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차라리 위안부운동을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 주장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들처럼 무책임하지 않으니까. 도울 수 없다.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무것도 않고 있는 이상 나같은 미미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냥 활동가들 남은 삶이라도 편하게 위안부운동도 접고 정의연도 해체하고 자유롭게 살라 말해주는 것 뿐.

 

내가 이번 정의연 논란을 지켜보며 더욱 대한민국 자칭 진보들과 자칭 지식인들에게 깊은 혐오감을 가지게 된 이유다. 차라리 나처럼 돌을 던졌어야 했다. 어차피 돕지 않을 것이면 더이상 괜한 수고와 고통을 겪지 않도록 포기하게라도 해주었어야 했었다. 보수언론이 공격하고, 보수정치권이 합세하고, 여론이 불리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니 차마 욕먹기는 싫어서 정의연의 편에서 한 마디 거드는 말조차 못한다. 언론이 공격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보수정치권이 공격하는 것도 그만한 빌미가 있었을 것이니 정의연이 더 잘했어야 했다. 반성하고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사실상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의 공격을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더 역겨운 것은 그러면서도 위안부운동의 취지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위안부운동을 이어나가야 한다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진 보수단체들이 더 많이 달려들어 집회 자체를 훼방놓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선의와 그동안의 노력까지 모조리 부정당한 채 상처투성이로 너덜너덜해진 상황을 보면서도. 사람이 언제 땀을 흘리는 지 아는가? 심화가 뻗친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교감신경의 작용으로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땀까지 비오듯 흘리게 된다. 근육에 경련이 오고, 갑자기 오감의 감각이 마비되고, 소화기관에도 분명 이상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윤미향 의원을 두고 그들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들은 무어라 하고 있었는가.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해체한 뒤 흩어졌으면 저런 비참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버티려다 보니까. 그래도 악착같이 견뎌보려다 보니까.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정의연 해체하라 대놓고 떠들어댄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이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들보다는 더 솔직하고 더 의미있는 주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전히 되도 않는 의혹으로 오물을 묻히고 상처까지 헤집고 있는데 자기는 더러워질 수 없으니 한 마디 보태지도 못하면서 그냥 견디라. 그냥 참으라. 그냥 잘하라. 오죽하면 아무도 정의연을 돕지 않으니 정의연의 편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김어준마저도 상종못할 인간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그래도 정의연의 그동안 활동을 지지해 왔고 앞으로의 활동 또한 지지할 것이기에 뻔히 예상되는 언론의 공격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오물구덩이를 뒹굴 각오까지 했던 김어준이 어째서 그런 놈들에게 비난을 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그래도 고작 블로그에서 끄적이는 수준이라 할지라도 글이라는 것을 쓰면서 한 가지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원칙이 있었다. 비겁해지지 말자.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해야 하는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함께 욕먹고 함께 조롱을 듣더라도 내가 그리 판단했고 필요하다 여겼다면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뭐 대단한 것 해 준다고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짧지도 않은 내 글을 읽어주고 하겠는가. 유튜브도 저리 많은데 이미 시대에 뒤쳐진 블로그 글따위 일부러 찾아와서 읽는 사람들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겠는가. 기껏 찾아와서 욕이나 지껄이고 돌아가더라도 그래도 솔직한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차라리 진중권이 진보인 연 지식인인 연 하나마나 한 듣기 좋은 소리나 반복해서 지껄여대는 허깨비들보다는 낫다. 욕먹기 싫다면 그냥 입 쳐닫고 살면 그만인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를 보면서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진짜 조용했다. 평소 그리 입바른 소리를 떠들어대던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 가운데 과연 누가, 몇이나 정의연을 위해 기꺼이 모든 언론과 여론의 공격까지 감수하며 전면에 나서고 있었는가. 김어준 뿐이다. 내가 김어준을 참 한심하게 보는데 그래서 내가 김어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중권에 쌍욕을 하면서도 진중권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그렇다고 자신이 공격당할 상황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용수 할머니의 진의를 의심했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정의연의 의혹들에도 편들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고, 혹시라도 사실로 드러났을 경우 책임도 지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위안부운동의 취지가 옳았다는 사실 역시 지식인으로서 부정해서는 안된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래서 정의연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나도 같이 돌을 던질 텐데, 너희는 원래 선의로 하던 것이니까 그마저 모두 견디며 하던 운동을 계속 하라. 사이코패스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차마 더이상 정의연에게 위안부운동을 계속하라 못하겠던데.

 

사실 빚을 진 것은 정의연이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과 대한민국 사회 전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수가 무려 수 백에 이르렀던 적도 있었다. 당시에도 정대협 활동과의 수는 모두 해봐야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었다. 대부분 시민들이 먹고사느라 바빠서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동안에도 정대협 활동가들은 항상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왔던 것이었다.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들이 다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렇게 자기 생활조차 없이, 거의 최저임금에 가까운 돈만 받으면서, 다른 수입은 거의 기부하다시피 해가며, 수 십 년을 이 하나를 위해 헌신해 왔는데 이제 앞으로는 욕까지 더 먹어가며 계속해야 한다니. 사람이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포기하면 편해진다. 그냥 실패했다 여기고 아예 놓아 버린다면 더 힘들고 괴로울 일도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던 것이었는데. 아마 남은 활동가들의 심정도 거의 비슷한 정도로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 있을 것이다. 보수언론이나 정치권이야 원래부터 정대협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마지막 칼을 그들의 심장에 겨눴는가? 이쯤에서 진짜 놓아주는 것이 저 분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은 아닌가.

 

대한민국 모두가 적으로 돌아선 상황이란 것이다. 자칭 보수도, 자칭 진보도, 그동안 자신들과 연대해 왔던 지식인사회도, 그나마 지지율이 아직 크게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니 민주당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텨주고 있는 정도다. 더이상 위안부운동을 이어나갈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절망감과 상실감이 어떤 이유로든 불행한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 보는 것이다. 어째서 상황이 이런데도 여전히 자기 편할 궁리만 하는 것인가.

 

그동안 정대협과 자칭 진보들 사이의 유대를 모르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시민사회도 이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공격당할 때 자칭진보는 절대 자신들을 위해 나서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지켜보거나 상황이 불리하면 오히려 함께 돌이 아닌 칼을 휘두르며 나선다. 이번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게 자칭 진보란 것들이다. 

어째 이런 일 생길 것 같더라니. 난 원래 인간이 비겁해서 안 될 것 같은 싸움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 해서 버티는 것조차 안 될 것 같다 여기면 바로 도망쳐 버린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피해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시작부터 과정과 결과 모두를 부정했는데 과연 정의연이 무엇으로 그 모든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만두라 했던 것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희생자를 내고야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 운동에서 피해자들은 그냥 시작이고 끝이며 근원이고 결과다. 피해자들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다. 무라야마가 만들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정대협이 부정할 수 있었던 것도 끝끝내 받기를 거부했던 피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의 위안부협상 역시 그를 거부하는 피해자들이 있었기에 힘을 받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피해자 자신이 위안부운동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러면 끝인 것이다. 피해자 자신은 물론 피해자를 신뢰하는 여론에 의해 정의연은 그동안의 모든 활동을 철저히 단죄당하고 있는 중이다.

 

정의연 관계자들의 지금 심정이 어떠할지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아마 그 가운데서도 아주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피해자들이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텨야 하는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이 너무 좋아도 때로 너무 잔인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버티며 상처입고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것이 과연 선의이기만 한 것인가?

 

과거의 역사는 역사고, 역사의 상처는 또 역사의 상처일 테고, 그러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의 역사도, 역사의 상처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안타까울 뿐. 나이 60에 14년을 활동해 왔으면 정말 지난 세월들이 억울할 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세월 동안 다른 일을 했으면 하다못해 막노동을 해도 돈은 더 벌었을 것이다. 얻은 것은 없이 부정당했다는 오욕만 남았다.

 

떠난 이를 안타까워하며. 더이상 이런 희생이 없어야 한다 더욱 다짐하면서. 그래서 무의미한 위안부운동은 이제 끝내는 것이 옳다. 수요집회도 중단하고, 정의연도 해체하고. 그동안 정의연과 함께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던 자칭 진보, 자칭 지식인 집단들마저 모든 언론과 함께 등돌린 상황이다. 그나마 믿을 것이라고는 민주당 180석 뿐인데, 정치란 때로 너무 잔혹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과연 희망이 있을 것인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다.

원래 자칭 진보들이 예전부터 늘 해 온 짓거리다. 여기서도 몇 번 쓴 적 있었다. 민주정부에서 뭔가 개혁을 해보려 하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반대하다가 그래서 여론에 떠밀려 좌절하고 나면 실패했다벼 비난한다. 아니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에도 뭐라도 보수정부와 여당과 맞서 이루어내려 하면 역시나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서 비난하다가 그래서 결국 힘에 밀려서 좌초되고 나면 무능하다며 온갖 조롱과 비아냥을 쏟아낸다. 다만 이번에는 좀 타이밍이 빨랐다. 역시 열린민주당 포함 180석이 한겨레에게도 부담이었을까?

 

미디어오늘이야 원래 똑같은 놈들이다. 미디어오늘 기자놈 둘이 김용민tv에 나와서 자기들은 아닌 것처럼 입바른 소리들 늘어놓지만 결국 미디어오늘이 다른 언론과 다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미디어오늘에서 한겨레 강희철 기자가 썼다는 뭔 책 하나를 오늘 소개했다.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한겨레 이 새끼들 또 시작이구나. 임기 3년차에 21대 국회가 겨우 시작되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왜?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때문에. 자기들이 검찰개혁 막기 위해서 발악했던 일들 따위는 깡그리 잊어 버린다.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검찰의 목소리를 받아서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것도 아예 없었던 일인 양 무시해 버린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늬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래서 과연 벌써부터 검찰개혁의 실패를 이야기할 시점이었는가?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아직 2년이나 남았고, 21대 국회의 회기가 이제 겨우 시작되었고, 이후 이낙연 의원이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될 수만 있으면 5년의 시간이 더 남은 것이다. 검찰이 저 지경이인 것이 벌써 수 십 년 된 문제인데 과연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강희철과 한겨레가 부족하다며 비판하는 그 검찰개혁안조차 한겨레를 포함한 모든 언론이 검찰과 보수야당과 손잡고 막아서는 것을 억지로 비집고 이루어낸 성과란 것이다. 강희철이나 한겨레가 불만인 부분이라면 원래는 지금보다 더 후퇴한 안이었었는데 윤석열의 폭주로 인해 오히려 더 진전된 내용으로 바뀐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윤석열 검찰로부터 충실히 받아쓰는 한겨레 기자것들이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을 비판하는 것부터 웃기는 일인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부정 아니겠는가.

 

아무튼 확실한 것은 한겨레가 지금 왜 저지랄을 하는가 미디어오늘의 기사로 분명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역시 전에 이야기한 바 있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저 지랄을 해대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사를 검증하고 비판하려는 문빠들에 대한 반감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이 쓰는 기사들에 대해 사실여부를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진다.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띄엄띄엄 비판하는 기사만 써주었어도 시민들은 자신들을 추앙했을 것이었다. 더구나 비판하는 짬짬이 정부에서 원하는 기사만 내주면 알게모르게 들어오는 지원도 꽤 쏠쏠했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정부에서 자신들은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하기만 한가. 그러니까 차라리 이명박근혜시절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도 검찰과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 윤석열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명박 때가 가장 좋았다고. 박근혜는 차마 아니더라도 이명박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검찰에 힘을 실어준다. 이후 들어설 보수정부에 방해가 될 만한 시민단체도 알아서 치워준다. 사실상 지금 한겨레는 조중동과 한 몸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정의연과 윤미향을 공격할 때도 뻔히 알고 있을 사실들마저 외면한 채 조선일보의 논조를 따라가기만 바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겨레를 같은 편이라 여기고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직 그렇게 여기는 놈들이 민주당에도 적지 않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강희철 자신이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굳이 지금 시점에 그런 책을 낸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끝났고 실패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더이상 검찰개혁을 시도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특히 민주당 내부에 아직 자신들을 믿고 귀기울이는 놈들에게 그리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너희들도 한목소리로 검찰개혁에 반대하라. 금태섭처럼. 조응천처럼. 저놈들의 의도는 최대한 악의로 해석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새삼 확인하게 된다. 미디어오늘도 똑같은 놈들이다.

일본 전국시대 필생의 라이벌인 다케다 신겐을 돕기 위해서 소금까지 보냈던 우에스기 겐신은 그러나 정작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영민을 인신매매하던 다이묘에 지나지 않았었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필요하면 한 해 수확의 8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고, 그래도 부족하면 영내의 어린 여성들을 붙잡아 상인들에게 팔아 재정을 마련하던 당시의 다이묘들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절대왕정시절 유럽의 중상주의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걷는 것보다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쪽이 훨씬 쉽고 빠르고 간편하며 수입도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의 군주들은 사실상 농민들을 상인들에 아예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풍년이 들어도 상인들이 식량을 다 쓸어가다시피 하니 농민들은 굶주려야 했었고, 심지어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국왕의 명령에 의해 매점매석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늘어나는 국왕의 재정수입 만큼 상인들만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 구조였었다. 다시 말해 중상주의가 추구하는 부국강병이란 자체가 아직 국민이 되지 못한 백성을 배제한 오로지 국왕과 그 주변의 지배세력의 부와 군사력만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백성은 굶어죽어도 국왕의 주머니만 풍족하다면 국가가 부유한 것이다.

 

당연히 유럽의 군주 가운데서도 세금만으로 수입이 충분치 않으면 자국 국민들을 붙잡아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용병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더 비싼 값을 받고 용병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창가의 경우도 대부분 국왕이나 고위귀족의 소유로 그들로부터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군주의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던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랬었다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던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국가와 군주란 역시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믿고 충성하며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있었을까? 바로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였었다.

 

그에 반해 아예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던 조선말에조차 조선의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고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억울하고 부당한 모든 일들을 해결해 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을 둘러싼 부패하고 무능한 신하들이 문제인 것이지 왕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런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왕이란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 어려움을 헤아려 바르게 이끄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곧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했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왕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들 역시 부모를 따르는 자식처럼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인 것이다. 왕과 백성이 둘이 아니고, 국가란 왕과 백성이 서로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도 백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백성들 역시 왕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공동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게 된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 아래에서도 최소한 권력이 직접 국민을 해하는 경우는 없어야 했었다. 하물며 아직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학생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군사독재가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경찰이든 군이든 대학 경내로는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사자들을 고문하고 증거와 증언을 조작해서 무고하게 재판에서 형을 받게 하더라도 최소한 직접적으로 공권력이 어린 학생들에 위해를 보이는 모습 만큼은 보이지 않으려 당시 군사독재정권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 가만 돌이켜 보면 김주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 같은 국민이 직접 들고 일어난 경우를 제외하고 사법살인이나 의문사는 있었어도 권력이 직접 국민에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노출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래서 그 약속을 국가가 어긴 순간 아무리 군이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어도 국민들은 기꺼이 일어나 그와 싸우려 했던 것이었다. 국가로써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국가가 아닌 불의한 권력은 마땅히 국민의 힘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올바른 권력으로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 맹자의 혁명론이 또 그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유교와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한말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들었을 때 많은 유학자들이 그를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유교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서로를 배척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전에도 말한 바 있는 대동사상인 것이다. 그냥 한 사회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인 것이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으로써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도 사대부로써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왕은 더이상 왕이 아니고 사대부도 더이상 사대부일 수 없다. 왕답지 않은 왕을 몰아내고 죽이는 것도 따라서 반역이 아닌 천명을 바로 세우는 혁명이 되는 것이고, 비천한 백성이 때를 얻어 왕이 되는 것 또한 천도이고 천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맡기고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게 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공동체를 유지한다. 독재를 해도 폭정을 펼쳐도 결국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용납할 수 있지만 아니면 용서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민의를 구체화할 수단으로 선거라는 제도만 더한다면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으니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충분히 인정해 준다. 대통령의 판단이고 결단이라면 일단 지지하고 힘을 실어준다. 한 편으로 요구한다. 대통령다움을.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모순되지 않다. 그래서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며 힐난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대통령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그를 이유로 서슴없이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대통령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모습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대통령을 모여서 힘으로 내쫓는 모습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랜 유교의 전통 위에 세워진 한국만의 민주주의 국가관, 사회관, 국민관, 시민관인 것이다. 국가는 남이 아니고, 국가권력 또한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중하고 복종하며 한 편으로 감시하고 심판한다.

 

촛불시위는 그같은 국민적인 당위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의 결과인 것이다. 당연히 국민이 요구하면 굳이 실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만큼 국민이 모여서 주장하고 있다면 국회든 행정부든 심지어 청와대까지 그 목소리를 듣고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들이 국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듯 국가 역시 국민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라. 그래서 솔직히 촛불시위 당시 반쯤 비웃기도 했었다. 국가를 뭘로 믿고. 국가는 타자이며 경쟁자 아닌가. 때로 배척하고 타도해야 할 적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80년대의 끄트머리를 보낸 세대인 때문이다. 과연 새로운 국가라는 개념에 익숙한 세대들의 시위는 그때와 전혀 다르다. 내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만큼 국가도 나를 위한 의무를 다하라. 너무나 당연한데 그때는 왜 그리 당연하지 않게만 들렸던 것인지.

 

어째서 코로나19와 관련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서구와 한국사회 일반의 판단이 다른 것인가. 심지어 일본이나 중국과도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연하다. 같은 유교문화권이라 해서 중국이나 일본 모두가 뼛속까지 유교사회였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의 민간을 지배하던 것은 유교보다는 도교였었고, 일본은 불교와 신도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교가 일상까지 지배했던 것은 거의 한반도가 유일했었다. 국가에 대한 인식도 그래서 서로 상당히 다르다. 누군가 그리 말하더만.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의 힘이 국가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기에 개인의 사생활정보를 국가에 관리하라 넘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슷한 맥락이다. 일단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 개인의 정보까지 모두 내주고 사용하고 관리하게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서서 뒤엎으면 된다는 자신감인 것이다. 먼저 국가를 믿고, 그리고 그 국가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국민들 자신을 믿는다. 국가를 두려워하지도 적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국민의 국가이기에 국민 역시 국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나 역시 유교를 우습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그랬었다. 그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유교가 가진 진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저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교란 유교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로부터 수입된 선거라는 제도가 그 결여되어 있던 부분을 채워주며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답게, 재벌은 재벌답게, 아니라면 마땅히 갈아치운다. 뭐가 문제였을까? 당연한 이유다.

1990년대의 일이다. 만화가 친구 하나가 단행본을 냈는데 인세를 불로소득으로 간주해서 세금을 떼어가더라며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유명 만화가 하나는 신용카드를 만들려 했더니 사실상 무직자라 신용등급이 낮아서 내주지 못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었다. 당시까지도 사회분위기란 그랬었다. 그깟 만화쪼가리나 끄적이는게 어찌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화가는 직업도 아니고 만화를 그려 번 돈은 근로소득일 수 없다.

 

검사와 기자는 이 불로소득이라는 개념부터 다시 배우고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불로소득을 죄악시하던 것은 스스로 몸을 사용해서 땀흘려 일하는 것을 모두에게 권장해야 했던 전통사회의 유산이란 것이다. 19세기까지도 그래서 일도 안하면서 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본가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수입을 지대로 꼬박꼬박 챙겨가는 지주들에 대한 반발이 거셌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지주는 때려잡아야 할 악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다. 부동산의 임대수입은 근로소득일까? 불로소득일까? 당연히 내가 부동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노동력 만큼 비례해서 받는 것이 아닌 부동산의 가치에서 파생된 소득이기에 불로소득이 되는 것이다.

 

주식을 사고 팔 때도 대부분 많은 시간을 할애해가며 여러가지 정보를 모으고 분석도 할 테지만 역시나 그와 상관없이 주식의 가치 자체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이기에 매매차익은 불로소득이 될 수밖에 없다. 부동산 매매차익 역시 마찬가지다. 채권의 이율이나 주식의 배당금 또한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지급되는 것이기에 불로소득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러면 이자소득은 불로소득일까? 근로소득일까? 어느 기업의 컨설팅을 맡아 컨설팅비를 받았다면 그것은 다시 불로소득인가? 근로소득인가? 무엇보다 불로소득이라 해서 모두 범죄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당한 수입인 것인가. 그래서 불로소득이니까 범죄다?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를. 무식하거나 멍청하거나 아니면 사악한 것이다. 정경심 교수는 이미 처음부터 단지 명목만 컨설팅비일 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것이었다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면 이 이자에 대해 조국 전장관은 무엇이라 평가했을 것인가. 그러니까 세금이 높게 나왔어도 어차피 불로소득이었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반쯤은 부부사이에 있을 법한 장난스런 가벼운 힐난이고, 반은 그러니까 받아들이라는 위로의 뜻이다. 그런데 횡령이라? 그러면 불로소득 올리는 모든 사람은 횡령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몇 년 사이 소유한 아파트 값이 몇 천 정도 올랐으니 나 역시 횡령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을 낚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감정 때문에 휩쓸리는 사람을 현혹시키겠다는 뜻일 게다. 이게 바로 검사와 기자들 수준이다. 모를 리 없으니 분명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놈들이 사람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진실이랍시고 기사를 쓴다. 일개 무지렁이 블로거도 그냥 첫 문장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짓말을 몇 명이나 속을 줄 알고 저리 태연히 늘어놓는 것인지.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새삼 확인한다. 기자것들. 쓰레기에도 구더기에게도 미안하기만 하다.

오늘 경향일보 1면을 보니 그동안 경향일보가 그 지랄을 해 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결국 이것들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첫째는 공수처가 설치되어 감히 검찰님들의 심기를 불편케 만드는 것, 둘째는 감히 정의연따위가 일본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끝까지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뒤에 계신 분들께 손해를 끼치려 하는 것.

 

경향일보의 뿌리를 생각해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이다. 원래 어용언론으로 시작되었고, 한때 대기업이 사주로 있기도 했었다. 그 뿌리가 어디갔는가 생각해 보면 경향일보가 그리 현정부와 민주당에 대해 처음부터 악의와 적개심을 가지고 기사를 써 온 이유가 너무 분명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일보 시험봤다가 떨어진 놈들이라면 더욱 보상심리에서라도 더 조선일보보다 조선일보스럽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경향일보의 뿌리를 안다면 당연하게 경향일보는 경향일보다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검찰개혁도 위안부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한다.

 

그래서 굳이 민주당 비판하겠다고 이 두 가지를 들어 무려 1면에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공수처법을 반대했다고 금태섭을 징계했는가. 어째서 그동안 정대협의 대표로써 위안부운동에서 많은 일들을 했던 윤미향을 가차없이 내치자는 내부의 주장을 용인하지 않는 것인가. 역시 첫째는 민주당 망하라는 것이겠지만 망하는 과정에서 이런 논란들이 크게 불거지며 민주당의 입장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째 저리톡에서도 패널들이 정의연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이더니만 결국은 경향일보 기사 칭찬. 조선일보도 드물게 좋은 기사 쓸 때 있거든? 단,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맞아떨어질 때. 그렇다면 경향일보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런 경향일보의 기사를 칭찬한 의도는 과연?

 

경향일보가 민주당 잘되라고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조선일보도 아는 상식이다. 중앙일보도 경향일보가 자기들 편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끔 진보인 척 기사를 쓰는 것은 단지 알리바이 만들기. 사실 한겨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정의연 해체하라고 몰아붙이는 기사를 쓰다가 검찰의 손으로 넘어가고 나니 아니었던 척 갑자기 위안부운동을 걱정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언론을 믿는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연 경향일보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자칭일보가 진정 혐오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이번 정부 들어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역시 조국 전장관이 잘 버텨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 언론에 진보란 없다. 양심도 개혁도 정의도 없다. 언론은 언론이다. 그냥 이름만 다를 뿐이다. 새삼 확인한다.

한겨레 것들은 정의연 논란이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 모양이구나. 그동안 열심히 정의연 까다가 갑자기 무슨 한미일동맹? 알리바이 만들기다. 항상 그랬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도 죽고 나니 반성하는 것처럼. 그래서 한겨레가 반성했는가? 익성의 존재를 가장 먼저 보도했던 한겨레인데 과연 지금 조범동 재판에서 익성의 존재를 입밖에라도 내고 있는가. 한명숙 재판은 어떨까? 이제와서야 검찰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을 변명처럼 달고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보수매체의 의도는 명확했었다. 무엇보다 의혹이라는 것들의 실체조차 모호했었다. 한겨레도 알고 있지 않았는가. 정작 집을 판 당사자는 9억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좋은 일 해보겠다고 7억 5천에 집을 팔았던 것이었다. 사실확인조차 않고 조선일보의 보도만이 사실이라 전제한 뒤 그마저 의혹이라며 보도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가.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따라간 것이다. 정대협이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이며 위안부 피해자들을 30년 동안 끌고다니며 이용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마저 그대로 인용해서 보도한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설마 몰라서? 그랬다면 한겨레는 폐간되어야지. 아니어도 폐간되어야겠지만.

 

정의연은 이미 끝났고 위안부운동도 이미 끝났다 여기니 더이상 같이 진흙탕을 뒹굴 필요가 없다 여기고 다음을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정부에 책임을 지우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정의연을 그대로 방치하고 공천까지 했던 정부와 여당에 이 모든 책임이 있다. 물론 기사같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내용은 몰라도 의도는 분명하다. 조선일보를 굳이 기사까지 읽어야 의도를 알 수 있는가.

 

판단이 빠르다기보다 검찰이나 조선일보에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한겨레는 진보일 때 의미가 있다. 이미 반정부 딱지가 붙은 경향일보의 기사가 이제 와서 무슨 영향력을 가지는가. 같은 진보언론이 진보정부를 깐다니 경향일보 기사를 중요하게 다루고 했었던 것이었다. 이젠 경향일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한겨레를 잃어서는 안된다. 정의당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저런 기사들이 더 역겨운 것. 언론의 판단은 끝났다. 어디 지켜보자.

이건 이용수 할머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정의연도 굳이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대놓고 반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칫 자신들이 반박하는 순간 오히려 이용수 할머니와 자신들 모두가 함께 죽을 수 있다.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정의연과 그동안 함께 활동해 온 30년 세월들을. 정대협은 위안부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다. 정대협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다. 정대협이 그동안 해 온 것은 위안부피해자들을 이용해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돕는 것이었다. 오히려 정대협으로 인해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문제가 뒤섞이며 해결만 더 어려워지고 말았다. 무슨 의미인가? 이용수 할머니 자신의 말처럼 정대협은 처음부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자격도 없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단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위안부운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운동에서 상징적인 김복동 할머니마저 정대협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이용당했다며 그동안의 위안부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말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원하고 선택해서 그리했던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정대협이 자신들을 속이고 이용하며 강제한 것들이었다. 위안부운동은 이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정도가 아닌 그동안의 모든 활동을 부정하고 아예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위안부운동에는 정대협도 그동안의 위안부운동의 성과들 역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면 이용수 할머니가 그리 주장했다고 그동안의 위안부운동은 완전히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다수 지식인들의 인지부조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동안 정대협이 주도한 위안부운동은 비단 정대협만의 운동은 아니었었다. 당연히 피해자들만을 위한 운동도 아니었었다. 그래서 무궁화회가 따로 떨어져나갔던 것이었다. 대한민국 시민사회 주류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철저히 소외되며 어느샌가 잊혀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정대협의 위안부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것은 그 방향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의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 개인의 고통과 억울함도 당연히 풀어주어야겠지만 그보다 인류보편의 인권과 여성의 문제로써 풀어가고자 했던 정대협의 운동방향은 세계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용수 할머니 한 사람이 주장한다고 그런 모든 과정들을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래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과 그럼에도 정대협의 그동안 운동방향이 옳았다고 아직도 여기는 사람들로. 서로를 용납하기에는 정대협과 정대협의 그동안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이었고, 따라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인정하는 순간 정대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마는 탓이었다. 물론 일부 지식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용수 할머니의 말을 적당히 생략하고 왜곡하고 편집하면 어떻게 공존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기들이 믿고 싶은대로 취사선택해서 어떻게든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연이 공존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이용수 할머니의 의지도 아니고 정의연의 진심도 아닌 그들 자신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대협 자체를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부정할 것인가? 이용수 할머니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중간은 없다. 제로섬게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고 바로 정의연 해체를 주장하게 된 이유였다. 정의연은 부정당했다. 정의연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이용수 할머니를 부정해야 한다. 피해자들을 위한다는 단체를 긍정하기 위해 정작 피해자들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의연을 위해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부정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정대협의 그동안 활동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기에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의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정의연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과 심지어 이용수 할머니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안부문제는 이용수 할머니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무궁화회 등 다른 피해자 개인들의 문제도 아닌 것이다. 당사자도 아닌 유가족들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좁게 보면 그같은 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공유하는 대한민국과 한국인이라는 민족 전체의 문제이며, 더 나가서는 인류보편의 인권과 여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그리 주장한다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믿어 왔던 신념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뭐라 주장하든 자신들은 자신들의 노력해 온 그 방향을 온전히 지키면서 계속 위안부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이용수 할머니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누가 이렇게 상황을 몰아갔는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명확히 시시비비를 가려서 서로의 오해와 갈등을 봉합하는 방향으로 언론이 기사를 내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서로 극단으로 치달으며 상대를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오해와 갈등을 키우는 방향으로 기사를 쏟아냈으니 이제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가고 만 것이다. 오히려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던 보수진영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싸고돌며 위안부운동을 주도하던 정대협과 시민사회를 공격하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도 이제와서 이용수 할머니도 위안부운동도 모두 지켜야 한다는 자칭진보들의 주장은 그래서 얼마나 공허하기만 한 것인가.

 

답은? 없다. 둘 중 하나다. 이용수 할머니가 입장을 바꾸던가. 아니면 정의연이 해체되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제와 정의연을 해체하기에는 정의연의 그동안 활동들에 동의하며 지지를 보내 왔던 시민들의 입장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의연이어서 지지한 것이 아니다. 정의연의 활동이 옳다고 여겼기에 지지한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새롭게 시작한 운동이라고 무작정 지지하기에는 시민들 역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들이란 것이다. 자기가 동의하지 못하는데 단지 이용수 할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해야 하는가.

 

이용수 할머니를 공격하는 것도 그런 시민들 자신의 의지인 것이다. 정의연의 위안부운동을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자신들은 앞으로도 정의연의 위안부운동을 지지할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이제와서 정의연 해체도 답은 될 수 없겠다 여기게 된다. 자신들이 옳다 여기는 방향으로 시민들은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역겹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시민들을 갈라치며 서로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란 것이.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놈들이 더 그러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엔 더러운 놈들이 너무 많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아무래도 약자와 피해자의 편에서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벌써 나이도 90이 넘었고, 그동안 위안부문제의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그 이름과 존재까지 친숙했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런 이용수 할머니가 악의를 가지고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정의연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는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지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사실 여러 매체에서 거의 비슷하게 쓰이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런 논리조차 없는 한겨레와 경향은 얼마나 정의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결국 그냥 위안부운동에 대한 결산과 방향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언론이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갈등만 부추기고 있을 뿐이란 주장은 전부터도 여러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2차 기자회견 당시 정대협은 정신대 피해자를 위한 단체라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했을 뿐이란 주장을 했을 때 과연 이용수 할머니는 노선의 차이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1차 기자회견에서도 이용수 할머니는 윤미향 당시 정대협 대표가 위안부협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주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이었는가 여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과연 이용수 할머니는 사실을 근거로 단지 위안부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었는가. 윤미향 의원이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협상 당시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해 전혀 전달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후 외교부의 공식조사로 밝혀진 사실이란 것이다. 그런데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비판하는 인터뷰 어디에 정당한 노선갈등의 논리가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명백하고 명료한 사실과 논리들을 근거로 제기된 것이라면 사실 결론은 간단하다. 2015년 위안부협상도 미리 알았으면서 속였다. 1990년 정대협을 만들 때부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로써 세웠으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앞세워 이용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 답은 나온 것 아닌가. 불법이 없었더라도 정의연은 해체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해체되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 정의연, 아니 정대협의 30년 활동은 부정되어야 맞다.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대문제 해결을 위해 위안부문제를 끼워넣은 탓에 오히려 해결만 어려워지고 말았다. 이런 악마같은 단체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위안부운동의 역사를 폄훼해서도 안되고 취지는 최대한 살려야 한다? 이게 말인가? 개인가? 

 

누군가 이용수 할머니 곁에서 이용수 할머니에게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고, 어찌되었거나 여러 이유로 판단이 흐려진 이용수 할머니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30년 동안 함께해 온 단체가 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인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인지조차 사실관계를 혼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틀린 사실을 옳게 믿고 그를 근거로 더 분노하며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2015년 위안부협상에 대해 윤미향 의원이 알고 있었다는 말을 누가 이용수 할머니에게 해주었겠는가. 혼자서 알아냈을까? 오로지 이용수 할머니만을 선으로 놓고 판단하려니 그런 기본적인 사실관계의 이해조차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이용수 할머니는 모두 옳고 오로지 선의로만 그리 주장하는 것일 터다. 그러므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정의연도 그에 맞춰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정의연 해체하면 된다니까?

 

내가 그동안 정의연 해체하고 윤미향 사퇴하라 주장한 근거는 오로지 그 한 가지였다. 피해자가 원한다. 피해자 자신이 그것을 바란다.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에 따르면 정의연이란 단체는 더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는, 아니 존재 자체가 해악이 되는 해체되어 마땅한 단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의연마저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 나름 지식인들의 안타까운 선의일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그런데 그런 때 명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단을 도와주는 것이 원래 지식인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더 냉철해지고 더 단호해져야만 한다. 동정은 결코 선의도 정의도 될 수 없다. 저널리즘 토크쇼J를 보면서 느낀 것이다. 자신의 선의에 취한 지식인의 궤변은 얼마나 아름답기만 한가.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아름답게 이해하고 꾸미려 하니 이런 오류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진흙탕싸움이 되어 버렸다. 이용수 할머니 스스로 그 진흙탕으로 알아서 뛰어든 상황인 것이다. 진흙탕을 진흙탕이 아니게 만들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될까. 그러니까 서로 대립하는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과 정의연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사실이고 어느것이 더 타당한가. 그러니까 누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서로 뒤엉킨 오해와 갈등의 진흙탕은 그로써 비로소 벗겨진다. 그를 통해 이용수 할머니든 정의연이든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할 길을 찾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무엇이 진짜 원인이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지금의 혼란과 갈등을 온전하게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 외부에서 답을 주지 않으면 그냥 오해는 오해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혼란과 갈등도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김어준도 선택한 것이다. 나 역시 선택했다. 한겨레와 경향도 선택했을 것이다. 정의당 또한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정의연을 선택했다. 정의당은 이용수 할머니를 선택했다. 그를 기준으로 해결을 위한 답을 찾고자 한다. 아마 비겁한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한 쪽의 편에 서는 순간 누군가로부터 공격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 경향, 정의당은 차라리 솔직하고 당당하다. 그러라고 있는 것이 지식인이란 것들이다. 아무것도 않고 있다. 역겨울 따름이다.

그러고보니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조선민족을 위한다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가 지배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정부도 군대도 없는 자신들이 저 강대한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조선민중의 현실적인 삶을 위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른바 자강론이니 자치론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일본을 배우며 조선민족이 더 부강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한 편으로 일본 정부를 설득해서 조선민족 스스로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치를 얻어내도록 하자. 그러므로 일본정부가 감격할 수 있도록 일본의 전쟁에도 기꺼이 조선민족이 자원에서 돕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도 어쩌면 유일한 대안일 수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사실상 괴멸상태에 있었고, 그나마 남은 상해의 임시정부 역시 존재감없이 지리멸렬해 있던 중이었다. 하물며 조선 국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1941년 진주만공습 이후 미국과 영국 같은 세계의 열강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오히려 우세를 점한 듯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의 열강들도 어쩌지 못하는 강대국 일본을 상대로 자신들이 끝까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기준에서는 친일파라 불리우는 최남선이니 이광수니 하는 이들조차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의 지성으로 꽤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진짜 친일파라면 이효석처럼 아예 스스로 조선인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협락하며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던 이들이거나. 그에 비하면 그들의 의도는 얼마나 민족을 생각하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가.

 

문제는 그러한 그들의 선택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조선반도의 물자와 인력마저 징발해서 전쟁에 동원하려 하고 있었던 시점과 겹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병탄 전부터 그렇게 마음을 정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뒤늦게 생각을 돌린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전쟁이 한창 치열해지고 그만큼 조선의 민중들마저 일본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휩쓸려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무렵이 되면 모두가 함께 모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래 가졌던 조선의 민족과 민중을 위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에는 친일파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지금도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그리 추앙해마지않는 김활란이 자기 제자들마저 일본을 위한 정신대에 자원하라며 독려했던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한국의 근대사가 왠지 휑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활약했던 대부분 인물들이 끝내는 친일로 돌아서고 만 역사가 있었던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의 강제징발과 동원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단지 이전과 이후의 공만을 들먹이며 친일이 아니었다 변명하는 것은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최근 한겨레가 기사쓰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역시 머리를 간질거리다가 비로소 오늘 아침에서야 그 비유가 떠올랐다. 이번 정의연 논란을 통해 확인하게 된 또 하나 사실이다. 한겨레는 검찰만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도 받아쓴다. 안성 쉼터와 관련해서 분명 한겨레의 기자는 쉼터 건물을 팔았던 김운근씨와 인터뷰했거나 인터뷰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건물을 짓는데만 7억 5천 이상을 썼었고 원래는 9억에 팔려 했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익명으로 처리한 김운근씨의 설명을 빌어 기사에까지 상세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겨레의 기자는 인터뷰한 당사자의 말보다 조선일보의 보도만을 사실로 전제하고 여전히 의혹이라며 보도하고 있었다. 판매한 당사자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이미 보도했고 여러 언론들이 따라가고 있으므로 여전히 그것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한 마디로 김운근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조선일보의 보도를 근거로.

 

원래 많은 시민들이 돈까지 갹출해가며 한겨레의 창간을 도왔던 이유는 기득권의 편에서 일방적인 기사만을 쏟아내는 기성언론들과 대항해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감춰진 사실들을 취재해서 왜곡된 진실을 밝혀 자신들에게 알려달라는 간절한 바람에서였던 것이다. 한겨레는 그런 점에서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으로 보수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맞서싸우던 시민사회의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들이 무어라 떠들더라도 한겨레가 취재해서 이렇게 보도했다면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조중동이 아닌 한겨레를 읽어야만 한다.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참여정부 시절에도 한겨레의 기사만 믿고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지지자들이 그리 많았었단 것이다. 설마 한겨레가 거짓말로 민주정부를 공격하고 있겠는가. 실제 그랬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조중동의 대항마로써 한겨레의 가치는 여전하지 않은가라는 반문이 이후로도 한겨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물론 다 헛된 믿음이었었다.

 

지난 조국사태를 통해서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한겨레가 조선일보를 일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확신같은 건 없었다. 그냥 어설픈 정의감에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집착이 조선일보가 주도한 반정부프레임에 갇히도록 만든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한명숙 전총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한겨레와 검찰의 오랜 유착관계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한겨레와 그런 권력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는 검찰의 밀월관계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은 아닌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돕는 것이 언론으로서 한겨레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겨레와 경향은 오래전부터 검찰과 유착하며 동화되어 왔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아니겠는가. 검찰에 대한 부정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이고, 검찰에 대한 개혁은 자신들에 대한 개혁이다. 당연히 검찰개혁을 하면 언론개혁도 해야만 한다. 자신들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국 전장관을 공격해서 낙마시켜야 한다. 추미애 장관도 공격해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아니 문재인 대통령 자신을 공격해서 내쫓고 새로운 검찰정권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설마 검찰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에게도 완전히 백기투항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참여정부를 공격하면서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힘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정부를 비판하면 한겨레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최저임금인상을 평소 주장했어도 조선일보가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니 자신들도 논리를 만들어 정부의 최저임금정책을 비판한다. 근로시간단축을 주장하다가도 조선일보가 그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니 자신들도 논리를 만들어 근로시간단축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가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한 편으로 탄압하면서도 한 편으로 당근으로 안겨준 상당한 지원들이 그런 판단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일보만 따라가면 손해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일보만 잘 따라다니면 이익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민주당 정부에서 조선일보를 쫓아서 기사를 쓰면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니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맞는다.

 

그러니까 기껏 인터뷰를 하고서도 조선일보의 보도만을 전제로 의혹이라 여기고, 그리 기사를 쓰고, 방송에 나와서도 그리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이의 말보다 검찰의 말을 더 믿었던 KBS의 상황과 비슷하다. 지금 한명숙건에 대해서도 KBS와 한겨레의 보도의 결이 다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KBS는 검찰은 따라가지만 조선일보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겨레는 검찰도 따라가고 조선일보도 따라간다. 조선일보가 판단하지 않으면 스스로 판단할 능력 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판단할 수 있어도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것이다. 아마 경향의 상황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의연 논란으로 얻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한겨레의 현재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한겨레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이것저것 주문하던 유시민이나 여러 지식인들의 어설픈 온정에 대해서도 그래서 동정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예전의 한겨레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 창간될 당시의 한겨레에 대한 기억으로 차마 미련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냥 눈치를 보는 정도가 아니다. 이제 한겨레에게 판단의 기준은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들이다. 보수언론들이 치고 나가면 따라가고, 침묵하면 따라서 침묵한다. 채널A의 검언유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한겨레의 보도는 조중동만 보면 얼추 예상이 가능하다.

 

진보언론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차라리 모욕으로 들린다. 하지만 한겨레나 경향이나 정의당이나 그 결이 너무 닮아 있으니. 홍세화나 진중권 같은 무리들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인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보수세력이라고. 보수정당이고, 보수언론이고, 보수지식인이고, 보수시민들이라고. 조선일보 쫓아서 조국 전장관 공격하는 동안 그 좋아하던 삼성에 대한 비판조차 잠시 멈추고 있었다. 삼성에 대한 공격마저 이제는 그냥 관성이 되지 않았는가. 과연 진심으로 지금 한겨레에 자기 주장과 논리라는 것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자칭 진보의 현주소다.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는 결론일 것이다. 진보의 시절은 끝났다. 80년대의 진짜 종말이다. 구시대의 유산은 역사로나 남겨야 한다.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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