 시간을 낭비한 박원순 따위에 비해 훨씬 인정되어야 할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뇌물도 부정도 비리도 협잡도 그래서 검찰이든 법원이든 언론이든 보수정당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거만 잘 치렀을 뿐인 민주정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떠올려 보라. 한겨레가 권력비판 못한다고 이렇게 안달한 적이 있었는가.

 

한겨레를 비롯한 자칭 진보들이 필사적으로 검찰과 법원의 편을 드는 이유인 것이다. 아마 최순실이 아니었다면, 아니 박근혜가 서울대 출신만 되었어도 나라를 팔아먹어도 참된 진보라고 찬사를 늘어놓았을 자칭 진보란 것이다. 윤석열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뇌가 구더기가 되니 그 사고수준이 이해가 된다. 조선일보와 같아지고 싶다.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다른 것이 불만이다. 그 수준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안다. 나는 자칭 진보를 증오한다. 혐오한다. 경멸한다. 무시한다. 오로지 편견과 오해로 자칭 진보를 보려 하고 있다. 문제는 그래서 뭐 얼마나 잘못되었느냐는 것. 내가 자칭 진보에 대해 예언한 것 가운데 틀린 게 몇이나 될까? 거의 다 맞추지 않았는가? 나 자신도 편견과 오해와 감정의 결과라 인정하는데도 그렇게 쓴 글들이 거의 예언이 되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래 자칭 진보란 그런 놈들이었다. 20년이 넘어가는데 달라진 게 없다. 대단한 버러지새끼들이다.

장애인 미혼모들을 '비정상'이라 비하한 김종인의 발언에 대한 자칭 진보들의 태도가 흥미롭다. 여성들이다. 장애인들이다. 그야말로 이 사회의 약자이고 소수자들이다. 그런데 그를 비정상이라 말한 김종인의 발언에 대해서 자칭 진보들은 너무 냉정하고 침착하다. 심지어 김종인과 국민의힘의 해명조차 너무나 관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왜?

 

가짜니까. 거짓말이니까. 말했잖은가. 저들에게 진보란 자신을 치장하는 장신구 같은 것이다. 어쩐지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자신이 그럴싸해보여 그리 연기해 보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국민의힘이 가진 기득권이다. 그들이 그동안 누려 온 주류라는 위치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행도 성추행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영원한 비주류 민주당 뿐이다. 박원순도 국민의힘 소속이었으면 뭔 짓을 저질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하도 시끄러워 꽤나 논란이 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벌써 자칭 진보들은 납득하고 끝나 버렸네. 그런 정도의 사안이란 것이다. 국민의힘이니까. 민주당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놈들의 진보란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뇌가 구더기인 줄 아나. 민주당이었으면 다음 대선까지 끌고 갔다. 자칭 진보가 버러지인 이유. 사람새끼가 아니다.

한겨레를 포함 자칭 진보도 오래전부터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주장해 왔었다. 다만 현정부의 공수처와 검찰개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을 넘어 적대적이다. 공수처도 검찰개혁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저들이 비판하는 지점을 봐야 한다. 검찰 인사를 하면서 윤석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감히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을 징계하려 했었다. 감히 대통령이 그 징계에 결제까지 했었다. 감히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대해 왈가왈부 가타부타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엄하게 감히 입법부따위가 검찰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중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검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자. 감히 대통령도 검찰에 대해서는 손대서는 안된다. 검찰 인사도 마음대로, 예산도 마음대로, 입법부도 행정부도 검찰에 관여하지 말고, 사법부도 검찰이 마음대로 사찰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즉 검찰을 사법부의 위에 두어 행정부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사법부 위에서 검찰이 입법사법행정을 보도 감시하며 수사할 수 있도록 하자. 누구도 감히 검찰을 수사하거나 감사하거나 징계할 수 없도록 하자. 그러므로 검찰이 곧 공수처가 된다. 

 

무지렁이 국민따위가 선출한 권력은 무시한다. 어리석고 무지한 국민 나부랭이들이 선출한 권력이 아닌 자기 스스로 실력으로 쟁취한 검찰권력이 그 위에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석열 대권론 따위가 아니다. 대권 위에 검찰을 두어야 한다. 

 

최근 한겨레를 비롯한 자칭 진보들의 검찰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내려진다. 정부의 정책마저도 검찰의 허락을 받고서 그 용인 아래 추진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검찰의 밑닦개는 한겨레 자신이 될 것이다.

 

시험봐서 좋은 대학 들어갔고 기자까지 되었단 사실 하나가 유일한 자랑거리인 버러지들이라 그렇다. 아니라고? 그러면 기사는 왜 그따위로 쓰는데. 말과 글은 또 왜 그따위로 나오는데.

 

독자를 먼저 부정한 것은 한겨레란 것이다. 나야 일찌감치 탈출했지만 아직도 50대 남성 기득권이란 소리나 쳐들으며 신문 읽어주는 사람들은 그저 불쌍하달 밖에. 늬들은 위한 신문이 아니라는데도 굳이 찾아 읽어준다.

 

자칭 진보에게 검찰개혁이란 뭐다? 윤석열이 곧 검찰개혁이다. 윤석열과 그 가족, 측근들의 범죄들을 은폐하는 것이 곧 검찰개혁인 것이다. 그래서 김학의도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한겨레와 정의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다. 

과연 조선의 왕권은 약했었는가? 언제부터인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만 보면 왕과 맞먹으려는, 심지어 왕의 머리위에서 존재하는 권신들이 당연하게 악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권신의 존재와 맞서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의인 것처럼 대부분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실제 역사에서도 신하들이 왕의 머리 위에서 놀고 왕은 그런 신하들의 눈치나 보는 존재였던 것인가.

 

간단히 중국 전한의 선제가 곽광의 일족을 제거하기까지의 과정과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선제가 곽광도 아닌 그 자신들을 제거하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다. 이미 대부분 군권까지 곽광의 자식들이 쥐고 있었기에 그를 빼앗고 만에 하나 모를 반격의 여지까지 없애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많은 주의를 기울여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나가야 했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어떠했는가. 아니 그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과정조차 바로 당일 입궐하려는 흥선대원군을 막아서는 것으로 끝내고 있었다. 왕명이라는 한 마디에 안동 김씨는 조정을 이루는 여러 세력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심지어 전국의 서원마저 철폐될 지경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잘나서? 원래 조선의 왕권이 그만큼 강했던 탓이다.

 

심지어 안동 김씨에 의해 꼭두각시로 세워졌다는 철종조차도 한 번 제대로 화를 내면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마저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철종은 안동 김씨의 전횡을 묵인하며 그들의 꼭두각시 역할만을 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이 권력인 때문이다. 어째서 후한의 황제들은 그토록 환관들을 총애하여 국정을 혼란으로 몰아간 것일까? 환관이 사라지면 외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스스로 명문으로써 상당한 일족을 거느리고 세력을 이룬 외척과 황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환관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서 권력을 몰아주어야 하는가는 산수만 할 줄 알아도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아닌 환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고, 일거수일투족까지 아내나 자식이 아닌 환관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권력에 있어서도 환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을 나누고 부정과 전횡을 묵인하는 대신 오로지 황제 자신에게만 충성하게 만든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에게 어떤 충신보다도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환관이었기에 그것이 권력이 되어 전횡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권력이란 절대 혼자 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협력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한으로 여겼던 주원장이 정작 명을 건국하는 과정에서는 지주들을 위한 정책을 앞세워야 했던 이유였다. 덕분에 당시 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강남의 지주들이 주원장의 편을 들어 명의 건국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건문제를 동정하던 강남의 세력이 아닌 자신을 지지하는 하북의 유력자들을 택해서 영락제는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옮겼던 것이었다. 조선도 여전히 고려왕조를 지지하며 새로운 왕조에 반감을 가진 개경을 떠나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던 것이 아닌가. 권력과 이해를 공유하는 기반이 되는 세력이 있어야 권력 역시 안정되게 권력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런 친위세력의 도움 없이는 숭정제처럼 스스로 목을 매달거나 단종처럼 왕위에서 내쫓기고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을 가진 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권력을 지켜 줄 우군부터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켜 줄 우군이 없었기에 임기 내내 고립되어 온갖 공격에 시달리다 오욕속에 죽어갔던 노무현 전대통령과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을 비교해 보라. 낙하산이네 뭐네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행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여러 자리에 여권의 인사들을 임명한 행위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전리품을 나누지 않으면 누구도 함께 힘써 싸우려 하지 않는다. 이익이 없다면 충성도 연대도 없다. 공동운명체가 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동영이 그 전리품을 나누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직접 나누었다. 이낙연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가 민주당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상황이 이래서야 앞으로도 문재인 그늘에 가려 있을 뿐이다. 그런 불만에서 나온 오판이 아니었을까. 사면론은.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서 있는 동안에는 자리도 있고 이익도 있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치인들도 모두가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선다. 그래서 참여정부 당시에도 정동영의 뒤에 정치인들은 줄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숙종이 몇 번이나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숙청한 것이었다. 소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경종이 노론을 숙청한 이유이기도 했었다. 선조는 너무나 비대해진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서인과 손잡고 정여립의 모반을 이용하여 기축옥사를 일으켰었다. 다만 광해군은 선조에 의해 불안해진 자신의 입지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소수파에 불과한 대북에만 의지했다가 결국 서인과 남인의 연합에 왕위를 잃고야 말았다. 태종부터 세종까지 양성된 실무관료들은 서로 분열하여 단종을 지키지 못했고, 절치부심한 종친과 공신의 후예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영정조에 의해 사실상 당파가 사라지고 왕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줄세우기가 끝난 세도정치 시기 왕들에게 선택지란 무엇이 있었을까? 왕과 가까운 한양의 벌열들만이 사실상 관직과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 소수 가문들의 문벌화가 이루어지면 선택지란 결국 그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세력이 큰 안동 김씨를 등뒤에 세우면 감히 다른 누구도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라고 정조가 김조순을 순조의 장인으로 삼고 고명을 맡겼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철종과 안동 김씨의 관계는 중국 전한 선제와 곽광의 관계와 비슷하다 봐야 할 것이다. 전한 선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곽광의 선택 덕분이었다. 곽광이 소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추대된 창읍왕의 행실을 문제삼아 그를 쫓아내고 선제를 차기 황제로 선택했기에 그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 곽광의 권세는 감히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었고, 그런 곽광의 선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선제 역시 절대적으로 곽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곽광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의 즉위마저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곽광이 죽고 그 일족을 모두 주살한 뒤에도 곽광 만큼은 신원하여 제사까지 지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에 안동 김씨와 견줄만한 세도가가 없고, 바로 그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오른 만큼 안동 김씨의 권력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안동 김씨와의 공존은 필수다. 다만 그렇더라도 철종이란 존재가 사라지면 안동 김씨의 권세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실제 고종이 즉위하고 그렇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안동 김씨를 몰아내는 과정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안동 김씨를 대신할 세력으로 흥선대원군이 선택한 것이 바로 종친과 풍양 조씨였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안동 김씨의 상당수를 여전히 조정에 남겨두고 있었다. 즉 종친인 전주 이씨와 대비 조씨의 가문인 풍양 조씨에 기존의 안동 김씨의 신파, 여기에 더해 중전 민씨의 친정인 여흥 민씨까지가 모여 조정을 이루고 고종의 왕권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 정도 힘이 있으니 안동 김씨도 몰아내고 고종의 권력기반도 단단히 다잡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신하가 감히 왕의 눈을 똑바로 보고 심지어 막말까지 하는 드라마의 상황 같은 건 실제 역사에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역대 황제들보다는 못했다 뿐이지 조선의 왕권은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왕권이 약하다 하려면 왕이 언제든 내쫓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데 왕권이 가장 약했다는 철종조차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시작한 것인지 아주 드라마 볼 때마다 짜증나는 이유인 것이다.

 

영정조의 개혁이 오히려 조선을 약화시키고 쇄망의 길로 이르게 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당쟁이 사라지고 결국 왕을 중심으로 줄세워진 문벌만이 남게 되자 결국 왕과 특정 문벌과의 결탁이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조선을 지탱해 온 국가의 근본까지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세도정치의 시작을 연 안동 김씨의 김조순조차 정조가 어린 세자 순조를 위해 안배한 것이었으니. 당쟁이 문제가 아닌 당쟁이 사라진 이후가 문제였던 것이다. 상식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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