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상사의 지시마저 무시해가며 최대한 내 관리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더 많이 쉴 수 있도록 많은 부분들을 배려하려 노력해 왔었다. 당연히 내 책임 아래 있기에 다른 지시가 있으면 그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팀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치에 있기에 그 부분도 신경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온전히 내 팀 만 신경쓸 수는 없는 상황이란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 배려하며 신경써 주던 부분은 싹 빠진 채 최근 조금 관리를 엄격하게 하며 서운하게 한 부분만 이유로 들어 말하고는 직원 하나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 내 기분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잘못했는가? 그 다음에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가? 그래서 내가 지금보다 뭘 얼마나 잘해 줄 수 있겠는가? 아니 잘 해 준다고 무슨 보람이 있기는 할 것인가? 모든 것이 허무해져서 화도 잘 나지 않더라. 화도 나지 않고 밉거나 싫지도 않고 그냥 기운만 빠진다. 덕분에 너무 팀원들 풀어준다고 상사로부터 몇 번이나 질책도 받고 했었는데. 그래서 보이는 데서는 너무 티내지 말라면서 나 혼자 안달복달하고는 했었다. 당연히 그러는 것을 알아도 실제로 그러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일 테니까. 자기 편한 사정은 이야기하면서 내 곤란한 사정 같은 건 헤아리지 않는다. 그래서 말했다. 지금보다 잘하지는 못할 테니 그냥 나 자르라 말하라고. 다른 사람 팀장 시켜달라 말하라고. 그래서 잘리면 잘리는 거고.

 

문득 박원순 시장이 피소사실을 알았을 경우를 가정하고 당시 박원순 시장의 심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평생을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전혀 터무니없는 이유로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게 생겼다. 더구나 그동안 동지로써 가까이 지내던 이들마저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낙인찍고 비난하는 말들을 하고 있다. 검찰과 언론이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를 박원순 시장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서울시장으로 있던 내내 보수정당과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며 가족까지 크게 곤란을 겪었던 경험도 있을 터였다. 과연 지금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씨발 그냥 그만두라면 그만두고 말지 손 놔 버린 내 상황과 당시 박원순 시장의 처지가 크게 봤을 때 어느 정도 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화도 그다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덤비고 까불어도 그다지 밉거나 하지 않다. 그냥 필터라도 하나 걸친 양 현실감 없이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래서 사람들이 굳이 아랫사람을 위해서 윗사람과 다투기 보다 윗사람 눈에 들기 위해 아랫사람을 희생양 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상사가 시키는대로 갈구고 다그치기만 했다면 상사도 굳이 내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을 테지. 그러면서도 또 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기에게 게기며 팀원들만을 챙기고 있었는가도. 확실히 서로 마음 통하는 것은 상사 뿐이었던 것일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결국은 나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이상 신경쓰기도 싫고 마음쓰기도 싫다. 다만 언론과 정치권의 표적이 될 일은 없으니 다행이다.

 

자살은 공포를 회피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포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 때로 허무일 것이다. 그동안의 삶이 허무해지고, 앞으로의 삶까지 공허해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심연보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뭐가 어떻게 되는 나와는 상관없을 것이다. 당연히 팀원들이야 뭐가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 팀원들 개개인이 사라지고 팀원이라는 이름 하나만 남게 된다. 애정과 관심이 사라지면 개인이 아닌 전체만 인식 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일부만 일부만 떠들며 특수한 사례임을 강조해도 외부인들 눈에 모두 똑같이 보이는 이유다. 그러니까 결론은 뭐다? 그냥 좆같다.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다. 출근해야 한다.  

그래도 박원순 시장 논란을 계기로 직장에서의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기 시작한 여성들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편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만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매 순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제와서 호소라도 할 수 있으니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일까. 그런데 한 편으로 그래서 여기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편을 들게 되면 여성주의자들이 더 득세하는 것은 아닌가.

 

여성을 수단으로 앞세우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여성주의를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로 앞세우려 하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들인 것이다. 여성주의가 권력화되어 기성의 권력과 결탁한 뒤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모두를 억압하려 하고 있다. 검찰을 이용해서 여성 검사를 징계하려 하고, 경찰을 움직여서 자신들에 비판적인 이들을 2차 가해라며 처벌하려 하고, 심지어 대통령마저 압박한다. 일베라면 모를까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성주의자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약화시키기 위해 여성주의자들이 앞세우는 여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여성의 문제란 여성주의자들의 부정하고 부당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원이자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최소한 더 강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여성문제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여성주의자들이 먼저 적이기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 여성주의자이기를 선택했고,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오로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만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단지 남성인 내가 여성의 편에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편에 서야만 하는 것인가. 어차피 적일 텐데?

 

오랜 세월 동지였었다. 어쩌면 기성의 남성들 가운데 가장 든든한 그들의 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이었다. 그래서 적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빚져 온 그보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편에 당연하게 서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인연조차 외면한 채 죽음마저 모욕하며 시신까지 난도질하려고 하고 있다. 안티페미란 놈들이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는 박원순 시장이라는 오랜 동지조차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단죄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러 논쟁들에서 여성주의자들의 편을 들어 본 적 있는 대부분 남성들이 한 번 쯤 겪어 본 상황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같은 편이 되어 논쟁하다가도 결국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여 비난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다름이 틀림이 되고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내가 저들과 같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란 이유 때문이다. 내가 여성주의자들과는 절대 어울릴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보다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이 더 커져서는 안된다. 언론과 검찰과 보수권력과 손잡은 여성주의자들이 의도한대로 앞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이 앞세우는 여성의 문제들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수단이니까. 권력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여성 자신들조차. 과연 여성주의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인가.

 

여성주의는 정치다. 여성주의는 권력이다. 여성과 여성주의는 단지 기득권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손잡는 대상이 여성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수구언론과 검찰이란 것이다. 정의당이 감히 검찰개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언론개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페미니즘은 더이상 사회적 약자를 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부한다. 저들의 여성주의를. 박원순 시장 논란이 남긴 성과다. 선을 긋는다.

그러고보니 여성주의자들이 습관처럼 하는 말 가운데 그런 게 있었을 것이다. 직업이나 직책 앞에 여성을 붙이지 마라. 여류작가, 여의사, 여배우, 여선생, 여직원, 여의원 등등등...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앞에 여자를 붙이지 않는 만큼 하는 일에도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하는 일을 남성도 하고, 남성이 하는 일을 여성도 한다. 그러면 과연 비서의 일이란 무엇일까?

비서란 말 그대로 보좌하는 일일 것이다. 하는 일도 많고 책임도 무거운 사람들이 보다 자기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일들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말이든 새벽이든 자기가 보좌하는 이가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거나 하면 동반해야 할 때도 있고, 잠시 분주한 일과 가운데 잠시 짬을 내서 눈을 붙이거나 하면 때맞춰 깨워주기도 해야 한다. 나이가 있으니 건강관리를 위해 혈압을 재려 하면 역시 혼자서 재는 것보다 남이 재 주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하다. 체력관리를 위해 운동을 마쳤으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주는 정도도 업무에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비서가 여성이니까 이런 일도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사실 박원순 시장도 잘한 것은 없다. 비서가 여성이라도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 하고, 짜증날 때는 짜증도 내야 한다. 그랬어야 비서들이 여성인 비서를 앞세워 방패막이로 삼지 않는다. 여성 비서를 앞세우면 화내고 짜증낼 것도 그만큼 더 참더라. 자는 것 깨우면 불편한 표정을 짓거나 할 때도 있는데 여성 비서가 깨우니까 그런 게 없더라. 왜 사람을 차별하는가? 여성 비서에게도 야단도 치고 질책도 하고 불편한 기색도 내보였으면... 아, 그래도 여전히 욕먹었을까? 여성인 비서를 함부로 대한다고?

어차피 누군가 갈아입을 속옷을 가져다 줘야 한다면 여성 비서가 아니면 남성 비서가 그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굳이 남성 비서가 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여성이라서 그 일을 시킨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비서가 하는 일이니 남녀 구분 없으 그냥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된 것인가. 더구나 속옷심부름을 시키는데 어떤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었는가. 그냥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라 시킨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남자 비서들은 아무래도 박원순 시장이란 사람을 마주 대하기가 몹시 불편하다.

아무튼 웃기는 것이다. 여성이니까 시켜서는 안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해서는 안되는 말이나 행동들이 너무 많다. 대부분 남성이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들이다. 그런데 여성이라서 문제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한 마디로 여성은 특별하다는 것이다. 특별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은 다르다. 그러면 비서 앞에도 여성을 붙여서 여비서라 불러야겠지. 당연히 여비서라 불리는 만큼 하는 일도 달라야 한다. 그것을 바라는 것인가. 남비서 할 일 따로 있고 여비서 할 일 따로 있다. 시킬 수 있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들도 서로 전혀 다르다.

여성을 거짓말을 않는다. 여성을 사실을 왜곡하지도 편취하지도 않는다. 여성은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성추행으로 고소한 순간 이미 가해자로 유죄가 확정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주의가 바라보는 여성의 정체란 것이다. 세월이 너무 지나 버린 것일까. 더치페이를 문제삼는 여성주의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여성은 전혀 별개의 존재로 전혀 다른 일을 시킬 목적으로만 채용하고 대우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 역시 인정한다. 인간이 아닌, 보편의 개인이 아닌 단지 여성이라면 굳이 일반적인 일을 위해 채용할 필요가 없다. 여성에게 시킬 일에 대해서만 여성을 채용하면 된다.

여성주의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다수 여성의 입장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많음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여성들과는 신분부터 다르신 분들이란 것이다. 여성주의를 팔아먹는 여성을 수단화하는 특별한 여성님들이다. 그게 바로 여성주의의 현주소다. 없던 여성혐오까지 생기려 한다. 대단한 여성주의자들이다.

그러니까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서로 다르다면 논쟁을 통해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기성의 국가와 사회를 비판하면서 흔히 쓰는 말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폭력적인 권력구조라는 것이다. 검찰이란 조직에서 다수를 차지하며 그 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 역시 대부분 남성들일 텐데 그런 남성들에게 단지 의견이 다른 같은 여성의 징계를 의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긴 한가?

 

그래서 벌써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여성주의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했던 말이 바로 기생페미니즘이란 것이었다. 스스로 쟁취한 무언가를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여성주의가 아닌 단지 남성의 권력에 기생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여성주의란 뜻이다. 자신들과 다른 판단과 지향을 가지는 이들과 논쟁을 통해 설득하며 하나씩 쟁취해 나가기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눈에 들어 그들의 비호 아래 권력에 기생하여 일시에 폭압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여성주의란 것이다. 그래서 실제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은 설득의 대상이어야 할 일반 남성 대중이 아닌, 심지어 일반 여성 대중조차도 외면한 채 오로지 권력을 가진 특수한 소수를 향해서만 부르짖는 경우가 많다.

 

진혜원 검사의 판단은 틀렸다. 진혜원 검사의 주장이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왜 틀렸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근거를 제시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설마 같은 여성인데 남성 일반들보다야 근거만 타당하다면 설득하기도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대화를 통해 설득하기보다 진혜원 검사가 속한 검찰이라는 조직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남성인 검찰총장과 그를 정점으로 이루어진 검찰이란 권력의 구조를 이용하고자 했었다. 같은 여성조차 대화와 설득의 대상이 아닌 권력을 통한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박근혜를 탄핵당하는 그 순간까지 지지했던 것이기도 하다. 여성이 대통령이 되어야 그 힘을 빌어 자신들도 권력을 휘두르며 여성주의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 그나마 여성에 우호적인 남성권력이 들어서니 오로지 그에 기대서만 설득과 공감이 아닌 억압과 폭력을 통한 강제로써 그를 이루려 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마초 페미니즘이라 할 만하다. 여성주의자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남성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권력이 아닌 남성의 권력에 기대서. 남성의 권력을 이용해서. 그래서 그 권력만 빌려준다면 어느새 자신들의 편이 되는 것이다. 장자연 사건도, 김학의 사건도, 여성의 인권을 처참히 유린한 그런 사건들을 철저히 은폐해 온 언론들과 어느새 한 편이 되어 손잡고 있는 것이다. 조중동이야 말로 진정한 페미니즘 언론이다. 과거 전력은 중요하지 않다. 원래 매춘부에게 손님이 과거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몸을 팔려는데 상대가 얼마나 대가를 주려는가가 중요하지 손님의 정체가 무엇인가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래서 기생페미니즘이란 것이다. 그래서 마초페미니즘인 것이다. 권력에 기생해서 그 권력을 사용해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말고 소통의 방법을 모른다. 그만한 위치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이들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2차 가해라는 억지도 그래서 가능하다. 증거를 대가며 구체적인 진술을 하는 자체를 성가시고 피곤해 한다. 그냥 들으라. 그냥 믿으라. 아니면 너희를 벌하겠다. 확실히 박원순에게도 원죄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버릇을 너무 잘못 들였다.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전에 먼저 여성 스스로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방법을 배우게 했어야 했다. 소통법을 배우도록 했어야 했다.

 

여성주의보다 우선하는 것이 인본주의다. 여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인간이란 가치다. 여성이 절대 인간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성 위에 남성이 없듯 남성 위에도 여성은 없다. 그런데 남성 위에 여성 있고, 그 여성 위에 권력있는 남성이 있고, 그런 남성들과 가까운 자신들이 있는 듯 여긴다. 여성주의에는 여성이 없다. 권력에 취한 여성을 도구화하는 소수의 엘리트들만 있을 뿐. 더욱 확신을 가진다. 여성주의는 사회를 넘어 인간의 해악이다. 분명한 깨달음이다.

누군가 강도를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묻는다.

 

"어디서 어떻게 강도를 당하셨죠?"

"내 말을 안 믿는 건가요? 2차 가해입니다."

 

신고자가 지목한 사람을 불러 대질심문을 한다.

 

"이 사람은 그런 적 없다는데..."

"내가 피해자입니다. 지금 가해자의 편에서 2차 가해를 하는 건가요?"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되었다. 용의자를 기소한 검사가 증인을 불러 심문하려 한다.

 

"증인 나와주세요."

"왜 증인이 필요하죠? 내가 피해자입니다. 2차 가해입니다."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증거는 이 핸드폰 사진이면 충분합니다. 피해자인데 2차 가해를 하려는 건가요?"

 

그리고 검사 심문이 끝나고 변호인 심문이 시작되려는데,

 

"저 변호사는 뭡니까? 왜 가해자 편에서 변호를 하는 거죠? 2차 가해입니다."

 

재판장이 참다 못해 한 마디 한다.

 

"여기는 신성한 재판정입니다."

"지금 저에게 뭐라 하시는 건가요? 2차 가해입니다."

 

그러니까 왜 가해냐고. 도대체 박원순 시장이 뭘 어떻게 했길래 성추행이라 주장하는 것인가. 그냥 성추행이라 주장하는 것 말고 내놓은 증거라는게 아무나 만들 수 있는 대화방 초대화면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장에 의문을 표하는 것조차 2차 가해라. 그러니까 성범죄는 일단 신고를 당했으면 사실여부도 따지지 말고 무작정 믿고 지지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침묵하는 것도 용납지 않고 오로지 지지의 발언만을 요구한다. 그게 페미니즘?

 

물론 불과 얼마전까지 저런 방식이 통하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요즘도 우스개로 많이들 이야기하지 않던가.

 

"내가 누구인 줄 알아?"

"내가 여자야!"

"내가 고소인이야!"

"내가 피해호소인이야!"

"내가 피해자야!"

"그러니까 믿어!"

"따라!"

"지지해!"

 

씨발 여자가 무슨 벼슬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대부분이 잘 나가는 여자들이기는 하다. 남자들에게 '어딜 감히!'라 말해도 되는 위치의 여자들이란 것이다. 더구나 언론이 편들어주고 있다. 언론개혁을 위해서 이제는 여성개혁까지 해야 하는 모양이구나. 여성은 언론에게 여성주의란 명분을 쥐어주고, 언론은 여성에게 언론이라는 힘을 빌려주고. 그래서 어딜 감히가 가능해진다. 같은 여성에게마저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생각과 판단을 이야기 할 자유마저 박탈한다.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성추행이냐고.

 

진혜원 검사의 중징계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검사의 일이란 게 그런 것이다. 누군가 고소고발하면 당사자의 진술과 제시된 증거와 참고인의 진술까지 취합해서 실제 범죄의 성립여부를 판단한다. 그래서 요구하는 것 아니던가. 증거나 증언은 차치하고라도 도대체 뭘 어떻게 당했는지 구체적인 사실이라도 이야기해달라. 그랬더니 하는 말이란 새벽에 출근시키고, 잠깨우게 하고, 속옷 심부름 시키고, 혈압재게 했다. 그래서 속옷 심부름을 여성이라서 시켰었는가? 아니면 비서니까 시킨 것이었는가? 더구나 피고소인으로부터 증언도 들을 수 없을 테니 더욱 엄정하게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밝혀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2차 가해라?

 

증거를 요구해도 2차 가해, 보다 구체적인 진술을 요구해도 2차 가해, 그냥 지켜보자고 침묵하니 2차 가해, 죽은 사람은 죽었다고 2차 가해, 도대체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려니 그것도 2차 가해, 피해자의 주장과 다른 정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것도 2차 가해, 중세 마녀사냥인가? 아니면 이단심판인가? 그냥 믿지 않으면 다 2차 가해고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는 중죄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칭 안티페미들은 어디서 뭘하는 쓰레기들인가.

 

온라인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평소 문재인 욕하고 박원순 욕하고 미래통합당 지지하던 안티페미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박원순과 함께 고소인을 같이 욕하더라.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 그런데 이번엔 나 역시 그냥 맞장구치고 말았다. 그래, 더이상 여성할당제 같은 것으로 여성의 고용을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자랑 같이 일하는 것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참고로 이 친구는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여직원과는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외골수다. 온라인에 취한 놈들이 아니면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도 역시 더이상 여성문제로 싸우기를 포기하고 입장을 같이 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대화가 부드럽게 잘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란 것이다. 정치적 목적과 여성주의의 신앙만 제하면 생각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도대체 속옷 심부름 정도가 그렇게 죽은 사람을 부관참시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범죄인가 하는 상식 차원의 판단인 것이다.

 

아마 상황이 달랐다면 당연히 나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모욕하지 않고, 무덤까지 파헤쳐 부관참시하려 하지 않았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가. 비례의 원칙이란 것이다. 소매치기했다고 손목을 자르고, 도둑질 했다고 목을 매달고, 성폭행 했다고 일가족까지 노예로 팔아넘긴다. 분명 범죄자인데도 그런 경우 그런 형벌까지 받게 된 이들을 동정하게 되는 것이 상식인 것이다. 지나쳤고 넘쳤고 그래서 선을 넘고 말았다.

 

아무튼 개씨발 쌍것들이라는 것이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죄인이지만 이미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혔으면 수형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형자들 역시 보편적으로 사회적 약자로 여겨진다. 공권력에 의해 인신을 구속당하고 감옥에 갇힌 채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조차 제약당하고 있는데 과연 강자이겠는가 약자이겠는가. 당연히 죽어서 자신을 위한 한 마디 변명조차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괜히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더이상 왈가왈부 않으려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아무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더 대상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과연 진상조사라도 제대로 하고 있느냐면 인권위도, 서울시의 자체조사도 모두 여성들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소인과 변호인 자신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그렇게 진실이 중요하다면서.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연 여성단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여성단체들은 언론과 손잡고 이런 식으로 일을 키우려고만 하고 있는 것인가.

 

어쨌거나 정말 어이가 없다는 것이다. 뭔 말만 하면 2차 가해다. 아무말도 않고 있어도 2차 가해다. 죄다 2차 가해고 그 판단은 자신들이 한다. 언론이 부추기니 아주 신났다. 여성운동은 없다. 최소한 앞으로 나에게는. 여성주의자란 내게 있어 그냥 기자와 같은 뜻인 것이다. 안티페미를 외치던 일베 벌레들처럼. 빌어먹을 것들이다.

지금 고소인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며 참페미니스트로 추앙받는 강용석과 김재련, 그리고 바로 그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인간쓰레기로 부관참시당하고 있는 박원순, 과연 사람이라면 누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너무 자명한 것이다. 이번 박원순 시장과 관련한 논란에서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이들과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차이는. 그나마 싸가지는 없어도 민주당의 여성주의 정치인들은 영결식까지는 참아주는 인내심을 보이고 있었다. 박원순 시장을 비판하면서도 그동안의 삶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동안의 삶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은 박원순 시장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부터 그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그 순간 축배까지 들고 있었다. 여성주의를 대표할만한 인간들이 보인 행동들이다.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추모하거나, 그동안의 삶과 업적들을 애석해하거나, 박원순 시장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 의심을 보이는 이들은 2차 가해자라 부르며 매도하기 급급했었다. 언론과 결탁해서, 언론에 페미니즘이라는 명분을 쥐어주고, 언론이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힘을 싣고 그에 편승하려 하고 있었다. 언론과 결탁한 놈들이 지금껏 멀쩡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평소 안티페미니즘을 주장하던 일베들은 오히려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금과옥조처럼 받들며 페미니즘 전사로 변신하고, 평소 페미니즘을 지지하던 이들이 고소인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가지거나 바로 편들지 않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2차 가해자라며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평서 안티페미를 주장하던 고소인의 지지자들과 페미니즘을 지지하던 고소인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 누가 그동안 더 올바른 삶을 살아왔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단지 고소인의 편을 드니 일베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고, 고소인을 의심했으니 2차 가해자이며 여성차별주의자다. 그러면 누구의 편에 서야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가세연과 박원순만 비교해도 바로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김재련 변호사가 지난 정부에서 했던 일들만 놓고 봐도 바로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페미니즘이 바라는 인간상이란 가세연이고 김재련이며, 박원순이나 진혜원 등이 아니다. 하긴 윤석열이 진혜원 검사 징계하겠다고 감찰부에 넘긴 것을 보니 역시나 이들이 진짜 누구와 손을 잡고 있는가가 분명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주의 변호사가 진혜원 검사에게 중징계가 가능하다 자신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주의가 원래 누구를 지지했는가 안다면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여성주의가 바라는 인간상이란 과연 보편적으로 추구할만한 바른 인간상인 것인가.

 

원래도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지만 더욱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거부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가세연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베놈들과 같이 놀 수는 없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바라는 인간이 그런 것이라면 그냥 박원순처럼 페미니스트의 적이 되고 말겠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적이란 오히려 훈장이다. 페미니스트의 아군이란 차라리 모욕이고 치욕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언론이든 뭐든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몰아가는 상황이란 오히려 악을 선으로, 불의를 정의로, 부도덕을 도덕과 윤리로 뒤바꾸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그것이 정의라면서.

 

가세연을 앞세우고, 김재련을 앞세우고, 하긴 덕분에 일베가 류호정과 장혜영을 지지하는 웃기는 꼬라지도 보게 되었기는 하다. 원래 저들은 하나였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 아니 모르는 척 하는 것은 민주당 내 여성주의자들 뿐. 그나마도 결국 서울시장을 둘러싼 나름의 셈법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볼수록 쓰레기들만 저쪽으로 몰려가는 듯한 모습이 보기가 좋다. 진중권도 보이지 않는가. 박용진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은가. 참 저런 놈들과는 같이 섞이는 자체가 치욕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페미니즘을 지지하며 페미니즘에 반대해 온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한 것이 원망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대로 고소는 곧 피해자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2차 가해라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디 한 번 당해봐라. 그러면 박원순 하나만 당하고 말겠나?

 

참 병신들이란 것이다. 오히려 기회다. 봐라.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것들이 페미니스트란 것들이다. 더구나 과연 민주당 지지자라고 모두 극렬 페미니즘에 우호적이었었는가. 오히려 이런 때 손잡고 안티 페미니즘 진영을 강화하는 것이 이후를 위해서도 더 현명한 행동일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남성 페미니스트였던 박원순 시장이어서가 아니라 박원순 시장조차도라는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서 그토록 노력해 온 박원순 시장조차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으로 돌리고 죄인으로 단정짓는다. 그런 게 페미니즘이라면 차마 사람이 가져야 할 신념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그동안 문제되었던 것보다 더 지독하고 더 악랄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자칭 안티페미들은 오히려 그런 페미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그런 주장과 행동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페미니즘인가, 단지 민주당이 싫었던 것 뿐인가.

 

웃기게도 정권 초반 남녀간의 성간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무렵에는 20대 남성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그리 비판하던 언론들조차 어느새 열렬한 페미니즘의 지지자라도 된 듯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안티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의 오월동주라 할 만하다. 민주당 정치인을 죽이려면 서로 일베도 페미니즘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동안 다른 대상들을 상대로 하던 것을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란 것이다. 진실을 요구하는 것도, 증거를 기대하는 것도, 그래서 사실관계를 검증하는 것도 모두 2차 가해라는 것이다. 심지어 당사자가 죽었는데 이유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2차 가해라고 낙인부터 찍어 버린다. 그래서 뭐가 성추행인가? 자는 거 깨우랬다고. 자기가 있으면 시장님이 기분 좋아 하더라고. 속옷심부름 시켰다고. 여비서가 안하면 남비서가 속옷심부름 했겠지. 주말에 출근하는게 그리 싫었던가. 증거라고 나온 게 그냥 대화방 초대하는 화면 하나 캡쳐한 것이다. 아무리 이런 정도로 더구나 얼굴과 이름까지 가리고서 성추행이라고 고발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던가. 그런데도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중죄다. 그러니까 늬들이 진짜 안티 페미 맞느냐는 것이다. 저 주장들이 다 옳다면서?

 

정권 초기 여러 이슈들을 두고 논쟁하던 사이라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느끼게 된다. 저 새끼들은 그냥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깔 꺼리가 없어서 페미니즘에 반대했던 것이며, 따라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깔 꺼리가 생기니 바로 페미니스트가 되고 만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남페미라 고소해서 그러는 것이라? 남페미가 싫은 것인가? 페미니즘 자체가 싫은 것인가? 그러면 남페미만 사라지만 페미니즘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인가.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여성주의자들이 영리하기는 했다. 이들의 반페미니즘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허구고 모순인가를 벌써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불만이 많고, 현정부와 여당에 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그냥 여성을 욕하고 페미니즘을 욕하자. 그래서 현정부와 여당을 욕할 수 있으니 그냥 페미니즘의 편에 서자.

 

이 새끼들 또 페미 어쩌고 하는 꼬라지 보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 필요할 때는 페미고 필요없어지만 안티페미다. 그래서 벌레새끼들인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초지일관 안티페미를 주장했으면 인정할 만도 했을 텐데. 지금 저 주장들의 모순이 보이지도 않는 것인가. 뇌가 우동사리거나 우동사리가 뇌이거나. 상종하기도 싫어진다.

어제 kbs 뉴스9에서 자살도 2차가해라고 떠들어댄 모양이다. 고소인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니 그 정체를 알려는 것도 2차가해. 그런데 자신이 당한 성추행을 공동체의 공론에 맡기고자 했던 것은 고소인 자신 아니던가. 공론이란 바로 그런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주장에 대해 과연 타당한가 옳은가를 공공의 다중이 판단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데 주장하는 바를 모두 인정하고 긍정해달라. 그게 무슨 공론인가? 선언이지.

 

이런저런 증거들과 정황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왜 그랬는가? 어째서 그것이 성추행이 되고 성추행의 증거가 되는 것인가? 그마저도 2차 가해라고 한다. 아니 이것저것 사실을 밝히기는 했는데 성추행이라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자기 상식에 그런 정도 가지고 이렇게까지 난리칠 일은 아니니 정말 그런가 되묻는 것인데 그마저도 2차 가해라면 그냥 다중들은 판단하지 말라는 것인가? 지금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이 그리 몰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너희는 판단하지 말라. 우리가 판단할 테니 너희는 그냥 따르기만 하라.

 

비유하자면 어른들과 이야기할 때면 거의 항상 반드시 나오는 '어딜 감히 어린 놈이!'와 비슷한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딜 감히 여성님들께! 어딜 감히 여성주의자님들께! 어딜 감히 언론님들께! 오랜만에 신이 났다. 언론의 보도에 의혹을 제기하면 감히 여성주의를 거부하는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무지한 대중이 되는 것이고 그 모든 행동은 2차 가해가 되는 것이다. kbs 뉴스9에서 앵커가 말한 맥락도 그런 것이다. 스트레스가 쌓였겠지. 뭐라 보도해도 믿지 않으니 무척 짜증도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2차 가해라면 2차 가해인 것이다. 자기들이 성추행이라면 성추행이고, 추악한 범죄라면 추악한 범죄고, 그러므로 더이상 다른 이견을 달지 말라. 죽음조차 2차 가해다. 살아서 때리는 대로 맞으라.

 

만일 진짜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 고소건으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안티페미 외치던 병신새끼들은 지금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선언한 것이다. 자살도 하지 말고, 반론도 하지 말고, 그냥 고소인이 떠들면 인정하고 엎드려서 때리는대로 다 쳐맞으라. 뭔 소리인지 알겠는가? 반론하고 반박하는 자체도 2차가해이니 그냥 언론과 함께 때리면 쳐맞고 뒈지라면 뒈지라는 소리인 것이다. 죽는 것조차 너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게 여성주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한국의 여성주의는 여성엘리트주의라고.

 

대중도 판단할 수 있다. 나같은 그저 계약직이나 전전하는 가난하고 비루한 존재조차 사실여부에 대해 얼마든지 자신의 지각과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상식에 비추어 설사 성추행이라도 그렇게 중대한 범죄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상황을 키우는 이유를 의심하게 될 정도다. 그러니까 2차 가해라는 것이다. 감히 자신들을 거스르고 있으니까. 대중은 그냥 따르면 되는 것이다. 여성주의자 이외의 대중들은 다른 판단 말고 그냥 자기들이 떠드는대로만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게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것인가.

 

하긴 kbs뉴스9의 앵커 정도면 그래도 좋은 성공한 엘리트이기는 할 것이다. 방송에 나와서 떠드는 이름있는 여성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야 엘리트로서 여성주의라는 타이틀을 이용해서 지금의 자리도 지키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 무지한 대중을 가르치고 바꿔가면서. 민주당 여성정치인들이 저 지랄 하는 이유는 단지 서울시장 공천에서 여성의 지분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인 것이고. 그러므로 엘리트로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더 강화하겠다. 대중은 그런 자신들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성인지감수성이라는 말로 돌려 말한다.

 

성추행이 목숨보다 중하다. 아무리 살인을 저질러도 사람의 목숨까지 뺐는 경우는 드문데 성추행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인 것이다. 그래서 성인지감수성이니 뭐니 쓰레기통에 쳐박으라는 것이다. 없던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 생기려 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들 욕하면서 어지간하면 그래도 합리적인 주장들에 대해서는 욕먹어가며 지지하고 했었는데 그냥 다 때려치고 말겠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다. 단지 여성일 뿐. 여성주의자들이 그리 선언하지 않았는가. 여성에 인간은 없다고. 여성주의에 인간은 없다면서. 여성주의에는 대중도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만 있다.

 

TV는 그냥 죽을 때까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물론 TV 있어도 수신료 안내는 방법 정도는 있을 테지만 내 양심이 그런 걸 허락지 않는다. 수신료 내기 싫어서 TV 안 산 지 10년을 넘어간다. 여성주의자는 그냥 적이다. 내게 있어 적이란 동등한 존중해야 할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아무리 민주당 공천을 받았어도 여성후보가 나왔으면 투표도 포기한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계기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곳까지 건드려 버린 모양이다. 좆같은 상황이다.

내가 여성주의자 씨발년들이 성인지감수성 어쩌고 아무데나 끌어다 붙일 때 욕하며 했던 말들이 있다. 여성보다 인간이 먼저다. 원래 페미니즘이란 여성 역시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낙타와 텐트의 우화와 비슷할 것이다. 머리만 좀 들어갈게. 앞발만 좀 들어갈게. 몸만 좀 들어갈게. 뒷발만 좀 들어갈게. 꼬리까지 들어갈게. 그리고 사람은 낙타에게 밀려나 텐트 밖에서 지내게 된다. 아예 사람취급도 받지 못한 여성들이 그래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지게 되니 할 일 없어진 여성들이 그 이상을 원하게 된다. 아니 무슨 여성주의자라는 년들이 데이트할 때 남성이 더치페이 하는 것 가지고 시비거냐?

 

원래 여성주의자라는 자체가 남성이고 여성이고 다 똑같은 인간이니 더 차별하고 더 배려하고 하는 것 없이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얼차려 받을 때 여성도 같이 받고, 직장에서 쌍욕 들을 때 여성도 같이 듣고, 힘들게 잡일 할 때 여성도 같이 하고. 당연하게 남자 직원들만 불러서 야단치고 있으면 왜 자기는 빼고 야단치느냐고 항의할 수 있어야 여성주의인 것이다. 그런데 여성도 함께 야단치면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다. 비서니까 시장이 필요해서 옷갈아입거나 할 때 갈아입을 속옷도 함께 가져다 주고 집으로 보내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였던 것인가.

 

물론 박원순 시장도 잘못했다. 여비서라고 특별대우해서는 안됐었다. 남비서들과 똑같이 화나면 화내고 짜증나면 짜증내고 질책하고 야단치는 모습도 보였어야만 했다. 오죽 여직원들만 특별히 대우했으면 남비서들이 하나같이 여비서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려 했을까? 그래서 묻고 싶다. 그러니까 박원순 시장이 다른 남비서들 대하듯 여비서도 대했다면 전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인가. 그런데 혈압을 재면서 했다는 말이나 갈아입을 속옷을 가져다 주고 집으로 보내는 일 등을 보면 그냥 비서로서 일을 한 것 뿐인데? 여비서는 따로 달리 대우해야 한다고? 더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까지 파헤쳐 난도질해야 할 정도로 그게 그렇게 흉악한 범죄인 것인가.

 

도대체 무슨 내용을 가지고 성희롱이라 성추행이라 주장하는 것인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는 것 같다. 그냥 성추행이라니 흉악한 범죄다. 성추행으로 고소했으니 흉악한 범죄자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상당히 법적으로 심각한 범죄에 해당하거든? 그런데 여성이니 상관없다. 여성에 대한 범죄이니 시효도 한도도 없다. 뭐 이런 개 씨발 좆같은 것들이 다 있나. 욕하려고 쓰는 글이니 계속 욕을 붙이겠다. 욕 없이 쓰기 힘든 글이다.

 

아무튼 확신했다. 예전 글 보면 알겠지만 나 역시 여성할당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었다. 취업시장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아직 많이 불리하고 상당한 차별도 받고 있다. 그러니 할당제로 강제해서라도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취소다. 절대 취소다. 이래도 성인지감수성, 저래도 성인지감수성, 남직원들과 똑같이 대해도 성인지감수성, 남직원들과 달리 대해도 성인지감수성, 그리고 그 책임과 처벌은 거의 무한대. 누가 그런 여성들을 데려다 쓰겠는가? 비서로서 할 일도 여성이라고 일일이 가려서 시켜야 하는데 차마 못할 일인 것이다. 혈압도 대신 재달라 말할 수 없다. 말도 혹시라도 성인지감수성인지 쓰레기인지에 걸릴까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이게 직원이냐? 상전이지?

 

직장이란 곳이 업무적인 위계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 함께 일하다 보면 위계관계도 인정관계로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정관계란 때로 아슬아슬한 선을 넘기도 하면서 부담없이 말도 나누고 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정관계를 위계관계에서도 기대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성은 안된다. 여성은 오로지 성인지감수성을 지켜가며 대해야 한다. 아무리 함께 오래 일했어도 동료도 뭣도 아닌 그냥 여성일 뿐이다. 나라도 안 쓴다.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폭로가 의미하는 바인 것이다. 저 썩을 것들은 데려다도 못 쓰겠다.

 

반여성주의를 그토록 강하게 주장하던 놈들이 얼마나 대가리 없는 쓰레기인가도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말이 안되는 것이다. 아니 설사 그렇게 성인지감수성이란 걸 어겨서 문제가 있다 해도 그게 죽은 사람의 인격까지 모욕해가며 비난할 정도로 중대한 범죄란 것인가. 인간이 인간이 아니고 여성은 단지 여성이란 것이다. 여성이 인간의 위에 있다. 이 미친 것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런 의미 아니던가. 

 

아무튼 이런 정도가 그렇게 중대한 범죄라 한다면 성인지감수성인지 뭔지 그냥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리겠다. 반여성주의 하는 쪽이 내 이성에도 부합한다. 인간이 우선이다. 여성보다. 남성이고 여성인 것보다. 상식일 테지만. 버러지들.

간단히 남성인 내가 여성에 대해 같은 말을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여성은 거짓말을 않는다. 필요에 의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취하지도 않는다. 상황을 잘못 오해하는 경우도 없다. 오로지 이성적으로 명징한 사실과 진실만 말한다. 여성에 대한 칭찬일까? 아니면 여성에 대한 대상화이고 정형화이고 차별인 것일까?

 

이를테면 여성을 오로지 순결한 존재로만 여겨서 성적으로 조금만 더럽혀졌다 싶으면 바로 단죄하던 시대나 사회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여성의 순결과 여성의 현숙함을 예찬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는 여성들은 더욱 잔혹하게 내치고 단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거짓말하고, 필요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고 편취하고, 자신의 이해와 주관에 따라 오해도 하는 존재는 여성도 아니라는 것인가.

 

그런데 여성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말하니 사실일 것이다. 여성이 주장하니 진실일 것이다. 한 치의 거짓도 오류도 없이 그 자체로 이미 증명된 것이다. 여성이 피해를 주장하니 피해자라지 않는가. 여성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 것일까? 그렇다면 남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짓말도 하고 왜곡도 하고 오해도 하는 일반의 여성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여성주의에는 여성이 없다. 여성이 생각하는 대상화된 이상의 여성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성주의가 현실에서 남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사회적 약자니까. 어려서 그렇게 배워 놓은 탓에. 요즘 20대가 그런 점에서 우리들보다 더 솔직하고 더 당당하다. 여성도 인간이다. 스스로 인간이고자 해야만 한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과 비슷한 그 무엇도 아니어야 한다. 혹은 인간이란 현실의 인간과 다른 이상적인 어떤 존재여야 한다. 망상이다. 그런 망상이 만들어낸 것을 흔히 신앙이며 종교라 말한다. 종교 앞에서 이성이고 인정이고 관계고 모두 부정될 뿐이다. 최소한 여성주의자는 보편의 인간이라 볼 수 없다. 똥은 거름으로라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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