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력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권력의 대상이 되는 모든 피지배층의 단합이고 단결이다. 피지배층의 존재야 말로 권력에 대한 증거이고 증명이다. 모든 피지배층이 권력을 부정한다면 권력은 그 존립근거를 잃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권력자는 피지배층을 분열시키려 노력해 왔었다.


전국민이 하나가 되어 저항하면 더구나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만일 국민이 분열한다면 정부는 그 가운데 분열된 일부만을 상대하면 된다. 그 일부만을 다른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면 고립된 소수는 전혀 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참 오래된 레파토리다. 당신들은 단지 소수일 뿐이다.


하기는 그래서 성주가 선택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소수로 만들기 적당하다. 어차피 주민의 수도 많지 않고 주민들이 반대하더라도 그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다. 지역이기주의로 몰아간다. 개인의 이기가 문제다. 개인의 그릇된 욕심이 문제다. 그 과정에서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도덕성에 흠집을 낸다. 그러므로 성주 주민들은 다른 국민들과 같지 않다. 전혀 다른 존재다. 


새월호 때도 그랬었다. 거슬러거슬러 노무현 정부에서도 부안군민들을 그렇게 정부와 당국이 몰아세우고 있었다. 불순한 외부세력이 있다. 불순한 외부세력이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 더욱더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가 나온다. 시민들이 연대해서는 안된다.


솔직히 나 역시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서기 꺼려진다. 연대란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상대의 손을 잡아주면 상대 역시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같은 신뢰야 말로 연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여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성주 주민들은 어떠했는가. 그같은 연대의 시도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여주고 있었는가. 그동안 수많은 이슈에 있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여론조사들을 찾아본다. 과연 그들은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일까.


그동안 많은 - 특히 보수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빨갱이라 몰아세웠던 사람들이 같은 과정을 거쳐왔을 터였다. 사소한 꼬투리로 이기적이고 불순한 목적을 가진 집단으로 몰아세워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그에 부화뇌동하며 빨갱이라 욕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그들이 같은 처지가 된다. 이성으로는 그래서는 안된다 여기는데 감정으로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심드렁해지는 이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과 맞서기 위해서는 약한 개인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배신당할지라도 내민 손을 잡아줄 수밖에 없다. 그래야 권력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당장의 감정을 이유로 고개를 돌렸다가 결국 개인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일방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최소한 지역주민의 동의를 오랜시간에 걸쳐 보다 철저하게 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정부와 여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온 지역들인 것이다. 진심을 가지고 설득했을 때 들어주지 않을 리 없다. 목적이 문제가 아니라 방법이 문제고 절차가 문제다. 대통령은 결정만 하고 해외로 떠나버리고 총리는 일부러 폭력사태를 유도하는 듯 지역주민들을 자극한다.


갑갑하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들이 반복되고 마는 것일까. 너희는 따로다. 너희는 소수다. 나머지는 문제없다. 진짜 문제없다는 듯 나머지는 모두 침묵한다. 그렇게 하나씩 점령되어간다. 밀양 역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말한다. 사드를 배치할 수는 있다. 그 장소가 성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 국가다. 민주주의 국가에 어울리는 절차와 과정이 있다. 그에 반대한다. 성주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분노한다.

병자호란 당시의 일이다. 너무나 빠른 청군의 진격에 강화도로도 가지 못하고, 더구나 물자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농성하기만 아마 한 달 여, 결국 견디지 못하고 화친을 주장하던 신하들의 의견을 쫓아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항복문을 쓴 것이 주화파의 핵심이었던 최명길이었다. 그리고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은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최명길이 써온 항복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찢는 사람이 있으면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때 김상헌이 찢어놓은 항복문을 주워 다시 이어붙이며 최명길이 했던 말이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이런데 끝까지 무모하게 항전을 주장하는 것도 어리석고, 그렇다고 한 나라의 대신들씩이나 되어서 당장의 곤궁함에 꺾여서 무작정 항복만을 주장하는 것도 한심한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을 쫓고 누군가는 이상을 지킨다. 누군가는 현실을 위해 모든 수모와 굴욕을 견디며 누군가는 이상을 위해 고고한 자존심을 지킨다. 그게 정치다.


더민주의 정체성만 놓고 보자면 사드배치 반대가 맞다. 하지만 더민주가 보다 오른쪽으로 외연을 확장하자면 안보이슈에서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자칫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과 관계된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핑계삼고 있는 것이 북한이고 수도와 대한민국 영공과 영토의 방어다. 그같은 정부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는 유권자마저 더민주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양자를 모두 만족시킬 것인가.


지난 총선에서도 김종인은 이른바 친노를 쳐내며 비노반노성향의 유권자들을 만족시켰고, 한 편으로 문재인은 안에서 원래 지지자들을 다독이며 후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종인이 명분을 주고 문재인이 안에서 실리를 다진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원래 김종인과 문재인이라는 어쩌면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전혀 상반된 성향의 인물들이 더민주라는 울타리 안에 공존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보수의 입장은 김종인이 대변하고, 원래 야당지지자들의 바람은 문재인이 대신한다. 김종인은 더민주가 완전히 보수와 등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문재인은 더민주가 여전히 지지자들이 바람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희고 검은 늑대가 서로 싸우면 그 가운데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어느 한 쪽만 있다면 더이상 누구에게 먹이를 줄까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이러라고 김종인을 영입한 것이다. 보수적인 한국유권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여전히 당대표로서 중요한 사안마다 보수정치인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더민주의 맨앞에 내놓는다. 김종인이 입장을 정리하면 이어서 더민주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 나온다.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것은 당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파국을 바라지 않으며 확실한 중심이 있다는 사실이 더민주를 안전하게 노선투쟁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사실 투쟁도 아니다. 이런저런 논의가 있고 갈등이 있고 그 가운데 당론이 정해진다. 그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비난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만큼 김종인은 야당에 있어 이질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마저 포함해서 더민주는 집권정당으로 가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김종인마저 아우른다. 김종인과도 공존한다. 보수와 진보가 더민주 안에서 하나가 된다. 더민주에 비판적이던 보수적인 유권자들을 안심시킨다. 어떻게 해도 김종인은 경제민주화라는 아젠다를 가지고 더민주에서 큰 일을 해낼 사람이다. 크게 본다. 단지 과정이다. 나가고 있다.

감독이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데 투수가 마운드에서 버티고 있다. 감독이 판단해서 교체하려는데 오히려 선수가 달려나와 감독에게 항의를 한다. 아마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팀이 있고 선수가 있는 것인데 아무리 스타플레이어라고 감독의 지시를 거부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에이스니까.


에이스란 한 마디로 책임지는 사람일 것이다. 팀이 연패에 빠졌다. 그렇다면 당연히 에이스가 마운드에 올라가서 그 연패를 끝내줘야 한다. 거꾸로 팀이 연승을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에이스가 마운드에 올라가서 연승을 이어가야 한다. 하다못해 운이 따르지 않아 결국 지게 되더라도 불펜이라도 쉴 수 있게 이닝이라도 많이 먹어줘야 한다. 최소의 실점으로 에이스의 패배가 아닌 팀의 패배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에이스까지 무너지면 더이상 기댈 곳이 없다.


팀이 지고 있다면 그라운드에 선 동료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당장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로 모이게 된다. 이 사람이 공만 잡을 수 있다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이 사람에게 공만 넘기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고 골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모두의 기대를 현실로 만들어줄 때 그를 에이스를 넘어 리더라 일컫게 된다. 굳이 일일이 말로 지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를 중심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모이게 된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플레이가 이루어진다. 그가 있기에 희망이 생기고 그가 없으므로 모두가 절망하게 된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포르투갈팀의 주장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대해 그리 비판해 왔었다. 너무 욕심이 많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플레이를 한다. 하지만 그는 데뷔초반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자신이 소속된 팀의 에이스로 군림해 왔었다. 호날도 자신이 돌파구를 열어야 했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의 수비를 뚫고 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어야 했다. 양보하는 에이스는 에이스가 아니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고 여기는 에이스 역시 에이스가 아니다. 누구도 그런 에이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단 한 사람 내 몫까지 모두 대신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에이스라 부른다. 보통의 경우라면 욕심이 많은 것이지만 에이스라면 그것은 책임감이 강한 것이다. 


다리가 완전히 꺾였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으로 보였었다. 몇 번이고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와 경기를 계속하려 했지만 절뚝거리는 다리로는 장기인 헤딩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이상 팀에 도움은 커녕 오히려 짐만 될 것이기에 교체되어 나가면서도 그는 울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라운드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고 분노였다.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몫이다. 설사 더이상 뛸 수 없게 되었어도 그는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한다. 감독의 자리마저 꿰차고 극성스러울 정도로 팀을 독려한다. 분명한 것은 호날두가 부상으로 교체되고 프랑스팀은 집중력을 잃은 반면 포르투갈팀은 이전보다 더욱 집중해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같은 의지가 자연스럽게 동료들을 감화시키고 그의 의지에 자신을 동화시키게 만든다. 더이상 호날두는 그라운드에서 함께 뛸 수 없지만 이미 그는 자신들과 함께였다.


최소한 책임있는 자리에 있어 양보란 미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비겁이다. 무책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해야만 한다. 어떤 욕을 듣더라도. 어떤 비난을 듣더라도. 욕심쟁이라 비아냥을 듣더라도. 그래서 결국 모든 책임을 자신이 다 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동료의 공까지 빼앗아 자신이 본 그 자리로 공을 몰아 힘껏 슛을 날린다. 이기는 것이야 말로 에이스에게 지워진 책임이며 의무다. 뒤가 없다. 오로지 앞만이 있다. 모두가 패배를 두려워할 때도 자신만은 승리를 믿는다. 자신이 모두를 승리하게 만들 것을 믿는다. 에이스의, 리더의 탐욕은 그래서 미덕이고, 리더의 집요함은 모두의 든든한 신뢰이자 기대가 된다.


2012년의 문재인은 분명 그같은 리더의 조건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대선에서 과연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는가 의심스러운 모습들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애초에 대통령후보로 선거에 나온 것부터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위에서 그를 떠밀었기에 나왔던 것이었다. 그랬던 만큼 내가 안되면 다른 사람도 못되는 것이라는 각오로 독하게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대로 생긴대로 성실하게 선거운동에 임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길 수만 있다면 발을 진흙탕에 담그고 손을 오물에 더럽히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그런 과감함이나 지독한 모습이 없었다. 인간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지만 과연 정치인으로서 그를 기대해도 좋은 것인가.


인상이 바뀐 것은 작년 당시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경선에 출마하면서부터였다. 물론 그때도 여전히 그는 올곧았고 올바랐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 오로지 자신이어야만 한다. 당대표가 되기 위해 신념을 꺾고 박정희 묘소에 참배하겠다는 공약까지 내세웠다. 2012년 선거에서 문재인이 직접 박정희의 무덤과 생가를 찾아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당대표가 되고 바로 치러진 재보선에서 참패한 이후 당내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흔들었을 때도 그는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관철시켜야 할 혁신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혁신안만 제대로 자리잡으면 더민주는 달라질 수 있다. 전처럼 지리멸렬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자신이 해야 한다. 그리고 약속대로 당대표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무런 당직도 없는 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총선의 승리를 위한 지원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홀로 빈 역사에 허탈하게 앉은 모습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렇기때문에 문재인을 중심으로 벌써 모여든 사람이 한가득이다. 문재인 자신이 진흙탕에 발담그기를 꺼려하기에 누군가는 직접 기꺼이 진흙탕으로 들어가려 한다. 참여정부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는 노무현이 언론과의 싸움까지 모두 도맡아 했어야 했었다. 이번에는 손혜원이 그 역할을 맡는다. 손혜원은 정면에서 야당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언론과 맞서 싸우고, 표창원은 야당에 적대적인 종편에 출연하여 야당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아마 이 가운데 일부는 필요하다면 기꺼이 악역도 맡아 줄 것이다. 결국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이 모든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들에게 있어 자존이며 명예이며 긍지다. 그만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움직여 자기가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다.


안철수는 아니라 여기는 이유다. 유승민도 결국 자격을 잃고 말았다. 지난 총선에서 탈당까지의 과정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당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승리해서 당도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었어야 한다. 단지 유승민 개인의 승리였다. 그것도 당의 패배를 전제한 승리였다. 새누리당 골수지지자들이 유승민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안철수는 야권지지자들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패배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원래 속했던 정당을 위기로 몰았다.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 했었다.


말 그대로 지금 문재인은 제 1야당 더민주의 에이스다. 당대표경선을 하는데 정작 문재인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이들마저 하나같이 문재인의 눈치를 보며 그와의 관계를 앞세우고 있다. 당내 최대계파의 수장으로 당대표는 물론 앞으로 당의 행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만 이를 자각하는가. 그리고 이를 얼마나 어떻게 활용하는가. 때로 독단적일 정도로 당을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필요도 있다.


아무튼 새삼 펠레와 마라도나가 메시와 호날두에 대해 했던 대화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메시에게는 없고 호날두에게는 있는 그것. 바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 불편하게만 여겨지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당신들이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해주지 않으니 안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리더십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내 탓인 이유는 내가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실력과 자격이 있다. 야당대표일 때는 잘만 하더니. 우스울 따름이다.

약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손내밀 수 있는 크고 강한 친구면 더 좋다. 유사시 든든한 방패가 되고 평시에는 믿음직한 배경이 되어 준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필수다. 손해와 수모를 인내하지 못한다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란 무척 힘들다.


하지만 한 편으로 약자에게는 적이 있어서는 안된다. 결국 도움을 청하더라도 실제 도움을 줄지 말지는 강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만에하나 도움을 거절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약자 자신이다. 그러므로 만일을 대비해서 든든한 우군을 만들어 놓되 그렇다고 앞장서서 다른 누군가와 적대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누군가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하더라도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조차 자신은 적이 아님을 각인시켜야 한다. 최소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고 싶다고 우리나라가 이제와서 미국과의 동맹을 저버리고 중국과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대한민국을 이루는 대부분의 중요한 부분들이 미국과 맞물려 발전해 왔었다. 미국 없이는 대한민국도 없다. 여전히 반미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이른바 진보진영도 반성을 해야 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그같은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적 행태로부터 자유로운가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이익이 된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된다. 누구와도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지금 가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미국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 미국마저 등져가며 중국에 다가가는 모양새를 취했으니.


아차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국이 중국과 헛짓하는 사이 일본은 더욱 미국에 밀착하고 있었다. 더이상 미국은 한국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 미국과의 동맹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역대정부였다면 굳이 사드배치를 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그리 불쾌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한국은 소중한 우방이고 신뢰할 수 있는 맹방이다. 그런 한국이 중국과 적대관계가 되어 손해를 보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더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보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중국과 적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미국과 이익을 함께 할 것을 확인시켜준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위안부협상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의 대응이다. 미국의 편인 것은 알았다. 미국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맹방인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가까이 있는 중국과 적대하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당연히 그럴 리도 없었다. 그런데 중국 자신이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한국영토에 사드를 배치하겠다 선언하고 있었다. 미국의 편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첨병에 서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친구인 동시에 중국의 적이다. 중국에게는 자신의 적을 곤란하게 만들 - 더구나 미국도 아니고 한국같은 작은 나라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들이 제법 많이 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현재 러시아를 넘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 가운데 하나다.


아주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사드 빼자는 말은 못한다. 그 말은 곧 한미동맹 끝내자는 소리다. 그렇다고 사드배치를 강행하다가는 중국과 적대하게 된다. 중국과 맞물린 경제적 이익만 치명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이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냥 배치하겠다 말로만 끝낸다. 언제 어디에 배치할지는 결국 이러고저러고 따지다 보면 다음 정부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우리가 책임은 지지 않겠다.


하다하다 이렇게 외교 뭣같이 하는 정부도 처음본다. 그나마 가장 미국과 긴장관계를 이루었던 참여정부조차 일단 미국이 하자는 것은 거의 들어주는 방향으로 갔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의 현실에서 미국과의 동맹 없이 무언가를 독자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중국을 믿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은 것인지. 배신당했다며 사드배치 밀어붙이는 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최악의 외교이고 최악의 결과다,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것은 좋지만 누군가의 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국은 중국의 적이다. 그렇게 선언했다. 그러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찍지도 않은 나까지 결국 그 피해를 함께 받는다. 어처구니없다.

불과 얼마전까지 나라라는 것은 곧 왕조였다. 굳이 루이14세의 말을 빌지 않아도 왕이 곧 나라였고 나라란 왕의 사유물에 불과했다. 세금도 전쟁도 단지 왕 개인의 변덕에 의해 결정되었다. 심지어 왕비에게 생일선물을 하겠다고 세금을 따로 거두는 것도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그같은 왕의 전횡과 수탈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은 왕을 내쫓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고대로마나 중국과 같은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국가 자체를 구성원 모두를 위한 공공의 구조로서 이해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미 고대그리스에서는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있었고, 고대로마에서는 공화라는 개념이, 고대중국에서는 공자에 의해 주창된 '대동'의 사상이 각각 발달하고 있었다. 국가는, 사회는, 천하는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모두의 소유다. 모두의 소유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천하가 모두를 위해 그에게 왕이라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왕의 통치는 따라서 모두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추구했던 법가조차 왕 개인이 아닌 단지 공공의 규범인 법을 주재하는 주체로서의 왕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치적인 행위는 오로지 공공의 규범인 법을 근거로 법이 정한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모든 정치적인 판단 역시 다수의 구성원들로부터 의견을 모아 공론의 이름으로 내려져야만 했었다. 딱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래서 고대로마에서는 법이 발달했고, 원로원이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회정치가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시민 모두의 소유다. 원로원 의원이 되고 집정관이 되고, 심지어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스스로를 '제 1시민'이라 일컫고 있었다. 단순히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명예와 권력이 아닌, 개인의 영달이나 욕망만이 아닌 공공을 위한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들조차 그것을 로마의 다수 시민들에게 과시하고 확인받아야 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대에 권력은 단지 권력자 개인의 사유물이었다. 고대로마조차 결국은 그렇게 흘러가고 말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사유화하려 하고, 그같은 시도를 적절하게 막아내지 못한다면 더이상 그를 견제할 모든 수단을 잃고 만다. 처음에는 단지 왕의 소유인 토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준 것에 불과했지만 정작 가신들이 그 토지를 기반으로 힘을 키워 왕과 겨룰 수 있을 정도까지 되자 왕이 그 토지들에 대한 권리를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봉건제다. 권력의 분화와 이동은 대략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누군가 권력을 나누거나 양도하면 그 권력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다시 기존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나 혹은 도전을 선택하게 된다. 다수의 주체가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아 나누게 되면 그것이 영국민주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대헌장'이 된다. 사실은 대귀족과 대상공인들을 위해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으려는 것이었지만 귀족과 대상공인을 그저 도시의 시민으로 바꾸면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어쨌거나 현대의 많은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이념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 할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의 나라의 주인이 되어 서로의 합의에 의해 공공의 목적을 위해 나라를 이끌어간다. 원래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에게 오로지 주권이 있고, 따라서 국가에 대한 책임 역시 오로지 국민들에게 있다. 그리고 국가와 권력이라는 개념 역시 이를 전제로 성립하게 된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은 단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임된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힘에 불과하다. 당연히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공공의 이익과 목적이라는 목표를 공유해야만 한다. 이 또한 결국 법과 제도라는 형태로 정의된다. 이념과 상식이라는 무형의 가치로도 정의된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이란 무엇하나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자의 비서관이 사적으로 전화를 걸어 언론관계자를 협박한다. 진실을 전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과 책임에 권력이 관여하려 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보도가 나오도록 협박까지 일삼는다. 그런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전전정부에서 많은 국민들이 국가와 권력이 하는 일에 시원하지 않다며 불만을 드러낸 것과도 아주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은 개인의 것이다. 개인의 소유이므로 마음껏 자기 쓰고 싶은대로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며 권장한다. 불의한 권력은 자기와 다른 편에 서 있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만 자기와 같은 편에 있으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어차피 누가 권력을 잡았더라도 반드시 했어야 할 일이기에 차라리 어설프게 들킨 것이 더 큰 문제다.


하기는 조선후기 조선은 왕 개인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사대부마저 더이상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단지 왕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인척관계등을 통해 나누어받는 위치에 있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던 식민지 시대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국민의 동의 없이 총칼로 나라의 권력을 탈취하여 독점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시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력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감히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시키는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원래 자기의 것인 권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가 문제다.


전혀 이슈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몇몇만이 시끄럽게 떠들 뿐 정작 일반국민들의 지지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했다. 오히려 잘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전전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중들로부터 비토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권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어 시원하게 일처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하고 있다. 권력을 잘 사용해서 조용하게 잘 만들고 있다.


알량한 국회의원 보좌관조차 특권으로 여긴다. 감히 친인척을 앉히려 해서는 안되는 대단한 자리로 여긴다. 당대표가 책임을 지기보다 그저 물러나며 면피하기에 바쁘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다. 공공의 책임보다 자신의 권리를 우선한다. 결국 그렇게 수렴되는 것일까. 아무런 위기의식 없이 이슈조차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주어진 권력이라면 자기를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 논란이야 있지만 그 정도 위치에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쓰는 것도 옳다. 일단 조용하다. 시끄럽지 않다. 과연 그 수단이 정당했으며 그 목적이 적합했는가는 굳이 따지지 않는다. 권력은 자신의 것이다. 자기가 쓰는 것이다. 항상 흥미롭다.

간단히 7촌이라면 부모의 사촌의 손자 쯤 된다. 부모의 사촌이 5촌당숙, 그 자식이 6촌, 그러니까 그 자식의 자식이 7촌인 셈이다.


그러면 얼마나 먼 사이인가? 일단 할아버지가 7대독자시니 친가쪽은 제외하고 외가쪽으로는 거의 5촌당숙이며 6촌형제들과 일상으로 왕래하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바로 그 6촌 형제의 자식이 내게는 7촌이 되는 셈이다. 의외로 가깝지 않은가?


요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당장 나만 해도 외가는 물론이고 어머니의 외가와도 왕래가 없지 않아서 촌수는 모르는데 그냥 형동생, 아저씨 할아버지 그렇게 어울려 지냈었다. 아예 촌수계산도 안되면 먼 친척인데 한마을에 살다 보니 그냥 친척이라며 소개하고 또 대우해주고 그런다. 외할머니 쫓아서 친척들 찾는데 도대체 아무데나 다 친척이 산다. 그런데 7촌이라면 얼마나 가까운가.


정동영의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 그 연배에서 7촌이라는 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아내의 7촌이라 해봐야 장인장모의 사촌의 손자다. 자기 7촌이면 아버지의 사촌형제의 손자다. 6촌 정도는 왕래가 있었다 봐야 한다. 그냥 생각하기에 7촌이라면 한참 머니까.


그러니까 입을 조심했어야 하는 것이다. 암말 없이 지냈으면 누가 뭐라나? 어째서 국민의당의 문제에 기존 거대정당들이 굳이 침묵하고 있는가. 긁어 부스럼이거든. 혹시 모를 빠져나올 구멍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안다.


하여튼 재미있다. 7촌은 남이라며 열심히 감싸는 중이다. 남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정동영 연배나 지방의 정서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웃긴다.

원래 자본주의는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 혹은 독립되기를 바라는 자본을 소유한 주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기는 그래서 자본주의는 봉건적 전통이 남아있는 사회에서 발달하기가 더 쉽다. 권력이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할 때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껏 이윤을 추구할 수 있고 마침내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기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권력의 위에 서게 된다.


근대유럽의 초기자본주의에서는 그래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심지어 영국의 인도침략조차 영국정부가 아닌 영국의 자본가들이 투자하여 세운 동인도회사라는 사기업이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부의 역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이란 자본가들이 이윤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행정적, 제도적, 정책적 지원과 보호만을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바로 그런 자본가들이 내는 세금에 의해 영국이라는 대제국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기에 기록된 임금따위 무슨 상관이냐는 격양가가 이때 유럽의 자본가들에 의해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초기자본주의 국가들과 달리 뒤늦게 출발해서 그들을 따라잡아야 했던 후발국가들은 유형이 약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자본가들이 육성되고 사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아직 자본적으로 취약한 이들 후발국가에 있어 정경유착은 필연적이었다. 정부가 주도하여 경제정책을 펼치면 그에 편승하여 자본가들은 돈을 벌었다. 사실상 보다 이른 시대의 중상주의의 발전형에 더 가까웠다. 정부는 자본가들로 하여금 돈을 벌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본가들은 정부의 권력을 자본으로 뒷받침한다. 그리고 정부의 주도로 경제정책이 이루어지는 만큼 경제성장의 과실 역시 정부와 자본가들이 독점한다. 다양한 시장주체들에 의해 성장하는 경제가 아닌 정책을 주도하는 소수권력과 자본에 의해 성장하는 경제다.


일본경제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정부기관의 관료주의는 바로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폐허에서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일본의 엘리트관료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본의 위에서 일본의 경제가 세계경제를 굽어볼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시기적절한 정책들을 펼쳐 지원하고 이끌었다. 바로 이들 관료들이 일본을 이끌고 일본경제를 이끈다. 바로 이들 관료들이 있기에 지금의 일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같은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는 일본의 경제위기에 있어 오히려 비효율과 비능률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만다. 여전히 자신들의 성공에 갇혀 있던 관료주의의 경직성이 오히려 일본의 경제위기 극복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한국의 자본주의도 바로 그런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경제부흥을 이끈 주도세력들은 만주국 모델을 만들었던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주도세력 역시 만주군에 복무하며 일본의 방식을 배운 특정세력들이었다. 아니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치독일도 그랬고 스탈린의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후발국가가 선발자본주의국가를 따라잡으려면 강력한 국가의 통제가 필수였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정책을 만들고 자본을 모으고 투자를 주도한다. 민간은 오로지 정부가 하자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경제에 대한 모든 책임도 권한도 오로지 정부가 갖는다. 경제발전의 공적 역시 오로지 정부에게 모이게 된다. 정부가 하자는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돈을 번다. 시장의 주체들의 자발적인 경제활동의 결과가 아닌 정부의 정책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한다.


시장에서 다양한 경제주체들의 기여나 행동에 대한 판단 역시 따라서 한국식 자본주의에서는 오로지 정부에 의해 독점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같은 행동들이 적절했는가. 그같은 행동들이 한국사회와 경제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가. 그러나 어차피 한국의 경제를 이끄는 것은 정부다. 정부가 판단한다. 그것이 과연 옳았는가. 적절했는가. 경제주체들 사이의 약속인 신용은 그래서 전혀 의미가 없다. 어차피 경제를 이끄는 것은 정부이기에 개인의 판단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시장주체인 기업이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경영자가 주가조작을 했어도 정부가 괜찮다 했으면 괜찮은 것이다. 그들 또한 정부와 함께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사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였다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기업이 자신들의 실적을 속인다. 투자의 자료가 되는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아예 조작한다. 투자와 관련한 자료들을 조작해서 주가를 임의로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과연 누가 기업에 투자할 수 있을까? 누가 주식을 사고 시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주식은 단지 돈놓고 돈먹는 도박에 불과하다. 타짜의 사기조차 도박판에서는 하나의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속는 놈이 바보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나라는 최소한 선진국 가운데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정치가 썩었어도 그것은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하기는 그러고 보면 아직도 선진국이라는 독일에서마저 기업의 도덕성과 관련한 이슈가 끊이지 않는다. 역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국가의 경제를 이끈다. 경제주체들이 아니다. 시민들이 아니다. 그래도 설마 이같은 신용과 관련한 문제들까지 허술하게 넘어가려 하지는 않는다. 시장을 속였다. 투자자들을 속였다. 그런데도 아무일없이 넘어간다.


그냥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기업이 하자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자신이 아니다. 주체들이 아니다. 주체는 저들이다. 그저 믿고 따르면 부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내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나를 돈벌게 하는 것이다. 정부도, 기업도, 심지어 많은 국민들 자신들마저 그렇게 여기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경제는 정부와 기업이 하기 나름이다. 그들이 하자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하여튼 재미있다. 남의 일이라 여기면.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를 미리 알았으면서도 아무 조치없이 그저 4조라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할 논의만을 하고 있었다. 분식회계는 문제가 아니다. 신용을 속이는 것은 전혀 큰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도 조용하다. 알면서도 반응이 없다. 원래 자본은 그런 것이다. 정부란 그런 것이다. 분노하는 이조차 드물다. 그래도 경제만 살아난다면. 그래서 경제가 살아날 거라는 기대 자체가 한국의 근대가 만든 신화다. 신앙이다. 수준을 확인한다. 여전하다.

안철수가 책임지겠다며 당대표자리에서 물러난 것과 결국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어째서 안철수가 여전히 유력대선후보로서 높은 지지를 받는가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자리란 책임이 아닌 권리다. 자리에 붙은 타이틀은 그만큼의 권한이고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하는 일 없이 노는 자리가 아니다. 거의 휴일도 없다. 잔업에 야근에 휴일근무도 거의 일상이다. 급여가 높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모시는 국회의원이 재선에 성공했을 때나 의미있는 것이다. 재선에 실패하면 실업자 신세다. 그때부터는 자신을 채용해 줄 다른 국회의원을 알아봐야 한다. 낙선한 국회의원들은 자기 보좌관이 다른 국회의원 밑에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주는 것이 일이다. 마냥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마저도 특권이니까. 국회의원 보좌관이 무슨 힘이 있다고.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악착같이 최저임금 올리는 건 반대다. 복지 늘리는 것도 반대다. 그러므로 아무나 보좌관이 되어서 세금으로 월급받는 것은 특혜다. 보좌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받는 급여만을 생각한다. 하기는 그러니까 친척 가운데 누가 국회의원이라도 되면 한 자리 얻으려 그리 난리치는 것이기도 할 터다.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직업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직업이란 신분이다. 사회적 지위다.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지위, 수입만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 힘든 일 친인척이든 누구든 잘 할 수 있으면 믿고 맡기면 무엇이 문제일까.


국회의원이 진짜 제대로 일하려면 보좌관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죽어라 일해야 한다. 항상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이 보좌관 좀 늘려달라는 것이다. 보좌관 부족해서 편법으로 보좌관을 늘린 뒤 다른 보좌관 임금 덜어서 늘어난 보좌관들에 준다. 생각이 있는 것인지.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역할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 그를 위해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공공에 대한 의식 자체가 희박하기도 하다. 당장의 이기적인 욕망이 공적 책임을 대신한다. 우울하다.

단, 여기서의 가족은 말 그대로 가족이 아닌 친인척에 대한 관용적인 수사로 보아야 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단지 자기 가족을 보좌관으로 채용했다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까. 동서에, 5촌에, 엄밀히 그런 관계를 일반적으로 가족이라 일컫지는 않는 것이다.


원래 친척이란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 그리고 인척은 혼일을 통해 이어진 관계를 뜻한다. 한 마디로 처가, 시가, 외가, 사가 등을 모두 통틀어 말한다. 이를테면 형의 아내쪽 가족들을 부를 때 사돈이라 호칭하는 것이 바로 사가를 뜻하는 것이다. 친척은 아니지만 인척이다.


운전사도 보좌관이다. 국회의원 운전사가 그냥 운전만 하는 사람이라 여기면 곤란하다. 운전 역시 국회의원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업무를 보조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세금으로 급여를 지급한다. 차라리 친척은 안되지만 인척은 된다고 큰소리치던가.


도대체 친인척의 개념도 모른다. 인척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국회의원 운전사가 어떤 역할인지도 모른다. 그냥 운전만 하는 것이니 아무 문제되지 않는다. 은연중 운전이라는 자체를 깔보는 것이 있다. 운전이 그렇게 문제라면 인턴은? 고작 인턴이다.


그래서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 일부러 글까지 써가며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다시피 나는 친인척채용에 대해 무척 관대한 편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긴다. 다만 그것으로 남을 공격하니까.


우리는 깨끗하다. 우리는 전혀 문제없다. 늬들이 잘못이다. 늬들이 잘못된 것이다. 태생부터 문제다. 그런데 정작 하는 짓거리 보면 다른 것이 거의 없다. 차라리 말이나 말던가. 자기들 코가 석자다. 어이가 없다. 우습다.

잘못 이해했다. 심상정 의원의 법안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전제 하나가 빠져 있었다. 모든 경영자들이 단지 최저임금의 30배에 해당하는 임금까지만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경영자마다 기업의 임금수준이 전혀 다르다. 신입사원 최저연봉이 3천만원인 기업과 1500만원인 기업에서 경영자들이 똑같이 최저임금의 30배인 4억 5천까지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최저임금수준이 높은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에서 기업내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차이가 서로 다르다. 심지어 어떤 경우 중소기업 경영자에 비해 대기업 경영자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아마 정의당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최고임금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에서 그 전제로서 그 전에 도입되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므로 어느 사업장이든 동일한 노동을 한다면 급여조건은 같다. 일괄적으로 최고임금역시 최저임금에 맞춰 모든 사업장에서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마다 하는 일마다 고용형태마다 모두 임금이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른 기준 가운데 가장 낮은 하나에만 맞춰서 다시 모두에게 일괄적인 최대임금을 적용한다. 과연 옳은가. 과연 정당한가.


그래서 설마 같은 기업 안에서라는 단서를 스스로 만들어 붙이게 되었던 것일 게다. 그래야 겨우 타당해진다. 같은 기업 안에서 기업내 임금수준에 맞춰서 최고임금을 정한다. 최저임금이 높은 곳에서는 더 많은 임금을, 최저임금이 낮은 곳에서는 더 적은 임금을. 그럼으로써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차별을 둔다. 실적이 좋은 기업과 근근히 먹고 사는 기업 사이에도 차별을 둔다. 장기적으로 지역과 업종에 따라 최저임금에도 차등을 두어야만 한다. 모두가 같지 않을 것이면 다른 것도 하나의 원칙을 세워 달라지도록 만든다.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법을 입안해도 결국 통과될 리 없을 것이라 지레 판단한 때문인가.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정의당에서는 이런 정책들을 지향한다. 이런 법들을 만들려 한다. 국민의당의 등장으로 인해 그나마 제 3당이었던 정의당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다.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차라리 욕이라도 먹는 쪽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기억되는 방법이다. 지금대로라면 전혀 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비판과 비만들만 듣게 될 뿐이다. 절박하다. 문득 안쓰럽다. 정의당의 앞날이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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