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왕조에서 전제군주의 지근거리에 있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밀실에서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제왕조란 자체가 전제군주 개인의 사유재산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중세를 특징짓는 봉건제부터가 원래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신하들에게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나누어주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분봉이 이루어졌을 때도 고려와 조선의 전시과나 과전법과 다르지 않게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에 대해서만 당대에 한정되어 지급되고 있었다. 상속세의 기원도 그래서 당시 이미 지급받은 봉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영주의 자손이나 가신들에 의해 영지의 상속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바치던 세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들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찬가지 이유로 만일 자신의 봉신에게 후손이 없어 영지를 상속할 수 없게 되면 원칙적으로 영지는 다시 주군의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 프랑스에 비해 왕권이 강했던 영국의 경우는 그래서 지금까지도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라고 하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단지 개인은 국왕의 소유 가운데 그 사용권만을 구입하여 거래하거나 실제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세금에 대해서도 심지어 어느 유럽의 군주는 단지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로 세금을 부과하여 거두기도 했을 정도로 공적재정과 사유재산의 경계마저 모호했었다. 아니 모호하다는 것도 그나마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추어진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그냥 나라의 재정이 개인의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토지가 국왕의 소유이듯 모든 인민 역시 국왕의 소유다. 그래서 요역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징발하여 노동력으로 부리고 전쟁에서는 병사로 써먹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금도 국왕이 필요해서 거두어야 한다면 거두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다 쓰는가도 오로지 국왕 개인이 결정한다. 중국 명나라 말기 조정의 재정수입은 고작 400만냥이었는데 그 2배인 800만냥을 자기 무덤을 만드는데 써버린 만력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부족한 세금을 더 거둬보겠다고 광세를 신설하여 민란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라의 모든 토지와 백성과 재정이 국왕 개인의 소유라면 나라의 관리들이란 모두 국왕 개인의 종복에 불과하다. 실제 전제적인 왕권을 휘둘렀던 중국 명나라의 초대황제 홍무제나 이후의 황제들, 이어진 청나라의 옹정제 등은 모두가 나라의 관리들을 마치 개인의 종복처럼 철저히 억압하며 일방적으로 부리려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나라의 공적 역할과 책임을 맡는 관리와 개인적인 일들을 돕는 고용인 사이의 경계가 사실상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나라 일도 살피면서 왕 개인의 일도 살피고, 왕 개인의 일을 해결하면서 함께 나라의 중요한 일들도 해결한다. 물론 방점은 왕 개인에게 찍힌다. 왕의 신하가 나라의 신하이고, 왕의 측근이 나라의 중심인물이고, 왕의 의지가 곧 나라의 법이고 제도고 윤리가 된다. 그러므로 해당 관리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어떤 관직에 있는가가 아니라 과연 왕과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왕 개인의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는가에 따라 그 신분과 지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공식적인 신분이나 지위가 높아도 어차피 왕조국가에서 존엄이란 왕 한 사람 뿐이기에 나머지는 단지 신하로써 왕의 의지 아래 종속되어 존재한다. 비천한 노예를 귀족으로 만들 수도 있고, 황실의 종친을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다고 왕의 말 한 마디에 일족이 모두 몰살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지와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것이 왕의 측근들인 것이다. 일개 환관이 조정의 대신들마저 굽어보며 그들을 손가락 하나로 부리는 상황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왕과의 거리가 개인의 위치까지 결정한다.


말 그대로다. 어차피 국가란 국왕의 개인재산과 같다. 그래서 단지 국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자에게 왕위와 더불어 국가의 모든 것이 상속되기도 하는 것이다. 공적으로 임명된 관리나 국왕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측근이나 그 차이는 사실상 없다시피 한 것이다. 오히려 왕과 관련된 일들을 주로 처리하기에 왕과 가까이 있는 측근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왕과의 거리가 권력의 크기를 결정한다. 물론 민죽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다. 모든 법과 정책은 공식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쳐 모든 것이 공개된 채 투명하게 결정되고 집행된다. 국가원수란 국가를 사유화한 소유주가 아니다. 단지 국가적인 책임을 국민들로부터 일시적으로 위임받은 고용인에 불과하다. 그 모든 행동들마저 국민이 합의한 법에 의해 강제된다. 국가원수와 가깝다는 이유로 아무 직책도 없는 개인에게 재벌과 검찰과 유력인사들이 고개를 숙이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결코 있어서도 안된다.


무슨 뜻이겠는가. 대한민국에 보수와 진보는 국가의 사유화와 그에 대한 반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이든 재벌이든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산은 단지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쟁취한 사유물일 뿐이다. 자신도 그처럼 크고 많은 권력과 재산을 자기 실력으로 한 번 가져보고 싶다. 자기 소유인 만큼 마음껏 자기를 위해 사용한다. 비리를 저지르고, 전횡과 부정을 일삼아도 그만한 위치에 있기에. 높은 자리에 있는 만큼 오히려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더 무능한 것이다. 대통령이 측근 쯤 두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원래 정치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답답한 이유다. 아무 직책도 없는 개인들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체계마저 무시한 채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꼼짝없이 그들에 놀아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었다. 지난 대선은. 패배가 바로 그 이유다. 우습게도.

최소한 조선에서는 환관으로 인한 폐단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왕을 비롯 왕실의 주요인사들을 항상 가까이서 모셔야 했던 특수성으로 인해 권력과 유착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내시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딸을 주어 인척을 맺기까지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환관 몇몇 의 전횡과 부패로 인해 나라가 절딴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었다. 조선이 가진 몇 가지 장점 가운데 하나였다.


원래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로 결심하며 목표로 삼았던 것이 바로 성리학의 이상이 실현되는 이상국가의 구현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상이란 사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공론의 정치였다. 언로를 열어 널리 선비들의 의견을 구하고, 어진 군왕은 현명한 신하들을 찾아내어 등용한 뒤 모든 것을 그들에 물어 결정한다.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도 공론이라면 참고 들어야 하며, 아무리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공론이 그렇다면 따라야 한다. 현실적으로 언제나 그러기란 무리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원칙만큼은 그런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처럼 왕이 소수의 측근들과만 모여서 의논하여 무언가를 아무도 모르게 결정하고 집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조선역사에서 왕이 사관까지 물리고 대신과 독대한 경우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도 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논의는 공개된 정청이나 국와의 집무실에서 승지와 사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그 모든 내용은 문서로 기록되고 있었다. 단지 왕과 가깝다는 이유로 국가적인 중요한 결정에 자의로 개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사대부들끼리 항상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했기에 아무리 왕의 신임을 받고 높은 관직에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어도 법과 원칙을 어기고 전횡을 일삼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가능해진 것은 역시나 조선에서도 왕권이 강해지며 신하들이 왕을 중심으로 줄서기를 시작한 영정조 이후의 일이었다.


말 그대로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거의 대부분 황제가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황제의 명령이 곧 법이었다. 황제의 뜻에 의해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이 모두 죽어나갔다. 아무리 그 말하는 내용이 옳고 의도가 바르더라도 황제의 의사를 거스르면 그 일족까지 모두 몰살당해야 했었다. 법이 있어도 유명무실했고, 대신들이 있어도 국정은 황제와 측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 역대 성군이라 일컬어지던 군주들이라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조차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지적들에 항상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구축한 명의 홍무제 주원장이나 청의 강희제와 옹정제 역시 뛰어났지만 독재적인 군주들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뛰어났던 자신들에 맞춘 그들의 시스템은 결국 명과 청을 쇠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왕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을 비판하거나 조언할 수 있는 수단도 통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마나 청은 역대 중국의 역사를 거울삼아 환관의 폐해를 적극 경계한 탓에 폐단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황권이 강한 만큼 스스로 환관들에 둘러싸여 고립되기 일쑤였던 중국 거의 모든 왕조에서는 - 특히 홍무제로 인해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명왕조에서는 환관이 차라리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환관이 하는 말은 그대로 황제에게 전해졌고, 환관 이외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환관을 거쳐 황제에게 전해졌다. 대신들의 비판보다 오히려 환관들의 말을 믿었다. 대신들의 지적이나 조언보다 환관들이 들려주는 듣기 좋은 말들만을 들으려 했다. 그런데도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수단도 통로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제가 곧 법이었고 그 법은 환관을 통해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환관들의 보필을 받으며 그들에 의해 훈육된다. 환관이 오히려 역대 중국의 황제들에게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부모 대신이다시피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였으며, 세상을 보고 듣는 창구이기도 했다. 중국 후한에서 황제들이 환관을 중용했던 것도 그남 외척들에 비해 믿을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자기 세력이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환관의 권력이란 것도 황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물려줄 자식도 없는 환관이라면 최소한 찬탈을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토목보에서 그 치욕을 겪고서도 정통제가 환관 왕진을 그리워하여 그를 위한 제사를 명령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권력의 고독을 잠시나마 환관을 통해 잊을 수 있다. 그런 이점에 비하면 환관이 저지르는 약간의 비행과 전횡은 그냥 용인할 수준이다. 황제가 괜찮다면 역시 괜찮은 것이다.


굳이 환관을 예로 들었지만 환관이 아니더라도 그런 예는 많이 있다. 고려 왕실에서 내시란 조선에서와는 달리 왕의 총애를 받는 개인 시위들이었다. 왕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친위대였기에 왕권의 부침에 따라 이들의 권력 또한 요동하고 있었다. 조선말 고종 역시 감시하고 견제할 세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명성황후가 한낱 무당과 점장이들에 이끌러 휘둘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비공식적인 개인의 친분과 관계가 공식적인 구조와 권력에 우선한다. 그래서 모든 논의와 결정이 공개된 자리에서 이루어지도록 아예 법으로 못박아놨던 것이 조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에서조차 감시와 견제를 위한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경우 같은 문제가 발생했었고 보면 이미 권력의 구조적인 문제라 보아도 옳을 것이다.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감시도 견제도 불가능한 절대권력은 관계를 이용한 비공식적인 권력을 출현시키고 만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는 신문 정치면을 보도록.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 집무실이든 관저든 어디든 대통령과 관계된 일이라면 모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정과 관련해서 하는 모든 말들은 기록되고 공개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모든 말과 행동이 언론과 국회의 감시를 받으며 비판받고 견제되어야 한다. 불가능한 꿈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인데. 역사는 때때로 거꾸로 흐르기도 한다. 비극이다.

엄밀히 말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이미 조선에 의병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이항복 등 당시 조선의 대신들이 의병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당장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해 1592년 7월에 유곡찰방에 임명되었고, 1차 진주성 싸움 당시 김시민을 외곽에서 도왔던 10월에는 조방장, 이듬해에는 무려 성주목사까지 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홍의장군 곽재우의 군대는 그해 7월부터 관리가 이끄는 관군이었다.


원래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로 임명받아 경상우도로 내려갔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무너진 행정조직을 복구한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무하고, 관리가 없는 곳은 관리를 임명하면서,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관군에 편입하도록 했었다. 흔히 아는 사실과는 달리 그래서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에 경상우도는 빠르게 수복되어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진주성 싸움을 지휘한 김시민에게 목사를 제수하도록 한 것도 김성일이고 보면 그 공과에 대해서는 따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과연 의병이란 그저 민초들에 지나지 않았는가. 갑작스럽게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며 경상우수사 원균과 좌수사 박홍은 싸우지도 않고 배와 물자를 불태우고 바로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남은 관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승방략에 의해 이일이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도 미처 관군이 모이기도 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온 탓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었다. 그러면 그때도 남은 관군들은 모두 일본군에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칠천량 싸움에서도 정작 대부분의 조선수군은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모든 배가 불타고 수군이 죽어나갔으면 명량에서의 싸움 이후 그렇게 빨리 조선수군이 재건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조선의 대단한 점이다. 군대는 흩어졌지만 병사들은 남았다. 지휘관마저 도망친 뒤에도 병사들은 남아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병사들의 싸움을 대신 지휘했던 것이 이른바 의병장들이었던 것이다. 군사경험이라고는 없는 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군사지식도 일천한 양반출신 의병장들을 도와 전술을 구상하고 실제 병력을 운용했다. 싸움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병사들은 이후 조선의 행정조직이 복구되자 바로 관군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지휘광이 죽거나 도망치고 주위의 고을과 백성마저 적이 온통 점령한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관군으로, 그 다음에는 의병으로, 다시 관군으로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조선을 폄훼하려는 시도가 굳이 그들을 관군과 분리해서 의병이라 이름짓게 만들었을 뿐.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 실제 싸움에서도 지휘관이 혼자서 모든 궁리를 끝내고 병사들에게 이리하라 저리하라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일까. 삼국지의 조인이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쳐들어왔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혼자서 싸움을 잘해서 그 많은 전공을 세웠던 것이었을까. 물론 지휘관 자신이 뛰어나서 참모진마저 주도하여 이끄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도 지휘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갖춘 참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판단과 결정은 지휘관이 내리더라도 그를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휘하에 있는 참모들이었던 것이다. 의병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그 이름을 의병장들이 대신하고 있을 뿐.


그러면 다시 어째서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의병의 활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가. 오히려 대부분의 의병들이 관군으로 편입된 뒤에도 관직을 받지 못하고 의병으로 남아 있는 경우란 어떤 경우이겠는가. 이미 조정의 명령을 받기를 거부하거나 스스로 세력을 이루어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는 양반이기보다 양인 이하의 신분인 경우가 많았을 테고. 개인적으로 이런 의병을 소재로 드라마를 한 번 만들어 보았으면 싶다. 비천한 신분으로 임금도 조정도 믿지 못하여 스스로 무장하고 일어섰으나 결국 반역자로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에 대해서.


의병의 활약은 전쟁이 시작되고 초기 몇 달 간 잠깐 집중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문부도 의병이었다. 엄연히 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까지 있던 무관이었지만 함경도가 모두 일본군의 지배아래 들어가며 군도 행정조직도 사라지자 의병이 되어 비공식적인 투쟁을 주도했다. 당시 정문부가 세운 업적들이 나중에야 알려지게 된 이유였다. 모이면 관군이고 흩어지면 의병이다. 초유의 국난에도 조선을 지탱한 진짜 힘이었다. 

어째서 19세기 정조가 죽고 바로 조선의 왕권은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는 것일까? 어려서 즉위했다고는 하지만 김조순이라는 든든한 후견인도 있고 순조 자신도 그렇게 무능하기까지 한 임금은 아니었다. 물론 왕으로서 무능하다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실제로 현실에 구현할 역량이 부족한 것을 뜻한다. 아무리 영민하고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현실로 옮기지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다른 이야기다.


아무튼 그러나 정작 진실을 이해하자면 먼저 어떻게 숙종의 재위 이후 영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그토록 완벽하게 신하들을 통제하고 제압할 수 있었는가. 단종 이후 최초라는 숙종의 정통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단종은 그러면 정통성이 부족해서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까지 당했겠는가. 바로 조선이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고 그것을 중단하기까지의 사정과도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당시 조선의 재정수입 가운데 상당부분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에서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천하에 편입되지 않은 이상 일본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도, 더구나 무역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류큐를 사실상 지배아래 두고 류큐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과 무역을 하기는 했지만 전국이 통일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더욱 커지기 시작한 일본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머지를 어디선가는 사들여야 했다.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을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자주 보내어 적극적으로 조공무역을 해왔거니와, 더구나 청이 건국되고 책문에서 제한적이지만 사무역도 허용되고 있었다. 조선의 주력수출품인 인삼과 쇠가죽 역시 일본에서 무척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이 지불한 것이 바로 은. 유황도 구리도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중국에 물품을 구입하고 결제할 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아는 바와 같이 중국이 은본위제를 채택하며 동아시아 무역의 기본결제수단은 은이 되었고, 그리고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기까지 무역에 사용된 은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나오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사인들이 일찍부터 일본을 찾았던 이유였다. 그 은이 조선으로도 흘러든 것이었다. 오사카성 여름싸움도 끝나고 일본의 정국이 안정된대다 청과의 전쟁도 끝나서 중국과의 국경도 정상을 찾아가면서 무역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딱 효종, 그리고 숙종 연간이다. 얼추 조선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러면 19세기 조선의 왕권이 추락할 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무엇보다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은으로 결제해야 하는데 일찍부터 은광을 개발하여 채굴해 왔던 탓에 일본의 은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미 은의 부족으로 결제에 사용한 은의 품질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제수단의 부족으로 인해 더이상 조선으로부터 물품을 사들이지 못하며 일본 내부에서 대체품을 생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삼이었다. 조선의 인삼과는 효능이 전혀 달랐음에도 일본에서도 인삼의 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일본에 대한 가장 주된 수출품은 면화였었다. 팩추얼드라마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면화재배장면을 묘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선중기에는 일본에 수출한다고 너도나도 면직물염색에 뛰어드느라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워낙 조선의 재정 가운데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아무리 전세를 많이 걷어봐야 1할도 안되는 세율로 무려 생산의 절반을 지대로 거둬가는 사대부들을 경제력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역에 대한 세금은 공식적으로 오로지 조정만이 거둘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전세의 비중이 커지면 경제력에서 조정과 왕실이 사대부를 압도하기란 어려워진다. 반대로 전세보다 무역이나 상거래로 인한 세수의 비중이 높아진다면 조정과 왕실의 재정은 사대부의 그것을 앞설 수 있다. 딱 그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에서 조선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는 그로 인한 세금만으로 조선조정은 어느때보다 풍족한 안정적인 재정을 꾸릴 수 있었고 이는 곧 조정과 왕실의 힘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무역과 상거래가 위축되고 전세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재정은 악화되며 조정과 왕실의 권위는 그만큼 추락하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모든 힘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치권력이라는 것도 경제력과 비례하기 쉬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이 그저 백성들만을 위해 그리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그런 이유로 조선에서도 중상주의자와 중농주의자 사이에 서로 추구하는 정치지향이나 철학이 서로 달랐었다. 중농주의자들이야 당연히 향촌경제를 장악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자치에 더 무게를 두었었다. 반면 주로 조정이 있는 한양에 거주하고 있던 중상주의자들은 조정과 전제적인 군주가 주도하는 개혁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같은 경향은 갑신정변까지 조선내 개화파의 주된 입장이 된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은 지주의 것이지 나라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인이 장사를 해서 거두는 이익은 오로지 나라만이 거둘 수 있다. 부국강병은 상업과 무역에서 비로소 나온다.


그저 드라마에서처럼 국왕, 혹은 세자가 권신과 말싸움 몇 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많은 궁인들에게 녹봉도 주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추가로 도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대신들에게도 충분한 녹봉이 지급될 수 있어야 한다. 병사들을 굶기고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먹이고 나야 충성심도 기대할 수 있다. 조선의 재정은 그래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왕이 힘을 쓸 수 없다. 그런 이유다.

연의는 물론 정사를 읽더라도 주유의 뒤를 이어 손오의 도독이 된 노숙은 바보같을 정도로 유비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도 가장 먼저 강하의 유비를 찾아갔고, 근거 없이 떠돌던 유비가 형주를 빌려달라 할 때도 손권을 설득해서 그러도록 했었으며, 이후 유비가 촉을 차지하고도 형주를 돌려주지 않았을 때도 답답할 정도로 인내하며 말로써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원래 노숙이 유비라는 인물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일부러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정사를 보더라도 노숙은 자신의 주군 손권을 새로운 중국의 황제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손권에게 한왕조의 부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장강유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뒤 조조와 맞서야 한다고 조언했고, 적벽에서 승리한 뒤에도 손권이 직접 말에서 내려 노숙을 맞는 최상의 예우로써 그를 대했을 때도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 수레를 보내 예우해야 비로소 자신의 공적에 보답했다 할 수 있다 대답한 바 있었다. 다시 말해 노숙의 목표는 일개 군벌이 아닌 장차 중국을 둘로 나눈 황조의 황제로 손권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과정에서 손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북을 평정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며 손권에게 항복을 권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노숙이 앞장서서 유비와의 동맹을 추진했던 것도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 명분상 아직까지 중국의 천하는 한의 천하였다. 한의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고 조조는 그 황제의 명령을 받드는 승상의 신분이었다. 조조가 항복을 요구했던 것도 자신이 아닌 황제에게 신하로써 순종하라 명령을 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손권이 조조의 항복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손권의 세력은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반역집단이 되어 버린다. 조조의 항복권고를 받고 손오의 진영이 크게 분열했던 진짜 이유였다. 이대로 명분을 거스르면서까지 조조에 대항하며 독립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명분을 쫓아 조조가 아닌 황제에게 항복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을 것인가. 결국 문제는 명분이었다. 명분상 신하인 손권이 황제의 명령을 받드는 한왕실의 승상 조조와 맞서도 괜찮은 것인가.


그래서 유비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일단 유비는 한실의 종친이었다. 촌수가 조금 멀기는 하지만 직접 황제로부터 황숙이라 불리기까지 했던 천하의 명사 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유비에게는 오래전 동승과 함께 황제로부터 받았던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는 밀조가 있었다. 황실의 종친인 유비가 황제의 밀조를 받아 역적 조조를 토벌하려 한다. 황제라고 하는 결코 거역해서는 안되는 명분을 앞세워 압박해오는 조조에게 오히려 역공까지 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수단이 바로 유비 자신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손오가 조조에 대항하는 것은 황제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역적 조조에게 억류되어 있는 황제를 구하기 위한 충심의 발현이다. 장차 노숙의 구상대로 손권이 장강 일대를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조조와 자웅을 겨루려 할 때 자신들의 행도을 정당화시킬 명분 역시 한실의 종친이며 충신인 유비라고 하는 개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노숙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손오가 멸망하기까지 손오의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정작 장강 건너 중원에까지 야심을 품었던 이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원래 손오라는 세력 자체가 한왕조를 등지고 남하한 토착세력과 손가와의 결합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토착세력의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들의 기득권만 보장받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저 더 많은 땅과 백성과 물자만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손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유비라는 명분 없이도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조조와 겨루고 자신들의 영토를 지켜내겠다. 손오가 오히려 촉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고서도 번번히 위와의 전쟁에서 패퇴한 이유였다.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므로 필사적이지만, 정작 조위의 영토로 공격해 갔을 때는 별다른 명분이 없었다. 그저 남의 땅을 빼앗는 것일 뿐 반드시 그래야 하는 필연도 당위도 없었다. 동기가 부족하면 그만큼 의욕도 줄어든다.


노숙이 죽고 손권이 노숙이 유비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이유였다. 유비가 없어도 되었다. 유비 없이도 형주와 강동을, 자신들의 영역을 지킬 수 있었다. 장강을 넘어 여러차례 군사적인 시도를 했음에도 번번히 좌절한 것은 자신의 실패이므로 철저히 묻어둔다. 그에 반해 유비라고 하는 명분을 철저히 계승했던 촉한은 제갈량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조위와의 국경을 압박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정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도 강유는 독자적으로 군을 이끌고 여러차례 조위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저들은 한을 배신한 역적이고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한을 계승하고 부흥시킬 충신들이다. 유비와 제갈량의 선정에 감복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싸울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 가장 컸다. 의미없지 않다. 당장 싸우다 죽더라도 가치있게 죽는 것이다. 때로 사람에게는 그런 바보같은 이유들도 필요한 것이다.


실제 기록에도 노숙은 매우 강단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익양대치 당시 보여준 우유부단한 모습과는 배치되는 인상이었다. 당연했다. 그것이야 말로 노숙의 단호한 결단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유비가 필요하기에 양보한다. 손오와 주군 손권을 위해 유비와의 동맹이 필요하기에 불편해도 불쾌해도 과감히 인내한다. 그리고 노숙이 사망하고 인내심이 사라진 손권에 의해 손유동맹이 깨지면서 노숙의 원대한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중원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그저 변두리 군벌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꿈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조선의 경제가 무려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크게 발전하지 못한 첫째 이유로 나의 경우 노비를 꼽는다. 이미 같은 시대 명과 일본에는 인신이 구속된 채 공짜로 부려지는 노예와 같은 존재는 공식적으로 사라진 뒤였다. 신분적으로는 예속되었지만 기본적인 급여 정도는 지급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예속인을 부려 누리는 지배층의 사치는 곧 예속된 하층민들의 경제활동을 의미했다.


조선이 노비제를 폐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노동력이 유일한 수단이던 전근대사회에서 지배신분이 사치를 누리려 하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사실 그것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그래서 농노가 있었다. 엄격히 주거와 직업, 여행의 자유가 통제되는 영민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그를 이용해 부를 만들고 일상의 사치를 유지하는가, 그것이 바로 가진 바 권력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전근대 일본사회에서 봉건영주가 누리는 권력을 측정하는 단위인 석고(고쿠)도 그것을 뜻했다. 고쿠란 자신이 소유한 영지에서 나오는 생산량이고, 생산량은 곧 그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뜻한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만한 사람들이 복종하며 일하고 있다.


조선과 이들 나라들과의 차이는 단 하나다. 일정한 영지를 항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가, 아닌가. 중세의 유럽, 혹은 근세의 동유럽의 농노들이나 일본의 농민들은 사람이 아닌 땅에 예속되었다. 오다의 소유가 아니라 오와리 영주의 소유였다. 누군가 사이토를 몰아내고 기후성을 차지한다면 마찬가지로 미노의 농민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곧 토지에 예속된 노동력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모든 토지를 국왕의 소유로 간주했던 조선에서 지배층의 토지소유란 매우 불안정한 한시적 권리에 불과했다. 특히 조선초기 과전법은 지배층의 토지소유를 한정시키고 있었다. 더욱 노동력을 직접 자기 개인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토지의 소유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노비는 언제나 지배층 가문의 소유여야 했다.


문제는 그런 결과 생산에 종사해야 할 노동력을 따로 불러 부리는 것을 비용으로 인식했던 다른 문화권에 비해 직접적으로 예속된 노동력을 공짜로 여기는 인식이 강해졌다는 것일 게다. 노동력은 영지에 속해 있으니 따라서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그들을 불러 부리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그것부터 생산의 감소라는 비용으로 지불된다. 그에 비해 사람만을 소유한다. 사람만을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부린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신분에 따른 일방적인 권력관계와 명령 뿐이다. 더이상의 어떤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고 않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어째서 조선은 후기까지 제대로 화폐도 유통되지 않고 상공업 역시 정체되어 있었는가. 돈을 벌고 쓰는 주체들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한 조선후기만 해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유민들이 임금노동자로 편입되며 도시경제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일을 해서 임금을 받고 다시 그 임금을 생활을 위한 소비에 쓴다. 임금노동자들이 쓰는 그 돈을 바라고 새로운 노동력이 유입되며 다양한 직업이 생겨나고 물자의 유통 역시 활발해진다.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나온다. 바로 그런 변화가 이미 한참 더 전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귀족의 시중을 드는 하녀나 하인들마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자였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마저 얼마간의 대가를 받고서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번 돈은 바로 시장에서 쓰여졌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과정에 그들이 번 돈이 쓰여지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음식을 팔고, 혹은 옷을 팔고, 혹은 노동력을 제공하며 또다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노비들은 조선경제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생산에는 종사했다. 양반들의 땅을 경장하여 생산을 하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조선의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재화를 주고받을 일 자체가 드문데 화폐를 유통하려 한다고 실제 그것을 가져다 쓸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도시화란 결국 임금노동자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한 신분들이 많이 살아서 화려한 건물이 빼곡하다고 도시화가 잘되었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시화란 시장화다. 시장이란 실제 재화가 유통되는 공간이다. 자신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재화를 필요한 물품으로 바꾸어가는 공간이다. 수입이 있어야 한다. 수입이 없는데 소비란 있을 수 없다. 자급자족이란 생산을 있는 그대로 소모하는 원시경제와 같은 말이다.


아마 조선의 노비제와 경제에 대해 비판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서 노동력을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 노동력은 단지 지배층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일방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노동력이 생산으로 경제활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을까? 소득이 없이는 소비도 없다. 너무나 당연한 전제이며 결론인 것을.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사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굴복시키고 일약 천하인으로서 관백의 자리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전국시대 일본에서 가장 최대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모리가였다. 모리가 120만석에 분가나 다름없던 고바야카와 깃카와가 도합 50만석, 여기에 모리가를 맹주로 여기고 따르던 서국의 다이묘가 무려 10국에 이르고 있었다. 벌써 오다 노부나가가 죠라쿠에 성공하기 10년도 훨씬 전부터 그만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정작 모리가는 단 한 번도 죠라쿠나 쇼군과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었다. 어째서?


하긴 당시 전국의 다이묘 가운데 천하일통이니 천하인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다이묘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가장 먼저 죠락쿠를 시도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조차 자기가 천하인이 되어 혼란스러운 전국의 일본을 통일하겠다는 야심보다는 그저 겐지의 일족으로서 유명무실해진 쿄의 쇼군을 대신하겠다는 단순한 욕심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케다나 호조와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을 등뒤에 두고도 감히 쿄로 전력을 다해 진군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죠라쿠에 성공해서 쇼군을 계승했다고 이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아우를 수 있었을까? 그냥 자기가 쇼군이 되고 모두가 인정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심지어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근대에조차 일본인에게 일본이라는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원래 아이즈인이었다. 그냥 사츠마 출신이었다. 쵸슈의 경계 밖은 한슈의 허락을 받아야만 겨우 나갈 수 있는 외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우리들끼리 걱정없이 잘 살면 된다. 실제 전국시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수많은 토착다이묘들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난세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굳이 다케다여야 할 필요도 없고, 굳이 아사쿠라가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오늘 사이토가 대세라면 사이토를 따르고, 내일 오다가가 대세라면 오다의 편에 선다. 만일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식들 가운데 나누어서 양쪽 편에 모두 서도록 만든다. 세키가하라 싸움 당시에도 사나다 가문의 당주 마사유키는 차남 유키무라와 함께 서군에 속해 있으면서 장남 노부유키는 동군에 합류하도록 했던 것도 그런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의 패권을 누가 가지든 사나다라는 성과 영자를 지킨다. 대부분의 다이묘에게 그것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았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도 다른 다이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군을 상대로 발악에 가까운 기습을 감행해서 무려 다이묘를 살해하는 위업을 이루기까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에서도 흔한 여러 다이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살해하고도 사이토 요시오카를 몰아내고 기후성을 차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다 노부나가도 천하에 대한 포부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만큼 미요시가 장악하고 있던 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고, 쿄까지 지나쳐야 하는 롯가쿠와 아사쿠라의 세력 역시 고만고만한 정도였다. 정작 강적이라 할 만한 다케다와 호조는 훗날 도쿠가와가 되는 마쓰다이라의 너머에, 그리고 우에스기는 다케다의 위에 버티고 있었다. 입지까지도 운이 따라주고 있었다. 요시타쓰의 급사와 요시오카의 어리석음은 오다 노부나가라는 군소영부에게 새로운 야망을 현실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죠라쿠에 성공해서 일왕까지 알현했음에도 정작 오다 노부나가 자신은 겐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것이야 말로 같은 시대 죠라쿠를 꿈꾸던 다른 많은 다이묘들과 오다 노부나가가 결정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겐지라면 얼마든지 쇼군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 자신의 실력만 보이면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얼마든지 쇼군의 계승을 인정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가 죠라쿠로 겨우 손에 넣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위의 다른 다이묘들을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노부나가를 포위하는 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때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넘겨야 했었다. 다른 겐지의 다이묘들과 달리 필사적으로 주위의 다이묘들을 제압하고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같은 이유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충실하게 이어받는다. 만일 이 두 사람이 아닌 겐지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던 이에야스가 처음부터 천하인이 되었다면 일본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처음부터 죠라쿠를 시도하고 쇼군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겐지의 후예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 원래 쇼군-정확히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은 가와치 게인지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동국을 정벌하면서 받았던 관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전구년후삼년의 역이라 일컬어지는 동국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사들의 마음을 얻으며 충성서약같은 것을 받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미나모토의 겐지는 마치 무사들의 우두머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요시이에의 증손 요리토모가 타이라가를 무너뜨리고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세운 뒤부터는 공식적으로 쇼군이란 무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써 쓰이게 되었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 무사들이니 무사들의 왕이 곧 일본의 왕이다. 굳이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아도 무사들만 장악하고 있으면 일본은 곧 쇼군의 지배 아래 들어온다. 중세 이후 일본의 정치를 특정짓는 정의였다.


원래 겐지라는 자체가 동국에 연고를 두고 있었으므로 서국과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서국에는 다이라씨가 있었지만 미나모토씨에 의해 철저히 몰락하면서 서국을 대표할만한 이름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에도시대까지 서국은 마치 별개의 존재인 양 중앙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따로 움직여 온 경향이 강했었다. 아무래도 쇼군이라는 이름에 얽매이기 쉬운 동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성도 더 강했던 것이다. 굳이 힘을 소모해가며 죠라쿠를 할 이유도 없었고, 성공해도 돌아올 실익이 없었다. 죠라쿠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겪어야 했던 위기들을 돌아볼 때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오다 노부나가 역시 수많은 역사의 패배자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렸을 수도 있다. 당장 서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모리 모토나리가 선택한 서국 10국의 맹주라는 형식부터 천하인이라는 야심과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마저 끝내 쇼군도 되지 못하고, 쿠게마저 호소카와에 거절당한 탓에 토요토미의 성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토요토미의 가신들이 분열했던 이유 역시 토요토미가 겐지가 아닌 쿠게의 이름이었다는 이유도 적지 않았고 보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싸움만 아니었다면.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패권에는 사실 운도 상당히 따랐었다. 당장 죠라쿠를 위해 미카와를 거쳐 진격하던 다케다 신겐이 그만 급사한 것도 그 하나였다. 그 전에 이미 다케다가는 그 힘의 근원이던 금광이 고갈되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만일 다케다 신겐의 사후 후계문제로 다케다가의 내정이 혼란스럽지 않았더라면 나가시노에서 가쓰요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한참 더 훗날의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역시 쇼군의 요청에 따라 죠라쿠를 시도하던 우에스기 겐신이 진중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도 역시 오다 노구나가의 패권을 도운 행운 가운데 하나였다. 우에스기 겐신이 죽고 양아들 카게카쓰가 뒤를 잇고 나서도 여전히 우에스기는 강적으로 다키가와와 시바타 모두를 고전케 만들고 있었다. 호조와 모리마저 오다 노부나가에 적대했다면 오다가의 운명도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남은 고만고만한 적들을 상대로도 상당히 고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였다. 아네가와강의 전투에서는 미카와군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자칫 패할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테지만 말이다.


사실 세키가하라 싸움 당시도 정작 패하기는 했지만 모리가가 속해 있던 서군 쪽이 동군에 비해 그다지 열세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서군 가운데 고바야카와나 깃카와 같은 배신자들이 나타나며 지리멸렬하여 와해된 것이었지 전력으로 동군이 서군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서군에 포함된 다이묘 가운데 상당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다 상당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이들이었다. 거의 절반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고 보면 된다. 잃은 병력 만큼 막대한 물자 역시 잃고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가 세키가하라 싸움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큐슈의 패자인 시마즈도 소극적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열심인 것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오타니 정도였다. 괜히 일본에서저 이순신이 도쿠가와 바쿠후의 일등 공신이라 말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서국의 무장들이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결국 졌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신들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외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다. 모든 평가는 승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전국시대 일본 역사의 중심은 결국 승리한 동국에 있었다.


단순히 동국의 무장들이 더 강해서 동국이 전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살아있을 때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중앙정치에 소극적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특히 서국의 다이묘들에게 많은 희생과 손실을 강요했다. 무능해서 이순신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함경도에서 정문부에게 패하고 쫓겨났다. 졌기에 무능한 거지 무능해서 진 것은 아니다. 결과로 모든 것을 계량한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다이묘들은 각각 독립된 영지를 다스리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근대까지도 일본이란 원래 생소한 개념이었다. 통일이라기보다는 정복이었고 복속이었다. 오로지 겐지만이 쇼군이 될 수 있었다. 오다와 토요토미조차 겐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사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유가 달랐고 목적이 달랐다. 그리고 겪은 환경까지 달랐다. 역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임진왜란. 토요토미의 야망은 정작 자신의 편에 선 다이묘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남겼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별 것 아니다.

어쩌면 많은 일본인, 혹은 그에 동조하는 한국인들이 그리 주장하고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일본에서도 2군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일본의 진짜 주력은 일본 본토에 남은 채 조선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만일 이들까지 조선으로 갔다면 조선은 망했을 것이다. 조선은 단지 일본의 2류 무장들에게도 고전한 한심한 나라였다. 이순신도 고작 그런 이들만을 상대로 공을 세운 정도에 불과했다. 과연 그럴까?


역사상 일본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관서였다. 관동이 관서보다 더 중요해진 것은 에도시대 이후로 불과 몇 백 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일본의 경제와 문화와 정치와 군사의 중심은 쿄토의 서쪽 관서지방에 있었다. 일찌감치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을 받아들인 것도 역시 서쪽의 큐슈 다네가시마였었다. 워낙 전국을 통일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이고, 그의 가신이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마침내 바쿠후가 열렸기에 관동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전국시대 중요한 싸움들 역시 거의 관서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기후를 근거로 전국의 주도권을 잡기 전까지 가장 큰 세력도 모두 시마즈, 오우치, 오토모, 모리 등 서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다케다나 우에스기나 이름만 높았지 고작 몇 만 명 동원하는 것도 버거운 시골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인식의 오류란 오로지 결과만으로 그 과정과 원인까지 정의하려 할 때 발생하기 쉽다. 결국 전국을 제패한 최후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 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였고, 그 전에는 오다 노부나가였었다. 모두 관동에 속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들이 전국의 주도권을 쥐기까지 싸운 상대들 역시 관동의 인물들이었다. 실제 전국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싸우고 승리한 상대들 역시 다케다와 우에스기, 사이토, 롯가쿠, 아사쿠라, 아사이 등 미요시를 제외하고 동국의 다이묘들이 거의 전부였다. 모리와는 말년에 사소하게 부딪혔을 직접 전력을 기울여 싸우거나 한 적이 없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탁월한 정치력으로 아케치, 시바타. 그리고 호조만을 직접 상대했을 뿐 모리 등 서국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승리만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도쿠가와가 전국을 통일하게 된 세키가하라는 동국과 서국이 서로 뒤섞여 있었으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승자인 오다, 토요토미, 도쿠가와만을 기준으로 나머지 인물들도 평가해야 했기에 아무래도 서국의 - 그것도 패자가 된 이들에 대한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바로 어떤 멍청이들에게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코에이의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이었다. 직접 싸운 적도 없는 이들이 이런저런 - 그나마 공식적인 사료도 아닌 기록들을 근거로 능력이 계량되어지고 수치로 정의된다. 단지 주인공이 되는 이들과 직접 싸우고 훌륭히 싸웠기에 높은 수지를 받고, 주인공들과 직접 부딪힌 적이 없었기에 간접적인 비교 결과 객관이라는 이름 아래 낮은 수치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런 건 역사가 아니다. 살아남는자가 강하다지만 살아남았다고 모두가 강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역사에 무지하게 알아서 빠지고 마는 함정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는가. 제대로 조선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보급이 닿지 않고 있었다. 먹을 쌀과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겠는가. 세키가하라 싸움의 승패를 결정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이었다 말하는 사람마저 있는 이유다. 조선과의 전쟁에서 그토록 많은 인력과 물자를 소모하고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가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큐슈의 패자 시마즈마저 세키가하라에는 그저 명목만 세울 뿐인 병력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보유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전쟁에 쏟아붓는 것은 게임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전쟁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그래서 더 가혹하다.


쵸쇼카베다 나베시마, 다치바나 같은 이름들이 그리 가벼운 이름들이 아니다. 모두 서국의 주력으로 조선에 출병했던 이들이다. 시마즈와 모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초전에서의 놀라운 승리와 달리 평양성전투 이후 육전에서마저 번번히 패퇴하거나 고전을 피하지 못했다. 보급에 한계를 느끼고 해안에 틀어박혀 농성했던 정유재란의 마지막이 딱 일본이 가진 한계였다. 물론 피해가 더 컸던 것은 조선이 분명하지만. 역사는 냉정하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국지연의를 아예 해체하여 재창작하다시피 한 만화 '창천항로'에서도 동탁은 서량의 기병대를 이끌고 중원을 오로지 무도와 난폭으로 짓누르는 마왕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하긴 원래 양주 출신이기도 하고, 그를 따르는 측근들이며 사병들 역시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생 벼슬을 한 것도 기반을 닦은 것도 모두 그곳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하진이 밀지를 받고 낙양으로 들어왔을 때 동탁이 거느리고 있던 병력은 고작 3천 정도에 불과했었다. 군세가 적은 것을 감추기 위해 이유가 억지로 꾀를 부려야 했을 정도로 미미한 세력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과연 동탁은 이후 전국의 난다긴다는 제후들을 거의 아우르다시피 한 17로의 연합군을 상대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일까? 동탁이 정권을 잡고 17로 제후군이 일어나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삼국지연의에서 병주자사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폐위시키려는 동탁에 맞섰던 정원은,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진의 명령을 받고 낙양으로 들어가 손발노릇을 하며 집금오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집금오란 곧 황실숙위대의 장이니 결국 황실을 호위하는 친위군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다.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에 죽임을 당한 뒤에는 사실상 낙양에 주둔중인 중앙군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동탁은 굳이 여포를 꼬드겨 그를 죽이게 만들고 그의 병사를 자신의 휘하로 흡수하려 했던 것이었다.


일부 특수한 겨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가장 정예인 군사는 왕이 머무는 수도 인근에 주둔하는 중앙군이었다. 물론 실전경험이야 싸울 일이 많은 변경의 군사들이 더 많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군을 이끄는 실질적인 힘은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를 이어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부사관, 바로 하급지휘관들이었다. 전근대사회에서 거의 세습되었으며 임지와 직위마저 항상 고정되어 있었던 이들이야 말로 군을 움직이는 신경망이며 군을 지탱하는 허리와 같았다. 당장 한국군에서 부사관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해보면 답은 바로 나온다. 실전경험은 부족할지 몰라도 오랜세월 신분을 세습해가며 직업군인으로서 전문성을 축적해 온 이들의 역량은 허투루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낙양의 중앙군을 흡수함과 동시에 주준과 같은 조정의 경험많은 지휘관들 역시 함께 휘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동탁이 가진 진짜 힘의 정체였던 셈이다.


역시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으로 이미 후한말에 이르면 중국의 군사기술은 이민족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역사상 한무제 이후 역대 중국의 왕조가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퇴하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삼국지에서도 어지간한 이민족들은 몇몇 장수들에 의해 어이없이 패퇴하고 토벌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고구려마저 관구검의 1만 병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변경의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라는 것도 고작 그런 의미다. 그같은 고도로 발달한 군사기술을 모두 집약한 것이 바로 중앙군이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과 기술을 계승하며 발전시켜 온 것이 이들 전문직업군인들이었다. 17로 제후군이 아무리 수도 많고 강하다고 그런 중앙군을 쉽게 이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역시 많은 왕조에서 역시 지방에서 일으킨 반란이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진압되곤 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면 어째서 중원을 차지한 조조의 군사가 다시 원소와 원술을 쓰러뜨리고 마침내 천하의 패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가.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이들 하급지휘관들 역시 결국 낙양에 그 기반을 두고 생활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며 이들 또한 자신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동탁이 죽고 여포와 이각 등이 다투고 다시 이각과 곽사가 서로 싸우는 사이 동탁이 처음 장악했던 중앙군은 하나둘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 중앙군의 유산을 가장 많이 의미있게 받아들인 것은 누구이겠는가. 원래 그런 이유로 어느 시대이든 난세를 끝내고 패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딱 중앙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초반의 혼란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동안 축적해 온 힘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전쟁은 관우와 장비 등 그저 이름있는 장수 몇 명 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인적이라 불리던 관우와 장비는 물론 유비 역시 한중에서 조조를 패퇴시켰을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어째서 매번 싸우기만 하면 지고 쫓기기를 반복했는가. 조운이나 진도 같은 지휘관급은 어떻게 개인의 의리나 인정으로 가까이에 붙잡아 둘 수 있다. 하지만 이들 하급지휘관들은 생활인들이다. 명분보다 당장 자신의 가족과 내일의 삶이 우선이다. 굳이 앞날도 보이지 않는데 싸움에 져서 도망치는 유비를 끝까지 따라가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게 되자 유비는 신야에서만도 여러 차례 조조군을 물리치며 만만치 않은 군사적 역량을 과시한다. 손발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 줄 때 아무리 고수라도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바로 이들 하급지휘관의 존재가 위촉오 삼국의 군사적 특성을 정의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중원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강동은 굳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제패해야한다는 동기 자체가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고장을 지키는 것에는 목숨을 거는데, 그러나 영토를 벗어나 다른 이의 땅을 공격하는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반면 촉은 상당수 외지인드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쉽게 근거지인 촉을 벗어나 한중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굳이 성도의 조정과는 상관없이 제갈량과 그 뒤를 이은 강유를 따라 중원진출에 목숨을 걸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정작 성도에 남아있던 토착인들은 등애가 산을 넘어 공격해 오자 쉽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위의 군사들은 대세를 따라간다. 특히 중앙군은 누가 권력을 쥐는가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원래 후한의 중앙군도 하진에서 동탁으로, 동탁에서 조조로 쉽게 자신의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서량기병이라고 하지만 마초와 한수가 일으킨 반란 역시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조조에 의해 진압되고 있었다. 연의와는 다르다. 연의에서는 그나마 조조가 고전하기라도 했지만 실제 정사에서 마초는 그저 변방에서 작은 소란 정도나 일으킨 것이 고작이었다. 장로로부터 군사를 지원받아 기산을 공격했을 때도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오자 지레 도망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군은 결국 기술이고 문명이 된다. 다르지 않다.

그냥 딱 사도세자 라이트버전이다. 그나마 사도세자와는 달리 나이들어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이미 세자의 자리에 있었고, 임진왜란 동안 보여준 것들도 있어 지지세력 또한 작지 않았다. 선조 역시 명분을 무시하고 마냥 광해군만을 괴롭힐 수도 없었다. 덕분에 어찌되었거나 선조가 죽고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쇠도 두드리다 보면 부서진다. 어느 순간까지는 강도가 올라가지만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바로 깨지거나 부서져버리게 된다. 사람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까지는 견디며 스스로 강해진다. 내성이 생긴다. 하긴 이 내성이 생긴다는 것도 문제다. 허구헌날 부모로부터 맞으며 자라다 보면 어느 순간 맞는다는 자체에 익숙해지게 된다. 내가 맞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모르는데 타임이 맞는 것에까지 익숙해져버리고 만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채 그것을 어느새 자신도 반복하게 된다. 폭력이 유전되는 과정이다.


워낙 선조에게 시달린 나머지 더이상 누구로부터도 그와 같은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싫은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한다. 딱 자기 좋은 사람들만을 주위에 두고 쓴다. 분명 조정의 주류는 남인과 서인이었다. 일찌감치 조정에 출사하여 한양에서 기반을 닦았던 서인은 물론이거니와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남인의 기반은 북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나마 북인마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소북 가운데서도 중북이 떨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반도 약하고 숫적으로도 부족하며 구심점이랄 것도 없는데 그 가운데서도 다시 찢기고 나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은 정인홍이나 이이첨은 전적으로 신뢰했을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먼저 서인에게 손내밀고 남인을 아우르며 아버지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정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방법이 분명 있었다. 이미 선왕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어 명분상 아무런 하자 없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 정통성을 가지고 시비걸 간 튼 위인은 당시 조선팔도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서인과 남인까지 모두 아우른다면 영창대군이 다른 마음을 먹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기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결국 광해군의 일방주의적인 정치가 서인과 남인을 소외시키면서 능양군의 반정에 동참하도록 강요했던 것 아니던가. 하지만 광해군은 세자시절의 경험을 근거로 신하들을 내 편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로 나누고 철저히 자기 편만을 등용하여 쓰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과 요구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인과 남인을 무리해서라도 모조리 죽이는 것이 나았다. 그럴 힘도 명분도 없으면서 서인과 남인을 소외시키는 것은 후환을 남기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대북 가운데서도 중북이 떨어져나가고, 그나마 나머지 가운데서도 이렇게 저렇게 떨어져나가며 사실상 친위세력이라 할 만한 것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이이첨조차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고립을 자초한 것은 광해군 자신이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편을 가르고, 그 가운데 내 편만을 쓰고 내 편의 말만을 듣고 다른 사람들은 철저히 배척하고 멀리했다. 그러고도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실제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에도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고립된 나머지 권신 이이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한심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았을 때도 광해군이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이 이이첨이었을 정도로 광해군은 끝까지 그를 불신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폐위와 위리안치이고 비참한 최후였다.


문득 어느 분이 떠오르는 이유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그 분은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내 편과 남의 편을 나눈다. 내 편 가운데서도 진짜 내 편과 가짜 내 편을 나눈다. 그리고 진짜 내 편의 말만을 듣고 그들의 요구대로 행동한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광해군을 밀어날 정도로 소외된 나머지가 단합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건만. 서인과 남인보다 더 큰 거리가 나머지들 사이에 있다는 것으 그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더 그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 진짜 내 편의 지분을 늘린다. 하지만 덕분에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비리인사 하나 쳐내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아주 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리고 마는 것이다.


광해군의 몰락을 아쉬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뻑하면 토목에, 심심하면 옥사에, 아무리 욕먹어도 아버지 선조도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편을 갈랐으면 정치라도 자라던가. 백성들의 마음도 떠나고, 지배집단인 사대부의 마음도 떠나고, 조정까지 분열되었다. 그러고도 유지되는 정권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다. 몰락은 수순이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광해군은 왕이었고 한 나라의 주인이었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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