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전세라는 자체가 고금리시대의 유산과 같은 것이다.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 90년대 초반 은행금리가 10%를 훌쩍 넘었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예금에도 분기마다 꼬박꼬박 3% 넘는 이자가 들어오고 있었으니. 당시 기준으로 전세가 천만 원이면 1년 이자가 백 수 십만 원 정도 된다. 나중에 전세금 올려받을 것까지 계산하면 임대인 입장에서도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임차인의 입장에서 전세기간 동안 목돈이 묶여 있느라 이자수입 등 추가적인 수익도 기대할 수 없는데다 물가상승까지 고려하면 자산가치가 떨어지면서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었다. 차라리 월세를 살고 목돈을 굴려서 돈을 불리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만큼 경제도 빠르게 성장하고, 시장에 풀리는 돈 만큼 물가도 가파르게 올라가면서, 현금의 가치가 현물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집을 사두면 값이 올랐고, 돈을 그냥 은행에 묵혀만 두어도 상당한 이자수익을 올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밑천이 될 만한 목돈이 있으면 그만큼 빠르게 돈을 불리는 것도 가능했었다. 그러니까 이미 있는 집 전세금 받아서 나중에 고스란히 돌려주더라도 그 동안의 이자수입이며 전세금 상승분이며 집값 상승분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언제 밀릴지 모르는 월세보다 더 확실한 수입원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독 한국에서만 세계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전세라는 제도가 유지되어 온 비결이었다.

 

그래서 문제란 것이다. 지금 은행에 예금해봐야 연이율이 2%도 채 되지 않는다. 전세금 1억 받아봐야 1년 이자가 고작 200만 원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수익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집주인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받은 전세금을 고스란히 돌려주면서도 그 동안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인가. 첫째는 전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전세금을 2천만 원 정도 올린다. 즉 2년이라는 기간 동안 2천만 원 정도의 추가수입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역시 집값이 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세를 놓고 전세금을 돌려주는 가운데 집값이 오르면 충분한 차익을 남기고 집을 팔아서 최종적으로 이익을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부동산 담보대출까지 끼어들게 되면 집값상승으로 인한 차익을 기대하고 기존의 부동산을 담보삼아 대출받고 전세금을 더해서 새로운 부동산을 사들이는 이른바 갭투자라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부동산이 오를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 만일 정부의 정책이 성공해서 부동산이 더이상 크게 오르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1억 주고 산 집이 전세기간이 끝난 2년 뒤에도 여전히 1억 그대로다. 전세로 7천만 원 정도 받았는데 돌려주고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려 했더니 전세를 올려줄 바에는 그냥 차라리 얼마간 주위에서 돈을 빌려서 자기가 직접 집을 사는 쪽이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전세금도 올릴 수 없고, 그렇다고 집을 팔자니 집값도 오르지 않았고, 당연히 금리는 거의 제로에 근접해 있다. 그동안 생활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써야 하는 돈이 있을 텐데 그것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인 것이다. 주택임대로 돈을 번다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차라리 월세가 더 낫다. 전세라는 목돈보다 많지는 않아도 꼬박꼬박 월세로 들어오는 돈이 임대인 입장에서 더 이익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성공해서 집값이 완전히 안정화된다면 더이상 임대인 입장에서 전세를 놓을 유인 자체가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세가 아예 사라질 수 있다.

 

전세대란이라는 말이 의미없는 이유인 것이다. 이미 금리는 제로를 향해가고 있는 중이고, 전세금이야 집값을 따라가는 것이니 집값이 잡히면 전세는 이미 그 존재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2년 뒤에 고스란히 자신이 그동안 쓴 돈까지 포함해서 전세금을 그대로 돌려줘야 하는데 집주인 입장에서 더이상 전세를 놓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전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집값이 지금처럼 오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차라리 집값을 잡아서 전세란 제도의 명줄을 끊어 놓거나, 아니면 전세라는 제도를 위해서 집값이 지금처럼 계속 오르게 내버려두거나. 그래서 어느 쪽인가. 어느 쪽이 서민들 입장에서 더 나은 선택일 것인가. 충분히 집값만 잡을 수 있다면 언젠가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 쪽이 낫지 않을까.

 

전세란 공짜가 아니란 것이다. 전세금이 고스란히 돌아온다 생각하지만 그만큼 그동안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거나 현물의 가치가 오르는 등 가치의 변동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낸 전세금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전세금에 더해서 사야 할 부동산의 값이 더 오르거나. 결국은 비용이다. 그 비용을 단지 일정한 숫자로 고정된 전세금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작년 이사하면서 월세를 선택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도 이자까지 포함하면 차라리 월세를 더 싸게 얻는 쪽이 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갈수록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세입자 입장에서도 오히려 전세보다는 월세가 더 나을 수 있다.

 

십 년 넘게 전세를 살면서 끝내 자기집을 사지 못한 경우도 현실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전세금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조금만 더 모아서 더하면 자기 집도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만큼 그동안 집값도 오르고 돈의 가치도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목돈만 전세라는 이름 아래 집주인에게 묶여 있던 것이었다. 차라리 전망 좋은 곳에 투자라도 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큰 이익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러가지로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는 제도란 것이다. 그렇게 전세에 묶여 있는 자본이 또 사회 전체에서 얼마나 될 것인가. 어떻게 따져봐도 과연 앞으로도 전세라는 제도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전환기란 것이다. 전세는 여전히 유용한가. 당연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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