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까 기자놈들이 기자짓하면서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설득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설득당하는가? 기자가 판사인가? 기자가 심판인가? 그래서 기자만 설득할 수 있으면 그동안의 의혹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고, 기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의혹만으로 유죄가 된다는 것인가?

 

기자놈들이 검찰과 붙어먹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검사놈들도 자기가 판사라 생각한다. 수사단계에서 이미 판결까지 모두 머리에 그리고서 수사를 한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어떻게 누구를 무엇을 수사하고 그를 통해 어떤 혐의를 입증해 나갈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기자들이다. 기자들 역시 그런 검찰의 수사정보를 받아서 아예 판사처럼 여론재판을 통해 판결을 내리려 한다. 이러이러하니 유죄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렇게 비명에 간 것이 아니던가. 한명숙 전총리가 강요된 증언에 의해 오욕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었다. 조국 전장관도 그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고, 유시민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그 마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채널A의 검언유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는 대부분 언론들이 그 공범이라 보면 된다. 검찰이 수사했으니 당연히 유죄가 나올 것이고, 그러므로 검찰이 흘린 정보는 정확한 사건정보로써 유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재판부에서 검찰과 언론이 손잡고 노력한 결과로 원하는 판결이 나오면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하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그냥 거든다. 재판부야 검찰과 언론이 원하는 판결만 내려주면 되는 기관이다.

 

그러니까 되도 않는 사실들을 가지고서도 확인조차 거의 않고 아무렇게나 검찰이 조서 꾸미듯 던지고는 판사처럼 해명을 요구하고 판결부터 내리려 드는 것이다. 검사 없어도 이런 정도는 자기들끼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기껏 이것저것 찾아서 기소하고 판결까지 내리려니까 감히 윤미향따위가 해명하겠다고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어디 한 번 떠들어보라. 그리고는 자기들 원하는 대답이 아니란 이유로 설득하지 못했다. 설득은 늬들이 아니라 국민들이 판단하는 거거든? 너희들은 단지 국민들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실만을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들이 아직도 국민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이 배우고, 그래도 번듯한 기자증도 달고 있고, 언론이라는 권력마저 배후에 두고 있다. 국민들따위가 어디 자기보다 많이 알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속내가 무심결에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 것이다. 윤미향 의원이 해명해야 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닌 기자들 자신이다. 윤미향 의원의 해명에 대해 판단하고 납득하는 것 역시 국민이 아닌 기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자들이 판단을 끝내면 국민은 그냥 그 결과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가지들을 설득하라. 기자들을 납득시키라. 문제는 그렇다고 과연 기자놈들에게 그럴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작년 조국 전장관의 기자간담회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다. 최강욱 의원이 법정에 출석했을 당시에도 바로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을 것이다. 더럽게 무식하다. 그렇게 자신들이 무시하는 국민들보다도 무식하고 멍청하다. 그래놓고는 작년 조국 전장관 기자간담회에서도 자기들에게는 그럴 권한도 실력도 없다며 우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수사권도 없는 자신들이 어떻게 그런 사실들에 대해 깊이 알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늬들이 회계를 알아? 아니면 위안부운동에 대해 관심이라도 있어봤어? 한겨레조차도 정대협이 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 듯하다. 그런 주제들이 기자증 하나 달고 있다는 이유로 판사행세를 하려 한다.

 

하긴 그래서다. 원래 실력없는 재판관이 증거나 증언보다는 진술에 더 의존하는 법이다. 엄밀하게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속편하게 당사자의 설명만으로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전근대의 재판이 그따위로 이루어진 것은 대부분이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한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 언론은 권력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국민들더러도 들으라고. 자신들이 듣고 판단하면 국민들이 그에 따르라.

 

미디어오늘이라면 다른 미디어 매체들을 비평하는 미디어일 것이다. 그래도 양심적인 매체로 분류되는데 하는 짓거리가 딱 이 모양인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언론과 언론 아닌 것 두 가지밖에 없다. 언론이 엮이면 그들은 모두 언론이 되고야 만다. 이제는 화도 거의 나지 않는다. 기자가 기자했다. 언론이 언론했다. 바람이 불고 꽃이 핀다. 당연하다.

간단하다. 더이상 국민들이 언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언론이 뭐라 떠들든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다. 다만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억울함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으니 그 때문에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뿐,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에 대해서는 별반 크게 관심도 없다.

 

그러고보면 이마저도 조국 전장관의 덕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너무 오래 잘 버텨 주었었다. 검찰과 언론과 보수야당과 보수시민단체가 어떤 식으로 결탁하는가 덕분에 적나라하게 국민들 앞에 노출되고 말았었다. 청와대를 겨냥한 수사에서도 그 모습들은 반복되었었고, 유시민 이사장을 노린 계획이 드러나며 국민들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일개 기자나부랭이가 무려 검사장을 들먹이며 수감중인 죄수에게 가족을 인질삼아 한 개인을 음해하라고 협박까지 했던 사건인데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조차 거의 드물었었다. 아, 이런 게 언론의 실체구나. 원래 언론이란 문재인 정부에 적대적인 집합체로구나. 그렇다면 언론의 지금 정의연과 윤미향에 대한 보도도 다른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전에는 그래도 한겨레와 경향이라면 진보언론이기에 진보정당과 진보정부에 더 우호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마저 비판보도를 낸다면 진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보수지지자들과 한 줌 정도 남은 독자들 말고 이들 언론을 진보언론이라 여기는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원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적대적인 언론이기에 불리하다 싶으면 그냥 무작정 사실확인없이 가져다 쓰는 조중동과 다를 바 없는 언론이다. 알리바이가 무너졌다. 그래도 조국 전장관까지는 통했는데 심지어 경향의 경우는 '민주당만 빼고' 같은 칼럼까지 싣는 바람에 빼도박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한겨레와 경향이 정부와 여당에 불리한 기사를 쓴다고 굳이 믿어 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다. 하도 떠들어대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다른 시민단체들은 어떠할까라는 당연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다 똑같은 놈들이지 뭐.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이면까지 스스로 유추해서 판단하려 한다.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하고,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하는 것 보니 나쁜 놈들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특별히 대통령이나 민주당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만큼 심각한 정도인 것인가. 실제 언론이 쏟아낸 의혹보도들만 보더라도 굉장히 큰 비위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냥 소소한 잡범 수준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조국 전장관도 언론이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그저 잡범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소된 혐의 모두가 유죄로 인정되도 그래봐야 흔한 잡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사퇴여론이 높은 것은 따라서 언론이 공격해서라기보다 이용수 할머니가 직접 나서서 피해자인 당사자의 입으로 그동안의 모든 활동까지 부정해가며 그를 비판하는 말들을 쏟아낸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힘이지 언론따위 이제 누구도 제대로 읽거나 신뢰를 보내는 경우란 거의 없다. 아마 언론의 기사를 인용해서 정의연과 윤미향을 공격하는 당사자들도 정작 언론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신뢰도 없을 걸? 그냥 언론이 자기들 편이로구나. 한겨레와 경향까지 기꺼이 자기들 편이 되었구나. 얼마나 문재인과 민주당이 싫었으면.

 

그래서 아무 영향도 없는 것이다.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에는 도움이 되었는가. 정의당의 지지율은 조금이나마 높여 주었는가. 이용수 할머니를 등에 업고서 마치 자기들이 잘해서 그런 것처럼. 주제도 분수도 모르는 병신들은 그냥 답이 없다.

 

언론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신뢰를 잃은 언론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인가. 언론이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총선 이후 언론의 연패다. 그렇게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달려들어서 민주당의 180석 의석을 막는데도 실패하고 있었다. 언론보다도 강하다. 다만 이용수 할머니보다는 약하다. 우스운 현실이다. 

굳이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았다.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무지와 오해와 악의의 소산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조금만 사회생활을 해봤어도 아예 상주하는 건물관리인의 월급이 120만원이라는 것부터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며칠만 소홀히 해도 바로 티가 나는 게 바로 집이란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이용해도 상관없게끔 유지하고 관리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집값이라는 것이 땅값만으로 정해진다는 것도 현실을 조그만 알아도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헛살았어도 그 정도 모를 정도는 아니다.

 

아무튼 민주당이 언론과 야당의 공격을 버텨볼 만큼의 명분은 제공한 소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바로 납득이 될 만큼 워낙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이라는 것도 허술한 것들이었고, 해명 역시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 시민단체 주먹구구로 운영한 것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사정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터다. 뻔한 인원에, 뻔한 예산에, 더구나 오로지 선의만으로 모인 아마추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회계처리까지 전문적으로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인재라면 그 월급 받고 그 대우 받으며 시민단체에서 썩거나 하지 않는다. 특히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윤미향 당선자의 아파트구매에 대한 의혹들.

 

사실 이 부분이 안성 쉼터 관리자 월급 120만원과 함께 주위에 설명해주기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어떻게 혼자서 상주하며 경비도 하고 관리도 하는데 한 달에 받는 돈이 120만원밖에 안 될 수 있는 것인가. 이건 특혜가 아니라 혹사다. 분개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에게 그런 일까지 시키는가. 그런에 아파트 구입과정을 보니 더 어이가 없다. 주위에서 40대 이상 된 사람들 죄다 붙잡고 한 번 물어보라. 1995년 4500만원짜리 빌라를 구입했던 사람이 2012년에 2억 6천짜리 아파트 사서 아직까지 거주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너무 비싼 아파트를 산 부분이 아닌 그것밖에 집을 넓히지 못한 부분을 문제삼으려 들 것이다.

 

진짜 악의적이었다는 것이, 1990년대의 내집마련과 2020년의 내집마련은 그 느낌부터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1990년대까지는 그래도 허드렛일을 하면서라도 열심히 아껴서 잘 모으기만 하면 어떻게든 나이 먹고 내 집 한 칸 정도는 장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혼이라도 하면, 아니 결혼하기 전부터도 나중에 내 집 한 채 장만해 보겠다는 현실의 꿈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계획까지 세워가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도 혼자서 벌어서 윤미향 당선인이 아파트를 사기 몇 해 전에 그보다 더 비싼 아파트를 그것도 서울 변두리에 장만하고 계셨다. 아버지 덕분에 교회 사택에서 살며 월세가 나가지 않았다면 주위의 도움까지 받아서 1995년 4500만원짜리 빌라를 사고 1999년 7900만원짜리 아파트를 산 것이 그리 크게 문제가 되는가. 2012년 샀다는 아파트도 고작 2억 6천 정도였다. 그동안 아파트 가격이 올라서 주위에서 돈을 끌어다 산 다음 아파트 사서 갚았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 지금 부동산 가격이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여겨지는가. 한 마디로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들도 평생 벌어서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기가 그리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최저임금이 많이 올랐지 임금상승이 상대적으로 부동산가격의 상승에 비해 정체되면서 평생 모아서 아파트를 산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인 망상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도 열심히 돈벌어 아끼고 모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내 집 한 채는 장만할 수 있다는 희망 정도는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것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불가능해진 시절이가. 그러면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래서 윤미향은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내 집 한 채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 어떻게 잘 굴려서 지금은 그보다 더 크게 불린 경우도 적지 않다.

 

전형적으로 달라진 현실의 차이를 무시한 채 그를 이용해서 대중의 인식을 왜곡하고자 의도한 기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자들이 몰라서 그런 프레임에 우루루 쫓아갔겠는가. 몰랐을 리 있는가. 알면서 그냥 몰아간 것 뿐이다. 대충 년도와 금액이 나왔으니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오는 반박이라는 게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조금만 조사하면 나오는데 무슨 증거? 결혼하고 아버지 일하는 직장 사택에서 살다가 내집마련부터 한 부분을 문제삼으려면 문제삼을 수 있어도 아무리 그 나이에 그 정도 집 한 채 갖는 것이 뭐가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굳이 횡령이니 유용이니 할 필요 없이도 대부분 살 수 있는 정도의 집이다. 자기 집이 이미 있으면 그 집을 팔아서 상당부분을 메울 수 있는데 주위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도 실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정대협 대표로써 강연도 다니고 책도 내고 기고도 하면서 받았을 돈들을 생각하면 그동안 그 정도밖에 돈을 모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30년 동안 샀던 모든 집들을 더해서, 심지어 아버지가 산 집까지 더해서 5채를 현금으로 샀다라.

 

그런데도 자신들을 기레기라 부른다고 싫어한다면 너무 자신들을 칭송하는 표현이라 그런 것이라 여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레기도 아니고 기더기조차 불편하다면 자기가 구더기도 못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 여겨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사람이기라도 하다면. 더 악랄한 놈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면서 조선일보의 프레임을 따라갔던 한겨레,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과 정의당이라는 자칭 진보정당일까. 몰랐을 수 없다. 몰랐다면 언론으로서든 정당으로서는 존재할 이유자체가 사라진다.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어차피 믿을 사람은 믿고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는다. 다만 다툴만한 여지는 생기게 되었다. 과연 누가 옳을 것인가.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6월 1일 개원까지 윤미향 당선인과 민주당이 야당과 언론의 연합공격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6월 1일이 지나면, 더구나 6월 5일이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민주당의 시간이 시작된다. 일단 언론사 정부광고부터 끊고 나서.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다.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좋은 언론사도 망한 언론사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기자와 언론사는 사라져야만 한다. 언론의 자유는 그냥 개소리다. 믿음이다.

결국 노무현 재단이 목적이었구만. 진중권까지난 긴가민가 했는데 김근식이 확인해 주었다. 어째 정의연과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면서 뻔히 인터뷰까지 하고 조선일보 프레임 그대로 따라 기사를 쓰더라. 한겨레 이야기다. 김운근씨와 인터뷰하고 9억 받으려던 집이라는 말까지 다 듣고서 그러나 조선일보가 주장했으니 의혹이다. 노무현 - 아니 노무현재단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민주진영 인사들에 대한 그들의 평소 감정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거래한 것이다. 위안부 운동을 끝장내고 일본에 유리하게 결론나도록 정의연 공격에 협력하는 대신 노무현재단을 확실하게 조지겠다. 채널A의 어설픈 짓거리로 놓쳤던 유시민도 확실하게 잡고 이해찬과 문재인도 반드시 엮어 넣겠다. 그 정도 약속이 되어 있으니 자칭 진보언론과 정당에서 정의연 공격에 이리 적극적인 것이다. 정의연을 공격해야 노무현 재단을 통해 대통령까지 공격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았는가. 심상정의 탄핵 발언은 언론의 왜곡이 아닌 진심이었다고.

그렇게 다시 검찰과 자칭 진보가 하나가 된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검찰에 의해 수모를 당할 때 자칭 진보의 태도가 어떠했었는가. 그때의 영광을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자칭 진보야 말로 수구와 함께 청산해야 할 적폐라는 이유일 것이다. 참여정부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악하고 집요하다. 민주당의 힘을 보여줘야 할 때다. 검찰개혁은 자칭진보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끔찍하다.

참 나도 배에 기름이 낀 모양이다. 그렇게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대한민국 국민 전체로 보자면 한참 아래쪽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잊고 있었다. 아, 그랬지. 이제야 이용수 할머니가 이해가 된다.

 

그동안 머릿속이 간질간질거렸었다. 뭔가 떠오르는 것 같은데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마 감정을 다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슷하게 나 자신이 느꼈던 분노와 실망, 허탈감 같은 것들이 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헛소리 지껄여대는 자칭진보들 욕하다가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도 배웠다는 자칭 진보들이 어째서 검찰의 일이 자기 일인 것처럼 저렇게까지 밀착되고 일체화되고 마는 것인가.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소리다.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이 떠밀리듯 옹기종기 고여 지내는 이른바 달동네라 부르는 곳에는 그리 수다장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허구헌날 입만 열었다 하면 과연 있었을까 싶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의 이야기들로 날을 지새고는 했었다. 대학교는 구경도 못해봤다면서 중고등학교에서는 항상 1등이었고, 반장도 도맡아 했었다. 어렸을 적 고향에는 제법 넓은 땅도 있어서 떵떵거리고 지냈었는데 시절이 좋지 않아 이런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최근의 일로 넘어오면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 얼마나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더라. 자기가 지금 일하는 집에서 사모님이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옷과 악세사리를 가지고 있더라. 집은 얼마나 넓고, 끼니마다 나오는 반찬은 어떻고. 누군가 혹시라도 빨간 물이 들어서 그런 사장과 사모들을 욕할라면 마치 자기 일인 양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억압당하고 훼손당한 자존감에 대한 보상으로 과잉되게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 비참하고 비천한 만큼 그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이 때로 왜곡과 거짓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대상에 대한 투사가 그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고, 혹은 인연을 맺고 있고,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 그러니까 내가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집에서 일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니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없으면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나마 훌륭한 사람 집에서 그를 위해 일한다는 가치라도 있어야 자신을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을 봤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때로 그런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사람은 목숨까지 내걸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었는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직 고루한 과거의 인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겪고 견뎌왔을지 역시 감히 짐작하려는 자체가 송구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수 십 년을 홀로 속으로 삼키며 힘들게 버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기 시작한 것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자신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며 주위에서 자신을 돕고자 나선다. 자신이 겪은 그 고통스런 경험이 지금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굳이 정신대와 위안부 피해자를 구분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그런 기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입으로는 진보를 외쳐도 어차피 그런 게 현실에서 이루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언제까지나 이 사회에서 소수이고 주변에 머물게 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너무 옳은데. 자신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그 모든 방향들이 현실의 어느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당연하기만 한데. 하지만 세상은 자신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들을 인정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실망과 좌절이 분노로 바뀌었을 때 그런 자신들의 상실감을 채워 줄 다른 대상을 찾으려 하게 된다. 뭔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만큼이나 정의로우면서 자신들에게는 없는 힘을 가진 대상에게. 민주당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3당합당 이후 아주 최근까지 민주당이란 그야말로 지리멸렬 그 자체였던 터라. 이명박도, 박근혜도, 심지어 그 얄밉던 노무현까지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그 힘이란 얼마나 멋지기만 한 것인가. 이재명까지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한 마디로 검찰이란 어차피 이루어질 리 없는 허무한 주장들을 신념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들을 대신할 그들의 무언가란 것이다. 검찰이 잘하면 자기들이 잘한 것 같고, 검찰이 이기면 자기들이 이긴 것 같고, 검찰이 개혁의 대상이 되면 자기들이 개혁의 대상이 된 것만 같다. 오죽하면 한겨레가 오보의 오명을 써가며 검찰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겠는가 말이다. 경향일보 기자들은 마치 자기가 진짜 검사라도 된 것만 같다. 물론 자칭진보만이 아니다. 다른 언론사 기자란 것들도 꿈만 높았지 결국 월급쟁이로 현실은 시궁창 이하라는 것이다. 언론이 쓰레기인데 기자인 자신은 더 쓰레기다. 그나마 덜 쓰레기가 되는 것은 검찰과 함께하는 것이다.

 

윤미향 당선인이 이용수 할머니를 계속해서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비로소 이해가 되려 한다. 전부터도 가까이서 지켜보며 느껴왔던 모양이다. 2012년 비례대표로 출마하려 했던 것이나, 이번에 윤미향을 배신자라 주장하며 정의연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려는 모습이나, 나아가 이용수 할머니 자신이 밝힌 모금운동을 마치고 맛난 것 사먹자고 말했다던 그 상황까지 모두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다. 많이 닮아 있었다. 동네 할머니였는데. 참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좋아하고, 입도 걸고,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이 그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욕이라기보다는 윤미향 당선인의 말처럼 상처가 그만큼 컸기에 이상행동으로 보일 만큼 그 보상을 위한 당연한 욕구조차 남들보다 더 컸던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피해자들이 이용수 할머니 같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그동안 겪었을 역정들이 다 다르다. 남들보다 더 상처가 깊은 만큼 그를 드러내는 방법도 남들보다 과격하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차라리 그런 할머니를 이용하기 위해 주위에서 부추기는 놈들을 욕하는 쪽이 더 맞지 않을까. 한도 많고, 원망도 많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보상을 받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평생을 굶주리던 사람에게 먹을 것이 주어지면 배가 터질 것 같아도 차라리 토하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의연에서 굳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직접 반박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마 정의연 스스로 그런 피해자들의 행동에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런 때 자신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대협 시절에도 활동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었는데 당시는 피해자들도 수 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비난을 자신들이 뒤집어 쓸 지언정 차마 반박조차 못하는 정의연과 할머니의 이름을 빌어 위안부의 역사마저 왜곡하려는 놈들 가운데 누구를 더 믿어야 하는가.

 

맞는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닮았다. 진짜 아주 오랜 기억이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시절까지 자랑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아마 아직 살아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참 인간이 슬픈 것이다.

당뇨도 상당히 위험한 병이기는 하다. 하지만 또 굳이 당뇨가 있다고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천식도 비슷하다. 여러가지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주의하며 관리만 잘 하면 어떻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는 될 수 있다. 어차피 완치가 어렵다면 병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노력을 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리가 부러졌다면 당연히 정상적인 일상을 누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치료가 끝날 때까지 쉬고만 있기에는 당장 내일의 밥벌이가 걱정이다. 치료하겠다고 한 주나 두 주, 혹은 한 달 정도는 쉬면서 치료만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굶어죽을 지경이면 아픈 다리를 이끌고도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목발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것이다. 깁스라는 것도 하게 된 것이다.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어떻게든 제약은 있겠지만 일상의 일부나마 누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한다.

 

백신이든 치료제든, 아니 설사 그런 것들이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더라도 한 번 생겨난 코로나19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옳다. 타미플루가 있어도 인플루엔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을 감염시키고 또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지금까지 인류가 앓아 온 병들 가운데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해도 좋은 것은 천연두가 아마 거의 유일할 것이다. 나머지는 백신도 치료약도 있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앓고 누군가는 죽기도 하는 가운데 저항할 수단에 의지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상태라 보는 것이 옳다. 혹은 몇몇 사람은 병에 걸려 죽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예방도 할 수 있고 치료도 할 수 있으니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영위할 수 있다.

 

이대로 백신도 치료제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그저 병만 무서워하며 아무것도 않고 움츠려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병에 걸리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가운데 최대한 감염의 위험을 차단하면서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다시 일상을 영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자칫 병에 걸려 죽기 전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해 굶어 죽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무도 농사짓지 않고, 농사를 지어도 그것을 유통하려 하지 않고, 유통해 온 것들을 팔지도 사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사회는 커녕 개인의 일상조차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지은 것들을 소비자들에게로 날라와야 하고, 가게에서는 그것들을 팔아야 한다. 소비자들 역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것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되고 돌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그를 위한 실험인 것이다. 지금 세계의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일이기에 오로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실험인 것이다. 이대로 개인이 최대한 코로나19의 감염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의료기관이 혹시 모를 감염에 대해 차단과 치료를 책임지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얼마간의 감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의료시스템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감염은 어쩔 수 없는 상수로 여겨야만 한다. 대신 그 의료시스템을 유지하며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원들까지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도록 경제시스템을 다시 가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장비도 생산해야 할 것 아닌가. 개인의 위생을 위한 도구들 역시 충분히 공급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겠다고 마스크 생산공장마저 재택근무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어디까지 무엇까지 각오하고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를 위한 데이터따위 없다. 대한민국 스스로가 그 모든 데이터를 찾고 만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앞서가면 다른 나라들은 그 길을 따라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위험한 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기에는 어쩌면 인류의 선봉으로서 대한민국에게 지워진 책임이 막중하다. 어떻게 하면 이 코로나19라고 하는 황당할 정도로 감염력도 치사율도 변이도 잘되는 질병과 인류는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아직 100명 이하에서는 확진자가 나오더라도 대한민국의 의료체계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인의 활동이 위축되며 다른 환자들까지 줄어든 것을 감안했을 때 매일 그런 정도 수준으로 확진자가 나온다면 대한민국의 의료체계 안에서 크게 문제없이 소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위한 노력이다. 확진자 0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확진자 20명 정도에서 계속해서 관리된다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즐길 수도 있는 그런 세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정부가 여러 우려에도 굳이 개학을 강행하려는 이유인 것이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새로운 조건에서 시험적으로 적용해 보려는 것이다. 다만 그런 정부의 노력에 호응하지 않거나 아예 관심도 없는 이들이 불안요인으로 더욱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있을 뿐.

 

아직은 괜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쿠팡과 같이 전혀 아무 경각심도 없이 개인과 집단의 방역과 위생을 방치하기만 한다면 다시 사회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영구히 거리두기를 하며 스스로 말라죽을 것인가. 아니면 제약이 있더라도 일정부분 일상을 회복하고 사회가 돌아가도록 할 것인가. 쉬운 선택은 아니다. 트럼프나 아베가 아닌 이상 그런 선택이 쉬울 리는 없다. 어떻게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대한민국은 살아갈 것인가.

 

아마 세계 여러나라들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인류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질병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전같지는 않더라도 다시 어느 정도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란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희망만 가지고 싶다.

전에도 말했듯이 조국사태가 검찰이 정부에 싸움을 건 것이라면, 지금 정의연 사태는 언론이 여당인 민주당을 상대로 싸움을 건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국사태에서는 언론이 검찰을 따라갔고, 정의연 사태에서는 검찰이 언론을 따라갔다. 목적은 하나다. 검찰을 건드리지 말라. 언론을 건드리지 말라. 그러니까 괜히 자신들을 개혁한다고 나서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주며 여론까지 움직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이런 도발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검찰이 수사한다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사퇴부터 시켜서는 행정부의 인사권은 검찰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검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마다 꼬투리잡고 수사해서 언론플레이한다고 매번 사퇴시키다가는 검찰이 거부하지 않을 사람만을 눈치를 봐가며 인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버틴 것이다. 최대한 버티고 버티다 마지막에 사퇴한 것이었다. 청와대가 사퇴시킨 것이 아니라 장관 자신이 가족을 걱정해서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정부와 여당의 검찰에 대한 개혁을 차근차근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선거법을 앞세운 정의당의 방해가 있기는 했었다.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소수정당의 원내진출을 돕겠다는 대의를 깡그리 무시한 정의당의 행보로 봐서 선거법 개정을 위해 검찰개혁을 늦춘 것은 과연 어느 쪽에 그 진심이 있었을 것인가.

 

그러니까 금태섭이든 김해영이든 강창일이든 고작 그만한 인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더 크기 위해서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그렇게 쉽게 놓으려 해서는 안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이란 곧 자기가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기도 하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과연 검찰이 수사한다고 행정부에 대한 인사권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대통령에게 주어진 인사권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대통령에게 인사권이 주어지는 것은 자신이 국민들에 약속한 정책들을 실제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재들을 알아서 골라서 책임을 맡겨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대통령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스스로 찾아서 임명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대통령이 인사권자로서 모두 짊어져야 한다. 그러라고 국민들도 굳이 자기 시간을 할애해 가며 투표도 하고 대통령을 선출해서 그 막강한 권한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과 언론과 여론이 떠든다고 그저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만 인사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책임한 것이다. 인사의 책임까지 모두 검찰과 언론과 여론에 맡기게 된다. 대통령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모두 방기하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민주당에 무려 177석이라는, 민주당에 우호적인 의석까지 181석에 이르는 막강항 힘을 쥐어준 이유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언론이 쥐어 준 힘이 아니다. 언론은 처음부터 단 하나도 예외없이 민주당의 패배만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나마 MBC 정도만이 중립을 지키고 있었을 뿐, 한겨레와 경향마저 채널A 기자가 물고 올 유시민의 의혹을 터뜨릴 준비를 모두 마친 채 선거가 시작되기 전 기다리고 있었던 정황이 있다. 김남국의 그 말도 안되는 프레임이 조선일보를 통해 제기되었을 당시 그를 받아쓰던 한겨레와 경향의 신속한 행동들을 보라. KBS는 어땠을까? 언론이 도와서 181석이 아니라 언론의 방해에도 그를 무릅쓰고 민주당에 투표한 사람의 수가 그 만큼이란 것이다. 그것은 민주당이 그동안 하고자 했던 정책들에 대해 한 번 마음껏 펼쳐보라고 힘을 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민주당이 져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안성 쉼터를 그리 비싸게 샀다고 지랄하더니만 결국 어제 언론도 인정하고 말았다. 오히려 9억에 내놓을 매물을 판매자의 선의로 싸게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가에 사고서 팔 때는 싸게 판 것이다. 그마저도 2016년부터 매물로 내놓았었고 화장장이 들어설 것이란 소문이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 반박이 가능하다. 심지어 지난 30년 간 부모와 남편 포함 5번의 주택구입이 있었다는 것마저 시차를 무시하고 의혹이라고 제기하는데, 최종적으로 구입한 아파트의 가격이 지금 내 소유로 있는 아파트 정도의 가치다. 한 채 더 있다는 지방의 아파트인지까지 다 포함해도 30년 간 부부가 애써 노력해서 돈벌어 장만한 부동산의 전부라면 진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란 것이다. 얼마나 거지들인지 몰라도 요즘 전세도 어지간하면 그냥 1억은 훌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좀 쓸만한 집이면 2억은 가뿐히 넘어간다고 봐야 한다. 의혹이라는 게 대개 이런 수준이다. 그런데 언론이 의혹이라고 떠들면 다 사실로 간주하고 기껏 자신들이 공천한 국회의원마저 자기들 손으로 사퇴시켜야 하는 것인가.

 

그런 식이면 아예 앞으로도 당의 운영을 언론에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공천하고, 누구를 남기고, 어떤 정책들을 위해서 당력을 기울일 것인가. 그래서 열린우리당이 망했다. 언론이 뭐라 기사만 쓰면 과반수 여당이란 것들이 지레 휘둘려서는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뭐 하나 이루지 못하고 그야말로 폭망하고 말았었다. 언론이 하자는대로 다 하고서는 그 책임은 열린우리당 혼자서 다 짊어져야 한다. 아마 그때 많은 정치인들이 깨달았을 것이다. 언론이 주장한다고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함께 져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 책임에 맞는 권한 역시 자신들이 직접 결정해서 휘두르는 것이 맞다. 이해찬도 당시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지켜봤던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이다. 우상호 역시 마찬가지다. 김해영은 국회의원도 아니었고, 강창일은 그때 언론에 휘둘리던 수많은 정치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아는 것이다. 여기서 언론에 하나가 되어 떠든다고 밀린다면 민주당에 미래는 없다. 미래통합당과 하나가 된 언론에 밀리면 이후 의회에서도 언론과 하나가 된 미래통합당에 밀릴 수밖에 없다.

 

당장 정의당부터 참여정부시절로 돌아가서 미래통합당과 손잡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자칭진보 인사들이 자신들의 정의를 위해서 미래통합당과 보조를 맞추려 하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 역시 정의연 사태를 통해서 자신들의 스탠스를 명확히 했다. 민주당의 공천을 받으면 어제까지 함께 연대하던 정의연조차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정의연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게 문제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보수고 진보고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민주당을 적대하며 밀어붙이려 할 텐데 그때마다 언론이 떠든다고 물러나기만 한다면 과연 민주당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 정책과 지향 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냥 언론사 사주들 불러다가 국회의원 배지 하나씩 나눠주고 마음대로 해보라 하는 쪽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면 언론사 사주들이 그 책임까지 모두 나눠 지게 될 테니까. 양보해서 실패하면 그 책임도 민주당에게로 돌아온다. 밀려서는 안되는 이유다.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자신들에 표를 준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원망을 듣더라도 결국 결과로써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버티는 것이다.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언론이 싸움을 건다고 지레 항복하고 물러설 수는 없다. 지지자들이 과분한 힘까지 쥐어준 이상 그것을 믿고 끝까지 버티며 자신들이 약속한 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것이 책임이다. 그래서 지금 민주당의 지지율이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상관없이 거의 흔들림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한 편으로 자신들의 여론이 반영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여론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강인함에 믿음을 가지기도 한다. 확실하게 실력이 있다 여겨지면 오만도 독선도 결국 자신감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지지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은 그냥 약하고 비겁한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면서도 민주당을 믿지 못하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신마저도 믿지 못한다. 그런 지지자들을 국회의원으로서 믿지 못한다.

 

물론 나는 윤미향이 사퇴해야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퇴 정도가 아니라 정의연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입장이 그리 정리된 이상 정의연의 용도는 이미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그를 기회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한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언론이 싸움을 걸어 온 이상 6월 1일 21대 회기가 시작할 때까지는 버텨주어야 한다. 민주당이 가진 힘을 과시하고 언론의 공격에 힘이 빠질 때 쯤 언론과 상관없이 물러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겨야 한다. 이겨야 언론과 검찰의 훼방과 상관없이 민주당이 바라는 정치를 의회에서도 할 수 있게 된다.

 

이해찬이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이유다. 아마 이낙연이었다면 다음 대선에 대한 부담 때문에라도 이렇게까지 강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낙연에게 당권을 물려주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 이 싸움을 피투성이가 되어 진흙탕을 뒹굴어가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민주당에 자신밖에 없다. 이낙연에게로 당권이 넘어가면 그때는 또 다른 민주당이 될 수밖에 없다. 언론이 감히 덤비지 못하는 강한 민주당의 힘을 한껏 과시한 뒤 이낙연다운 민주당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정치인의 책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인 것이다.

 

여론이 시킨다고 그대로 따르는 것만이 좋은 정치는 아니란 것이다. 언론이 떠든다고 여론이 움직이는대로 이리저리 휘청이는 정치란 오히려 무책임한 것일 수 있다. 권한이란 책임이다. 주어진 권력만큼 정치에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그 책임이 버거울 때 때로 사람들은 권한마저 내놓으려 한다. 오만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책임감있고 자신감도 강한 것이다. 잘 싸워주고 있다. 이해찬이나 우상호나. 탈당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이렇게 잘 하는데. 훌륭하다.

자칭 진보가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와 정반대의, 명백히 틀린 정책을 펼치는 보수정부 아래서다. 더 선명하게 보수정부를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써 자신들의 진보적 정책을 국민들에 제시할 수 있다. 설득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민주정부는 자칭진보들에게 수렁이라 할 수 있다. 뭐라 주장하든 그 정도와 과정만 다를 뿐 대체로 비슷하다. 이래서야 차라리 보수정부가 낫지 않겠는가.

 

극우가 준동하지 않으니 위안부 문제에서 자기들이 할 역할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극우가 날뛰며 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해야지만 언론 자신들에게도 비비고 들어갈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위안부 운동을 주도하던 윤미향 전이사장이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니 거대여당인 민주당을 등에 업고 진짜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자칭 진보의 존재감을 위해 민주정부를 타도해야 하는 것처럼, 위안부운동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정의연을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모를 리 없었다. 정대협은 위안부운동의 시작이고 끝이다. 처음부터 정대협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정대협의 이름과 함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나마 모양새좋게 물러나기라도 했으면 그만한 여지라도 생겼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지난 정대협의 30년 역사를 부정한다면 함께 지난 30년 간 정대협이 해 온 활동들까지 모두 부정되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정대협이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위해 해 왔던 모든 노력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언론 자신이 제기한 의혹과 함께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중이다. 이용수 할머니 자신의 주장을 빌어 그저 피해자들의 삶이나 더 편안하게 유복하게 보살피면 되는 것이지 무슨 해외 시민단체와의 연대이고 여성인권운동인가. 사실 자칭 진보언론들도 동의한 바였다. 이용수 할머니를 철저히 속이고 이용한 정대협은 가짜였다. 기만이고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위안부운동을 계속한다?

 

위안부와 관련한 모든 진실들도 정대협의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을 것이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위한 모든 논리와 근거들 역시 정대협을 통해 세계의 시민들에게 제공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정의연이 가짜다. 정의연은 단지 피해자들을 이용해서 사익을 추구한 위선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과연 위안부 운동은 무엇을 근거로 기반으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가.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조차도 정대협의 강요와 강제에 의한 것으로 몰아간 바 있었다. 그렇게 정의연을 다 걷어내고 나면 정의연과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위안부 운동을 자신들을 위해 남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결국은 정의연이, 지난 정대협의 30년 세월이 언론에 의해 부정당하며 정대협이 앞장서 온 위안부운동 역시 부정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던 이들이 더 기세등등하게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등에 업고 위안부운동 자체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기들이 그러지 말라면 그만둘 것이라 믿는 것일까. 도대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설마 한겨레, 경향 등 자칭진보들도 처음부터 그들과 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아니라면 정의연만 지우면 위안부운동은 다시 원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놓여질 것이란 믿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무튼 어이없다. 정의연을 박살낸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와 활동들까지 모두 부정하고, 그 위에 겨우 힘겹게 이루어진 위안부 운동의 성과만을 지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멍청한 것이 아니면 고도로 사악한 것이다. 누가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세력들에게 그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는가. 잘못이 있다면 마땅히 밝혀서 책임을 물었어야 하겠지만 그런 결정적인 정황증거조차 아직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항상 이 새끼들은 비슷한 행동들을 반복해 왔었다. 하긴 유물론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정의연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윤미향이 아니더라도 전혀 아무 문제 없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정대협과 윤미향이 이루어낸, 정말 힘겹게 헤쳐 온 과정들을 깡그리 무시한다. 진짜는 이념이고 이상이고 주장이다.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입진보인지도 모르겠다. 흩날리는 낙엽보다도 가벼운 한심한 것들이다. 

모르긴몰라도 지금 정의연을 둘러싼 논란들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위안부운동을 둘러싼 주도권다툼에도 있을 것이다. 해외활동가들도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돌아가시기까지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전이사장이 위안부운동의 최전선에 있었으니 이제는 다른 주체가 나서서 위안부운동을 주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그 틈이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위안부운동에 있어 정대협이 가지는 상징성이다. 사실상 위안부문제가 불거진 초기부터 활동해 온 단체이고, 이후 위안부운동의 모든 중요한 장면들을 만들어 온 주체였다. 그야말로 위안부운동의 시작이자 끝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러니까 이용수할머니의 기자회견문에서도 정의연이 이루어낸 성과 위에서 새롭게 시작하자 했었던 것 아니겠는가. 정의연을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그동안 정의연이, 정대협이 이루어 온 것이 너무 크고 너무 많다. 모두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다만 착각한 것은 그동안 정대협을 노려 온 적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힘까지 세다. 거의 모든 언론과 식자층과 정치권과 한일관계에 민감한 기업들이 그동안 위안부문제에 앞장서 온 정대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정대협만 사라지면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 할머니를 개별설득해서 쉽게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다. 정대협만 아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위안부 문제는 대중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을 것이다. 그나마 국민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었으니 지금까지 버틴 것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타겟이 되어 오욕속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지금 언론의 보도가 목표하는 바는 하나다. 정대협을 신뢰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에게 더이상 신뢰하지도 지지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무려 30년 동안의 이용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처음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을 속이고 이용한 것이다. 정대협 활동의 모든 정당성을 부정한다. 정대협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수요집회까지 부정한다. 정대협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수요집회도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지지해 온 위안부운동은 더이상 없다. 과거에도 모두 거짓이었고 앞으로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신들도 속은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정대협이 추구하던 위안부운동의 대의를 이해하고 동의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그동안 위안부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지원해 왔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어느 순간 정의연과 함께 여론이 공격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어제까지 위안부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던 이들이,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고 끝냈어야 했다고, 2015년 위안부협상을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들이 어느 순간 피해자들의 편에서 위안부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해왔던 이들을 앞장서서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럴 수 있는 명분을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그들 스스로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위안부운동을 시작한다면 충분히 정의연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말했다. 원래 그들은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이들이라고.

 

미래통합당 곽상도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미래통합당이 그동안 위안부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 오고 있었는가. 심지어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과 행동을 함께하는 모습까지 보여 온 이들이었다. 2015년 위안부협상의 주체이기도 했었다. 협상의 내용을 받아들이라며 피해자들을 강요하고 이간질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기자회견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앞장세워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렇게 정대협의 활동을 지지해 왔던 이들을 모두 잘라내고 몰아내고 나면 누가 남겠는가. 그것도 아주 불쾌한 기억과 함께 몰아내고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면 과연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지해 주겠는가.

 

어차피 저쪽의 목적은 그동안 자신들의 의도를 방해해 왔던 정대협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 없애는 것일 게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정대협을 대신하고자 하는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대협이 사라지고 그들이 다시 저들이 정대협을 대신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까. 아니 그렇게 된다고 과거 정대협을 성원하고 지지하던 국민들이 새로운 운동에도 성원과 지지를 보내줄까. 정대협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가짜고 거짓말이었다면 그 자체로 그동안의 지지조차 의미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모든 활동을 깡그리 부정하는 새로운 운동을 지지하기에는 너무 낯설고 불편하기만 하다. 불쾌한 감정마저 남기고 만다. 사실 진짜 의도하는 바일 것이다. 정대협의 활동을 지지해봐야 결국 남는 것은 회계부정이나 횡령 같은 불편한 기억들 뿐이다. 무엇으로 앞으로 그런 사람들을 전처럼 열정적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해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긴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동안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들의 일관된 노선이기도 했다. 진짜가 아닌 가짜는 필요없다. 진짜가 아닌 가짜독자마저도 자신들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꺼이 거부한다. 진짜 독자들만 남기기 위해 심지어 위악스런 기사까지 내보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생존자 가운데 전면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한 분을 중심으로 새롭게 판을 짜는 것일 게다. 그 새로운 판 위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대협은 끝났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문을 작성하는데 7-8의 사람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냥 관여했을까. 그냥 아무 상관없는 개인들이었을까. 기자회견문에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대신했으면 한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었다. 그러기 위해 정대협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아가며 지금까지 공격해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대협과 함께 그동안의 위안부운동 전체를 부정하며 지지자들까지 시궁창으로 내몰았다. 불쾌한 감정들이 쌓이고 있다. 내가 왜 저런 놈들로부터 위안부문제에 대해 이따위 비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인가. 그 원인을 돌이켜 보면 남는 것은 역시 불쾌한 기억 뿐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정대협의 운동방향을 지지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저 국민들은 아무 판단도 없이 그냥 위안부운동이라 하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인가.

 

사실 새로운 것도 없다. 한일관계가 좋아지면 당연히 좋겠지만 지금 그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일본정부인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사과하고 배상도 하고 사이좋게 지내고도 싶은데 정대협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 역시 지금도 열심히 활동은 하고 있지만 일본정부 차원에서 거부하고 있으니 크게 진척은 없다. 정대협만 사라지면 일본 정부가 갑자기 온건해지고 유연해진다고? 그런 말을 잘도 받아쓰는 기자놈들의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 보고 싶다.

 

원래 위안부운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배제한 채 관심도 없이 오히려 그를 부정하던 사람들로 주위를 채운다. 지지자들을 분열하여 일부를 배제하며 그를 공격할 논리까지 제공해준다. 정대협의 해체는 그냥 시민단체 하나의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아무튼.

어제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성의있게 해결하려 하고 있다. 정신대 문제를 함께 엮지만 않았으면 벌써 일본 정부에 의해 사과도 받고 보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정신대 문제를 끌어들여 중간에서 훼방놓은 정대협이 잘못한 것이다.

 

딱 그대로 지금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의 편에서 최대한 억울함이 없도록 함께 일본정부에 항의하며 싸웠던 이들은 비난받고,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을 윽박지르며 합의를 종용하던 놈들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2015년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 1994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는 것이 옳았다. 할머니 자신은 아니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소녀상도, 기념관도, 기림비도, 세계 여성단체들과의 연대도 의미없고 현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옳다.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진자 이용수 할머니의 말처럼 운동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운동이란 전시 성노예라고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가 아닌 피해자들의 개별적인 경험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강제로 인신을 약탈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했어도 자신들과 같이 이야기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위안부 운동을 한다고 모금했으면 모두 피해자들을 위해서만 써야 하고 다른 어떤 활동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지원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런 프레임 전환에 좋아라 끼어드는 진중권은 역시나 진중권이라 할 밖에. 그렇다고 진중권만 욕하기에는 한겨레나 경향이나 정의당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제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보고 정의연과 윤미향을 욕하던 사람들마저 냉정해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다. 지금 이용수 할머니가 주장하는 바의 의미를 이해한 때문이다. 그러면 그동안 자신들이 위안부 운동을 지지해 온 것이 뭐가 되는가.

 

실제 그동안 피해자 개인의 고통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을 모색하며 그 활동들을 지지해 온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보면 더 많을 것이다. 정의연이 이룬 가장 큰 성과다.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류 보편의 세계의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로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미 의회에서 결의문도 내고, 세계 각지에서 시민들이 나서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든 활동들이 아무 의미없다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정의연과 연대하고 있고 내부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해외의 시민단체들에 대한 취재나 인터뷰조차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정의연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일부러 모아서 들려줄 뿐 정의연을 지지하는 단체나 개인의 목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다. 그동안 정의연의 활동에 대한 부정이다. 조중동이야 그렇다치고 한겨레와 경향까지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내용의 일부만 인용해서 윤미향을 죄인으로 확정짓고 공격하는데만 골몰하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이른바 말하는 위안부 인권운동이란 이것으로 끝이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의연은 해체하고 윤미향 당선인도 사퇴해야 한다. 다만 6월 1일까지는 버텨 주어야 한다. 언론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운동의 방향이 바뀐 이상 정의연이 더이상 존재할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 것이다. 윤미향 당선인이 국회로 가더라도 더이상 피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뭘 하겠는가. 그동안의 활동을 모두 부정당했는데.

 

이번 논란을 보면서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이들이 크게 허탈감과 허무감마저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피해자들과 함께라고 생각했었다. 일부 생각이 다른 피해자들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세계시민의 문제로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모두의, 그리고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아마 그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의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그 부분을 전혀 말하지 않는 자칭 진보언론을 보면서도 역시 자칭 진보는 진보가 아님을 확인한다.

 

다시 말하지만 정부 입장에서 크게 나쁠 것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도 어려운데 여론이 이런 식으로 바뀌면 그냥 2015년 협상에서 조금 더 얹어 받는 수준으로 재협상을 해도 크게 욕을 먹을 정도는 아니다. 정의연이 사라지면 할머니 개인들을 설득하기도 더 수월해진다. 정의연이 버티고 있었기에 그동안 보수정부에서도 할머니들에게 직접 접근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이제는 그런 정의연도 없는데 뭐가 어렵겠는가.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으면 - 아니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자세만 견지해도 위안부 문제는 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정의연이 걸림돌이기는 했었다. 일본이 편한대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었다. 한국 언론과 여론이 그것을 치워주었다. 뭐라 말하기도 싫다. 말을 섞기도 싫은 놈들이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편에 선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 꼴같잖다.

 

내가 지금 느끼는 불쾌감의 정체다. 나 자신까지 부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당사자의 문제이므로 내가 무어라 거기에 대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차라리 맡기고 지켜보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민주당 입장에서 소극적인 이유는 위에 설명했으니 이해하면 될 것이고. 과연 누가 진짜 피해자일지는. 어떻게든 알아서들 잘 하겠지. 다 의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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