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선비들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달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설사 당장 오명을 쓰고 일가족까지 모두 볼살당하는 상황을 맞더라도 또한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보다 자신이 과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을 고민했다. 자신이 배우고 알고 있는 바를 어김없이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는가를 고민하고 두려워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먼 훗날에라도 자신의 진실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로서 유교의 영원은 역사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마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곡학아세라는 말도 나오게 된 것이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세상에 맞춰 자신을 알리고자 한다. 세상에 자신을 알리려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알고 있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비틀고 뒤집고 속인다. 진정한 선비라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대로 여전히 학문을 닦으며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건만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원래는 세상이 알아주면 알아주는대로 조정으로 나가 경륜을 펼치고 알아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을 닦는다고 사대부일 테지만 오로지 권력만을 쫓느라 자신을 세상에 맞춰가려고만 한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남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다른 곳으로 몰아가려 한다. 그래서 그런 평가를 듣지 않기 위해, 나아가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하려 한다. 다른 말로 시류에 편승한다는 것이다. 죄다 누군가를 욕하니 자기도 함께 덩달아 욕하고, 아니 오히려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더 욕하고 비난하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언론의 자유가 소중했던 것은 권력으로부터 탄압받으면서도 그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던 용기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두렵고 위험하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기사를 쓰고 논설을 쓰고 세상과 맞섰다. 모두가 아니라 할 때 맞다고 말하고, 모두가 맞다고 할 때 아니라 주장한다. 세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가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다른 기자들이 보는 눈이 두렵다고 기사의 방향을 그에 맞춰야 한다는 버러지들이 있다.
물론 언론의 역사에 항상 훌륭한 언론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론의 시작과 황색언론의 시작은 거의 같다 보면 된다. 그럼에도 권력에 쫓기면서도 정의를 밝히기 위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이 있고, 어둠에 숨어서 권력이 금지한 진실의 조각들을 인쇄해서 세상에 뿌리던 이들이 있었다. 이명박근혜는 두렵고, 보수언론의 비난은 무섭고, 검찰과 법원으로부터 기사거리를 받지 못하는 것은 겁난다. 대신 뭐라 욕해도 감히 맞대응조차 않는, 맞대응해도 말로써 꺾어 버릴 수 있는 민주당은 만만하다. 그래서 무서운 대상들을 피해서 만만한 대상을 욕하는데 동참한다. 그런 놈들을 위한 언론의 자유란 과연 무슨 의미인 것일까.
하긴 벌써 몇 년 전에 나 자신도 그리 선언했을 것이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언론이 지성을 가리키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에 지나갔다. 자타칭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마저 누가 자기를 인정해주는가에 따라 신념과 주장을 바꾸며 낙엽처럼 나부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시대다. 누가 욕해도 내 할 말은 한다. 세상이 비난해도 내 하고 싶은 말은 한다. 물론 쉽지 않다. 특정 커뮤니티에 가입해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그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더이상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서운 것이 있어서야 나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겠는가.
한겨레 기레기들 덕분에 언론의 속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차라리 고맙기조차 하다. 보수언론의 눈이 무서워서 기사를 그에 맞춰 쓰려 한다. 보수언론으로부터 듣는 말들이 무서워서 차라리 자기 선배와 상사들을 들이받으려 한다. KBS가 파업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쫓겨났는데 자기들만 가만 있으면 쪽팔리니 파업이라도 해서 대세를 쫓아가겠다. 그리고 다시 언론의 대세가 반문인 것 같으니 대세를 쫓아간다. 남은 것은 고작 MBC 하나 뿐인 것인가. 과연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대의 씁쓸한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