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만나지 못해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면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세상을 살피고, 우연히 때를 만나 관직에 나가면 관리로써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며 천하를 경영할 뜻을 펼친다. 사대부란 단어의 뜻이다.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초야의 선비가 되는 것이고, 초야의 선비가 관직을 얻으면 관리인 대부가 되는 것이다. 선비가 관리가 되고, 관리는 선비가 된다. 그러면 왜 선비인가?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 익힌 당대의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느 백성들보다야 많이 배워서 알고 있으니 자격이 된다.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지렁이 백성들보다야 어려운 경전도 줄줄 외고 제법 문장도 지을 줄 아는 선비들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가장 하찮은 선비조차 공맹을 알고, 예의를 알고, 천하를 경영하는 방법을 배워 알고 있을 것 아닌가. 본능이 시키는대로 해뜨면 나가 일하고, 해지면 들어와 잠드는 일상을 사는 백성들은 매순간 선비로서 엄격한 예법을 지키며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유럽의 귀족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을 권력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봉건영주로서 가지고 있는 영지 만큼 무력을 동원할 수 있고, 그 무력이 곧 자신이 가진 신분과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시대가 바뀌고 전처럼 마음대로 무력을 과시할 수 없게 되면서 자신이 가진 부를 기반으로 교양이라는 것을 앞세우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비싼 돈을 들여 저명한 교사를 초빙해서 다양한 교육을 시키고 그를 통해 다른 신분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명한 학자나 예술가들을 초빙하거나 혹은 후원하면서 그들을 자신들의 권위를 돋보이는 배경으로 삼기도 했었다. 근세 유럽의 학술과 문화와 예술의 발전은 바로 이런 귀족들의 허영과 사치의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방식을 본받아 자기것으로 만든 것이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부르주아들이었다.

 

당연히 교양과 품위를 갖춘 집안이라면 예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최신 학술동향에 밝아야 하며, 시사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이들만이 자격을 부여받고 있기도 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예술을 모르면 그것은 천박한 것이다. 문학과 철학과 과학에 대해 토론할 수 없으면 그저 탐욕스런 돈벌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가 속한 나라가 공동체가 중요한 문제와 맞닥뜨린 상태에서 책임있는 위치에서 한 마디 의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일까. 바로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서구권의 엘리트, 혹은 리더라 불리는 이들의 특징이 여기서 비롯된다.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과시할 수 있는 자격을 보여줄 수 있어야 그들은 엘리트, 혹은 리더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려면 말했듯 상당한 돈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아마 전에도 썼을 것이다. 군대 있을 때 중대장이 돈 많은 집 자식들 다른 건 부럽지 않은데 피아노 연주하고 클래식 연주회 가고 하는 건 더럽게 부럽더라고 토로한 바 있었다. 그야말로 출세 좀 해보겠다고 악으로 깡으로 공부해서 사관학교 들어간 경우라 그렇다. 자기 어렸을 적에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고, 클래식을 이해하고 싶어도 들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살면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게 그렇게 아쉽고 서운하더라. 그러고보니 나도 어렸을 직 집에 오디오는 커녕 카세트플레이어도 없었다. 라디오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길가다 누가 버린 걸 주워다 고쳐 듣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TV역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마 낡은 흑백TV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내 색감이 이상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흑백TV에는 회색밖에 없었으니까.

 

돈 없이는 음악도 없는 것이다. 언젠가 KBS의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파인다이닝과 클래식 등 문화생활들에 대해 체험하는 내용을 방영했을 때 난리가 났던 이유였다. 난 돈없어서 저런 것 하고 싶어도 못한다. 난 시간이 부족해서 저런 말 그대로 저런 사치같은 건 누리지 못한다. 그리 해외여행을 많이들 나간다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당키나 한 말일까. 지금 나처럼 출근해서 돌아오면 죽은 듯 쓰러져 자다가 잠에서 깨면 다시 출근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에게 독서는 감히 누리지 못할 호사일 수 있는 것이다. 가정교사까지 고용해서 여러 분야들을 가르치고, 심지어 예술분야에 대해서까지 자기가 직접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도록 만든다. 예전이라고 책값이 쌌겠는가. 어떤 작품이 화제라고 그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려면 그만한 지적 기반과 기회와 여유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냥 내 감상이 어떻다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들 천박하고 무지한 노동자들과는 다르고, 저들의 위에서 저들을 위해 베풀며 저들을 위해 군림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동정은 베풀 수 있지만 저들이 자신들과 같아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능력이 되고 학창시절 성실하게 노력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지적으로 남들보다 뛰어나고 노력해 온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심지어 사법시험에도 통과하고 어렵다는 언론사 입사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투자하고 노력해 온 대가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 전에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저 울타리 밖이 아닌 울타리 안에서 저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대부가 사대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더이상 사대부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사대부로서 사대부답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대부들로부터 먼저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대부라면 당연히 사대부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문난적 아니던가. 저 새끼가 떠드는 소리는 사대부로서 해서는 안되는 헛소리 개소리다. 

 

정의당이 필사적으로 민주당을 거부하고 국민의힘에 붙으려 애쓰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학벌좋기로는 국민의힘과 정의당이었다. 하긴 학벌 좋고 집안에 돈까지 있는 이들에게 보수는 자신들의 계급에 맞고, 자칭 진보는 자신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는 것이다. 어째서 한겨레는 조선일보를 추종할 수밖에 없는가. 경향일보는 조중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째서 탈원전을 주장하다가도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니 탈원전을 범죄로 단정짓고, 김학의에 분노하다가도 김학의 출국금지를 수사한다니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인가. 엘리트지 않은가. 당연히 이 사회를 지배할 자격을 갖춘 명문대 출신에 심지어 어려운 시험에까지 당당히 합격한 이들인 것이다. 저들과 한 편이 되어야지 저들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된다. 그래서 검찰의 수사는 진실이고 법원의 판결은 정의다. 김학의의 성폭행이나 김병욱의 의혹에 비해 박원순의 의혹에 대해서만 저토록 강경한 이유도 저들이 속하고자 하는 그룹에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엘리트가 지배해야 한다. 좋은 대학 나오고 어려운 시험 합격해서 정당한 자격을 입증한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해야 한다. 그것은 검사고 판사다. 검사와 판사가 법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장서는 것은 자신들 언론이다. 자신들 정치인이다. 말 그대로 현대판 사대부들이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자신들은 그럴만한 자격을 스스로 이미 입증한 상태다. 물론 자격이 안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래서 그들도 필사적인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해야만 저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조선일보로부터 인정받고 국민의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정의당과 한겨레의 행보는 그것을 보여준다. 진중권 보라. 조선일보가 인정해주고 국민의힘이 인정해주니 어느때보다 기운이 뻗치지 않는가.

 

그래서 검찰과 법원에 대한 비판은 부당하다. 절대 검찰과 법원을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다. 저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국민의힘과 정의당을 동일시하고,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동일시한다. 심지어 KBS마저 조선일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맞춘다. 가짜뉴스를 내보내더라도 정부만 비판할 수 있으면 언론으로서 옳다. 자기들이 속한 집단의 논리에서 그것은 정의다. 그렇게 검찰과 법원과 언론과 정치권이 하나가 된다. 지식인사회까지 하나로 뭉친다. 손석희처럼 아예 투명하게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경우 또한 그에 대해 한 점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야 말로 정의이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 박근혜를 내쫓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그들이기에 더욱 의심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총궐기인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한 지배에 저항하는 저 무지렁이들을 진압해야 한다.

 

최근 여러 논란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인 것이다. 대중을 공격한다. 지지자들을 공격한다.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 또한 국민인 것이다. 유권자인 것이다. 정당한 권리를 가진 독립된 인격이며 존엄한 주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시한다. 당연하게 폄하한다. 원래 친노친문이 공격받아 온 이유였었다. 같은 민주당이어도 대중적 지지가 약했던 이른바 김한길류의 당권파들은 그다지 크게 공격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한겨레와 미디어오늘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상대로 막말을 쏟아낸 이유였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주당도 문제지만 저들이 저리 반역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힘을 실어주는 지지자들이 더 문제다. 저들을 꺾어야 한다. 자칭 진보가 대중을 오히려 적대하며 혐오와 증오의 감정마저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실 지지자들의 지지 없이 친노든 친문이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스스로가 엘리트이며 주류에 속해 있다 여기는 자칭진보나 수구와는 다른 부분이다. 오로지 그들만이 대중적 지지기반 위에 있다. 이미 엘리트가 존재하고 그를 지지하는 대중이 뒤따르는 구조가 아닌, 대중의 지지 위에 정치집단이 존재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공격한다. 정의당에서 노회찬이 비주류로 항상 겉돌던 이유였었다. 아마 이번 총선까지 살아있었다면 정의당에서 아예 축출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은 위험하다. 

 

그러니까 과연 공맹의 도리를 배우고 천하를 경영할 방도를 깨우친 사대부란 얼마나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들 또한 욕망의 주체다. 본능의 노예다. 정작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지지자들을 위한 정치를 부정하고, 지지자들에게 물어 펼치는 정책들을 부정한다. 의회민주주의도 부정한다. 자신들이 거부할 권리만 권리다. 자칭 진보의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일까.

 

바로 저들이 대중독재라 단정지은 반대편에 있는 엘리트주의란 실체인 것이다. 저들이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 중심의 정치에 적의를 드러내며 수뇌끼리 연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당원과 지지자를 위한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검찰과 언론과 지식인사회와 정당간의 연대와 합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당원이 아닌 국민의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민주주의인 터다. 자칭 진보가 주장한다. 자칭 보수의 주장을 받은 것이다. 이유를 이해한다. 너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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