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도 배에 기름이 낀 모양이다. 그렇게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대한민국 국민 전체로 보자면 한참 아래쪽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잊고 있었다. 아, 그랬지. 이제야 이용수 할머니가 이해가 된다.

 

그동안 머릿속이 간질간질거렸었다. 뭔가 떠오르는 것 같은데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마 감정을 다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슷하게 나 자신이 느꼈던 분노와 실망, 허탈감 같은 것들이 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헛소리 지껄여대는 자칭진보들 욕하다가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도 배웠다는 자칭 진보들이 어째서 검찰의 일이 자기 일인 것처럼 저렇게까지 밀착되고 일체화되고 마는 것인가. 그러니까 비슷하다는 소리다.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이 떠밀리듯 옹기종기 고여 지내는 이른바 달동네라 부르는 곳에는 그리 수다장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허구헌날 입만 열었다 하면 과연 있었을까 싶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의 이야기들로 날을 지새고는 했었다. 대학교는 구경도 못해봤다면서 중고등학교에서는 항상 1등이었고, 반장도 도맡아 했었다. 어렸을 적 고향에는 제법 넓은 땅도 있어서 떵떵거리고 지냈었는데 시절이 좋지 않아 이런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최근의 일로 넘어오면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 얼마나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더라. 자기가 지금 일하는 집에서 사모님이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옷과 악세사리를 가지고 있더라. 집은 얼마나 넓고, 끼니마다 나오는 반찬은 어떻고. 누군가 혹시라도 빨간 물이 들어서 그런 사장과 사모들을 욕할라면 마치 자기 일인 양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억압당하고 훼손당한 자존감에 대한 보상으로 과잉되게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 비참하고 비천한 만큼 그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이 때로 왜곡과 거짓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대상에 대한 투사가 그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고, 혹은 인연을 맺고 있고,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 그러니까 내가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집에서 일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니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없으면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나마 훌륭한 사람 집에서 그를 위해 일한다는 가치라도 있어야 자신을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을 봤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때로 그런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사람은 목숨까지 내걸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었는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직 고루한 과거의 인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겪고 견뎌왔을지 역시 감히 짐작하려는 자체가 송구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수 십 년을 홀로 속으로 삼키며 힘들게 버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기 시작한 것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자신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며 주위에서 자신을 돕고자 나선다. 자신이 겪은 그 고통스런 경험이 지금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굳이 정신대와 위안부 피해자를 구분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그런 기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입으로는 진보를 외쳐도 어차피 그런 게 현실에서 이루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언제까지나 이 사회에서 소수이고 주변에 머물게 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너무 옳은데. 자신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그 모든 방향들이 현실의 어느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당연하기만 한데. 하지만 세상은 자신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들을 인정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실망과 좌절이 분노로 바뀌었을 때 그런 자신들의 상실감을 채워 줄 다른 대상을 찾으려 하게 된다. 뭔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들만큼이나 정의로우면서 자신들에게는 없는 힘을 가진 대상에게. 민주당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3당합당 이후 아주 최근까지 민주당이란 그야말로 지리멸렬 그 자체였던 터라. 이명박도, 박근혜도, 심지어 그 얄밉던 노무현까지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그 힘이란 얼마나 멋지기만 한 것인가. 이재명까지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한 마디로 검찰이란 어차피 이루어질 리 없는 허무한 주장들을 신념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들을 대신할 그들의 무언가란 것이다. 검찰이 잘하면 자기들이 잘한 것 같고, 검찰이 이기면 자기들이 이긴 것 같고, 검찰이 개혁의 대상이 되면 자기들이 개혁의 대상이 된 것만 같다. 오죽하면 한겨레가 오보의 오명을 써가며 검찰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겠는가 말이다. 경향일보 기자들은 마치 자기가 진짜 검사라도 된 것만 같다. 물론 자칭진보만이 아니다. 다른 언론사 기자란 것들도 꿈만 높았지 결국 월급쟁이로 현실은 시궁창 이하라는 것이다. 언론이 쓰레기인데 기자인 자신은 더 쓰레기다. 그나마 덜 쓰레기가 되는 것은 검찰과 함께하는 것이다.

 

윤미향 당선인이 이용수 할머니를 계속해서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비로소 이해가 되려 한다. 전부터도 가까이서 지켜보며 느껴왔던 모양이다. 2012년 비례대표로 출마하려 했던 것이나, 이번에 윤미향을 배신자라 주장하며 정의연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려는 모습이나, 나아가 이용수 할머니 자신이 밝힌 모금운동을 마치고 맛난 것 사먹자고 말했다던 그 상황까지 모두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다. 많이 닮아 있었다. 동네 할머니였는데. 참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좋아하고, 입도 걸고,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이 그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욕이라기보다는 윤미향 당선인의 말처럼 상처가 그만큼 컸기에 이상행동으로 보일 만큼 그 보상을 위한 당연한 욕구조차 남들보다 더 컸던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피해자들이 이용수 할머니 같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그동안 겪었을 역정들이 다 다르다. 남들보다 더 상처가 깊은 만큼 그를 드러내는 방법도 남들보다 과격하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차라리 그런 할머니를 이용하기 위해 주위에서 부추기는 놈들을 욕하는 쪽이 더 맞지 않을까. 한도 많고, 원망도 많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보상을 받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평생을 굶주리던 사람에게 먹을 것이 주어지면 배가 터질 것 같아도 차라리 토하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의연에서 굳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직접 반박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마 정의연 스스로 그런 피해자들의 행동에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런 때 자신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대협 시절에도 활동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었는데 당시는 피해자들도 수 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비난을 자신들이 뒤집어 쓸 지언정 차마 반박조차 못하는 정의연과 할머니의 이름을 빌어 위안부의 역사마저 왜곡하려는 놈들 가운데 누구를 더 믿어야 하는가.

 

맞는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닮았다. 진짜 아주 오랜 기억이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시절까지 자랑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아마 아직 살아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참 인간이 슬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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