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김활란이다. 일제강점기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 가운데 하나였으며 군사독재 당시에는 가장 적극적인 부역자이기도 했던 김활란은 그러나 한국 여성주의의 주류인 이화여대의 총장까지 역임했기에 여성주의 진영 내부에서 끊임없이 재평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화여대에서 김활랑의 이름을 딴 상까지 제정하여 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매매춘에 그렇게 혐오를 드러내는 여성주의일 텐데 모윤숙이 주도한 매춘로비집단인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던 사실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친독재성향은 유명했었다. 일단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 여대를 다니며 공부한 이들이란 것이다. 태생적으로 기득권에 더 가까운 이들이었는데, 더구나 그들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는 김활란이나 모윤숙과 같은 여성지식인 상당수가 친일파에 친독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 이후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진보적 담론으로 민주화를 주도한 진보진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박근혜가 나타나며 바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다.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 그가 생물학적 여성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본성을 가릴 유용한 대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덕분에 박근혜 정부에서 그들 여성주의자들은 다양한 요직을 맡으며 철저히 박근혜 정부와 한 몸이 되다시피 했었다. 어느새 여성주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김재련이 바로 당시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위안부문제를 지나간 과거로 묻고자 시도했던 화해와치유재단의 요직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김재련만 그랬느냐면 박근혜가 대선에 출마한 그 순간부터 촛불혁명으로 탄핵되어 물러난 이후까지 여성주의는 철저히 생물학적인 여성으로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에조차 박근혜의 복권을 주장하는 메갈이나 워마드 등 극렬 여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다. 과연 자신들이 박근혜라는 굴레를 벗고 다시금 여성주의의 리더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미투가 그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어 주었던 이유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미투가 있으면 무조건 피해자의 입장에서 지지하며 가해자로 지목된 이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만일 함께 돌을 던지지 않으면 그도 가해자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돌을 어떻게 던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미투를 주도하는 여성주의자들 자신이다. 어떤 미투는 크게 키우고 어떤 미투는 없는 것처럼 묻어 버리고 그렇게 최초의 미투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서지현 검사는 오히려 내부로부터 음해를 당하면서 온갖 불명예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었다. 과연 여성주의자 가운데 누가 서지현 검사를 적극적으로 도우려 했었는가. 무엇이 여성주의자로서 자신들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부정한 과거를 지워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결국에는 정의연 논란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의당과 자칭 진보의 스탠스를 알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의연 사태 당시 이들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보인 모습은 일단 어찌되었거나 정의연부터 죽이고 보자는 것이었다. 왜이겠는가? 정의연이 대표하는 위안부문제의 역사적인 해결이라는 부분에 대해 명분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박근혜 정부 당시 지지했던 정치적 타협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재련이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들고 나오며 그런 노력들에 보답을 했던 것 아니었는가. 만일 정의연 사태를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피해자중심의 역사적 해결이라는 기존의 방향에 대한 명분이 약화되지 않았다면 화해와치유재단 출신의 김재련이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서서 설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위안부문제의 역사적 해결을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마저 조롱하는 댓글들이 넘치도록 달리게 된다. 박근혜 방식도 괜찮지 않았는가. 이명박의 방식도 상관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굳이 정의연이 주장하는 완전한 해결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아가 친일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게 되면 김활란과 모윤숙을 다시 끄집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오랜 숙원이다. 어째서 정의당과 녹색당이 한 데 뭉쳐서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외치고 있는가. 그런 여성주의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다. 여성주의의 과거를 정당화하여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서다. 원래 여성주의와 민주화는 별개였었다.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이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이라는 당위에 동의해서 여성주의를 지지하게 되었을 뿐 그 출발도 전개도 발전도 전혀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든 그동안 진보와 여성주의는 하나라 여겨지며 함께하고 있었는데 박근혜를 통해 그 균열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여성주의는 민주화진영과 함께 갈 수 없다. 여성주의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여성주의는 민주화세력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성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단지 여성의 기득권만을 위한 운동이가.

 

그래서 여성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한 자칭 진보진영에서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목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라고 하는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동의 역시 사라져갔다. 검찰의 권력독점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검찰의 힘을 빌어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 서지현이나 진혜원 등을 압박하고, 사회적 권력을 사용해서 같은 여성인 계약직 방송인을 내쫓고, 그 대가로 여성인 앵커는 공영방송 뉴스를 통해 자사의 오보가 빌미가 된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앞세워 검언유착 수사를 비판한다. 바로 자살도 가해라며 떠들던 바로 그 앵커였다. 이해가 되는가. 원래 여성주의가 가고자 했던 그 길로 돌아가는 도중이란 뜻이다.

 

정의당 내부에서 여성주의와 관련해서 일고 있는 논란들은 바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어째서 진보를 자처하던 한겨레와 경향이 철저히 기득권의 개가 되어 똥이나 핥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가. 진보가 아니다. 그냥 여성주의가 진보인 양 여겨지던 시절 여성주의를 추종하던 놈들이 이들 언론으로 흘러가며 진보를 자처하게 되었을 뿐. 지금 경향일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과연 진보의 가치에 부합한다 생각하는 것인가. 검찰의 절대권력에 대해 오히려 옹호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군사독재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으니 이제는 남성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 저들이 바라는 여성주의는 그런 여성의 해방이 아니다. 여성인 자신들이 여성을 무기로 권력을 가지는 여성주의인 것이다. 박근혜를 지지하며 박근혜가 임명한 자리에서 박근혜의 입맛에 맞게 반여성적인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런 여성주의다. 김재련을 옹호하는 것을 보라. 김재련이 박근혜 정권 시절 보인 행보들이 과연 여성주의의 가치에 맞는다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미 여성주의 그 자체가 되어 있는 상태다.

 

여성주의는 분명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중요한 진보적 가치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성주의가 진보적인가는 다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전환자나 성소수자에 배타적인 여성주의를 과연 진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기득권 여성에 의한 약자인 남성과 심지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학대, 착취 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 것인가. 그래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기만 한 것인가. 대영제국의 일개 노동자도 식민지 인도에서는 우월한 백인이며 영국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항상.

아니나 다를까 그놈의 여성주의라는 것도 참 선택적이다. 그 똥같은 성인지감수성이 사람을 가리면서 적용된다. 한국사회에서 미투의 시발점이 되었던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로부터 조직적인 음해를 당했는데 그에 대한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작 언론이나 여성계 어디에서도 서지현 검사를 도우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검찰 내부의 음해만 믿고 서지현 검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박원순 시장과 관련해서 서지현 검사에게 그토록 시험하듯 발언을 압박하고 있었는가. 그리고는 자기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그를 비판하고 있었는가. 그런데도 전혀 성인지감수성이나 미투의 피해자중심주의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상식 위에 여성이 있고 여성 위에 검찰이 있는 것이다. 언론과 여성주의자들 모두가 결국 한 몸이었던 것이다. 검찰을 위해 기꺼이 여성마저 희생해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아, 김활란과 모윤숙이 한국 여성주의 초창기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쌍년들.

 

서지현 검사의 경우를 보니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가 확인하게 된다. 현직 검사에 의해 성추행당했고 검찰출신 정치인에 의해 방조되고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던 피해자는 외면하고, 단지 주장만 있을 뿐인 박원순 시장의 고소인에 대해서는 사실검증을 위한 최소한의 의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여성인 계약직 방송인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실작하도록 압박한다. 이 쌍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냥 자기 편하려는 여성주의인 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주의는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민주당과 관련해서만 성추문 사건이 끊이지 않는가. 보수정당은 성문제에 있어 청정구역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동안 보수정당을 지켜봐 온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심지어 자칭 진보정당조차 성문제에 있어서는 깨끗하지 못하다. 여성혐오에 빠질 것 같다. 정확히 여성주의 혐오다. 딱 일베 가서 놀면 제격인데. 벌레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의 비판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가장 우스운 것이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한 편으로 개인의 이윤추구의 결과인 부동산 가격까지 안정시켜야 한다는 요구다. 모순된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이윤추구를 제한해야 한다니. 이윤추구는 제한해야 하는데 개인의 욕망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니. 도대체 어느 정당에 맞추란 것인가?

 

물론 그들에게도 논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 다시 19세기로 돌아가서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공급량을 늘리면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격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수요공급의 법칙이 나오는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토지를 소유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누리는 지주계급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토지란 고정되어 더이상 추가하거나 늘릴 수 없는 한정된 자원일 텐데 이를 소수의 지주가 독점함으로써 정작 시장에서 도전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부르주아들의 이익까지 최종적으로 갈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주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부르주아들이 알아서 공장을 짓고 상품을 생산하며 사람들이 도시에 몰리는 과정에서 땅값이 올라가고 지대수입도 늘어난다. 부르주아들도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이익의 상당부분을 지주에게 지대로 지불해야 한다.

 

정부에서 모든 서울시민들이 한 채 씩 아파트를 다 가질 수 있도록 공급계획을 세운다면 과연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을 것인가? 물론 가능은 하다. 서울을 경기도 전체로 넓히면 된다. 멀리 평택이며 양주까지도 서울로 편입하면 어찌되었거나 서울 안에 충분한 아파트를 지어 공급한 것이 된다. 아니라면 지금 있는 서울의 경계 안에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 해도 땅이 그리 많지 않다. 북한산자락에다 빼곡하게 아파트를 채워 넣을까? 아니면 인왕산 정상에까지 아파트를 지어 올릴까? 그도 아니면 모든 아파트를 50층 100층짜리 고층으로 지어 올려야 하는가? 그런다고 무려 천 만이 넘는 서울시민들을 각종 편의시설까지 포함해서 함께 담아내기에는 서울이라는 공간의 제약이 심하다. 도대체 어디에 얼마의 아파트를 더 지으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강남 아파트가 그렇게 비싼 것이다.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동네이니 당연히 경쟁이 붙으며 아파트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남을 무한히 넓힐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강남에 무한히 층수만 높여 가구수만 늘릴 수 있을 것인가. 재건축으로 용적률만 높여서 더 많은 가구를 지어 올린다고 강남에 살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해소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지 강남과 가깝고 강남과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강남을 따라 아파트 가격이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과연 강남에 새로 얼마나 많은 아파트를 공급해야 그 모든 욕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 어째서 사람들이 강남에 몰려와 살고자 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재건축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나마 실거주를 목적으로 한 다른 수요들과 달리 재건축은 단지 강남의 높은 부동산 가격만을 노린 수요이기 때문이다.

 

낡은 아파트를 재건축하면 용적률을 높여서 더 많은 가구를 지어 비싼 가격에 분양까지 하면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그렇게 신축아파트의 공급이 중요하다 하면서 낡아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구축아파트들이 오히려 끝도 없이 오르기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오히려 재건축을 앞둔 구축아파트들의 가격이 오르면서 주변 아파트 시세까지 끌어올리고 덕분에 재건축된 아파트의 분양가격까지 올리는 연쇄반응까지 일어나게 된다. 재건축만 아니면 그런 낡은 아파트를 그렇게 비싼 돈까지 지불해가며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낡은 아파트까지 샀으니 재건축하면 더 많은 돈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용적률을 높이고 분양가도 올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말한 것처럼 주변 아파트 가격까지 올라간다. 과연 강남의 아파트가격이 실수요자들에 의해서만 그렇게 올라간 것인가. 그러면 재건축이 이익이 되지 않을 때도 이들 구축 아파트들이 강남 부동산 가격을 이끌게 될 것인가.

 

바로 지금 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을 두고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이 비판을 쏟아내는 지점인 것이다. 인터넷 등에서 반발여론이 크게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이 말하는 공급확대란 곧 재건축 확대다. 이미 재건축이 예정된 구축아파트를 중심으로 용적률을 높여 더 크게 더 많이 짓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공급을 늘리겠다며 여기저기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발표하니 반발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도 안되고 저기도 안되고 그러니까 강남 구축을 다시 밀고 용적률 새로 지어 기존의 집주인들 돈 더 많이 벌게 하자. 그러니까 기존의 집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공급은 늘리는 신의 한수와 같은 계획인 것이다. 그러나 말했다. 바로 그 재건축 때문에도 강남의 아파트 값은 끝간 데 모르고 오르고 있다고.

 

공급물량이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어디에 공급을 하느냐는 것이다. 강남에 더 많은 공급을 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강남에 더 많은 아파트를 지어야만 한다. 그러면 누가 이익을 본다? 이미 강남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이다. 재건축 단지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물론 그로 인해 덩달아 가격이 뛴 주변의 아파트는 물론 이후 신축이 들어서며 분양될 경우 오르게 될 가격의 영향을 받게 될 집주인들인 것이다. 그래서 반발하는 것이고. 세금을 더 올려받기보다는 그렇게 집주인들이 이익을 보게 하면서 공급을 늘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정부에서 내놓은 대안이 아예 재건축 용적률 지금보다 더 높여줄 테니 절반을 임대아파트로 지어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공급이 중요하다면 임대로라도 물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할 텐데 여기에는 또 반대다. 집주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최선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이재명의 기본주택 개념이 언론을 통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을 매우 아쉽게 여기는 편이다. 그렇게 강남의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려야 한다면 임대주택으로 늘리면 되는 것이다. 더 많은 임대주택을 지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강남에 살 수 있도록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한다. 직값을 잡기 위해 공급을 늘려야 하는데 그로 인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논란의 본질이다. 집값을 잡아야 하지만 집값이 떨어지면 안된다. 그리고 언론의 그런 농간에 집없는 서민들까지 놀아난다. 집주인들이 이익을 누릴 수 있어야 자신들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개뿔. 덕분에 집값만 끝간 데 없이 집주인들을 위해 오르고 있는 중이다.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공급이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 공급해야 하느냐고, 그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집값은 잡아야 하지만 집값이 떨어져서는 안된다. 집주인들에 손해가 가서는 안된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이 아무것도 않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않는 동안에는 티도 나지 않을 테니. 본질을 모르면 먹힌다.

 

어차피 지금 아파트 짓기 시작해도 다음 정권이나 되어어야 공급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 공급되는 신축 대부분이 박근혜 시절에 짓기 시작한 물량들이다. 장기적인 대책도 못되는데 그렇다고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기도 힘들다. 정부 입장에서도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란 것이다. 역시 어떻게 해도 공급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언론만 열심히 떠든다. 여론이 정부를 움직인다. 본질과 한참 벗어난 헤프닝인 셈이다. 웃긴다.

그러보니 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지금 기자놈들 입사지원서 조국 전장관 자식들 털듯 털면 아주 재미있을 거라고. 과연 과연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진실일까? 당연히 한 눈에 바로 알아볼 정도의 거짓말을 대놓고 입사지원서에 넣는 짓은 그래도 기자들인데 안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놓고도 기자질하는 것이라면 부정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런데 이걸 조국 전장관 자식들 털듯 검찰이 총동원해서 털면 어떻게 될까?

조국 전장관 아들이 인턴십 프로그램의 세미나에 몇 번 참석했는가를 두고 재판에서 다투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참석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한두번인지 두세번인지 서너번인지 가지고 지금 다투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인턴확인서가 개근하고 만근했을 때만 주어지는 것이던가.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인턴이라는 자체가 정규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사용자 마음이란 것이다. 집에서 자료조사만 해도 되고, 그냥 꾸준히 얼굴만 비쳐도 되며, 한 번 만 나와서 자기를 찾아와 인사를 했으면 그것만으로도 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다. 그래서 입시든 채용이든 그런 인턴증명서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하다. 그거 심사하는 사람들이 발급한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어차피 10년 가까이 오래된 일이라 사람들 기억도 희미하고 따라서 봤네 안 봤네 그 회수까지 디테일하게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참석했는가 아닌가. 증명서를 발급할 요건을 갖추었는가 아닌가. 그래서 발급권자가 직접 자기 도장을 찍어 발급했다니까 또다시 공소장을 변경하며 뭐라뭐라.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듯 또 언론은 기사로 써준다. 도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인턴증명서 하나로 온 세상이 떠들썩해질 정도의 나라였었는가.

불과 얼마전이다. 연세대에서 대학교수들이 자식들 입시와 관련해서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교육부 감사를 통해 드러난 바 있었다. 조국 전장관은 그냥 정해진 법과 규정 안에서 편의를 추구한 것이라면 이들은 대놓고 법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언론의 보도를 보라. 그 잘난 대학생들의 태도를 보라. 나경원에 대해서도 이토록 언론과 청년들은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가. 그러고도 자기들은 기자라고 거들먹거리겠지.

역시나 내가 옳게 봤다. 바로 강진구 기자가 말한 후배권력이란 것일 게다. 인터넷에 리플 달 듯 기사를 쓴다. 저놈들 기사를 인터넷에서 더 잘 더 많이 더 즐겨 소비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게 진짜 기자가 기사를 쓰는 방법이다. 선배들은 낡았다. 그런 주제에 조중동처럼 사주가 있는 언론에서는 충실한 개가 되어 꼬리를 흔드는 것이 그놈들의 속성이다. 사과할 디스를 왜 하는가. 언제부터 디스에 사과가 따라붙었는가. 일베도 참 한심한 것들이다.

아무튼 마친 민사도 걸리고 했으니 KBS 기자들부터 입사지원서를 뒤져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조국 전장관이 고발한 기자들 역시 입사지원서부터 차근히 살펴봤으면 하는 것이다. 과연 이 놈들의 입사지원서는 얼마나 정직할까? 그 내용들이 까발려지면 몇이나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기자를 사람취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의 자유란 한국 기자들에게는 개발에 편자에 불과하다. 불쌍해지는 것이다.

태양광발전과 산사태 사이에 연관성을 주장하고 싶으면 일정한 통계가 일치해야 한다. 이를테면 전체 산사태 가운데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곳에서 일어난 산사태의 비율이 몇%이고, 전체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산지 가운데 몇% 정도에서 산사태가 일어났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산지와 그렇지 않은 산지 사이에 산사태의 발생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음을 통계로써 입증해야 한다. 그래서 전체 산사태 가운데 태양광의 비율이 몇%가 되는가. 태양광이 아직 충분히 설치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면 전체 태양광 발전소 가운데 몇%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것인가.

 

보아하니 전체 천 건 넘는 산사태 가운데 고작 12건 만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곳에서 일어난 모양이다. 전체 1만 곳이 넘는 태양광 발전소 가운데서 따지면 0.1%도 안되는 확률이다. 과연 이런데도 태양광 발전과 산사태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유독 태양광 발전소가 있는 곳만 0.1%라도 사고가 났으면 태양광 발전소 때문이구나 하겠는데, 아니면 전체 산사태 가운데 태양광 발전소가 있는 곳만 유의미하게 비율이 높아도 태양광 발전소가 원인이구나 말해도 좋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물러지면 태양광이고 뭐고 아무리 나무가 많아도 그냥 한꺼번에 쓸려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산사태가 일어난다. 설사 태양광이 원인이었다 할지라도 비율로 보았을 때 설치와 관련한 안전기준을 강화해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정도란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인데, 대한민국의 야산 가운데 원시림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보면 된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조선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가 바로 붉은 산이었다. 난방한다고 하도 나무를 베어댄 탓에 산에 나무가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지금의 푸른 산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시림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이용하던 산림 가운데 일부를 다시 태양광 발전을 위해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사고가 나면 복구가 불가능한 방사능과 패널을 치우고 나무만 다시 심어도 얼마든지 다시 복원 가능한 산림이 비교가 되는가. 어째서 태양광을 안전하고 깨끗한 차세대 에너지로 선진국에서도 주목하는 것인가. 전체 산지 가운데 태양광이 차지하는 비율도 아직 얼마 되지 않는데 그렇게 나무만 아까워 안달이다.

 

아무튼 그냥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약해진 탓에 나무가 있어도 산이 허물어지는 상황이란 것이다. 방송에 나오는 산사태로 집이 온통 뒤덮인 현장 가운데도 그래서 태양광 패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일부러 그런 곳만 찾지 않는 한 전체 가운데 비율이 1%, 혹은 그 이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섬진강 홍수를 4대강 재평가를 위한 기회로 이용하더니만 이번에는 산사태라는 재해마저 태양광 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기록적인 폭우와 홍수가 언론과 정치권만 신나게 만들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말할 가치도 없다. 뇌가 구더기똥이다. 벌레똥들. 

경향과 한겨레가 왜 그리 윤석열 검찰의 뒤를 빨아제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세상에 남자끼리 한 달 남짓 동안 300건 넘는 문자라니. 아무리 중요한 거래처라고 이렇게 자주 많은 문자를 주고받지는 않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루에도 열 개도 넘게 문자를 주고받아야 하는 이유가.

 

어쩐지 진보를 자처하는 경향과 한겨레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수자의 인권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단지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이 고소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로 단정짓고 죽음마저 짓밟은 대부분 언론과 정치권, 지식인들이 한동훈의 무죄를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 그와 아주 무관치는 않겠다는 어설픈 추측이다. 그렇게 간절한 사이인데 두 사람 사이를 섣부르게 오해해서 자칫 차별과 탄압으로 비칠 지 모르는 상황이란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면 말고. 아무튼 도대체 뭘 어쩌면 안부문자만 두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300건 넘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사귀는 사이라도 무리다. 아, 그래서 내가 지금 솔로인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300건은 도저히 안 나오던데. 끝말잇기라도 한 모양이다. 너무 다정하다. 눈물이 나오려 한다. 

일본만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장면이다. 고등학생이거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인물이 부동산을 알아보러 돌아다닌다. 그러면 주위에서 당연하게 묻는다.

 

"독립하려고?"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30대까지 젊은 직원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방을 따로 얻어 자기가 월세를 내며 살고 있었다. 심지어 한 시간 넘게 걸려 출퇴근하는데도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월세를 얻고 싶어도 보증금 낼 돈이 부족하다.

 

재개발이 예정된 동네에 아주 오래되고 낡은 반지하 단칸방조차도 월세의 몇 배나 되는 보증금을 내고서야 겨우 들어가 살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좁고 볕도 들지 않아 어둡고 습기까지 차는 반지하방에 살고 싶은 사람은 기성세대 가운데도 거의 없다 봐야 할 것이다. 그나마 살 만한 집이면 기본이 몇 백에, 조금 괜찮다 싶으면 천 단위를 넘어간다. 월세가 그런데 전세는 어떨까? 아예 전세대출까지 고려해서 어지간하면 요즘은 그냥 억은 넘어간다 보는 것이 옳다. 과연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젊은이가 자기 힘으로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자기가 돈 벌어 전세금 마련한다는 것도 제법 대단한 중견기업 이상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소수에게나 해당되는 도시전설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나마 월급 모아서 얻을 수 있는 전세라는 것도 변두리 주택가에 방 하나나 두 개 짜리가 고작일 것이다. 아니 요즘 이쪽은 거의 전세물량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파트처럼 집값이 올라 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요즘같은 저금리 시대에 일반주택 전세는 임대인 입장에서 전혀 남는 것이 없다. 집값이라도 올라서 나중에 차익을 실현할 수 있지 않는 한 전세는 더이상 임대인 입장에서 매력적인 제도가 아니란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되면 따라서 당연히 전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렇다면 막 사회에 첫 발을 딛은 젊은이들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살 수 있는 전세란 과연 어디까지일 것인가.

 

전세가 쓸데없다 여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아니 당장 월세조차도 만만치 않은 보증금 때문에라도 겨우 갓 취업한 젊은 초년생들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90년대 막 사회에 첫발을 딛고 한동한 고시원 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렇게 겨우 모아 반지하 단칸방 하나 월세를 얻었는데 그마저 IMF로 홀랑 날려먹었으니 내가 지금도 김영삼이라면 이를 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일 것이다. 이명박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아무튼 현실이 그런데 몇 억 씩이나 하는 전세란 제도가 얼마나 현실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내가 전부터 전세라는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온 첫째 이유일 것이다. 어지간해서 서민들이 자기 능력만으로 몇 억이나 하는 전세금은 커녕 몇 천 짜리 월세 보증금조차 모으기란 너무 버겁기만 하다는 것이다. 아니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그래서 젊은 직원들이 월세 보증금이라도 마련해 보겠다고 몇 년이나 부모의 집에 얹혀 살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었더란 것이다. 올해만 다니고. 아니 내년만. 한 해만 더. 그래도 사실 현실적으로 몇 천이나 되는 돈을 모으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고보면 전세는 커녕 월세의 몇 배, 심지어 몇 십 배나 되는 보증금이란 것도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제도라는 것이다. 대부분 나라에서는 월세를 얻을 때 따로 보증금 같은 것 없이 몇 달 치를 선불로 내거나 사례금을 따로 지불하거나 하는 식으로 장벽도 매우 낮다. 그냥 길거리를 떠돌던 홈리스라도 그나마 아무거라도 직장을 가지고 나면 바로 받은 월급으로 적당한 월세를 찾아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젊은이들도 일찌감치 집을 나와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자립심이 부족해서 늦게까지 부모에게 얹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독립해서 나와 살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기에 그런 것이다.

 

하긴 그러고보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며 임대료까지 올라가자 해외에서도 늦게까지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캥거루 세대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월세를 얻으려 해도 월세 자체가 비싸서 부모의 집에 기대 함께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월세는 고만한데 월세의 최대 몇 십 배나 되는 보증금을 마련하기가 너무 버거워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 혼자서 나가 살려고 해도 방 하나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데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결혼도 않으려는 것이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월세라도 그럴싸하게 얻어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둘이서는 어떻게 살더라도 아이라도 낳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뭐다? 몇 억 씩이나 하는 전세금보다는 당장 젊은 사회초년생들이 바로 들어가 살 수 있게 보증금조차 필요없는 값싼 월세가 더 시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집은 커녕 전세조차 자기 힘으로 벌어서는 모으기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에서 차라리 보증금조차 없이 더 값싸게 얻어서 전세금 모을 돈으로 소비라도 마음대로 하며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이 개새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서민 걱정하고 청년 걱정하고 낮은 결혼율과 출산율을 걱정하는 새끼들이 정작 그들을 위한 임대주택은 주민들더러 반대하라고 부추기는 기사나 써제끼고 있는 중이다. 주민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이유는 그렇게 거짓정보를 흘리며 부추기는 놈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누구이겠는가. 그러면서 서민을 걱정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전부터 일관되게 해 온 이야기일 것이다. 평생 악착같이 모아서 10억짜리 아파트를 사나, 평생 쓰고 싶은 것 다 쓰면서 10억짜리 아파트에서 3억 월세를 주고 사나 결국 아파트를 남기거나 7억 만큼의 소비를 남기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7억 만큼 아끼며 살 것인가. 그냥 아파트를 포기하고 7억 만큼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 것인가. 어차피 안되는 거라면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개천을 만들어야 한다. 붕어, 개구리, 미꾸라지가 모여서 마음놓고 살 수 있는 개천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보다 월세 얼마간 더 내더라도 보증금을 다시 은행 잔고로 돌려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월세 보증금조차 부담이 되는 진짜 서민의 삶을 지금도 살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면서 내일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를 가까이서 몇 년이나 보아 왔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인 것이다. 그나마 최저임금이라도 올라서 일자리가 있는 젊은 세대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상황인가. 그럼에도 그 돈 모아서는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도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젊은 세대의 원망과 분노가 세상을 혼란케 하는 것만 걱정하는 것인가.

 

결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때로 주민의 반대마저도 무릅써가며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단호하게 결정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임대주택에 반대한다. 왜? 어째서? 그리고 언론은 그런 무리한 주장들을 어째서 한 마디 비판조차 않는 것인가? 답은 너무 명확하다. 그래서 일부러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옛사람 말 가운데 틀린 게 없다지만 진짜 개소리라 생각한다. 가는 말에 채찍질한다? 예쁜 놈 매 한 대 더 때린다? 물론 의미는 이해한다. 결국 채찍질해야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고, 한 대라도 더 맞고 더 열심히 공부하면 더 높고 귀한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중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 싫거든? 그냥 오늘 떡 하나 더 먹고 미운 놈 하는 게 더 낫거든? 아마 내가 이상한 모양이다. 오래전부터 저런 문화가 정말 싫었다.

 

보상은 아주 나중에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고서 알아서 누리면 된다. 그 전까지는 그저 못하고 아쉬운 것들만 야단치고 매를 들어가며 고치고 바로잡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놈들이 저 모양인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누리지 못한 보상을 한꺼번에 다 누리려 하니 온통 저 난리들인 것이다. 법을 집행해야 하는 놈들이 법을 어기고, 더욱 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놈들이 저 편할대로 법을 만들고 이용하려고나 들고, 정작 그런데도 오히려 사회분위기는 그런 그들에게 관대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어렵게 노력해서 그 위치에까지 올랐는데 그런 정도는 봐 주어도 좋지 않겠는가. 그러라고 부모는 자식을 기르고 선생은 학생을 가르친다.

 

문제는 그렇게 먼 미래만 바라보다 보니 당장은 보상은 커녕 온통 아프고 싫고 짜증나는 체벌과 야단과 비난 뿐이란 것이다. 그러면서 또 말한다. 보아라. 역심히 노력하지 않은 결과 저처럼 벌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가난하고 누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것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며 벌이다. 그러므로 저렇게 살기 싫으면 지금을 인내하며 그저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벌받아야 하고, 노력했으면 마땅히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지금 매맞고 야단맞는 그들도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삶을 누리려 할 것이다. 아니더라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그래서 잘하지 못한 대가이니 당사자들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정의다.

 

인터넷이 쓸데없이 정의로워진 이유인 것이다. 정확히 악플러란 없다. 악플을 다는 놈들 치고 악플이라 생각하고 악플을 다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자기딴에는 정의라 생각한다. 악을 응징하고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행위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판단하기에 악이라 여기는 대상을 향해 단호히 매를 드는 것이고, 불의라 생각하는 대상을 향해 기꺼이 거친 말로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반성하며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대로 좋은 것이고, 아예 세상에서 사라지면 정의를 실현한 것이 된다.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타진요 사태가 그랬었고, 바로 어제 먹방유튜버 쯔양이 은퇴를 선언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고보면 기자 것들이 갈수록 질이 떨어져가는 것도 인터넷 댓글 쓰듯 기사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조국 전장관의 딸 조민씨가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밤늦게 건장한 남자기자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며 위협을 하더라는 이야기는 이미 작년 기자간담회 때 나온 바 있었다.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기자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기자가 취재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필요하면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행동이다. 자신들은 정의의 투사다. 진실을 탐구하여 전하는 메신저다. 세상의 악과 불의를 찾아내고 응징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든 따라서 용인될 수 있어야 한다. 협박도, 사칭도, 사기도, 위협도, 조작도, 왜곡도, 그래서 악을 응징하고 진실만 전할 수 있으면 그 수단이 무엇이든 당연히 인정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어느새 전가의 보도처럼 되어 버린 성인지감수성마저 기자의 취재과정에는 적용이 되지 않을 정도다. 여자 기자가 스스로 밤늦게 남자들이 떼로 몰려가 여자 혼자 사는 집 문을 두드려도 취재를 위해서라면 괜찮다 말하는 수준이란 것이다. 

 

오보를 내도 괜찮다. 사실확인까지 하고 깡그리 무시한 채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보도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재를 통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그렇게 기사를 내는 쪽이 악을 응징하는데 더 유리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한국경제만 취재하고 오보를 냈던 것이 아니었다. 한겨레도 정작 안성 쉼터를 판 당사자와 인터뷰까지 하고서도 의혹이라고 기사를 내고 있었다. 명분은 단순했다. 그렇게 의혹으로 보도를 해야 당사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진짜 잘못이 있으면 검찰수사를 통해서 법적인 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 언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딱 자칭 정의로운 네티즌이라 일컫는 이들과 너무나 닮은 행동이며 태도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쯔양이 이미 오래전에 모든 사실을 밝히고 양해와 용서까지 구한 사안에 대해서도 어쨌든 잘못을 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 실수로 저지른 잘못이고 그 크기가 그리 크지 않더라도 아무튼 작은 잘못이라도 저질렀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참피디가 영웅이 된다. 쯔양이라는 불의의 희생자도 만들었지만 그보다 제대로 단죄한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뒷광고를 실제로 했다고 밝혀지고 그로 인해 해명과 사과 동영상까지 올렸던 이들의 경우가 부당한 공격에 결국 방송까지 접여야 했던 한 사람의 존재를 지우고 만다.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옳았던 것도 있지 않은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가운데도 살인자나 강간범, 악독한 고리대금업자가 있었을지 모른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난징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중국인 가운데 조선인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기꾼이 있었을지도.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고보면 확실히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방송을 그만두려는 쯔양의 등뒤에 뒷광고나 일삼던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큼지막하게 찍어준 것도 SBS와 JTBC라는 방송사들이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었다. 아마 그들 역시 나름대로 네티즌들과 똑같이 정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 그리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잘못도 잘못이다. 잘못은 밝혀서 응징해야 한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기자인 자신들이 그들에게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먹방 같은 건 아예 보지도 않고 쯔양은 그저 워낙 유명해서 이름만 아는 정도인데도 그래서 돌아가는 상황이 정말 엿같다는 것이다. 매번 반복이었다. 이번은 단지 대상이 쯔양이라는 유튜버였을 뿐 이전에도 연예인을 대상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타진요의 이름을 첫머리에 언급했던 것이 아니던가.

 

조국을 잡아야 한다. 조국을 죽여야 한다. 그 전에는 노무현을 잡아야 한다. 노무현을 죽여야 한다. 정의연을 잡아야 한다. 정의연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그래서 검언유착이 아닌 것이다. 언론이 보기에 이동재와 한동훈이 했던 작업들은 유착이라기보다는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까지 했던 것이다. 기자가 취재하면서 검사와 상의해야지 누구와 상의하는가? 기자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검사에게 의견을 구해야지 누구에게 의견을 구하겠는가? 협박을 해서라도 진실만 밝혀내면 되는 것이다. 부정한 거래를 통해서라도 정의만 실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유시민도 잡아 죽여야만 한다. KBS가 어째서 한동훈을 구하겠다고 그런 오보까지 내고 바로 사과까지 했던 것일까? 자기들이 보기에 너무 당연한 언론의 사명이기까지 한데 범죄로 모는 것을 차마 보고 있지 못하겠어서인 것이다. 유시민을 잡아 죽여야 할 이유가 너무 분명했던 한 곳이 바로 KBS였었다.

 

처음에는 그저 쯔양의 처지가 너무 안되었고 쯔양을 몰아세우는 네티즌들이 뭣같아서 그들을 비판하려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어느새 네티즌이 아닌 언론과 기자를 향하고 말았다. 그만큼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자가 네티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터넷에 리플 달 듯 무책임하게 기사를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를 경계하고 말리려는 선배기자들을 아예 자기들이 앞장서서 징계하고 입까지 틀어막으려 하고 있다. 이같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당사자들이야 어떤 고통을 받든. 취재의 대상이 된 그들이 어떤 괴로움을 호소하든. 자신들이 낸 잘못된 기사로 인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어도 자신들은 그저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그런 것이므로 감히 책임을 물으려 해서도 안된다. 진짜 딱 악플러들이란 것이다. 단지 남들은 악플이라고 다는 것을 자기 이름까지 내걸고 기사랍시고 쓰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자기 기사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물으려고 하면 그건 또 싫고. 부모들이 잘못 키운 것이다. 아니 이 사회가 저들을 잘못 키운 것이다. 어린애들도 아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책임지기 싫은 어린애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에 대한 정규직전환에 대한 언론의 보도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력하지 않은 대가로 남들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벌을 받으며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정규직이 되어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설사 자신들이 인용한 단톡방의 내용이 허위라 할지라도 자신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문제를 제기한 것 뿐이다. 오히려 당당하다. 벌주는 사회, 벌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 벌을 주기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들.

 

확실히 그런 점에서 베테랑 기자들이 말하는 그래도 전과는 너무 다른 법조팀의 분위기란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원래 검사가 벌주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냥 수사하고 기소하고 원고가 되어 재판을 진행하는 역할일 뿐이다. 하지만 언론과 검사가 만나면서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판결까지 마치고 있었다. 일베와 검찰이 결합한 그 무엇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러고보니 그들도 검언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다? 그들의 부모가 잘못 키운 탓이란 것이다. 조국 전장관도 잘못했다. 아무리 서울대 법학과에 학생이 많아도 교수로서 그들을 바로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도대체 교수로서 자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조국 전장관의 딸 조민씨나, 악플러들 앞에서 손까지 떨며 창백한 얼굴로 죄인처럼 사죄해야 했던 쯔양이나, 취재를 이유로 여자 혼자 사는 집까지 떼로 찾아가 두드리던 기자놈들이나, 오래전 일까지 끄집어내어 정의로운 비난과 욕설과 모욕을 퍼부어대던 악플러들이나, 그리고 벌을 받아야 하기에 그나마 안정적인 정규직조차 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검찰은 정의롭고, 언론은 진실되고, 대중은 곧 진실이며 정의여야 한다.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빌어먹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이 죽기 얼마전 LA에서 월세 아파트에 산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바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마이클 잭슨이 고작 월세 아파트에 사는 처지가 되었단 것인가. 물론 터무니없는 오해였었다. 마이클 잭슨이 산다는 월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월세가 아니었다. 해외에서는 의외로 흔한 사례다. 굳이 필요치 않은 경우 굳이 집을 사서 소유하기보다 일정 기간 세를 주고 거주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LA같은 대도시에서 자기 집을 굳이 사서 소유하기보다 일정기간 월세를 내며 사는 쪽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전에도 전세와 관련해서 쓴 적 있지만 한 달 월세 100만 원 해봐야 10년이면 1억 2천만 원밖에 하지 않는다. 월세 천만 원 해도 10년이면 12억이다. 그런데 대도시 한복판에 집을 가지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 나중에 다시 되팔면 되지 않느냐 말할 수 있겠지만 부동산을 거래하는데는 당연히 세금이 따라붙는다. 고가의 부동산이라면 그만큼 고율의 세금이 매겨지게 된다. 더구나 땅이라면 몰라도 건물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후화되며 감가상각이 생기게 된다. 당장 아파트는 당연히 오른다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사할 때 가장 먼저 신경쓰는 것이 신축인가 구축인가의 여부인 것이다. 오랜 아파트는 인기가 없다. 값만 오를 뿐 정작 세를 살려 해도 될 수 있으면 신축으로 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다행히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비싸게 팔 수 있으면 남는 장사일 테지만 적지 않은 세금까지 내가며 부동산을 다시 팔아도 남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속편하게 임대해서 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어차피 자기 집을 가질 수 없는 계층 뿐만이 아닌 고가의 건물을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고소득자를 위한 고급형 임대주택 시장이 크게 발달해 있는 것이다. 굳이 오래 살 것도 아니고, 더구나 건물을 소유하는 번거로움까지 고려할 경우 차라리 비싼 돈 내고 자기 집을 가지기보다 아무리 비싸더라도 월세로 사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 드라마를 보면 흔히 보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많은 돈을 벌었으면서 정작 사는 곳은 비싼 월세를 내야 하는 임대아파트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그만한 수입이 있고, 차라리 그 돈을 모아 집을 사기보다 월세가 더 싸게 먹힌다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인 것이다. 대신 그런 모든 부담을 대신 감당하는 대신 임대업자들은 그로부터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월세를 받는다고 모두 업자들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감가상각이란 말 그대로 건물을 유지 보수 관리하면서 이후 노후화되었을 경우 다시 짓는 등의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 박근혜 정부 이래 현정부에서 추진했던 임대업자 사업자등록이 이를 목표로 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아파트 가격이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오르지 않았다면 임대업자 사업자등록이라는 제도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이 모든 비정상적 상황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세란 제도인 것이다. 월세 아래서는 다달이 받는 월세 가지고 급격히 사업자가 임대주택의 보유를 늘리기가 매우 어렵다. 한 달에 천만 원, 이천 만 원 받아서 언제 몇 십억 이나 하는 임대주택을 새로 또 하나 짓고 구입하겠는가. 하지만 거의 집값에 근접한 전세가로 인해 터무니없이 적은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임대주택을 늘려갈 수 있는 것이다. 임대업자 사업자등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전세라는 이상한 제도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악용되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그로 인해 집값까지 크게 오르면서 임대소득 말고도 집값만으로도 임대업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답은 뭐다? 전세의 월세로의 전환이다. 주택담보대출을 제한해서 전세금에 약간의 자기 돈 더해서 집을 늘리는 이른바 갭투기를 차단하고, 나아가 임대업자들이 임대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경로를 막는다.

 

임대업자들의 잘못이 아니란 것이다. 그저 있는 집 빌려주고 세 받아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단지 임대업자에 대한 혜택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부동산투기로 이익을 보려는 인간들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전세라는 제도는 따라서 부동산투기를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되면 임대업자들도 말 그대로 임대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업자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과연 부동산 가격이 지금처럼 오르지 않을 경우 전세라는 제도가, 임대업자에 대한 혜택들이 그렇게 문제가 될 정도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면 전세도 의미없고, 임대업자들에 대한 혜택은 임차인에 대한 혜택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답은 뭐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고 그 원인이 되는 전세 또한 줄여나가야 한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지인이 새로 이사하는 집 전세금이 무려 6억이란다. 어지간한 집 한 채 가격을 훌쩍 넘어간다. 과연 나같은 서민조차 되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이 6억이라는 전세금을 만들려면 몇 년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만만한 일반주택 전세가 못해도 1억은 기본으로 넘는 것이 현실이란 것이다. 십 몇 년을 쓰지 않고 모아서 전세금을 겨우 마련했더니만 계약기간 끝나니 전세가 또 올라서 다른 곳으로 이사가야 한다. 차라리 그렇게 모을 돈으로 만만하게 월세라도 안정되게 내면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1억 모으려면 한 달에 100만원 가까이 아껴서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참고로 저 지인도 땅부자인 부모로부터 받은 돈이 저 만큼인 것이다.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정책이 무엇을 것인가.

 

굳이 한 달에 100만원 씩 모아서 1억 전세 사느니 한 달에 40만원 월세 내면서 60만원을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삶을 살고 싶다. 실제 그러고 있다. 그래서 굳이 전세를 구하기보다 방 두 개에 월세 25만원 짜리 싼 집을 찾아서 이렇게 대충 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통장에 목돈도 굳었고 괜히 돈모은다고 안달할 필요 없이 나 자신을 위한 소비도 충실히 할 수 있다. 사람이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집을 사기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요즘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아예 집 사는 걸 포기하고 현재를 즐기려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같더만.

 

월세가 과연 그렇게 나쁜 제도인가. 그냥 단순히 비교해 보면 된다. 지금 집값과 지금 전세값과 비교하면 과연 월세가 그렇게까지 서민들에 부담이 되는 제도일 것인가. 결국 보면 떠드는 대부분이 서민의 삶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경우들이란 것이다. 전세도 오른다. 그것도 대부분 서민들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오른다. 그 돈을 모으느라 역시 그동안 소비도 못하고 돈을 모아야 한다. 언론이 서민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전세금 올릴 것을 대비해서 모으는 그 돈도 결국은 비용인 것이다. 결국 다시 전세를 살기 위해서 그 돈을 다시 전세금으로 묻어 두어야 한다.

 

그러고보니 국채와도 비슷한 구조라 할 수 있다. 국채는 빚이면서도 빚이 아니다. 다음 세대에 갚아야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이자만 충실히 낼 수 있으면 그 다음 세대에서도 굳이 갚지 않고 다음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 바로 국가의 채무라는 것이다. 채권을 발행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기존의 채권을 사들이며 이자를 갚으면 거의 무한히 채권은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모아 전세금을 늘려도 그 돈은 세입자의 돈이 아니다. 다음 임대인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많이들 착각하고 있다. 전세를 월세로 바꿔 살아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조조가 어떤 패악을 저질러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며 충성을 다하던 순욱이었지만 결국 조조가 위왕에 즉위하며 찬탈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그와 결별하게 된다. 이성계를 도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핏줄로 몰아 폐위시키는데 일조했던 정몽주였음에도 결국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려는 것을 알고 그를 막기 위해 오랜 친구의 목숨마저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왕조의 명운이 다했어도, 왕이 무능하고 포악하여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어도, 왕을 바로잡으려 애써야지 왕을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 혼군보다 암군보다 폭군보다 더 큰 죄악이 그래서 찬탈자인 것이다.

 

권경애가 결국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으로 바꾸기 위해 없는 사실마저 조작해 퍼뜨리려 시도했다. 조선일보가 그것을 받고 진중권은 그 주장을 고스란히 인용한다. 홍세화나 서민 나부랭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하다. 윤석열 검찰이 아니면 누가 문재인의 목을 딸 수 있겠는가. 윤석열 검찰을 돕지 않으면 어떻게 문재인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있는 지배자일 것인가. 물론 국민 가운데 문재인을 지지한 40%는 취급할 필요도 없는 불가촉대상인 것이다. 국민이란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들만을 가리킨다. 문재인을 지지한 순간 국민의 자격조차 잃는다. 어째서 언론들이 정상화를 위해 시민들의 도움을 구하고서는 정작 문재인을 지지하던 시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바로 외면하고 정파적이라고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는가.

 

원래 일본에서는 아무리 끝자락에 살짝 걸친 정도라 할지라도 겐지의 후손이어야지만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힘으로 전국의 다이묘들을 누르고 그들의 위에 군림하고 난 뒤에도 끝내 쇼군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던 이유였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올랐던 관직이 우장군, 우대신이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호소카와에게까지 한 번 까이고 그나마 쿠게의 명문이던 토요토미가의 양자로 들어가 쇼군 대신 간바쿠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바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를 중심으로 뭉쳐서 토요토미가를 멸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진위는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겐지의 후손이라 주장할 수 있는 도쿠가와에 비해 역시 오다나 토요토미는 다이묘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이 턱없이 미치지 못했던 탓이었었다.

 

위진시대 이래 대대로 황제가 바뀌는 동안에도 호족에서 귀족으로 거듭난 특권층들이 모든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왕조가 뒤집히고 황제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새로운 황제를 맞아 그를 지지하며 오로지 영화와 권세를 누릴 뿐이었다. 황제마저도 우스웠다. 진정한 천하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런데 혹시라도 황제가 정신이 나가서 그런 귀족들의 특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전충 같은 제대로 미친 놈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어떻게 할 마음조차 먹을 수 없게 된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기록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결국 비대해진 훈구파들의 특권을 왕권으로 억압하고 박탈하려 한 것이지 않던가. 

 

민주화진영에도 엄연히 등급이 있었다. 성골과 진골이 있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육두품과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성골은 군사독재정권도 인정한 이들이었다. 서울대 나와서 서울에서 활동한 말 그대로 엘리트들일 터였다. 그나마 서울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사람들이 알 만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활동했다면 진골 쯤 된다. 역시 이 또한 서로 멱살잡이 하면서도 군사독재정권 역시 인정하던 선 안에 있었을 것이다. 저 멀리 부산에서 한 사람은 고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희대 출신이다. 과연 기득권이든 민주화진영이든 그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겠는가. 노회찬이 아주 오래전 잠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진영에서 끝끝내 비주류로 떠돌다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로 욕하고 멸삽잡이 하더라도 그래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도 박근혜도 그렇게 욕하면서 결국은 대통령으로 인정하기는 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시 자칭 진보 가운데서도 검찰로 하여금 정권을 수사해서 몰락시켜야 한다 주장한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아니 그렇게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에도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경우란 거의 드물었었다. 그런데 어떤가? 노무현 정부 당시는 걸핏하면 거리로 나와 떠들던 말이 대통령 하야와 정권 퇴진이었었다. 감히 이명박과 박근혜에게는 하지 못하던 말들을 당시는 너무도 당당히 외치고 했었던 것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윤석열 검찰을 지켜야지만 문재인 정부를 몰락시키고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누구로의 정권교체이겠는가?

 

KBS가 파업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한 선언이 문재인 정부를 거꾸러뜨려 파업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김경록PB의 인터뷰를 왜곡하고,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으로 바꾸기 위한 오보를 자발적으로 내보냈다. 바로 그 오보를 이유로 수사심의위에서 한동훈에 대한 수사중단권고가 나온 것이었는데 권고를 무시하고 수사했다며 비판하는 보도까지 전면에 내보내고 있었다. 이유가 뭐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당위에 비하면 언론으로서 오보를 내야 한다는 치욕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겨레도 기꺼이 KBS의 검언유착을 가리기 위해 오보 아닌 오보를 냈고 윤석열 총장의 권위가 떨어지는 듯 보이자 오체투지하며 온몸을 던져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런 연장에서 본다면 바로 반박이 나오는 왜곡된 사실로 국면을 전환하고자 시도한 권경애 변호사의 시도는 얼마나 깜찍한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조선일보가 받으니 진중권이 따라서 외치기 시작한다.

 

어째서 언론들은 저토록 정의당을 띄워주는 것일까. 어째서 미래통합당은 정의당에 저토록 추파를 보내는 것일까. 과거 참여정부 시절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정책연대를 하던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당시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을 이어주던 고리도 바로 그것이었었다. 서울대 출신들이 모여서 모임까지 가지더라. 너도 서울대, 나도 서울대, 이성윤 지검장이 아미 경희대 출신이었던가? 같은 검사고 무려 중앙지검장인데 언론은 이성윤 지검장에 대해서만 어쩌면 이토록 가혹하기만 한 것인가.

 

아마 지금쯤 내가 왜 진보를 자칭 진보라 부르는가 이해하게 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진보는 차라리 패션에 가깝다. 페미니즘과 비슷하다. 좋은 대학 나왔고 사회적으로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적어도 이런 그럴싸한 소리 정도는 읊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원래 프랑스혁명 당시에도 많은 귀족들이 당시의 유행이라 귀족들의 특권을 비판하는 글이나 연극 등을 직접 후원하며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질은 단지 특권의식에 찌든 병신들이란 것이다. 토론하던 도중 서울대라는 학벌을 앞세워 상대가 지방대 출신임을 까발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오히려 그런 모습을 지지하며 응원하던 자칭 진보들의 모습에서 더이상 그들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던 기억이 있었다. 소비에트가 어떻게 노동자 농민을 위해 일어났음에도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

 

참 어이없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정의가 무언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통이다. 정통이란 정체성이다. 누가 이 나라 이 사회의 정당한 지배자로서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최소한 서울대도 나오지 못한 부산 출신들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 부역하려는 놈들 역시 마찬가지다. 순혈의 자격을 찾으려 한다. 한겨레와 경향이 벌써부터 윤석열 선거운동에 목숨을 거는 이유인 것이다. 안철수도 서울대였다. 무려 서울대 의대다.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진다.

 

원래는 다른 글을 쓰려 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그런데 또 그런 모습들이 너무 납득이 된다. 조선일보와 손잡고 미래통합당과 손잡는다. 조선일보를 금과옥조로 조선일보를 위해 먹잇감마저 기꺼이 만들어 던져준다. 양심도 염치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대의와 명분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노무현을 몰아내기 위해 한나라당과 손잡았던 당시의 민주노동당과 자칭 진보들처럼. 당시도 비슷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인터넷에는 정말 잘나고 똑똑한 놈들이 너무 많다. 현실이란 것이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이다. 개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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