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든 마찬가지다. 스스로 정치인이 되었다 생각해 보자. 어쩌면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비밀스런 내용들까지 공유해야 하는 최측근으로 자신이라면 과연 어떤 사람을 임명하고 싶을 것인가. 그래도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이 아닐까.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던 사람이 적합하지 않을까. 결국은 가족이고, 친척이고, 친구이고, 동문이다. 때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파란 것은 그렇게 개인적인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문제가 된다면 과연 그같은 친인척 임명이 단지 세금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꼼수는 아닐까. 친인척을 보조관으로 임명하여 세금을 빼돌리려는 편법은 아닌가.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충분히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겨 채용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실력이나 실적이 부족해도 개인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그를 상쇄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도 단지 친인척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해서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국회의원의 친인척 보좌관 임명에 대해 문제삼으려 한다면 바로 그 점을 정확히 해야 한다. 친인척인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부적절한 친인척 임명이기에 문제인 것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과연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어 채용된 당사자가 얼마나 크게 부당한 이익을 보았는가. 업무의 전문성이나, 급여의 적절성, 무엇보다 보좌관 채용 이전의 직업이나 수입 등도 고려해야 한다. 보좌관으로서 실제 수행한 업무들에 대해서도 정량적 판단을 내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친인척이기 때문에 채용해서는 안된다. 친인척만 아니면 되는가? 만에 하나 국회의원들끼리 서로 친인척을 교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로의 친인척을 교차하여 채용한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고 잘했는가만 보면 된다. 얼마나 적합한 채용이었는가 전문성만을 따지면 된다. 하지만 귀찮다. 바로 이런 것이 포퓰리즘이다. 행정편의주의다. 그냥 귀찮으니 해경을 해체하자. 그냥 성가시니 친인척 채용하지 못하게 하자. 친인척인 것이 잘못이 아니다.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제한하는 것 역시 기본권 침해일 수 있다. 너무 나이브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뜩지 않다.

나같은 경우 어디 가서 무슨 뒤에 '장'자 붙거나 하는 자리 맡는 거 무지 싫어하는 편이다. 귀찮다. 성가시다. 물론 아무리 하찮은 것이더라도 일단 뒤에 '장'자 붙으면 나름대로 권위가 서는 것도 있다. 어느 정도 사소한 것이라도 남들과 다른 특권 같은 것도 주어진다. 아무튼 뭐가 좋아도 좋기는 한데, 그러나 그보다 그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일들을 맡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장'자를 단지 남들보다 높은 곳에 있는 무엇으로만 생각한다. 남들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이고 고귀한 명예이고, 보다 크고 강력한 권력이고 권위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책임이다. 의무다. 자신을 얽매고 옭죄는 족쇄이고 형틀이다. 자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벗어던지니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그럼에도 끝내 자기가 먼저 자리를 내던지지 못하는 것은 그마저도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이고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 무게를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퇴가 책임이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벌이어야 한다. 피해이고 고통이어야 한다. 불이익이어야 하고 굴욕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말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스스로 책임을 졌다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그런데 단지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대신한다. 아무런 사죄도 반성도 없이, 더구나 아무런 사후처리 없이, 그저 자리에서 물러난 것만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문득 작년 고작 4석짜리 재보궐선거에서 패했다고 비주류가 모두 나서서 물러나라 압박했을 때 당의 혁신을 위해 끝까지 당대표자리를 지키던 문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당시 문재인에게 물러나는 것과 당대표 자리를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편하고 쉬운 길이었을까? 당대표자리 그냥 물러나면 된다. 실제 김종인을 영입해서 비대위원장에 앉히고 절차에 따라 당대표에서 물러났을 때 문재인은 어느때보다 홀가분한 모습이었었다. 지금도 당과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있다. 당대표일 때는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꼬리가 따라붙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거의 없다. 그래서 과연 당시 문재인에게 당대표자리를 지키는 것과 포기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고통이고 불이익이고 모욕이었을까.


그릇의 차이다. 책임질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그때문에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 지금 당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해야만 하는가. 물러나는 것은 쉽다. 오히려 남아서 리베이트추문에 대한 뒤처리를 하자면 온갖 구설에 휘말리기 쉽다. 당내 관계도 불편하게 꼬일 가능성이 높다. 리베이트에 관련되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바로잡으려는 당대표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미흡하다 여겨진다면 그에 따른 언론과 여론의 비판 역시 감수해야 할 것이다. 대선가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당대표로서 자신이 대표로 있는 당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저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수모로써 모든 것을 대신할 것인가.


안철수가 생각하는 새정치의 실체다. 그래서 작년에도 그렇게 문재인더러 당대표 물러나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일 게다. 당대표는 특권이다. 권력이고 권리다. 그러므로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진정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표의 자리에 앉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불리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안철수의 방식과도 이어진다.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기에 권력을 가지려는 것이 아닌 권력이라고 하는 결과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권력이란 자신을 위한 트로피다.


참 편하게 정치를 한다. 나같으면 진짜 편하다. 책임질 일 있을 때마다 더이상 책임질 일 만들지 않게 편하게 자리부터 내놓는다.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기부터 한다. 그 다음에는 자기와는 상관없다. 작년에도 그랬다. 정동영과 천정배 두 사람이 탈당까지 하게 된 것도 결국 이전 당대표였던 김한길과 안철수가 뿌린 씨가 그렇게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당대표에서 물러났으니 자기와는 상관없다. 전직당대표가 물러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현직당대표를 비난하며 물러나라 압박한다. 자기와는 상관없다. 이제 자기와는 전혀 아무 상관도 없다.


정당이란 사기업과 같다. 자신은 CEO다. 내 회사다. 내 소유다. 그런데 내가 그 소유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아마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까. 권력을 사유화한다. 사회적 책임과 의무마저 사유화하려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책임이다. 오히려 넘친다. 자신은 자신이 져야 하는 책임 그 이상으로 책임을 모두 졌다. 재미있는 캐릭터다. 너무 흔해서 이제는 식상하다. 새정치의 안철수다.

결국 리베이트 추문으로 인해 안철수가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천정배가 불쌍하다. 공동대표라고 도대체 뭐 한 게 있어야지. 뭘 할 수 있었지? 아무튼 참 무책임하다. 도대체 정치인 안철수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맞는가.


이제 안철수가 물러났으니 비대위든 다음 당대표든 뽑히고 나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하겠는가. 이번 리베이트와 관련해서 연루된 인사들이며 내부의 구조적 문제들을 바로잡는 숙정작업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악역이 되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 쳐내고, 자리도 잡기 전에 당규와 인적구조부터 손을 대야 한다. 그런데 그 문제들이 누가 대표일 때 일어났는데.


굳이 정치가 아니더라도 원래 있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려면 인수인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더럽고 힘들고 번거롭고 욕먹기 쉬운 일들은 전임자가 일단 자기 책임 아래 일어난 일들이면 일단 미리 정리하고서 넘겨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다. 리베이트 추문으로 인해 당이 위기에 빠졌는데 후임자에게 모두 떠넘기고 자기는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순수성도 의심된다. 여기서 더 버티고 있어봐야 추문으로 인해 유력대선주자로서 안철수 자신의 내상만 깊어진다. 어차피 전당대회가 열리면 당대표에서 물러나고 내년 대선출마를 위한 준비에만 집중할 계획이었다. 조금 더 일찍 당대표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분간 여론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몸을 피해 더이상의 이미지훼손을 막는다.


가장 쉬운 것은 죽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힘든 일들이 있을수록 더 그렇다. 어려운 과정들이 남아 있을수록 더 그렇다. 오욕을 무릅써야 한다.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만한 다짐도 없이 대통령이 되려 한다. 당대표가 되어 있다. 너무나 쉽게 당대표자리에서 물러난다. 사태를 수습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상황이 불리해지니 일단 도망치고 본다. 지난 대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고도 여전히 유력대선주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인지. 측근의 비리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최측근마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정작 당의 위기에 아무것도 않고 먼저 도망부터 치고 마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리더십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조금 더 욕먹어야 한다. 지금 국민의당에서 안철수 빼면 누가 남는가. 그나마 쓸만한 인물이라고 해봐야 안철수 혼자가 전부다. 그런 안철수마저 뒤로 물러난다. 당에 사람이 남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당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모인 당이다. 어이없다.


간단히 어느 영세기업이 있다. 실적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며 노동자를 파견직으로 고용하고는 일 년에 천만 원 남짓만을 겨우 지급한다. 그런데 전무의 연봉은 5억이 넘어간다. 전무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가 5억을 넘어간다면 당연히 그에 비례하여 회사에 이익을 남겼어야 하는 것이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전무라서 당당히 그에 맞는 연봉을 지급했다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천만 원도 안되는 연봉만을 받을 리 없다.


물론 노동자의 임금이란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에 비례하여 받는 것이 아닌 노동력 그 자체에 대해 지급하는 것이다. 그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 자신이 가진 노동력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인간의 가치이기도 하다. 오히려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의 총량을 결정하는 것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노동력이 아닌 목적인 상품에 있다. 어떤 상품을 얼마에 생산해서 어떻게 팔 것인가. 경영이란 것이 존재하는 이유다. 리더다. 그런데 30배가 넘는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그들의 결정에 의해 일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그 30분의 1로밖에 인정받지 못한다. 부당하지 않은가.


연봉을 10억 이상 받고 싶은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만큼의 실적을 낸 뒤 그 실적 가운데 노동자의 연봉을 최소 3400만원 이상으로 올려주면 된다. 10억이면 그 30배에 채 미치지 못하는 연봉이다. 그러고 보니 참 느슨하다. 같은 기업 안에서 노동자의 최저연봉이 4천만원만 되도 무려 12억이다. 그런데 어째서 반대하는가면 기업내 최저임금은 천만 원 조금 안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유능한 임원은 3억도 적을 뿐이다. 3억을 받아도 적을 정도로 일을 하는데 전체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고작 연 몇 백 만원 올리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모순이다.


사실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는 법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정상적인 기업에서는 최저연봉과 최고연봉의 차이가 그렇게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는 경우른 그리 드물다. 전체 가운데 아주 일부만이 그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대우조선과 같은 경우다. 회사는 적자를 보는데, 그래서 노동자는 경영정상화를 이유로 해고까지 당하는데, 그러나 임원들은 여전히 정상임금을 받는다. 실적은 최악인데도 경영진은 책임을 지지 않고 노동자의 임금만을 깎으며 자기 급여는 이전대로 유지하려 발버둥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려면 자기 임금부터 갂아야 한다.


도대체 이 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천만원 이하라서? 그리고 임원들은 기본으로 10억 이상은 받아야 해서? 도대체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얼마를 받아야 적당하고, 능력있는 임원급은 얼마를 받아야 적절한 것인가. 이익을 내도 임원의 공인이 임원에게 대가가 돌아가고, 손해를 보면 노동자의 책임이니 노동자의 급여가 깎이고 일자리마저 위협받는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만한 일을 했으면 그만큼 노동자에게도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그만큼의 일을 하지 못했으면 임원들 역시 책임져야 한다. 당연한 상식이다. 단지 임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몇 십 배의 연봉을 받고, 단지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그 몇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연봉만을 감사하며 받아야 한다. 임원급이 받는 최고임금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 지 모르겠다. 너무 늦었다. 더 빨리 나왔어야 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대중의 편의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느라 국가적 국제적 이슈에 정교하게 판단하고 대응하기에는 여유가 너무 부족하다. 각각의 이슈들에 얽힌 복잡한 사정이나 구체적인 내용들을 일일이 살펴서 적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해서 결정한 뒤 행동에 옮기기까지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적인 지식과 그를 위한 충분한 시간적 물적 여유가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적합한 사람을 골라 필요한 자리에 앉히고 그 역할들을 대신 시킨다.


투표란 그런 의미다. 과연 저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공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인가. 굳이 내가 일일이 신경쓰지 않아도 바르게 옳게 판단해서 자신과 우리들에 피해가 오지 않도록, 아니 최대한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판단하고 결정해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인가. 그래서 일일이 별 것 아닌 일들에 대해서까지 여론에 묻고 여론을 핑계삼는 정치야 말로 가장 비겁한 것이다.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자신의 능력과 소신에 맞게 바르게 옳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라고 그 자리에 올린 것이다. 평가는 결국 다음 선거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만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을 했다면 그에 대해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할 의무가 주어진다. 국민으로부터 공적 책임을 위임받은 전문가로서 대중에게 바른 정보를 제공하여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정치인의 역할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영국국민들이 어리석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그것이 오만이라는 것이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럴만한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전제한다. 어째서 과반에 이르는 영국인들이 EU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EU탈퇴를 지지하는데 투표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럼에도 EU탈퇴가 영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면, 국가와 국민에게 손해가 된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만에 하나 설득에 실패했다면 국민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자신이 그 책임까지 대신하는 것이 공인으로서 정치인이 져야 할 책임인 것이다. 노엘 갤러거의 말이 맞다. 그러라고 결코 적지 않은 세금을 급여로 지급하고 각종 예우와 사회적 권위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회피하고 단지 국민투표에 그 책임을 돌리려 했었다.


과연 브렉시트가 옳은가. EU탈퇴가 영국과 영국민들에 이익이 되는가. 그마저도 미리 생각해두지 않은 듯 벌써부터 말이 바뀌고 있다. 하기는 그런 정치인들에 낚여 지지를 보내고 심지어 투표를 통해 당선까지 시킨 것이 바로 유권자들인 것이다. 정치인의 책임은 한 편으로 유권자의 책임이다. 보다 고도의 전문적인 판단이 필요한 영역까지 국민투표에 맡긴 무책임은 분명 정치인의 잘못이지만, 그런 정치인을 선택하여 그같은 책임있는 자리에 앉힌 것은 어디까지나 유권자의 잘못이다. 정치인들은 비겁했고 국민들은 어리석었다. 그들은 주권자로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했다.


그래서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여론을 들먹이는 정치인 역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내 책임 아래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시 국민들에 묻는다. 그를 위해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설득하며 이끈다. 그래서 리더다. 리더십이 사라졌다. 리더십이 사라진 정치는 그저 낚시에 불과하다. 정치인이 미끼를 던지면 대중이 그 미끼를 문다. 대중이 미끼를 물면 그를 기반으로 정치적인 영향력과 지위를 상승시킨다. 저질정치다. 책임이 없는 정치라는 것은.


과연 자신은 책임정치인으로서 바른 판단을 내렸는가. 국민들에게 부끄럽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옳은 결정을 내렸는가. 그래서 정치인과 대중의 소통은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발달은 미디어와 교통의 발달에 비례한다. 포퓰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다. 영국은 그것을 잊었다. 그것을 잊은 유권자와 정치인들이 정치를 왜곡시켰다. 남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의 여론과 반대로 가는 것을 정치인의 책임인 양 여기는 이들마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희생하여 국민들을 바르게 이끈다. 민주주의도 한계에 이르러 가는 것 같다. 하필 영국에서. 난해하다.

리더의 정치와 리더가 아닌 이의 정치는 다르다. 당연히 지키는 자와 도전하는 자의 정치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리더의 정치란 관리의 정치다. 통제의 정치다. 리더란 룰을 만드는 사람이다. 자기 영향력 아래 모든 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와 구조를 만든다. 자신이 내세운 이념과 신념대로 모두가 따르도록 기준을 세우고 규범을 만든다. 만에 하나 따르지 않는 이가 있다면 엄격하게 제제한다. 반면 리더가 아닌 이의 정치란 타인이 만든 룰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순종하거나, 아니면 도전하거나.


지킨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해진 룰 아래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도전한다는 것은 따라서 그 룰을 부정하고 새롭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인정하지 않겠다. 받아들이지 않겠다. 반드시 자신이 의도한 새로운 룰을 만들겠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의 수단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따른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당시는 무척이나 합리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투사였던 이들이 정치인이 되어 급격히 타락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운동하던 당시의 방식 그대로 정치를 하려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철수는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도 김한길이라는 공동대표가 있었다. 사실상 김한길이 주도하고 자신은 그를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스스로 룰을 만들어 본 적도, 그 룰을 따르도록 강제해 본 적도 없다. 기업과 다르다. 기업에서 CEO는 월급을 주는 사람이고 CEO가 주는 급여는 직원들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주체들이 존재하는 정당에서 월급으로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초선의원에 자기세력이 없는 입장에서 주위에 더 많이 의지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자신의 의지를 주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럴만한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아닌 시절에는 편했다. 아무 걱정없이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었다. 나중은 생각지 않고 아무것이든 질러댈 수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이 그에 대해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공격만 하면 되었다. 비난만 하면 되었다. 그런 때는 누구나 정의로울 수 있다. 야당시절의 한나라당을 떠올려 보면 된다. 야당이던 시절 그들은 누구보다 정의롭고 유능했다. 오히려 야당으로서는 지금 야당보다 더 뛰어났었다. 반면 여당으로서는 지금 야당보다 한참 미치지 못한다. 마침내 자기 당을 만들고 자기 측근으로 주위를 채웠을 때도 그저 초선의원시절이던 때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정의를 주위에 강제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안철수가 가진 리더십, 정치력의 한계인 셈이다. 자신의 측근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 아니 측근들이 오히려 안철수의 머리 위에 올라 그를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철수가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는 이유다. 자기 주위에서 그런 부정이 저질러지는데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어느 분이 생각난다. 차라리 자기가 모든 것을 주도하여 저질렀다면 바보는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정치초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사실 문재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투르고 어설펐다. 그리고 무능했다. 자신의 측근들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차이라면 그럼에도 단지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좋아서 모인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능력이 없다면 인덕이라도 있던가. 직접 강제하여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사람을 심복시키는 것도 정치인의 능력이다. 그마저도 없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고 그를 유력 대선후보로 여기는 것일까.


몰랐으면 몰라서 문제고 알았어도 알았으니 문제다. 차라리 초반에 빠르게 결론짓고 확실하게 대처하느니만 못했다. 시간을 끌면서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가진 리더십의 한계만 드러내고 말았다. 정치할 깜냥이 아니다. 다양한 이해주체들을 조율할 역량도 인격도 가지지 못했다. 자신의 측근들마저 제대로 심복시키지도 통제하지 못했다. 자기 당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그릇이다. 뒤늦게서야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정치는 타이밍이다. 남 공격할 때는 좋았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한심하다.

원래 낚시란 잡을 물고기를 특정하여 미끼를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미끼를 던지고 물고기가 그것을 물면 그제서야 낚아 올리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당연히 미끼야 상관할 바 없다. 당연히 미끼는 배고픈 놈이 먼저 문다. 아니면 욕심이 많거나.


정치란 그와 같다. 대중의 지지가 필요한 정치인들은 일단 아무것이나 대중이 좋아할만한 미끼부터 던지고 본다. 대중이 흥미를 가지고 지지를 보낼만한 이슈를 꺼내서 던지고 반응을 기다린다. 때로 재촉하기도 하지만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유능한 정치인은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렇게 대중이 일단 미끼를 물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여주면 그 다음에는 어차피 미끼는 그냥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치인과 대중은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다르다. 정치인은 항상 저 위를 본다. 더 높은 지위와 더 강한 권력을 가지기 위해 그들은 정치라는 것을 한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소박하다. 당장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대중은 쉽게 정치를 불신하게 된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정치인이 추구하는 것이 실제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미끼를 문다. 대중은 정치인이 던진 미끼를 문다. 소박하다. 순진하다. 그래서 순수하게 믿어 버린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것이야 말로 진심일 것이라고. 성급하게 달려들어 미끼를 물고는 바로 후회하고 만다. 배신당한다. 그렇다고 정치인만의 책임인가. 하지만 한 편으로 그렇다면 반대편에 있는 또다른 정치인들은 어째서 그와 같은 먹음직한 미끼를 던지지 않았던 것일까.


낚일 수밖에 없다. 항상 물고기들은 굶주려 있다. 대중 역시 굶주려 있다.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미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놓치지 않으려. 더이상 굶주리지 않으려.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런데 미끼는 항상 복수로 던져진다. 그래야 한다. 그 가운데 훨씬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미끼를 선택하여 문다. 그 정도 이성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반대편에서는 그만큼 매력적인 미끼를 준비하지 못한 것일까.


브렉시트를 단순히 선동한 정치인이나 그에 부화뇌동한 대중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몰아가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면 EU는 그동안 영국의 대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런 영국의 다수 대중들을 위해 어떤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들려주었는가. 그래서 그나마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지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했을 뿐이다.


정치의 근본이다. 정치와 대중의 관계의 기본이다. 정치인은 낚시하는 사람이다. 대중은 그에 낚이는 물고기다. 한 편으로 낚시꾼들은 낚시를 통해 물고기들에게 본능을 충족시킬 먹이를 제공한다. 정치인 역시 대중의 욕망에 봉사하게 된다. 낚이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낚시꾼이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칫 물고기가 죽거나 도망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그래서 항상 정치인과 대중은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 자칫 미끼만 떼이고 허탕칠 수 있다. 기껏 잡아놓고도 물고기를 놓칠 수 있다. 물고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살아있어서 더 가치있는 물고기여야 한다. 쉽게 지지를 내주어서는 안된다. 너무 쉽게 보았다. 자신들의 선동에 넘어간 영국의 유권자들을 오히려 바보취급하고 있다. 정작 영국인을 바보취급하는 것은 영국독립파들 자신들이 아니었을까.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설정이 실패한 대표적 사례를 보고 있다. 그리 낯설지는 않다. 어디선가는 항상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굳이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정작 유권자 자신이 책임을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떠들고 마음대로 선동하며 마음대로 낚시한 뒤 마음대로 미끼까지 거둬간다. 나는 이미 내가 목적한 모든 것을 이루었으므로 더이상 대중의 반발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소박하고. 그다지 야심이랄 것도 없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면 여기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영국의 대중이 우습게 보였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그것으로 충분하거나. 그래도 상관없다. 여기서는 그래도 된다.


우스운 것이다. 그래도 역시 가장 책임을 묻게 되는 것은 어째서 반대편에서는 그만한 근거와 논리들을 대중에 들려주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투표하고 후회한다. 결과를 보며 반성한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역시 정치의 책임이다. 반대편 역시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재미있다.

원래 국가주의 국가에서 모든 생산과 소비는 국가를 단위로 이루어진다. 물건을 생산해서 팔면 그 이익은 모두 국가경제로 귀속된다. 자본가는 자본을 투자해서 공장을 짓고 생산을 하며, 생산된 상품을 시장에 내다팔아 이익을 남긴다. 그리고 그 이익은 다시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지급되며 이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자본가가 가져간 이익 역시 시장에서 사용됨으로써 모든 가치는 시장에서 순환하며 소비된다.


그런데 세계화 이후 이같은 전통적 관계가 상당히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당장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부터 다양한 국적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투자에 따른 이익의 상당부분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향한다.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그 이익이 향하는 경로를 세금이 없는 다른 곳으로 틀어놓는 경우도 많다. 물건을 생산해서 시장에 내다팔아 이익은 많이 남겼는데 정작 그 이익이 그 나라의 사회와 개인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아마 최근 크게 이슈가 되었던 옥시 역시 이런 중요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생산도 판매도 거의 국내에서 이루어지는데 정작 이익은 대부분 영국의 본사로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옥시의 제품으로 인해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건만 어떤 책임도 가지지 않고 단지 이익만을 탐한다.


당연히 경제활동을 통해 이익을 얻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 시장에서 이익을 얻은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싫다고 자본은 국경을 넘는다. 세금도 내기 싫고 의무도 지기 싫다고 국경을 넘거나 아니면 정부를 협박한다. 국적자본이든 다국적자본이든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보니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을 두고 국가가 경쟁해야 한다. 그 경쟁에서 희생되는 것은 결국 국가에 속한 사회이고 개인들이다. 자본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희박해지고 국가는 국부를 앞세워 사회와 개인에 양보를 강요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기보다 노동력들이 알아서 국경을 넘어 찾아오도록 국가를 압박한다. 메르켈이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대단한 인도주의적인 신념 때문이라 여긴다면 순진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기에 자본가들은 국가를 자신들을 위해 경쟁시킬 수 있다. 반면 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국가에 의해 경쟁하는 입장이 된다. 더 싼 임금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과 경쟁하며 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한다. 자본의 이익과 반비례해서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는 줄어드는데 정작 노동자의 소득은 비례해서 감소한다. 삶은 더욱 열악해지고 사회는 더욱 불안해진다. 차라리 나라문을 닫고 우리들끼리 잘살자. 더 잘 살 필요도 없이 그냥 있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들끼리 살아보자.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체험과 직관의 영역이다.


본능적으로 안다. 무엇이 자신의 삶을 이토록 열악하게 만들었는지. 특히 노동자의 입장에서. 쇠락한 생산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라문을 닫고 노동을 영국 국민들만이 독점하자. 영국의 자본으로 하여금 영국에 투자하도록 만들자. 영국에 투자하고 그 이익을 다시 영국사회에 돌려준다. 문제라면 이미 그렇게 하기에는 영국 자신도 유럽연합체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산업구조가 그렇게 개편되었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분야는 도태시키고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분야만을 집중해서 성장시킨다. 혼자서 살아남기에는 지나치게 기형적인 구조가 되어 버렸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에서 경상도나 전라도가 따로 떨어져나간다면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구조를 다시 바꾸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필요하다. 그것을 과연 영국은 감당할 능력이 되는 것인가.


자본가들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노동자 역시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그리고 평준화된다. 기업에 더 유리하면서 노동자에게는 더 불리한 환경으로. 사회저변은 취약해지며 단지 겉보기 규모만 성장한다. 숫자는 늘고 규모는 커지는데 정작 실질적으로 와닿는 것은 없다. 누적되며 반복된다. 그래도 단지 숫자의 단위가 괜찮으니 괜찮은 것인가. 묻는 것이다. 그래도 좋은 것인가고.


굳이 중국에 공장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다. 집도 절도 없는 아랍의 난민들이 맨몸으로 유럽으로 들어간다. 어떻게하면 이들은 더 값싸게 자신들을 위한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니 조선족을 받아들여 귀화시키면 된다. 이민을 받아 인구를 늘리면 된다. 한국의 기득권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예전으로 원대래도 돌아간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그럼에도 바라게 된다. 바로 문제다.

과연 일반 대중에게 국가적, 혹은 국제적인 이슈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이 갖춰져 있는가.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사실을 판단하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가운데 다수는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다수는 지적으로 충분히 남들보다 뛰어나다 말하기 어렵다. 그런 다수의 대중에게 판단을 맡겨 선거, 혹은 투표의 결과에 따라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과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가. 그것은 옳은가.


하지만 한 편으로 고도로 훈련받은 선택된 소수의 엘리트라 해서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인가. 최소한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대학도 나오고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경력을 쌓은 그 사회의 엘리트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항상 바른 판단과 결정만을 내리는가. 당장 영국에서 브렉시트 여론을 주도한 이들 역시 영국사회의 주류들이었을 것이다.


군왕은 무치다. 그것은 전적으로 군왕에 속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말아먹어도 자기 나라를 말아먹는 것이다. 나라 재정을 축내고 백성들이 신음해도 자기 재정 자기 백성이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모두 국왕에게 속한 군왕 자신의 권리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못하면 군왕을 바꾸면 된다. 바꾸지 않는다면 여전히 군왕이기에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옳다.


민주주의다. 국민이 주권자다. 항상 잘할 수는 없다. 항살 옳을 수도 없다. 때로 잘못하기도 한다. 때로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모두 전적으로 주권자로서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옳아서가 아니라. 항상 바른 결정을 내려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국민이 가지는 권리인 것이다. 틀릴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고, 오해하고 실수할 수도 있다.


브렉시트가 과연 옳았는가. 그건 나중에 가서 결과가 드러나면 판단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든 감정이든 무엇에 의해서든 영국인들 스스로가 EU에 남아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반수의 영국인들이 EU를 거부했으므로 영국 역시 EU를 탈퇴한다. 옳고 그름 이전의 당위의 문제다. 국민이 그리 선택했다.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거기에 이것저것 양념을 섞고 장식을 얹어 이익을 추구하려는 몇몇 인간들이 문제일 뿐.


왕이 잘해서 왕이 아니다. 왕이 훌륭해서 왕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왕을 고르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실력으로 왕위를 쟁취했다고 왕으로서 항상 훌륭한 것도 아니다. 찬탈자가 과연 이전의 무능한 군주보다 더 훌륭했는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군들에게도 하나나 둘 쯤 아쉬운 점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다. 왜? 왕이니까. 국민은 주권자다. 국민의 뜻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다. 국민이 주권자니까.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굳이 왜 그런 판단을 했어야 했는가 물을 수는 있다. 그같은 판단이 과연 적절하고 옳은 것이었는가 토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같은 판단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다수의 결정에 의한 결론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하물며 국민이 가진 주권을 비웃고 의심한다. 옛날같으면 반역이다. 묻고 또 묻는다. 듣고 또 듣는다. 가장 기본인데 가장 어렵다. 여러 과정 가운데 하나다. 먼 시간 가운데 찰라다. 국민은 그래서 항상 옳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국민의당에서 먼저 나서서 엄정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당사자들을 징계하는 것이다. 당에서는 모르고 있었는데 조사해 보니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몇몇 국회의원들이 개인적으로 부당한 이득을 챙기려 했다. 책임정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정중히 사과한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박선숙과 김수민 등 관련자들을 전적으로 믿는 스탠스를 취했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먼저 관련 당사자들을 불러 조사하는 모양새는 취했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일은 없었다더라. 같은 당의 동료이고 오랜 동지이기에 그들의 선의를 믿고자 한다.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믿을 수 없다 말한다면 동정표는 얻을 수 있다. 나쁜 건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들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했다. 엄정하게 진상을 조사하지도, 그렇다고 관련자들을 전적으로 믿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두루뭉수리하게 이도저도 아닌 태도로 일관하는 사이 의혹은 당지도부에게로까지 번지고 만다. 이런 상황에조차 당대표가 침목하며 대중의 상상력은 끝도 없이 온갖 곳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자르지 못한다. 그나마 어설프게 잘라내려다 김수민의 반발만 사고 말았다. 역풍이 분다.


작년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가면서 내세운 명분이 첫번째였다. 문재인은 두번째에서 한 발 더 나갔다. 두 사람이 가진 성향의 차이이고 그릇의 차이다. 설사 잘못했어도, 그래서 죄를 짓고 처벌받는 처지가 되었어도 쉽게 자신의 인연을, 신뢰를 물리지 않는다. 그것은 곧 주위의 신뢰로 이어진다. 문재인을 비판하는 사람도 그런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적개심을 누그러뜨린다. 아예 안티는 그냥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엄정하게 조사해서 먼저 징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같은 당 국회의원이니 당 차원에서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을 인위로 키운 것인가면 그것은 더욱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만일 2012년 저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참 재미있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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