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딱 사도세자 라이트버전이다. 그나마 사도세자와는 달리 나이들어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이미 세자의 자리에 있었고, 임진왜란 동안 보여준 것들도 있어 지지세력 또한 작지 않았다. 선조 역시 명분을 무시하고 마냥 광해군만을 괴롭힐 수도 없었다. 덕분에 어찌되었거나 선조가 죽고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쇠도 두드리다 보면 부서진다. 어느 순간까지는 강도가 올라가지만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바로 깨지거나 부서져버리게 된다. 사람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까지는 견디며 스스로 강해진다. 내성이 생긴다. 하긴 이 내성이 생긴다는 것도 문제다. 허구헌날 부모로부터 맞으며 자라다 보면 어느 순간 맞는다는 자체에 익숙해지게 된다. 내가 맞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모르는데 타임이 맞는 것에까지 익숙해져버리고 만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채 그것을 어느새 자신도 반복하게 된다. 폭력이 유전되는 과정이다.


워낙 선조에게 시달린 나머지 더이상 누구로부터도 그와 같은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싫은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한다. 딱 자기 좋은 사람들만을 주위에 두고 쓴다. 분명 조정의 주류는 남인과 서인이었다. 일찌감치 조정에 출사하여 한양에서 기반을 닦았던 서인은 물론이거니와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남인의 기반은 북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나마 북인마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소북 가운데서도 중북이 떨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반도 약하고 숫적으로도 부족하며 구심점이랄 것도 없는데 그 가운데서도 다시 찢기고 나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은 정인홍이나 이이첨은 전적으로 신뢰했을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먼저 서인에게 손내밀고 남인을 아우르며 아버지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정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방법이 분명 있었다. 이미 선왕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어 명분상 아무런 하자 없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 정통성을 가지고 시비걸 간 튼 위인은 당시 조선팔도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서인과 남인까지 모두 아우른다면 영창대군이 다른 마음을 먹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기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결국 광해군의 일방주의적인 정치가 서인과 남인을 소외시키면서 능양군의 반정에 동참하도록 강요했던 것 아니던가. 하지만 광해군은 세자시절의 경험을 근거로 신하들을 내 편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로 나누고 철저히 자기 편만을 등용하여 쓰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과 요구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인과 남인을 무리해서라도 모조리 죽이는 것이 나았다. 그럴 힘도 명분도 없으면서 서인과 남인을 소외시키는 것은 후환을 남기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대북 가운데서도 중북이 떨어져나가고, 그나마 나머지 가운데서도 이렇게 저렇게 떨어져나가며 사실상 친위세력이라 할 만한 것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이이첨조차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고립을 자초한 것은 광해군 자신이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편을 가르고, 그 가운데 내 편만을 쓰고 내 편의 말만을 듣고 다른 사람들은 철저히 배척하고 멀리했다. 그러고도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실제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에도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고립된 나머지 권신 이이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한심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았을 때도 광해군이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이 이이첨이었을 정도로 광해군은 끝까지 그를 불신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폐위와 위리안치이고 비참한 최후였다.


문득 어느 분이 떠오르는 이유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그 분은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내 편과 남의 편을 나눈다. 내 편 가운데서도 진짜 내 편과 가짜 내 편을 나눈다. 그리고 진짜 내 편의 말만을 듣고 그들의 요구대로 행동한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광해군을 밀어날 정도로 소외된 나머지가 단합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건만. 서인과 남인보다 더 큰 거리가 나머지들 사이에 있다는 것으 그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더 그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 진짜 내 편의 지분을 늘린다. 하지만 덕분에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비리인사 하나 쳐내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아주 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리고 마는 것이다.


광해군의 몰락을 아쉬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뻑하면 토목에, 심심하면 옥사에, 아무리 욕먹어도 아버지 선조도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편을 갈랐으면 정치라도 자라던가. 백성들의 마음도 떠나고, 지배집단인 사대부의 마음도 떠나고, 조정까지 분열되었다. 그러고도 유지되는 정권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다. 몰락은 수순이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광해군은 왕이었고 한 나라의 주인이었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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