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김활란이다. 일제강점기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 가운데 하나였으며 군사독재 당시에는 가장 적극적인 부역자이기도 했던 김활란은 그러나 한국 여성주의의 주류인 이화여대의 총장까지 역임했기에 여성주의 진영 내부에서 끊임없이 재평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화여대에서 김활랑의 이름을 딴 상까지 제정하여 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매매춘에 그렇게 혐오를 드러내는 여성주의일 텐데 모윤숙이 주도한 매춘로비집단인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던 사실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친독재성향은 유명했었다. 일단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 여대를 다니며 공부한 이들이란 것이다. 태생적으로 기득권에 더 가까운 이들이었는데, 더구나 그들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는 김활란이나 모윤숙과 같은 여성지식인 상당수가 친일파에 친독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 이후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진보적 담론으로 민주화를 주도한 진보진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박근혜가 나타나며 바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다.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 그가 생물학적 여성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본성을 가릴 유용한 대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덕분에 박근혜 정부에서 그들 여성주의자들은 다양한 요직을 맡으며 철저히 박근혜 정부와 한 몸이 되다시피 했었다. 어느새 여성주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김재련이 바로 당시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위안부문제를 지나간 과거로 묻고자 시도했던 화해와치유재단의 요직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김재련만 그랬느냐면 박근혜가 대선에 출마한 그 순간부터 촛불혁명으로 탄핵되어 물러난 이후까지 여성주의는 철저히 생물학적인 여성으로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에조차 박근혜의 복권을 주장하는 메갈이나 워마드 등 극렬 여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다. 과연 자신들이 박근혜라는 굴레를 벗고 다시금 여성주의의 리더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미투가 그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어 주었던 이유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미투가 있으면 무조건 피해자의 입장에서 지지하며 가해자로 지목된 이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만일 함께 돌을 던지지 않으면 그도 가해자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돌을 어떻게 던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미투를 주도하는 여성주의자들 자신이다. 어떤 미투는 크게 키우고 어떤 미투는 없는 것처럼 묻어 버리고 그렇게 최초의 미투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서지현 검사는 오히려 내부로부터 음해를 당하면서 온갖 불명예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었다. 과연 여성주의자 가운데 누가 서지현 검사를 적극적으로 도우려 했었는가. 무엇이 여성주의자로서 자신들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부정한 과거를 지워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결국에는 정의연 논란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의당과 자칭 진보의 스탠스를 알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의연 사태 당시 이들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보인 모습은 일단 어찌되었거나 정의연부터 죽이고 보자는 것이었다. 왜이겠는가? 정의연이 대표하는 위안부문제의 역사적인 해결이라는 부분에 대해 명분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박근혜 정부 당시 지지했던 정치적 타협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재련이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들고 나오며 그런 노력들에 보답을 했던 것 아니었는가. 만일 정의연 사태를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피해자중심의 역사적 해결이라는 기존의 방향에 대한 명분이 약화되지 않았다면 화해와치유재단 출신의 김재련이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서서 설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위안부문제의 역사적 해결을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마저 조롱하는 댓글들이 넘치도록 달리게 된다. 박근혜 방식도 괜찮지 않았는가. 이명박의 방식도 상관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굳이 정의연이 주장하는 완전한 해결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아가 친일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게 되면 김활란과 모윤숙을 다시 끄집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오랜 숙원이다. 어째서 정의당과 녹색당이 한 데 뭉쳐서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외치고 있는가. 그런 여성주의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다. 여성주의의 과거를 정당화하여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서다. 원래 여성주의와 민주화는 별개였었다.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이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이라는 당위에 동의해서 여성주의를 지지하게 되었을 뿐 그 출발도 전개도 발전도 전혀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든 그동안 진보와 여성주의는 하나라 여겨지며 함께하고 있었는데 박근혜를 통해 그 균열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여성주의는 민주화진영과 함께 갈 수 없다. 여성주의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여성주의는 민주화세력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성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단지 여성의 기득권만을 위한 운동이가.

 

그래서 여성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한 자칭 진보진영에서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목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라고 하는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동의 역시 사라져갔다. 검찰의 권력독점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검찰의 힘을 빌어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 서지현이나 진혜원 등을 압박하고, 사회적 권력을 사용해서 같은 여성인 계약직 방송인을 내쫓고, 그 대가로 여성인 앵커는 공영방송 뉴스를 통해 자사의 오보가 빌미가 된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앞세워 검언유착 수사를 비판한다. 바로 자살도 가해라며 떠들던 바로 그 앵커였다. 이해가 되는가. 원래 여성주의가 가고자 했던 그 길로 돌아가는 도중이란 뜻이다.

 

정의당 내부에서 여성주의와 관련해서 일고 있는 논란들은 바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어째서 진보를 자처하던 한겨레와 경향이 철저히 기득권의 개가 되어 똥이나 핥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가. 진보가 아니다. 그냥 여성주의가 진보인 양 여겨지던 시절 여성주의를 추종하던 놈들이 이들 언론으로 흘러가며 진보를 자처하게 되었을 뿐. 지금 경향일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과연 진보의 가치에 부합한다 생각하는 것인가. 검찰의 절대권력에 대해 오히려 옹호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군사독재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으니 이제는 남성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 저들이 바라는 여성주의는 그런 여성의 해방이 아니다. 여성인 자신들이 여성을 무기로 권력을 가지는 여성주의인 것이다. 박근혜를 지지하며 박근혜가 임명한 자리에서 박근혜의 입맛에 맞게 반여성적인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런 여성주의다. 김재련을 옹호하는 것을 보라. 김재련이 박근혜 정권 시절 보인 행보들이 과연 여성주의의 가치에 맞는다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미 여성주의 그 자체가 되어 있는 상태다.

 

여성주의는 분명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중요한 진보적 가치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성주의가 진보적인가는 다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전환자나 성소수자에 배타적인 여성주의를 과연 진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기득권 여성에 의한 약자인 남성과 심지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학대, 착취 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 것인가. 그래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기만 한 것인가. 대영제국의 일개 노동자도 식민지 인도에서는 우월한 백인이며 영국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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