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란 정의와 폭력의 합성어다. 정의는 강력해야 하고, 폭력은 정의로워야 한다. 폭력은 정의가 아닌 것조차 정의로 만들 수 있고, 정의는 폭력에 대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권력인 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틀어지면 그 순간 권력은 붕괴하게 된다. 폭력이 정의를 뒷받침하지 못하거나, 정의가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할 때 권력은 안팎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끝내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언론과 검찰이 공생해 온 관계가 그랬었다. 물론 전부터도 언론은 그런 식으로 권력에 빌붙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었다. 언론이 떠들면 진실이 된다.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어 떠들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정의가 되어 버린다. 권력이 이미 저질러 놓은 행동들이 그렇게 언론에 의해 정당화되고, 다시 언론이 떠드는 소리들을 권력이 받아 행동으로 옮기면 정의는 구현되는 것이다. 권력이 언론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며 언론이 권력에 기생해야 하는 이유다. 그럼으로써 언론은 자신들의 정의를 현실로 만들 힘을 가지고, 권력은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정의로 만들 수단을 갖는다. 그래서 특히 언론과 검찰 모두에 대한 통제를 놓아 버린 민주정부에서 언론과 검찰의 유착은 폭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언론이 떠들면 검찰이 수사한다. 언론이 한 목소리로 떠들면 검찰이 기소해서 재판에 넘긴다. 재판결과는 상관없다. 재판에 넘긴 그 순간까지만 언론은 관심이 있을 뿐이다. 재판에 넘겨진다는 자체가 유죄심증이라는 논리를 언론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검찰이 수사하면 언론은 그 수사를 정의로 만들기 위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검찰의 수사는 항상 옳고, 언론의 보도는 검찰의 수사를 통해 입증된다. 그런 언론과 검찰의 협업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탄핵으로 끌어내리고 정권교체까지 이루었을 때 그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은 그 끝을 모를 지경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처럼 손잡고 함께 한다면 대통령이고 정권이고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윤석열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상황까지 만들고 만 것이었다.

 

바로 그 윤석열과 손잡고 언론은 박근혜를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다만 문재인의 집권을 막는데는 실패했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그 문재인을 치는 것이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정신줄 놓고 쫓아 달려갔던 이유였다. KBS가 인터뷰까지 왜곡해가며 검찰을 지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문재인의 집권은 막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윤석열과 함께 문재인을 끌어내릴 수 있으면, 나아가 노무현처럼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럴 힘이 검찰총장이 된 윤석열에게 있었고, 그 힘의 사용을 정당하게 만들어 줄 힘 또한 언론인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대통령마저도, 정권마저도 우습게 여기는 정말 특별한 존재들이다.

 

감히 언론 나부랭이가 소비자인 시민들을 서슴지 않고 비웃고 모욕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심지어 언론사를 정상화겠다고 파업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던 그들마저 정작 자신들이 원한 결과를 얻어내고 가장 먼저 한 짓거리가 자신들을 지지했던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편향된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필요할 때는 지지를 호소하지만 일단 얻을 것을 얻고 나면 오히려 더 비천하고 누추한 존재로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제 자신들이 검찰과 손잡고 실제 이 사회를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 더이상 시민들따위의 도움 없이 검찰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사를 통해 오보를 내고 그를 가지고 검찰에 수사받고 재판까지 받게 하면 되는 것이다. 재판결과가 나오는 동안 자신들이 만든 이미지가 그들을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그깟 시민들따위.

 

한동훈이 저토록 오만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수사에 협조한 적이 없었다. 같은 검찰이면서 검찰의 수사를 불신하며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언론이 자기가 말한 대로 써 줄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언론에 의해 자기의 말만이 진실로 전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훈의 의도 그대로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한동훈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 수사 자체마저 부정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다만 여기서 고리 하나가 빠진다. 그런데 언론이 떠든다고 한동훈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추미애가 지금 검찰인사를 미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성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허튼 짓 말고 제대로 수사하라. 인사권은 법무부장관에게 있다. 윤석열이 뭘 어쩌든 검찰의 모든 인사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에 의해 결정된다. 무엇보다 더이상 국민들이 전처럼 언론의 보도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정치권마저도 이제는 언론의 보도를 그냥 반만 흘려듣는 정도다. 언론이 떠든다고 정의가 아니다. 더구나 언론이 아무리 정의를 주장해도 검찰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사를 앞두고 과연 자기를 따르는 일선검사들도 적지 않을 이성윤이 법무부장관과 척질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한동훈이나 언론이나 여전히 오만하지만 현실은 그를 따라주지 않는다.

 

윤석열이 뜬금없이 진짜 민주주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총장과 대통령은 같다. 검찰청과 청와대는 같다. 언론과 정부는 같다. 시민과 기자도 같다. 사실 나름대로 절박하게 현실을 인정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원래는 검찰총장이 대통령 위에 있었다. 언론이 시민보다 위에 있었다.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 괴롭히지 말라. 그를 위해서 자기가 권력을 가져야겠다. 자기가 저 위에 올라가야겠다. 언론이 도와달라. 아니나 다를까. MBC가 검찰에 맺힌 것이 진짜 많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MBC만 그런 윤석열에게 한결같이 비판적이다. 우리가 이 나라를 가지자. 이 나라 대한민국을 가지자. 보수 정치권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다. 언론을 향한 메시지다. 다만 언론의 주류가 보수언론이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보이는 것 뿐이다. 윤석열이 진짜 이재용 잡고 싶어서 그를 기소하려 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조국 전장관이 하고 있는 일들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언론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인사권을 법무부장관이 돌려받으며 검찰총장의 장악력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 결정적으로 검찰을 통해 언론을 처벌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워낙 작년 이른바 조국사태를 국가적인 규모로 키워 놓은 탓에 조국 전장관의 그런 행보를 아무리 언론이라고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현행법 안에서 검찰을 통해 형사처벌을 받게 하고 민사를 통해 손해배상까지 하도록 한다. 검찰이 언론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다시 언론의 비판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검언유착으로 인해 한껏 무리수를 두고 있는 상황에 기자들을 기소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검찰의 수사와 기소를 그대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검언유착 수사에도 변수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동재 혼자 모든 것을 뒤집어쓰려 해도 과연 검찰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윤석열 검찰과 채널A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신뢰의 고리를 깬다. 검찰과 언론의 오랜 유착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검찰의 행사를 언론이 훼방놓고, 언론의 보도를 검찰이 부정한다. 벌써부터 정의연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언론의 잇딴 기사삭제와 정정보도로 난관에 처해 있다.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 언론이 책임지거나 아니면 검찰이 책임지거나. 물론 검찰은 언론을 위해 자기가 희생할 조직이 아닌 것이다.

 

사실 어느 한 쪽만 허물어도 되는 문제이기는 했었다. 검찰이 언론의 칼이 되어 주거나, 언론이 검찰의 거울이 되어 주는 경우만 막아도 검찰 혼자, 혹은 언론 혼자 지금처럼 미쳐 날뛰는 상황은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이고 현직 대통령까지 탄핵하고 나니 무서울 것 없이 날뛰던 검찰과 언론이 마침내 천적을 만났다. 문재인이 아니다. 문재인을 중심으로 언론도 검찰도 믿지 않고 굳게 뭉친 과반에 가까운 시민들이다. 그들이 언론과 검찰의 훼방에도 민주당의 176석을 만들었고, 조국 전장관과 정의연이 반격에 나설 환경까지 만들어 주었다. 결국은 언론과 검찰의 힘이라는 것도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시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을 텐데도.

 

정신을 차리면 살아남고 아니면 죽는다.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이성윤이 야망이 있다면 아마 여기서 윤석열과 다른 행보를 걸으려 할 것이다. 검찰총장도 좋지만 대법관도 바라는 것이 바로 국회의원 배지라는 것이다. 검찰총장을 거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언론 가운데서는 어디가 살아남을까. 한겨레와 경향이 망할 것은 알겠다. 조중동이야 원래 독자들이 그런 성향들이었다. 시대의 종말을 본다. 흥미로운 요즘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빌붙어 부역하던 이른바 친일파들이 해방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해방군으로 들어온 미국에 빌붙어서 반공투사가 되는 것이었다. 일제보다 더 나쁜 것이 공산주의자고, 친일에 대한 단죄보다 더 시급한 것이 그런 공산주의자들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는 친일파는 정의가 되고 혹시라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았다면 그는 단죄되어야 할 악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반공투사들을 필요로 했던 미군정과 이승만이 뒤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한 변신이었었다.

 

그러고보면 이명박근혜 당시 언론이라고는 손석희의 JTBC 정도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아, 청와대에서 나눠준 질문지대로 질문하지 않았다가 청와대 출입처가 끊겼던 미디어오늘도 있기는 했었다. 그래도 진보를 자처했으니 한겨레나 경향이나 당시 보수정부와 여당을 어느 정도 비판도 하고는 했지만 대부분 딱 당시 정부와 여당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세월호에 대해서도 차라리 민주당과 문재인을 더 욕하면 욕했지, 아니 차라리 민주당과 문재인을 더 비난했기에 청와대와 보수여당을 조금 더 비판해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2016년 말 JTBC를 시작으로 국정농단 보도가 쏟아졌을 때 조선일보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한겨레와 경향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끝까지 내달릴 수 있었을 것인가. 박근혜 탄핵에 오히려 가장 공이 컸던 것은 손석희의 JTBC가 아니라 조선일보와 TV조선일 수 있는 것이다.

 

탄핵을 앞두고 박근혜가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늘어놓을 때도 두 손 곱게 모으고 경청하던 기자들 가운데 이들 자칭 진보언론의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노무현 죽이겠다고 검찰을 동원해서 망신주고 압박할 때도 자칭 진보언론은 그 맨 앞에 있었다. 한명숙 전총리를 뇌물죄로 걸어넣으려 검찰을 동원해 공작을 꾸밀 때 역시 자칭 진보언론들은 충실히 보수정권의 손과 발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JTBC가 포문을 열고 조선일보가 호응하는 듯 보이자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듯 태도를 바꾸더니 박근혜를 탄핵하고 정권까지 교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원한 적도 기여한 것도 없는 자기들과 상관없는 정권교체였다는 사실을. 마치 일본의 지배가 영원할 것이라 여기며 부역하던 이들이 어느날 느닷없이 광복을 맞은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과거 정권에서 자신들이 했던 일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서 2017년 총선 당시 ㅅ자칭 진보언론들은 하나같이 민주당과 문재인이 아닌 국민의당의 안철수를 지지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진보언론이니 정의당의 심상정을 지지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이념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문재인을 꺾을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거의 안철수에 올인하다시피 했었다. 한겨레 기자가 자기 SNS를 통해 문재인을 문재앙이라 부르고, 선거가 끝나고는 아예 문재인 지지자들을 상대로 '덤벼라 문빠들아!'를 외친 배경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문재인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물으려 할 것이다. 물론 보수언론들 역시 처지는 비슷했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만큼 그 실정과 부정에 대한 책임 역시 함께 직접적으로 나눠 져야만 한다. 다른 대안이 없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여성계 역시 그런 언론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2년 이후 여성계는 항상 박근혜 정권을 지지해 왔었다.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근혜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왔을 것었다. 탄핵정국에서마저 여성대통령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라며 박근혜를 적극 옹호했던 것이 바로 그들 여성계였었다. 그래서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성향을 이용해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려 했던 것이었다. 친일파들이 반공을 앞세워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친여성주의 성향을 이용해서 여성주의의 기득권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움직임은 자칭 진보와 자칭 보수들에게 여성주의와 반여성주의라는 선택지를 만들어 주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보다 더 철저한 여성주의자로서 엄하게 비판하거나, 혹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여성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거나. 결국은 어떻게든 정당성과 명분을 잃은 자신들에게 정부를 비판할 빌미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더 여성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반여성주의를 주장하거나.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계기로 여성주의를 앞세우던 자칭 진보와 반여성주의를 이용하던 자칭 보수가 마치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부터 명분을 잃은 자신들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그리고 그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용해 왔던 것이 여성주의이고 반여성주의였다는 것이다. 미투는 그런 그들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 주고 있었다. 여성주의를 선택한 자칭 진보들은 미투에 편승해서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고, 반여성주의를 이용하려는 자칭 보수들은 그에 대한 남성들의 불안과 반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결국 목적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공격이었기에 박원순이라는 거물의 죽음은 그들에게 다시 하나가 될 계기가 되어 준다. 평소 반여성주의를 그토록 처절하게 부르짖던 인간들이 이제와서 정의당의 여성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하며 나서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처음부터 여성주의고 반여성주의고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박근혜로 인해 차마 현정부를 욕할 거리가 부족했던 이들에게 여성주의든 반여성주의든 단지 빌미가 되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칭 진보들에게 여성주의란 절대적인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의심해서는 안된다. 감히 진실을 요구해서도 안된다. 심지어 변호사에 대한 비판조차도 2차 가해이니 절대 금지해야만 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가해이고, 죽음을 추모하는 것도 가해이며,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마저 가해다. 그래서 더욱 모든 구성원들은 그런 2차 가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해야 했던 해방공간의 상황과 비슷하다. 여성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고 그를 단죄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들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여성주의에 대한 조금이라도 다른 대답을 하게 되는 순간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웃기는 건 자칭 진보들에게 그 권력의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민주정부라는 것. 그러나 그 권력을 민주정부를 공격해서 뒤집는 데에 쓰려고 하고 있다.

 

결국 자칭 진보들이 여성주의를 앞세워가며 현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려는 이유는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이며 홍세화 등 자칭 진보 나부랭이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윤석열이 얼마전 공개석상에서 한 발언과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은 박근혜와 같다. 문재인은 이명박과 다르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근혜 정권과 차이가 없다. 그렇게 문재인 정부를 이명박근혜 정권과 같은 선상에 놓아야 지난 정권에서 자신들이 침묵하며 심지어 부역하던 과거가 지워질 수 있다. 어차피 이명박근혜를 비판했어도 결국 들어서게 되는 것은 문재인의 민주당 정부라는 것이다. 그래도 문재인의 민주당 정부를 끌어내릴 수 있으면 자신들이 지난 정부에서 보였던 비겁함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박근혜를 끌어내린 것은 촛불시민이지만 박근혜와 똑같은 문재인을 끌어내리는 것은 언론들 자신이다. 그래서 더욱 검찰과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를 재판정에 세웠듯 윤석열이 문재인도 재판정에 세우고 말 것이다.

 

말하자면 보상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절 비겁했던 자신들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문재인 정부를 이명박근혜 정부와 같이 만들고, 그를 끌어내림으로써 그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수록, 하긴 그러고보면 박근혜 정부 말기에 대부분 정부와의 싸움은 자칭 진보가 아닌 민주당이 거의 전담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 꼴보기 싫은 것이다. 세월호 정국에서 자칭 진보가 아닌 민주당이 중심에서 국민의 마음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검찰이라면 문재인도 끌어내릴 수 있지 않을까.

 

윤석열의 현정부에 대한 날선 발언들은 그런 언론을 향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쩌면 진중권이나 홍세화 등은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의 기자들은 다시 노무현의 상황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검찰이 문재인 정부를 치겠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가 무너지면 자칭 진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달라지는 것 있을까? 그저 입으로만 떠드는 족속들이. 차라리 지금처럼 뭐라도 현실로 이루어야 하는 상황이 더 부담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니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문재인 정부는 실패하고 몰락해야 한다.

 

자칭 진보언론이나 자칭 진보지식인이나 자칭 진보정당이나 그리고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주의에 그리 철두철미해서 여성주의에 대한 종교적 광신까지 보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름의 절박함이다. 특히 자칭 진보들 입장에서 현정부와 여당을 공격할 명분이 여성주의 말고는 거의 없는 빈곤한 현실이 더욱 곤란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성주의라도 있으니 그것을 앞세워 진보입네 목소리라도 크게 낼 수 있지 않은가. 지금 와서 과연 조선일보와 자칭 진보들 사이에 과연 차이랄만한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당연한 것이다. 여성주의의 의미다. 저들에게.

지금 당장 부동산앱을 켜고 전세를 검색해 보면 반지하 아니면 거의 1억은 기본으로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에도 쓴 것처럼 연봉 3천 받는 사람이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3년이고, 절반을 쓰고 절반을 모으면 6년, 그래도 현실적으로 10분의 1씩 모은다면 30년은 걸려야 모을 수 있는 돈이다. 그나마도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전세가 이렇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연 이제 갓 결혼한 젊은 부부들이 바로 자기가 벌어서 전세금씩이나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의문인 것이다. 주위에 무려 6억이나 하는 전세를 살다가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만큼 돈을 모으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만 못한 곳으로 이사가야 하는 처지인 사람이 있다. 사실 6억이면 지역에 따라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가격은 훌쩍 넘고도 남을 금액이지만 아이가 자라고 하면 그만큼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벌이가 적은 편도 아닌데 전세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가기가 그리 버거운 것이다. 과연 전세를 살면 전세금이 고스란히 남는다고 하는데 어째서 전세금은 그대로인데 사는 집은 계속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더 낡고 허름한 더 아쉬운 것이 많은 동네로 밀려나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6억이란 전세금은 처음 계약한 2년 전의 6억 그대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인가?

 

전세에 대한 터무니없는 착각인 것이다. 나 역시 작년 이사하면서 전세자금대출까지 고려하느라 더욱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전세는 최저임금의 영향 아래 있는 가계에서 돈을 모아 마련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전세를 살려면 주위의 도움을 받거나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누군가의 비용이고 빚이 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는다면 부모는 노후의 여유를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이고, 대출을 받았다면 그만큼 이자를 계속해서 갚아야 한다. 만일 당시 내가 대출을 받아서 여윳돈없이 전세를 살았다면 지금처럼 일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집에서 뒹굴거릴 수 있었을까? 아직 남아있는 은행잔고야 말로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가장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 돈을 전세금이라는 이름으로 집주인에게 계약기간 동안 맡겨 두어야 한다.

 

사실 보증금이라는 것도 대부분 서민 입장에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막 첫직장을 얻고 사회을 시작한 초년생이 어떻게 천만 단위를 넘어가는 월세보증금을 장만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월세 밀린다고 보증금 빼가며 버틸 수 있는 시절도 아니다. 보증금은 보증금이다. 월세도 아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월세를 일정 이상 밀리면 바로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보증금 없이 단지 월세로만 살 수 있게 하도 어차피 큰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라도 바로 방을 얻으려 하면 두 어 달 월세만으로 바로 방을 얻어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만큼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내딛는 사람들에게 장벽을 낮춰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내가 벌 수 있는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런 범위 안에서 정해지는 주거비용이야 말로 온전한 서민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부모로부터 전세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딱히 월세 보증금을 기대할 처지도 아니다. 그렇다고 계속 함께 살 수도 없다. 부모 자신조차 겨우 알량한 전세나 혹은 여전히 월세에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진짜 서민들 이야기다. 남의 돈조차 없어서 보증금 5백, 1천만원 짜리 손바닥만한 방 한 칸 찾아서 헤매 다니는 이들의 이야기다. 월세는 어떻게 감당하겠는데 보증금이 너무 어렵고 부담스럽다. 최저임금이 오른 탓에 알바만 해도 어떻게 월세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증금에서부터 막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진짜 젊은 서민들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란 무엇일 것인가. 서울이 천박한 도시라는 이해찬 대표의 말에 동의한다. 청년임대주택 만들겠다 하니 집값 떨어진다며 온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반대한다. 보증금 없이 그저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월세만 내면서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있다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다른 임대인들로 하여금 더이상 월세와 보증금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대체가 월세로는 못살겠다며 전세부터 이야기하려는 서민이란 어디에 사는 어떤 서민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전세금 빌릴 곳도, 대출받을 신용도 없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평생 모은 돈에 대출금까지 갚아가며 전세 살고 내 집 살기보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수입이라도 오늘을 즐기며 살 수 있다면 그게 그리 나쁜 일인 것인지. 서민의 기준이 다르다. 월세 사는 사람이 보는 서민의 기준은 집도 몇 채 씩이나 있는 사람들이 보는 서민과는 서로 한참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가 자칭 진보들 싫어한다고. 그리 돈이 많더라. 그리 집안도 좋아서 정작 없이 사는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너무 천박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임금수준에서 전세조차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의 돈을 끌어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란 것이다. 도대체 몇 억 씩이나 하는 전세란 어디 사는 어떤 서민들의 이야기란 것인지. 차라리 아파트조차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월세가 가능하다면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100만원 씩 모아 아파트 사나 월 200 버는 것 가운데 80만원 씩 주고 월세로 사나. 그래도 20만원 남는다. 굳이 집을 사서 물려줄 필요 없이 역시 자식들 일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다.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은 더욱.

 

확실히 명언이라 할 것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부모에 손벌리지 않고서도 주거걱정 없이 젊은이들이 자신있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결혼하면서도 부담없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월세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서민의 기준이 서로 다른 때문일 것이다. 전세조차도 이미 이런 수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말많은 놈들이 절실하게 느낄 수 없는 부분일 테지만. 우습게도.

불과 3년 전이다. 3년 전 이맘 때 갑자기 실직자가 되어 구직에 나서고 있었다. 암담했었다. 이것저것 고정으로 나가는 돈이 적지 않은데 어지간해서 그만한 수입을 기대할만한 일자리가 그리 쉽게 찾아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당시 몸상태도 영 아니었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집 가까운 곳에 경력도 되지 않을 일을 찾아서 겨우 3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느꼈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어느새 고정지출을 모두 감당하고도 저축이 가능해지는 마법같은 현실을.

 

바로 며칠 전에도 썼을 것이다. 3년 동안 열심히 운동한 결과 어지간한 젊은 친구들보다 근력이나 체력에서 우위에 있다는 자신도 생겼다. 아무리 20대라고 데드리프트 스쿼트 100kg씩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은 당연히 내가 만만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닌 더 좋은 곳을 찾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게 3년 전과는 다른 자신감으로 구인사이트 뒤져보니 확실히 세상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급여에 대한 기대를 조금만 낮춰도 고정지출 다 감당하면서 생활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임금을 보장해주는 일자리가 이렇게나 많다. 3년 전에는 비슷한 일자리가 있어도 돈이 되지 않고 체력에 자신이 없어 그냥 넘어갔던 일자리들이다.

 

가만 보면 돈 좀 있다는 놈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인식이란 상당히 평면적인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 좀 적게 받아도 아무 일이나 할 수 있으면 고맙게 여길 것이다. 마치 가난한 사람은 선량하고 가난한 집일수록 정이 넘친다는 편견과도 많이 닮았을 것이다. 가난한데 어떻게 선량할 수 있는가. 가난한데 어떻게 정이 넘칠 수 있는가.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만큼 돈도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있는 집 자식들이야 시급 6천원에 주 16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용돈이나 벌어 쓰면 그만이겠지만 없는 집 자식들은 시급 8천 원으로도 주 40시간 다 채우고도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같은 시간을 일하고도 받는 돈이 더 많다면 그만큼 그 시간을 다른 일에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가난하면 시간도 필요없는 것일까?

 

내가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운동하며 체력을 단련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근로시간 단축으로 칼퇴근 이후 자유시간이 늘어난 것이 큰 역할을 했었다. 돈을 얼마간 덜 받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확실하게 쉴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투자할 수 있게 된다. 돈을 더 벌고 싶으면 일을 하나 더 해도 되는 것이고, 조금 더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싶다면 그리 하면 되는 것이다. 가난한 집일수록 가족끼리 얼굴을 자주 보는 자체가 그만큼 현실이 고단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달 내내 일해도 먹고 살 정도가 되지 못하는데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할 시간에 좁은 집구석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뒹굴거리고 있어야 한다.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다. 좀 더 적은 시간만 일해도 먹고 살 만한 정도를 넘어서 어느 정도 여유까지 즐길 수 있다면 소세지에 필라이트라도 사다가 허튼 시간도 함께 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최저임금에 바로 영향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입장에서 바로 느끼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삶을 살지 않는 놈들은 정작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니 임금이 적더라도 아무일이나 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어차피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니 더 오랜 시간 일해서 돈이라도 더 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은 줄이고 근로시간은 늘리라. 그래서 내 몸이 3년 전 그렇게 망가졌던 것이었다. 고관절과 무릎은 굽혀지지 않고, 어깨는 굽어 제대로 기지개도 켤 수 없고, 목은 뻣뻣하고 머리는 항상 아프다. 조금만 무리해도 바로 피로가 머리를 짓눌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하긴 지난 3년 동안의 피로가 몰려오며 요즘 내 상태가 그때 비슷해지기는 했다. 가난하니까 그런 삶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내가 자칭진보 새끼들 싫어하는 또 하나 이유다. 더럽게 집안들이 좋다. 돈도 많고.

 

아무튼 오랜만에 또 포털에서 개소리를 보고 말았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컵라면도 못 먹게 될 것이다. 컵라면이 아니라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집에서 직접 요리도 해서 먹을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면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냥 아무거라도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몸을 누일 공간만 있어도 사람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노동가치란 것이다. 그래서 과연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으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장담하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거라도 해서 하찮고 비루한 삶이라도 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하는 대부분은 가난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놈들일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이란 벌이가 없어 아쉬우면서도 소중한 휴식의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직접 느껴보지 못하면 모르는 것이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과연 무엇이 바뀌었는가. 나 자신이나, 내가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는 세상이나. 역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을 그만두기 직전 스쿼트 100kg으로 5x5세트에 성공하고 데드리프트는 3x1에 성공한 것이 이렇게 자신감의 원천이 되어 준다. 이제와서 대단한 일자리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고양이놈 외롭지 않게 집을 오래 비우지 않아도 되는 정도면 나로서는 만족이다. 덕분에 오랜동안 묵혀뒀던 자격증이 쓸모가 생길 모양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아 버렸는데 다행히 갱신이 필요없다니 재발급만 받으면 된다. 역시 힘이 제법 필요한 일이기에 다행이라 여긴다.

 

도대체 사람이 일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철학의 부재다. 현실과의 괴리다. 그래도 오래전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경로가 적지 않았었다. 자칭 진보가 주장하는 약자를 위한 정책들이 어째서 그처럼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인가. 지성의 소멸이다. 멸망이거나. 현실이 우습다.

미통당 윤희숙 의원 덕분에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나 역시 집이 있으면서 월세에 살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내 명의 아파트도 있고 대출금도 갚고 있는데 정작 사는 곳은 서울을 가로질러 반대편 일반주택 월세다. 그래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월세보다 앞으로 20년은 더 갚아야 하는 아파트 대출금이 더 비싸다.

 

간단한 산수다. 한 달에 월세 40만 원을 낸다. 1년이면 480만원, 10년이면 4800만 원, 30년 이면 1억 4400만 원이다. 그런데 요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얼마지? 20살부터 경제활동 시작해서 80살까지 산다고 치면 한 달 40만원 월세 모아봐야 3억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3억이면 요즘 전세 구하기도 매우 빠듯하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으면 조금 쓸만하다 싶은 집은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보는 것이 옳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6억 짜리 아파트를 사려면 1년에 6천만 원 씩 10년을 모아야 한다. 연봉이 6천만 원도 안되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10년을 모아야 한다는 소리다. 30년이면 그나마 1년에 2천만 원인데 어찌어찌 그 정도는 모은다고 해도 월세로 계산하면 한 달에 160만 원을 넘기는 것이다. 한 달에 160만 원 씩 월세를 내면서 30년을 살면 온전히 6억 짜리 집이 내 집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정도로 악착같이 씀씀이를 줄이고 모아야만 6억 넘는 아파트 한 채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그 동안 월세 60만 원 짜리 집에서 살았으면 한 달에 100만 원은 훨씬 넘겨 아끼며 다른 곳에 여유롭게 쓰며 살 수 있었겠다.

 

그래서 의문인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사람들은 자기 집을 가지려 애쓰는 것인가. 역시 고도성장기의 유산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도 오르고 월세도 전세도 따라서 오른다. 지금 당장 집을 사 놓지 않으면 전월세도 오르게 될 것이고, 따라서 어찌되었거나 지금 내 집을 장만해 놓으면 자연스럽게 그 값이 오르며 돈을 모으느라 무리한 보상은 충분히 되고도 남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래서 조금 더 좋은 집에서 살겠다고 전세로 들어갔다가 그 형편없던 집의 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것을 보며 그리 후회하셨다 한다. 당연히 전세도 따라 올라서 나중에는 전세금으로 집을 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면 부동산 가격만 제대로 잡는다면 수요자 입장에서 굳이 자기 집 장만하겠다고 무리할 이유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란 뜻이다. 어차피 아파트를 사 놔 봐야 오르지 않을 것이면 굳이 아파트 한 채 장만하겠다고 무리하게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기보다는 오히려 더 여유를 즐기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기 형편에 맞는 더 넓고 더 좋은 집에서 아이도 기르면서 문화생활도 즐기면서 가끔 사치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것이다. 하긴 어차피 더이상 개인이 돈을 모아서 집을 장만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해지기는 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일단 집부터 사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모든 국민이 자기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지금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부터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지금 내 명의로 있는 아파트 역시 사실 그리 크지도 대단하게 좋지도 않은 그냥 내가 사는 주변에서 내가 내는 대출금 정도면 월세를 구해 들어가 살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 혼자 사는 지금 이 집은 거기서도 10만 원 더 빠지는 월세를 내며 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정도 월세만 계속 유지된다면 차라리 저 아파트 팔아서 그 돈으로 다른 짓 하며 평범하게 놀며 지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굳이 그렇게까지 대출금 때문에 허리 휘어가며 쓸 것도 못 쓰고 살 이유가 과연 있는 것인가.

 

월세가 진짜 서민에게 불리한 제도인가 묻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전세금 1억 마련하기도 대부분 서민 입장에서 허리가 휘기는 마찬가지다. 어지간하면 요즘 전세도 구축 일반주택 기준으로 1억은 그냥 넘어간다 보는 것이 옳다. 40만 원 월세 20년 내나, 1억짜리 전세로 20년 사나 과연 차이가 무엇인가. 아 그래도 전세금은 남는다? 그래도 전세금도 남기고 집도 나중에 자식들에게 남겨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돈 모으느라고 억척을 부려야 하는 세월을 생각해 보라.

 

차라리 전세자금대출 받고 이자 내느니 깔끔하게 월세 싼 거 살고 말겠다. 그만큼 목돈 아껴서 그 돈으로 다른 것 하며 살면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내가 전세가 아닌 지금 월세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혼자 살기에는 충분하게 넓다. 방도 2이나 되고 거실은 있는대로 어질러도 아직 고양이가 뒹굴 공간이 남아 있다. 통장에 목돈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일을 하다 뭣같을 때는 그것 믿고 바로 때려쳐도 몇 달 넉넉하게 버틸 정도는 된다. 얼마나 좋은가.

 

언론도 정치권도 자칭 지식인이며 시민들도 전혀 하지 않는 고민인 것이다. 전세가 과연 서민을 위한 것인가. 모든 국민이 자기 집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진정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 한다면. 월세 내나, 월세 만큼 쓰지 못하고 돈을 모아야 하나, 결국은 부동산에 묶인 남의 돈일 뿐이다. 달라지는 건 없다.

행군 중에 군량이 떨어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목표한 적의 진지가 있다. 아군이 적의 10배이고 적의 진지에는 아군을 모두 먹이고도 남을 물자가 쌓여 있다면 지휘관 입장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는가. 군량이 없어 병사들이 굶을 것을 우려해서 후퇴해야 하겠는가?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으니 전력의 우세를 믿고 공세에 나서야 하겠는가? 

 

그러면 그런 적을 마주한 상대편 입장에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옳겠는가? 어차피 군량도 떨어졌으니 알아서 흩어지거나 물러날 것이라 믿고 목소리나 높일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여전히 압도적인 적의 전력을 전제하여 최대한 버틸 수 있게끔 대비를 갖추겠는가? 적이 알아서 흩어지고 물러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지만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 하면 충분한 대비 없이는 오히려 더 곤란해질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민주당이 달라졌다는 것이 이런 부분일 것이다. 예전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과반의 의석을 가지고서도 주위에서 조금만 흔들면 바로 겁먹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었다. 언론이 공격하고 여론이 악화되고 그래서 지지율까지 빠지면 조금이라도 상황을 돌려보려고 멈춰서고 물러서며 흩어지는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언론이 공격을 멈추지도 악화된 여론이 돌아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모습에 지지율만 더 급하게 빠져나갈 뿐이었다. 지지자들마저 실망해서 돌아서는데 하물며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 중도층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말이 아니다. 보여주기식 퍼포먼스가 아니다. 실제 결과를 낼 수 있는 법이고 정책이다.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이고 더 확실한 더 강력한 법을 입법부인 국회를 장악한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법안들에 문제가 있어 정책이 실패하면 당연히 민주당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대한 그대로 효과를 발휘한다면 잠시간의 지지율의 하락은 얼마든지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힘을 보여준다. 민주당이 과연 어디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그 실력을 유권자들에 각인시켜준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민주당은 어찌되었거나 주어진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정당이고 할 수 있는 정당이다. 그런데 고작 지지율 얼마 떨어졌다고 지레 겁먹고 움츠러들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떻게 도겠는가.

 

그래서 미래통합당이 멍청하다는 것이다. 정의당이 차라리 낫다. 국회 안으로 들어와서 입법과정에 모두 참여하면서 그 과정 자체를 문제삼으려 하는 중이다. 물론 그럼에도 정의당 따위 얼마든지 무시해도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크게 문제가 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래통합당이라면 다르다. 그래도 100석 넘는 의석으로 상임위마다 출석해서 법안에 대한 토론등을 통해 그 기세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고 법안의 내용에서도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미래통합당은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하도록 시간만 끌고 있어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게 될 텐데 굳이 마음대로 다 해보라고 자리까지 비워 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장외투쟁까지 한다? 더 고맙다.

 

그러고보면 21대 총선 이후 미래통합당으로 인해 민주당이 가장 곤란했던 상황이란 국회가 열리기까지 협상과정에서 비타협으로 일관하며 시간을 끌던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당장 국회에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국회가 열리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상임위조차 제대로 구성되지 않아서 국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국회가 열리는 순간 이미 예정된 과정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임위단계에서라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도록 상임위원장을 몇 개 받았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었다. 그 결과가 일사천리다. 미래통합당은 국회 밖에서 언론과 함깨 정부와 여당을 욕하고, 정부와 여당은 국회에서 필요한 법안들을 통과시킨다. 그래서 승자는 누구일 것인가.

 

결국은 법안들로 인한 결과를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당에 점수를 줄 유권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언론이 사실대로만 보도했어도 미래통합당은 벌써 나노단위로 박살났을 상황이란 것이다. 심지어 자칭 진보언론조차도 아무것도 않으며 국회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미래통합당에 대해 어떤 비판도 내놓지 않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민주당만 비난한다. 하지만 그래서 지지율이 어떻게 변화하든 결과적으로 실제 현실에 영향을 주고 그 판단을 받는 것은 오로지 민주당 뿐이란 것이다.

 

심상정은 아는데 김종인은 모른다. 아니 김종인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국회에서 열심히 싸워는 모습을 보여야 할 동기가 있는 수도권 출신 국회의원의 수가 턱없이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국회의원도 대부분 초선나부랭이들이다. 그래서 과연 지금 일시적으로 오른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이 이후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더욱 몰아붙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 민주당만이 오로지 앞으로 4년 동안 토론과 협상의 대상이란 것이다. 아직 실감을 못하는 모양이다. 늬들이 지금 늬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화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지지율을 너무 무시해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얽매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지지율은 그저 따라오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지지율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잘하면 오르고 못하면 떨어진다. 그 전에 언론부터 확실히 손봐야 한다. 다시는 감히 가짜뉴스로 까불지 못하도록.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 언론만 잡아도 상황은 크게 나아질 수 있다. 헛소리 지껄일 때가 아니란 것이다. 언론에 잘보이기보다 언론이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

 

어찌되었거나 강해지기는 진짜 강해졌다. 무엇보다 자기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게 되었다. 반복학습이 필요하다. 더 확실하게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구성원 모두가 각인할 필요가 있다. 초선이기에 더욱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수월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민주당은 강하다. 그 사실만 바로 알면 된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뿌듯하다.

원래 전세라는 자체가 고금리시대의 유산과 같은 것이다.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 90년대 초반 은행금리가 10%를 훌쩍 넘었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예금에도 분기마다 꼬박꼬박 3% 넘는 이자가 들어오고 있었으니. 당시 기준으로 전세가 천만 원이면 1년 이자가 백 수 십만 원 정도 된다. 나중에 전세금 올려받을 것까지 계산하면 임대인 입장에서도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임차인의 입장에서 전세기간 동안 목돈이 묶여 있느라 이자수입 등 추가적인 수익도 기대할 수 없는데다 물가상승까지 고려하면 자산가치가 떨어지면서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었다. 차라리 월세를 살고 목돈을 굴려서 돈을 불리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만큼 경제도 빠르게 성장하고, 시장에 풀리는 돈 만큼 물가도 가파르게 올라가면서, 현금의 가치가 현물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집을 사두면 값이 올랐고, 돈을 그냥 은행에 묵혀만 두어도 상당한 이자수익을 올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밑천이 될 만한 목돈이 있으면 그만큼 빠르게 돈을 불리는 것도 가능했었다. 그러니까 이미 있는 집 전세금 받아서 나중에 고스란히 돌려주더라도 그 동안의 이자수입이며 전세금 상승분이며 집값 상승분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언제 밀릴지 모르는 월세보다 더 확실한 수입원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독 한국에서만 세계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전세라는 제도가 유지되어 온 비결이었다.

 

그래서 문제란 것이다. 지금 은행에 예금해봐야 연이율이 2%도 채 되지 않는다. 전세금 1억 받아봐야 1년 이자가 고작 200만 원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수익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집주인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받은 전세금을 고스란히 돌려주면서도 그 동안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인가. 첫째는 전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전세금을 2천만 원 정도 올린다. 즉 2년이라는 기간 동안 2천만 원 정도의 추가수입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역시 집값이 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세를 놓고 전세금을 돌려주는 가운데 집값이 오르면 충분한 차익을 남기고 집을 팔아서 최종적으로 이익을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부동산 담보대출까지 끼어들게 되면 집값상승으로 인한 차익을 기대하고 기존의 부동산을 담보삼아 대출받고 전세금을 더해서 새로운 부동산을 사들이는 이른바 갭투자라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부동산이 오를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 만일 정부의 정책이 성공해서 부동산이 더이상 크게 오르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1억 주고 산 집이 전세기간이 끝난 2년 뒤에도 여전히 1억 그대로다. 전세로 7천만 원 정도 받았는데 돌려주고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려 했더니 전세를 올려줄 바에는 그냥 차라리 얼마간 주위에서 돈을 빌려서 자기가 직접 집을 사는 쪽이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전세금도 올릴 수 없고, 그렇다고 집을 팔자니 집값도 오르지 않았고, 당연히 금리는 거의 제로에 근접해 있다. 그동안 생활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써야 하는 돈이 있을 텐데 그것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인 것이다. 주택임대로 돈을 번다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차라리 월세가 더 낫다. 전세라는 목돈보다 많지는 않아도 꼬박꼬박 월세로 들어오는 돈이 임대인 입장에서 더 이익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성공해서 집값이 완전히 안정화된다면 더이상 임대인 입장에서 전세를 놓을 유인 자체가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세가 아예 사라질 수 있다.

 

전세대란이라는 말이 의미없는 이유인 것이다. 이미 금리는 제로를 향해가고 있는 중이고, 전세금이야 집값을 따라가는 것이니 집값이 잡히면 전세는 이미 그 존재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2년 뒤에 고스란히 자신이 그동안 쓴 돈까지 포함해서 전세금을 그대로 돌려줘야 하는데 집주인 입장에서 더이상 전세를 놓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전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집값이 지금처럼 오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차라리 집값을 잡아서 전세란 제도의 명줄을 끊어 놓거나, 아니면 전세라는 제도를 위해서 집값이 지금처럼 계속 오르게 내버려두거나. 그래서 어느 쪽인가. 어느 쪽이 서민들 입장에서 더 나은 선택일 것인가. 충분히 집값만 잡을 수 있다면 언젠가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 쪽이 낫지 않을까.

 

전세란 공짜가 아니란 것이다. 전세금이 고스란히 돌아온다 생각하지만 그만큼 그동안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거나 현물의 가치가 오르는 등 가치의 변동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낸 전세금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전세금에 더해서 사야 할 부동산의 값이 더 오르거나. 결국은 비용이다. 그 비용을 단지 일정한 숫자로 고정된 전세금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작년 이사하면서 월세를 선택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도 이자까지 포함하면 차라리 월세를 더 싸게 얻는 쪽이 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갈수록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세입자 입장에서도 오히려 전세보다는 월세가 더 나을 수 있다.

 

십 년 넘게 전세를 살면서 끝내 자기집을 사지 못한 경우도 현실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전세금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조금만 더 모아서 더하면 자기 집도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만큼 그동안 집값도 오르고 돈의 가치도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목돈만 전세라는 이름 아래 집주인에게 묶여 있던 것이었다. 차라리 전망 좋은 곳에 투자라도 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큰 이익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러가지로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는 제도란 것이다. 그렇게 전세에 묶여 있는 자본이 또 사회 전체에서 얼마나 될 것인가. 어떻게 따져봐도 과연 앞으로도 전세라는 제도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전환기란 것이다. 전세는 여전히 유용한가. 당연한 물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경향일보 기자들이 남달리 정의감이 강해서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확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실 여성주의자들도 정작 여성이나 여성주의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성과 여성주의를 이용해서 가지게 될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일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성폭력 사건과 비교해서도 박원순 시장과 관련해서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듯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일 터다. 당장 이수정만 하더라도 덕분에 미래통합당에서 한 자리 얻어 들어가지 않았던가.

 

경향일보에게 있어 여성주의란 여러모로 훼손되고 퇴색된 자신들의 정당성을 담보할 거의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정의당을 비롯한 자칭 진보들이 여성주의에 매달리는 이유와 같다.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경향일보가 그저 주장하고 비판만 하는 동안 민주당은 그것들을 약간의 손색은 있을지언정 실제로 현실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 뭐라도 잘난 척 떠들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욕하고 싶어도 하나씩 한 걸음씩 변화하고 나아가는 모습들이 그를 비판해야 하는 자신들의 입지만 갈수록 좁히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절대다수가 남성이고, 당연히 남성이기에 생기게 될 문제들이 그들에게는 유일하게 붙잡을 동아줄이 되어준다. 하나만 걸려라. 제발 하나만 걸려라.

 

프레시안이 정봉주 전의원에 대한 미투를 뒤에서 조작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었다. 자신들은 진보정부인 문재인 정부와 진보정당인 민주당마저도 여성주의에 입각해 철저히 비판하고 있는 중이다. 그 선명함이야 말로 자신들이 진보라 불리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라도 하나만 걸리면 바로 나서서 철저히 짓밟고 짓이겨 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정의와 정당성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이 되어야 할 미투가 자칫 의심받을 수 있는 정황이 자신들의 지면을 통해 보도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미투는 절대적으로 옳아야 하고 조금의 의심도 허락되어서는 안된다. 의심하는 것도 가해고, 진실을 요구하는 것도 가해다. 미투는 그 자체로 절대의 정의며 진리고 진실이다.

 

미투마저 의심받게 되면 보수도 될 수 없는 경향일보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자칫 진보의 이념을 따라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기사를 써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건 때려죽여도 하기 싫다. 어렵게 명문대학 나와서 기자씩이나 되었는데 미래통합당도 아니고 민주당 떨거지들을 지지하는 기사를 쓰는 것은 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집안이나 학력, 직업 등과 어울리려면 최소한 미래통합당이나 검찰 정도는 되어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보수정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쓸 수 있어도 민주당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투의 절대성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경향일보만이 아니다. 정의당이나 한겨레나 자칭 진보들 모두가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죽하면 하태경이 지금의 정의당이라면 말도 잘 통하고 연대도 할 수 있겠다며 기꺼워하고 있겠는가. 더이상 조중동은 한경오를 경쟁상대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나마 조중동은 아직 보수라는 이념으로 현정부와 여당을 공격할 수 있으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반면 조국마저 무죄판결을 받으면 저들에게는 정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저리 미친 듯 정신줄 놓고 달려드는 것일 터다. 한 마디로 말을 꺼내기도 낯부끄러운 버러지들이라는 것.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실 처음부터 말이 안되었다는 것이, 그래도 대학교수씩이나 되어서 표창장 하나 위조하겠다고 잘 쓰지도 못하는 프로그램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그림부터가 일반의 상식과 크게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당장 문만 열고 나가도 발에 채이는 것이 바로 그래픽 전문가라는 인간들이다. 표창장 하나 위조하는데 그렇게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아무나 붙잡고 얼마간 쥐어주면 바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만들어준다. 상장용지야 정경심 교수가 직접 준비하더라도 파일 자체를 만드는데 굳이 익숙지도 않은 프로그램을 직접 다루어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컴맹이면 컴맹인데로 컴퓨터에 능숙하면 능숙한대로 프로그램을 몇 개나 옮겨가며 작업하는 번거로움을 일부러 감수할 이유같은 건 더욱 없어 보인다. 컴맹이라면 더욱 컴퓨터에 익숙지 못하기 때문에, 컴퓨터에 능숙하다면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대부분은 어지간하면 프로그램 하나로 거의 모든 작업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한글로 문서작업하다가 워드에 있는 기능이 아쉽다고 옮겨서 작업하거나, 워드로 작업하다가 한글의 매크로가 필요하다고 옮겨서 작업하는 경우란 현실에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아마 컴퓨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거의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일부러 파일 변환해가며 프로그램을 바꿔서 작업한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귀찮고 짜증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한글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그렇게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표창장 하나를 위조하려 한다?

 

사람은 그렇게 복잡한 동물이 아니다. 복잡한 것 같아도 그 행동의 동기나 원리를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경우가 현실에는 더 많을 것이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더욱 본능과 충동이 동기인 경우 그 행동방식은 매우 단순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하물며 자기가 전문가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컴퓨터에 익숙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인데 굳이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해가며 복잡한 과정을 거치려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말했듯 얼마간의 돈만 쥐어주면 대신할 사람이 문밖만 나가도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많은 돈도 필요없다. 강남건물주가 꿈이지 이미 강북건물주에 수 십억 자산가인 사람이다.

 

대부분 추리물에서도 추리하는 과정은 매우 단순명쾌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사건의 동기나 수법 등에 대해 스스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 추리물에서도 설명은 길어지고 복잡해진다. 심지어 만화임에도 그림보다는 탐정의 설명이 텍스트만으로 한참을 이어지는 경우 또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공소장의 범죄사실은 매우 단순한데 정작 재판정에서 시연한 과정이 복잡한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경심 교수의 지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정경심 교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언론의 목적이거나. 웃기는 것이다.

언론이 정상이었으면 대부분 국민들이 더위마저 잊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래도 현직 검사다. 바로 얼마전까지 부산고검 차장검사에, 그 전에는 대검 반부패부장이라는 핵심 요직에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검찰의 수사에 대해 누구보다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검사로서 자신이 보아 온 검찰의 수사라는 것이 그동안 주장해 온 그대로 오로지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사실과 증거에 입각해서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면 검사인 자신이 같은 검찰의 수사에 불신을 가져서는 더욱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검찰을 믿을 수 없다. 검찰의 수사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작년 조국 전장관이 자택을 압수수색당하는 상황에 아내의 건강을 걱정해서 담당 검사에게 전화로 한 마디 한 것으로 그렇게 모든 언론이 난리를 피웠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 관련한 수사에 대해 단 한 마디 보고도 받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지시를 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출석요구를 거부한 적도, 압수수색에 저항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은 이들의 검찰의 수사가 지나치고 방법도 잘못되었다 지적하는 동안에도 조국 전장관은 묵묵히 검찰의 수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현직 검사가 같은 검찰을 믿지 못하겠다며 심지어 수사심의위의 도움마저 청하는 상황이다. 과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결론은 최소한 한동훈이 아는 검찰의 수사란 목적을 위해 사실마저 왜곡하는 신뢰할 수 없는 부정한 행위란 것이다. 누가 누구를 수사하는가에 따라 수단과 결론이 마음대로 뒤집힌다. 그렇기 때문에 현정부에 의해 임명된 중앙지검장이 자신을 대상으로 지휘하는 수사는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검찰개혁을 주도한 탓에 검찰과 불편한 관계였던 조국 전장관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 것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어느 언론도 그런 한동훈의 태도에 대해 단 한 마디 비판조차 않고 있다. 오히려 그런 한동훈의 편에서 수사를 지휘하는 중앙지검장을 공격할 뿐이다. 역시나 검언유착이란 비단 한동훈과 이동재 개인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증거라 봐야 할 것이다. 한동훈과 이동재의 대화에 대한 오보를 내고 바로 사과함으로써 권언유착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에 일조했던 KBS가 자신들이 결론에 한 몫 거들었던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근거로 마치 압수수색이 부당한 것처럼 멘트를 내보낸 것을 보라.

 

하여튼 KBS를 정상화하겠다고 앞장섰던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죄다 이따위라는 것이다. 한동훈에게는 바로 사과했으면서 김경록 PB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진실을 다투며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다. 덕분에 KBS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소득은 있었다고 해야 하나. KBS 뿐만 아니라 언론이 검찰과 유착하는 구조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그 진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은 한동훈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면 그동안 자신들이 검찰과 유착해 온 과거를 모조리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일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현직 검사가 검찰의 수사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법이 허락한 정당한 수사에도 응하지 않으려 하는 중이다. 현직 검사가 같은 검찰의 수사를 믿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런데도 한 마디 비판조차 못하는 언론은 도대체 뭐하는 것들인가. 그런 검찰의 말을 받아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공격해 온 자칭 진보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동훈 하는 짓거리를 보면서도 한동훈의 편에서 그를 비판하는 언론을 마주 비판하는 홍세화와 같은 부류들의 민낯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다 문재인 덕분이라 해야 할까. 한 데 분리수거해서 내다버려야 할 쓰레기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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