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나라라는 조선이었지만 그러나 중기를 넘어가면 사대부 가운데 사서삼경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굳이 몰라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3대에 한 번은 과거급제자가 나와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바로 그 과거만 노리고 준비하는 기술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과거에 출제될만한 문제들만 모은 족보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그것만 공부하느라 정작 유가의 경전은 돌아보지도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시험을 통한 능력지상주의에 회의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 나부터 학력고사 시절 모의고사보다 무려 40점이나 오른 점수를 받은 경험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모의고사와 학력고사 사이에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점수만 무려 40점이 오르고 있었다. 시험은 능력인가? 운인가? 한 문제 맞고 틀리고에 등급이 갈리고 당락이 갈린다면 그 한 문제의 차이를 온전히 실력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칭기즈칸 시대 몽골에서는 말 잘 타는 것이 능력이었다. 말 잘 타고 활 잘 쏘면 그것으로 알아주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 중국 송나라에서는 사서삼경 잘 외고 시문 잘 짓는 것이 능력이 되고 있었다. 과학자 가운데도 날카로운 직관과 탁월한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최근의 추세는 반복된 실험에 질려하지 않고 데이터를 꼼꼼하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맥아더와 같이 자신의 직관을 믿고 과감한 도전을 하는 지휘관이 더 필요했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아이젠하워와 같은 관리형 지휘관이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있다. 그래서 진정 모두가 인정할만한 능력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기타를 잘 친다고 반드시 기타리스트로서 더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잘한다고 더 높은 인기와 많은 수입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는 중견배우보다 아직 연기도 어설픈 젊고 매력적인 신인배우가 더 높은 개런티를 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필 그 시점에 가장 평가받을 수 있는 재능을, 더구나 그것을 발현하기 좋은 조건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시험문제의 제출방식과 평가방식에 따라서도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시험 하나 잘 봤다고 과연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문제란 것이다. 시험이 능력이다. 결과가 능력이다. 그래서 결과를 얻었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덕분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더 노력을 않는다. 자칭 진보들이 진보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무지한 이유인 것이다. 자칭 보수들이 보수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무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는 능력이라면 보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제 보수는 그저 막말의 아이콘처럼 되어 버렸다. 국민의힘에 진짜 실력있다 여길만한 인물이 누가 남아 있는가. 자칭 진보 가운데 귀기울일만한 가치있는 주장을 내놓는 이가 누가 있는가. 그런데도 학벌과 학위과 전력이 방패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잘났다.

 

오세훈의 'v' 발언을 보면서 더욱 느끼는 것이다. 언론은 차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제 얼굴에 침뱉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기자놈들도 무식하기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시험이란 단지 과정이며 결과는 이후로 증명되는 것이다. 학벌이 아니라, 전력이 아니라, 시험의 결과가 아닌 실제 누적된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진보가 진보인 이유는 진보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류호정이나 장혜영 같은 얼치기들이 오히려 진보를 상징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래도 된다. 그만한 자격이 된다. 그러므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격이 안되는 너희들이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칭 사법부인 검찰과 법원이 아닐까. 엄밀히 사법부는 법원만을 가리킨다. 검찰은 행정부다. 그러나 법원 스스로가 검찰을 같은 사법부로 여긴다. 김명수가 필사적으로 검찰을 지키려 애쓴 이유였다. 같이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연수원생활도 함께 했었다. 동료 아닌가. 고작 시류를 잘 타서 선거로 당선되었을 뿐인 정치인들에 비해 자신들이야 말로 타고난 실력과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이른 이들이다. 감히 국회의원 따위가. 감히 대통령따위가. 감히 국민들 따위가. 그 오만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그리고 그런 오만조차 옳다는 언론의 태도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민주당의 중진 가운데 오히려 그런 이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이들은 또 무엇 때문인가.

 

능력지상주의라기보다 시험지상주의다. 시험을 잘봤으면 능력 있는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자격이 있다. 자격이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기자들이 조국 전장관의 일가족을 집요하게 들이파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험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시험이 정의고 시험이 진리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도 참 고생 많이 했었다. 대학에 가지 못했었다. 지금 대통령도 고작 경희대 출신이다. 노회찬도 고려대 출신이었었다. 웃기는 현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