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조선에서는 환관으로 인한 폐단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왕을 비롯 왕실의 주요인사들을 항상 가까이서 모셔야 했던 특수성으로 인해 권력과 유착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내시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딸을 주어 인척을 맺기까지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환관 몇몇 의 전횡과 부패로 인해 나라가 절딴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었다. 조선이 가진 몇 가지 장점 가운데 하나였다.


원래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로 결심하며 목표로 삼았던 것이 바로 성리학의 이상이 실현되는 이상국가의 구현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상이란 사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공론의 정치였다. 언로를 열어 널리 선비들의 의견을 구하고, 어진 군왕은 현명한 신하들을 찾아내어 등용한 뒤 모든 것을 그들에 물어 결정한다.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도 공론이라면 참고 들어야 하며, 아무리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공론이 그렇다면 따라야 한다. 현실적으로 언제나 그러기란 무리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원칙만큼은 그런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처럼 왕이 소수의 측근들과만 모여서 의논하여 무언가를 아무도 모르게 결정하고 집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조선역사에서 왕이 사관까지 물리고 대신과 독대한 경우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도 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논의는 공개된 정청이나 국와의 집무실에서 승지와 사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그 모든 내용은 문서로 기록되고 있었다. 단지 왕과 가깝다는 이유로 국가적인 중요한 결정에 자의로 개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사대부들끼리 항상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했기에 아무리 왕의 신임을 받고 높은 관직에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어도 법과 원칙을 어기고 전횡을 일삼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가능해진 것은 역시나 조선에서도 왕권이 강해지며 신하들이 왕을 중심으로 줄서기를 시작한 영정조 이후의 일이었다.


말 그대로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거의 대부분 황제가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황제의 명령이 곧 법이었다. 황제의 뜻에 의해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이 모두 죽어나갔다. 아무리 그 말하는 내용이 옳고 의도가 바르더라도 황제의 의사를 거스르면 그 일족까지 모두 몰살당해야 했었다. 법이 있어도 유명무실했고, 대신들이 있어도 국정은 황제와 측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 역대 성군이라 일컬어지던 군주들이라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조차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지적들에 항상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구축한 명의 홍무제 주원장이나 청의 강희제와 옹정제 역시 뛰어났지만 독재적인 군주들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뛰어났던 자신들에 맞춘 그들의 시스템은 결국 명과 청을 쇠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왕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을 비판하거나 조언할 수 있는 수단도 통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마나 청은 역대 중국의 역사를 거울삼아 환관의 폐해를 적극 경계한 탓에 폐단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황권이 강한 만큼 스스로 환관들에 둘러싸여 고립되기 일쑤였던 중국 거의 모든 왕조에서는 - 특히 홍무제로 인해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명왕조에서는 환관이 차라리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환관이 하는 말은 그대로 황제에게 전해졌고, 환관 이외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환관을 거쳐 황제에게 전해졌다. 대신들의 비판보다 오히려 환관들의 말을 믿었다. 대신들의 지적이나 조언보다 환관들이 들려주는 듣기 좋은 말들만을 들으려 했다. 그런데도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수단도 통로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제가 곧 법이었고 그 법은 환관을 통해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환관들의 보필을 받으며 그들에 의해 훈육된다. 환관이 오히려 역대 중국의 황제들에게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부모 대신이다시피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였으며, 세상을 보고 듣는 창구이기도 했다. 중국 후한에서 황제들이 환관을 중용했던 것도 그남 외척들에 비해 믿을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자기 세력이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환관의 권력이란 것도 황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물려줄 자식도 없는 환관이라면 최소한 찬탈을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토목보에서 그 치욕을 겪고서도 정통제가 환관 왕진을 그리워하여 그를 위한 제사를 명령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권력의 고독을 잠시나마 환관을 통해 잊을 수 있다. 그런 이점에 비하면 환관이 저지르는 약간의 비행과 전횡은 그냥 용인할 수준이다. 황제가 괜찮다면 역시 괜찮은 것이다.


굳이 환관을 예로 들었지만 환관이 아니더라도 그런 예는 많이 있다. 고려 왕실에서 내시란 조선에서와는 달리 왕의 총애를 받는 개인 시위들이었다. 왕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친위대였기에 왕권의 부침에 따라 이들의 권력 또한 요동하고 있었다. 조선말 고종 역시 감시하고 견제할 세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명성황후가 한낱 무당과 점장이들에 이끌러 휘둘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비공식적인 개인의 친분과 관계가 공식적인 구조와 권력에 우선한다. 그래서 모든 논의와 결정이 공개된 자리에서 이루어지도록 아예 법으로 못박아놨던 것이 조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에서조차 감시와 견제를 위한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경우 같은 문제가 발생했었고 보면 이미 권력의 구조적인 문제라 보아도 옳을 것이다.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감시도 견제도 불가능한 절대권력은 관계를 이용한 비공식적인 권력을 출현시키고 만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는 신문 정치면을 보도록.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 집무실이든 관저든 어디든 대통령과 관계된 일이라면 모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정과 관련해서 하는 모든 말들은 기록되고 공개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모든 말과 행동이 언론과 국회의 감시를 받으며 비판받고 견제되어야 한다. 불가능한 꿈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인데. 역사는 때때로 거꾸로 흐르기도 한다.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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