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원회에 의해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아닌 성희롱이 사실로 인정된 이유인 것이다. 증거 따위 상관없이 피해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가 사실이라면 사실인 것이다. 인정하고 사과하고 책임지라. 

 

민주주의에서 논쟁은 필수적 요소다. 논쟁을 통해 오류와 모순을 바로잡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나간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 갈등을 해소하며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간다. 그러니까 무엇이 성추행이고 왜 성추행이고 그 책임은 어떤 식으로 져야 하는가. 어떤 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졌기에 당대표가 사퇴씩이나 하는 것인가. 당대표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하고, 너무 과한 처분이다 싶으면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마저 모두 감당하는 것이 공당의 책임 아닌가. 그럼에도 당시의 성추행이 그토록 엄중한 사항이라 여겨졌다면 그 또한 공당으로서 대중에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뭐라든 이 사안은 그렇게 중대한 사안이었다. 

 

내가 말한 그대로다. 자칭 진보에게 민주주의란 아무 가치가 없다. 저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과두정이다. 엘리트 보수와 엘리트 진보가 모여서 어리석은 대중을 이끄는 정치인 것이다. 스스로 어리석은 대중을 자신들이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놈들이다. 대중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대중이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을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자신들을 지지했어야 하는데 무지하고 어리석어 민주당을 지지한다. 자기들이 성추행이라면 성추행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신들이 성추행으로 결론을 내렸으므로 성추행이다. 그러니까 뭐다? 박원순은 자기들 기중으로 성추행이고 주호영은 아니다.

 

김학의도 강간이 아니다. 김병욱도 자신들 기준에서 무죄인 것이다. 오로지 유죄는 안희정과 박원순 뿐이다. 왜? 자기들이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그래서 더 내용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김종철이 저질렀다는 성추행에 대해 밝혔을 경우 자칫 주호영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다. 그게 더 두려운 것이다. 자칫 주호영에게 불똥이 튈 수 있다. 국민의힘 하나 믿고 여성주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주호영에게 불똥이 튀면 성인지감수성은 어디 가서 찾는단 것인가. 그러니까 자기들이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리고 통보한다. 상관없이 박원순 유죄, 주호영 무죄, 김종철 유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누가 종교재판이라 했던 것 같은데 비슷하다. 그런데 종교재판에서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이유는 밝히고 본다. 그래서 재판이다. 재판조차 존재하지 않는 원시시대의 린치가 이러했을까?

 

자칭 진보의 민낯을 보여준다. 성추행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자칭 진보가 얼마나 반민주적인 집단인가를 낱낱이 보여준다. 원래 알던 사실이라 새로울 건 없다. 벌레는 벌레다. 똥은 똥이고. 냄새가 진동한다.

오래전부터 노선투쟁을 젠더이슈로 돌리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일관된 전략이었다.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어른들이 말싸움하다 밀리면 상투적으로 쓰는 그 말과 같은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것이 버릇없이!"

 

어딜 남자가 여자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 여기에 최근 미투의 영향으로 성범죄가 추가되었다.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진 것이다. 스스로 성인지감수성이란 여성주의자들의 레토릭에 동의하며 같은 주장을 해 왔기에 더욱 빠져나갈 수 없다. 주호영이야 그런 것 주장한 적 없으니 아니라 당당히 외칠 수 있다.

 

진보정당의 당대표로서 성인지감수성이 없다. 바닥이다. 여성에게 성추행을 저질렀다. 왜 성추행인가? 여기서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주호영 정도 말고 없다. 도대체 어떤 노선투쟁이었을까? 어떤 이슈로 의견이 갈렸기에 성추행이라는 오명을 씌워 당대표를 내보낸 것일까? 그렇다고 고발까지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더 명확해 보인다. 한 편으로 어차피 활동비라고 100만원 겨우 받는 약소정당 대표자리 그렇게 매력 있는 것도 아니니 반가웠을 수도 있다.

 

아무튼 주호영의 성추행을 이런 식으로 덮는 걸 보니 국민의힘 전위대 맞다. 어떤 노선투쟁이었는가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종철에게 축하한다 말해주고 싶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냥 정당 자체가 코미디다. 

오래전 기사들을 보면 알겠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결정된 월성 원전 재가동 결정에 대해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했을 때 정의당과 한겨레 등 자칭 진보 역시 탈원전이라는 진보적 가치를 앞세워 주민의 편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특히 월성 원전과 같은 중수로 방식에, 더구나 설계수명까지 다 한 노후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월성 원전의 가동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입장은 어떤가.

 

월성 원전 폐쇄에 대한 감사원 감사의 결과는 경제성 평가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경제성을 평가하는데 명확한 기준이 없으므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밖에 문제로 삼은 것은 감사를 하려는데 공무원들이 협조하지 않고 자료까지 삭제했더라. 그런데 한겨레와 정의당의 입장을 보자. 얼마전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경을 두고서도 정의당은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원전 폐쇄와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 아예 범죄로 단정짓는 듯한 표현까지 쓰고 있었다. 한겨레 역시 마찬가지다. 한 편에서는 월성 원전의 방사능 누출에 대해 기사를 쓰면서도 월성 원전의 폐쇄는 정권차원의 범죄라는 검찰과 감사원의 시각을 공유하는 중이다. 이해가 가는가? 

 

중대재해법에 대한 정의당과 자칭 진보의 비판을 귓등으로도 들을 필요가 없다 말한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자기들이 월성 원전을, 그것도 조기폐쇄도 아니고 설계수명이 다해서 이미 폐쇄된 것을 재가동하려는 것을 다시 폐쇄해야 한다 주장했었던 사실을 깡그리 외면한 채 감사원이 감사하고 검찰이 수사했으니 정권차원의 범죄다.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비리고 적폐다.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주장하고서 정작 정부에서 올리니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비판하고 반대하더니 정책이 후퇴하니 또 그것도 욕한다.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 단 한 번도 협력하는 법 없이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서 비판하고 반대하다가 역시 후퇴하면 바로 욕부터 한다. 즉 이놈들은 뭔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이나 법안이 있어서 그를 위해서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닌 그냥 민주당이 하니까 비판하고 반대부터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에서는 방사능 누출에 대해 보도하면서 한 편에서는 월성 원전 조기폐쇄라는 범죄를 청와대가 저질렀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경제성은 무시하고 안전성만 강조해서 부당하게 가동 가능한 원전을 폐쇄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그런 자칭 진보로부터 진정성과 선의란 것을 어디서 어떻게 찾으면 되는 것일까.

 

그토록 성인지감수성을 강조하더니만 주호영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논평조차 없다. 기사도 한 줄 나온 것이 없었다. 김병욱에 대해서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일반인을 부당하게 사찰하고 절차를 어겨가며 출국금지시켰다고 문제삼으려는 중이다. 그런 한 편에서 박원순을 핑계로 윤인순과 진혜원을 공격하는데는 열심히 힘을 모으고 있으니 이 새끼들 대가리속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요지경 속이란 것이다. 결국은 내가 말한 그대로 진보가 뭔지 정의가 뭔지 도덕이 뭔지도 모르고 저 편한대로 떠드는 놈팽이 새끼들이란 것이다.

 

괜히 그럴싸 해 보이니 진보적 가치를 주장한다. 그러나 확신 같은 건 없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 역시 없다. 그렇다 보니 그를 위해 다른 이들의 비난을 감수할 의지도 용기도 있을 리 없다. 딱 욕먹지 않을 정도로면. 딱 그로 인해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정도로만. 그러니까 괜히 정부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여서 비난을 듣는 위험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비판한다. 그래서 반대한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 비판하고 반대한다. 그래야 자기들이 진보처럼 보일 테니까. 그래서 누구에게 평가받으려 하는 것인가. 역시나 그동안 내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내용이다.

 

이인영이 제대로 보았다. 정의당과, 아니 자칭 진보와 어울리는 것은 똥통을 함께 구르는 것과 같다. 박주민도 정신차려야 한다. 박주민 다 좋은데 정의당과 함께 어울리는 부분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 유시민에 대해서도 최근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정의당이 진보면 민주당은 진보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 정의당이 진보면 정의당 혼자 진보 하라고 하면 된다. 같이 어울릴 필요가 없다. 저것들은 그냥 똥이나 파먹는 구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월성 원전 방사능 누출과 관련해서 가장 역겨운 집단들일 것이다. 아예 탈원전을 주장한 적 없고, 직접 행동에 나선 적도 없으면 이해라도 한다. 한겨레는 정신분열중이다. 월성 원전은 위험한데 월성 원전 폐쇄는 범죄다. 정권차원의 심각한 범죄로 김학의 출국금지에 버금가는 위험한 사안일 것이다. 대통령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 지 모른다. 진보는 해야겠고 정부는 까야겠고. 이런 놈들 하는 소리를 들으라? 똥이 똥파먹는 소리를 듣겠다.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백성은 어리석기에 무서운 것이다."

 

나 역시 일정부분 동의하는 바다. 임진왜란 당시 어떤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전쟁에 대비한다고 자신을 노역에 동원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을 괴롭힌 권력을 응징하기 위해 기꺼이 침략군의 편에 서고 있었다. 물론 침략군 또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다시 입장을 바꿔 조선조정의 편에서 침략군과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은 무서운 것이다. 의리도 염치도 신념도 정의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매번 선택을 달리할 수 있다.

 

백성이 임금을 알고 나라를 알고 도리를 알고 의리를 알고 정의를 알고 신념을 알고 가치를 알면 그리 매몰되고 마는 것이다.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라를 위해 가족까지 내팽개친다. 어린 자식마저 돌아보지 않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고 죽을 길로 떠나는 이들마저 있다. 숭고하지만 그래서 자신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국가와 민족이란 것이 일개 백성인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해 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그 국민과 민족을, 임금과 조정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선정을 베풀어야 하고, 그럼으로써만이 백성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부와 권력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양보하고 희생하려 할 것이다. 바로 국가와 민족이, 정부와 권력이 자신에게 이익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본놈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조선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조금도 이익이 되어 주지 않았다.

 

오래전 서프라이즈에서 놀던 당시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을 것이다. 냄비가 되자. 냄비가 되어야 한다. 냄비가 조리도구로서 유용한 이유는 그만큼 빨리 달구어지고 빨리 식기 때문이다. 그래서 냄비를 이용해서 다양한 요리들을 할 수 있다. 요리를 해서는 바로 식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 냄비가 유용한 이유는 쉽게 주어진 조건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얼마나 잘하든 한결같이 반대하고, 권력이 아무리 못해도 한결같이 지지하는 무쇠솥같은 국민이라면 새로운 무언가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권력자들이 항상 더 새로운 더 이로운 것들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하면 국민은 반응한다. 내가 잘해주면 국민들은 바로 반응해 준다. 그래서 그런 국민들을 위해 더 잘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게 된다. 어제가 아닌 오늘을, 바로 지금을, 바로 지금 보이는 행동과 결과들만을 집중해서 오로지 판단하게 된다. 그런 국민이 영리한 국민이다. 그런 국민이 현명한 국민이다. 이기적인 국민이야 말로 권력을 항상 긴장하게 고민하게 노력하게 만든다.

 

이낙연에게 아직 기회가 없지 않다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민주당 지지층에서 이재명에 대한 비호감도가 매우 높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 이재명만은 안된다. 이재명만은 지지할 수 없다. 차기 대선주자로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처음 이재명의 차기 대선주자로서의 지지율은 민주당 지지층이 아닌 민주당 밖의 보수층과 중도층으로부터 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가. 이제는 이낙연보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지지율이 훨씬 앞서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잘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이전의 감정마저 깡그리 잊을 정도로 지지자들이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으니까. 지금 잘하면 과거의 일은 잊혀지는 것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수는 과거의 일따위 상관없이 지금만으로 판단한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더 잘하려 노력하면 보상은 뒤따른다.

 

그러면 이낙연은 아닐 것인가. 그냥 나를 보면 되는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 개새끼 씹새끼 해가며 욕을 퍼붓다가 갑자기 다음 글에서는 그래도 대선주자로서 아직 희망이 있다며 낙관적인 소리들을 늘어놓는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치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신인이 노무현 후광으로 바람을 타고 있을 뿐이라고 비관적으로 보다가 사람이 괜찮은 것 같으니 바로 열성지지자로 뒤바뀐다. 원래 자칭 진보들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알고 혐오의 감정을 가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잘하면 인정한다. 잘하는 것 같으면 지지한다. 그래서 진짜 잘한다 여겨지면 이명박근혜를 사면하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하시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한결같은 지지란 없다. 영원한 반대 같은 것도 없다. 그러니 항상 긴장하고 삼가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낙연이 그런 민심의 무서움을 제대로 느끼고 깨달았다면 아마 이후 민주당의 행보에서 크게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깨달은 것이 없다면 이낙연은 딱 거기까지인 인물인 것이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무능하다는 것은 실패한 자체가 아닌 그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항상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지게 되는 경우 더이상의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미 등돌린 사람들이야 벌써 다 끝난 듯 떠들겠지만 그들마저 다시 되돌려세울 수 있는 성과들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고관여층의 확신에 찬 주장들만 듣지 말라. 김어준이 아무리 대단해도 180석 의석의 여당을 이끌고 있는 것은 이낙연 자신인 것이다. 친민주성향의 스피커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실제 민주당을 이끌고 성과를 내는 것은 당대표인 민주당인 것이다. 그들이 지지자들 사이에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특별히 더 잘나서가 아닌 것이다. 잘하면 된다. 결과로써 보여주면 다시 돌아온다. 단 하나 이낙연이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아직 나는 이낙연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잘만 한다면. 그리 쌍욕을 퍼부었는데 태세전환이 놀랍지 않은가. 내가 냄비라 그렇다. 무식하고 멍청해서 확고한 신념 같은 건 없다. 잘하면 인정한다. 잘해야 하는 사람이 잘해야 내게도 좋다는 사실 정도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과 언론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지지자들이 바라는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인가. 이낙연이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지를 구해야 하는 대상은 어디의 누구인가. 이재명으로부터 빼앗아 와야 할 자신의 핵심지지층은 어떤 사람들일 것인가. 만회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들이 필요하다. 승부수가 필요하다. 멍청하지만 않다면. 이래도 모르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칼날위에 서있다. 권력의 속성이다. 지켜 볼 뿐이다.

원래 차기 대선후보로서 이재명의 지지율은 민주당 지지층에서 낮고 민주당 밖에서 높게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 민주당 핵심지지층은 문재인 정부의 초대총리이자 역대 최장수총리로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보여준 이낙연을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계승할 인물로 거의 확정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성과를 이어받아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최적의 인물이다. 더구나 총선에서 180석까지 얻었으니 이번 정부에서 입법을 통한 개혁은 거의 마무리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총선이 끝나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개혁을 저지하려는 적의 세력이 더 커지고 강해진 듯한 상황들이었다. 검찰과 언론이야 당연히 현정부의 개혁에 저항하는 적폐들이었는데 여기에 박원순 시장을 계기로 여성단체들이 더해지더니 윤석열 징계를 계기로 사법부까지 노골적으로 한 팔 거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국민의힘과 정의당이라는 보수와 진보의 두 야당에, 공중파와 종편과 신문과 방송과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 언론의 연합에, 여성단체와 사법부라는 이름으로 뭉친 검찰과 법원의 연합이 민주당을 상대로 아예 대놓고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수구의 연합에 대해 민주당은 지레 주눅든 듯 무력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과연 이번 정부에서 개혁을 끝낼 수 있을 것인가. 자칫 마음을 놓았다가 다음 정부에서 개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지지자들 사이에서 차기 정부에서도 안정보다는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이재명이 홍남기와 기재부를 저격하며 새로운 개혁의 아젠다를 지지자들 사이에 던져 주었다. 앞으로 개혁할 적폐는 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차기 대선주자로서 이낙연의 가치는 문재인 정부의 훌륭한 계승자라는 것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완성하고 이미 이루어진 개혁들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할 적임자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층으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아 왔던 것이었다. 즉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민주당 대표로써 완성한다고 그 공이 온전히 문재인 대통령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재인 정부의 성공한 개혁이 문재인 정부 이후에 대한 기대로써 이낙연에게로 자연히 흘러가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욕심이 너무 지나쳤다. 결국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해봐야 문재인 대통령만 좋은 것 아닌가. 자기가 앞장서서 개혁들을 이룬다고 그 공이 온전히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정치를 해 봐야겠다. 정치인으로서 내가 내 힘으로 나의 지지를 끌어올려봐야겠다. 그래서 나온 게 사면론이다. 참모 갈아치워라. 일단 100미터 이내로는 얼씬도 못하게 내쫓아 버려라. 이건 진짜 병신짓도 상병신짓인 것이다.

 

일단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최우선 개혁과제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제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즉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방향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개혁방향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에서 다음 정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대통령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과 차별화하겠다고 그 노선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말았다. 자기는 문재인 대통령과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정책들과 전혀 다른 자기만의 지향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대부분 개혁방향을 설정한 상태라 그로부터 벗어나 자기 정치를 하려니 민주당 지지자들의 바람과 어긋난 주장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겠다면서 민주당 다수 지지자들이 바라는 방향과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는데 누가 그런 사람을 차기 대권주자로 지지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이재명이 영리했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이재명도 그냥 다급하니 한 번 무리하게 던져 본 승부수였을 것이다. 홍남기와 기재부를 저격함으로써 특히 민주당 지지층 내부에 기재부의 보수적이고 경직된 관료주의에 비판적인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의 지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동형이나 김용민 등이 급격히 이재명 지지로 기울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낙연이 문재인 정부의 계승을 천명하고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입법을 통해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이재명의 승부수는 그저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개인의 주장 정도로 여겨지고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낙연은 개혁에 소극적이고, 윤석열 이하 기득권들은 더 극성을 부리며 현정부의 앞을 막아서려 하고, 지지자들의 마음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런 상황에 이낙연이 이명박근혜의 사면까지 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윤석열의 분탕질을 시작으로 기득권들의 강력한 연대에 경각심을 가지게 된 지지층에 대해 소극적이고 안이한 모습을 보였던 이낙연의 행동이 이재명에게 반사이익으로 돌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긴 그래서 승부수다. 될 지 안 될 지 모르지만 이 시점에서 내가 이런 승부수를 던짐으로써 상황에 반전을 꾀할 수 있다. 180석이란 의석이 이낙연을 둔하게 만든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나약하게 만든 건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다. 비교되지 않는가. 없는 기회까지 스스로 만들어가며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낸 이재명의 승부수와 확고하던 지지층마저 스스로 날려버리는 이낙연의 선택이란? 과연 지지자들은 민주당의 차기 대선후보에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 것인가.

 

능력만 놓고 보자면 이낙연이 이재명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결과가 그렇다. 지금 이재명의 지지율은 이재명 자신이 자신의 역량으로, 그동안 이루어낸 성과들을 바탕으로 스스로 쟁취해 낸 것이다. 그에 비해 이낙연은 문재인 대통령이 물려준 지지조차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를 계승할 인물로써 과연 자격이 있을 것인가. 기회가 없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은 결과고 성과다. 실력이고 능력이다. 과연... 이재명만 돋보이고 있다. 우스울 정도다.

이경규가 어느 방송에서 말한 바 있다.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더 위험하다. 아주 오래전 연예인에 대해 별 꼬투리를 잡아서 비난하는데만 열심인 이른바 네티즌들을 가리켜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비루한 무지와 나태가 타인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게 만든다. 

 

여기서도 썼을 것이다. 여기 아니어도 어디선가는 썼었다. 누군가를 칭찬하고 지지한다는 것은 그와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같이 지겠다는 의미다. 어째서 칭찬했는가? 잘했으니까. 왜 지지하는가? 옳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왜 잘했고 무엇이 옳아서 그를 칭찬하고 지지한 것인가? 그러려면 알아야겠지. 공부해야 한다. 취재도 해야 한다. 그러고서도 혹시라도 생각못한 부분들로 인해 곤란해질 지 모른다. 그에 비해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얼마나 편한가? 설사 내가 비난한 내용이 사실과 전혀 다르더라도,

 

"그런 빌미를 준 당사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타진요 때도 타블로를 비난하던 놈들이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다. 그럴 빌미를 주었기에 자신들은 정당하게 비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 편에서 이미 초기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타진요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을 알았던 나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판단의 여지가 있다면 오히려 신중하게 사실에 대해 더 정확히 알아보고 당사자의 해명까지 들어서 시간과 수고를 들이더라도 정확하게 사실을 알고 판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귀찮으니까. 그런 노력을 하기는 귀찮고 당장 자신의 정의감을 드러내고 싶으니까. 바로 인정부터 받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정부가 잘한다. 그래서 칭찬한다. 바로 비판이 들어온다.

 

"너 어용이냐?"

"너네 친정부냐?"

 

그걸 못 견딘다. 차라리 가짜뉴스로 비난하면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사실을 제대로 취재해서 보도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폼도 난다. 제대로 취재도 않고 사실확인도 않은 채 그저 살아있는 권력과 맞선다는 자신에 취해서 아무 기사나 막 써댄다. 그래서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기자세계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자기가 이렇게 무엄한 행동까지 해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경우없고 무례한,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모욕한 행위일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없다. 살아있는 권력과 맞섰으므로 자신은 정당하다.

 

정의당에 진보가 없다는 이유다. 한겨레에도 경향에도 진보란 없다. 홍세화에게도 강준만에게도 진보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가 사실이면 최소한 박노자처럼 현정부가 들어서 조금이라도 나아진 부분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박노자도 현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당연히 박노자는 극좌 중에서도 극좌에 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진중권보다도 홍세화보다도 강준만보다도 심상정보다도 더 왼쪽에 있는 인물이 박노자다. 그런데 어용소리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비판할 부분들을 비판한다. 그것이 지식인이다. 누가 뭐란다고 그것을 두려워서 말조차 가릴 것이면 그건 협잡꾼이지 지식인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당이나 한겨레나 자칭 진보 가운데 누구도 현정부 들어서 이루어진 여러가지들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는 경우가 없었다. 다 못했다. 다 잘못했다. 망해야 한다. 죽어야 한다. 아니 죽여야 한다. 왜? 어용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니까.

 

감히 국민의힘으로부터 민주당 2중대라는 소리를 듣기가 그리 두려운 것이다. 조중동으로부터 친정부 언론이라는 말을 듣기가 그리 굴욕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앞장서서 꼬투리를 잡아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데만 열을 올린다. 혹시라도 잘한 것이 보여도 그 가운데 못한 것을 찾아서 억지로 키워 떠드는데만 열심이다. 현정부와 민주당이 이루어낸 성과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진보이념에 부합하든 다른 부분을 찾아내서 비판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들에게 진보란 국민의힘으로부터 조중동으로부터 인정받는 진보다. 조중동이 부정하면 진보조차 아니게 된다. 국민의힘이 인정하지 않으면 진보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 무의식이 장혜영의 민주당을 진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표출된다. 누가 누구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진보와 보수가 결정되는가? 

 

자아가 비루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비루한데 자존은 높다. 욕먹기도 싫고 비판듣기도 싫고 그래서 혹시라도 논쟁이 붙어 지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는데, 그럼에도 인정은 받고 싶다. 대접은 받고 싶다. 그래서 그토록 기레기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남은 그렇게 쉽게 편하게 비난하면서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는 그토록 견디지 못해 하는 것이다. 기레기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 굴욕과 수모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면 기사같은 건 쓸 수 없는 것이다. 기자가 아닌 것들이 쓰는 기사란 그냥 글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주류라 생각한다. 자칭 진보들의 내면이다. 그런데 제대로 주류사회에서 주류로 인정받지 못한다.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일하게 노회찬 정도가 그런 판단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주류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수구언론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수구정당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민주당의 인정따위 필요없다. 민주당이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들이다. 원래 자기들의 신분으로 보면 진짜도 아닌 가짜진보 민주당은 마주할 가치도 없는 비천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면에 그럼에도 어느새 주류로 올라선 민주당을 인정할 수 없다는 졸렬함이 자리하고 있다.

 

김학의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김학의의 인권조차도 소중히 여겨야 수구로부터 진보로 인정받을 수 있다. 김학의의 범죄와 상관없이 그의 도피를 막는 과정에서의 절차상의 문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진보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박원순은 비난해도 김병욱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피해자라는 여성의 주장을 앞세워 당사자도 아닌 민주당 국회의원의 사퇴는 주장해도 감히 주호영의 성추행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후원전의 위험성보다 그 과정에서의 잘못들을 문제삼아 대통령과 청와대를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 필사적인 것이다. 

 

악의가 있어서도 있겠지만 그 정도 수준도 못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란 뜻이다. 그나마 악의라도 있으면 목적과 동기가 읽히는데 악의조차 없으면 그냥 부화뇌동하는 경박함만이 보인다. 신념도 양심도 정의도 자존도 정체성도 없다. 더 나쁘다. 내가 자칭 진보들을 벌레취급하는 이유다. 존엄이 없는 인간은 벌레와 같다. 그냥 비천한 것들이다.

찾아보니 벌써 작년 10월 쯤이었다. 시간 가는 걸 잊는다. 그보다 내가 그런 글을 썼었다는 사실조차 가물거려서 결국 다시 찾아서 읽어보고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지금의 상황을 그때 이미 나는 예견하고 이재명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상황을 오판한 결과 이낙연은 수세로 몰린 것이고. 

 

한 가지 내가 그때 판단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낙연이 설사 민주당 180석 의석을 앞세워 검찰개혁을 이루어내더라도 그것은 이낙연 자신의 공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누구라도 민주당의 대표가 되었으면 당연히 이루어야 할 과제인 것이지 자신의 성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검찰개혁은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에서 시작된 문재인 대통령의 공이다. 그래서 이낙연도 조급해진 것이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자기가 당대표로서 민주당을 이끌고 개혁법안들을 입법해도 그 공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야 어느새 자신을 추월해 앞서가는 이재명을 따라잡기란 요원하다. 뭔가 승부수를 던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게 하필 사면론이었다.

 

이낙연의 계산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이은 통합과 안정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을 게다. 문재인 대통령이 적폐청산과 개혁정책들을 이루어냈으니 자신은 그 뒤를 이어받아 관리형 대통령으로서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이끌겠다. 선명하지만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만 여겨지는 이재명과 비교하기에도 자신에게는 더욱 필요한 과정이라 여긴 것이다. 문제는 지지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만으로 적폐청산과 개혁이 모두 끝날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찬의 말처럼 앞으로 최소 20년은 더 집권해서 일관되게 개혁정책들을 밀고 나가야 비로소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로써 민주당 180석을 가지고 어떤 개혁적인 아젠다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가 이낙연에게 주어진 숙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로까지 보이게 만들었으니 이만저만 패착이 아니다.

 

아무튼 그래서 당시에도 이낙연이 홍남기와 기재부를 적폐로 규정짓고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었다. 뭐랄까 막 싸우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는 듯한, 그저 사납고 거칠게만 보이는데 영리하게 지능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싸움판을 만들고 있었다. 재난지원금에 대해 보편지급이라는 아젠다를 먼저 자기가 세팅해 놓는 것이 그랬고, 더구나 재난지원금 지급을 계기삼아 홍남기와 기재부의 보수적이고 경직된 재정운영을 비판하면서 이후 개혁할 대상으로서 관료사회의 관료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문재인 대통령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좌초된 것도 기재부 관료들의 태업과 저항 때문이었고,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재정정책을 펴려 할 때마다 홍남기와 기재부에서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었다. 그 사실을 지지자들도 알기에 이재명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들마저 문재인 대통령의 뒤를 이어 개혁을 이끌어갈 인물로써 기대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구나 때도 좋게 사법부마저 윤석열과 손을 잡은 것이 명백해지면서 문재인 정부 이후는 안정보다 더 강력한 개혁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게 되었으니 이재명이 벌려 놓은 판 위에서 이제는 여권 전체가 움직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재난지원금의 보편적 지급이냐? 선별적 지급이냐? 재정안정이냐? 과감한 재정정책이냐? 

 

이낙연의 오판이 더욱 뼈아픈 이유인 것이다. 덕분에 홍남기의 기재부 관료출신다운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재정운영이 이낙연의 이미지와 결부되기 시작했다. 홍남기를 추천한 것도 이낙연 자신이었기에 홍남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만큼 이낙연에게도 그 책임이 덧씌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낙연 자신 또한 사면론에 이어 개혁되고 청산되어야 할 구세력의 일부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다. 아예 이전 이재명이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이낙연이 민주당 지지자 다수 사이에서 비호감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래서야 앞으로 무엇을 하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리 없다. 반사효과로 이재명은 더욱 자신의 선명성을 드러내며 이후의 논쟁들을 주도해 나간다. 정세균과 임종석마저 이재명이 만든 판 위에서 논쟁을 이어가지 않는가.

 

그러면 이낙연에게는 기회가 없는가? 그동안 내가 쓴 글 뭘로 읽은 것인가. 선별지급으로 보편지급을 뒤집을 방법은 하나다. 선별지급이 보편지급을 압도할 정도로 현실적이면 되는 것이다. 전국민 100만원 보편지급보다 피해입은 당사자들에게 선별해서 최대 수천만원까지 손실금액을 보전해준다. 이낙연이 아마 아직도 자기가 가진 힘의 크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사면론같은 헛발질을 승부수라고 던진 것이다. 하려면 뭐든 할 수 있다. 더불어 과연 문재인 대통령의 업적을 대신한다는 것이 여당의 당대표로서 반드시 나쁘기만 한 일인가 스스로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려 하는데 그 정책적 목표를 공유한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불리하게만 작용할 것인가. 지금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것은 그럼에도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론은 정치력에서 이재명이 이낙연보다 몇 줄 위라는 것이다. 아니 지금 현재 정치권에서 본능적인  판세읽기와 판만들기에서 이재명보다 낫다고 할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인간이 신뢰하기 어려워 그렇지 능력만 놓고 보면 최상급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자기가 똑똑한 걸 아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걸 단지 수단으로 도구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보니. 더구나 자수성가한 유형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다른 대안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 여길 밖에.

 

이낙연에게 위기다. 그런데 여전히 이낙연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순전히 이낙연 자신의 선택에 달렸을 것이다. 무엇으로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인가. 즉 무엇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의 이미지를 일신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참모는 역시 갈아치워야겠다. 하등 쓸데가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단지 생산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란 생산에서 자본을 분리해내는 것이다. 자본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과 그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을 분리함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를테면 동네빵집과 대형프랜차이즈 빵집과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아닌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 소자본 빵집의 경우 가게 사장이 곧 제빵사고, 가게 사장이 만드는 빵의 품질에 의해 가게의 매출이 결정된다. 생산과 자본의 이익이 일치된 상태인 것이다. 분식점주인이 만드는 떡볶이가 맛있어서 멀리서까지 사람이 찾아오고, 국숫집 주인이 만드는 국수가 맛이 없어서 며칠 안 가 문을 닫는다. 그에 비하면 대형 프랜차이즈는 빵 만드는 사람 따로, 빵을 파는 사람 따로,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다. 어떤 빵을 만들 것인가조차 제빵사가 아닌 경영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경영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을 투자한 자본가들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제품의 품질을 떨어뜨리고 인력을 감축하는 결정도 아무렇지 않게 내릴 수 있다. 반드시 빵이 많이 잘 팔려야지만 자본이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생산과정에서의 소외가 일어나는 이유다. 한 마디로 보람이 없다. 빵을 만들면서도 과연 이게 내가 만드는 빵인지, 내가 만든 빵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과연 내가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주어진 레시피대로 그저 기계처럼 반복해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전체 생산과정 가운데 단지 제빵사로서 자신의 실력이 필요한 일부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그같은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자동차에 쓰이는 중요한 부품이지만 캠이나 크랭크를 제작하는 하청기업 종업원은 생산된 차를 직접 볼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왜 만들고 어디에 쓰이는지조차 모르는 채 전체도 아닌 일부 공정만을 반복할 뿐인 노동자에게 과연 얼마나 대단하게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런 노동자는 무엇에서 자신의 노동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많은 사용자들이 가족이 있는 기혼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이 있으면 가족의 생계 때문에라도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 보람 없이도,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음에도, 그러나 자기가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만큼 가족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노동자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며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일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는 만큼 일의 결과로써 자신의 보람을 찾으려 한다. 밖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봉투들이 바로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없거나,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부양할 가족을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장 청년실업률만 보더라도 일자리가 없다는데 사람이 없어서 문을 닫을 지경인 회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어째서 고용률이 30대만 되면 바로 치솟는가에 대해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을 것이다. 20대까지는 여기저기 고르며 버티다가 30대 되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건을 낮춰서 아무데고 취업하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와중에도 도저히 그 돈 받고 그 일은 못하겠다며 거부하는 일자리가 상당한 것이다. 일본의 고용률이 우리보다 높게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노동자라도 없으면 안되는 곳에서마저 일본인들은 일본인을 고용해 쓸 수 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은 그런 일자리를 회피하는 것일까? 일도 보람이 없는데 일해봐야 기대할 것도 없다. 지금 최저임금 수준으로도 보람도 없는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일을 청년들이 왜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해야만 하는가?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게 된다. 어느새 남은 것이 그런 일자리들 뿐이니까. 거의 대부분 일자리가 최정임금이나 겨우 받는 정도다. 그조차도 고용이 보장되지 않아 몇 년 뒤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 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기껏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는데 계약이 끝나 실업자 신세가 되어 보라. 돈을 모을수조차 없는데 일자리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급여와 상관없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젊은이들의 경우 결혼률이나 출산률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 부양할 가족도 없다면 의미없는 일에서 어떤 보람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하긴 가족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고생한 결과 가족이 행복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이 고생한 결과에 스스로 보람과 의미를 찾는 것도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에 대해 방송했을 때 다른 네티즌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에게 상을 준다. 그동안 노력하며 고생한 자신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을 해 준다. 그것이 파인다이닝일수도 있고, 클래식공연일 수도 있으며, 해외여행일수도 있다. 그 순간 행복해하는 자신을 위해 자신은 그만큼 더 노력하며 버틸 수 있다.

 

요즘 부쩍 지출이 는 이유다. 일이 힘든 때문이다. 일도 일이지만 그다지 보람 같은 걸 느끼기 힘들다는 게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냥 열심히 하는데 그것 뿐이다. 그래서 받는 돈은 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많은 액수다. 내가 혼자 살면서 이런저런 고정지출 포함해서 한 달에 지출하는 액수가 고작 얼마간이다. 그런데 거의 그 두 배 가까운 돈을 받는다. 아 씨발 그냥 딱 저 절반만 받고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의미있는 일을 찾아볼까?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돈을 쓴다. 돈을 버는 만큼 나 자신을 위한 보상에도 아끼지 않는다.

 

물론 한계가 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겨우 주말이나 되어야, 그것도 낮에는 자야 하니 밤에만 겨우 시간이 난다. 그래서 미뤄두었던 게임도 질러 보고, 술도 조금 더 비싼 놈으로 마셔 보고, 그에 맞게 안주도 그럴싸한 것으로 준비해서 먹는다. 사실 가장 큰 게 술이다. 알콜중독이라기에는 주중에는 진짜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냉장고에 술병들이 가득한데도 그냥 외면하고 술없이 일주일을 버틴다. 술에는 안주가 따라와야 한다. 그리고 안주는 비용이나 공이 많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주중에는 시간이 없어 그것이 힘들다. 그리고 그렇게 수고와 비용이 들어간 안주를 제법 괜찮은 술과 함께 즐기며 주말의 한가함을 즐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일주일동안 개고생하는 것 아닌가.

 

문득 벌써 10년도 더 전에 거북이가 재해석한 '사계'에 대해 크게 반감을 드러내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일을 하는 의미도 보람도 사라진 시대에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한 무산자 노동자들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가. 그런 자신을 위해 비장함도 엄숙함도 숭고함도 아닌 하잘것없고 대수롭지 않은 그저 자신만을 위한 순간들이 필요치 않을까.

 

맥주 한 잔에, 매운 치킨 한 마리에, 그리고 어느새 보채다 잠든 고양이를 보면서 드라마도 볼 것 없어 끄적이는 중이란 것이다. 원래 계획이 있었는데 힘든 일일수록 피하고 싶은 것이 나란 인간이라. 일주일의 고단함을 주말의 하잘것없음으로 이완시키며 풀어본다. 내일도 마실 거다. 더 맛있는 안주와. 내가 살아가는 이유처럼.

여성주의자들이 그토록 주장하던 성인지감수성에 따르면 주호영의 행위는 명백한 성추행인 것이다. 우연히 밀치다 잠시 닿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마저도 사전에 주의하여 조심할 필요가 있고, 이미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엔 인지한 순간 바로 사과하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김학의는 말할 것도 없다. 말이 좋아 성접대지 여성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말로 여성을 대상화 사물화하여 성적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위력을 사용한 집단 성적 유린의 한 당사자인 것이다. 박원순 시장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 가해라 떠들던 여성주의자들의 기준대로라면 김학의의 출국을 막는 조치에 대해 범죄로 예단하여 수사하는 것은 김학의의 수사에 대한 정당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반여성적인 행위인 것이다. 하물며 김학의를 변호하는 듯한 발언들이 국민의힘과 검찰은 물론 정의당, 한겨레 등 정치권과 언론을 막론하고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무혐의의 일반인인 김학의를 대상으로 출국금지를 시켰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래부터 성인지감수성이란 구더기 똥파먹는 소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은 구더가 오줌퍼먹는 소리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놈의 성인지감수성은 지금 어디 있는데? 국민의힘 관련 인사들의 성추문에 대해서 과연 그놈의 성인지감수성이란 얼마나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가? 그러니까 대한민국에는 1신분과 그 밖의 신분이 존재하기에 1신분인 국민의힘 정치인들과 검찰들에게는 그놈의 성인지감수성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여성주의란 굼뱅이 흙파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당은 시체나 파먹고 사는 구더기란 것이고. 노회찬의 죽음을 팔고, 박원순의 시체나 뜯어먹으며 무엇이 정의고 진보인지 기준조차 없이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다. 그게 자칭 진보의 본색이기도 하다.

 

성인지감수성? 여성주의? 그래서 내가 진선미나 윤인순 같은 민주당 소속 여성주의 정치인들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진선미는 처음부터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여성주의의 뿌리를 돌아보라. 친일, 친독재, 친재벌, 친기득권, 그래서 기생페미니즘이다. 곰팡이는 그래도 세상에 긍정적인 도움도 준다. 

협의란 의견을 듣는 것이다. 합의는 의견을 맞추는 것이다. 차이는 무언가? 결국 서로 의견을 주고받은 결과 동의 아래 어떤 결론을 내린다. 합의다. 의견을 듣기는 들었는데 결국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가장 낫다 여기는 방향으로 알아서 결론을 내린다면 협의가 된다. 이른바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결정은 자기 멋대로 내린다 할 때 이 협의를 쓰는 것이다. 최근 언론이 아주 악랄하게 오염시키는 개념 가운데 하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모두가 하나의 주장이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다. 그래서 결국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최대 다수의 의견을 묻는 표결이란 것을 하게 된다. 2017년 대선에서 홍준표나 안철수, 심상정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의 의견도 분명 충분히 존중하고 귀기울여야 하겠지만 어찌되었거나 대통령은 문재인인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거의 과반에 가까운 국민이 트럼프에게 투표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국민이 바이든을 지지했기에 대통령은 바이든이고 바이든의 신념과 철학에 의해 미국의 국정은 꾸려질 것이다. 결국 서로간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국민이 위임한 의석을 기준으로 표결로 결정할 수밖에 없고 그 또한 민주주의의 원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당의 동의 없이는 어떤 법안도 통과시켜서는 안된다는 합의라니.

 

정의당이 민주주의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주장하는 이유인 것이다. 정의당의 민주주의는 고대의 만장일치제가 아니면 국민의힘을 상원으로 두고 거부권을 인정하는 중세공화정에 더 가까울 것이다. 국민의힘의 동의 없이는 어떤 법안도 통과시켜서는 안된다.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사안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서는 안된다. 즉 모든 법안은 의회에서 국민의힘의 허락을 받은 다음 결정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대등한 각각이 헌법기관인 국회가 아니라 특정 정당이 비토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요상한 국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의당의 무의식일 것이다. 민주당은 천민이고 자신들은 귀족이다. 민주당은 비주류고 자신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다. 그러니 자신들의 허락을 받으라. 국민의힘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

 

그게 지금 언론이 주장하는 협치인 것이다. 국민의힘더러 조금 더 정부와 여당의 입장에 대해 듣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라는 소리따위 절대 하지 않는다. 들어야 하는 것도 양보해야 하는 것도 모두 정부와 여당이다. 아예 야당에 맞춰 모든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수구정당인 국민의힘에 굴복하지 않는 정부와 여당의 오만과 독선을 질타한다. 독재다. 민주주의란 국민의힘의 의견을 들어서 그들의 동의 아래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협의란 말도 쉽게 오용되고 만다. 검찰인사에 있어 검찰총장과 충분히 협의하겠다. 의견을 듣기는 하겠는데 인사권자는 장관인 자신이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 합의가 아니다. 동의나 허락도 아니다. 뭐가 문제인가?

 

정상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계약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데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묻는다. 그런데 결정은 누가 하는가?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이라면 무기계약직으로 바꿔주는 것이 회사를 위해서도 좋은 결정인 것 같다. 그러나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인사가 결정된다. 그래서 협의하지 않은 것인가? 언론의 농간이다. 버러지새끼들인 것이다. 넘어가면 같은 수준이 된다. 웃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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