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정치나 시사관련 유튜버 혹은 블로거 가운데 공포나 증오와 같은 감정에 대해 나처럼 중요하게 깊이 파고드는 경우는 거의 드물 것이다. 정치와 시사란 단지 사실과 진실의 문제라 여기는 경우 공포나 증오와 같은 감정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어떤 논리로써 그것을 타당하게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내가 아는 시사란 감정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과거 서프라이즈 이후 내가 천착해 온 문제이기도 했었다. 인간은 얼마나 이성적이고 감성적인가? 대중이란 얼마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인가?

 

그래서 공포나 증오와 같은 대중의 감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온 만큼 그에 대해서도 민감한 편이었다. 당연히 수구진영에 대해서는 공포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자칭 진보에 대해서도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본능처럼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자칭 진보의 실체나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단지 나 자신의 편견과 오해가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고. 또 그를 근거로 예상하는 자칭 진보의 모습이란 나의 생각이나 믿음과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런데도 쓴다. 말했듯 나는 나에게 유리하게 글쓰기보다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를 선호한다. 그것이 내가 얼마 안되는 블로그 방문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차라리 내가 틀렸다면, 그래서 자칭 진보들에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정의연 논란이 남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성과인 것이다. 정의당이 시민단체의 내부사정에 무지하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칭 진보언론이 시민단체 내부의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오히려 조롱거리나 될 만한 주장인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당시 법과 제도 아래에서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 모르지 않는다. 정의연이 시민단체로써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 절대 모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했는가? 직접 정의연에 대해 취재하고서도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정의당 역시 시민단체의 내부사정에 대해 모르지 않았을 터임에도 조선일보가 만든 프레임에 따라 윤미향을 공격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탈원전을 주장하던 자칭진보가 탈원전을 수사하겠다는 검찰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넘어 이미 청와대를 정권차원의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 집단으로 단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지게 된 확신이다.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해 국민의힘이 문제삼고 검찰이 수사하겠다는데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모른 채 침묵하는 모습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내가 증오와 공포, 혐오와 경멸이라는 최악의 감정을 전제로 이해한 자칭 진보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검찰이 수사하니 문제이고 국민의힘이 문제삼으니 범죄다. 오히려 증오와 공포라는, 혐오와 경멸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전제하여 이해하고 예측한 자칭 진보의 모습이 더 현실에 가깝다.

 

틀리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는데 사실로 맞아 떨어질 때의 느낌은 아마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틀렸을 것이라 여기며 감정을 배설하듯 글을 쓰는데 실제 그대로 이루어진다. 정의연 논란이 남긴 최대 성과일 것이다. 그  전까지는 증오와 공포라는 감정까지는 있었어도 사실이고 진실일 것이라는 확신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알게 되었다. 저들의 진보란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저들의 정의란 누구를 뒤쫓는 정의인 것인가? 조선일보가 앞장서고 국민의힘과 검찰이 주장하면 진실이 된다. 저들의 진보란 조선일보와 국민의힘과 검찰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긴 그래서 정의당과 한겨레는 그토록 조선일보를 의식하며 주장하고 기사도 쓰고 했을 것이다.

 

허무한 것이다. 스스로는 증오란 것을 알고 있다. 혐오이고 경멸이란 것을 스스로 느끼며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설마 틀렸겠거니. 그냥 편견과 감정에 의한 배설이겠거니. 그런데 사실이었다. 사실을 넘어 예언이었다. 월성원전에서 방사능이 누출되었다는데 오히려 자칭진보는 침묵하고,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한 검찰수사에도 철저히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저들에게 진보와 정의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내가 믿고 있던 진보와 정의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총선 때마다 민주당은 예외로 하고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온 나를 조롱하는 것 같다. 나는 과연 병신이었는가.

 

정의당의 진보는 조선일보가 판단한다. 한겨레의 진보 역시 조선일보가 판단한다. 그래서 진중권은 진보다. 홍세화도 진보다. 강준만도 진보다. 어째서 자칭 진보는 조선일보와 국민의힘을 저토록 의식할 수밖에 없는가. 굳이 반복할 필요 없이 그동안 지겹도록 떠들어 온 내용일 터이므로. 자칭진보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래서 뻔히 사정을 알면서도 정의연을 외면해야 했던 것이고, 그동안 주장해 왔음에도 탈원전은 범죄여야 하는 것이다. 김학의의 출국금지는 정권차원의 범죄이고 인권유린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칭 진보란 뭐다? 내 생각이 맞아서 더 열받는 것도 생소한 경험이라 하겠다. 

역대 로마의 황제들이 굳이 이집트로부터 로마로 밀을 배에 실어 날랐던 이유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하는 일 없이 먹고 놀며 애낳는 일만 하는 잉여들이라 해도 그들은 로마 시민들이었다. 가진 것 없이 그저 황제만 바라보며 손을 벌리는 무지렁이들이라 해도 그들의 지지가 있어야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정통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굳힌 정통성과 권위로 로마 황제들은 마음껏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황제자리에서 내쫓일 때까지.

 

복지란 과연 시민의 권리인가? 아니면 권력의 시혜인가? 시민의 권리로써 마땅히 국가가 져야 하는 의무인가? 아니면 권력의 선의로써 국민에게 베푸는 은혜인 것인가?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권력이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선의로만 국민들에 굳이 자기의 부를 헐어가며 무언가를 베풀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렇게 국민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환심을 샀으면 그 다음은 무엇일 것인가? 복지와 포퓰리즘이 분리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를 통해 더욱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단지 권력자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만 쓰려 할 것인가?

 

포퓰리즘의 유래가 된 페론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도 대중에 영합하여 얻은 권력을 부정부패와 전횡과 독재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론은 대중주의자이기는 했어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차이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의 권리이고 의무이고 책임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보편의 권리를 위해 반대급부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더 많은 지지와 그로 인한 더 큰 권력과 그에 뒤따르는 더 큰 부와 같은 것들이다. 대중의 마음을 사는 정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쓴다면 그것은 진정 대중을 위한 것이겠는가. 그래서 시혜가 되는 것이다. 특정한 권력자가 대중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어떤 일들을 해주었다. 

 

바로 이 말이 핵심인 것이다. '해 준다'. 원래는 안그래도 되는데, 굳이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이루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즘에서 복지란 개인에 대한 숭배와 지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페론주의인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구성원들 사시에 합의된 보편의 상식과 가치와 정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페론 대통령 개인, 혹은 에바 개인의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페론의 부패와 독재를 문제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은 이후의 정체세력들이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 더 클 것이다. 페론이기에 가능했다. 에바이기에 가능했다. 그들만이 진정 우리를 위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다시 불러들여 원래의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수구진영에서 복지에 대해 반대할 때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반박의 근거다. 대부분 복지정책들은 박정희가 먼저 시작했었다. 의외로 현대의 대부분 사회보장정책들은 독일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 기득권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나설 여지가 줄어들고 더불어 막 통일을 이룬 독일제국의 단합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박정희 시절이 살기 좋았다 추억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생활보호정책 덕분에 동사무소에서 받아온 쌀과 밀가루로 연명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는 것이다.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어지는 의료보험증도 꺼리지 않고 받아주던 돌팔이 동네의원도 기억한다. 왜 그랬겠는가? 어쩌면 가난한 이들이 더 권위주의적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으니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이 아니더라도 알량하게 주어지는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정책에 의한 것이 아닌 개인의 동정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들이라도 그 차이를 깨닫기 힘들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가난한 이들이 더 보수적으로 더 권위주의적으로 더 자유지상주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보편적 복지에 더 반대할 수 있는 이유는 부를 독점한 이들이 알량하게 베푸는 자선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자신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는 돈보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가난한 이들이 지지한 결과로 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복지고 포퓰리즘인 것이다. 그래서 시민의 권리이고 대중에 대한 영합인 것이다. 결국에 포퓰리즘은 권위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기에 노동자를 위해, 자영업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만이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더이상 대통령따위 않겠다 해도 이래서야 대중에 의해 다시 끌려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여야 한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지난 4년 좀 안되는 시간들을 되돌아 보라. 당시 언론들은, 정부와 여당은 무엇이라 떠들고 있었는지.

 

정의당이라서 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만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이고 정치권이 져야 할 책임이기에 정의당이 앞장서는 것 뿐이다. 바로 여기서도 정의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의당과 자칭 진보들은 자신들의 선의를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리 서운하고, 민주당은 굳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어찌되었거나 이룰 것은 이루려 한다. 어째서 진보적인 대중 상당수가 정의당이 아닌 어차피 똑같이 한 줌에 불과했던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지하여 뭉치게 된 것인가. 이념적으로 나같은 경우 노무현이나 문재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그래서 심지어 노무현과 문재인을 때때로 심하게 조롱하고 비난하기도 했음에도 끝내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당은 무산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정당이고, 친노친문은 당연한 시민들과 보편적인 과제들을 함께 해내가는 진영이기 때문이다. 친노친문이 자칭 진보들 보기에 극성맞을 정도로 적극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정의당과 민주당, 정확히 이제는 민주당의 주류가 된 친노친문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엘리트주의와 진정한 대중주의다. 대중영합적 엘리트주의와 대중이 중심이 된 대중주의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 답답할 정도로 보편과 타협을 중시하기도 한다. 개새끼 씹새끼 욕하다가도 어느새 같이 손잡고 연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그를 위한 과정이다. 민주주의란. 노무현이 무언가를 해주었다? 문재인이 무언가를 해 주었다? 그게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과제들을 그들이기에 대신해 이루어 준 것이다. 그래서 보편인 것이다.

 

하필 오세훈이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바람에. 더구나 바로 직전 정의당이 정부의 거리두기 연장을 비판하는 논평을 보고야 말았다. 오세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정의당이 정부의 거리두기 연장을 비판하며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법안들을 보았다. 무엇이 복지이고 무엇이 포퓰리즘인가? 무엇이 시민의 권리이고 무엇이 대중에 영합하는 것인가? 정의당이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이 과연 그같은 보편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인가? 원래 쓰려던 내용과 그래서 조금 벗어나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근본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어째서 복지이고 포퓰리즘인가?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니까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는 본인의 재판도 아닌 남의 재판에서 판사가 한 마디 한 것 가지고 바로 반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응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강도의 논평까지 내고 있었다. 그러면 김학의는 어떤가?

 

탈원전 수사의 경우에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탈원전을 주장하며 정부의 탈원정 정책이 늦다고 오히려 비판하던 것이 자칭 진보였었다. 그런데 검찰이 월성원전의 경제성 평가에 문제가 있다며 수사를 시작하자 바로 태도를 바꾼다. 정부가 부당하게 부정하고 불법적인 수당을 동원해서 멀쩡한 원전을 폐쇄한 것이다. 대통령까지 검찰수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중대한 정권차원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정의당의 논평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한겨레 기자 역시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낸 바 있다. 그러면 김학의는 어떨 것인가.

 

뻔하지 않은가. 김학의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 피의자의 인권도 소중하다. 심지어 당시에는 피의자조차 아니었던 일반인 신분이었다. 정권이 일반인을 사찰하고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다. 설사 김학의를 놓아주더라도 정권이 출국금지를 시켜서는 안되었는데 청와대의 책임 역시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이 수사받고 정권차원에서 책임을 지라. 왜? 김학의는 민주당이 아니니까. 김병욱도 민주당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의 진보와 정의, 그리고 엄정한 법집행은 누구에게만 해당된다?

 

제발 유시민도 최강욱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최강욱 대표의 정의당에 대한 발언들을 보면서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다. 열린우리당을 지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의당은 이미 국민의힘과 한 몸인 것이다. 박원순에 대한 의미없는 한 마디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김학의의 출국금지를 문제삼는 국민의힘과 검찰의 행보에는 철저히 침묵한다. 자칭 진보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자칭 여성주의자들 역시 한결같다. 그런데도 같은 진보라고 같은 편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인가. 정의당이 중대재해법을 문제삼는 것도 그것을 통과시킨 것이 민주당이기 때문일 뿐 어차피 정의당 입장에서 진정한 노동존중의 정당은 국민의힘이었던 것이다. 국민의힘과 손잡고 법을 통과시키려는 것이었지 민주당의 법안을 통과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아무튼 보면 볼수록 자칭 진보의 알몸을 보는 것 같아 그냥 혐오스럽기만 할 뿐이다. 저들의 말과 행동은 어쩌면 저리도 선택적인가. 김학의의 인권만 소중하다. 김병욱의 인권만 존중받아야 한다. 벌레는 벌레다. 구더기는 구더기다. 

경제성을 따질 것이면 자동차에 범퍼도 있을 필요가 없다. 에어백은 웬 말일까? 매연저감장치를 굳이 달 이유가 있겠는가. 그냥 엔진에 트랜스미션에 차가 굴러가는데 필요한 최소한만 달아서 겉모양만 그럴싸하게 출시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 그 비슷한 차량이 있었다. 타우너였던가? 값도 싸고 유지비도 싸고 대신 사고나기도 쉽고 사고나면 끝장이다. 결국 단종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싸다는 이유로 그 차를 필요로 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계속 생산되었었다.

 

내가 일하는 물류센터만 해도 안전사고를 최소화하겠다고 휴게시간도 충실히 지키고, 그를 위해 사람도 더 고용하면서, 각종 안전을 위한 조치를 강화하는 중이다. 그게 다 무언가? 돈이다. 그냥 어딘가처럼 화장실 가고 담배 필 최소한의 시간만 주며 굴려도 어쨌든 일할 사람은 일하는 것이다. 안전장구들이야 알아서 장만해서 쓰게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사람이 부족하면 그만큼 더 일하면 되겠지. 아니면 더 다그쳐서 더 빨리 움직이도록 하면 된다. 하지만 사고나지 말라고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라 교육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를 안전하기 운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부품이며 설비들도 검증된 최고의 것들이 쓰이며, 정기적으로 안전점검을 위해 발전을 멈추고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운영인력들의 교육과 훈련, 그리고 충분한 대우를 위해서도 큰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단순히 전기요금이 얼마일 것이다 하는 예측은 그 가운데 지엽말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전한 운용을 위해 필요한 비용이 더 크다면 경제성이 없는 것이다. 안전이 최우선인 원전을 감사하면서 안전성과 경제성을 분리한다는 게 과연 말이 된다 생각하는가.

 

원래 경제성이라는 것도 장래의 경제적 가치는 어떤 요소를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기업, 같은 국가, 같은 사안들에 대해서도 주체마다 그 경제성에 대한 예측치가 다르게 나오는 것이다. 당장 대한민국의 올해 경제전망만 해도 계산하는 주체에 따라 다른 값이 나오는 것이 실상이란 것이다. 그래서 누가 맞고 누가 틀렸다? 아니 설사 그 예상이 틀렸다고 해서 그것을 범죄라 말할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정의당과 한겨레 같은 자칭 진보들을 욕하게 되는데, 검찰이 수사한다는 이유로 월선원전 폐쇄를 정권차원의, 대통령까지 언급되는 범죄로 단정짓는 태도가 참 우습다는 것이다. 정의당 찌그래기들이 자기네 선의를 주장해봐야 웃긴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는 것이다. 경제성에 대한 평가가 감사원의 그것과 달랐다. 그래서? 무슨 기준으로 어떤 요소들을 적용해서 계산한 것인가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문제가 있으니 범죄다. 버러지새끼들 아닌가.

 

당장 삼중수소가 원전부지에 누출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 삼중수소를 안전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의 비용과 시간과 노력들이 필요한가. 그 동안 인근 주민들이 느껴야 할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비용들은 또 어떠한가. 그런데도 탈원전 정책에 대해서 감사하겠다. 그야말로 총집결이다. 추천한 새끼는 지금이라도 광화문 광장에서 배갈라라. 왜 이리 나라가 벌레들 소굴인가. 

다시 말하지만 진중권은 변절한 게 아니다. 더이상 진보논객이 아니라 말하는데 원래 진보논객이었던 적도 없다. 다만 자칭 진보논객이었다. 자칭 진보정당 자칭 진보언론과 같다. 그래서 진중권과 홍세화와 정의당과 한겨레가 지금 현재 하는 짓거리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원래 먹물들이었고 자기들이 이 나라를 이끄는 주류엘리트라 여기던 놈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구세력과 동질감이 있었다. 참여정부 시절을 돌이켜 보라. 저들이 당시 손잡았던 것이 열린우리당이었던가? 한나라당이었던가? 대통령 탄핵도 진중권이 말하고 심상정이 따라 읊어댔었다. 

 

그래서 진중권은 바뀐 것 없다는 것이다. 전향따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칭 진보논객이다. 자칭 진보들과 정확히 주장하는 방향이 일치한다. 다만 개인이라 조금 더 유연하고 신속할 뿐. 한겨레가 어떤 식으로 조선일보 기사를 받아서 읊어대는가 보라는 것이다. 어떻게 정의당은 수구언론의 주장을 받아 정부를 공격하고 있는가.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원래 진보란 없었다. 진보라 자처하던 놈팽이들만 있었을 뿐. 그마저도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성과다. 검찰의 공격을 계속해서 버텨내니 저놈들이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판사놈들마저 알몸을 드러낸 상황이니. 

역지사지란 거다. 김종인이 어느날 제정신이 돌아와서 '대한민국 망해라!' 외치고 갑자기 사퇴한다면 사람들은 무어라 말하겠는가. 김종인이 물러나고는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국민의힘에서 비대위를 구성하고 다른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 새끼들 꼬리자르기 하는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직함에 '대표'자가 붙는 사람의 한 마디는 그냥 개인의 의견일 수 없는 것이다. 당사자만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있는 정당이고 정치인이라면 발언한 자신이 직접 사과하든 다른 만회할 대책을 내놓든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문재인 대통령 이전 민주당이 선거결과와는 상관없이 평소 지지율이 바닥을 치던 이유였었다. 뭐만 하면 대표를 교체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정책이든 법안이든 하여튼 문제만 생겼다 하면 기존의 대표를 몰아내고 새로 비대위를 꾸려서는 전혀 다른 말들을 내뱉고 있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 어차피 당헌당규에 따라 선출된 대표라 해도 존중하는 문화 자체가 없다 보니 언제든지 몰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당내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더 크게 새 나온다. 당대표가 한 마디 하면 최고위원 누가 한 마디 하고, 중진 가운데 또 다른 소리를 하고, 그래서 당차원의 일관된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다.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신뢰할 수 없는 정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니 어제 한 말도 오늘 씹고, 바로 직전에 나온 말도 다른 소리가 덮어 버리는데 누가 그런 정당을 믿고 지지를 보내겠는가.

 

실수를 하면 실수한대로, 잘못했으면 잘못한대로, 그럼에도 여전히 대표로써 그리고 그를 대표로 선출한 정당으로써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며 그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까지 함께 한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 이후 민주당이 근본적으로 바뀐 부분일 것이다. 요식이든 어쨌든 당헌당규를 근거로 당원들의 의견을 물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원칙과 규범에 따라 모든 결정들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설사 민주당에 반감을 가지고 그를 비판하는 입장에서조차 일관된 방향을 가지고 비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발언은 의미가 있다. 충분히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지지율도 다시 크게 뛰어 오를 수 있다.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한결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당장 뭔 짓을 해도 결국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김종인이 기존의 국민의힘과 다른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이든 지지자들의 지지는 한결같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신뢰의 문제다. 공당으로서 이미 한 번, 더구나 정당하게 선출된 당대표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발언이면 당대표를 내쫓을 것이 아니라 당차원에서 그를 수습하고 만회하기 위한 노력까지 함께 유권자들에게 내보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정도 무게감은 있어야 공당으로서 그 말과 행동에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래서 이낙연을 잘라내면 이낙연의 발언이 사라지는가? 이낙연의 행동이 지워지는가? 그 이낙연을 당대표로 선출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원들 자신이란 것이다. 이낙연만 지우고 나면 그런 당원들의 책임은 사라지는 것인가. 마지막까지 당원으로서 지지자로서 당대표를 견제하고 감시하며 비판을 통해 바른 길로 나가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정치적 동지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당원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가 지금도 크게 후회하는 일이다. 탈당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둘째 공당으로서 신뢰의 문제도 문제지만 이제 곧 보궐선거도 앞두고 있는데 이미 있는 당대표가 사퇴하면 이후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것도 큰 문제인 것이다. 정당하게 선출된 당대표를 단지 그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원들이 움직여 내쫓고는 새로운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 문재인 대통령 이전 민주당에서 어째서 그토록 계파정치가 극성이었는지 기억하는가. 바로 당대표도 마음대로 내쫓고는 비대위 꾸려서 다시 지도부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계파가 크게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쪽과 그 기득권을 빼앗으려는 쪽 사이에서 원칙도 규범도 없이 힘겨루기를 하려니 서로 세를 키우는데 집중하게 되고 계파정치가 민주당을 온통 혼란으로 몰아갔던 것이었다. 아무리 당원들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원칙을 무시하고 당대표를 내쫓고 비대위를 꾸리려는데 쫓겨나는 쪽과 그를 대신하려는 쪽 사이에, 더구나 그를 대신하려 경쟁하는 입장에서 과연 공적인 규범이나 원칙이 얼마나 의미를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대표를 지키려는 입장에서는 당원들조차 적대하려 할 테고, 새로 당권을 차지하고 싶은 쪽에서는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혼란을 겪고도 보궐선거에서 당력을 모아서 선거를 치를 수 있을 것인가.

 

박시영이 괜히 당대표 교체론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 아니다. 민주당을 가장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일부 당원과 지지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동안 민주당을 한심하게 만들었던 그 짓거리였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항상 자기들끼리 싸운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일관된 메시지 관리조차 되지 않는다. 뭔 소리를 하는지, 뭘 하겠다는 것인지 항상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 민주당은 무능하다는 말에는 공당으로서 믿을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 시절로 당원들에 의해 돌아가자는 것인가.

 

소속 정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낙연이 사퇴하고 비대위 꾸리려면 어떤 혼란이 있고 그것이 장차 민주당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냥 안고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낙연은 나름대로 열심히 잘 수습하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민생이슈로 넘어간다. 정책이슈로 빠르게 전환하려 한다. 아마 검찰개혁도 덕분에 더 속도를 내게 되지 않을까. 이낙연이 다시 일어나려면 그만한 두드러진 성과가 필요하다. 그런 게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지 사퇴? 물러나면 끝나나? 당대표 내던지면 없던 일 되나?

 

당대표로서 이낙연을 믿지 못하겠다면 자유다. 더이상 차기 대권주자로서 이낙연을 지지하지 못하겠다면 그 역시 자유다. 문재인 대통령에 반대할 수 있다. 대통령 자격이 없다 주장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헌법이 바뀌더라도 이번 임기에서 5년은 대통령으로서 법이 정한 임기와 예우는 지켜져야 한다. 잘못 대통령을 뽑았더라도 그 책임까지 모든 국민이 함께 진다. 그래서 대통령 탄핵이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냥 무심코 말실수로 표현상의 오류로 내뱉을 말이 아니란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가? 심지어 당원인가? 무엇이 민주당을 위한 것인가?

 

이낙연 욕하다가 이낙연에게 이런저런 조언도 하고 기대도 다시 가져보는 이유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당원이 선출한 대표다. 정당하게 선출되어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공당의 대표인 것이다. 주호영이 말을 배설하고 원내대표직 그만둔 뒤 튀어 버리면 쫓아가서 국민의힘과 같이 욕할 것이다. 그게 대표라는 직함이 가지는 무게인 것이다. 이낙연 사라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에서도 지금 당대표를 교체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 그냥 감정의 배설일 뿐이다. 그마저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당대표로서 이낙연의 책임이겠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때를 만나지 못해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면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세상을 살피고, 우연히 때를 만나 관직에 나가면 관리로써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며 천하를 경영할 뜻을 펼친다. 사대부란 단어의 뜻이다.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초야의 선비가 되는 것이고, 초야의 선비가 관직을 얻으면 관리인 대부가 되는 것이다. 선비가 관리가 되고, 관리는 선비가 된다. 그러면 왜 선비인가?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 익힌 당대의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느 백성들보다야 많이 배워서 알고 있으니 자격이 된다.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지렁이 백성들보다야 어려운 경전도 줄줄 외고 제법 문장도 지을 줄 아는 선비들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가장 하찮은 선비조차 공맹을 알고, 예의를 알고, 천하를 경영하는 방법을 배워 알고 있을 것 아닌가. 본능이 시키는대로 해뜨면 나가 일하고, 해지면 들어와 잠드는 일상을 사는 백성들은 매순간 선비로서 엄격한 예법을 지키며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유럽의 귀족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을 권력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봉건영주로서 가지고 있는 영지 만큼 무력을 동원할 수 있고, 그 무력이 곧 자신이 가진 신분과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시대가 바뀌고 전처럼 마음대로 무력을 과시할 수 없게 되면서 자신이 가진 부를 기반으로 교양이라는 것을 앞세우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비싼 돈을 들여 저명한 교사를 초빙해서 다양한 교육을 시키고 그를 통해 다른 신분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명한 학자나 예술가들을 초빙하거나 혹은 후원하면서 그들을 자신들의 권위를 돋보이는 배경으로 삼기도 했었다. 근세 유럽의 학술과 문화와 예술의 발전은 바로 이런 귀족들의 허영과 사치의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방식을 본받아 자기것으로 만든 것이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부르주아들이었다.

 

당연히 교양과 품위를 갖춘 집안이라면 예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최신 학술동향에 밝아야 하며, 시사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이들만이 자격을 부여받고 있기도 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예술을 모르면 그것은 천박한 것이다. 문학과 철학과 과학에 대해 토론할 수 없으면 그저 탐욕스런 돈벌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가 속한 나라가 공동체가 중요한 문제와 맞닥뜨린 상태에서 책임있는 위치에서 한 마디 의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일까. 바로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서구권의 엘리트, 혹은 리더라 불리는 이들의 특징이 여기서 비롯된다.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과시할 수 있는 자격을 보여줄 수 있어야 그들은 엘리트, 혹은 리더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려면 말했듯 상당한 돈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아마 전에도 썼을 것이다. 군대 있을 때 중대장이 돈 많은 집 자식들 다른 건 부럽지 않은데 피아노 연주하고 클래식 연주회 가고 하는 건 더럽게 부럽더라고 토로한 바 있었다. 그야말로 출세 좀 해보겠다고 악으로 깡으로 공부해서 사관학교 들어간 경우라 그렇다. 자기 어렸을 적에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고, 클래식을 이해하고 싶어도 들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살면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게 그렇게 아쉽고 서운하더라. 그러고보니 나도 어렸을 직 집에 오디오는 커녕 카세트플레이어도 없었다. 라디오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길가다 누가 버린 걸 주워다 고쳐 듣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TV역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마 낡은 흑백TV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내 색감이 이상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흑백TV에는 회색밖에 없었으니까.

 

돈 없이는 음악도 없는 것이다. 언젠가 KBS의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파인다이닝과 클래식 등 문화생활들에 대해 체험하는 내용을 방영했을 때 난리가 났던 이유였다. 난 돈없어서 저런 것 하고 싶어도 못한다. 난 시간이 부족해서 저런 말 그대로 저런 사치같은 건 누리지 못한다. 그리 해외여행을 많이들 나간다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당키나 한 말일까. 지금 나처럼 출근해서 돌아오면 죽은 듯 쓰러져 자다가 잠에서 깨면 다시 출근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에게 독서는 감히 누리지 못할 호사일 수 있는 것이다. 가정교사까지 고용해서 여러 분야들을 가르치고, 심지어 예술분야에 대해서까지 자기가 직접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도록 만든다. 예전이라고 책값이 쌌겠는가. 어떤 작품이 화제라고 그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려면 그만한 지적 기반과 기회와 여유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냥 내 감상이 어떻다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들 천박하고 무지한 노동자들과는 다르고, 저들의 위에서 저들을 위해 베풀며 저들을 위해 군림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동정은 베풀 수 있지만 저들이 자신들과 같아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능력이 되고 학창시절 성실하게 노력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지적으로 남들보다 뛰어나고 노력해 온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심지어 사법시험에도 통과하고 어렵다는 언론사 입사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투자하고 노력해 온 대가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 전에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저 울타리 밖이 아닌 울타리 안에서 저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대부가 사대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더이상 사대부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사대부로서 사대부답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대부들로부터 먼저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대부라면 당연히 사대부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문난적 아니던가. 저 새끼가 떠드는 소리는 사대부로서 해서는 안되는 헛소리 개소리다. 

 

정의당이 필사적으로 민주당을 거부하고 국민의힘에 붙으려 애쓰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학벌좋기로는 국민의힘과 정의당이었다. 하긴 학벌 좋고 집안에 돈까지 있는 이들에게 보수는 자신들의 계급에 맞고, 자칭 진보는 자신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는 것이다. 어째서 한겨레는 조선일보를 추종할 수밖에 없는가. 경향일보는 조중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째서 탈원전을 주장하다가도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니 탈원전을 범죄로 단정짓고, 김학의에 분노하다가도 김학의 출국금지를 수사한다니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인가. 엘리트지 않은가. 당연히 이 사회를 지배할 자격을 갖춘 명문대 출신에 심지어 어려운 시험에까지 당당히 합격한 이들인 것이다. 저들과 한 편이 되어야지 저들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된다. 그래서 검찰의 수사는 진실이고 법원의 판결은 정의다. 김학의의 성폭행이나 김병욱의 의혹에 비해 박원순의 의혹에 대해서만 저토록 강경한 이유도 저들이 속하고자 하는 그룹에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엘리트가 지배해야 한다. 좋은 대학 나오고 어려운 시험 합격해서 정당한 자격을 입증한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해야 한다. 그것은 검사고 판사다. 검사와 판사가 법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장서는 것은 자신들 언론이다. 자신들 정치인이다. 말 그대로 현대판 사대부들이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자신들은 그럴만한 자격을 스스로 이미 입증한 상태다. 물론 자격이 안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래서 그들도 필사적인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해야만 저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조선일보로부터 인정받고 국민의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정의당과 한겨레의 행보는 그것을 보여준다. 진중권 보라. 조선일보가 인정해주고 국민의힘이 인정해주니 어느때보다 기운이 뻗치지 않는가.

 

그래서 검찰과 법원에 대한 비판은 부당하다. 절대 검찰과 법원을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다. 저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국민의힘과 정의당을 동일시하고,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동일시한다. 심지어 KBS마저 조선일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맞춘다. 가짜뉴스를 내보내더라도 정부만 비판할 수 있으면 언론으로서 옳다. 자기들이 속한 집단의 논리에서 그것은 정의다. 그렇게 검찰과 법원과 언론과 정치권이 하나가 된다. 지식인사회까지 하나로 뭉친다. 손석희처럼 아예 투명하게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경우 또한 그에 대해 한 점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야 말로 정의이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 박근혜를 내쫓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그들이기에 더욱 의심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총궐기인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한 지배에 저항하는 저 무지렁이들을 진압해야 한다.

 

최근 여러 논란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인 것이다. 대중을 공격한다. 지지자들을 공격한다.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 또한 국민인 것이다. 유권자인 것이다. 정당한 권리를 가진 독립된 인격이며 존엄한 주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시한다. 당연하게 폄하한다. 원래 친노친문이 공격받아 온 이유였었다. 같은 민주당이어도 대중적 지지가 약했던 이른바 김한길류의 당권파들은 그다지 크게 공격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한겨레와 미디어오늘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상대로 막말을 쏟아낸 이유였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주당도 문제지만 저들이 저리 반역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힘을 실어주는 지지자들이 더 문제다. 저들을 꺾어야 한다. 자칭 진보가 대중을 오히려 적대하며 혐오와 증오의 감정마저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실 지지자들의 지지 없이 친노든 친문이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스스로가 엘리트이며 주류에 속해 있다 여기는 자칭진보나 수구와는 다른 부분이다. 오로지 그들만이 대중적 지지기반 위에 있다. 이미 엘리트가 존재하고 그를 지지하는 대중이 뒤따르는 구조가 아닌, 대중의 지지 위에 정치집단이 존재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공격한다. 정의당에서 노회찬이 비주류로 항상 겉돌던 이유였었다. 아마 이번 총선까지 살아있었다면 정의당에서 아예 축출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은 위험하다. 

 

그러니까 과연 공맹의 도리를 배우고 천하를 경영할 방도를 깨우친 사대부란 얼마나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들 또한 욕망의 주체다. 본능의 노예다. 정작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지지자들을 위한 정치를 부정하고, 지지자들에게 물어 펼치는 정책들을 부정한다. 의회민주주의도 부정한다. 자신들이 거부할 권리만 권리다. 자칭 진보의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일까.

 

바로 저들이 대중독재라 단정지은 반대편에 있는 엘리트주의란 실체인 것이다. 저들이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 중심의 정치에 적의를 드러내며 수뇌끼리 연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당원과 지지자를 위한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검찰과 언론과 지식인사회와 정당간의 연대와 합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당원이 아닌 국민의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민주주의인 터다. 자칭 진보가 주장한다. 자칭 보수의 주장을 받은 것이다. 이유를 이해한다. 너무 쉽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김학의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얼마나 나쁜 놈이고, 얼마나 못 된 짓을 했고, 그럼에도 어떻게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갔었는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김학의의 이름을 거론하고 검찰이 받아서 출국금지에 대해 수사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김학의를 감싸는 듯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비판여론이 크게 일어날 것인데. 자칫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자신감이다. 김학의 사건에 가장 크게 분노한 것이 누구였는가? 여성주의자들이다. 그 여성주의자들이 지금 누구 편에 있지?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그리 들불처럼 일어나던 여성주의자들이 국민의힘 김병욱의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학계든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차라리 성폭행을 하지 성추행을 해서는 안된다는 글까지 썼었겠는가. 심지어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다른 여성 검사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검찰 수뇌부와 연결까지 시도한 바 있었다. 그래서 김학의 출국금지시켰다고 특검하자 하고 검찰수사까지 하는 지금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자칭 진보언론이나 진보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정의당이 김학의에 대해 박원순 만큼 열심히 진심을 담아 논평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언론은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는 순간 감히 비판은 커녕 따라가는 보도에나 열심일 것이다. 김학의를 감히 불법적으로 사찰하고 출국금지시켰으니 피의자에 대한 심각한 인권유린이며 정권차원의 범죄다. 벌써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고 있는 모양이던데. 자칭 진보언론이 이 지경이니 진보도 아닌 JTBC나 KBS는 말할 것도 없다. 자살도 2차가해라던 그 KBS 앵커년은 성폭행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 듣고 싶다. 더구나 아무렇게든 기소만 하면 재판부에서 알아서 유죄 때려줄 텐데 결과까지 정해져 있다. 뭐가 두렵겠는가.

 

그래서 논란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1야당의 대표가 김학의를 감싸고, 검찰이 그를 받아 수사하는 이 어이없는 현실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는 주류언론이나 지식인 정치인조차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왜? 저들은 이미 하나니까. 김학의까지 다시 되살릴 정도로 저들은 이미 하나로 똘똘 뭉친 상태인 것이다. 문재인만 죽일 수 있으면 박근혜인들 못 풀어주겠는가. 김학의인들 못 풀어주겠는가. 얼마나 강한 의지인가. 개인적으로 이낙연에게 박근혜 사면을 건의한 인물로 진선미나 윤인순 등에게도 혐의를 두고 있는 중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 여성대통령 박근혜는 신앙 자체다.

 

하여튼 웃기는 것이다. 되도 않는 소리다. 당시 김학의가 몰래 출국하려던 걸 잡는 장면이 얼마나 급박하게 중요하게 모든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인권 운운하며 그를 특검하겠다 한다. 심지어 수사까지 벌써 시작한 상태다. 논란조차 되지 않는다. 반발이나 비판조차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같은 편이라고 여전히 저들에게 기대를 보이는 머저리들이 있다. 최강욱이나 김진애나 정신 차리라. 저들은 적이다. 버러지 구더기들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는 성폭행보다 성추행을 지목해서 그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호소했고, 여성주의자들 역시 야당 국회의원의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도 악랄하게 집착하며 반응하고 있다. 무슨 뜻이겠는가?

 

한 마디로 성추행하려면 그냥 성폭행하라는 소리다. 그쪽이 여성에게 피해도 적다. 피해자에게 충격도 덜하고 사회적으로 공분할 정도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같은 주장이고 의혹인데 성폭행과 성추행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응과 태도는. 더구나 성추행 의혹이 나온 사람은 반페미들마저 고개를 돌릴 정도로 평소 여성들을 위해 많은 노력과 헌신을 해 온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 사람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사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없다는 건 그만큼 성추행이 중대한 범죄라는 뜻이겠지.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감수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습게도 정신과 진료라는 것조차 작년 박원순 시장이 죽기 직전 몇 달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전부터 피해와 고통을 호소해 왔다는데 정신과 진료는 딱 박원순 시장을 고발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어느 영화가 떠오른다. 남편을 살해하려는 악녀가 자기 동생과 짜고 거짓으로 정신과상담을 받으며 정신과의사를 유혹해서 자신들의 범죄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런 판결조차도 자칭 진보들, 자칭 여성주의자들에게는 금과옥조다.

 

아무튼 돌아가는 꼬라지가 너무 웃기다. 판사가 그래도 상식인이다. 피해자가 성추행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근본원인은 성폭행이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라는 여자도 변호사도 여성주의자들도 만족하는 부분은 박원순 시장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성추행하느니 성폭행하라. 여성주의는 사람의 대가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새삼 확인한다.

장혜영이 민주당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은 것이 불과 얼마전이다. 제대로 수사기관이 나서서 수사를 한 것이 아니다. 해당 증거가 재판에 제출되어 판단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정신과의사가 수사관이 아니다. 정신과 진료라는 게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자기도 모르는 진실을 한 눈에 꿰뚫고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란 것이다. 내가 심상정한테 맞아서 밤에 잠이 안와요 하면 그런가보다 해야지 증거를 요구하겠는가? 증인을 데려오라 하겠는가? 더구나 성폭행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이란 성추행으로 인한 그것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사실을 확정한다?

 

정의당이 몰라서 저따위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 당원 가운데는 법조인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 신장식만 해도 현역 변호사다. 제대로 수사 한 번 않고, 당사자의 반론조차 없이, 더구나 제대로 구체적인 증거가 제시된 것도 전혀 없다. 정신과 진료 기록이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사자의 주장을 전제로 이루어진 심리치료가 그 증거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물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서울시장을 국민의힘에 넘겨야 한다. 서울시장 자리를 국민의힘에 넘겨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설마 정의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당선되는 헛된 된 꿈을 꾸고 있지는 않겠지. 그건 뇌가 구더기라는 소리고. 

 

아무튼 다음 대선을 위해서라도 국민의힘에 서울시장 자리를 넘겨주든, 아니면 정의당이 직접 서울시장을 당선시키는 헛된 꿈을 꾸고 있든 결국 알면서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죽은 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죽인 이의 명예를, 인격을, 그 삶과 업적들을 갈갈이 찢어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는 것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도 굶주려 시체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정의당이 그런 사정인 것은 아닐 것이다. 정의당 지지자들도 인정하는 바다. 일베며 조선일보며 국민의힘이 모두 정의당을 주목하며 하는 말마다 기사로 써주는 판에 뭐가 그리 굶주려서 시체까지 뜯어먹으려는가? 그래서 죽은 이를 이용해서 이루려는 정치적 목적이란 얼마나 그들이 말하는 진보와 정의의 가치에 부합하는가?

 

아직도 정의당의 선의를 주장하고 싶은 버러지 새끼가 있으면 한 번 변명해 보라. 판사가 수사관인가? 심리상담기록이 물적증거가 되는가? 그냥 주장만 있을 뿐 아직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박원순 시장의 재판도 아니었다. 반론도 없었고 하다못해 박원순 시장 측 증인들의 반대증언조차 듣지 못했다. 그런 판결도 아닌 판사의 주장을 냉큼 받아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정의당을, 그 지도부와 당원들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봐도 좋은 것인가. 태극기와 차이가 뭘까? 하긴 일베가 요즘 류호정 무지 좋아하는 모양이더만.

 

원래 저런 년놈들이었다. 자칭 진보란 원래 저런 주제들이었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 주제에 정의로운 척 진보적인 척 개혁적인 척은 혼자서 다 한다. 도대체 심상정은 대통령 탄핵하고 당시 미래통합당과 뭘 어쩌려는 것이었을까? 하긴 그래서 정의당에게 있어 노동존중 여성존중 인간존중의 정당은 국민의힘 뿐이었을 것이다. 김학의에도 김병욱에도 정의당은 한 번도 저와 같이 분노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박원순처럼 집요하게 그 시체까지 물어뜯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 어디에 진보와 정의가 있을까? 벌레는 벌레일 뿐. 딱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구더기들. 역겨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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