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더욱 떠오르는 인터뷰가 있다. 자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를 찍었다.


벌써 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누구를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아주 제대로 명치를 얻어맞았다. 하는 일마다 모두 젊은 세대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노인들을 공경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젊은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인들이란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질시하고 어떻게든 그들에 위해를 끼치려 하는 늙은이들이 있을 뿐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자기들은 그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력으로 지금의 삶을 일구었다. 그러므로 노력하라.


즉 자신들처럼 되어라.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서 출발하라.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나타났다. 


여전히 노인 다수는 그 누군가를 지지한다. 한결같다. 자신들이 기대한 바를 이루어주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싫어한다. 젊은이들이 곤란해한다. 젊은이들이 좌절과 절망을 느낀다. 자신들의 기쁨이다.


지나친 것 같지만 아주 망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식세대가 힘들어도 그 힘들게하는 정책을 펴는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한다.


이미 노인 자신이 젊은이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 안타까운 이유다. 경로사상은 의미없다. 현실이다.

사실 성과랄 것도 없다. 방문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니. 괜히 국내언론과 정치권에서 더민주 초선의원들의 방중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해석하며 일을 키웠을 뿐이다. 중국을 직접 찾아가서 중국 현지의 여론을 듣고 한국의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전한다. 원래 외교는 채널이 많을 수록 좋다. 그렇게 한 편으로는 강경으로 한 편으로는 유화로, 하지만 외교조차 국내정치의 연장으로 보는 덜떨어진 인간들이 있다.


더 웃기는 것은 어떻게든 결과를 냈어야 했다며 그러지 못할 것이면 아예 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똑똑한 인간들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더민주라도 나서서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의 끈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 자체로 성과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이면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어찌 가만히 있는가?


당장 시중의 여론도 그렇다. 중국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중국과의 관계악화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당장 한국경제의 상당부분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크든작든 직간접적이든 중국과 관계 않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더민주의 지지율이 그것을 보여준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 발목을 잡은 것은 누구인가. 똑똑하다고 항상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있으라. 정부가 그렇게 결정했다. 대세가 그렇다. 여론이 그렇다. 손익이 안맞는다. 현실이 불리하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면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의도로 시작한 방중이 아니었다. 판을 엉뚱하게 키운 것은 사드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몰린 정부와 보수언론이었다. 그것을 받아 덥썩 문 것이 똑똑한 네티즌들. 참 잘도 낚인다는 생각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정한다.

그냥 한 마디만 묻고 싶다. 지금 세계의 수많은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 가운데 중국에 대해 할 말 다 하며 사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중국의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며 마냥 밀어붙일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제외하고 과연 있기나 할까?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중요한 논리는 바로 힘이다. 그리고 이익이다. 이익만 된다면 자국이 자랑하는 예술작품도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가릴 수 있다. 과연 지금 자신들이 옳다 해서 하는 행동이 자신보다 강한, 혹은 무시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장차 자기 나라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 것인가. 감정적으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이전에 냉정하게 따지고 계산해야 할 문제다.


위안부협상이 어째서 저처럼 졸속으로 이루어졌는가. 위안부문제로 일본과의 감정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아예 단절하다시피 했었다. 과연 대한민국이 일본을 이처럼 마냥 무시한 채 버틸 수 있는 나라인가. 여전히 세계 2위의 경제강국이다. 군사력에 있어서도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이다. 미국과의 관계도 있다. 무엇보다 바다 건너 바로 튜브만 타고도 건너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위안부는 위안부 외교는 외교다. 독도는 독도 일본과의 외교는 외교다. 단지 감정적으로 불편하다고 외교를 단절한다? 그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다. 국민이야 몰라서 그럴 수 있다. 굳이 그런 복잡하고 엄격한 사실들에 대해 고려할 여유도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대통령이고 정부이고 여당 아닌가. 그런 일 하라고 적지 않은 급여와 수많은 권한과 의전들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보다 한 차원 높게 한 발 앞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대주의라 한다. 적국에 영합한다 말한다. 그래서 언제부터 중국이 적국이었는가? 중국에 우호적인 행동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관계인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바로 누구 때문인가?


사드는 사드 중국외교는 중국외교다. 사드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면 그 만큼 중국정부에도 이해를 구하고 일정부분 양보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 있다. 미국도 중요하지만 중국 역시 중요하다. 반미도 멍청하지만 반중도 만만치 않게 멍청하다. 반일도 바보짓이다.


돌아가는 이야기가 우습다. 저것이 과연 정부인가. 저러고 있는 것이 과연 이 나라의 국정과 외교를 책임질 정부이고 여당인 것인가. 언론은 무엇인가. 국민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다수의 국민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 대단하다. 여론이 웃는다.

올인은 퇴로가 없다. 따거나 아니면 모두 잃는다. 딴다고 모두 따는 건 아닌데 잃는 건 확실히 모두 잃는다. 그나마 돈만 잃으면 상관없는데 돈을 모두 잃고 나면 당장 살아갈 수단을 모두 잃게 된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 판이다.


혼자라면 상관없다. 혼자 죽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는가. 아내 수술비다. 딸 등록금이다. 아들이 사고당해 받은 보험금이다. 당장 집 전세 계약할 돈이다. 그런 걸 두고 흔히 미쳤다고 말한다. 그런 인간은 가장으로서 자격도 없다.


민주주의의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든 외교든 군사들 올인은 결코 있어서 안된다. 잘되면 좋지만 자칫 잘못되면 그대로 망하는 것이다. 한 사람만 망하는 게 아니다. 단지 국가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퇴로를 만든다. 여지를 만든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가능성도 아직 이 사회 안에 남아 있다. 대안이 남아 있다.


사드배치가 중국을 자극할 것이라는 것은 세 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 중국을 근접에서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이 미국에 주어진다. 중국의 많은 중요한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미국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단지 그 가능성만으로도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밀히면 강대국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뻔히 옆나라에서 자신들에 위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을 실제 하려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신에도 크게 손상이 간다. 국내외적으로 중국정부가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마냥 거절할 수는 없다. 미국이 사드를 배치하자는데 동맹국의 입장에서 마냥 못하겠다 버티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일단 들어주어야 한다. 대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설사 전쟁이 일어나 미국의 편에서 파병하게 되었더라도 중국에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한다. 미국과 동맹관계라 어쩔 수 없이 입장을 함께 하는 것일 뿐 대한민국 자신이 중국을 적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직접 설명은 못하더라도 적당한 정치외교적 제스처를 통해 중국의 반감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중국의 원한을 사서 적대하게 되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예 중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면 모를까 결국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공존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숙명이다.


사드는 배치해야 한다. 그에 대한 논의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반발하는 중국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설득을 시도해봐야 한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이해를 구해야만 한다. 원래는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당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최소한 사드배치로 인해 양국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통제하고 관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외교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도 여당도 전혀 아무것도 않은 채 오히려 중국에 대한 적대감만을 키우고 있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국민들로 하여금 오히려 중국에 적대감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중국과 사이가 나빠져도 그다지 대한민국과 국민들에 실질적인 피해는 없을 것이다. 사이가 나빠지는 자체가 피해인 것이다.


결국 정부도 여당도 하지 않는다면 야당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물론 정부와는 달리 야당 국회의원들이 중국에 가서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국가간에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국회의원 개인자격으로 찾은 것이기에 거기에서 나눈 대화나 했던 말들에 대해 어떤 구속력 같은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양국 정부는 굳이 필요없다 싶으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야당 국회의원들이 현지에 가서 의견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차라리 중진급 거물이 아니기에 크게 정치적 외교적 부담 없이 자신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또다른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현지에 전하고 민간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최소한 여기 있는 이들 초선국회의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중국의 적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다. 일사불란할 필요는 없다. 전쟁중에도 굳이 모두가 하나의 전략만을 쫓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만에 하나의 퇴로를 만들어둔다. 정부가 한다고 모든 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반드시 국가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당장 중국과의 관계에서 만에 하나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도 노력을 벌써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일부는 - 아니 다수는 끊임없이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중국정부에도 명분이 된다. 한국정부가 미국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양국 사이가 서로 긴장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정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삐져서는 아예 생까고 외면하는 것은 한 나라의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초선의원인 것은 그만큼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다. 중진이 아니기에 그만큼 말과 행동에 무게가 실리지 않고 한국정부나 중국정부 역시 조금 더 가볍게 그들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다. 그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현정부의 참을 수 없는 옹졸함이다.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외교를 전쟁으로 착각하는 무지함이다. 그래서 사드 배치하고 중국과 적대하면 영영 중국 안 보고 살 것인가? 중국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동떨어져 살려는 것인가? 그런 와중에도 더민주 내부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것이 더민주 모두의 뜻은 아니라고 하는 역시 또다른 퇴로다. 초선의원들의 어설픈 혈기가 그같은 무모한 행동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물론 원내대표 우상호가 그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


바로 어제 전쟁했어도 오늘 당장 화해하려 나서야 하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관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도 그토록 처참한 피해를 입고서도 조선조정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바로 이웃해 있는데 여전히 적대하고 있어서야 국가적으로 너무 많은 비용이 소모된다. 언제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지 몰라 군비에만 모든 자원을 쏟아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에는 당장 대한민국의 경제적 이익까지 걸려 있다.


창구는 여러개 만드는 것이 좋다. 굴은 여러개 파놓는 것이 좋다. 다행히 더민주 초선의원들이 주로 민간을 대상으로 현지 여론을 듣고 한국국민의 입장을 전하겠다 시도하고 있다. 구체적인 결과는 당연히 내놓을 수 없다. 그러나 과정이 중요하다. 외교는 언제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는 생물이다.


논의가 참 저열하다. 사대 아닌 외교가 어디 있는가. 나보다 세면 눈치봐야 하는 것이다. 당장 내 목숨줄이 걸려있으면 자세를 낮춰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생존이다. 외교란 서로 위협이 될 수 있는 강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의 전략이다. 우습다. 그냥 당연한 것이다. 

일본 자민당이 문재인의 독도방문을 이유로 위안부재단에 약속했던 10억엔을 주지 않겠다 말했다 한다. 모두가 바라던 것이다. 그깟 10억엔-우리돈으로 100억원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정 필요하면 5천만 국민이 200원씩만 내도 100억은 어떻게 만들 수 있다. 10억엔을 주지 않는다면 아베와 박근혜 사이에 이루어졌던 위안부협상은 무효가 된다. 이미 협의한 약속내용을 어떤 이유로든 이행하지 않았다.


아주 한국정부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도 오히려 일본정부가 나서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명백한 협의위반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래도 된다. 한국정부는 그러면 안된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그같은 명백한 위반에도 항의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 10억엔을 주지 않더라도 한국정부는 자신들과 협상한대로 해야만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 번 호구잡히면 이렇게 무섭다. 그냥 무시당한다. 철저히 부정당한다. 인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불쌍하게 보이면 밟힌다. 그런 정부더러 외교 잘한다고 지지하는 국민이 무려 40퍼센트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가히 경악이다. 문재인이 참 큰 일을 했다. 원래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을 테지만 덕분에 명분만 하나 더해졌다. 위안부협상은 무효다. 다시 확인한다. 정부만 병신이다. 웃는다.

많은 사람들이 드러난 현상만 보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지금 성주를 비롯한 영남권에서 새누리당을 비토하는 것은 사드배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여전히 사드는 배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동네, 혹은 인접한 지역이어서는 안된다.


당장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네 마네 다투던 것이 조용해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과연 어느 당이 사드에 찬성했느냐 반대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드가 대한민국의 안보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기고 있을 때 사드에 대한 반대여부는 곧 안보에 대한 정당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리 멀지 않다. 바로 대선국면으로만 들어가도 성주는 뒷전으로 밀리고 사드를 앞세운 안보논란이 더 크게 불거지게 될 것이다. 최소한 침묵한다. 더민주의 전략이다.


어차피 지금 더민주가 나서봐야 성주든 사드배치는 정치문제로 비화될 뿐이다.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에 대한 시시비비와는 상관없이 새누리당이냐 더민주냐로 편갈라 싸우기 바쁠 것이다. 새누리당이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주의 사드배치에 반대하던 이들도 더민주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새누리당의 편에서 그들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세월호 당시도 당시 새정연이 나서는 순간 새누리당과 새정연, 나아가 보수유권자와 비보수유권자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진짜 대선을 먹으려 한다. 대권을 노리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손해가 될 만한 일은 나서지 않으려 한다. 당장 이익이 없어도 더 큰 손해만큼은 막으려 한다. 대선은 총선보다 비토세력의 유무도 무척 중요하다. 이긴 사람이 다 먹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 자신이 바라지 않는 후보가 이긴다면 그 손해와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다. 타겟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논란도 만들지 않는다.


당장의 지지율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지역주민이 하는 말에 쓸데없이 휘둘릴 필요 없다. 선거때가 되면 다 바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선거라는 것이다. 엄하게 힘쓰고 발목잡힐 수 있다. 잘하고 있다. 그저 국민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는 것만이 바른 정치는 아니다. 영리해져야 한다. 진보한다.

가끔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선대로부터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터임에도 많은 2세들이 단명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는가 저도 모르게 이해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의 한가운데 있었다.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권력에 둘러싸여 자라고 있었다. 권력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지는 대신 현실감이 떨어지게 된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단지 권력의 도구로,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한 마디로 선대가 남겨놓은 유산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자신이 물려받은 나라는 소수의 권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째서 수많은 정복자들이 마침내 모든 목적을 이루고 스스로 무너져내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갔는가 대통령의 이름이 등장하는 뉴스들을 통해 실제처럼 느끼게 된다. 오로지 정복이 목표였다. 권력이 목표였다.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정복을 마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감만 넘친다. 자신의 힘으로 정복을 끝냈다는 생각에 조심성이 사라진다. 그동안 자신을 옹위해 온 친위세력들도 있다. 어차피 대구경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지할 것이다. 부산경남 역시 자신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임기 3년차, 그러나 지지율은 40%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의 지지율은 전국평균보다 한참 높다. 무엇을 해도 된다.


대구경북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 부산경남 역시 오래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자만했다. 너무 자신만만했다. 대구경북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부산경남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실이 아닌 권력의 흐름만을 본다. 현실을 살아가는 다수의 국민이 아닌 특정한 이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권력의 향배만을 살핀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지지 없이 권력을 가지기도 지키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어차피 자신은 대통령을 했고, 싫은 놈이 대통령되느니 이대로 깽판놓더라도 상관없고, 어차피 이미 이룰 건 다 이뤘다.


기분나쁜 무심함을 느낀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단지 성취와 보상이라고만 생각한다. 대중에 대한 의무를 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 그래도 자신은 된다. 그동안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자신감이다. 왕조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나마 5년 남은 임기만 마치면 그의 이름 앞에 '전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현재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흥미롭다. 결국 천하를 통일하고도 어렵게 손에 넣은 권력마저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믿었던 이들의 반란에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만다. 마치 지금처럼.

예전 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부활이니까 부활의 음악을 한다.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음악이기에 그 음악을 만들고 들려준다. 다른 음악을 듣고 싶으면 다른 음악인의 음반을 들으라. 세상에 음악인은 얼마든지 많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맥락은 비슷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이 최소 복수의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각의 정당이 서로 추구하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념도, 성향도, 정책도, 노선도, 인적구성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유권자는 다수의 정당 가운데 가장 자신의 정치적 이해나 입장과 유사한 정당을 선택하여 자신을 대신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권자의 이해와 입장을 반영할 다양한 정당의 존재가 필수라 할 수 있다.


어차피 지지하는 정당도 아니다. 지지할 정당도 아니다. 전혀 상관없는, 평소 그다지 관심도 가지지 않던 정당이다. 하지만 말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바뀐다면 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정당의 모습을 갖춘다면 그때는 지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과 가장 가깝다 여겨 지지하는 정당이 따로 있지 않은가. 똑같은 정당이 둘이라면 굳이 다당제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파쇼란 정의다. 전체주의란 가장 강하고 완벽한 정의다.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그러므로 모두가 자신의 정의에 따라야 한다. 자신의 정의에 맞춰야 한다. 자신의 정의에 동의해야만 한다. 다양성도 그 안에서만 인정된다. 여성주의자들의 편에 선다. 그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이들이 그 정당을 지지하면 되는 것이다. 여성주의에 적대적인 자신들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정당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한다. 조선일보가 참언론이고, 새누리당이 그런 점에서 참정치인 참정당이다. 일베는 정의다. 그러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여기고 자신의 입장을 정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정의롭다. 그래서 항상 정의로운 인간들이 문제였다. 너무 정의로워서 다른 정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너무 정의롭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정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의란 자신과 같아지는 것이다. 자신과 같아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악이다. 더구나 자신들은 다수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억압할 수 있다. 고작 원내교섭단체도 못되는 제 4당을 두고서.


내가 네티즌들을 싫어하는 이유다. 다수가 정의라 착각한다. 다수가 동의하면 그것으로 정의는 결정되었다 여기고 만다. 정의와 반대되는 것은 악이다. 자신들이 적대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타진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그냥 자기와 맞지 않으면 지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지지하지도 않던 정당이니 앞으로도 주욱 지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지지자가 모두 떨어져 나가면 알아서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다. 억지로 자신과 같아지도록 만든다. 그렇게 압력을 가한다. 그것이 정의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다양한 입장과 이해가 존재한다. 메갈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와 주장들이 존재한다. 어느 한 쪽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부정한다. 다양성은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너무 정의롭다. 항상 한심하다. 정의가 악이다.

아마 학생운동이 결정적으로 국민들과 유리되며 동력을 상실하게 된 계기가 아마 96년 연세대사태였을 것이다. 사실 연세대사태는 한총련의 오판이라기보다는 경찰과 정부의 주도면밀한 전략에 의한 몰아가기에 가까웠다. 워낙 김영삼정부 내에도 이미 학생운동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운동권전력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바로 그들의 선배였으며 동지였던 이들이 정부를 위해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정부에 저항적인 학생운동을 무력화시켜라.


1997년 IMF로 인해 구조조정의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던 김대중 정부 역시 어떻게든 정부에 반대하는 노조를 무력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김대중 정부 내부에도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른바 재야운동권이 다시 핵심적인 위치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누구보다 노조의 생리를 잘 알고 노조가 가지는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노조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게 된 손해배상소송을 통한 경제적 압박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낸 전략이었다. 정부가 지시했고 검찰이 지휘했고 기업들이 따랐다. 이전 정부에서는 없었던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노조탄압정책이 바로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민주화정부에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군사독재정권에서도 이런 것은 없었다.


민주화정부의 가장 악랄한 점은 모든 것이 합법과 합리를 가장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민주화는 이루어졌고 국민이 선출한 법과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에 의해 합의로 만들어진 법은 공공의 규범으로서 강력한 강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법이 그렇다. 합법적인 정부가 합법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그렇다. 그러므로 그에 반대하는 것은 악이다. 죄도 아니다. 죄와 악은 전혀 별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단지 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악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법을 중요하게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그나마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민주화 정부 이후부터다. 폭력이 아닌 법과 합리에 의한 더욱 교묘해진 지배인 것이다. 그나마 역사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현행법을 어겼으니까.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고 있으니까. 시민들에 불편을 끼쳤으니까. 군사독재정권에서였다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 민주화를 주도한 민주화정부에서 그리 주장하면서 어느새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일단 법이니 따르라. 일단 정부가 시켰으니 따르라. 반대하면 형벌이 아닌 경제로써 압박한다. 아예 살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그로부터 배워 잘 써먹고 있는 것이 여당인 한나라당, 그리고 이후 새누리당이다. 그런데 단지 지금 정부가 새누리당이니 모든 것이 새누리당의 잘못인 것처럼. 과거가 아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그저 몰라서 왜곡되고 있다. 원죄는 누구에게 있을까.


'송곳'서도 구고신이 말한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멋모르고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이 새누리당 욕하는데 그 대사를 쓴다. 드라마의 배경이 바로 참여정부 시절이었다. 유시민이 노유진서 반성하더라. 다 참여정부의 잘못이었다. 합법적으로 노조 자체를 일반 시민과 분리한다. 대중의 집회와 시위마저 일반 시위와 분리한다. 전문시위꾼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도 바로 김대중 정부였다. 연대가 아닌 시위꾼이다. 역시 내부의 논리를 잘 아는 운동권출신 인사들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연대는 악이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민주화 이전의 김대중과 이후의 김대중에 대한 평가가 다른 이유다. 노무현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은 전혀 별개의 인간이다. 문재인도 그래서 사실 그렇게 크게는 기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뭐 더이상 어떻게 더 빼먹을 게 남아있는가도 모르겠고. 워낙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며 아예 뿌리부터 말려버린 탓에 노조든 시민사회단체든 더이상 무언가를 주도하여 추진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치면서 나머지 바닥까지 닥닥 긁어 아낌없이 박살낸 뒤다. 차라리 포기하면 편하다. 기대할 것도 없다.


여성운동가들이 제도권에서 여성운동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세우고, 노동운동가들이 정부의 요직에서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낸다. 학생운동에 몸담았으니 학생운동은 그들의 몫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머리도 달라졌다. 권력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원래 그런 인간들이었을까. 문득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축복이고 재앙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영웅인 이유다. 입맛이 쓰다.

국가란 가장 크고 강력한 단위권력이다. 어떤 개인도 집단도 결코 국가를 넘어설 수는 없다. 국가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개인이나 단체가 국가를 이기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개인, 혹은 단체와 연대해야만 한다. 최소한 국가에 위협이 될 정도의 세력을 만들어 국가와 맞서야 한다. 그러면 이들 다른 개인, 다른 단체는 어디에서 오겠는가?


성주군 혼자만의 힘으로 정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성주군민의 힘만으로 정부가 하겠다 밀어붙이는데 그것을 과연 거부할 수 있겠는가? 정부 뿐만 아니라 정부에 우호적인 개인이나 단체 역시 정부의 편에서 성주군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여전히 성주군민들은 혼자의 힘으로만 사드배치저지와 원점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과연 공정한 싸움이며 가능한 싸움인가 묻게 된다.


외부세력이라 말한다. 결국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이다. 비단 성주군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다. 혹은 아시아, 혹은 세계 전체. 하기는 그래서 세월호참사 때도 세계인들은 그것을 세계적인 비극이라 여겼는데 한국의 다수는 단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만의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성주군만의 일이다. 성주군 이외에는 끼어들지 말라. 성주군에 거주하는 성주군민을 제외한 누구도 이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분리한다. 조각조각 나눈다. 그렇게 나뉜 조각은 언제나 약하다.


그런데 크게 걱정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동안의 여론조사들을 떠올린 때문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최소한 사드의 성주군배치에 대해서만큼은 그다지 적극적이 되지 않는 이유다. 정부의 결정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거부하려는 성주군민의 노력은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 않다. 성주군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지만,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누구의 문제일까? 불과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밀양에서도 공권력에 맞서던 지역쥔들이 뿔뿔이 찢기어 흩어지고 말았다.


정부가 강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개인이나 특정한 단체가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때문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힘을 모은다. 단체들이 손을 잡는다. 쉽지 않은 대상이 된다. 위협적인 상대가 된다. 최소한 턱밑까지는 치고 올라갈 수 있다. 찢기고 난 조각들은 얼마나 허무한가. 굳이 긴장할 이유마저 찾지 못한다. 결국 개인과 단체들은 국가가 의도한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손을 잡는 것이다.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배우지 않는다. 남을 이기고, 남을 꺾고, 그 위에 군림하기를 가르친다. 함께 사는 법은 집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평생 타인과의 연대를 거부하다가 비로소 외부세력의 도움이라도 필요한 때가 온다. 도울 것인가. 도움을 받을 것인가.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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